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에 관한 레닌의 사상적 궤적(2) -Lenin On The Party
1905년과 레닌의 전환
레닌은 자신이 제출한 테제의 독창성을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실제로 레닌은 인용한 편지의 서두에서 볼셰비키 독자들에게 두 차례나 경고했다. 자신의 테제가 의심할 여지 없이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착상을 완전하게 개괄해야 했다고 말이다.58) 더욱이 지나가듯이 언급한 것이지만, 같은 곳에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이미 심대하게 변해버린 역사적 계기에 쓰여졌던 것이라고(레닌은 1907년에 이 지점으로 복귀할 것이다) 말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레닌은 소비에트가 비록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그들 중 일부는 사민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에 의해 자생적으로 창조되었지만 혁명적 기관이고 따라서 당만큼 필수적이라는 견해를 분명히 설명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조합주의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사실상 그는 소비에트를 임시 혁명 정부의 맹아로 보았다. 이 기관들이 선험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조리할 것이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는 소비에트 안에서 반드시 허용되어야 하는 다른 혁명적 분파들과의 끊임없는 변증법을 통해 스스로의 테제를 전달하려 노력하면서 소비에트의 근본 원리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는 다른 혁명적 인민들로부터 스스로를 폐쇄하지 않고,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보와 결정에서 그들의 판단을 따른다.
우리는 오직 노동대중 자신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전적으로 의지한다."59) 이 테제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낡은 관점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레닌은 자신의 새로운 시각이 십중팔구 너무 조급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주로 간접 정보를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편지의 출판 여부를 편집자들에게 위임하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따라 노선을 정한 바 있고 그에 입각하여 소비에트 가담을 반대했던(소비에트가 자생적이고 비(非)-당적인 기관인 한에서) 볼셰비키 신문은 편지를 출간하지 않았고, 그 편지는 1940년이 되어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향은 있었는데, 왜냐하면 볼셰비키 분파가 결국 레닌주의적 지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레닌 자신의 경우, 1906년과 1907년을 경과하면서 혁명적 수준까지 자생적으로 상승한 대중들의 능력과 어우러지면서 그는 소비에트 기관의 혁명적 특성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1906년의 소비에트 경험을 평가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어떤 이론도, 누군가의 재능이나 혹자에 의해 창안된 전술에의 호소도, 당의 교리도 아니고, 비-당적 대중기관이 봉기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봉기의 기관으로 전환하게끔 이끌었던 상황의 힘이었다."60) 그러므로 대중들은 당의 매개 없이 사건들의 힘을 이해했던 것이다: 소비에트는 전제정에 맞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혁명적 봉기의 기관이었다.
두 달 후 레닌은 그러한 판단을 되풀이했다: "조직의 지도부들을 뛰어 넘어 대중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파업에서 봉기로 발전했다. 이는 1905년 12월에 러시아 혁명이 획득한 가장 거대한 역사적 성과다; 그리고 모든 선행하는 성과들처럼 막대한 희생의 대가가 지불됐다. 운동은 일반적인 정치파업에서 더 높은 단계로 상승했다." 계속 이어진다: "12월 당시 사회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우리는, 병력 배치를 어설프게 한 나머지 그 대부분이 전투에 능동적으로 가담하지 못하게 한 총사령관 같은 꼴이었다. 노동대중들은 단호한 대중행동을 위한 지도를 요구했으나 이를 받지 못했다."61)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전술}에서 대중의 자생적인 혁명적 능동성으로 정의된 것과 지도의 무지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음을 발견한다: 빠져 있던 것은 자생적인 혁명적 대중의 능동성이 아니라 지도였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지도가 자생적으로 노동조합주의적인 대중에게 혁명의 길을 보여준 데 반하여, 여기에서는(레닌의 판단에서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자생적으로 혁명적인 대중이 노동조합주의 밖에 예견하지 못한 나머지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지도자들에게 혁명의 길을 가리켜 준 것이다.
요컨대 1905-06년에 러시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제공한 강렬한 자극으로 인해, 레닌은 발본적으로 다시 사고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입장의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a) 당은 대중들의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당의 외부적 개입과는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자율적 혁명 역량을 갖고 있다(사실 소비에트와 같은 몇몇 경우에는 대중이 당을 이끌었다). 대체로 당과 대중들 사이에는 의식 수준의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b) 따라서 비-당적이고 "자생적인" 기관인 소비에트는 당만큼의 중요성을 가지는 새로운 혁명적 권력의 맹아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다른 혁명적 분파들을 배제한다거나 소비에트가 사회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지 말고 소비에트에 단단히 결합해야 한다. (c) 소비에트에서 당은 대중들 위에 관료적으로 군림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대중들의 판단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스스로를 근거지우려는 자유로운 변증법을 받아들여야 한다.62) 동시에 경제 투쟁에 대한 레닌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최소한 혁명적 시기에는 경제 투쟁을 계급 의식 획득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로 인정하는 것이다.63) 당의 조직과 내적 구성에 관해서도 변화가 있다: 이제 레닌은 당 내에서 융통성 있고 민주적인 구조를 옹호하고,64) 회색 빛의 지적 도식을 구체적 생활로 전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기층 당원으로 대거 유입하고자 노력한다.65) 결국 레닌의 희망은 당 위원회 지식인 한 명 당 적어도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66) 분명 이는 이론적, 정치적, 노동조합적, 조직적 차원, 즉 모든 차원에서의 발본적 전환이었다.
레닌의 전환의 결과: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실질적으로 철회하다
1907년에는 성공하지 못한 혁명의 퇴조가 아주 분명해졌다. 이 기간 동안 레닌은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일련의 극히 흥미로운 저술들을 출판했다. 무엇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1905년과 1906년 사이에 당 내부적으로 조직적 전환이 있었다. 목표는 명백히 당에 뚜렷한 프롤레타리아적 형상을 부여하고 당을 직업적 혁명가의 협소하고 음모적인 조직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엄격하게 통합되어 있는 조직으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피로와 혁명의 퇴조 등과 같은 몇 가지 요소들로 인해 촉진되었는데, 레닌은 이미 1907년67)과 1908년68)의 다양한 계기 속에서 이를 감지한 바 있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은 당을 떠났다. 반면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인자들은 당에 굳건히 뿌리내렸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 숫자나 비율 면에서 성장했다. 이리하여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신뢰할 수 없고 동요하는 면모들은 가일층 폭로되었는 바, 이는 1905-06년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창발성과 퇴조기에도 이어지는 새로운 전투적 노동자들의 출현과 날카롭게 대비되었다.
1895-1907년 기간 저작들의 모음집 서문 격으로 1907년 중반 무렵에 출판된 레닌의 저작 {12년}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저작은 거의 전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헌정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레닌은 한층 명료해지고 이전 시기의 전환을 반복하는 일련의 입장을 취한다: "현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기본적인 잘못은 팜플렛을 우리 당 발전의 명확한, 그리고 지금으로선 오래 지난 시기의 구체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01년과 1902년의 {이스크라}의 전술 및 {이스크라}의 조직적 방침에 대한 요약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요약"이었다."69) 이러한 논의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2차 대회에서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주어진 나 자신의 정식들을 "강령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거나 특수한 원칙들을 대체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70) 같은 페이지의 앞 부분에서 레닌은 협소하고 종파적인 써클의 시대는 끝났고, 조직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민주적-프롤레타리아적인 특징의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요컨대 자생성과 의식성의 관계에 관해 종종 "완전히 유리하고 정확한 방식으로는 정식화되지 않은 ... 표현들"을 사용했음을 인정하는 것을 비롯하여,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당과 조직의 일반 이론을 제공했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거부했다. 그것은 심지어 러시아의 경험에 관해서도 일반화될 수 없고, 다만 1901년과 1905년 혁명 사이의 보다 선진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한 전술과 관련될 뿐이다. 게다가 레닌은 특히 그 저작에서, "자생적으로 투쟁에 가담하는 객관적으로 혁명적인 계급"이 있을 때 비로소 조직은 의미를 갖는다고 몇 번씩이나 강조했음을 언급했다. 이 계급은 "노동자 계급으로, 이들 중 최량 분자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창안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스크라} 구성원들이 수행한 유일한 적극적 역할은 사회민주주의적 써클들의 능동성을 집중시키기 위해 짜르의 탄압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해외의 중심을 구성한 것이었다.71)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레닌 자신의 해석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분명히 앞서 지적된 것처럼 이 저작에서 그는 전형적으로 러시아적인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경제주의를 격퇴할 필요성이 러시아적 수준과 함께 일반적 원칙의 수준에서 정당화된다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정통으로 여겨진 것을 방어하기 위해 수정주의에 맞서 투쟁하던 시기에 깊이 공감되었던 것으로 이에 따라 누구든 손쉽게 [일시적] 전술에서 [일반적] 전략과 원칙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경제주의를 수정주의와 비교하고, 카우츠키를 인용하여 (완전히 동의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정주의에 맞선] 정통파의 공식 후견인이었던 카우츠키는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이나 전술의 차원이 아니라 원칙의 차원에서 자생성과 의식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에 접근했다. 요컨대 레닌이 카우츠키의 일반적 원칙들을 러시아 상황에 적용했던 것은 그것들이 "경제주의자들"을 폐점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1902년에 레닌은 1907년에 썼던 것과 달리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최량 분자들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는 카우츠키의 일반적 주장이 "근본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이론과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 외부에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가공되어 대중들에게 외부로부터 의식성을 도입한다. 레닌에게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노동자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다루는 사소한 부분이었는데, 하지만 이들은 항상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으로 간주되었다.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레닌은 러시아 계급 투쟁의 심원한 역사적 변화(소비에트의 발생)로 인해,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이 근본적으로 유지불가능하며 (따라서 그것을) 철회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내부의 전술 때문에(멘셰비키와 "인텔리주의"라는 그들의 비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레닌이 자신의 테제들을 공개적으로 정정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랐다. 이 때문에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해석"을 통해 한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출된 전술(처음에는 심지어 멘셰비키도 유보 없이 지지하였던)의 유효성을 반복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그 저작에서 모든 일반적 유효성을 박탈하였다. 그것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역사에서 완전히 지나간 단계로 격하시킴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고 극히 적절하다: 1907년에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보편적으로 유효한 원칙으로 지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
이 기간 동안 그는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해 겉보기에 모순적인 몇 가지 시각을 견지했다. 사실 멘셰비키와의 논쟁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계급-의식적이라는 진술을 반복했다72)(이는 위험한 입장인데, 비록 "외부적" 의식성을 언급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러한 입장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셰비키 쪽에서 나타나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병적인 숭배에 대항하는 논쟁의 맥락에서 보자면, 레닌에게 이런 주장은 다만 관례에 따른 논쟁적 엄호 사격에 불과하다. 사실 논쟁을 발전시키고 결론 내린 그 이후의 논문에서 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기관의 경험으로 이해된 소비에트 경험에 대한 포괄적 평가를 내렸다. 그것은 그의 1905년 판단을 반복하는 것인 동시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1917년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이미 선취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유사한 제도들은 실질적으로 봉기의 기관이다... 봉기가 전개된 이후에야 이들의 발단이 하찮은 것 따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거대한 착취였음이 밝혀진다. 투쟁이 새롭게 고조되고 그같은 단계로 이행하면, 그같은 제도들은 물론 필수적이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적 발전은 반드시 ... 혁명적 권력의 맹아적 기관들(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바로 이런 것이다)을 혁명적 권력의 중심적 기관들로, 혁명적인 임시 정부로 전환하는 데 ... 있어야 한다."73)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한 1907년부터 1917년 기간 동안 레닌의 사상에 근본적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더 이상 이 주제에 관한 체계적 저술을 남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소비에트를 광범위하게 다루지도 않을 것이다.
