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슬람 그리고 전쟁의 협주곡
탈레반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슬람율법을 사회에 적용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십자군을 자처하는 미국의 혈맹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또 다른 극단적인 이슬람국가인 수단은 아랍세계에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선봉장이다. 친미 팔레비 왕조를 몰아낸 이란과 싸워준, 그래서 폐허가 된 이라크를 미국은 철천지원수로 여긴다. 이스라엘은 후에 하마스가 되어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게 되는 이슬람형제단(Muslim Brotherhood) 을 점령지에서 은밀히 지원해 PLO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미국과 쿠웨이트의 자극, 사전인지와 방조 가운데 일어났다. 르몽드 디쁘로마띠끄 최근호에서 아브라모비치(Abramovici)는 미국 회사의 오랜 가스관 공사의 갑작스런 중단과 철수, 그리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두 달이라는 시간 안에 아프간 공격에 대한 모든 주변국의 협조가 이루어진 점등을 들어 아프간공격과 탈레반 정권의 붕괴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간주한다. 빈 라덴의 세계에 대한 창구로 기능하는 카타르의 알 자지라 방송은 미국의 협조아래 이루어진 자유화의 상징이었다.
현상적으로 불합리하거나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이 몇몇 예들은 우리로 하여금 미국, 이스라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쟁, 이슬람간의 구조적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래에서는 이 요소들간의 관계를 1970년대에 시작되어 걸프전을 기화로 가속화된 새로운 중동지역질서의 형성과정에서 이슬람과 종족갈등이 차지하는 역할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이 시대적 맥락 속에서, 특히 걸프전이 주는 교훈을 통해 현재 이라크문제의 의미와 전망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 이슬람 중심의 지역질서 형성 =
이라크 공격을 앞두고 우리는 9·11테러 이후 변한 세계에 대해 얘기한다. 새로운 형태의 테러, 새로운 방식의 전쟁, 새로운 성격의 제국주의. 아랍세계의 현대사에서 시대의 변화는 6일 전쟁(1967), 제1차 석유파동(1973)과 캠프데이비드협상(1978), 걸프전(1990-91)과 오슬로협정(1993)과 같은 사건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각 사건들이 가져온 또는 상징하는 변화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6일 전쟁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진행되어온 주된 현상은 종속의 심화, 그리고 그에 밀접히 연관된 종교적·종족적 정체성의 정치도구화이다.
물론 우리는 이 현상의 전사를 나폴레옹의 이집트정벌에서 그리고 이 이후 열강의 오스만제국 지배과정과 식민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역의 발칸화, 즉 종족·종파에 따른 분할지배전략이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철에 주된 수단이었다. 이러한 서구지배의 유산은 독립 이후 70년대 전반기까지 아랍통합의 대의와 자유주의, 맑스주의와 같은 근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분위기 속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6일 전쟁이 신호탄이 된 이스라엘 헤게모니의 강화, 석유경제화가 가져온 국가 간, 일 국 내 불평등 심화, 그리고 유가폭등과 스스로 유발시킨 냉전의 격화를 배경으로 한 미국의 적극적인 중동개입과 함께 부활하였다. 먼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능력이 약화되면서 아랍진영은 이집트의 투항을 기화로 분열되고 만다. 이제 거칠 것이 없게된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전장화하면서 이 다민족사회의 해묵은 종족·종교·종파간 갈등을 부활시켰고, 더 나아가 레바논문제를 둘러싼 주변국들간의 갈등을 격화시켰다.
이 지역의 분열과 왜곡에 기여한 또 다른 효과적인 무기는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의 정치적 부상은 먼저 위로부터 일어났다. 발전의 실패와 대 이스라엘 투쟁의 약화로 정당성의 위기를 맞은 아랍정권들이 새로운 사회통합의 기제로 이슬람원리를 사회 제 영역에 부활시킨 것이다. 이는 이슬람을 표방한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석유를 매개로 한 세계경제로의 편입과 뒤이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가져온 파멸적인 사회적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지배세력들의 입장에서 이슬람근본주의는 아랍세계의 개방과 종속의 길에 유일한 장애물인 아랍민족주의의 후예들과 맑스주의자들을 약화시키는데 효과적 무기였다.
