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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11.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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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독일에서의 평의회와 국가

Guido De Masi, Giacomo Marramao | 번역 : 편집실
1. 사회화 프로그램의 위기와 경제적·제도적 결과

바이마르 헌법이 실행되기도 전에 독일사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재무장관 루돌프 비셀(Rudolf Wissel)은 1919년 6월 당 대회에서 비통한 절망감에 젖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형식적인 정치적 민주주의의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는 다만 막스 폰 바덴(Max von Baden) 황제의 제국 정부가 이미 시작한 프로그램을 추진했을 뿐이다. 헌법을 제정했지만 심원한 대중적 참여는 없었고, 적합한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암묵적 분노조차 진정시킬 수 없었다... 우리는 혁명을 좌우함으로써 새로운 정신으로 독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실패했다. 우리의 문화와 사회적 생활의 요체는 거의 변하지 않은 것 같다 ― 변화했더라도 개선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혁명의 성취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성격만을 가지며, 한 개인의 군사적·관료적 지배가 또 다른 종류의 지배로 대체되었고, 정부의 성격은 낡은 정체의 그것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부뿐만 아니라 의회(National Assembly)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아주 가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사회화 프로그램의 파산에 대한 이러한 날카롭고도 솔직한 선언은 실패의 정치적 이유, 즉 제도들의 통치에 능동적인 대중적 참여가 결여됐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사민주의의 자기비판은 문제의 급소인 당의 근본적인 경제주의와 대중적 기반, 사회화된 영역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치명적 망각에 집중되었다. 정치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사이의 관계에 특유한 역동적 형태이자, 동시에 "보편적 지식"의 단편들을 주도적으로 개조함으로써―그것들이 주요한 생산적 힘인 한에서 ― 이행국면을 운영할 수 있는 최초의 인물, 즉 노동자 계급의 역량으로 이해된다. SPD의 방대하고 야심에 찬 경제재건 프로그램의 실패는 카우츠키, 빌브란트, 헤이만 등이 계획과 노동자 평의회(Arbeiterr te), 사회화, "산업 민주주의"를 조화시키기 위해 이끌었던 "사회화 위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시도들 역시 종결시켰다. 2)
비셀의 마지막 제국 정부와의 비교는 매우 적절했다. 사실상, 수십 년 동안 독일 노동운동은 자신의 조직과 투쟁을 비스마르크 국가 구조에 순응시켜 왔고, 3) 11월 혁명 이후 새로운 구조도 전전(戰前)의 노조 구조의 모델에 근거를 두었다. 일례로 1919년 6월 뉘른베르크 노조 대회는 11월 협약(November Convention)의 합의를 전적으로 재가했다.4) 실제로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과정에 따라 노조와 고용주의 상관적인 기능이 조정될 "노동 공동체"(Arbeitsgemeinschaft)의 전형에 관한 연구와 기획을 장려함으로써 심화되었다. 뉘른베르크 대회의 결의안을 통해 노동자평의회는 인민위원 평의회가 차차 결정하고 사회화 위원회가 제안한 사회화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할당받았다.
경제와 평의회를 나란히 통제한다는 노조와 사민주의의 이러한 기획은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했다.5) 헌법 실행 전야의 그것의 실패는 노동운동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재사고하는 국면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11월 혁명과 1월의 진압 사이에 특정한 유형의 국가가 발전했는데, 이 안에서 어떤 계급적 흔적을 인식하는 것은 어려웠다.6) 11월 운동의 명시적인 표현으로서 평의회들은 새로운 국가 ―사민주의 다수파의 "사회적 교리"에 의해 장악당한 바로 그 노동 조직들의 산물이었던―와 개별 고용주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노동 공동체"에 반대했지만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인수하기 위해 기다리면서 일시적으로 수용했고 이제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된― 사이에 포획된 채 종말을 맞았다.
1919년 11월과 12월 사이에 사민주의자들은 낡은 에어푸르트 강령의 지령 뒤로 광범위하게 퇴각하면서 7) "무정부적 볼셰비키" 모델 ―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슬로건으로 표현된 ― 의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사회화 위원회의 실패 8) 로 인해 제 2인터내셔널의 사민주의적 전통과 레닌주의의 이론적, 조직적 모델 양자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재평가하는 순환이 생겨난다. 이것의 이유는 국제적인 경제적·정치적 상태(노동운동의 역사 문헌들이 이러한 복합적 국면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참조하는)보다는 바이마르 독일의 정치적·경제적 구조의 독특한 형태 속에서 규명되어야만 한다. 9)
너무 오랫동안 SPD는 종별적인 사회적-생산적 구조(빌헬름 독일 시대의)의 특징으로부터 정치적 범주를 도출했다. 집권 첫 주 동안, 당과 노조 그리고 평의회(몇몇 극단론자를 배제한)의 통일체가 부르주아적인 법적 규범― 휴고 프뤼스(Hugo Preuss)의 정교화를 거쳐 바이마르 헌법이 되었던 10) ―의 궤변적 통일체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회화 기획의 실패는 노동운동의 세 가지 유기적 부분들의 통일성을 침식했고, 신생 공화국의 입법적 장치만이 남았다. 모든 시민들의 복리와 행복이라는 전통을 옹호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회적 부문에게 평등에 기초하여 정치적 삶에 참여할 권리, 국가 생산력의 경제적 발전에 따라 노동조건과 분배의 조절에 참여할 권리"를 용인하는 헌법을 통한 사민주의자들의 운영은 확실히 쉽지는 않았다. 11) 베버적인 입헌적 구조로 인해 노동자 평의회는 국가 안에서 스스로를 지배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었는데 이는 복잡한 대의구조의 여타 요소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다양한 계급들과 사회적 계층들 사이의 어떠한 안정적 동맹의 창출도 불가능하게 했다. 사실, 바이마르 헌정구조는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동맹만이 가능하며, 이것조차 훨씬 더 불확실한 동맹으로 곧 대체되는 비례대표제에 근거한 권력관계의 강화 속에서 비위계적인 대의적 유기체들의 복합체였다. 그러므로 완전한 상태의 포럼은 발생하지 않았다.
