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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1999.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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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민주의의 딜레마

윤병삼 |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카피레프트모임
<b>라폰텐, 하나의 결절점</b>

지난 3월 독일 재무장관 라폰텐이 갑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하였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정통이었던 그는 재무장관직뿐만 아니라 사민당 총재, 국회의원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행로를 마감하였다. 이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유럽적인 충격이었으며, 이후 독일 사민당과 영국 노동당에서는 좌우파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사민당 외부의 급진좌파들 사이에서도 그의 사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가늠케 해준다.
라폰텐의 사임을 야기한 그의 정책방향은 좌파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직접적 이유가 된 조세정책이나 유럽중앙은행에 대한 금리인하 요구 등은 구매력 증대와 분배에 초점을 맞춘 케인즈주의적 기반에 서 있었지만, 그의 정책을 일반적으로 보자면 유연화와 사기업화 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떠한 '구조적 개혁'도 포함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왜 자본가 세력은 그를 그토록 위협적으로 보았을까? 그리고 슈뢰더는 왜 그토록 그를 몰아내고자 갖은 수를 썼을까? 라폰텐의 퇴임 발표 바로 다음날 독일 주가는 엄청나게 급등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 이후 유럽의 노동운동은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며, 어떠한 대중적 정치세력도 노동자투쟁의 사회적 필요와 요구를 뒷받침하고 있지 못하다.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맞서 유럽의 '사회적 그물망'를 지켜낼 수 있는 대중적 정치세력이 없다는 점에서 라폰텐은 그가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보루와 같은 인물이자 하나의 상징이었다.
둘째,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더 나은 대안의 부재라는 상황 속에서, 많은 사회운동은 계속해서 사민주의의 뒤를 쫓고 있다. 어느 누구도 체제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라폰텐의 투쟁은 사람들의 의식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지의 주필인 라모네가 다음과 같이 평가하듯이, 그는 사민주의적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에 약간의 제동을 걸다가 좌초한 것이다.

<font color="#006666">"오스카 라폰텐은 동료 사회주의자들이 퍼붓는 다섯 가지 중요한 죄를 뒤집어써야 했다. 유럽의 재출발을 원한 죄, 공정한 세제를 옹호한 죄, 유럽중앙은행을 위태롭게 한 죄, 국제 금융통화체제의 개혁을 요구한 죄, 그리고 이에 앞서 대부비용을 줄이고 소비를 촉진하며 실업에 대항하기 위해 이자율을 낮추라고 독일 중앙은행에 요구한 죄다."
("사민주의의 배신", 이냐시오 라모네,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99년 4월호) </font>

따라서 라폰텐의 좌절 이면에 담긴 의미는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침식과 신자유주의적 유럽의 전면화에 다름아닐 것이다. 그것이 제3의 길이건, 새로운 중도건, 아니면 다른 어떤 이름을 갖건 간에.


<b>새로운 중도? 제3의 길?</b>

유럽의회 선거 전야에 슈뢰더와 블레어는 <유럽 사회민주당이 나아갈 길>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의 핵심은 '제3의 길'이라는 명칭 아래 블레어가 추구해온 정책이 이제까지 모호했던 슈뢰더의 '새로운 중도'의 공식적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 총재였던 라폰텐에 의해 틀이 잡힌 독일 사회민주당의 기존 프로그램에서 급격한 유턴이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새로운 정책문서는 극히 선명하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을 구체화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글은 첫장 도입부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font color="#006666">"때로 사회정의의 증진이 결과의 평등을 부과하는 것과 혼동되곤 했다. 때문에 노력과 책임에 대한 보상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되었고, 사회민주주의는 창의성, 다양성, 우수성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순응과 평범함에 결부되게 되었다."
-이하 인용되는 성명은 영국 노동당 홈페이지를 참조
(http://www.labour.org.uk/wiews/index.html)-</font>