1917년 1월 새로운 혁명적 폭풍의 전야에 레닌은 회의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1905년 혁명에서 소비에트의 중요성을 (비록 약간의 주의를 두면서도) 실질적으로 되풀이했다: "전투의 시련 속에서 독특한 대중조직이 형성되었다. 각 공장의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된 저 유명한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몇몇 도시에서는 이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점차로 장차의 혁명 정부의 역할, 봉기의 기관과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74) 이렇듯 소비에트가 재출현하게 되는 시점 직전에 레닌이 그것의 혁명적 성격을 반복해 말했던 것이다.
1917년의 레닌: 소비에트와 {국가와 혁명}
위에서 언급한 회의가 있은 지 몇 주 후, 대중들의 자생적이고 예측하지 못한 행동의 결과75)인 혁명은 전제정을 전복하고 소비에트를 다시 세웠다. 이 사건의 막대한 중요성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레닌은 망명지 스위스에서 볼셰비키에게 맹렬한 편지 세례를 퍼부었다. 두 번째 편지에서 레닌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내에서 소수파에 불과했던 상황에서도 저 유명한 슬로건을 선포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76) 분명히 레닌은 소비에트에서 당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소비에트 대중들을 전취하는 당의 지혜와 정치적 역량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1905년 당시처럼 그는 소비에트가 근본 원칙에 관해서 볼셰비키의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당에 어떤 제도적 특권도 부여되지 않더라도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 즉각 이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맥락에서 당은 단지 소비에트 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며, 비중이나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자유로운 합의를 획득해야만 했다 ― 대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는 "역사적 권리"를 스스로 참칭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1917년에 레닌은 대중들의 창발성이 만들어 낸 소비에트의 근본적인 혁명적 중요성을 되풀이했다.77) 그러나 1917년의 가장 중요한 문건은 {국가와 혁명}이다. 여기에서 레닌은 당이 특권적인 정치적 지위를 부여받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의 운영자로 지명된(그리고 즉각적으로 그것에 책임을 갖는) 이들을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임명하고 소환하며 통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정했다.78)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이 도식을 제출할 때에 레닌은 파리 꼬뮌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비록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전위(마르크스주의적 분파)가 파리 꼬뮌의 경험에서는 부재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파리 꼬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초의 역사적 사례로 인정했다. 물론 그들은 꼬뮌의 우유부단함과 비극적 패배의 한 원인이 된 (중앙)집중화의 부재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의식성의 유일한 담지자인 하나의 당이라는 소수의 제도화된 지배를 문제의 해결책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꼬뮌을 위해 보더라도 중앙위원회가 너무 빨리 해산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중앙위원회는 내전의 급박한 결정에 더 적합할 수 있는 보다 조직된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는 단연코 스스로를 역사적 권리에 의해 전위로 공언하는 유일당의 제도적 표현은 아니었다.79)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대했던 것은 단지 모든 프롤레타리아 구성원들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내전 와중의 과도적인 체제 아래서 요구되는 급박한 행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아직 갖고 있는 기관이었을 뿐이다.
레닌은 이 접근과 단절하지 않았고, 그의 예견은 파리 꼬뮌의 도식을 완전히 되풀이한다.80) 게다가 17년 9월에 발효된 슬로건 "볼셰비키는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우리의 테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 슬로건을 선포한 편지에서 레닌은 분명히, 권력 획득의 시점까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장치의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의 이해를 볼셰비키가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4월 테제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있다. 소비에트는 여기에서(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첫 번째 국면에서도) 당의 도구로 여겨지지 않는다.81) 또한 카우츠키와의 1918년 논쟁에서 (여전히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여겨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맥락에서 (당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중심성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82)
1919년 초기에 레닌은 노동조합 2차 대회(1919년 1월)에서의 극히 중요한 연설에서 또다시 전술한 중추적 개념을 반복한다: "하지만 지금, 바로 지금, 정치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권력이 이양된 이후인 지금, 하나의 계급이라는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한 조직인 노동조합이, 아주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정치적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며, 말하자면 정치적 기관의 수장으로 나설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치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이양되었을 때 노동조합은 점차적으로 노동-계급 정치의 건설자라는 임무를, 자신들의 계급적 조직을 통해 낡은 착취자 계급을 대체하는 인민적 임무를 떠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너희가 경제적 임무를 돌본다면, 부르주아지의 당은 정치를 돌볼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나는 구래의 과학의 낡은 전통과 편견들을 뒤집어 놓았으니 말입니다."83)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연계 속에서 노동조합은 근대적 공산주의의 창시자들이 얘기했던 심오하고 유명한 말들을 아주 진지하게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에서 혁명이 더 넓고 더 깊게 진행될수록, 혁명을 만드는 사람들,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의 창조자인 인민들의 숫자는 필시 증가할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들 말입니다."84) 계속 이어진다: "사회주의 혁명은 수천만 인민이 능동적이고 실천적으로 국가 관리(administration)에 가담할 때에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85) 이 구절에 따르자면 당은 권력을 독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독점해서도 안 되며, 기층에서의 권력 증가가 즉각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없고, 당연한 얘기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살아남을 수도 없다. 사회주의는 오직 대중들이 "모든 의미에서의 입안자"로서 국가적 결정에 능동적이고 직접적으로 가담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어떤 제도화된 권력도 제한된 전위에 의해 대중들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물론 같은 경우에 레닌은 이렇게도 얘기한다: "이 임무는 인민들에게 관리(administration)의 기술을 가르치되, 책이나 강의, 회의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경험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명령하고 조직할 채비가 된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 대신, 훨씬 신선한 피가 부서에 들어올 것이고, 그와 유사한 다른 부서들에 의해 새로운 부문들이 강화될 것이다."86)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외부적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표현된 이 전위(반드시 당일 필요는 없는)의 권력이 즉각 스스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 시작해야 하는 완전히 과도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노동조합의 합리화는 정확히 이를 겨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는 전위의 기본적인 제도적 권력으로 파악되지 않고, 대중들의 명령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러므로 전위는 오직 대중들의 동의와 확신에 기반했고, 그럴 때에만 존속할 수 있었다.
반면 이는 소비에트 권력의 첫 번째 국면에 조응했다: 대중들은 자유로운 선택 행위를 통해 몸소 선출한 자들(이들은 대부분 볼셰비키였다)에게 통치할 권력을 (자유롭게) 부여했다. 이는 높은 수준의 의식성을 전제하는 것으로, 1917-1918년의 극적인 역사적 조건들 때문에 가능했다. 게다가 특히 인용된 구절에서 레닌이 언급한 것이 반드시 지적되어야 하는데, 그는 정치적 대중 교육의 유일하게 진실한 형태는 프롤레타리아의 점증하는 권력에의 직접 경험에 기초하지, 책이나 회의, 혹은 당 관료에 의한 다소간의 계몽된 회보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조차 기꺼이 인정하는 것처럼, 1917년 이래 레닌과 볼셰비키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917년 초반 레닌의 연설은 이 방면에서의 마지막 위대한 노력이다. 그 노력이 실패했음을, 지금의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카 같은 이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헬스의 법칙(Michels' Law) 같은, 일반적으로 정치 정당과 집단적 조직 안의 관료적 경화의 불가피성 따위의 탓이 아니다.87) 소비에트가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에서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생명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대중적 토대가 사멸하면서 소비에트는 관료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패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계급으로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실패인 것이다.88)
1919-1920년의 관료적 전환
1918년이 되자 소비에트 혁명이 관료적으로 타락하는 최초의 징후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구 세계, 낡은 관습, 그리고 오래된 사고방식이 새롭게 출현하는 세계를 망치려 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어야 했다. 이러한 퇴행적이고 "찌꺼기 같은" 경향은 그것들을 재도입하게 만든 일련의 사건들만 없었다면 틀림없이 격퇴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의 어리석은 태도로 인해 볼셰비키는 매우 격렬한 투쟁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도를 홀로 떠맡아야 했다. 한편,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노동조합과 소비에트가 관료화됨으로써 당과 계급간의 진정한 변증법의 가능성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료적 경직화의 이유들은 1919-1920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작동했던 역사적 조건들, 이미 1918년 후반에 분명해진 역사적 조건들에서 찾아질 수 있다. 내전과 외세의 개입은 산업생산의 총체적 붕괴를 야기하여 1920년 산업생산은 전전(戰前)의 13% 밖에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917년의 비범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학적으로 거의 완전히 소멸하였고 내전으로 지쳐버린 수십만의 개인들로 돌아갔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적 분자들은 전사하거나 관료기구로 흡수되어 작업장의 대중들과 유리되었다. 나아가 생산의 발전 혹은 최소한 지속을 위해 구(舊)체제의 관료 및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필요성 때문에 부르주아적 관습과 야망의 인습에 찌든 한 무리의 타락한 분자들이 국가와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중심부 안으로 들어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반적으로 반(半)프롤레타리아적인 소농민 대중들에게 의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는 그들이 사회주의를 한사코 거부했다거나 그들이 본성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도시와 농촌 양자를 동시에 장악할 힘을 결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백히 객관적인 이유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농민운동이 일어난 후 몇 십년 뒤에야 발전했고, 도시들에 고립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농촌은 사회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이미 스스로를 단단히 확립했던 다양한 인민주의 운동에 내맡겨졌다.
러시아의 상황에서 소농민은 사회주의에 이질적인 대중이었고, 수십년간 나로드니키와 쁘띠부르주아의 선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기껏해야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신뢰할 수 없고 동요하는 동맹자에 불과했으며, 장구한 시기에 걸쳐 지루하고 난해하며 모순적인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로 전취되어야 했다. 그러나 관료화의 과정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이 시점에는 이미 탈진해 버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당은 오랜 기간 동안 막대한 농민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었으며, 허약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 더 이상 의존할 수도 없었다. 다시 말해, 당은 나라 전체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사한 상황에서 그리고 경제적, 군사적 곤란함 속에서 프랑스 꼬뮌을 모델로 한 국가의 실현은 실로 불가능했다.
이상이 러시아 노동계급이 소생하고 그 사회적 비중 때문에 통제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러시아에 이미 견고하고 경화된 관료적 체제가 존재하게 된 배경이다. 이 같은 사정은 서방의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는데, 그 혁명만이 러시아를 유럽 사회주의 동맹의 일부로 통합함으로써 이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러시아를 해방시킬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혁명의 승리는 가능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룰 수 없는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혁명의 승리는 일어나지 않았고, 1921년경 프롤레타리아적 노도의 일반적 쇠퇴는 유럽에서도 분명해 보였다. 1918년에 이미 분명해진 이 같은 비극적 상황은 이듬해가 되면서 점차 악화되었고, 볼셰비키의 입장과 레닌의 사상에 공히 영향을 미쳤다.
"이론적" 전환의 계기는 아마도 1919년 1월의 제 2차 노동조합 대회로부터 두 달 정도 후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러시아 공산당이 소비에트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우위를 점하며 모든 업무에 대한 실천적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결의안이 1919년 3월 8차 당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이론적 정당화는 전위로서 공산당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제도적으로 지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사실 전위의 두 개념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개념에 따르면, 전위는 대중들에게 길을 제시하고(그들과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종종 중앙위원회의 견해보다 더 정확할 수 있는 그들의 요구와 지시를 고려하면서) 의견이 엇갈릴 경우 강요하기보다는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 개념에 따르면, 전위는 대중들을 지도하는 제도적이고 양도불가능한 기능을 지니며 따라서 의견이 엇갈리면 대중은 그 의지와 무관하게 전위의 지도에 복종해야 한다.
Novaja Zhizn에 보내는 1905년 서신이나 {국가와 혁명}의 레닌,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1917년의 볼셰비키의 경우에는 첫 번째 전위 개념이 우세했다. 그러나 8차 대회에서 두 번째 개념에 수반되는 고유한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세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도 및 공산당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배타적이고 완전한 통제에 대한 강조는 전위가 "역사적 권리에 의해" 항상 대중들보다 더 신속하고 더 잘 볼 수 있다는 가정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것이다.