그런데 이슬람이 80년대에 아랍세계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운동의 지배적 요소가 된 데는 아랍정권들이 적응하려 하는 새로운 지역질서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하는 미국과 아랍경제의 중심 사우디아라비아의 역할이 컸다. 미국은 70년대 후반 당시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혁명운동이 소련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 하며 데땅뜨를 파기하면서 냉전을 격화시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은 이슬람이 있는 제3세계 모든 곳에서 이슬람을 정치도구화하려 했다. 미국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시장경제주의자인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현상적인 대립, 즉 반제국주의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미국과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동반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세계화와 종교적 근본주의간의 친화성은 이슬람세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레이건시대 이래로 오순절파를 필두로 한 미국의 신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의 대남미정책, 신자유주의와 맺는 동반자적 관계를 알고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근본주의 현상은 문화, 전통, 민족성 등 각 사회에 고유한 것을 강조하는 담론, 정치·사회운동이 역설적으로 각 사회의 구체적 역사와 현실을 왜곡시키고 동시에 현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가로막으며 현 세계화의 동반자로서 기능하는 세계적 현상의 일부이다.
중동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전략에 호응하였다. 이슬람의 두 주요 성지가 자국에 위치한 나라로서, 그리고 19세기 초반이래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와하비즘이 사회를 지배해 이슬람의 선봉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세계 석유수입의 40%에 이르는 석유로 인한 부를 이용해, 그리고 미국의 이 지역 주요 동맹국이 되면서 이때까지 아랍정치의 중심이었던 이집트와 이 지역 주도권을 놓고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역전략 차원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무기로 삼은 것이 바로 이슬람이다. 아랍국가들에서 이슬람의 정치적·사회적 부상은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에 대한 재정지원, 세계적·지역적 차원의 이슬람기구들의 활성화 등을 통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역전략에 힘입은 바 크다.
= 걸프전 이후의 이라크 =
현상적으로는 걸프전과 소련의 붕괴, 그리고 이-팔 평화협상이 드디어 중동에 평화와 번영을 약속해주는 듯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어떤 것이었고 이 평화는 무엇을 동반한 것이었나? 결론적으로 걸프전은 새로운 지역질서의 주된 요소였던 이슬람담론의 지배, 종족·종교에 따른 분열, 국가간 갈등자극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이다.
먼저 이라크의 경우 걸프전은 후세인 정권을 몰아내지 못한 채 이라크사회의 총체적 위기만 가져왔다. 걸프전에서 정권유지와 반군의 통제, 그리고 이에 필요한 군사력 보존에만 주력했던 후세인에게 전쟁과 전후의 경제적, 군사적 제재는 정치적 위협이 되지 못했다. 히틀러의 정권장악에 기여한 독일의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보다도 더 패전국의 지불능력, 국민의 생존을 고려하지 않은 배상금과 12년간의 경제봉쇄는 대다수 국민의 생존 기반을 앗아갔으며 이제 국제사회의 지원이 미치는 남, 북부 국경지역이외에는 국가의 자원을 독점한 정권의 호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국민이 정권에 더욱 의존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주권국가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유엔시찰단의 요구, 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이라크쪽의 거부, 그리고 이를 빌미로 한 시찰단의 철수와 그에 뒤이은 공습이 반복되는 상시적 전쟁상황은 그간 서구언론이 만든 민족영웅으로서의 후세인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소수민족 문제도 더욱 악화되었을 뿐이다. 걸프전을 거치면서 미국이 부추긴 북부 쿠르드족과 남부 시아파의 분리독립운동은 미국의 소극적 개입과 주변국의 반대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대신에 연합군의 본격적인 지상개입 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했던, 주변국 누구도 원치 않는 쿠르드 독립운동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수십만의 이주, 혹독한 정부군의 탄압, 그리고 쿠르드족이 대규모로 거주하는 이란, 특히 터키의 정치적 혼란과 쿠르드족의 고통만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걸프전이 야기한 군비경쟁은 각지에 대량살상무기의 증대를 가져왔고 무기수입의 증대로 인해 민중의 생활수준은 악화되었다.
