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의 해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사회주의 정치연합' 비판
[아래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은 [사회화와 노동] 153호이다. 이 글을 꼭 참고해 주길 바란다.]
90년대 이후 전선이 해체되었음을 부정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상반되기까지 한 여러 입장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전선 개념에 대한 이해가 차별적이라는 점을 주되게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전선의 문제를 무엇보다 (정치적) 보편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종류의 보편성은 두 가지 속성을 갖는다. 우선 누구도 그것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적어도 근대 이후,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스스로를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자로 공공연히 내세울 수 없었다. 이 점에서 보편성은 누구도 그것 외부로 함부로 나갈 수 없는 하나의 '경계'를 상징한다. 그것은 갈등을 없애지는 않지만 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조건을 형성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떤 '모호성'을 갖는다. 그것을 함부로 부정할 순 없지만 당연히 동일한 입장이나 해석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적인 분화 혹은 차별화가 진행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곧 전장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는 즉각 자유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로 나뉘고, 이들은 각각 적대적인 계급적 이해에 복무한다. 사실 이같은 모호성을 갖지 않는다면 보편성은 보편성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양자가 결합할 때에만 보편성이 존재할 수 있다. 만일 전자 없이 후자만 있다면 그것은 무원칙한 '다원주의'가 될 것이고, 후자 없이 전자만 있다면 폭력적인 '전체주의'가 될 것이다. 이상의 맥락은 전선을 사고하는 데도 정확히 동일하게 적용된다. 전선은 다원주의도 전체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상의 두 가지 극단을 지양하면서, 차별적인 입장들과 투쟁들이 조정될 수 있는 조건을 이룬다.
이렇게 볼 때 전선이란, 특히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서, 하나의 '정치적 거점'이다. 그것은 지배계급이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정당성을 피지배계급에게 부여함과 동시에, 지배계급과 구별되는(심지어 적대적인) 피지배계급의 입장과 투쟁이 숨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기회가 될 때마다 그것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 노력하며, 피지배계급은 그것을 '영속적 민주화'의 거점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현 정세는 전선의 해체, 혹은 보편성의 해체로 특징지어진다. 여기에는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는 폭력 및 불평등의 출현이라는 정황이 있다. 그 상징적 사례로 '유사-카스트'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잉여권리"를 누리면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부유한 국가의 부유한 사람들, 착취가능한 인구로 분류되어 간신히 자신의 재생산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착취불가능한 인구로 분류되어 이런저런 방식으로 소비되고 마침내 쓰레기통에 내버려지는 "일회용 인간들"의 카스트 말이다.{{) 최원,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 {사회진보연대}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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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같은 모순이 현실적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 즉 '준-자연상태'로 표상된다는 점이다. 부르주아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 그들은 현 정세를 보편성을 '포기'하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보편성의 운명은 그 어느 때보다 피지배계급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이를 계기로 지배계급으로부터 보편성을 결정적으로 탈환하여, 보다 민주화된 방식으로 보편성을 개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건은 대중들과 밀착하여 기존의 보편성 속에서는 '들리지 않던' 그/녀들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영유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배계급과 함께 보편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정치 자체의 포기로 이어지고, 다른 편으로 (이전보다 훨씬 배타화된) '정체성의 정치' 내지 명확한 대상 없는 증오에 기반한 '원한의 정치'로 이어진다. 이것이 지배계급의 권력 재생산을 사실상 돕는 것으로 이용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안타깝게도 현재 피지배계급이 보이는 대부분의 반응은 후자다. 즉 전선의 해체가 곧 새로운 기회로 작용하기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정치마저 위기에 빠뜨리고 이것이 지배계급의 욕된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명확한 평가와 극복 없이, 전선을 재건하자는 선언만을 가지고서, 전선을 재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회주의 정치연합' 구상을 평가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위 '사회주의 정치연합' 구상에 대한 비판 1 -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에 대한 몰이해를 중심으로