노동자 투쟁(높은 수준의 의식성을 동반한)을 다른 계층의 "근로 인민", 특히 소농민과 결합시킬 수 있는 동맹의 정치에 대한 객관적 요구는 당면한 전술적 고려와 스스로가 다양한 계급 부문들의 대변자라고 선언하는 개인들 사이의 암묵적 타협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그러므로 군대와 SPD의 의회 그룹, 노조 총위원회가 그 안에서 제국이 무너졌던 "평의회 무정부상태"를 종결시키는 데 동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18년 12월 6일에 있은 사민당 다수파(SPD), 독립 사민주의자(USPD), 그리고 평의회 사이의 신속한 합의만이 대(大)베를린 노동자 평의회 집행위원회에 대항한 군대의 첫 번째 폭동을 막을 수 있었다. 12) 그 결과, 그뢰머와 노스케는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에서 소름끼치는 역할을 할 것이었다. 13)
대중적인 노조의 동원, 평의회 운동의 재개, 1920년 6월 6일 SPD의 선거 패배로부터 촉발된 1920년 3월 12일 카프 폭동의 실패는 공화국의 이러한 초기 국면을 마감하고 독일의 계급관계의 종별성을 드러냈다. 당 이론가들은 거의 이해할 수 없었고 정치 지도자들은 얼마간 만족스러워 했던 운동의 전위는 혁명 과정의 실천적 목표들과 조직적 요구를 단지 미미하게 통제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법률적 형식주의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헌법은 1919년 6월 뉘른베르크 노조 평의회의 토론을 되풀이했다: 헤게모니 계급이 없는 상태에서 노조가 자신의 기능들을 조정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군대와 노조는 최초 사건들의 주역으로 출현했고, 전쟁 기간 동안 노동 규제 및 전시 생산에 관한 특별법 체제 하에서 부상했던 권력 대립을 지속했다. 14) 노조가 군 지도부의 반혁명 공세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운동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드러냈다. 어쨌든 그것은 당, 노조, 평의회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격렬한 정치적·이론적 논쟁의 시기 동안의 공화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발전이며, 한편 군대는 주요한 부르주아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5)
카프폭동 전야에 공화국 법정이 심지어 11월 혁명기 동안 부르주아지들의 유일한 "비-군국주의" 의원이었던 중앙당 지도자 에르츠베르게(Erzberger) 조차 Dolchstoss-Legende(등에 꽂힌 칼 이론) 16) 에 희생시키는 동안, 스트레스만(Stresemann, 전(前)-민족주의자이자 인민당(Volkspartet) 지도자)과 비르흐(Wirth, 중앙당) 같은 인물들은 새로운 사회 현실에 적응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찍이 SPD와 동등한 처지에서 협력하고 경쟁할 수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을 대체하여 국가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음을 감지했던 자본의 명석한 대표자들로 등장했다. 그리하여 타협(동맹이라기보다는)의 변증법이 시작되며 이것의 결정적 요인은 사민주의의 헤게모니 무능력이다. 결코 공식적으로 시인된 적은 없었지만, 폭동 기도 이후 안정적인 제도적 협정을 위해 암묵적으로 합의의 지점들은 다음과 같았다: (1)생산과정 내 노동력에 대한 사민주의와 노조의 통제, (2)경제와 금융에 대한 자본주의적이고 독점적인 통제, (3)급속하고 합리적인 생산력 발전의 재개라는 시각에서 모든 사회화 프로그램의 포기(SPD에 따르면 다만 "보류"), (4)공장에서의 노동의 압력이 외부로 폭발한 경우에 한한 군대의 공적 생활에의 개입.
이 시점에서 경제 "합리화"의 단선적 계획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17) 그것은 노동계급의 주요 조직과 금융 및 산업자본 부문들(최대한 진보했다 할지라도)의 단순한 총계가 생산의 합리화를 낳을 것이라고 믿는 최근의 학자들의 오류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1920년 봄, 독일 자본주의의 현실은 장밋빛은 아니었다. ― 휴고 스틴스(Hugo Stinnes) 18) 의 표상 및 그가 운영한 공장, 광산, 호텔 그리고 금융 제도들의 복합체를 발전의 새로운 순환과 혼동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사민주의자들도 집중과 순환의 차이를 이해했다.
생산기구의 효율적 구조조정을 수행하지 못하는 독일 자본주의의 만성적 무능력은 결국 전쟁 채권이라는 성가신 문제로 요약됐다. 19) 황제 빌헬름 2세의 군사 정책은 다수의 중소 규모의 정밀기계산업과 20) 조선 및 중공업을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전쟁과 협상국의 몰수에도 불구하고 살아난 산업 기관들은 이 시점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모습으로 재출현했다. 수출은 공장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고, 노동-생산성은 유일하게 당장 사용가능한 물적 자원이었다. 어떠한 급진적인 변형도 시도하지 않은 채 이런 유형의 자본과의 동맹을 수용하는 것은 당과 노조가 이미 사멸 중이었고 따라서 평의회 이데올로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숙련" 노동 부문뿐만 아니라 매우 광범위한 노동계급 부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것을 의미했다. 21)
전전(戰前) 경제적 수준과 수단을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22) (경제) 합리화에 관한 사민주의와 자본의 무능력은 대결과 투쟁의 새로운 장에서 실험할 역사적 기회를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부자연스러운 공존 속에서 각각의 계급들은 보다 높은 수준의 상호적 의식을 획득했고, 동시에 그들의 상관적인 정치적·제도적 형태들을 통해 경제적·사회적 과정에 대한 보편적 전망을 획득했다. 산업의 재전환, 계획, 화폐, 신용, 지대 등과 같은 경제적 범주들을 위해 새로운 의미들과 장소들이 발전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비판이 경험적인 것에 관한 단순한 사회학으로 환원됨으로써(제 2인터의 교조적 판본에서처럼), 그것은 정치학과 이에 조응하는 혁명적 조직화 기획을 생산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낡은 정치경제학을 쇄신할 수도 없었다. 23)
1920년 6월 선거는 노동 운동에 내재한 이러한 일반적인 정치적, 심지어 역사적 난국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1919년 1월에 11,509,000의 득표를 기록했던 SPD는 이 선거에서 6,104,000 표를 얻는 데 그쳤고, 반면 USPD는 2,317,000 표에서 5,047,000 표로 성장했다. 두 당이 이제 거의 동등해졌다. 이 시점에서 당의 선택에 동화될 수 없었던 막스 아들러와 같은 과거 사민주의의 지도적 대표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평의회의 이론가들과 투사들은 SPD가 기각한 사회화 개념을 영유하고 재검토했다.