= 아랍정권들의 종속과 정치갈등의 심화 =
이라크가 아랍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은 이라크와 함께 아랍민족주의의 중심이었던 이집트가 낫세르 사후 친서방화의 길을 걷게 되고, 레바논에 대한 침략과 내정간섭으로 시리아마저 아랍인들의 지지를 잃게된데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걸프전으로 이 이라크마저 고립·파괴되고 나서 아랍국들의 서방에의 종속과 지역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걸프전에서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시리아마저도 연합군에 가담한 사실이었다. 물론 시리아는 이미 75년부터 레바논에 대한 침략과 내정간섭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수행한 레바논 분열전략의 동조자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래도 시리아의 참전은 이 지역 반제, 반시오니즘 세력의 결정적 패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시리아는 전쟁참여에 대한 대가로 레바논에 대한 자유로운 개입을 보장받았다. 리비아도 스코틀랜드에서의 팬암기 테러, 니제르에서의 UTA기 테러의 용의자 신병인도문제를 빌미로 한 경제봉쇄로 고립되어 이제 가다피는 반제국주의, 아랍통합의 기수로서의 아랍정치에서의 기존의 위상을 잃었다. 이렇게 반제, 중립노선의 국가들은 걸프전이 낳은 새로운 지역질서 속에서 변신 또는 고립되게 된다.
= 정치적 이슬람의 변화 =
튀니지와 알제리는 걸프전 이후 이슬람세력의 급부상으로 정치적 긴장상태 또는 내전을 겪게된다. 사우디 역시 이슬람의 본거지를 자처하던 자국에 수십만의 이교도가 이슬람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진주했다는 치명적 문제로 종교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운동에 시달리게 된다. 쿠웨이트도 미군에 의한 해방을 계기로 서방세계와 연관된 왕가의 부패와 종속성에 대한 종교세력의 비판이 강화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아랍세계의 정치적 이슬람은 이란혁명이 보여준 정치혁명에 의한 이슬람국가 건설의 가능성을 믿고 급진화했던 80년대와 달리 온건화 경향을 보인다. 이 온건화 경향은 알제리의 이슬람구국전선(FIS), 이집트·요르단·쿠웨이트의 이슬람형제단(Muslim Brotherhood)과 같이 과거 반정부운동의 주요 세력들이 합법적 틀 내에서 사회의 이슬람화를 주창하고 정당활동의 강화와 의회진입을 통한 제도권 정치세력으로서의 입지구축에 주안점을 두는데서 알 수 있다. 이 변화 속에서 서방세계나 아랍의 학계·정계·언론에서는 이 대다수의 온건세력과 알제리의 이슬람무장단체(GIA),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최근 빈 라덴의 테러조직에 가담한 이집트의 지하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과격파들을 구분하고, 온건파의 체제내 수용을 향후 아랍세계의 안정의 관건으로 여긴다. 실제로 세속적 전통이 강한 시리아, 튀니지, 이라크, 알제리에서 우리는 온건파와 강경파의 구분, 그리고 이 구분에 입각해 온건파는 포섭하고 강경파는 철저히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국 차원의 전략은 이슬람을 이용한 미국의 중동지배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유사성은 급진세력의 위협을 내세워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이 세력에 대한 투쟁에 전 정치세력을 동원하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 "평화의 길"의 의미 =
걸프전과 오슬로조약은 중동에 "평화"의 길을 열었다. 이-아랍간 협상재개, 오슬로 평화협정, 자치안합의, 분쟁관련국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수교로 숨가쁘게 진행된 이 평화의 길은 백악관 앞뜰에서의 양 진영 지도자간 최초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시오니즘을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로 규정한 1975년 11월의 유엔결의안을 폐기시킴으로써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불법점령세력의 존재는 국제사회뿐 아니라 아랍국가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의해서도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되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평화협상이 이스라엘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 협상은 팔레스타인국가 수립문제, 동예루살렘의 지위문제, 난민문제와 같은 본질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가 빠진 불평등한 것이었다. 걸프전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의 주역이 된 미국은 비본질적인 사안 위주의 피상적 화해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나마도 각종 유엔결의안이 유례없이 철저히 적용된 이라크와 달리 팔레스타인문제의 경우 오슬로조약은 거의 이행되지 않았다.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의 편향성은 결과적으로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강압정책과 양진영의 극단적 종교세력의 득세를 초래했다.