공투본 논의를 내외부에서 흔들어 댔고, 그것의 무산을 기화로 자신들의 입장이 정당했음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다. 대표적인 세력으로는 사회당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사회화와 노동] 153호를 통해서 이들을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글에서 밝힌 바 있듯, 문제는 사회당이라는 특정한 정치세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운동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이런 경향을 보이는 제 세력은 현재 '사회주의 정치연합' 준비모임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들이 최근 발표한 "신자유주의 분쇄 노동자민중 전선강화를 위한 전국투쟁연대" 제안서의 면면에는, 소위 '좌파' 이외의 세력 및 이들과의 연대 자체에 대한 신경질적 반응이 흐르고 있다. 현재 투쟁연대 및 사회주의 정치연합(준)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노동자 민중회의의 성명은 상징적이다: "특히 노동자의 힘과 사회진보연대 등의 통칭 좌파로 분류되는 이들 집단의 사고방식은 대립세력과의 배타적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흐름을 확대재생산하겠다는 기이한 수세적 패권주의에 다름 아니다. 보다 더 거칠게 비유하자면, 마치 남북이 배타적으로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분단구조의 활용 전술과 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 방식이 틀려먹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가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민족민주운동 내지 개량주의 운동의 상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위기란 보편적이고, 그들에게도 관통하고 있다. 이는 당장의 상태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양호하냐 와 별개로, 이전의 방식 내지는 그들 스스로 표방하는 바처럼 운동을 지속할 수 없고, 즉 기존의 노선을 가지고서는 자신들이 조직한 대중들과도 강력하게 결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그 운동들의 균열을 보다 확장시키고, 따라서 그 운동들이 재편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는 대안적인 노선이 없기 때문에 그럭저럭 갈등을 봉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당면 과제로서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을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즉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을 통해 그 운동의 균열을 확대시키고, 따라서 새로운 운동 지형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전제에는 현재 어떤 세력도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를 지연하고 관리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전략이자 이데올로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 위기'를 하나의 전제로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 위기가 도래한 지금, 현 체제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전향적인 대안은 신자유주의다. 부르주아가 말하는 "대안은 없다!"는 구호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이렇듯 가장 전향적인 대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례없는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중들의 '억압할 수 없는 최저한도'를 수시로 침해하지 않는 한 욕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지배계급 스스로 현재 위기의 깊이와 강도를 알기 때문에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이는 그들을 더욱 난폭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상처입은 이리가 더 사나운 법이다. 이로 인해 민중들은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끊임없이 내몰리고 동시에 야만적인 폭력에 노출된다. 이때 그들의 요구는 운동의 전성기에 비해 아주 소박한, 주로 생존에 관한 기본적인 요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사회주의가 아니라 말이다). 이는 아마도 자본주의의 물질적 팽창기에는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현재의 체제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여력을 대폭 상실하였다. 체제가 유지되는 한 '개량의 물적 토대'가 완전히 소멸되는 일은 없을 것이나, 그것이 심각하게 취약해진 것은 객관적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어쨌든 운동을 하는 세력이라면 누구도 반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억압할 수 없는 최저한도'를 수시로 침해당하는 대중들로부터 객관적 압박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앞서 말했듯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내재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라면,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결국 '체제의 모순을 어떻게 전화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최소한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억압된 문제로, 아무도 그에 대한 확정적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고, 따라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과정에서 이 문제는 점점 더 전면에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기존의 운동 내부에 객관적 균열을 만들 수 밖에 없고, 심지어 실천적으로 기존의 입장을 배반하는 상황으로까지 밀어 넣게 될 것이다. 이런 객관적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을 광범위하게 구축하는 가운데, 그것에 가장 적합하게 대응하기 위한 쟁점으로 '체제의 지양' 혹은 '이행'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다.
이상의 견해는 '사회주의 정치연합'을 주장하는 이들과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이들은 '반자본주의' 내지 소위 '사회주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가운데,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과 다른 실천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회당은 '사회주의 대통령 후보로 대선독자 돌파'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 정치연합으로 가기 위한 경로로 좌파 공투체로서 투쟁연대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구축에 근본적인 장애물로 작용하며, 따라서 우리 모두가 공히 제기하고 싶어하는 이행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전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한다.