2. 사회화와 평의회

이상의 역사-정치적 맥락 속에서, 평의회 운동의 두 국면이 식별될 수 있다. 1918년 11월 혁명부터 1920년 2월까지의 첫 번째 시기와 운동의 붕괴를 특징짓는 1923년 노동자 봉기의 패배로 끝난 두 번째 시기. 24)
평의회라는 논지에 관해 이론적으로 숙고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운동이 이들 국면에 나타났다. 이는 중부 유럽 노동운동의 두 명의 주요 지식인 칼 코르쉬와 막스 아들러의 저작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0월 혁명에 대한 상이한 평가들에도 불구하고, 코르쉬와 아들러의 전략적 모델 및 정치-이론적 제안은 처음에는 "레닌주의적이고 볼셰비키적인 개념화"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는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변종들"로 나타났다. 25) 사실 두 사람은 1919-1920년이래 사회주의 운동 내 좌익적 조류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코르쉬는 도이미크(D umic)와 뮐러(Muller) 등 베를린 USPD의 성원들이 주도한 평의회 운동 진영의 "유기적 지식인"이었고, 아들러는 오스트리아 사민주의 좌익의 지도적 이론가였다. 26)
코르쉬와 아들러는 사회화의 두 측면을 검토했다. 정치-조직적 측면(사회화 기관의 문제)과 이론-정치적 측면(대중운동과 지도 사이의 관계, 역사적 주체로서 대중운동의 구성, 계급운동과 제도의 변증법, 그리고 국가의 문제).
사회화(1919-1920)에 관한 코르쉬의 저작은 27) 그 운동의 비극적 위대함과 치명적 한계를 동시에 표현한다. 코르쉬는 산업민주주의(이것은 많은 측면에서 베른슈타인을 연상시킨다)라는 주제와 직접행동에 관한 아나코-생디칼리즘 이데올로기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민주의자들이 이론화하고 실천했던 권력의 단순한 행정적 관리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평의회 체계와 그것의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함의를 주장한다. 이 대안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실천적 수단은 평의회로, 이것의 기능은 중앙 계획화와 기업에 대한 민주적 자주관리라는 상반적인 필수요건들을 포함해야 한다. 코르쉬는 이러한 종합을 "산업 자율성"이라는 정식으로 표현한다. "산업 자율성이란 모든 산업(여기서 '산업'은 농업을 포함한 모든 계획된 활동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에서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대표들이 이전의 사적 소유자나 관리 감독관을 대신하여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간부가 될 때 존재한다. 동시에 이미 국가의 '사회 정책'이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대해 가했던 제한들은 더욱 발전하여 전체의 유효한 공공소유가 된다." 28) 코르쉬주의적 담론의 모순 속에서 운동의 실천적 요구에 따른 (있음직한) 조정을 찬양하거나 반-관료적이고 반-국가적인 인상과 같은 "급진적 유토피아적" 측면(로젠버그의 유명한 표현을 빌자면)을 비난하는 것은 모두 불공평할 것이다.
코르쉬의 평의회 테마는, 그것의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운동의 실천적 난국을 극복하려 한 불운한 이론적 시도였다. 그의 모델이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의 저작들은 이데올로기와 계급투쟁, 이론과 정치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의 극적인 복잡성을 표현했다. 국가-정치적 영역에서 경제("산업 자율성")에 이르는 혁명 전략의 탈구로 인해 평의회의 이중적 본질과 기능에 관한 개념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민주의 전통에서 전형적인) 당-노조 사이의 균열을 직접적으로 극복하고자 했으나 결국 사회화 테마에 대한 실용주의적-노조주의적 제한에 그치고 말았다. 29) 이는 코르쉬의 분석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의 몇몇 지적들은 여전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사회화와 국유화의 새로운 본질, 30) 사민주의적 지도부가 부과한 법인기업적 한계를 넘어 평의회 체계를 일반화할 필요성 같은 것들. 그러나 제안의 구체적 성과를 규정하려는 코르쉬의 시도는 막연한 "집합성"에 의한 "위로부터의 통제"와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이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통제" 사이의 중재(정치적 용어로 옮겨 놓으면 타협처럼 들리는)를 개괄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러한 형식적 해결은 코르쉬의 지적 형성의 뿌리인 법 이데올로기를 표상하는 "나쁜" 유토피아주의로 특징지어지며,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과잉 단순화한 결과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반-국가적 입장의 긴급성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혁명적 정치에 관한 비-유물론적 개념이자, 따라서 "구성"테마에 관한 여전히 환원론적이고 부분적 승인의 거울 반영이었다. 노동자 계급이 "대자 계급"으로 자기-구성되는 과정의 난맥 때문에 코르쉬는 "주체성이라는 객관적 요인"의 종별적 의의를 과소평가했고, 31) 역사적 현재의 절합된 복합성으로부터 그것이 출현하는 형태라는 문제를 회피했다.
그의 반-국가적 입장이 마르크스주의 국가 개념의 부재의 이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내에서 정치와 경제의 미분화된 통일성은 의식의 형태 및 (그로부터 이어지는) 정치 분야의 과학적 토대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라는 종별적 문제로서 구성의 문제를 회피했음을 반영했다. 그러므로 1919-1920 동안의 그의 전략적 개념은 전체로서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이율배반과 전체로서 노동운동의 정치적 후진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코르쉬와 달리, 막스 아들러는 "평의회 전략"의 정치적 귀결과 관련된 연관관계를 포착한 듯 보였다. 그는 평의회와 국가의 관계를 논지로 삼으려 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볼셰비키 모델"에 대한 반복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들러는 코르쉬보다 훨씬 더한 레닌주의의 대담자였다. 32) 아들러는 이 관계의 복잡성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슬로건이 제안한 혁명 문제의 즉각적 해결책에 신중함을 보였다. 이 같은 슬로건은 단지 시작 중이었으며 주체성의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개입에 의해서만 완결될 수 있는 과정, 즉 사회화를 이미 성취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권력 획득의 전략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경제적이고 자주-관리적인 계기의 단순한 급진화는 사실상 사회화와 대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19년 Demokratie und R tesystem에 실린 아들러의 중요한 팜플렛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자 평의회 체계가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는 수단이기를 중단하고, 동일한 바로 이 사회의 이익들을 방어하기 위한 제도로 변화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 33) 평의회 체계가 "진정한 사회화의 기관"이 되기 위해서 그것은 국가 및 제도라는 테마와 비판적으로 대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카우츠키가 교조적인 경멸감으로 거부한 바 있던 레닌주의의 정치-전략적 도전을 수용해야만 했다.