1919년 당 강령의 경우 자신들이 파리 꼬뮌을 모델로 한 국가의 원칙들을 고수하고 있고 이것이 서서히 기틀을 잡아가고 있다고 되풀이해 주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지도된 민주주의"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수용되었을 때, 역사적 맥락에서 원칙들의 이같은 선언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19년 3월에도 여전히 레닌은 모든 계급의 기관이 되어야 했던 소비에트가 사실상 제한된 전위의 권력을 "이상하게" 나타내고 있음을 슬픔에 젖어 언급했다.8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지만 불가피한 사정에 대한 깨달음은 1919년과 1920년을 거치면서 상황을 "합리화"하려는 일련의 주장들로 바뀌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그 무렵 자신들의 권력과 동일화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한편으로 사회민주주의적 비판의 유효성과 다른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적 비판의 유효성을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의 정치적 결과는 익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탈리아는 있을 법한 예외로 치더라도, 지도자들의 권력을 공격하고 전반적으로 룩셈부르크 사상의 영향을 받은 좌익적 경향이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우익을 형성했던 전(前)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비판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도 타격을 가했다. 따라서 이 같은 비판적 입장들이 레닌의 지지에 근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회를 전후로 레닌에게 무자비하게 거부당하고 말았다.
레닌은 이 좌익들에 대항하여(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이탈리아 좌익들에 대항하여) 논쟁하면서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을 썼다. 이 저작에서 좌익 공산주의의 매우 진지한 쟁점들은 "무정부주의적 광증"으로 환원되었고, 그에 반해 대중의 지도에 있어 강력한 권력집중화의 필요성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열 명의 강인한 우두머리"를 상기시키는 어조로 되풀이되었다.90)
사실 레닌의 테제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혁명}의 레닌,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2차 노동조합대회 연설에서 (당과 함께든 아니든 간에) 노동자들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이며 대규모의 참여를 강조했던 무정부주의적 레닌을 상기하고 어떤 전위도(아무리 능란하고 강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사회주의 건설에서 이 같은 본질적 요소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상할 수 있듯이 인터내셔널의 2차 대회 기간에도 논쟁은 계속되었다. 타너(독일)와 맥레인(영국)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속성에 관해 질문했을 때 레닌은 자본주의 시대에는 오직 소수의 노동자들(당에 순응하는 이들)만이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질적 조응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91) 몇 년 뒤 스탈린은 레닌이 이곳에서 실질적이지만 배타적이지는 않은 조응을 말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가 "본질적이고 진실로 중요한 것"을 의미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위의 지도력은 대중에 의해 통제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소환과 통제는 의식성을 내포하며 만일 레닌이 당시 언급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의식적인 노동자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라면, 정치권력은 이들에게만 귀속된다.
즉, 전위는 대중들이 선택해서가 아니라 의식성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운영한다. 마찬가지로 유사한 맥락에서 소비에트, 노동조합 등은 결국 독재를 실행하는 당의 수중에 있는 수동적인 집행도구(전달 벨트)가 되고 만다.
물론 레닌은 "외부적" 전위와 "지식인"의 기능에 관련된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재도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독점하는 "내부적" 전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국에는 점차로 "외부적" 전위로 변화하게 될 틈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경험을 다른 당들과 공산주의적 조류들이 모방해야 할 기본적 모델로 제시하려는 관료적 경향이 2차 대회 기간 동안 발전했다. 이 대회의 참가자들은 스탈린 시대를 예비하는 명백하게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침묵을 강요받았던 것이다.92) 이 같은 내적인 관료적 타락은 제3 인터내셔널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외부적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 시도된 종합: 관료제에 맞선 투쟁
그러나 관료화로의 경향이 이제 완전하고 최종적인 형태로 응고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는 수십년의 투쟁 동안 언제나 대중들 및 그들의 운명에 깊이 결박된 지도자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편으로는 "당독재"를 이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화의 발전과정에 대해 염려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특정한 현상의 원인을 산출했지만 그에 따른 관료적 효과의 위험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적어도 최초의 이행국면에서는 특정한 전제들이 수용되고 그것들의 "당연한" 효과를 완화하기 한 조치가 종종 취해졌다. 이는 대립하는 경향의 탁월한 조정자인 레닌이 1921년과 1923년 사이에 관료적 물결을 저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작동시키는 원리는 의문시되지 않았다. 당 독재 말이다.
요컨대 문제는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당이 관료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의 권력에 대한 진정한 대항세력을 찾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는 그 전제와 갈등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 독재와 같은 것임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내재적이면서 관료화의 과정을 제어할 수 있는 외부의 대항세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지적했듯이 러시아의 상황에서 그리고 서방혁명의 부재 속에서 관료화 경향은 비가역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레닌과 같은 지극히 탁월한 중재자조차도 극복하기 어려운 역사적 조건에 부딪쳐야 했다.
레닌은 1922년 초에 작성한 노동조합에 관한 논문에서 문제를 대면하려고 가장 진지하게 시도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의 주도성을 반복했다.93) 그러므로 레닌은 노동조합이 당과 대중 사이에서 작동하는 전달기제라고 주장했다. 대개 스탈린의 탓으로 돌려지는 이 유명한 표현은 레닌이 최초로 사용하였고, 1919년 1월 연설과 관련하여 근본적 전환을 보여준다. 또한 레닌은 노동조합이 국가의 관료적 타락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해야만 하며, 공산주의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레닌이 1919년에 주장했던 것이 옳다면, 즉 대중들의 교육은 오직 권력의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운용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제 이행국면에서는 권력이 당에 속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레닌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94)
국가의 관료화에 맞선 투쟁의 과제는 남아 있었다.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1919년에 개요된 과제들에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러나 당과 국가95)가 일치되는 경향이 있고 노동조합이 점점 더 당(차라리, 당-국가)에 장악당한 전달 벨트가 되는 만큼, 노동조합들이 이와 같은 기능을 더 이상 완수할 수 없을 것 같다.
레닌은 스스로 이 모순을 의식하고 있었던 바,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노동조합의 임무는 모순적이며 "전달 벨트"의 양상과 국가 내 관료화(특정한 자율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에 맞선 투쟁의 양상 간에 조정의 계기를 찾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하는지는 암시되지 않았다. 비록 레닌이 분쟁 시 제3 인터내셔널에의 의뢰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러나 그 무렵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조차 볼셰비키의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므로 이 처방은 망상이었다. 더욱이 논문의 역사적 상황과 이론적 전제를 고려할 경우, 어떤 구체적인 조치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레닌의 논문은 미해결의 문제와 물음표로 끝을 맺었다.
인생 말년에 레닌은 관료적 현상의 증가에 대해 끊임없이 몰두했다. 그러나 Lewin이 지적했듯이96) 레닌은 그것을 깊이 있게 분석하길 거부했다. 불가피한 역사적 조건을 달아 1920년과 1929년 사이97)의 러시아에 적용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과 같은 몇 가지 탁월한 분석 도구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로를 따름으로써 누군가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악전고투하고 있고 세계 혁명(혹은 적어도 유럽 혁명) 없이는 그것이 다시 소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레닌은 이 모두를 알았으며 필사적으로 서방에서의 혁명(혹은 그의 최후 저작에서 출현하는 것처럼 동방에서의 혁명)에 의지했다.98) 따라서 레닌은 관료제를 제어하고 완화시키려 노력하면서 그것의 효과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과 10월 혁명의 "요절"을 선언하는 결론에 다다를 정도로 충분히 분석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최후 저작은 징후적이다. 관료제 현상에 대한 책임이 스탈린에게 있는 듯 했으므로 그의 숙청을 요청했던 유언장에 부치는 유명한 방주99)도 추이를 바꿀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스탈린은 레닌보다 훨씬 막강한 역사적 힘의 행위자였던 것이다. 그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다소 덜 "전제적"(oriental)이고 덜 잔인했을지 모르나, 사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레닌의 최후 저술 "더 적더라도, 더 낫게"는 이 문제를 재론했다. 하지만 항상 효과의 차원이었을 뿐, 원인의 차원을 건드리진 못했다. 능률의 문제를 다룰 때 특히 그랬다. 사실 레닌은 그것의 과도함과 오용을 나무람으로써 관료제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중들로부터 유리되고 심지어 대중들과 대치하는 관료적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논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레닌은 같은 글에서 기능면에서 정당화될 수만 있다면 국가 기관과 당 기관을 융합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말년의 레닌은 비극적 모순 속에서 사고했다.
관료제에 맞선 투쟁이 패배한 러시아의 맥락에서 그 투쟁을 하는 것,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 사이의 동일성을 이론화하면서 동시에 이 독재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그 안에서 당과 국가가 대항세력을 발견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이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권력 및 국가(혹은 더 낫게 말하자면 그것의 지도적 기관)와 동일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면에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레닌의 최후 진술은 극히 고통스러운 물음표로 남아 있다.
결론과 전제
확실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 안에는 즉자계급에서 대자계급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따라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다양한 지점에서 그들은 이 과정을 포착했지만, 그러나 그것의 상호연관을 명료히 하지 않고 현상적 수준의 묘사에 그쳤을 뿐이다.100) 이 점에 관한 레닌의 사상은 단일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일련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입장들 속에 존재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 좌파" 그룹들은 "레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레닌에게 말인가? 초기의 "경제주의자" 레닌, 1899~1903년 사이의 "인텔리적" 레닌, 1905~1919년 1월 시기의 레닌, 1919~20년의 관료적 레닌, 아니면 말년의 고뇌하는 레닌?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레닌은 두 번의 혁명 사이의 레닌, 곧 Novaja Zhizn에 보내는 서신에서의 레닌, {국가와 혁명}의 레닌, 혹은 노동조합 2차 대회 연설에서의 레닌이다. 다시 말해 두 번의 위대한 혁명의 영도자로서의 레닌이다. 그의 위대함은 본질적으로 소비에트 현상의 중심성을 이해하고, 1905년 11월과 1917년 4월 당시 당에 이 노선을 "부과"했던 사실에 존재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1905년과 1907년 사이의 입장들과 함께)은 {무엇을 할 것인가?}와 그것의 인텔리주의를 극복했음을 표상한다. 그것은 레닌의 혁명적 창발성의 최고의 경지이다.
만일 소비에트의 발생, 즉 수많은 대중들이 이 거인적인 경험에 생명을 부여한 방식과 질적인 도약을 거쳐 표면 위로 마침내 분출한 더딘 분자의 은밀한 과정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레닌에게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실망할 것이다. 심지어 레닌에게서도, 전위와 대중의 관계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불합리한 교조주의로 인해 역사에 의해 지양되고 레닌 스스로 사회민주주의 전술의 과도적 국면으로 격하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이상주의적 테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신 좌파"는 무엇을 복원한다거나 어디로 돌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자율적인 연구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 글은 다만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위한 역사적 서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레닌주의적 교조주의(통상 스탈린의 눈을 통해 레닌이 파악되는)를 바르게 평가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구체적 방도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58) 레닌, [우리의 임무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레닌저작집 3-3}, 전진.
59) 같은 책, p. 293.
60) 레닌, [두마의 해산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레닌저작집 4-1}, p. 398-399.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어떤 당 조직도 대중들을 '무장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대중들을 기동적인 가벼운 전투부대로 조직화하는 것은 상황이 전개되기 시 작할 때 무기를 조달하는 데 아주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것은 1906년 7월에 쓰여졌다.
61)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 {레닌저작집 4-1}, p. 433.
62)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못박힌 손에 호소하는 것을 참주선동으로 간주했 다.
63) Cf. 레닌, [R. S. D. L. P. 5차 대회를 위한 결의 초안], {레닌저작집 4-2}, p. 323에서는 거대한 경제 파업에 대해 다음처럼 언급한다: "러시아 혁명의 전체 역사는 혁명운동의 모든 강력한 고양들이 오직 그런 대대적인 경제적 운동에 기초해서만 시작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혁명적 물결이 시작되던 1917년에 레닌은 다시 1907년의 판단을 반복한다: "즉각적이고 직접 적인 환경 개선 투쟁만이 피착취대중의 가장 후진적인 계층을 격앙시킬 수 있고, 그들을 진정으로 교육시키며, 혁명적 시기에 는 그들을 몇 개월 내에 정치 투사의 군대로 변혁할 수 있다." Cf. 레닌, "Lecture on the 1905 Revolution," in Collected Works, Vol. ⅩⅢ, p. 242.