요컨대 사회주의 정치연합의 가장 큰 문제는 전선 형성이 자신들의 입장(그것 자체가 적합한가와는 전혀 별개로)을 제기하는 데 호조건이 된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이해력'의 부재로 비판할 순 없다. 오히려 그들이 갖고 있는 어떤 문제틀이 적합한 인식을 제약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그 문제틀이 '당의 유령'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전선의 외부에서 당을 구성하려는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공투본 무산의 와중에서 무대를 지휘했던 '부재하는' 배우였다.
소위 '사회주의 정치연합' 구상에 대한 비판 2 - 전선 외부에서 당을 구축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해서
공투본을 반대하던 '사회주의 정치연합'의 논거는 의외로 간단하다. 즉 공투본의 성과가 결국 (민주노동)당으로 수렴될 것이며, 이는 곧 모종의 (좌파정)당 건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투본의 성과가 당으로 수렴되기보다, 오히려 당을 상대화하는 전선 형성으로 수렴될 것이라고 보았다. 더욱이 그러한 전선 형성이 당 형성에 저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덧붙여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그 전선을 가장 올바르게 이끌어가기 위한 당을 형성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즉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구축 및 그것을 급진화할 수 있는 분파의 자격으로서 '당'의 구성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회당은 일찍이 전선의 외부에서 좌파의 독자 정당을 구축할 것을 주장해 왔고, 그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었다. 그 핵심을 간추리자면, 전선의 외부에서 당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불가피하게 '정체성의 정치' 내지 심지어 '원한의 정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당이 취하는 얼마간 극단적인 행보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반정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 전선의 내부에서 누가 더 전선에 올바르게 복무할 수 있을 것인가 의 논쟁을 통해 차별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결국 나타나는 것은 실용주의와 근거없는 선명성의 대당이고, 이는 양자 모두에게 불행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노동자 민중회의에서는 평의회-계급정당 동시구축을 제기하면서, 사회당에 대해서 흔히 쏟아지는 '의회주의'라는 비판을 우회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당은 그들이 평의회 운동을 전혀 몰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할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 달리 평의회를 '조직'의 문제로 협소화시키면서, 그것이 기존의 운동에 대해 제기하는 발본적인 쟁점을 무화시킨다. 역사적으로 볼 때 평의회 운동은 항상 당-노조의 이분법에서 결정적으로 탈출함과 동시에, '이행'이라는 쟁점을 제기함으로써 양자를 공히 개조하려 노력해 왔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시에는 기존의 당-노조를 '내파'시킴으로써 그것들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새로운 운동의 조건을 창출하였다. 결코 지금처럼 '외재적'으로 대당하는 또다른 '계급정당'(혹은 '혁명적 노조')을 그 자체로 건설하는 방식을 취하진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 민중회의가 제기하는 것은 실상 혁명/개량 혹은 최대강령/최소강령의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혁명의 문제는 평의회가 담당하는 가운데, '일반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확장시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누차 지적했듯, 현재의 과제는 객관적으로 위기에 빠진 기존의 운동지형 전반을 재편하는 것이지, 기존의 판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 안에서 다수파가 될 수 있는 전술을 수립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이러한 강박의 배후에는 현실의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과대평가가 있다. 그것은 이전 식의 전위당도 아니고,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대중정당'이다. 이는 현재 대중들의 상태가 아주 직접적으로 반영된다는 의미인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반동을 용납할 수는 없지만, 이념의 해체 상황에서 '진보'라는 모호한 기치를 붙잡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 내부에 균열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상황이 그렇다면 우리의 중심 고민은 그/녀들을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 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을 구축하고 그 안에 당을 포함해 내는 가운데, 이행이라는 쟁점을 전면화시켜야 한다. 이때 계급정당이 구축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현재의 진보정당 운동과 대당하는 것이 아닌 전혀 종별적인 과정일 것이다.
이때 평의회는 유력한 화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럴려면 평의회는 조직의 문제로 협소화되지 않아야 한다(평의회-계급정당 동시구축론은 정확히 반대이다). 그것은 이행의 이념을 집약하는 상징으로, 그에 입각해서 운동 전반을 재조직하는 표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전선을 구축하는 가운데, 이 내부에서의 사상투쟁을 통해 문제의식을 확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 정치연합은 평의회 사상의 무덤이다.