아들러는 유럽에서의 혁명이 갖는 정치적 문제, 즉 대중운동과 제도들 간의 변증법을 이해했다. 출발점이자 도달점으로서 이 관계는 권력의 획득 이전과 이후의 사이에서 연속성을 구성하게 될 사회화 과정, 평의회가 통제하는 그 과정―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의식성의 점진적인 발전에 의해 차례로 실체화된 연속성의 한 요소―을 포함했다. 그러나 이 요구를 충족시킬 실천적 수단을 말하는 것과 관련해서 아들러는 코르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타협을 제시했다. 민주주의적-제도적 구조의 수준에서 그는 평의회와 국회의 조합을 제안했고, 사회화와 대중 정치화의 수준에서 그는 "진정한 집합적 의지"의 전제로서 노동자 코포러티즘을 극복할 "혁명적인 사회주의적 선전"을 34)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의 전제는, 부르주아 국가장치로부터 최대한의 이윤을 끌어내는 데 관여하는 모든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그것의 방어는 대개 당의 의회 투쟁의 핵심이다)은 국가와 사회의 현재적 조건, 말하자면 계급분할을 극복하도록 할 사회 변형의 공통의 이익 뒷전으로 명백히 밀려난다는 것이다." 35) 따라서 코르쉬와 아들러 모두 물질적인 노동자 투쟁(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자율적인 조직 형태)의 분석적 수준과 정치적-이론적인 전망 및 일반적 전략의 수준이 양분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코르쉬에게 이 이분법은 자주-관리의 경제적 수준과 반-국가의 정치적 귀결 사이의 괴리(그리고 이어지는 병렬)에서 나타났고, 아들러의 경우 한편으로 계급투쟁(국가의 문제 및 농민 문제에 동시에 연관된)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형태의 "사회학적"(경험적-경제적) 분석과, 다른 한편으로 보편주의적-초월적 해법 사이의 간극에서 나타났다. 36) 그러므로 이 둘은 분석적인 것과 설명의 변증법적-유기적 구성요소를 연결할 핵심, 즉 생산과 계급투쟁의 연관에 관한 분석을 결여했다. 이는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수준 모두에서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규정하는 구조적(또한 계급을 구성하는 개인들에게는 경험적) 정황으로부터 "의식 형태들"의 발생을 추론할 수 있게 해 줄 것이었다. 37) 아들러는 코르쉬보다 구성의 문제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 그가 복합적이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용어들(토대-상부구조 이분법의 교조적 지지와 "국가와 사회의 사회학적 통일성" 개념에 반대하며 제출한)로 국가의 문제를 제기했을 뿐 아니라 38), 평의회 개념을 "의식의 사회화" 개념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유럽 노동운동 속에서의 신-칸트주의와 사민주의의 내부적 정치 투쟁의 맥락에서 신-칸트주의적 테마가 영유되고 활용되었던 다양한 방식의 문제를 접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더욱 지적인 접근조차 궁극적으로 특정한 정치적·역사기술적 전통의 가정들에서 연원하는 환원적 도식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점에서 평의회 운동에 대해 제기된 비판들은 그것의 모든 복합성과 풍부함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데올로기 수준일지라도 세부사항들과 내적 분화에 대한 종별적 분석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치아리는 좌익 사회주의자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바바리아 혁명의 유명한 영웅, 1919년 살해됨)가 평의회에 대한 방어를 세기 초의 신칸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어떻게 연결시켰는가를 지적했다. 39) 실제로,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 노동운동에 관한 토론에 내재한 빌헬름 시대 생철학(Lebensphilosophie)은 아이스너의 신칸트주의 담론(그리고 Vorlander와 막스 아들러와 같은 다른 지식인들의 담론) 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아들러의 마흐주의, 미헬스의 사회학적 분석, 사민주의 원리에 대한 룩셈부르크적 비판의 발전을 예고했다. 신-칸트주의적 사회주의는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파편화와 소외로부터 인간 경험의 총체성을 복원하는 잠재적 구원자로 간주했다. 40) 그러나 당위(Sollen)로서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문화적 원천을 이렇게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치아리는 적절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이 문제는 신-칸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철학적 연원으로 했던 평의회 운동의 좌익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분파들 안에 현존한 주관적이고 이론적인 후진성에 대한 사후적(a posteriori) 강조로는 해결될 수 없다. 이 이데올로기는 사민주의의 이상적-전형적 표현으로 부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 1차 세계대전 훨씬 전 베른슈타인 논쟁에서 부상한 당의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위기―에 대한 효과와 반작용이었다. 베른슈타인이 SPD 구조 안에 칸트주의를 항체 격으로 도입한 것은 정치적 작업(진행 중인 자본주의의 변형들에 일반적 개념과 당의 활동양식을 적응시키려는 객관적 요구가 지시한)이었다. 만약 그 항체를 완전한 "부르주아적" 요소로 일소하려고만 든다면, 그것의 실질적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카치아리(내지 그와 유사한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에 따르면, 제 3인터 식 역사기술의 상투어가 재생되어 우리가 정치적 허위 의식이라고들 부르는 것에 대립하는 하나의 전통인 체 한다.