= 9·11테러의 함의 =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중동질서의 논리에 비추어 9·11테러와 그 이후의 사태전개를 해석해보자. 먼저 우리는 이전 흐름의 지속과 강화를 보여주는 예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악의 세력", "문명의 적"과 같은 식의 용어의 범람은 서양·기독교 대 이슬람이라는 세계인식의 위력을 확인시켜주며, 아프간 공격에서 나타난 미 헤게모니에 대한 일치된 승인에서 우리는 걸프전에서 보여준 미국에 대한 유럽의 위성국화가 본격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지위에 대한 전반적 승인의 분위기에서 볼 때, 이라크 제재의 비인도성과 이라크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이 제시한 근거들의 부당함에 대한 유럽국가들의 지적은 기껏해야 이 암묵적 승인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는 허울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운명과도 밀접히 연관된 9.11테러와 아프간 전쟁에 대한 아랍국들의 절대적 지지와 협조에서 우리는 6일전쟁 이후 시작된 아랍의 자주성과 저항능력 약화과정이 더욱 강화됨을 볼 수 있다.
최근 미국이 제시한 "예방전쟁" 개념, 즉 파시즘의 독일이 소련에게, 일본이 미국에게, 그것도 전쟁 중에 적용했던 것 이외에는 유례가 없는 전쟁논리도 아랍인들에게는 그리 신선하지 않다. 건국이래 지금까지 성서에서 만들어낸 초역사적 정당성과 유럽에서의 경험을 빌미로 상시적으로 국제법을 어긴 이스라엘, 이 국제법 위반을 방조하고 스스로도 인권을 내세워 분쟁지역에서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미국을 오랫동안 겪어온 이들은 새로움에 그리 예민하지 않다. 유엔결의안 등 국제법에 의존했던 것은 다름 아닌 아랍국가들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의 아랍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걸프전 당시 후세인도 국제법 준수와 합리적이고 총체적인 해결을 요구했었다. 반면에 미국은 "정의", "사명"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동원하면서 상대방의 합리적 제안은 함정, 사기라고 무시했다
= 빈 라덴과 정치적 이슬람 =
빈 라덴의 부상은 정치적 이슬람의 변화에 어떤 함의를 갖는가?
공식적, 비판적 종교세력 양자 모두 빈 라덴의 대표성과 종교적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미국과 독점언론이 이슬람세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만든 이 사우디의 억만장자는 아랍세계에 조직적 기반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던 인물이고 그 많은 돈을 팔레스타인해방운동에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대중은 그를 이슬람민중의 구세주로 생각한다. 우선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은 민중적 대안과는 거리가 먼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이 민중의 유일한 대변자로 군림해온 지난 2,30년 간의 경험에서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랍민중이 믿어왔던 이슬람 정치세력들이 지배계급과 외세 주도의 새로운 질서형성에 가담하고 이 신질서에 저항할 비종교적 비판세력은 그간 철저히 파괴된 상황에서 이제 그들은 (사실은 현 세계질서를 더욱 강화시키는데 절대적 기여를 하고 있지만) 비타협적 투쟁을 주창하는 테러세력 이외에는 안식처가 없게 된 점이다. 50개국에 퍼져있는 초국적 조직, 그러나 일국적, 대중적 토대가 없는 종말론적인 알 카에다에서 우리는 미국의 급진적 개신교 근본주의 종파들과의 유사성, 그리고 이슬람근본주의에 내재해 있던 속성의 표면화를 볼 수 있다. 미국을 근대적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비판하는 빈 라덴은 19세기 말 세속화를 비판하며 등장했다가 20세기 말 다시 부상한 미국의 근본주의 세력과 닮아있다.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정권장악 실패는 탈레반과 같은 초보수주의와 함께 알 카에다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낳았다. 희망을 갖자면 이러한 극단적 종교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이제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이슬람을 표방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최후의 지지일 수 있다.
