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진상규명운동의 성과와 한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 칼 쥐고 총 가진 자들
싸늘한 주검 위에 찍힌 독재의 흔적이
검붉은 피로, 썩은 살로 외치는구나
더 이상 욕되이 마라
너희 멸사봉공 외치는 자들
압제의 칼바람이 거짓 역사 되어 흘러도
갈대처럼 일어서며 외치는구나
여기 한 아이 죽어 눈을 감으나
남은 이들 모두 부릅뜬 눈으로 살아
참 민주, 참 역사 향해 저 길
그 주검을 메고 함께 가는구나
- 정태춘, 「일어나라 열사여」中
1. 들어가며 -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
헌법 제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리고 국사교과서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년대∼80년대 '산업화', 90년대 '민주화', 이 모두가 찬란한 민족번영의 역사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족번영의 역사가 아니다.
1946년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 1948년 4.3항쟁, 여순 사건, 1950년 보도연맹사건, 한국전쟁 처리 과정, 1960년 4·19 혁명,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수십만의 양민들과 민주통일인사들이 경찰과 미군, '국군'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여운형, 김구 선생은 암살되었고, 조봉암 진보당 당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최백근 사회당 조직부장,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된 이수병 등 8명의 민주통일인사들은 재판 과정을 거쳐서 사법살해 되었다.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노동, 빈민 열사들이 분신하였고, 박종철, 이한열 열사들이 고문과 최루탄으로 사망하였다. 60년대, 70년대 경제개발이라는 찬란한 미명 아래 국토개발단과 광주대단지에서 수없이 많은 양민과 빈민들이 인권유린을 당하고 죽었다. 장기수 선생들은 강제전향 과정에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으며, 녹화사업, 삼청교육대에 의해서 각각 1000여명 이상의 학생들과 4만 여명 이상의 시민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많은 수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80년대에는 사인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의문사가 수십 여건 발생했고, 고문으로 피해 입은 사람들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2002년에도 검찰에서 피의자가 고문치사 당하였고, 시위자가 폭력진압으로 큰 부상을 입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계속 분신하고 있다. 국가기구에 의해서 수십만의 민중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고, 여전히 많은 민중들이 폭력 속에서 희생되는 곳, 이곳이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는 의무 아래 살아가는 것이다.
2. 의문사 유가족들의 투쟁의 역사
의문사는 여운형, 김구 선생 암살 등과 같이 1945년 이후에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국가권력에 의한 생명권 침해까지 해석의 범주를 넓히면 사법살인과 양민학살까지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공권력의 개입 가능성이 높은 의문의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의 의문사는 1970년대, 특히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이 당시 의문사한 자의 유가족들이 중심이 되어서 1988년 10월에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이라 한다) 산하 의문사 지회를 결성하였고 지금까지 지난한 투쟁을 해왔다.
의문사 유가족들은 1988년 10월 17일부터 135일 동안 기독교 회관에서 농성을 하면서 의문사 문제를 사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국회에 5공 청문회에서 의문사 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의문사 관련 청문회가 중단되었다. 또한 1990년에는 10만 명 서명을 받아서 국회에 진상조사 요구를 하였으나 이 역시 폐기되었다.
한편 유가족들은 이철규, 이내창, 박창수 열사 등 새로운 의문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 투쟁을 하였고, 이외에도 각 의문사 사건의 분석, 정리, 국가기구에 청원, 진정, 고소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서 계속 진상규명 노력을 하였으나 이 역시 김상원 열사를 제외하면 별 다른 성과가 없었다.
유가족들의 투쟁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유가협은 1998년 4월 서울역에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였고 1998년 11월부터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천막농성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하 '의문사법')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법(이하 '명예회복법')이 제정되었다. 그 이후 유가족들은 의문사법의 올바른 시행령 제정을 위해서 투쟁하였고, 마침내 2000년 10월 17일 대통령 소속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원회'라 한다)가 출범하였다.
의문사위원회에서는 이후 2002년 9월 16일까지 83건의 사건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의문사위원회에서는 63건의 사건을 기각과 진상규명불능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의문사 유가족들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권한 강화, 조사기간 연장을 주장하면서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에서 10월 10일부터 11월 14일까지 36일간 노숙농성을 하였다.