64) 레닌, [논문 모음집 {12년}에 대한 서문], {레닌저작집 4-3}, 75p.
65) 레닌, [당의 재조직화], {레닌저작집 3-3}, 298p. 분명히 여기에서 노동자들은 지식인들과 다르게, 즉 말의 모든 의미에서 프롤 레타리아적으로 간주된다. 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다만 출신계급과 분리되고 다른 지식인들과 동등해진 노동계급 출 신의 지식인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66) 같은 책, p. 302, 각주 2. 혁명의 노도가 러시아에서 고조될 때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 3차 대회 당시(1905년 4월) 레 닌은 일찍이 당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지지했으며, 위원회가 두 명의 지식인에 대해 여덟 명의 노동자로 구성될 것을 희망했다.
지식인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67) 레닌, [혁명과 반혁명], {레닌저작집 4-3}, pp. 83 ff.
68) Lenin, "Letter to Ronsthein" (1908년 1월),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ⅩⅣ, pp. 375 ff. 그리고 "Letter to Gorki" (1908년 2 월), 앞의 책, pp. 379 ff.
69) 레닌, [논문 모음집 {12년}에 대한 서문], {레닌저작집 4-3}, pp. 72-73. 강조는 원문.
70) 같은 책, p. 78.
71) 같은 책, p. 76.
72) Lenin, "Intellectual Warriors against Domination by the Intelligentsia," in Collected Works, vol. ?, p. 317.
73) Lenin, "Angry Embarassment." in Collected Works, vol. ?, p. 322. 강조는 최종 판본에서 추가.
74) Lenin, "Lecture on the 1905 Revolution," 앞의 책, p. 248.
75) 이 점에 관해서는 History of the Bolshevik Revolution (Ann Arbor, 1957)에 있는 Trotsky의 탁월한 분석을 보라. 여기에서 그는 2월 혁명이 그들 자신의 것이라 일컬어지는 혁명적 조직의 저항을 이겨낸 그룹에 의해 아래에서부터 해방되었고, 주도권은 나 머지보다 더 착취받고 억압받은 프롤레타리아 분파가 자생적으로 틀어쥐었음을 보여 준다: 직물 노동자들 말이다. 2월 23일에 는 아무도, 특히 혁명적 써클들조차 폭풍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05년의 혁명적 경험과 볼셰비키의 혁명적 노동자 들이 없었다면 1917년 2월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트로츠키가 처음에는 인정했던 운동의 자생적 성격의 적 절성을 낮게 평가하려 했다는 것을 지적해 두자. 간단히 말해, 당은 투사들을 통해 대중들을 "간접적으로" 지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운동 속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음을 증명하지 못했고, 볼셰비키 외부에서도 전제정에 맞선 대 중투쟁으로까지 발전한 혁명적 분파들(무정부주의자, 사회혁명당원, 트로츠키 자신 같은 비-볼셰비키적 사민주의자)이 있었음에 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투쟁을 지도하고 결정하고 계획하는 집중화된 조직이 있을 때 당이 혁명을 조직하고 지도한다 는 관념은, 이 경우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만일 당시 조직 같은 게 있었다면, 집중화된 조직이 아니라 (거리거리마다, 집집마다 조직된) 지역적이고 분파적인 것이었다: 비-제도적이고 유동적이어서 아무 자취를 남기지 않았고, 무엇보다 어떤 당 강령의 헤 게모니 하에 있지도 않았다. 만일 볼셰비키가 지역적으로 투쟁을 조직했던 이런 과도적 조직에 가담했다면 사적으로 한 것이 지, 당시 다른 당들처럼 사건 앞에서 무력해지고 뒤쳐져 있는 당의 일원으로서는 아니었다. 이런 유형의 역사적 상황에서 지배 적인 요소는 분명히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주도권이지, (맹아적이고 분파적이고 유동적인) 조직이 아닐 뿐더러, 당이 중심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유형의 현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8 혁명의 자생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 다(cf.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위의 책).
76) 레닌, [당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4월 테제와 그 해설)], {레닌과 사회주의 혁명}, 태백, p. 158.
77) 공식적으로는, 1917년 당시 멘셰비키들이 추진력을 가지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상황이 주 어졌다면 대중들이 그들 스스로 1905년에 주저없이 만들어냈고 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소비에트를 재건했을 것임은 분명하 다. 사실 소비에트를 재구성하자는 발상은 투쟁의 이틀째부터 노동자들 스스로에 의해 자생적으로 제기되었다(Lisa Foa, "I Soviet e l'Ottobre," in Il Manifesto, 1970, no. 1, p. 57 을 보라). 그러므로 멘셰비키들은 대중들의 자생적으로 가동된 추진력 아래서 행동했던 것이다. 소비에트 실험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혁명적 기관을 발견하고 거기에 비-멘셰비키적인 해석을 부여한 대중들의 추동력 아래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므로 1917년에 대중들의 창발성이 소비에트를 만들어냈다(그것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의 미래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고 반복했을 때 레닌은 옳았던 것이다.
78) 레닌, {국가와 혁명}, 돌베개.
79) 이 점에 관해서는 Lissagaray, History of the Commune of 1871 (New York, 1968) 을 보라.
80) 최근 "국가와 혁명"은 Guerin 편에서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는 Anarchism: From Theory to Practice (New York, 1970), pp.
86. ff., 에서 본질적으로 연관된 세 가지 쟁점을 제기한다: (a) 전하는 바에 따르면 레닌은 꼬뮌을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국가"와 동일시했다; (b) 이 국가의 사멸 과정이 느리다는 사실은 레닌의 "의도"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다; (c) 레닌주의적 개 념에 따르자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기관인 소비에트는 제도적으로 볼셰비키 당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첫 번째 주장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국가와 자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국가"로 정의하지 않으며,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책에서 레닌은 카우츠키와 사납게 논쟁했는 바,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적 목적으로 위해 부르주아 국가를 활용하 려 했던 것이다. 대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따르고 꼬뮌의 원리에 의해 고취되는 새로운 기능적 국가 장치를 창출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주장의 근거는 더욱 박약하다: 국가를 제도화하는 과정은 날카로운 계급-전쟁(국내적·국 제적으로)으로 특징지워지는 전체적인 역사적 시대로 이루어진다. 이 맥락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결단주의적인 지름길은 허용될 수 없다. 당과 소비에트의 관계에 관한 마지막 언급의 경우, 역사적 맥락이 완전히 다른 1919-1920년 당시의 레닌이 쓰고 행동했던 것에 입각하여 1917년의 레닌을 독해한 혐의가 짙다. "국가와 혁명"에서는 역사적 권리에 의해 재가된 제도적 전위로 볼셰비키를 격상시키는 것 따윈 없다: 소비에트라는 장막 뒤에서 대중의 이름으로 대중을 통치하는 별개의 특권화된 전위 말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고 새로운 이론적 입장들이 출현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새로 운 사건들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81) 이와 대립되는 견해를 보려면 Lisa Foa, op. cit., p. 60을 보라. 하지만 이는 거침없는 레닌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 같다. 사실 레닌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지도력을 획득했을 때 소비에트 장치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 했다. 즉 소비에트의 "외부적" 제도화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
82)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소나무.
83) Lenin, "Report to the Second All-Russia Trade-Union Congress,"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Ⅷ, p. 418-419. 조합의 기능이 소비에트 체계 안에서 펼쳐져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84) 같은 책, p. 419. 강조는 추가.
85) 같은 책, p. 426.
86) 같은 책.
87) Cf. Carr, 앞의 책.
88) 우리는 Basso가 Neocapitalismo e Sinistra Europea (Bari, 1969), pp. 20 ff에서 제출한 것보다 이같은 해석을 선호한다. 전자 에 따르면 관료적 타락은 러시아의 후진성과 이로 인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허약함 때문이다. 실제로는,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집중되어 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나선 1905년과 1917년의 소비에트 경험을 통 해 자신들의 위력과 성숙함을 증명했다. 1917년 이후 분할되거나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비범한 능력을 상실했다는 증거 같은 건 없다.
89)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의 레닌의 구절을 인용하는 Moshe Lewin, Lenin's Last Struggle (New York, 1968), p. 6을 보라. "강령 에 따르면 노동자들에 의한 정부 기관이었던 소비에트는 사실상 노동대중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선진적인 분파들에 의해 운영되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부 기관에 불과하다." 강조는 Lewin.
90)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돌베개. 당은 모든 방면에서 당을 위협하는 쁘띠부르주아적 침투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중핵"으로 간주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은 매우 타락하기 쉽다고 간주되고 계급의 "정직한" 부분의 신뢰를 받는 철의 전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91) Lenin, "Speech on the Role of the Communist Party,"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 pp. 235 ff. 또한 p. 191을 보면 당과 소비에트, 그리고 대중의 관계에 대해 모호하게 언급한다. 아마도 이 같은 모호함 때문에 Tanner와 Mclaine의 질문 및 레닌의 건조한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92) 의회주의(그것이 아무리 혁명적이라 할지라도)에 반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좌 파(보르디가)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이 문제를 여기에서는 자세히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이 논쟁에 관한 문서들 ("O Preparazione Revolutionaria o preparazione Elettorale," in Documenti Raccolti dal 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 di Bordiga, Milan, 1968, 특히 pp. 36 ff 를 보라)을 재검토하는데 관심있는 사람들은 보르디가 주장의 심각성({공산주의에서 "좌 익" 소아병}에서 레닌은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과 권위주의, 스콜라주의, 그리고 레닌 및 볼셰비키의 답변의 공공연한 공허한 방식에 충격을 받는다.
93) 레닌, [신경제정책 하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관한 테제 초안], {민중민주주의 경제론 - 레닌의 노동자통제 및 국유 화론 1}, p. 202: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적인 전위인 공산당이 그 정치적 및 경제적 활동 전체를 지도하는 정부와 친밀하고도 항상적으로 협력해야만 한다."
94) 같은 책, pp. 190-191. 여기서 레닌은 기술적 의미에서 이해된 대중 교육(즉 특정한 관념을 배우는 것)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 한다. 하지만 단지 기술적 교육을 향상시킴으로써 대중이 국가 경제 건설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비록 레닌이 반드 시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할지라도). 중앙 계획 기관에서의 노동조합 대표자들의 권력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당이 지도하 는 국가적 차원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안에 협력하는 정도였다.
95) 만약 노동조합이 당의 전달 벨트이고 당이 국가 권력의 정점이라면, 노동조합은 불가피하게 당-국가의 필요에 복무하는 전달기 관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관료제에 맞선 투쟁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의 레 닌 비판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면에서 당과 조합의 관계에 관한 것이지 전혀 상이하게 나타나는 부르주아 지배 국면의 그것 이 아님은 지적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노동조합에 관한 가장 진전된 입장은 레닌이 제 2차 노동조합 대회에서 제 출한 것으로, 이때 레닌은 (특정한 맥락과 기능을 갖는) 노동조합의 국가기구화를 말했지 전달 벨트를 언급하지 않았다. 제 2차 노동조합 대회에서의 레닌의 연설은 조합에 부여하려 했던 기능("전달 벨트" 의 관료적 테제가 기각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 회에서 노동조합의 기능과 영속성에 대해서는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때문이 아니라, 대중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 직접적 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96) Moshe Lewin, Lenin's Last Struggle, op. cit.
97) 이와 같은 시기 구분에는 소련에서 관료가 진정한 계급이 된 것은 이 시점 이후라는 우리의 확신이 작용했다.
98) Lenin, "Better Fewer, but Better,", Collected Works, vol. ⅩⅩⅩⅢ, pp. 487-502.
99) Cf. Lewin, 앞의 책, pp. 84-86.
100) 이 점은 Classe e Stato 잡지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Cf. Stame의 논설, "Contraddizione e Rivoluzione," Classe e Stato, no. 4, pp. 3 ff; 그리고 Salvati, "Il Capitalismo dei Monopoli," Classe e Stato, no. 5, pp. 71 ff.