= 새로운 걸프전이 가져올 것 =
새로운 걸프전은 제2차 걸프전과 유사한, 그러나 더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먼저 미국경제의 악화 등으로 인해 제2차 걸프전 당시보다 세계석유시장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 커진 만큼 전쟁은 이라크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우선 이라크를 보호령으로 만든 후 이라크 석유증산을 통해 세계석유시장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이 증산이 가져올 유가하락으로 미 경제를 회복시키려 할 것이다. 그 이후 이렇게 강화된 입지를 바탕으로 미국은 동맹국 사우디의 비중을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 사우디 석유에 대한 기존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사우디 정치의 변동을 시도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 "악의 축"에 포함된 또 다른 석유대국 이란도 미국의 무력개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중동지역의 전장화는 또한 이미 극단적인 길을 걷고있는 이스라엘의 폭력에 면죄부를 주어 팔레스타인 문제의 악화를 가져올 것이고 국가간, 종족간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비판여론이 심화되고 현 정권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아랍현대사의 경험을 보면 지역질서의 불안정과 사회통합의 위기는 합리적이고 장기적인 대안의 모색을 저해해 종교적·종족적 정체성을 도구화하는 세력들이 민중의 힘을 가로채 왜곡시켜왔다. 더욱이 전쟁, 즉 6일 전쟁, 이란-이라크전쟁, 레바논전쟁, 걸프전은 그 자체가 낳는 비극과 더불어 이성적인 대안모색과 정치적 발전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최소한 전쟁은 막아야하는 이유이다. PSSP
현상적으로 불합리하거나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이 몇몇 예들은 우리로 하여금 미국, 이스라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쟁, 이슬람간의 구조적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래에서는 이 요소들간의 관계를 1970년대에 시작되어 걸프전을 기화로 가속화된 새로운 중동지역질서의 형성과정에서 이슬람과 종족갈등이 차지하는 역할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이 시대적 맥락 속에서, 특히 걸프전이 주는 교훈을 통해 현재 이라크문제의 의미와 전망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 이슬람 중심의 지역질서 형성 =
이라크 공격을 앞두고 우리는 9·11테러 이후 변한 세계에 대해 얘기한다. 새로운 형태의 테러, 새로운 방식의 전쟁, 새로운 성격의 제국주의. 아랍세계의 현대사에서 시대의 변화는 6일 전쟁(1967), 제1차 석유파동(1973)과 캠프데이비드협상(1978), 걸프전(1990-91)과 오슬로협정(1993)과 같은 사건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각 사건들이 가져온 또는 상징하는 변화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6일 전쟁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진행되어온 주된 현상은 종속의 심화, 그리고 그에 밀접히 연관된 종교적·종족적 정체성의 정치도구화이다.
물론 우리는 이 현상의 전사를 나폴레옹의 이집트정벌에서 그리고 이 이후 열강의 오스만제국 지배과정과 식민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역의 발칸화, 즉 종족·종파에 따른 분할지배전략이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철에 주된 수단이었다. 이러한 서구지배의 유산은 독립 이후 70년대 전반기까지 아랍통합의 대의와 자유주의, 맑스주의와 같은 근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분위기 속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6일 전쟁이 신호탄이 된 이스라엘 헤게모니의 강화, 석유경제화가 가져온 국가 간, 일 국 내 불평등 심화, 그리고 유가폭등과 스스로 유발시킨 냉전의 격화를 배경으로 한 미국의 적극적인 중동개입과 함께 부활하였다. 먼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능력이 약화되면서 아랍진영은 이집트의 투항을 기화로 분열되고 만다. 이제 거칠 것이 없게된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전장화하면서 이 다민족사회의 해묵은 종족·종교·종파간 갈등을 부활시켰고, 더 나아가 레바논문제를 둘러싼 주변국들간의 갈등을 격화시켰다.
이 지역의 분열과 왜곡에 기여한 또 다른 효과적인 무기는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의 정치적 부상은 먼저 위로부터 일어났다. 발전의 실패와 대 이스라엘 투쟁의 약화로 정당성의 위기를 맞은 아랍정권들이 새로운 사회통합의 기제로 이슬람원리를 사회 제 영역에 부활시킨 것이다. 이는 이슬람을 표방한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석유를 매개로 한 세계경제로의 편입과 뒤이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가져온 파멸적인 사회적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지배세력들의 입장에서 이슬람근본주의는 아랍세계의 개방과 종속의 길에 유일한 장애물인 아랍민족주의의 후예들과 맑스주의자들을 약화시키는데 효과적 무기였다.
그런데 이슬람이 80년대에 아랍세계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운동의 지배적 요소가 된 데는 아랍정권들이 적응하려 하는 새로운 지역질서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하는 미국과 아랍경제의 중심 사우디아라비아의 역할이 컸다. 미국은 70년대 후반 당시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혁명운동이 소련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 하며 데땅뜨를 파기하면서 냉전을 격화시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은 이슬람이 있는 제3세계 모든 곳에서 이슬람을 정치도구화하려 했다. 미국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시장경제주의자인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현상적인 대립, 즉 반제국주의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미국과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동반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세계화와 종교적 근본주의간의 친화성은 이슬람세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레이건시대 이래로 오순절파를 필두로 한 미국의 신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의 대남미정책, 신자유주의와 맺는 동반자적 관계를 알고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근본주의 현상은 문화, 전통, 민족성 등 각 사회에 고유한 것을 강조하는 담론, 정치·사회운동이 역설적으로 각 사회의 구체적 역사와 현실을 왜곡시키고 동시에 현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가로막으며 현 세계화의 동반자로서 기능하는 세계적 현상의 일부이다.