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성과와 한계
의문사위원회는 1948년 반민특위 이후 처음으로 구성된 과거청산 국가기구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의문사 유가족들의 처절한 투쟁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의문사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자체만 해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성과와 한계를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성과부터 확인해 보자. 의문사위원회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벌인 국가폭력의 진상을 일부 규명함으로써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대표적으로 5공의 관제 프락치 공작인 녹화사업, 유신정부에서 정권보위 차원으로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장기수에 대한 고문살해 사건, 삼청교육대의 진상을 상당 부분 규명하여서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반인간성을 폭로하였다. 또한 허원근 일병 사건의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군수사의 문제점과 군의문사 사건의 재조사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를 하였고, 노동자 문용섭에 대한 구사대 폭력 살인, 최종길 교수에 대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고문 살해, 한총련 투쟁국장이었던 김준배에 대한 폭행 살인들을 밝혀냄으로써 민주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의문사위원회는 김준배 사건을 밝혀내면서 국가기구로는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의 개정(폐지)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보고서를 통해서 반인륜적 범죄 또는 국가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를 정부에 권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문사위원회는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남겼지만 활동의 한계 역시 두드러졌다.
첫째, 의문사의 범위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의문사법에 따르면 의문사위원회는 민주화운동 관련성이 상당한 경우에만 의문사로 인정된다. 따라서 경찰이나 정보기관으로부터 아무리 심하게 고문을 당하소 살해당한 사건이라 해도 민주화관련성이 없으면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즉, 국가폭력에 의한 생명권유린의 진상을 규명하여서 과거청산을 하겠다는 애초의 취지가 민주화운동 관련성이라는 '문구'로 심하게 퇴색해 버린 것이다. 또한 의문사법에서 준용하고 있는 명예회복법 민주화운동 정의를 보면 민주화운동을 1969년 삼선개헌 이후의 행위로 국한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해서 의문사위원회의 조사대상 사건은 1969년 이후에 발생한 사건으로 국한되었다.
둘째, 의문사위원회에는 수사권이 없고 그 결과 국정원, 기무사 등 관련기관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넘지 못했다. 현재 임의수사에 해당하는 출석요구, 출석요구 거부자에 대한 동행명령, 진술청취, 자료제출 요구, 실지조사 정도만 의문사위원회가 취할 수 있는 조사의 권한이다. 그러나 참고인이나 특정 기관이 동행명령, 실지조사, 자료제출을 거부하거나 허위 자료를 제출하여도 과태료 1,000만원을 부과하는 것말고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그러므로 돈만 있으면 모두가 의문사위원회의 조사를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검사들과 전직 대통령들은 의문사위원회의 동행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국정원과 기무사에서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요구하는 자료 중에서 일부만 회신하였고, 자료 존안 여부를 투명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자료실 열람을 요청하여도 1∼2사건을 제외하고 모두 거절하였다. 당시 기관 근무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하려고 하여도 아예 회신을 하지 않거나 자체적으로 범위를 최소화해서 회신하였고, 실지조사를 요구하여도 모두 거절하였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1991년에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다가 안양병원에서 의문사한 박창수 사건의 경우 당시 의문사위원회에서 안기부 부산지부 직원 A씨에 대한 국정원의 감찰 기록 제출을 계속 요청하였으나 국정원에서는 관련 자료가 없다고 반복 회신하였다. 이에 의문사위원회에서 A씨를 조사한 결과 국정원에서 세 차례에 걸쳐서 감찰조사를 받았다는 진술을 얻었고 이에 의문사위원회에서 다시 국정원에 자료 요청을 하자 가장 최근의 감찰 자료 1건만 조사종료 이틀 전인 9월 14일에 의문사위원회에 회신하였다. 또한 1989년에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 편집장으로 근무하다가 광주 청옥동 소재 4수원지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 이철규 사건의 경우 의문사위원회에서 당시 안기부 광주지부 직원의 인적사항을 몇 차례 요청했으나 국정원에서는 '국정원이 이철규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내용만 회신하였다. 그러다가 조사 종료 3개월 가량 이전에 단 1명 B씨의 인적사항만 회신하였다. 그리고 의문사위원회에서 B씨를 조사한 결과 안기부에서 간첩단 사건 관련해서 이철규 배후 수사를 했을 가능성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국정원에서는 그 이후 의문사위원회의 인적사항 요청에 대해서 일체 자료를 회신하지 않았다. 이것들은 국정원의 비협조 사례 중 일부에 불과하다. 또한 기무사에서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실지조사를 요구했을 때 '하늘이 무너져도', '대통령이 와도' '들여보낼 수 없다'는 식으로 오만함의 극치를 보인 일도 있다.