레닌은 자신이 제출한 테제의 독창성을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실제로 레닌은 인용한 편지의 서두에서 볼셰비키 독자들에게 두 차례나 경고했다. 자신의 테제가 의심할 여지 없이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착상을 완전하게 개괄해야 했다고 말이다.58) 더욱이 지나가듯이 언급한 것이지만, 같은 곳에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이미 심대하게 변해버린 역사적 계기에 쓰여졌던 것이라고(레닌은 1907년에 이 지점으로 복귀할 것이다) 말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레닌은 소비에트가 비록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그들 중 일부는 사민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에 의해 자생적으로 창조되었지만 혁명적 기관이고 따라서 당만큼 필수적이라는 견해를 분명히 설명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조합주의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사실상 그는 소비에트를 임시 혁명 정부의 맹아로 보았다. 이 기관들이 선험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조리할 것이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는 소비에트 안에서 반드시 허용되어야 하는 다른 혁명적 분파들과의 끊임없는 변증법을 통해 스스로의 테제를 전달하려 노력하면서 소비에트의 근본 원리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는 다른 혁명적 인민들로부터 스스로를 폐쇄하지 않고,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보와 결정에서 그들의 판단을 따른다.
우리는 오직 노동대중 자신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전적으로 의지한다."59) 이 테제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낡은 관점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레닌은 자신의 새로운 시각이 십중팔구 너무 조급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주로 간접 정보를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편지의 출판 여부를 편집자들에게 위임하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따라 노선을 정한 바 있고 그에 입각하여 소비에트 가담을 반대했던(소비에트가 자생적이고 비(非)-당적인 기관인 한에서) 볼셰비키 신문은 편지를 출간하지 않았고, 그 편지는 1940년이 되어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향은 있었는데, 왜냐하면 볼셰비키 분파가 결국 레닌주의적 지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레닌 자신의 경우, 1906년과 1907년을 경과하면서 혁명적 수준까지 자생적으로 상승한 대중들의 능력과 어우러지면서 그는 소비에트 기관의 혁명적 특성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1906년의 소비에트 경험을 평가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어떤 이론도, 누군가의 재능이나 혹자에 의해 창안된 전술에의 호소도, 당의 교리도 아니고, 비-당적 대중기관이 봉기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봉기의 기관으로 전환하게끔 이끌었던 상황의 힘이었다."60) 그러므로 대중들은 당의 매개 없이 사건들의 힘을 이해했던 것이다: 소비에트는 전제정에 맞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혁명적 봉기의 기관이었다.
두 달 후 레닌은 그러한 판단을 되풀이했다: "조직의 지도부들을 뛰어 넘어 대중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파업에서 봉기로 발전했다. 이는 1905년 12월에 러시아 혁명이 획득한 가장 거대한 역사적 성과다; 그리고 모든 선행하는 성과들처럼 막대한 희생의 대가가 지불됐다. 운동은 일반적인 정치파업에서 더 높은 단계로 상승했다." 계속 이어진다: "12월 당시 사회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우리는, 병력 배치를 어설프게 한 나머지 그 대부분이 전투에 능동적으로 가담하지 못하게 한 총사령관 같은 꼴이었다. 노동대중들은 단호한 대중행동을 위한 지도를 요구했으나 이를 받지 못했다."61)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전술}에서 대중의 자생적인 혁명적 능동성으로 정의된 것과 지도의 무지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음을 발견한다: 빠져 있던 것은 자생적인 혁명적 대중의 능동성이 아니라 지도였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지도가 자생적으로 노동조합주의적인 대중에게 혁명의 길을 보여준 데 반하여, 여기에서는(레닌의 판단에서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자생적으로 혁명적인 대중이 노동조합주의 밖에 예견하지 못한 나머지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지도자들에게 혁명의 길을 가리켜 준 것이다.
요컨대 1905-06년에 러시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제공한 강렬한 자극으로 인해, 레닌은 발본적으로 다시 사고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입장의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a) 당은 대중들의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당의 외부적 개입과는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자율적 혁명 역량을 갖고 있다(사실 소비에트와 같은 몇몇 경우에는 대중이 당을 이끌었다). 대체로 당과 대중들 사이에는 의식 수준의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b) 따라서 비-당적이고 "자생적인" 기관인 소비에트는 당만큼의 중요성을 가지는 새로운 혁명적 권력의 맹아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다른 혁명적 분파들을 배제한다거나 소비에트가 사회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지 말고 소비에트에 단단히 결합해야 한다. (c) 소비에트에서 당은 대중들 위에 관료적으로 군림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대중들의 판단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스스로를 근거지우려는 자유로운 변증법을 받아들여야 한다.62) 동시에 경제 투쟁에 대한 레닌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최소한 혁명적 시기에는 경제 투쟁을 계급 의식 획득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로 인정하는 것이다.63) 당의 조직과 내적 구성에 관해서도 변화가 있다: 이제 레닌은 당 내에서 융통성 있고 민주적인 구조를 옹호하고,64) 회색 빛의 지적 도식을 구체적 생활로 전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기층 당원으로 대거 유입하고자 노력한다.65) 결국 레닌의 희망은 당 위원회 지식인 한 명 당 적어도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66) 분명 이는 이론적, 정치적, 노동조합적, 조직적 차원, 즉 모든 차원에서의 발본적 전환이었다.
레닌의 전환의 결과: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실질적으로 철회하다
1907년에는 성공하지 못한 혁명의 퇴조가 아주 분명해졌다. 이 기간 동안 레닌은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일련의 극히 흥미로운 저술들을 출판했다. 무엇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1905년과 1906년 사이에 당 내부적으로 조직적 전환이 있었다. 목표는 명백히 당에 뚜렷한 프롤레타리아적 형상을 부여하고 당을 직업적 혁명가의 협소하고 음모적인 조직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엄격하게 통합되어 있는 조직으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피로와 혁명의 퇴조 등과 같은 몇 가지 요소들로 인해 촉진되었는데, 레닌은 이미 1907년67)과 1908년68)의 다양한 계기 속에서 이를 감지한 바 있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은 당을 떠났다. 반면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인자들은 당에 굳건히 뿌리내렸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 숫자나 비율 면에서 성장했다. 이리하여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신뢰할 수 없고 동요하는 면모들은 가일층 폭로되었는 바, 이는 1905-06년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창발성과 퇴조기에도 이어지는 새로운 전투적 노동자들의 출현과 날카롭게 대비되었다.
1895-1907년 기간 저작들의 모음집 서문 격으로 1907년 중반 무렵에 출판된 레닌의 저작 {12년}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저작은 거의 전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헌정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레닌은 한층 명료해지고 이전 시기의 전환을 반복하는 일련의 입장을 취한다: "현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기본적인 잘못은 팜플렛을 우리 당 발전의 명확한, 그리고 지금으로선 오래 지난 시기의 구체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01년과 1902년의 {이스크라}의 전술 및 {이스크라}의 조직적 방침에 대한 요약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요약"이었다."69) 이러한 논의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2차 대회에서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주어진 나 자신의 정식들을 "강령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거나 특수한 원칙들을 대체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70) 같은 페이지의 앞 부분에서 레닌은 협소하고 종파적인 써클의 시대는 끝났고, 조직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민주적-프롤레타리아적인 특징의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요컨대 자생성과 의식성의 관계에 관해 종종 "완전히 유리하고 정확한 방식으로는 정식화되지 않은 ... 표현들"을 사용했음을 인정하는 것을 비롯하여,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당과 조직의 일반 이론을 제공했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거부했다. 그것은 심지어 러시아의 경험에 관해서도 일반화될 수 없고, 다만 1901년과 1905년 혁명 사이의 보다 선진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한 전술과 관련될 뿐이다. 게다가 레닌은 특히 그 저작에서, "자생적으로 투쟁에 가담하는 객관적으로 혁명적인 계급"이 있을 때 비로소 조직은 의미를 갖는다고 몇 번씩이나 강조했음을 언급했다. 이 계급은 "노동자 계급으로, 이들 중 최량 분자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창안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스크라} 구성원들이 수행한 유일한 적극적 역할은 사회민주주의적 써클들의 능동성을 집중시키기 위해 짜르의 탄압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해외의 중심을 구성한 것이었다.71)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레닌 자신의 해석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분명히 앞서 지적된 것처럼 이 저작에서 그는 전형적으로 러시아적인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경제주의를 격퇴할 필요성이 러시아적 수준과 함께 일반적 원칙의 수준에서 정당화된다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정통으로 여겨진 것을 방어하기 위해 수정주의에 맞서 투쟁하던 시기에 깊이 공감되었던 것으로 이에 따라 누구든 손쉽게 [일시적] 전술에서 [일반적] 전략과 원칙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경제주의를 수정주의와 비교하고, 카우츠키를 인용하여 (완전히 동의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정주의에 맞선] 정통파의 공식 후견인이었던 카우츠키는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이나 전술의 차원이 아니라 원칙의 차원에서 자생성과 의식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에 접근했다. 요컨대 레닌이 카우츠키의 일반적 원칙들을 러시아 상황에 적용했던 것은 그것들이 "경제주의자들"을 폐점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1902년에 레닌은 1907년에 썼던 것과 달리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최량 분자들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는 카우츠키의 일반적 주장이 "근본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이론과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 외부에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가공되어 대중들에게 외부로부터 의식성을 도입한다. 레닌에게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노동자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다루는 사소한 부분이었는데, 하지만 이들은 항상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으로 간주되었다.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레닌은 러시아 계급 투쟁의 심원한 역사적 변화(소비에트의 발생)로 인해,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이 근본적으로 유지불가능하며 (따라서 그것을) 철회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내부의 전술 때문에(멘셰비키와 "인텔리주의"라는 그들의 비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레닌이 자신의 테제들을 공개적으로 정정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랐다. 이 때문에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해석"을 통해 한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출된 전술(처음에는 심지어 멘셰비키도 유보 없이 지지하였던)의 유효성을 반복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그 저작에서 모든 일반적 유효성을 박탈하였다. 그것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역사에서 완전히 지나간 단계로 격하시킴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고 극히 적절하다: 1907년에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보편적으로 유효한 원칙으로 지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
이 기간 동안 그는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해 겉보기에 모순적인 몇 가지 시각을 견지했다. 사실 멘셰비키와의 논쟁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계급-의식적이라는 진술을 반복했다72)(이는 위험한 입장인데, 비록 "외부적" 의식성을 언급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러한 입장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셰비키 쪽에서 나타나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병적인 숭배에 대항하는 논쟁의 맥락에서 보자면, 레닌에게 이런 주장은 다만 관례에 따른 논쟁적 엄호 사격에 불과하다. 사실 논쟁을 발전시키고 결론 내린 그 이후의 논문에서 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기관의 경험으로 이해된 소비에트 경험에 대한 포괄적 평가를 내렸다. 그것은 그의 1905년 판단을 반복하는 것인 동시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1917년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이미 선취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유사한 제도들은 실질적으로 봉기의 기관이다... 봉기가 전개된 이후에야 이들의 발단이 하찮은 것 따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거대한 착취였음이 밝혀진다. 투쟁이 새롭게 고조되고 그같은 단계로 이행하면, 그같은 제도들은 물론 필수적이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적 발전은 반드시 ... 혁명적 권력의 맹아적 기관들(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바로 이런 것이다)을 혁명적 권력의 중심적 기관들로, 혁명적인 임시 정부로 전환하는 데 ... 있어야 한다."73)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한 1907년부터 1917년 기간 동안 레닌의 사상에 근본적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더 이상 이 주제에 관한 체계적 저술을 남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소비에트를 광범위하게 다루지도 않을 것이다.
1917년 1월 새로운 혁명적 폭풍의 전야에 레닌은 회의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1905년 혁명에서 소비에트의 중요성을 (비록 약간의 주의를 두면서도) 실질적으로 되풀이했다: "전투의 시련 속에서 독특한 대중조직이 형성되었다. 각 공장의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된 저 유명한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몇몇 도시에서는 이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점차로 장차의 혁명 정부의 역할, 봉기의 기관과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74) 이렇듯 소비에트가 재출현하게 되는 시점 직전에 레닌이 그것의 혁명적 성격을 반복해 말했던 것이다.