중동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전략에 호응하였다. 이슬람의 두 주요 성지가 자국에 위치한 나라로서, 그리고 19세기 초반이래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와하비즘이 사회를 지배해 이슬람의 선봉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세계 석유수입의 40%에 이르는 석유로 인한 부를 이용해, 그리고 미국의 이 지역 주요 동맹국이 되면서 이때까지 아랍정치의 중심이었던 이집트와 이 지역 주도권을 놓고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역전략 차원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무기로 삼은 것이 바로 이슬람이다. 아랍국가들에서 이슬람의 정치적·사회적 부상은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에 대한 재정지원, 세계적·지역적 차원의 이슬람기구들의 활성화 등을 통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역전략에 힘입은 바 크다.
= 걸프전 이후의 이라크 =
현상적으로는 걸프전과 소련의 붕괴, 그리고 이-팔 평화협상이 드디어 중동에 평화와 번영을 약속해주는 듯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어떤 것이었고 이 평화는 무엇을 동반한 것이었나? 결론적으로 걸프전은 새로운 지역질서의 주된 요소였던 이슬람담론의 지배, 종족·종교에 따른 분열, 국가간 갈등자극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이다.
먼저 이라크의 경우 걸프전은 후세인 정권을 몰아내지 못한 채 이라크사회의 총체적 위기만 가져왔다. 걸프전에서 정권유지와 반군의 통제, 그리고 이에 필요한 군사력 보존에만 주력했던 후세인에게 전쟁과 전후의 경제적, 군사적 제재는 정치적 위협이 되지 못했다. 히틀러의 정권장악에 기여한 독일의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보다도 더 패전국의 지불능력, 국민의 생존을 고려하지 않은 배상금과 12년간의 경제봉쇄는 대다수 국민의 생존 기반을 앗아갔으며 이제 국제사회의 지원이 미치는 남, 북부 국경지역이외에는 국가의 자원을 독점한 정권의 호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국민이 정권에 더욱 의존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주권국가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유엔시찰단의 요구, 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이라크쪽의 거부, 그리고 이를 빌미로 한 시찰단의 철수와 그에 뒤이은 공습이 반복되는 상시적 전쟁상황은 그간 서구언론이 만든 민족영웅으로서의 후세인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소수민족 문제도 더욱 악화되었을 뿐이다. 걸프전을 거치면서 미국이 부추긴 북부 쿠르드족과 남부 시아파의 분리독립운동은 미국의 소극적 개입과 주변국의 반대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대신에 연합군의 본격적인 지상개입 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했던, 주변국 누구도 원치 않는 쿠르드 독립운동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수십만의 이주, 혹독한 정부군의 탄압, 그리고 쿠르드족이 대규모로 거주하는 이란, 특히 터키의 정치적 혼란과 쿠르드족의 고통만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걸프전이 야기한 군비경쟁은 각지에 대량살상무기의 증대를 가져왔고 무기수입의 증대로 인해 민중의 생활수준은 악화되었다.
= 아랍정권들의 종속과 정치갈등의 심화 =
이라크가 아랍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은 이라크와 함께 아랍민족주의의 중심이었던 이집트가 낫세르 사후 친서방화의 길을 걷게 되고, 레바논에 대한 침략과 내정간섭으로 시리아마저 아랍인들의 지지를 잃게된데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걸프전으로 이 이라크마저 고립·파괴되고 나서 아랍국들의 서방에의 종속과 지역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걸프전에서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시리아마저도 연합군에 가담한 사실이었다. 물론 시리아는 이미 75년부터 레바논에 대한 침략과 내정간섭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수행한 레바논 분열전략의 동조자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래도 시리아의 참전은 이 지역 반제, 반시오니즘 세력의 결정적 패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시리아는 전쟁참여에 대한 대가로 레바논에 대한 자유로운 개입을 보장받았다. 리비아도 스코틀랜드에서의 팬암기 테러, 니제르에서의 UTA기 테러의 용의자 신병인도문제를 빌미로 한 경제봉쇄로 고립되어 이제 가다피는 반제국주의, 아랍통합의 기수로서의 아랍정치에서의 기존의 위상을 잃었다. 이렇게 반제, 중립노선의 국가들은 걸프전이 낳은 새로운 지역질서 속에서 변신 또는 고립되게 된다.