반-결정론 논쟁의 정치적 의미는 스탈린주의적이고 포스트-스탈린주의적인 역사기술 속에서 잊혀져 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주관주의적-활동주의적" 수용에 대해 반-개량주의적 함의를 부여하는 것은, 예를 들어 루카치와 코르쉬처럼, 1920년대에 단호하게 볼셰비키 편에 섰던 이론가들만의 특이한 무엇은 아니었다. 비록 레닌주의와 10월 혁명에 비판적이었던 전투적 지식인들이었다 하더라도 사민주의의 퇴행에 대해 전략적 대안을, 단순히 반역적 결과가 아니라 유럽의 노동자 계급 안에 존재했던 투쟁의 단일한(unitary) 잠재력을 그 형태 그대로(in its integrity) 재획득할 수 있는 "혁명적" 결과 41) 를 생산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정주의" 및 그것의 "반-유물론적 이데올로기"에 맞선 투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올바른 노선"과 기회주의적이고/이거나 극단주의적인 좌우 편향 사이의 투쟁이라고 교조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42) 그것의 정치 계급적 근원의 견지에서 이해하고 1920년 투쟁의 수준의 관점에서 측정한다면, 이 "정통성"은 유럽 노동 운동 사건들 이면에 있던 복잡한 이론적·정치적 틀 속의 많은 요소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 독일 공산당이 "볼셰비키화"하던 시기가 되어서야 등장했던 하나의 요소다. 그리고 독일 공산당의 "볼셰비키화"는 운동의 이론적, 조직적 붕괴에 뒤따랐다. 즉, 유럽에서 "볼셰비키화"는 공세의 물결이 아니라, 노동자 투쟁의 방어적 퇴각과 실천적 패배 속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43)
이런 문맥 속에서, 막스 아들러의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와 루카치의 특정한 철학적 테마 간에 평행성이 있음을 지적해 두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필연(M ssen)과 당위(Sollen) 간의 신-칸트주의적 이분법 ― 사회주의의 윤리적-초월적 이상 속에 있는 자본주의적 객관성 ― 은 루카치에게서 상품 세계의 양적 객관성(물상화)과 질적 차원의 전복적 폭발(계급 의식: 노동과 인간성 양자의 주체성) 간의 대립에 조응했다. 44) 만약 신-칸트주의적인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에 관계의 내재성이 전적으로 부재하다면, 루카치의 경우엔 다만 조정(posited)되어 있을 뿐 ― 하나의 필요조건으로 선취되어 있을 뿐 ― 해결되진 않았다: 그것에서 계급 의식이 출현하는 부정변증법은 순전히 선언적인 내재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루카치가 그것을 대상의 종별성 안에 기초짓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즉 그가 그것의 발생(genesis)을 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역사적으로 종별적인") 지형 및 계급 구성이라는 한정된 수준으로부터 설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양으로서의 "상품 세계"라는 결국에 기술적인 시각과 단절하는 것, 그것에 내재적인 질적인-변증법적인 요소를 한정된 생산관계의 추상적 표현으로 포착하는 것은, 경제(학) 비판과 계급 조직화 이론 사이에서, 자본주의 객관성에 대한 분석과 주체성의 발생을 융합하는 기초를 놓는 것을 의미한다.

3. 당, 노조, 그리고 평의회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자 계급"으로 구성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대중정당과 전위정당이 일시적으로 공존한 사례(볼셰비키의 경험)는 일찍이 있었으나, 두 대중정당(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이 함께 있는 경우는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상징했다. 만일 "자본주의적 주도권의 진정한 중심이 새로운 노동조직, 사회화 강령 및 제도적 질서 사이의 연관에 있었던 것이라면,"45) 그것은 1920년의 봄에 이미 광범위하게 실패한 바 있다. 사회화 강령의 좌절46)과 제도적 안정화의 실패는 (일련의 군사적 폭동에 맞서 노조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서) 노동의 재조직화 문제 및 이와 연관된 정치적 조직화라는 물음을 재출현시켰다. 실제로, 노조는 재정적으로 취약한 공장의 노동 계획을 통제하는 것보다 헌정질서를 수호하는 데 더 능숙했다. 이는 독일 노동조합 총연맹(ADGB), 에 소속된 "자유 노조"들이 1913년에 이미 진부해져 버린 범주들에 입각하여 조직되고 분할되었음을 고려할 때,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었다. 47) 그러므로 독립사민당 좌파와 독일공산당 안에서 평의회 이론은 이미 주어진 생산 과정 안에서가 아니라(사민주의적 기획), 노동자들의 정치적 성과에 따라 규정되는 발전 모델 안에서 계급 구성을 재구조화하는 계획에 긍정적인 정치적 성과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획으로 재출현했다.