1917년의 레닌: 소비에트와 {국가와 혁명}
위에서 언급한 회의가 있은 지 몇 주 후, 대중들의 자생적이고 예측하지 못한 행동의 결과75)인 혁명은 전제정을 전복하고 소비에트를 다시 세웠다. 이 사건의 막대한 중요성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레닌은 망명지 스위스에서 볼셰비키에게 맹렬한 편지 세례를 퍼부었다. 두 번째 편지에서 레닌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내에서 소수파에 불과했던 상황에서도 저 유명한 슬로건을 선포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76) 분명히 레닌은 소비에트에서 당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소비에트 대중들을 전취하는 당의 지혜와 정치적 역량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1905년 당시처럼 그는 소비에트가 근본 원칙에 관해서 볼셰비키의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당에 어떤 제도적 특권도 부여되지 않더라도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 즉각 이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맥락에서 당은 단지 소비에트 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며, 비중이나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자유로운 합의를 획득해야만 했다 ― 대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는 "역사적 권리"를 스스로 참칭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1917년에 레닌은 대중들의 창발성이 만들어 낸 소비에트의 근본적인 혁명적 중요성을 되풀이했다.77) 그러나 1917년의 가장 중요한 문건은 {국가와 혁명}이다. 여기에서 레닌은 당이 특권적인 정치적 지위를 부여받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의 운영자로 지명된(그리고 즉각적으로 그것에 책임을 갖는) 이들을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임명하고 소환하며 통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정했다.78)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이 도식을 제출할 때에 레닌은 파리 꼬뮌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비록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전위(마르크스주의적 분파)가 파리 꼬뮌의 경험에서는 부재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파리 꼬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초의 역사적 사례로 인정했다. 물론 그들은 꼬뮌의 우유부단함과 비극적 패배의 한 원인이 된 (중앙)집중화의 부재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의식성의 유일한 담지자인 하나의 당이라는 소수의 제도화된 지배를 문제의 해결책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꼬뮌을 위해 보더라도 중앙위원회가 너무 빨리 해산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중앙위원회는 내전의 급박한 결정에 더 적합할 수 있는 보다 조직된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는 단연코 스스로를 역사적 권리에 의해 전위로 공언하는 유일당의 제도적 표현은 아니었다.79)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대했던 것은 단지 모든 프롤레타리아 구성원들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내전 와중의 과도적인 체제 아래서 요구되는 급박한 행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아직 갖고 있는 기관이었을 뿐이다.
레닌은 이 접근과 단절하지 않았고, 그의 예견은 파리 꼬뮌의 도식을 완전히 되풀이한다.80) 게다가 17년 9월에 발효된 슬로건 "볼셰비키는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우리의 테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 슬로건을 선포한 편지에서 레닌은 분명히, 권력 획득의 시점까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장치의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의 이해를 볼셰비키가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4월 테제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있다. 소비에트는 여기에서(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첫 번째 국면에서도) 당의 도구로 여겨지지 않는다.81) 또한 카우츠키와의 1918년 논쟁에서 (여전히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여겨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맥락에서 (당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중심성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82)
1919년 초기에 레닌은 노동조합 2차 대회(1919년 1월)에서의 극히 중요한 연설에서 또다시 전술한 중추적 개념을 반복한다: "하지만 지금, 바로 지금, 정치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권력이 이양된 이후인 지금, 하나의 계급이라는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한 조직인 노동조합이, 아주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정치적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며, 말하자면 정치적 기관의 수장으로 나설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치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이양되었을 때 노동조합은 점차적으로 노동-계급 정치의 건설자라는 임무를, 자신들의 계급적 조직을 통해 낡은 착취자 계급을 대체하는 인민적 임무를 떠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너희가 경제적 임무를 돌본다면, 부르주아지의 당은 정치를 돌볼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나는 구래의 과학의 낡은 전통과 편견들을 뒤집어 놓았으니 말입니다."83)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연계 속에서 노동조합은 근대적 공산주의의 창시자들이 얘기했던 심오하고 유명한 말들을 아주 진지하게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에서 혁명이 더 넓고 더 깊게 진행될수록, 혁명을 만드는 사람들,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의 창조자인 인민들의 숫자는 필시 증가할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들 말입니다."84) 계속 이어진다: "사회주의 혁명은 수천만 인민이 능동적이고 실천적으로 국가 관리(administration)에 가담할 때에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85) 이 구절에 따르자면 당은 권력을 독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독점해서도 안 되며, 기층에서의 권력 증가가 즉각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없고, 당연한 얘기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살아남을 수도 없다. 사회주의는 오직 대중들이 "모든 의미에서의 입안자"로서 국가적 결정에 능동적이고 직접적으로 가담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어떤 제도화된 권력도 제한된 전위에 의해 대중들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물론 같은 경우에 레닌은 이렇게도 얘기한다: "이 임무는 인민들에게 관리(administration)의 기술을 가르치되, 책이나 강의, 회의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경험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명령하고 조직할 채비가 된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 대신, 훨씬 신선한 피가 부서에 들어올 것이고, 그와 유사한 다른 부서들에 의해 새로운 부문들이 강화될 것이다."86)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외부적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표현된 이 전위(반드시 당일 필요는 없는)의 권력이 즉각 스스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 시작해야 하는 완전히 과도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노동조합의 합리화는 정확히 이를 겨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는 전위의 기본적인 제도적 권력으로 파악되지 않고, 대중들의 명령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러므로 전위는 오직 대중들의 동의와 확신에 기반했고, 그럴 때에만 존속할 수 있었다.
반면 이는 소비에트 권력의 첫 번째 국면에 조응했다: 대중들은 자유로운 선택 행위를 통해 몸소 선출한 자들(이들은 대부분 볼셰비키였다)에게 통치할 권력을 (자유롭게) 부여했다. 이는 높은 수준의 의식성을 전제하는 것으로, 1917-1918년의 극적인 역사적 조건들 때문에 가능했다. 게다가 특히 인용된 구절에서 레닌이 언급한 것이 반드시 지적되어야 하는데, 그는 정치적 대중 교육의 유일하게 진실한 형태는 프롤레타리아의 점증하는 권력에의 직접 경험에 기초하지, 책이나 회의, 혹은 당 관료에 의한 다소간의 계몽된 회보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조차 기꺼이 인정하는 것처럼, 1917년 이래 레닌과 볼셰비키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917년 초반 레닌의 연설은 이 방면에서의 마지막 위대한 노력이다. 그 노력이 실패했음을, 지금의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카 같은 이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헬스의 법칙(Michels' Law) 같은, 일반적으로 정치 정당과 집단적 조직 안의 관료적 경화의 불가피성 따위의 탓이 아니다.87) 소비에트가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에서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생명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대중적 토대가 사멸하면서 소비에트는 관료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패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계급으로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실패인 것이다.88)
1919-1920년의 관료적 전환
1918년이 되자 소비에트 혁명이 관료적으로 타락하는 최초의 징후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구 세계, 낡은 관습, 그리고 오래된 사고방식이 새롭게 출현하는 세계를 망치려 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어야 했다. 이러한 퇴행적이고 "찌꺼기 같은" 경향은 그것들을 재도입하게 만든 일련의 사건들만 없었다면 틀림없이 격퇴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의 어리석은 태도로 인해 볼셰비키는 매우 격렬한 투쟁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도를 홀로 떠맡아야 했다. 한편,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노동조합과 소비에트가 관료화됨으로써 당과 계급간의 진정한 변증법의 가능성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료적 경직화의 이유들은 1919-1920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작동했던 역사적 조건들, 이미 1918년 후반에 분명해진 역사적 조건들에서 찾아질 수 있다. 내전과 외세의 개입은 산업생산의 총체적 붕괴를 야기하여 1920년 산업생산은 전전(戰前)의 13% 밖에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917년의 비범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학적으로 거의 완전히 소멸하였고 내전으로 지쳐버린 수십만의 개인들로 돌아갔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적 분자들은 전사하거나 관료기구로 흡수되어 작업장의 대중들과 유리되었다. 나아가 생산의 발전 혹은 최소한 지속을 위해 구(舊)체제의 관료 및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필요성 때문에 부르주아적 관습과 야망의 인습에 찌든 한 무리의 타락한 분자들이 국가와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중심부 안으로 들어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반적으로 반(半)프롤레타리아적인 소농민 대중들에게 의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는 그들이 사회주의를 한사코 거부했다거나 그들이 본성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도시와 농촌 양자를 동시에 장악할 힘을 결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백히 객관적인 이유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농민운동이 일어난 후 몇 십년 뒤에야 발전했고, 도시들에 고립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농촌은 사회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이미 스스로를 단단히 확립했던 다양한 인민주의 운동에 내맡겨졌다.
러시아의 상황에서 소농민은 사회주의에 이질적인 대중이었고, 수십년간 나로드니키와 쁘띠부르주아의 선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기껏해야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신뢰할 수 없고 동요하는 동맹자에 불과했으며, 장구한 시기에 걸쳐 지루하고 난해하며 모순적인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로 전취되어야 했다. 그러나 관료화의 과정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이 시점에는 이미 탈진해 버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당은 오랜 기간 동안 막대한 농민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었으며, 허약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 더 이상 의존할 수도 없었다. 다시 말해, 당은 나라 전체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사한 상황에서 그리고 경제적, 군사적 곤란함 속에서 프랑스 꼬뮌을 모델로 한 국가의 실현은 실로 불가능했다.
이상이 러시아 노동계급이 소생하고 그 사회적 비중 때문에 통제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러시아에 이미 견고하고 경화된 관료적 체제가 존재하게 된 배경이다. 이 같은 사정은 서방의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는데, 그 혁명만이 러시아를 유럽 사회주의 동맹의 일부로 통합함으로써 이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러시아를 해방시킬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혁명의 승리는 가능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룰 수 없는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혁명의 승리는 일어나지 않았고, 1921년경 프롤레타리아적 노도의 일반적 쇠퇴는 유럽에서도 분명해 보였다. 1918년에 이미 분명해진 이 같은 비극적 상황은 이듬해가 되면서 점차 악화되었고, 볼셰비키의 입장과 레닌의 사상에 공히 영향을 미쳤다.
"이론적" 전환의 계기는 아마도 1919년 1월의 제 2차 노동조합 대회로부터 두 달 정도 후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러시아 공산당이 소비에트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우위를 점하며 모든 업무에 대한 실천적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결의안이 1919년 3월 8차 당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이론적 정당화는 전위로서 공산당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제도적으로 지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사실 전위의 두 개념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개념에 따르면, 전위는 대중들에게 길을 제시하고(그들과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종종 중앙위원회의 견해보다 더 정확할 수 있는 그들의 요구와 지시를 고려하면서) 의견이 엇갈릴 경우 강요하기보다는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 개념에 따르면, 전위는 대중들을 지도하는 제도적이고 양도불가능한 기능을 지니며 따라서 의견이 엇갈리면 대중은 그 의지와 무관하게 전위의 지도에 복종해야 한다.
Novaja Zhizn에 보내는 1905년 서신이나 {국가와 혁명}의 레닌,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1917년의 볼셰비키의 경우에는 첫 번째 전위 개념이 우세했다. 그러나 8차 대회에서 두 번째 개념에 수반되는 고유한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세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도 및 공산당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배타적이고 완전한 통제에 대한 강조는 전위가 "역사적 권리에 의해" 항상 대중들보다 더 신속하고 더 잘 볼 수 있다는 가정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것이다.