}}. 의문사 사건은 일반 변사사건과 다르게 자료의 확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관련 기관에서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다면 많은 사건들의 진상규명이 한계에 부딪힌다{{) 의문사 사건은 짧게는 5년 이전, 보통은 10∼20년 이전, 길게는 30년 이전에 발생한 사건으로 조사의 출발점인 변사현장이나 사체, 유류품 등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변사자료, 부검사진 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건도 여러 건 있다. 따라서 경찰, 국정원, 기무사, 국방부, 검찰에서 보관하고 있는 정보보고, 내사자료, 수사자료의 확보가 의문사진상규명에 있어서 관건이다.
}}. 아울러 의문사 사건의 경우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이 사건 발생, 사후 조작, 은폐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의문사위원회에 수사권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방식으로는 현재 의문사위원회의 위원이 특별검사로 임명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셋째, 피진정인으로 의문사위원회에 출석한 과거(또는 현직) 수사기관, 정보기관 직원들이 허위진술을 하여도 의문사위원회에서는 처벌할 수 없다. 의문사 사건은 앞서 기술한 것처럼 발생 시간이 오래 지난 관계로 자료가 극히 부족하다. 피진정인들은 위원회의 이런 미약한 법적 권한을 이용하여 허위 진술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부천 '수영기계'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시흥역에서 사망한 박태순 사건(실종사건으로 의문사위원회에서 사체를 발견)의 경우 박태순이 사망하는 장면을 목격한 기무사 핵심 참고인 C씨가 시종일관 진술을 번복하였다. 허위 진술을 계속하다가 의문사위원회에서 기무사 자료를 일부 확보하여서 근거를 제시하면 다시 진술을 번복하였던 것이다. 또한 장석구 사건(인혁당 사건)의 경우 1974년 사건 당시 조사를 받았던 피해자들 다수가 고문을 가했던 특정인 이름을 정확하게 지목하고 당시 구체적 상황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당시 고문 장면 목격 경찰의 진술 역시 존재하는데도 주요 고문수사관으로 실명이 거론된 경찰들과 중정 수사관은 극구 고문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 의문사 사건은 증거가 보존되지 않았으며 자료가 대부분 폐기되었고 관련 참고인이 다수 사망한 관계로 검찰에서 수사하는 사건보다 훨씬 진상을 규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형사소송법에 근거해서 검찰이나 경찰처럼 허위진술 처벌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현재 검찰에서도 피의자 고문치사 사건 이후 인권보호 차원에서 허위진술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기존의 법체계는 정의로운 국가, 정부, 경찰, 검찰을 전제로 하고 제정된 것이지만 의문사 사건은 이미 전제가 무너진 사건이라는 것이 반드시 확인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허위 진술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도입되어야 하며, 그러한 방향으로 현재 국회에서 적용되는 청문회가 의문사위원회에도 도입되어야 한다{{) 「국회에서의 증언, 감정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참고인이 출석을 거부하거나 청문회에서 선거를 거부하는 경우, 그리고 허위 진술을 하는 경우 형사처벌을 하게 되어 있다.
}}.