이 기획의 지도적 이론가였던 다우밍(D umig)에 따르자면, 계급은 노동 생산성의 핵심 지점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는 또한 조합들이 더 이상 실행할 수 없는 역할들, 임금 협약을 맺는 것뿐만 아니라 기능들 및 범주들을 재정의하는 것을 떠맡아야만 했다. 경제적 평의회와 정치적 평의회로 조직적으로 세분되어, 노동자 평의회는 경제를 재정비하는 데 필수적인 직업적 탈숙련을 계급적 통일성과 정치적 기동성으로 전화시켜야 했다 ― 이때 재조직화는 물론 위로부터의 계획의 원리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의 견지에서 판단된다. "당연히, 내가 말하는 사회화는 독점화랄지, 혹자가 노동자들에게 제안하는 '구성적 공장'을 창조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이런 유형의 실험은 이미 여러 번 시도된 바 있으나, 그 귀결은 노동자에게 어떤 것이었는가? 48)" 공장이 국가의 법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노동자들의 자기-조직적 권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49) 오직 평의회 체계만이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을 실현하고, 직접적인 대중 가담에 힘입어 사회주의로의 이행 국면을 개시할 수 있다. 50) "나는 항상 혁명이 당의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당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활력있게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늦어질수록 자본주의는 뿌리를 내리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지 않은 수많은 노동자들은 다시금 낡은 자본주의 유기체에 서서히 적응해 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혼란에 빠지고, 심지어 더한 절망에 사로잡혀 우리 중 누구도 찬성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51) 산업 안에서 계급 재구성에 관한 다우밍의 가설은, 1월 베를린 봉기와 "뮌헨 소비에트 공화국"(1919년 3월)의 선포 사이의 시기 동안 파업과 거리 시위, 봉기적 기도가 잇달았고, 그후 브레멘, 뒤셀도르프, 베스트팔리아, 브라운슈바이크, 할렐 등지에서 군대의 가혹한 탄압이 뒤따랐음을 상기할 때,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그것은 (KPD의 좌익과 함께)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 당(KAPD)의 지도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혁명의 훈련"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을 공장 문을 넘어 확장하려 했던 가장 혁명적인 노동자들에 대한 몰살에 가까웠다. 52) 그러므로 사회화와 평의회는 새로운 조직적 과정의 토대를 대표했고, 그 과정에서 당과 노조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정치-경제적 구조 안에서 그들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이 "가장 신비한 평의회 이론가" 53) 라고 규정한 뮐러(R. M ller)는 사회화와 평의회 체계간에 명쾌한 평행성을 도출했다. 평의회가 아직 공산주의를 창조하지 못하면서(즉 부르주아적인 법적 규범에 의존하면서)도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국면을 도입하는 것처럼, 사회화는 아직 사회주의가 아니고 공산주의는 더욱 아니다. "사회화의 의의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경제 권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정치 투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54) 노동자 계급이 생산 과정을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명확할 때 생산력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노동자 평의회는 경제적 수준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 형태(공산주의)를 반드시 정치적으로 선취해야 한다. 이때 사회화는 기껏해야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을 대신하여 소비자들의 요구(지역 평의회에서 대표되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직된 생산을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개략적인 사고와 프루동주의적인 조야함이 뮐러의 주장과 전반적으로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계급을 생산 과정에 종속"시키지 않는 노동자 평의회 개념이 출현했다. 55) 노동자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주체적 조직으로 특징지어지는 이행 국면의 일반적인 정치 기관으로 등장했다.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성은 스스로가 착취의 대상임을 자각하는 것을 초월하여, 자본과 노동간의 역관계가 후자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적으로 전환되는 구체적 과정의 주역으로 스스로를 파악하는 것이다. 경제학은 더 이상 경제 운영자가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객관적 법칙의 집합이 아니라 상쟁하는 계급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서, 역사적으로 변화가능하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로부터 코르쉬의 반-국가주의와 매우 가까운 뮐러의 개략적인 반-의회주의적 입장이 어떤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제(USPD의 지도자)와의 대립은 평의회와 의회의 공존이 가능한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는데, 이것은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대립은 서로 다른 이론적 전제와 의회주의적 사법 체계와 자본주의적 생산이 뒤얽혀 결합되어 있다 ― 사회화가 대의적 평의회 체계와 결합된 것과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는 확신에 따라 발생했다. "위에서 적용된 사회화는, 사회화 위원회 시기 시도되었던 것으로, 다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보존했을 뿐이다. 최상의 경우, 생산수단의 소유자를 차치하더라도, 국가 스스로가 노동력의 수령자로 등장하여 양자가 노동이 창출한 잉여가치를 분할한다."56) 평의회에 관한 뮐러의 "순수" 이론에서, 당과 노조는 이제 사멸해 가는 사회-경제적 구성체에 속하는 계급적 제도로서 소멸하는 경향이 있다. 57) 그러나 코르쉬와 마찬가지로 뮐러의 주장이 갖는 문제적인 특색은 그것이 정치적 곤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조직이 경제주의적이고 특정한 실천(때때로 단순한 의회주의적 도식주의나 간관료주의적 전술주의로 이해된 형식적이고 난해한 "정치" 개념에서 변형된) 같은 부담을 지고 있으므로, 혁명적-정치적 실천의 요구는 최초에는 공식 "정치"의 거부 및 자율적인 노동자 계급 조직에 대한 이론적 주목 같은 엄격한 양극화로 표현되었다. 이때 (노동자 계급 조직은) 그것들이 논리적이고 역사적으로 속해 있던 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전체 구조로부터 절연되어 있고 외삽적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평의회 이론의 표현이 제 2인터의 개념적 뼈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지만, 여전히 전체로서의 운동의 요구에는 상당히 미달했다.
반면, 이 운동의 공산주의적 분파들도 정치적·조직적 문제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파르타쿠스단원 E. Ludwig는 USPD와의 통합을 앞둔 KPD 4차 대회(1920년 4월 14-15일)에서 58) 당과 노조, 평의회 간의 외재적 절합을 제안했다. 이는 룩셈부르크적 사상과 볼셰비키적 경험을 이론적으로 올바르게 종합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고, 미래의 당이 겪을 이질성과 모순에 대한 근심어린 예견에 지나지 않았다. KAPD가 설립한 AAU(일반 노동 조합)에서 손쉬운 목표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프루동주의적인 쁘띠-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머리 속에서 태어난, 그 전망이 기껏 해야 노동자 자본주의의 형태로 귀결될 뿐인 편협하고 몽상적이고 종파적인" 조직으로 공격받았다. 59) 이 같은 "소수파적" 경험이 생겨나게끔 했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보다는, 루트비히는 "정치"와 "조직"의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개념에 매달렸고 USPD의 평의회 이론가들조차 비판했다. 60) 뒤이어 노동자 평의회의 "이데올로기"가 초기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의 견지에서 비판받았다. 61) 권력 획득 및 이행 국면에서 소비에트의 정치적 지도를 위한 레닌의 복합적 전략은 독일에서는 매우 일그러진 주장을 낳았을 뿐이다.
1920년 당시 독일의 현실은 루트비히의 불모적인 노선보다 훨씬 복잡하여, 당의 다수파들은 정치 지도에서 끊임없는 중단과 갑작스런 전환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62) 고립된 정치가들이나 당을 떠난 그룹들의 문건, 논설, 선언, 그리고 호소들은 일반적 후진성과 운동의 전반적인 정치적 요구들에 대한 자각에 직면하여 대안적인 정치 노선의 독특한 부재를 반영했다.