요컨대 문제는 전선과 당(다른 맥락이지만 평의회)을 배타적으로 대립시키는 경향이다. 전선 구축 혹은 보편성 형성의 문제설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당이든 평의회든 그 정당성을 얻을 수 없고, 결국 '정체성의 정치'로 빠져들 뿐이다.
우리는 그 가장 비극적인 사례를, 우리와 함께 공투본을 구성했던 노힘에게서 발견한다. 공투본 무산 과정과 그 이후 나왔던 노힘의 입장을 통해 우리는, 결국 그들이 '전선'을 '(노동계급정)당'의 건설이라는 목표에 '종속'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당이라는 문제설정에 어떤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방식은 오직 전선 형성의 과정에서 스스로의 입장의 정당함을 대중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의해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전선 수립의 목표가 일차적이며 노동계급 정당의 건설은 그 과정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힘은 전선형성의 유력한 계기로서 대선전술을, 오직 현장에서의 세 확장 및 (노동계급정)당 건설의 계기로만 사고했다. 그들이 공투본 논의에서 철수한 것은 거기에 어떤 미사여구를 붙인다 하더라도, 결국 전선과 대립적으로 여겨진 자기 당의 이해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선과 대립되는 당이란, 말의 강한 의미에서 '종파'가 아닌가? 조금 완화해서 말하자면, 전선 구축에 복무하지 못하는 당이 도대체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당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무수히 많고, 전선 개념과 당 개념의 지속적 혼란은 그 '한' 측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히 한 '측면'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올바르게 해결하지 않는 한 그것은 어느 때 다시 유령처럼 출몰하여 계급투쟁과 대중운동의 진전을 가로막을지 모른다. 우리가 공투본 무산을 평가하고,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회주의 정치연합' 구상을 비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공투본은 무산되었고 그것은 향후의 대중운동에 심각한 제약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음 번에 또 제약이 되지 않게 하는 것 뿐이다. 이것을 눈 앞의 투쟁이 시급하다는 말로 억압하려 들지 말자. 도대체 앞으로의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이 무엇이었단 말인가!
90년대 이후 전선이 해체되었음을 부정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상반되기까지 한 여러 입장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전선 개념에 대한 이해가 차별적이라는 점을 주되게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전선의 문제를 무엇보다 (정치적) 보편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종류의 보편성은 두 가지 속성을 갖는다. 우선 누구도 그것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적어도 근대 이후,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스스로를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자로 공공연히 내세울 수 없었다. 이 점에서 보편성은 누구도 그것 외부로 함부로 나갈 수 없는 하나의 '경계'를 상징한다. 그것은 갈등을 없애지는 않지만 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조건을 형성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떤 '모호성'을 갖는다. 그것을 함부로 부정할 순 없지만 당연히 동일한 입장이나 해석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적인 분화 혹은 차별화가 진행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곧 전장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는 즉각 자유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로 나뉘고, 이들은 각각 적대적인 계급적 이해에 복무한다. 사실 이같은 모호성을 갖지 않는다면 보편성은 보편성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양자가 결합할 때에만 보편성이 존재할 수 있다. 만일 전자 없이 후자만 있다면 그것은 무원칙한 '다원주의'가 될 것이고, 후자 없이 전자만 있다면 폭력적인 '전체주의'가 될 것이다. 이상의 맥락은 전선을 사고하는 데도 정확히 동일하게 적용된다. 전선은 다원주의도 전체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상의 두 가지 극단을 지양하면서, 차별적인 입장들과 투쟁들이 조정될 수 있는 조건을 이룬다.