넷째,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할 수 없다. 의문사 사건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났다. 따라서 조사 결과 범죄사실이 확인되어도 처벌이 불가능하다. 기소를 하고 처벌을 할 수 있어야 정의가 바로 설 수 있으며, 처벌이 가능할 때에만 양심선언자들을 사면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제법이나 독일, 프랑스의 경우와 같이 의문사 사건을 비롯한 반인륜적 범죄 또는 국가폭력에 의한 범죄의 경우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공소시효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조사 기간이 턱없이 짧다. 지난 9월 26일, 대구 와룡산에서 개구리 소년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현재 43명의 수사전담반이 수사를 하고 있다. 물론 전문인력까지 포함하면 수사참여 인력이 100명을 훨씬 넘는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에서 조사하는 사건들과 유사성이 있다. 자·타살 여부(법의학 감정 결과 발표 이전), 범행 동기, 용의자{{) 의문사 사건의 경우 용의기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 불분명하고 사회적 관심사가 높으며, 사건 발생 시점이 11년 전이라는 것들을 고려해 보면 의문사위원회는 그동안 개구리 소년과 같은 사건을 83건이나 조사한 셈이다. 그런데 개구리 소년 사건은 유골이 발견되고 본격적으로 수사를 진행한지 2개월이 지나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다. 무려 43명이나 되는 수사인력이 동원되었는데도! 의문사 사건처럼 조사관 2명이 조사했다고 가정하면 경찰은 벌써 40개월을 소비하고도 사건 하나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기관이 되는 것이다. 물론 경찰을 탓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의문사 사건 해결에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지난 22개월 동안 의문사위원회에서는 한 명의 조사관이 평균 2∼3건의 의문사 사건을 조사하였고, 어떤 민간 조사관들의 경우 책임감과 사건에 대한 열정이 높다 보니 6∼7건의 사건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33건이 불능으로 결정되고 30건의 사건이 기각으로 결정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2인 1조로 하나의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면, 현재 개정된 1년 연장 법안으로 63건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다시 한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의문사진상규명을 하려면 조사기간을 4∼5년 연장하던가 아니면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조사기간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 국회에서는 이런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법적 한계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 몇 가지 살펴보았다. 즉, 법적 한계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민간 조사관들의 자질이나 파견 조사관들의 의문사법에 대한 이해와 열정, 조사 지휘와 사건 평가·점검 및 조사지원 체계, 조직의 민주적 운영, 국민참여사업 및 언론사업 등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상술을 피하도록 하겠다.
4. 의문사진상규명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앞에서 간략하게 의문사진상규명운동 과정에서 유가족들이 어떻게 투쟁해 왔고, 의문사위원회의 22개월 동안의 활동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지난 3년 여 시간 동안 각 급의 계급대중조직, 민주사회단체, 진보정당 등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에서 의문사진상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에는 51개 단체가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이중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와 유가협 산하 의문사 유가족들이 주도적으로 결합하였고, 민주노총에서 노동사건을 중심으로 위원회 외부에서 지원을 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조직의 활동은 미약했다. 여기에는 각 조직별 내부 상황 문제도 있을 것이고 의문사진상규명운동, 크게 봐서는 과거청산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중 후자의 문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은 과거청산운동이다. 과거청산운동의 범위는 의문사 사건 이외에도 앞에서 다루었던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 일반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 모두 포함된다. 그렇다면 과거청산운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과거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규명하고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하며, 유족들에게 국가의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재심을 통해서 무죄임이 확인되어야 한다. 즉, 기본적인 진상규명과 국가적 진실 인정, 피해자 구제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이다. 정부기관과 군, 경에 의한 무고한 양민학살과 정권보위를 위한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의 역사를 국가가 기억하고 교과서에 수록하여서 후세에 끊임없이 교육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당성이 허울좋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 모두가 인정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민초들의 저항의 역사를 복권시킴으로서 이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이 민중들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을 4,800만 동시대인의 뇌리에 정확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법령과 사회제도, 사회관행을 개선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사회보호법 따위의 악법을 철폐하고 수사기관의 고문관행을 종식시키는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필자는 여기에 보다 정세적으로 과거청산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을 더하고 싶다.