이는 복잡한 정치적 개성의 소유자인 폴 레비의 사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1920년 초입에 독일의 정치 상황을 개괄적으로 분석했는데, 이는 그의 팜플렛 Unser Weg: Wider den Putschismus(이 팜플렛은 1921년 4월에 그가 공산당과 제 3인터를 떠났음을 증명한다)의 논리적이고 정치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레비에 따르면 11월 혁명은 사민주의 지도자들 편에서의 어떤 "배신" 때문에 희생당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간단한 이유 때문인데, 즉 사민주의 지도자들은 다만 군사기구와 관련하여 굴종의 정책을 추종했을 뿐이며, 이는 1914년 8월 4일보다 훨씬 일찍 시작됐던 것이다. 63) "11월 혁명에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이 부르주아 혁명들에서 매번 해 왔던 역할을 재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스스로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세력으로서의 역할 말이다." 64)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사민주의자들도 융커와의 연계를 끊을 수 없었다. 65) 사민주의와 부르주아지간의 동맹이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독일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감내하기 어려운 함의들로 가득찬 쓰라린 깨달음, 즉 이들의 통일성이 깨졌던 것은 사민주의 지도자들의 "배신" 때문이 아니라 군사적 패배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급 운동이 내적으로 분할되는 근원적 요인은 무엇인가? 전쟁은 모든 층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균등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모든 사회적 출신의 개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체 프롤레타리아트 층도 전쟁의 영향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는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행복한 정세였다. 모든 범주의 노동자들은 군역을 면제받았고 전문 분야에 따라 고용되었다. 전시 생산의 막대한 발전 덕에 실업을 면할 수 있었고, 절대적인 고임금때문에 배고픔에서 벗어났다... 힌덴부르크와 뤼덴도르프는 자신들이 한 거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66) 이것은 몇 년 후 제 3인터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스탈린적인 정치 안에서 모든 패배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기능하게 될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노동 귀족" 이론의 최신 판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수한 역사적 관계에 대한 비-도덕주의적이고 비-이데올로기적인 분석이라 할 것이다. 전쟁이 그 최종 고리를 표상했던 노동자 계급과 독일 군수 산업의 동시 성장.
휴고 프뤼스(Hugo Preuss)는 스파르타쿠스단과 마찬가지로 착각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이 스스로 싸우고 있다고 믿었던 부르주아지 국가를 Preuss는 자신이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Preuss는 국제적 자본의 일가에 의존한 반면, 스파르타쿠스단은 사민주의 대중이 마침내 미몽으로부터 깨어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휴전의 조건은 평화주의와 선명하게 대립했다... 베르사이유 조약은 카우츠키와 그의 벗들의 모든 수다에 종지부를 찍었어야 했다." 67) 위대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독일을 위한 케인즈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68)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다만 실업과 절망만을 약속했다. 그러나 사민주의적-부르주아적 공화국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또한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계급으로 재통일될 수 있다는 스파르타쿠스단의 망상이 가망 없음을 폭로했다. 69) 그러나 그는 단일한 혁명적 노동자 당이라는 "위대한 관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당 동지들의 악화된 주관주의, 새로운 당을 세우기 위해 이미 당을 떠난 이들의 "전형적 행위", 그리고 운동의 실천적이고 이념적인 분열 앞에서, 레비는 위기와 노동자들의 자생성의 파국론적 상호의존 속에 잠재한 혁명적 모형을 재출현시키기 위해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선별해내고자 했다. "얼핏 보기에 호의적인 경제 조건은" ― 마르크화의 평가절하로 인한 수출의 증가 ― "프롤레타리아에게 자본주의의 붕괴와 그들의 역사적 과업, 공산주의를 은폐했다." 70) 그러나 자본주의의 전성기는 끝장났다. "위기는 독일에서 폭발했다" 71) 그리고 착취 체계는 그것의 맨 얼굴을 프롤레타리아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레비의 글들이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의 장황한 이론적 종합은 운동 안에 널리 퍼진 불안을 반영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다양한 노동자 당들이 분열(및 연합)하는 복합적 연쇄 속에서 표현되어 왔다. 독일공산당의 하이델베르크의 분열에서부터(이는 KAPD의 창당을 초래하는 한편, 룩셈부르크주의 출신의 엄격한 스파르타쿠스단 노선이 폴 레비의 지도 하에 재결집하는 결과를 낳았다), 할렐 대회에서 USPD가 분열하면서 다우밍이 지도하는 좌익 다수파가 제 3인터 지지 및 스파르타쿠스단과의 통합 결정을 선언하기에 이르기까지. 이 분열로부터 1920년 12월에는 통일공산당(VKPD)이 출현했는데, 이들은 레비와 다우밍의 지도 아래 노동운동의 정체성의 위기를 긍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연 듯 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정치 조직의 타이밍은 계급 운동과 조응하지 않았다. 새로운 당은 혁명적 대중 정당의 뿌리가 아니라 다만 요구를 표현했다. 당은 장래를 예견하는 과학이 아니라 "미네르바의 부엉이", 즉 당면한 앞날의 긴급한 과업보다는 최근의 패배들을 반성할 뿐인 때를 놓친 현자였다. 조직적 자생주의가 봉기의 시절에 벌어진 정면 충돌의 와중에서 노동 계급이 상실한 위치를 더 이상 재획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직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로젠베르그(Rosenberg)가 말했듯이).