이렇게 볼 때 전선이란, 특히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서, 하나의 '정치적 거점'이다. 그것은 지배계급이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정당성을 피지배계급에게 부여함과 동시에, 지배계급과 구별되는(심지어 적대적인) 피지배계급의 입장과 투쟁이 숨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기회가 될 때마다 그것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 노력하며, 피지배계급은 그것을 '영속적 민주화'의 거점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현 정세는 전선의 해체, 혹은 보편성의 해체로 특징지어진다. 여기에는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는 폭력 및 불평등의 출현이라는 정황이 있다. 그 상징적 사례로 '유사-카스트'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잉여권리"를 누리면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부유한 국가의 부유한 사람들, 착취가능한 인구로 분류되어 간신히 자신의 재생산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착취불가능한 인구로 분류되어 이런저런 방식으로 소비되고 마침내 쓰레기통에 내버려지는 "일회용 인간들"의 카스트 말이다.{{) 최원,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 {사회진보연대}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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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같은 모순이 현실적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 즉 '준-자연상태'로 표상된다는 점이다. 부르주아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 그들은 현 정세를 보편성을 '포기'하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보편성의 운명은 그 어느 때보다 피지배계급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이를 계기로 지배계급으로부터 보편성을 결정적으로 탈환하여, 보다 민주화된 방식으로 보편성을 개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건은 대중들과 밀착하여 기존의 보편성 속에서는 '들리지 않던' 그/녀들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영유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배계급과 함께 보편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정치 자체의 포기로 이어지고, 다른 편으로 (이전보다 훨씬 배타화된) '정체성의 정치' 내지 명확한 대상 없는 증오에 기반한 '원한의 정치'로 이어진다. 이것이 지배계급의 권력 재생산을 사실상 돕는 것으로 이용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안타깝게도 현재 피지배계급이 보이는 대부분의 반응은 후자다. 즉 전선의 해체가 곧 새로운 기회로 작용하기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정치마저 위기에 빠뜨리고 이것이 지배계급의 욕된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명확한 평가와 극복 없이, 전선을 재건하자는 선언만을 가지고서, 전선을 재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회주의 정치연합' 구상을 평가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위 '사회주의 정치연합' 구상에 대한 비판 1 -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에 대한 몰이해를 중심으로
공투본 논의를 내외부에서 흔들어 댔고, 그것의 무산을 기화로 자신들의 입장이 정당했음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다. 대표적인 세력으로는 사회당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사회화와 노동] 153호를 통해서 이들을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글에서 밝힌 바 있듯, 문제는 사회당이라는 특정한 정치세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운동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이런 경향을 보이는 제 세력은 현재 '사회주의 정치연합' 준비모임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들이 최근 발표한 "신자유주의 분쇄 노동자민중 전선강화를 위한 전국투쟁연대" 제안서의 면면에는, 소위 '좌파' 이외의 세력 및 이들과의 연대 자체에 대한 신경질적 반응이 흐르고 있다. 현재 투쟁연대 및 사회주의 정치연합(준)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노동자 민중회의의 성명은 상징적이다: "특히 노동자의 힘과 사회진보연대 등의 통칭 좌파로 분류되는 이들 집단의 사고방식은 대립세력과의 배타적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흐름을 확대재생산하겠다는 기이한 수세적 패권주의에 다름 아니다. 보다 더 거칠게 비유하자면, 마치 남북이 배타적으로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분단구조의 활용 전술과 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 방식이 틀려먹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가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민족민주운동 내지 개량주의 운동의 상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위기란 보편적이고, 그들에게도 관통하고 있다. 이는 당장의 상태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양호하냐 와 별개로, 이전의 방식 내지는 그들 스스로 표방하는 바처럼 운동을 지속할 수 없고, 즉 기존의 노선을 가지고서는 자신들이 조직한 대중들과도 강력하게 결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그 운동들의 균열을 보다 확장시키고, 따라서 그 운동들이 재편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는 대안적인 노선이 없기 때문에 그럭저럭 갈등을 봉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당면 과제로서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을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즉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을 통해 그 운동의 균열을 확대시키고, 따라서 새로운 운동 지형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전제에는 현재 어떤 세력도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를 지연하고 관리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전략이자 이데올로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 위기'를 하나의 전제로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 위기가 도래한 지금, 현 체제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전향적인 대안은 신자유주의다. 