첫 번째, 한국사회에서 과거청산 문제는 중요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과제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국민들 다수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신화를 인정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버스에서 만나는 장년, 노년층의 국민들은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가 더 살기 좋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이승만 '박사'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박근혜, 김종필은 이러한 '국민정서' 아래에서 계속 생명력을 유지했고 보수세력은 이러한 정서를 계속 활용하면서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말 비참한 '민주공화국'이다. 과거청산운동은 이러한 관념, 즉 현재의 한국사회가 구성된 조건에 대한 문제제기다. 필자는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체계적으로 폭로하고 여러 경험 속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된 민중의 의식과 관념을 변화시키는 것이 정치활동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저항주체의 형성은 결코 단일한 정치활동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와 경험에 대한 체계적인 폭로가 분명한 정치활동의 과제라면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은 더 이상 과거청산운동에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일례로 의문사위원회에서 발표한 사건 중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검토해 보자. 유신헌법은 반민주 악법이며 유신체제는 박정희로 국가시스템이 집중되는 극단적인 독재체제다. 그러나 국민들은 유신 이전의 박정희를 기억할 뿐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유신정부에서 정권보위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이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접한 국민들은 놀라움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박정희에 대해서 '조국근대화의 아버지'와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라는 두 개의 이미지가 부딪히게 된다. 공식화된 폭로의 효과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은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사실을 더욱 체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두 번째, 과거청산운동은 신자유주의 사회에 만연한 국가폭력을 비판하고 보수화된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계기임이 분명하다. 한국사회에서 폭력과 학살의 역사는 신자유주의의 이름 아래 반복되고 있다. 금융화된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기간산업의 사유화, 대량 실업 사회, 비정규직화된 노동구조, 노동기본권의 후퇴 등 IMF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민중이 참을 수 있는 최저한도를 계속 침범하고 있다. 그만큼 민중의 저항은 필연적이고 이를 막으려는 국가폭력도 필연적이다. 2001년 대우 자동차 노조원에 대한 폭력진압, 올해 여중생 살해에 분노하는 시민들에 대한 폭력진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 미군의 니노와 워커에 대한 무죄판결과 여기에 뒤이은 심상명 법무부 장관의 '미군 재판이 공정했다'는 발언을 보더라도 신자유주의의 대부 미국에 철저히 종속된 한국사회에서 제국주의와 이를 옹호하는 국가폭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원인과 형태는 과거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국가폭력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폭력과 학살의 과거를 청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아래 자행되는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편 과거청산이라는 과제는 필연적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모순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70∼8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보수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민주당류의 '개혁주의' 세력과 집권중심의 진보정당운동은 타협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만큼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애매하게 절충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외국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 등 남미에서는 군사정권 시기를 종식하고 민간정부가 들어서도 정부가 군부와 타협하여서 군부의 학살에 의한 실종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철저하게 하지 않고 있다. 특히 책임자들은 공무를 수행하였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있다.
}}. 그리고 국정원, 기무사, 검찰, 경찰, 국방부 등의 권력기관은 과거청산 운동을 방해하고 있고 이러한 권력기관을 필요로 하는 정부는 과거청산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철저한 과거청산은 생산공간과 생활공간에서 민중들이 전선을 형성하고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낼 때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조건 속에서 과거청산운동은 단순히 과거를 '청산'하는 운동이 아니라 현재의 한국사회 모순을 분명히 드러내는 운동인 것이다.
5. 통합적인 과거청산운동의 전망
현재 의문사위원회는 1년의 생명을 수혈 받았다. 하지만 수사권과 기소권 등 법적 권한은 극히 미약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정치권도 철저한 진상규명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의문사유가족들이 한나라당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동안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의문사위원회에 특별검사제도와 청문회 제도 도입을 비롯한 여러 개혁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민주당 국회의원들 역시 의문사법 개정을 당론으로 정하기는 하였으나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의문사법을 통과시킬 때는 정작 참여도 하지 않았다.