1919년 당 강령의 경우 자신들이 파리 꼬뮌을 모델로 한 국가의 원칙들을 고수하고 있고 이것이 서서히 기틀을 잡아가고 있다고 되풀이해 주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지도된 민주주의"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수용되었을 때, 역사적 맥락에서 원칙들의 이같은 선언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19년 3월에도 여전히 레닌은 모든 계급의 기관이 되어야 했던 소비에트가 사실상 제한된 전위의 권력을 "이상하게" 나타내고 있음을 슬픔에 젖어 언급했다.8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지만 불가피한 사정에 대한 깨달음은 1919년과 1920년을 거치면서 상황을 "합리화"하려는 일련의 주장들로 바뀌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그 무렵 자신들의 권력과 동일화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한편으로 사회민주주의적 비판의 유효성과 다른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적 비판의 유효성을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의 정치적 결과는 익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탈리아는 있을 법한 예외로 치더라도, 지도자들의 권력을 공격하고 전반적으로 룩셈부르크 사상의 영향을 받은 좌익적 경향이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우익을 형성했던 전(前)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비판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도 타격을 가했다. 따라서 이 같은 비판적 입장들이 레닌의 지지에 근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회를 전후로 레닌에게 무자비하게 거부당하고 말았다.
레닌은 이 좌익들에 대항하여(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이탈리아 좌익들에 대항하여) 논쟁하면서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을 썼다. 이 저작에서 좌익 공산주의의 매우 진지한 쟁점들은 "무정부주의적 광증"으로 환원되었고, 그에 반해 대중의 지도에 있어 강력한 권력집중화의 필요성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열 명의 강인한 우두머리"를 상기시키는 어조로 되풀이되었다.90)
사실 레닌의 테제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혁명}의 레닌,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2차 노동조합대회 연설에서 (당과 함께든 아니든 간에) 노동자들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이며 대규모의 참여를 강조했던 무정부주의적 레닌을 상기하고 어떤 전위도(아무리 능란하고 강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사회주의 건설에서 이 같은 본질적 요소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상할 수 있듯이 인터내셔널의 2차 대회 기간에도 논쟁은 계속되었다. 타너(독일)와 맥레인(영국)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속성에 관해 질문했을 때 레닌은 자본주의 시대에는 오직 소수의 노동자들(당에 순응하는 이들)만이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질적 조응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91) 몇 년 뒤 스탈린은 레닌이 이곳에서 실질적이지만 배타적이지는 않은 조응을 말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가 "본질적이고 진실로 중요한 것"을 의미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위의 지도력은 대중에 의해 통제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소환과 통제는 의식성을 내포하며 만일 레닌이 당시 언급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의식적인 노동자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라면, 정치권력은 이들에게만 귀속된다.
즉, 전위는 대중들이 선택해서가 아니라 의식성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운영한다. 마찬가지로 유사한 맥락에서 소비에트, 노동조합 등은 결국 독재를 실행하는 당의 수중에 있는 수동적인 집행도구(전달 벨트)가 되고 만다.
물론 레닌은 "외부적" 전위와 "지식인"의 기능에 관련된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재도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독점하는 "내부적" 전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국에는 점차로 "외부적" 전위로 변화하게 될 틈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경험을 다른 당들과 공산주의적 조류들이 모방해야 할 기본적 모델로 제시하려는 관료적 경향이 2차 대회 기간 동안 발전했다. 이 대회의 참가자들은 스탈린 시대를 예비하는 명백하게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침묵을 강요받았던 것이다.92) 이 같은 내적인 관료적 타락은 제3 인터내셔널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외부적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 시도된 종합: 관료제에 맞선 투쟁
그러나 관료화로의 경향이 이제 완전하고 최종적인 형태로 응고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는 수십년의 투쟁 동안 언제나 대중들 및 그들의 운명에 깊이 결박된 지도자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편으로는 "당독재"를 이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화의 발전과정에 대해 염려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특정한 현상의 원인을 산출했지만 그에 따른 관료적 효과의 위험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적어도 최초의 이행국면에서는 특정한 전제들이 수용되고 그것들의 "당연한" 효과를 완화하기 한 조치가 종종 취해졌다. 이는 대립하는 경향의 탁월한 조정자인 레닌이 1921년과 1923년 사이에 관료적 물결을 저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작동시키는 원리는 의문시되지 않았다. 당 독재 말이다.
요컨대 문제는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당이 관료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의 권력에 대한 진정한 대항세력을 찾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는 그 전제와 갈등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 독재와 같은 것임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내재적이면서 관료화의 과정을 제어할 수 있는 외부의 대항세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지적했듯이 러시아의 상황에서 그리고 서방혁명의 부재 속에서 관료화 경향은 비가역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레닌과 같은 지극히 탁월한 중재자조차도 극복하기 어려운 역사적 조건에 부딪쳐야 했다.
레닌은 1922년 초에 작성한 노동조합에 관한 논문에서 문제를 대면하려고 가장 진지하게 시도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의 주도성을 반복했다.93) 그러므로 레닌은 노동조합이 당과 대중 사이에서 작동하는 전달기제라고 주장했다. 대개 스탈린의 탓으로 돌려지는 이 유명한 표현은 레닌이 최초로 사용하였고, 1919년 1월 연설과 관련하여 근본적 전환을 보여준다. 또한 레닌은 노동조합이 국가의 관료적 타락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해야만 하며, 공산주의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레닌이 1919년에 주장했던 것이 옳다면, 즉 대중들의 교육은 오직 권력의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운용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제 이행국면에서는 권력이 당에 속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레닌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94)
국가의 관료화에 맞선 투쟁의 과제는 남아 있었다.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1919년에 개요된 과제들에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러나 당과 국가95)가 일치되는 경향이 있고 노동조합이 점점 더 당(차라리, 당-국가)에 장악당한 전달 벨트가 되는 만큼, 노동조합들이 이와 같은 기능을 더 이상 완수할 수 없을 것 같다.
레닌은 스스로 이 모순을 의식하고 있었던 바,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노동조합의 임무는 모순적이며 "전달 벨트"의 양상과 국가 내 관료화(특정한 자율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에 맞선 투쟁의 양상 간에 조정의 계기를 찾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하는지는 암시되지 않았다. 비록 레닌이 분쟁 시 제3 인터내셔널에의 의뢰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러나 그 무렵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조차 볼셰비키의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므로 이 처방은 망상이었다. 더욱이 논문의 역사적 상황과 이론적 전제를 고려할 경우, 어떤 구체적인 조치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레닌의 논문은 미해결의 문제와 물음표로 끝을 맺었다.
인생 말년에 레닌은 관료적 현상의 증가에 대해 끊임없이 몰두했다. 그러나 Lewin이 지적했듯이96) 레닌은 그것을 깊이 있게 분석하길 거부했다. 불가피한 역사적 조건을 달아 1920년과 1929년 사이97)의 러시아에 적용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과 같은 몇 가지 탁월한 분석 도구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로를 따름으로써 누군가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악전고투하고 있고 세계 혁명(혹은 적어도 유럽 혁명) 없이는 그것이 다시 소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레닌은 이 모두를 알았으며 필사적으로 서방에서의 혁명(혹은 그의 최후 저작에서 출현하는 것처럼 동방에서의 혁명)에 의지했다.98) 따라서 레닌은 관료제를 제어하고 완화시키려 노력하면서 그것의 효과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과 10월 혁명의 "요절"을 선언하는 결론에 다다를 정도로 충분히 분석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최후 저작은 징후적이다. 관료제 현상에 대한 책임이 스탈린에게 있는 듯 했으므로 그의 숙청을 요청했던 유언장에 부치는 유명한 방주99)도 추이를 바꿀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스탈린은 레닌보다 훨씬 막강한 역사적 힘의 행위자였던 것이다. 그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다소 덜 "전제적"(oriental)이고 덜 잔인했을지 모르나, 사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레닌의 최후 저술 "더 적더라도, 더 낫게"는 이 문제를 재론했다. 하지만 항상 효과의 차원이었을 뿐, 원인의 차원을 건드리진 못했다. 능률의 문제를 다룰 때 특히 그랬다. 사실 레닌은 그것의 과도함과 오용을 나무람으로써 관료제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중들로부터 유리되고 심지어 대중들과 대치하는 관료적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논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레닌은 같은 글에서 기능면에서 정당화될 수만 있다면 국가 기관과 당 기관을 융합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말년의 레닌은 비극적 모순 속에서 사고했다.
관료제에 맞선 투쟁이 패배한 러시아의 맥락에서 그 투쟁을 하는 것,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 사이의 동일성을 이론화하면서 동시에 이 독재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그 안에서 당과 국가가 대항세력을 발견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이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권력 및 국가(혹은 더 낫게 말하자면 그것의 지도적 기관)와 동일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면에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레닌의 최후 진술은 극히 고통스러운 물음표로 남아 있다.
결론과 전제
확실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 안에는 즉자계급에서 대자계급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따라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다양한 지점에서 그들은 이 과정을 포착했지만, 그러나 그것의 상호연관을 명료히 하지 않고 현상적 수준의 묘사에 그쳤을 뿐이다.100) 이 점에 관한 레닌의 사상은 단일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일련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입장들 속에 존재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 좌파" 그룹들은 "레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레닌에게 말인가? 초기의 "경제주의자" 레닌, 1899~1903년 사이의 "인텔리적" 레닌, 1905~1919년 1월 시기의 레닌, 1919~20년의 관료적 레닌, 아니면 말년의 고뇌하는 레닌?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레닌은 두 번의 혁명 사이의 레닌, 곧 Novaja Zhizn에 보내는 서신에서의 레닌, {국가와 혁명}의 레닌, 혹은 노동조합 2차 대회 연설에서의 레닌이다. 다시 말해 두 번의 위대한 혁명의 영도자로서의 레닌이다. 그의 위대함은 본질적으로 소비에트 현상의 중심성을 이해하고, 1905년 11월과 1917년 4월 당시 당에 이 노선을 "부과"했던 사실에 존재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1905년과 1907년 사이의 입장들과 함께)은 {무엇을 할 것인가?}와 그것의 인텔리주의를 극복했음을 표상한다. 그것은 레닌의 혁명적 창발성의 최고의 경지이다.
만일 소비에트의 발생, 즉 수많은 대중들이 이 거인적인 경험에 생명을 부여한 방식과 질적인 도약을 거쳐 표면 위로 마침내 분출한 더딘 분자의 은밀한 과정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레닌에게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실망할 것이다. 심지어 레닌에게서도, 전위와 대중의 관계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불합리한 교조주의로 인해 역사에 의해 지양되고 레닌 스스로 사회민주주의 전술의 과도적 국면으로 격하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이상주의적 테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신 좌파"는 무엇을 복원한다거나 어디로 돌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자율적인 연구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 글은 다만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위한 역사적 서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레닌주의적 교조주의(통상 스탈린의 눈을 통해 레닌이 파악되는)를 바르게 평가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구체적 방도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58) 레닌, [우리의 임무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레닌저작집 3-3}, 전진.
59) 같은 책, p. 293.
60) 레닌, [두마의 해산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레닌저작집 4-1}, p. 398-399.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어떤 당 조직도 대중들을 '무장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대중들을 기동적인 가벼운 전투부대로 조직화하는 것은 상황이 전개되기 시 작할 때 무기를 조달하는 데 아주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것은 1906년 7월에 쓰여졌다.
61)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 {레닌저작집 4-1}, p. 433.
62)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못박힌 손에 호소하는 것을 참주선동으로 간주했 다.
63) Cf. 레닌, [R. S. D. L. P. 5차 대회를 위한 결의 초안], {레닌저작집 4-2}, p. 323에서는 거대한 경제 파업에 대해 다음처럼 언급한다: "러시아 혁명의 전체 역사는 혁명운동의 모든 강력한 고양들이 오직 그런 대대적인 경제적 운동에 기초해서만 시작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혁명적 물결이 시작되던 1917년에 레닌은 다시 1907년의 판단을 반복한다: "즉각적이고 직접 적인 환경 개선 투쟁만이 피착취대중의 가장 후진적인 계층을 격앙시킬 수 있고, 그들을 진정으로 교육시키며, 혁명적 시기에 는 그들을 몇 개월 내에 정치 투사의 군대로 변혁할 수 있다." Cf. 레닌, "Lecture on the 1905 Revolution," in Collected Works, Vol. ⅩⅢ, p. 242.