부르주아가 말하는 "대안은 없다!"는 구호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이렇듯 가장 전향적인 대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례없는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중들의 '억압할 수 없는 최저한도'를 수시로 침해하지 않는 한 욕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지배계급 스스로 현재 위기의 깊이와 강도를 알기 때문에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이는 그들을 더욱 난폭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상처입은 이리가 더 사나운 법이다. 이로 인해 민중들은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끊임없이 내몰리고 동시에 야만적인 폭력에 노출된다. 이때 그들의 요구는 운동의 전성기에 비해 아주 소박한, 주로 생존에 관한 기본적인 요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사회주의가 아니라 말이다). 이는 아마도 자본주의의 물질적 팽창기에는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현재의 체제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여력을 대폭 상실하였다. 체제가 유지되는 한 '개량의 물적 토대'가 완전히 소멸되는 일은 없을 것이나, 그것이 심각하게 취약해진 것은 객관적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어쨌든 운동을 하는 세력이라면 누구도 반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억압할 수 없는 최저한도'를 수시로 침해당하는 대중들로부터 객관적 압박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앞서 말했듯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내재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라면,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결국 '체제의 모순을 어떻게 전화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최소한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억압된 문제로, 아무도 그에 대한 확정적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고, 따라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과정에서 이 문제는 점점 더 전면에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기존의 운동 내부에 객관적 균열을 만들 수 밖에 없고, 심지어 실천적으로 기존의 입장을 배반하는 상황으로까지 밀어 넣게 될 것이다. 이런 객관적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을 광범위하게 구축하는 가운데, 그것에 가장 적합하게 대응하기 위한 쟁점으로 '체제의 지양' 혹은 '이행'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다.
이상의 견해는 '사회주의 정치연합'을 주장하는 이들과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이들은 '반자본주의' 내지 소위 '사회주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가운데,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과 다른 실천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회당은 '사회주의 대통령 후보로 대선독자 돌파'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 정치연합으로 가기 위한 경로로 좌파 공투체로서 투쟁연대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구축에 근본적인 장애물로 작용하며, 따라서 우리 모두가 공히 제기하고 싶어하는 이행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전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한다.
요컨대 사회주의 정치연합의 가장 큰 문제는 전선 형성이 자신들의 입장(그것 자체가 적합한가와는 전혀 별개로)을 제기하는 데 호조건이 된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이해력'의 부재로 비판할 순 없다. 오히려 그들이 갖고 있는 어떤 문제틀이 적합한 인식을 제약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그 문제틀이 '당의 유령'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전선의 외부에서 당을 구성하려는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공투본 무산의 와중에서 무대를 지휘했던 '부재하는' 배우였다.
소위 '사회주의 정치연합' 구상에 대한 비판 2 - 전선 외부에서 당을 구축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해서
공투본을 반대하던 '사회주의 정치연합'의 논거는 의외로 간단하다. 즉 공투본의 성과가 결국 (민주노동)당으로 수렴될 것이며, 이는 곧 모종의 (좌파정)당 건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투본의 성과가 당으로 수렴되기보다, 오히려 당을 상대화하는 전선 형성으로 수렴될 것이라고 보았다. 더욱이 그러한 전선 형성이 당 형성에 저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덧붙여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그 전선을 가장 올바르게 이끌어가기 위한 당을 형성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즉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구축 및 그것을 급진화할 수 있는 분파의 자격으로서 '당'의 구성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회당은 일찍이 전선의 외부에서 좌파의 독자 정당을 구축할 것을 주장해 왔고, 그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었다. 