결국 사회정의와 사회적 평등 사이에 대립이 그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논리적 결과는 '사회적 양심은 공공지출의 수준으로 측정될 수 없다'는 다음 구절로 이어진다. 완곡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체제에 대해서 메스를 가하겠다는 의미이다. 결국 '개인적 성취와 성공, 기업가 정신, 개인적 책임성, 공동체 정신 등과 같은 시민에게 중요한 가치들이 종종 보편적 사회안전망에 종속되곤 했다'면서 (복지)국가의 역할에 도전하고 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수요지향적인 케인즈주의 정책을 추구하던 라폰텐과는 달리 이들은 '좌파를 위한 새로운 공급지향 의제'라는 주문(呪文)을 만들어내었다. 문서 서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좌파와 우파라는 도그마로 표상되는 세계관을 포기했다. 사민주의자들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발언해야 한다"고 선언한 이들에게 과연 '좌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상식적인 의미의 좌파가 아님은 분명하다. "생산, 자본, 노동 모두가 유연해야 한다"는 말은 우파의 언명이기 때문이다.
라폰텐의 뒤를 이어 적녹연정의 재무장관 자리에 오른 한스 아이헬이 제안한 복지정책 축소를 보면 '새로운 공급지향 의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의료보험과 연금제도, 실업수당, 사회보조비 등 복지 부문의 공공예산을 대폭 감축하고 자본측에는 조세감면을 행한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결국 '제3의 길/새로운 중도'로 표상되는 현재의 움직임은 복지국가의 해체로 나아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b>유럽의회 선거 결과의 함의</b>

지난 6월 10일에서 13일까지 유럽연합(EU) 15개 회원국에서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 개표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중도우파가 승리, 유럽의회 내 구도변화를 초래하였다. 1979년 시작된 유럽의회 선거 이래 최저의 투표율(기권율은 이탈리아의 29%에서 영국의 77%까지 다양했으나 평균 51%로 매우 높았다)을 기록한 이번 선거를 두고 언론매체들은 '유럽에 대한 관심 결여'의 탓이라고 논평했다.
이러한 분석은 낮은 투표율은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낮은 투표율의 대다수가 이전에 좌파에 표를 던진 대중이었다는 점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15개 회원국 중 11개국의 정권을 잡고 있는 사회당 계열은 프랑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패배하였다.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예상을 뒤엎고 패배한 것은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제3의 길/새로운 중도'라는 센세이셔널한 이름으로 전유럽을 휩쓴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변신은 벌써 효과를 다한 것인가? 왜 좌파 성향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지 얼마되지도 않은 좌파 정권에 표를 던지지 않았는가?
프랑스의 경우에는 투표에 참여한 천 오백만 명 중 100만 명이 백지표를 던지기도 하였다.
좌파유권자들의 대규모기권을 초래한 첫번째 원인은 영국 노동당정부와 독일 사민당정부가 앞장선 對유고슬라비아 전쟁이었다. 리오넬 조스뺑, 게르하르트 슈뢰더, 맛시모 달레마, 토니 블레어 등은 미국이 제안한 군사적 해결책이 코소보 평화협정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데 동의했다. 유엔의 결의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동의도 없는 명분없는 전쟁에 사민주의 세력이 자신의 전통을 내팽개친 채 참여한 것이다. 이는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구분선을 스스로 던져버린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 영국의 블레어 정권은 마가렛 대처가 1983년 포클랜드-말비나스 전쟁을 이후 선거에 활용한 식으로, 자국민의 정서를 자극하고자 했으나 결과는 대실패였을 뿐이었다.