= 정치적 이슬람의 변화 =
튀니지와 알제리는 걸프전 이후 이슬람세력의 급부상으로 정치적 긴장상태 또는 내전을 겪게된다. 사우디 역시 이슬람의 본거지를 자처하던 자국에 수십만의 이교도가 이슬람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진주했다는 치명적 문제로 종교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운동에 시달리게 된다. 쿠웨이트도 미군에 의한 해방을 계기로 서방세계와 연관된 왕가의 부패와 종속성에 대한 종교세력의 비판이 강화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아랍세계의 정치적 이슬람은 이란혁명이 보여준 정치혁명에 의한 이슬람국가 건설의 가능성을 믿고 급진화했던 80년대와 달리 온건화 경향을 보인다. 이 온건화 경향은 알제리의 이슬람구국전선(FIS), 이집트·요르단·쿠웨이트의 이슬람형제단(Muslim Brotherhood)과 같이 과거 반정부운동의 주요 세력들이 합법적 틀 내에서 사회의 이슬람화를 주창하고 정당활동의 강화와 의회진입을 통한 제도권 정치세력으로서의 입지구축에 주안점을 두는데서 알 수 있다. 이 변화 속에서 서방세계나 아랍의 학계·정계·언론에서는 이 대다수의 온건세력과 알제리의 이슬람무장단체(GIA),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최근 빈 라덴의 테러조직에 가담한 이집트의 지하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과격파들을 구분하고, 온건파의 체제내 수용을 향후 아랍세계의 안정의 관건으로 여긴다. 실제로 세속적 전통이 강한 시리아, 튀니지, 이라크, 알제리에서 우리는 온건파와 강경파의 구분, 그리고 이 구분에 입각해 온건파는 포섭하고 강경파는 철저히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국 차원의 전략은 이슬람을 이용한 미국의 중동지배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유사성은 급진세력의 위협을 내세워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이 세력에 대한 투쟁에 전 정치세력을 동원하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 "평화의 길"의 의미 =
걸프전과 오슬로조약은 중동에 "평화"의 길을 열었다. 이-아랍간 협상재개, 오슬로 평화협정, 자치안합의, 분쟁관련국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수교로 숨가쁘게 진행된 이 평화의 길은 백악관 앞뜰에서의 양 진영 지도자간 최초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시오니즘을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로 규정한 1975년 11월의 유엔결의안을 폐기시킴으로써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불법점령세력의 존재는 국제사회뿐 아니라 아랍국가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의해서도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되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평화협상이 이스라엘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 협상은 팔레스타인국가 수립문제, 동예루살렘의 지위문제, 난민문제와 같은 본질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가 빠진 불평등한 것이었다. 걸프전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의 주역이 된 미국은 비본질적인 사안 위주의 피상적 화해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나마도 각종 유엔결의안이 유례없이 철저히 적용된 이라크와 달리 팔레스타인문제의 경우 오슬로조약은 거의 이행되지 않았다.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의 편향성은 결과적으로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강압정책과 양진영의 극단적 종교세력의 득세를 초래했다.
= 9·11테러의 함의 =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중동질서의 논리에 비추어 9·11테러와 그 이후의 사태전개를 해석해보자. 먼저 우리는 이전 흐름의 지속과 강화를 보여주는 예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악의 세력", "문명의 적"과 같은 식의 용어의 범람은 서양·기독교 대 이슬람이라는 세계인식의 위력을 확인시켜주며, 아프간 공격에서 나타난 미 헤게모니에 대한 일치된 승인에서 우리는 걸프전에서 보여준 미국에 대한 유럽의 위성국화가 본격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지위에 대한 전반적 승인의 분위기에서 볼 때, 이라크 제재의 비인도성과 이라크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이 제시한 근거들의 부당함에 대한 유럽국가들의 지적은 기껏해야 이 암묵적 승인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는 허울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운명과도 밀접히 연관된 9.11테러와 아프간 전쟁에 대한 아랍국들의 절대적 지지와 협조에서 우리는 6일전쟁 이후 시작된 아랍의 자주성과 저항능력 약화과정이 더욱 강화됨을 볼 수 있다.