그 핵심을 간추리자면, 전선의 외부에서 당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불가피하게 '정체성의 정치' 내지 심지어 '원한의 정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당이 취하는 얼마간 극단적인 행보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반정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 전선의 내부에서 누가 더 전선에 올바르게 복무할 수 있을 것인가 의 논쟁을 통해 차별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결국 나타나는 것은 실용주의와 근거없는 선명성의 대당이고, 이는 양자 모두에게 불행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노동자 민중회의에서는 평의회-계급정당 동시구축을 제기하면서, 사회당에 대해서 흔히 쏟아지는 '의회주의'라는 비판을 우회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당은 그들이 평의회 운동을 전혀 몰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할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 달리 평의회를 '조직'의 문제로 협소화시키면서, 그것이 기존의 운동에 대해 제기하는 발본적인 쟁점을 무화시킨다. 역사적으로 볼 때 평의회 운동은 항상 당-노조의 이분법에서 결정적으로 탈출함과 동시에, '이행'이라는 쟁점을 제기함으로써 양자를 공히 개조하려 노력해 왔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시에는 기존의 당-노조를 '내파'시킴으로써 그것들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새로운 운동의 조건을 창출하였다. 결코 지금처럼 '외재적'으로 대당하는 또다른 '계급정당'(혹은 '혁명적 노조')을 그 자체로 건설하는 방식을 취하진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 민중회의가 제기하는 것은 실상 혁명/개량 혹은 최대강령/최소강령의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혁명의 문제는 평의회가 담당하는 가운데, '일반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확장시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누차 지적했듯, 현재의 과제는 객관적으로 위기에 빠진 기존의 운동지형 전반을 재편하는 것이지, 기존의 판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 안에서 다수파가 될 수 있는 전술을 수립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이러한 강박의 배후에는 현실의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과대평가가 있다. 그것은 이전 식의 전위당도 아니고,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대중정당'이다. 이는 현재 대중들의 상태가 아주 직접적으로 반영된다는 의미인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반동을 용납할 수는 없지만, 이념의 해체 상황에서 '진보'라는 모호한 기치를 붙잡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 내부에 균열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상황이 그렇다면 우리의 중심 고민은 그/녀들을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 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을 구축하고 그 안에 당을 포함해 내는 가운데, 이행이라는 쟁점을 전면화시켜야 한다. 이때 계급정당이 구축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현재의 진보정당 운동과 대당하는 것이 아닌 전혀 종별적인 과정일 것이다.
이때 평의회는 유력한 화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럴려면 평의회는 조직의 문제로 협소화되지 않아야 한다(평의회-계급정당 동시구축론은 정확히 반대이다). 그것은 이행의 이념을 집약하는 상징으로, 그에 입각해서 운동 전반을 재조직하는 표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전선을 구축하는 가운데, 이 내부에서의 사상투쟁을 통해 문제의식을 확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 정치연합은 평의회 사상의 무덤이다.
요컨대 문제는 전선과 당(다른 맥락이지만 평의회)을 배타적으로 대립시키는 경향이다. 전선 구축 혹은 보편성 형성의 문제설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당이든 평의회든 그 정당성을 얻을 수 없고, 결국 '정체성의 정치'로 빠져들 뿐이다.
우리는 그 가장 비극적인 사례를, 우리와 함께 공투본을 구성했던 노힘에게서 발견한다. 공투본 무산 과정과 그 이후 나왔던 노힘의 입장을 통해 우리는, 결국 그들이 '전선'을 '(노동계급정)당'의 건설이라는 목표에 '종속'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당이라는 문제설정에 어떤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방식은 오직 전선 형성의 과정에서 스스로의 입장의 정당함을 대중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의해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전선 수립의 목표가 일차적이며 노동계급 정당의 건설은 그 과정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힘은 전선형성의 유력한 계기로서 대선전술을, 오직 현장에서의 세 확장 및 (노동계급정)당 건설의 계기로만 사고했다. 그들이 공투본 논의에서 철수한 것은 거기에 어떤 미사여구를 붙인다 하더라도, 결국 전선과 대립적으로 여겨진 자기 당의 이해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선과 대립되는 당이란, 말의 강한 의미에서 '종파'가 아닌가? 조금 완화해서 말하자면, 전선 구축에 복무하지 못하는 당이 도대체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당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무수히 많고, 전선 개념과 당 개념의 지속적 혼란은 그 '한' 측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히 한 '측면'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올바르게 해결하지 않는 한 그것은 어느 때 다시 유령처럼 출몰하여 계급투쟁과 대중운동의 진전을 가로막을지 모른다. 우리가 공투본 무산을 평가하고,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회주의 정치연합' 구상을 비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공투본은 무산되었고 그것은 향후의 대중운동에 심각한 제약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음 번에 또 제약이 되지 않게 하는 것 뿐이다. 이것을 눈 앞의 투쟁이 시급하다는 말로 억압하려 들지 말자. 도대체 앞으로의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이 무엇이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