64) 레닌, [논문 모음집 {12년}에 대한 서문], {레닌저작집 4-3}, 75p.
65) 레닌, [당의 재조직화], {레닌저작집 3-3}, 298p. 분명히 여기에서 노동자들은 지식인들과 다르게, 즉 말의 모든 의미에서 프롤 레타리아적으로 간주된다. 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다만 출신계급과 분리되고 다른 지식인들과 동등해진 노동계급 출 신의 지식인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66) 같은 책, p. 302, 각주 2. 혁명의 노도가 러시아에서 고조될 때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 3차 대회 당시(1905년 4월) 레 닌은 일찍이 당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지지했으며, 위원회가 두 명의 지식인에 대해 여덟 명의 노동자로 구성될 것을 희망했다.
지식인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67) 레닌, [혁명과 반혁명], {레닌저작집 4-3}, pp. 83 ff.
68) Lenin, "Letter to Ronsthein" (1908년 1월),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ⅩⅣ, pp. 375 ff. 그리고 "Letter to Gorki" (1908년 2 월), 앞의 책, pp. 379 ff.
69) 레닌, [논문 모음집 {12년}에 대한 서문], {레닌저작집 4-3}, pp. 72-73. 강조는 원문.
70) 같은 책, p. 78.
71) 같은 책, p. 76.
72) Lenin, "Intellectual Warriors against Domination by the Intelligentsia," in Collected Works, vol. ?, p. 317.
73) Lenin, "Angry Embarassment." in Collected Works, vol. ?, p. 322. 강조는 최종 판본에서 추가.
74) Lenin, "Lecture on the 1905 Revolution," 앞의 책, p. 248.
75) 이 점에 관해서는 History of the Bolshevik Revolution (Ann Arbor, 1957)에 있는 Trotsky의 탁월한 분석을 보라. 여기에서 그는 2월 혁명이 그들 자신의 것이라 일컬어지는 혁명적 조직의 저항을 이겨낸 그룹에 의해 아래에서부터 해방되었고, 주도권은 나 머지보다 더 착취받고 억압받은 프롤레타리아 분파가 자생적으로 틀어쥐었음을 보여 준다: 직물 노동자들 말이다. 2월 23일에 는 아무도, 특히 혁명적 써클들조차 폭풍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05년의 혁명적 경험과 볼셰비키의 혁명적 노동자 들이 없었다면 1917년 2월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트로츠키가 처음에는 인정했던 운동의 자생적 성격의 적 절성을 낮게 평가하려 했다는 것을 지적해 두자. 간단히 말해, 당은 투사들을 통해 대중들을 "간접적으로" 지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운동 속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음을 증명하지 못했고, 볼셰비키 외부에서도 전제정에 맞선 대 중투쟁으로까지 발전한 혁명적 분파들(무정부주의자, 사회혁명당원, 트로츠키 자신 같은 비-볼셰비키적 사민주의자)이 있었음에 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투쟁을 지도하고 결정하고 계획하는 집중화된 조직이 있을 때 당이 혁명을 조직하고 지도한다 는 관념은, 이 경우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만일 당시 조직 같은 게 있었다면, 집중화된 조직이 아니라 (거리거리마다, 집집마다 조직된) 지역적이고 분파적인 것이었다: 비-제도적이고 유동적이어서 아무 자취를 남기지 않았고, 무엇보다 어떤 당 강령의 헤 게모니 하에 있지도 않았다. 만일 볼셰비키가 지역적으로 투쟁을 조직했던 이런 과도적 조직에 가담했다면 사적으로 한 것이 지, 당시 다른 당들처럼 사건 앞에서 무력해지고 뒤쳐져 있는 당의 일원으로서는 아니었다. 이런 유형의 역사적 상황에서 지배 적인 요소는 분명히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주도권이지, (맹아적이고 분파적이고 유동적인) 조직이 아닐 뿐더러, 당이 중심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유형의 현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8 혁명의 자생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 다(cf.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위의 책).
76) 레닌, [당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4월 테제와 그 해설)], {레닌과 사회주의 혁명}, 태백, p. 158.
77) 공식적으로는, 1917년 당시 멘셰비키들이 추진력을 가지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상황이 주 어졌다면 대중들이 그들 스스로 1905년에 주저없이 만들어냈고 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소비에트를 재건했을 것임은 분명하 다. 사실 소비에트를 재구성하자는 발상은 투쟁의 이틀째부터 노동자들 스스로에 의해 자생적으로 제기되었다(Lisa Foa, "I Soviet e l'Ottobre," in Il Manifesto, 1970, no. 1, p. 57 을 보라). 그러므로 멘셰비키들은 대중들의 자생적으로 가동된 추진력 아래서 행동했던 것이다. 소비에트 실험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혁명적 기관을 발견하고 거기에 비-멘셰비키적인 해석을 부여한 대중들의 추동력 아래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므로 1917년에 대중들의 창발성이 소비에트를 만들어냈다(그것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의 미래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고 반복했을 때 레닌은 옳았던 것이다.
78) 레닌, {국가와 혁명}, 돌베개.
79) 이 점에 관해서는 Lissagaray, History of the Commune of 1871 (New York, 1968) 을 보라.
80) 최근 "국가와 혁명"은 Guerin 편에서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는 Anarchism: From Theory to Practice (New York, 1970), pp.
86. ff., 에서 본질적으로 연관된 세 가지 쟁점을 제기한다: (a) 전하는 바에 따르면 레닌은 꼬뮌을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국가"와 동일시했다; (b) 이 국가의 사멸 과정이 느리다는 사실은 레닌의 "의도"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다; (c) 레닌주의적 개 념에 따르자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기관인 소비에트는 제도적으로 볼셰비키 당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첫 번째 주장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국가와 자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국가"로 정의하지 않으며,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책에서 레닌은 카우츠키와 사납게 논쟁했는 바,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적 목적으로 위해 부르주아 국가를 활용하 려 했던 것이다. 대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따르고 꼬뮌의 원리에 의해 고취되는 새로운 기능적 국가 장치를 창출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주장의 근거는 더욱 박약하다: 국가를 제도화하는 과정은 날카로운 계급-전쟁(국내적·국 제적으로)으로 특징지워지는 전체적인 역사적 시대로 이루어진다. 이 맥락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결단주의적인 지름길은 허용될 수 없다. 당과 소비에트의 관계에 관한 마지막 언급의 경우, 역사적 맥락이 완전히 다른 1919-1920년 당시의 레닌이 쓰고 행동했던 것에 입각하여 1917년의 레닌을 독해한 혐의가 짙다. "국가와 혁명"에서는 역사적 권리에 의해 재가된 제도적 전위로 볼셰비키를 격상시키는 것 따윈 없다: 소비에트라는 장막 뒤에서 대중의 이름으로 대중을 통치하는 별개의 특권화된 전위 말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고 새로운 이론적 입장들이 출현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새로 운 사건들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81) 이와 대립되는 견해를 보려면 Lisa Foa, op. cit., p. 60을 보라. 하지만 이는 거침없는 레닌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 같다. 사실 레닌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지도력을 획득했을 때 소비에트 장치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 했다. 즉 소비에트의 "외부적" 제도화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
82)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소나무.
83) Lenin, "Report to the Second All-Russia Trade-Union Congress,"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Ⅷ, p. 418-419. 조합의 기능이 소비에트 체계 안에서 펼쳐져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84) 같은 책, p. 419. 강조는 추가.
85) 같은 책, p. 426.
86) 같은 책.
87) Cf. Carr, 앞의 책.
88) 우리는 Basso가 Neocapitalismo e Sinistra Europea (Bari, 1969), pp. 20 ff에서 제출한 것보다 이같은 해석을 선호한다. 전자 에 따르면 관료적 타락은 러시아의 후진성과 이로 인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허약함 때문이다. 실제로는,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집중되어 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나선 1905년과 1917년의 소비에트 경험을 통 해 자신들의 위력과 성숙함을 증명했다. 1917년 이후 분할되거나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비범한 능력을 상실했다는 증거 같은 건 없다.
89)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의 레닌의 구절을 인용하는 Moshe Lewin, Lenin's Last Struggle (New York, 1968), p. 6을 보라. "강령 에 따르면 노동자들에 의한 정부 기관이었던 소비에트는 사실상 노동대중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선진적인 분파들에 의해 운영되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부 기관에 불과하다." 강조는 Lewin.
90)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돌베개. 당은 모든 방면에서 당을 위협하는 쁘띠부르주아적 침투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중핵"으로 간주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은 매우 타락하기 쉽다고 간주되고 계급의 "정직한" 부분의 신뢰를 받는 철의 전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91) Lenin, "Speech on the Role of the Communist Party,"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 pp. 235 ff. 또한 p. 191을 보면 당과 소비에트, 그리고 대중의 관계에 대해 모호하게 언급한다. 아마도 이 같은 모호함 때문에 Tanner와 Mclaine의 질문 및 레닌의 건조한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92) 의회주의(그것이 아무리 혁명적이라 할지라도)에 반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좌 파(보르디가)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이 문제를 여기에서는 자세히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이 논쟁에 관한 문서들 ("O Preparazione Revolutionaria o preparazione Elettorale," in Documenti Raccolti dal 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 di Bordiga, Milan, 1968, 특히 pp. 36 ff 를 보라)을 재검토하는데 관심있는 사람들은 보르디가 주장의 심각성({공산주의에서 "좌 익" 소아병}에서 레닌은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과 권위주의, 스콜라주의, 그리고 레닌 및 볼셰비키의 답변의 공공연한 공허한 방식에 충격을 받는다.
93) 레닌, [신경제정책 하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관한 테제 초안], {민중민주주의 경제론 - 레닌의 노동자통제 및 국유 화론 1}, p. 202: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적인 전위인 공산당이 그 정치적 및 경제적 활동 전체를 지도하는 정부와 친밀하고도 항상적으로 협력해야만 한다."
94) 같은 책, pp. 190-191. 여기서 레닌은 기술적 의미에서 이해된 대중 교육(즉 특정한 관념을 배우는 것)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 한다. 하지만 단지 기술적 교육을 향상시킴으로써 대중이 국가 경제 건설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비록 레닌이 반드 시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할지라도). 중앙 계획 기관에서의 노동조합 대표자들의 권력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당이 지도하 는 국가적 차원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안에 협력하는 정도였다.
95) 만약 노동조합이 당의 전달 벨트이고 당이 국가 권력의 정점이라면, 노동조합은 불가피하게 당-국가의 필요에 복무하는 전달기 관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관료제에 맞선 투쟁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의 레 닌 비판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면에서 당과 조합의 관계에 관한 것이지 전혀 상이하게 나타나는 부르주아 지배 국면의 그것 이 아님은 지적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노동조합에 관한 가장 진전된 입장은 레닌이 제 2차 노동조합 대회에서 제 출한 것으로, 이때 레닌은 (특정한 맥락과 기능을 갖는) 노동조합의 국가기구화를 말했지 전달 벨트를 언급하지 않았다. 제 2차 노동조합 대회에서의 레닌의 연설은 조합에 부여하려 했던 기능("전달 벨트" 의 관료적 테제가 기각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 회에서 노동조합의 기능과 영속성에 대해서는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때문이 아니라, 대중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 직접적 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96) Moshe Lewin, Lenin's Last Struggle, op. cit.
97) 이와 같은 시기 구분에는 소련에서 관료가 진정한 계급이 된 것은 이 시점 이후라는 우리의 확신이 작용했다.
98) Lenin, "Better Fewer, but Better,", Collected Works, vol. ⅩⅩⅩⅢ, pp. 487-502.
99) Cf. Lewin, 앞의 책, pp. 84-86.
100) 이 점은 Classe e Stato 잡지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Cf. Stame의 논설, "Contraddizione e Rivoluzione," Classe e Stato, no. 4, pp. 3 ff; 그리고 Salvati, "Il Capitalismo dei Monopoli," Classe e Stato, no. 5, pp. 71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