최근 미국이 제시한 "예방전쟁" 개념, 즉 파시즘의 독일이 소련에게, 일본이 미국에게, 그것도 전쟁 중에 적용했던 것 이외에는 유례가 없는 전쟁논리도 아랍인들에게는 그리 신선하지 않다. 건국이래 지금까지 성서에서 만들어낸 초역사적 정당성과 유럽에서의 경험을 빌미로 상시적으로 국제법을 어긴 이스라엘, 이 국제법 위반을 방조하고 스스로도 인권을 내세워 분쟁지역에서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미국을 오랫동안 겪어온 이들은 새로움에 그리 예민하지 않다. 유엔결의안 등 국제법에 의존했던 것은 다름 아닌 아랍국가들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의 아랍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걸프전 당시 후세인도 국제법 준수와 합리적이고 총체적인 해결을 요구했었다. 반면에 미국은 "정의", "사명"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동원하면서 상대방의 합리적 제안은 함정, 사기라고 무시했다
= 빈 라덴과 정치적 이슬람 =
빈 라덴의 부상은 정치적 이슬람의 변화에 어떤 함의를 갖는가?
공식적, 비판적 종교세력 양자 모두 빈 라덴의 대표성과 종교적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미국과 독점언론이 이슬람세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만든 이 사우디의 억만장자는 아랍세계에 조직적 기반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던 인물이고 그 많은 돈을 팔레스타인해방운동에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대중은 그를 이슬람민중의 구세주로 생각한다. 우선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은 민중적 대안과는 거리가 먼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이 민중의 유일한 대변자로 군림해온 지난 2,30년 간의 경험에서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랍민중이 믿어왔던 이슬람 정치세력들이 지배계급과 외세 주도의 새로운 질서형성에 가담하고 이 신질서에 저항할 비종교적 비판세력은 그간 철저히 파괴된 상황에서 이제 그들은 (사실은 현 세계질서를 더욱 강화시키는데 절대적 기여를 하고 있지만) 비타협적 투쟁을 주창하는 테러세력 이외에는 안식처가 없게 된 점이다. 50개국에 퍼져있는 초국적 조직, 그러나 일국적, 대중적 토대가 없는 종말론적인 알 카에다에서 우리는 미국의 급진적 개신교 근본주의 종파들과의 유사성, 그리고 이슬람근본주의에 내재해 있던 속성의 표면화를 볼 수 있다. 미국을 근대적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비판하는 빈 라덴은 19세기 말 세속화를 비판하며 등장했다가 20세기 말 다시 부상한 미국의 근본주의 세력과 닮아있다.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정권장악 실패는 탈레반과 같은 초보수주의와 함께 알 카에다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낳았다. 희망을 갖자면 이러한 극단적 종교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이제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이슬람을 표방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최후의 지지일 수 있다.
= 새로운 걸프전이 가져올 것 =
새로운 걸프전은 제2차 걸프전과 유사한, 그러나 더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먼저 미국경제의 악화 등으로 인해 제2차 걸프전 당시보다 세계석유시장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 커진 만큼 전쟁은 이라크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우선 이라크를 보호령으로 만든 후 이라크 석유증산을 통해 세계석유시장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이 증산이 가져올 유가하락으로 미 경제를 회복시키려 할 것이다. 그 이후 이렇게 강화된 입지를 바탕으로 미국은 동맹국 사우디의 비중을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 사우디 석유에 대한 기존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사우디 정치의 변동을 시도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 "악의 축"에 포함된 또 다른 석유대국 이란도 미국의 무력개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중동지역의 전장화는 또한 이미 극단적인 길을 걷고있는 이스라엘의 폭력에 면죄부를 주어 팔레스타인 문제의 악화를 가져올 것이고 국가간, 종족간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비판여론이 심화되고 현 정권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아랍현대사의 경험을 보면 지역질서의 불안정과 사회통합의 위기는 합리적이고 장기적인 대안의 모색을 저해해 종교적·종족적 정체성을 도구화하는 세력들이 민중의 힘을 가로채 왜곡시켜왔다. 더욱이 전쟁, 즉 6일 전쟁, 이란-이라크전쟁, 레바논전쟁, 걸프전은 그 자체가 낳는 비극과 더불어 이성적인 대안모색과 정치적 발전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최소한 전쟁은 막아야하는 이유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