독일 정치 상황에 관한 레비의 논설(1920년 11월)과 팜플렛 Unser Weg(1921년 4월)에 따르자면, 일련의 중대한 사건이 잇달았다: "공개 서한" 정책의 실패, 72) 라덱과의 충돌, 73) 중앙위원회에서 다우밍 및 제트킨과 함께 레비가 숙청된 것 74), 그리고 "3월 전투". 루트비히는 노동자 평의회를 설명하면서 다우밍과 뮐러가 베를린에 조직하려 했던 평의회 조직의 유형을, 튀링가(Thuringa)의 켐니츠(Chemnitz) 그리고 공산당에 의해 통제된 작소니(Saxony)의 모든 할레-만스필드(Halle-Mansfield) 지역의 "혁명적 평의회"의 긍정적 모델과 대립시켰다. 노동자 평의회가 카프 폭동에 도전하여 지역을 무장해제하는 데까지 이른 곳은 독일에서 이 지역뿐이었다. 오직 이곳에서만 노동자 평의회가 공장 밖에 있는 영토적 실체가 될 수 있었다. 75) 이 전장에서 라덱과 벨라 쿤에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새로운 당 중앙위원회(브랜들러, 탈하이머, 스토이커 (Stoeker), 프뢰리히(Fr lich))는 "타격 이론"을 실행하는 결정을 내렸다. 76)
여기에는 긴장 상황을 활용하자는 판단이 개입되어 있었는데, 이는 작소니(Saxony)주 당국 쪽에서 그 지역을 재무장화하기 위해 할레-만스필드(Halle-Mansfield) 지역의 민간인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법(중앙 독일의 모든 다른 지구에서 이미 강제되고 있던)을 적용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과정에서 유발되었다. 독일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 것으로 예견되었던 불씨, 곧 계급의 무장한 분파로서 당의 개입은 그 지역을 재탈환하려는 국가의 시도를 예기치 않게 도와준 것으로 밝혀졌다. 77) 공산주의 그룹들의 "봉기적" 행동은 이미 무의미하게 되어, 3월 31일의 참담한 퇴각 후엔 그 작전의 기술적 측면만이 비판받았을 뿐, 일반적인 정치적 문제는 도마에 오르지 않았다: 노동자 평의회와 당 간의 동질성이 완전히 부재했다는 점 말이다. 이는 "3월 전투"와 "타격 이론"이 공장 투쟁과 사회적 투쟁,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 간의 경계를 극복하는 방도라고 보았던 많은 이들에게는 애석한 결과였다. 78)
불과 한해 전만 하더라도 다우밍과 뮐러의 베를린 "경제 평의회"와 대립하면서 튀링가(Thuringa)와 작소니(Saxony)에 있는 노동자 평의회의 "혁명적 의식"을 치켜세웠던 루트비히의 무디고 종파적인 분석은, 이로써 당혹스러운 역사적 거부에 직면했다. 사실이 보여준 것은, "계급"과 "당" 같은 이데올로기적 통념을 가지고서 혁명적 시점을 측정하는 것, 그리하여 봉기적 직접성과 복합적인 정치 형태 간의 간극을 명료하게 지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위기와 제도 간의 관계 안에 있는 결정적 지점을 향해 노동자 투쟁을 지도하여 그것을 사회주의화할 수 있는 일반적인 대안 전략의 요구는, 노동자 계급의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을 당의 직접적 행동으로 역전시키려 했던 "3월 전투의" 개략적 시도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79)
이 같은 비판적 전제를 별도로 하자면, 레비의 팜플렛은 1920년의 초기 저작을 긴밀히 따르면서도 VKPD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1920년의 논설에서 레비는 전전(戰前)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인 경이로운 계급 통일성의 뿌리에 독일의 군사주의 정치, 즉 세기 초부터 모든 생산적 장치들의 거대한 추진력이 되었던 프러시아 국가가 놓여 있음을 강조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빌헬름 2세 및 그를 따르는 장군들을 구래의 사민당으로 대체함으로써 통일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 마지막 통합 제스쳐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는 갈등하는 조직적 경험으로 분열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각자가 전체 계급의 요구를 표현하는 체 했다. 만일 "Die politische Lage in Deutschland,"에서 레비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자동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재통일을 가져올 최종 해결사(deus ex machina)로 여전히 믿고 있었다면, 폭동주의에 반대하는 팜플렛에서 통일적 요소는 "독일 민족 문제"에 놓여 있었다. 80) 레비가 볼 때 볼셰비키의 성공은 노동자들의 혁명적 기획을 농민 문제와 같은 광범위한 민족적 문제와 결합시킨 데 있었다. 같은 식으로 독일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을, 전쟁과 베르사이유 조약이 제기한 거대한 민족 문제의 결정의 배후에 있는 추동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했다. 선동 및 이러한 문제의 정치적 활용은 융커나 우익들에게 내맡겨질 수 없었다. 민족적 볼셰비키 라우펜베르그(Laufenberg)와 볼펜하임(Wolfheim)은 정상 합의(아마도 협약을 위해 증오를 버리고 소비에트 연방에 접근하려 드는 반동적 장군들과의)를 통해 새로운 독일의 민족적(그리고 국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했다. 81) 대신 필요했던 것은 독일 인민으로 하여금 VKPD가 소련과의 동맹을 지지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코민테른(당이 그것의 한 분파였던)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적 자율성을 수호하기 위한 사활적인 경제적·정치적 중요성이 있다는 근거에 따라서 말이다. 82) 당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재조직하고 새로운 민족적 동일성을 재구성하는 기획은 동시에 추진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양자는 충돌하여 노동자 계급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83) "민족 문제"와 노동자 계급이 민족적 삶의 정치적 주역의 수준까지 올라서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를 강조하면서, 레비는 위기 및 제도적 불확실성의 상황에서 계급투쟁과 맞서는 방도에 관한 주장을 기각했다. 정치의 심급은 따라서 "자율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러나 생산 영역과 생산자들의 직접적 자기-조직화의 계기에서 볼 때 외삽적이라는 부정적 의미에서 그렇다. 일반적 정치 조직(당) 및 "민족적 길"의 테마는 실질적으로 중단됐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평의회와 사회화라는 전체 쟁점들을 고립시켰기 때문이다: 즉 노동 계급의 정치적 임무는 생산력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재구성하고 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객관적 차원에 내재한 정치적 심급을 포착하는 종별적 임무를 피하는 일반성의 심급에서 실체화되었다. 복합성의 심급에도 불구하고 레비의 입장은 자신의 논쟁적 목표와 관련하여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결점을 보여 주었다. 물론 공산당의 폭동주의는, 심지어 "3월 전투"와도 독립적으로, 다른 사회 집단들과 연합하고 동맹하는 데 있어 분명한 무능을 보였다. 노동자 계급과 이들의 당은 완전한 고립 속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열띤 논쟁을 넘어 보자면, 레비와 폭동주의자들은 무언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성장을 재조직·촉진하고 이들의 투쟁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이같은 행동을 생산 과정, 공장의 현실, 공장 평의회(Betriebsr te)의 종별성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거기에는 그것들의 공장적 한계, "생산력주의" 내지 "노동자주의적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레비가 소묘한 "사회주의로의 민족적 길"이나 벨라 쿤의 "타격 이론"에서 공히 찾아볼 수 없는 치밀함과 계급 의식의 심급을 포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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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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