둘째, 이번 선거는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제3의 길에 대한 심판의 무대이기도 하였다. 비록 짧은 집권기간이지만, 사회를 개조하겠다는 블레어와 슈뢰더의 야심찬 노력은 긍정적 성과를 낳지 못했다. 유럽의회 선거 직전 유럽사회당(PES)은 빠리와 밀라노 등지에서 대회를 갖고 국경을 넘는 유대와 세력을 과시한 바 있다. 여기서 주창된 메시지는 유럽통합의 강화와 시민 참여의 제고, 사회적 유럽의 추진 등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의 핵심은 새로운 중도좌파 노선이 이전과는 달리 현실적인,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정책을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유로화 출범 이후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경제 상황과 여전히 높은 실업률 등은 대중의 무관심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사회보장제를 대폭 축소하고 기업의 조세부담을 줄이며, 노동조합의 활동을 제약하면서 고용을 창출한다는 블레어의 '제3의 길'이 현실화되는 조짐을 보이자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편 영국과 덴마크의 경우 선거 결과가 유럽연합에의 참가 자체를 지연 내지 무효화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유럽연합 반대파들이 16석이라는 엄청난 의석을 얻기도 하였다. 유럽연합 강화에 앞장서온 노동당의 패배는 앞으로 유로를 향한 항로가 그리 순탄치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b>대안 세력은 어디에?</b>

10년 전, 동구 사회주의체제의 몰락과 함께 공산당을 비롯한 서유럽의 좌파정당들은 심각한 위기를 겪은 바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좌익민주당으로의 변신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위기 이후, 과거의 스탈린주의를 탈피하고자 한 정치세력들은 재구성과 재편의 과정을 겪었다.
다른 한편, 서유럽의 트로츠키주의 정당들도 과거의 편협성을 벗고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사회운동과의 적극적인 결합과 의회주의로부터의 탈피, 당내외 좌파 세력들의 통합 노력, 새로운 대안 체제의 모색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선거는 이들에게 하나의 데뷔 무대였으며 그간의 실험을 대중적으로 평가받는 자리였다.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 좌파 재구성 정당들은 새로운 얼굴의 유럽의회 의원들을 배출하였다.
프랑스의 노동자투쟁(LO)과 혁명적 공산주의동맹(LCR, 이하 혁공동) 공동후보단은 5.2%를 득표, 각각 3석과 2석을 차지하게 되었다(프랑스의 경우 유럽의회 의원 배출을 위한 최소 득표율은 5%인데, 이는 군소정당에게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겨져왔다). 이는 사회당 주도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프랑스 공산당의 7% 득표와 비교해 보면 높은 수치임을 알 수 있다. 6개월 간의 선거운동 기간 동안 노동자투쟁과 혁공동은 프랑스 전역에서 연인원 3만 오천명이 참가한 200여회의 대중집회를 개최하였다. 텔레비전 유세에 의존한 여타 정당들과는 달리 이들은 대중을 직접 만나서 설득한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의 성공은 또한 실업자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사회운동과 현장 중심의 노동운동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노동자투쟁'과 '혁공동'의 유럽의회 의원들은 좌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려하고 있다. 거대이윤을 추구하며 일자리를 삭감하는 기업 측의 정리해고와 '감량경영' 금지, 노동조건의 악화 없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 정부의 공격에 맞선 퇴직연금의 방어, 비등록 이민노동자(sans papiers)들에 대한 이민서류 지급 등이 현재 이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요구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정부 참여의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된 구공산당 계열의 지지율이 약간 증가하는 정도에 그쳤다. 정부참여를 거부하고 뛰쳐나온 재건공산당(Rifondazione Comunista)은 4.3%를 득표했고 연정에 남아있는 공산당은 2%를 얻었다. 대규모 우파, 중도우파 정당들이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지만, 당의 분열을 신속하게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신좌파의 결집체인 녹색좌파(GroenLinks)가 4%에서 12%로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청년층과 지식인의 당으로 인식되던 과거에서 벗어나 대중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들이 얻은 5석의 의석은 노동당보다 단지 1석이 적을 뿐이다.

독일 녹색당의 최근 경험(이에 관해서는 박종완, "정권교체 6개월 뒤, 독일의 딜레마"([민주노동과 대안] 99년 4월호를 보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새로운 정치세력이 서유럽의 정치 풍토경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서유럽 노동대중은 신자유주의적 길을 걷고 있는 사민당 세력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만 어떠한 좌파 정치세력도 이들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이는 실패한 사회주의 실험으로 인한 의혹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들이 체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맞서 복지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 영국 노동당 좌파와 같이 경제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으며, 이는 미약하나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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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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