}}. 이런 가운데 이회창이나 노무현 어느 쪽이 당선되더라도 2기 의문사위원회에서 분명한 성과를 낳을 것이라는 보장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과거의 국가폭력을 진상규명하고자 하는 운동이 새로운 출발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후 1년 동안 운동주체들은 보다 확실한 경험과 인식을 얻게 될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현재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처벌을 요구하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군의문사 가족들은 군의문사 진상규명과 군 폭력 근절을 위한 가족협의회를 구성해서 활동하고 있고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은 삼청교육대 인권운동연합을 구성해서 진상규명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 고문의 피해자들이 속속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이 새로운 실험이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구체적인 운동의 흐름들과 결합해서 그동안의 성과를 보다 확장시켜야 한다. 즉, 해방 이후 자행된 국가폭력에 대한 통합적인 과거청산 운동을 차분히 준비할 시점이다. 현재의 의문사진상규명운동과 이후 통합적인 과거청산 운동의 준비 과정에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 국가폭력의 처절한 피해자들이 올바르게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의 국가폭력의 적극적 반대자로 나설 수 있도록 지지·엄호해야 한다. PSSP
너희 칼 쥐고 총 가진 자들
싸늘한 주검 위에 찍힌 독재의 흔적이
검붉은 피로, 썩은 살로 외치는구나
더 이상 욕되이 마라
너희 멸사봉공 외치는 자들
압제의 칼바람이 거짓 역사 되어 흘러도
갈대처럼 일어서며 외치는구나
여기 한 아이 죽어 눈을 감으나
남은 이들 모두 부릅뜬 눈으로 살아
참 민주, 참 역사 향해 저 길
그 주검을 메고 함께 가는구나
- 정태춘, 「일어나라 열사여」中
1. 들어가며 -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
헌법 제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리고 국사교과서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년대∼80년대 '산업화', 90년대 '민주화', 이 모두가 찬란한 민족번영의 역사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족번영의 역사가 아니다.
1946년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 1948년 4.3항쟁, 여순 사건, 1950년 보도연맹사건, 한국전쟁 처리 과정, 1960년 4·19 혁명,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수십만의 양민들과 민주통일인사들이 경찰과 미군, '국군'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여운형, 김구 선생은 암살되었고, 조봉암 진보당 당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최백근 사회당 조직부장,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된 이수병 등 8명의 민주통일인사들은 재판 과정을 거쳐서 사법살해 되었다.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노동, 빈민 열사들이 분신하였고, 박종철, 이한열 열사들이 고문과 최루탄으로 사망하였다. 60년대, 70년대 경제개발이라는 찬란한 미명 아래 국토개발단과 광주대단지에서 수없이 많은 양민과 빈민들이 인권유린을 당하고 죽었다. 장기수 선생들은 강제전향 과정에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으며, 녹화사업, 삼청교육대에 의해서 각각 1000여명 이상의 학생들과 4만 여명 이상의 시민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많은 수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80년대에는 사인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의문사가 수십 여건 발생했고, 고문으로 피해 입은 사람들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2002년에도 검찰에서 피의자가 고문치사 당하였고, 시위자가 폭력진압으로 큰 부상을 입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계속 분신하고 있다. 국가기구에 의해서 수십만의 민중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고, 여전히 많은 민중들이 폭력 속에서 희생되는 곳, 이곳이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는 의무 아래 살아가는 것이다.
2. 의문사 유가족들의 투쟁의 역사
의문사는 여운형, 김구 선생 암살 등과 같이 1945년 이후에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국가권력에 의한 생명권 침해까지 해석의 범주를 넓히면 사법살인과 양민학살까지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공권력의 개입 가능성이 높은 의문의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의 의문사는 1970년대, 특히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이 당시 의문사한 자의 유가족들이 중심이 되어서 1988년 10월에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이라 한다) 산하 의문사 지회를 결성하였고 지금까지 지난한 투쟁을 해왔다.
의문사 유가족들은 1988년 10월 17일부터 135일 동안 기독교 회관에서 농성을 하면서 의문사 문제를 사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국회에 5공 청문회에서 의문사 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의문사 관련 청문회가 중단되었다. 또한 1990년에는 10만 명 서명을 받아서 국회에 진상조사 요구를 하였으나 이 역시 폐기되었다.
한편 유가족들은 이철규, 이내창, 박창수 열사 등 새로운 의문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 투쟁을 하였고, 이외에도 각 의문사 사건의 분석, 정리, 국가기구에 청원, 진정, 고소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서 계속 진상규명 노력을 하였으나 이 역시 김상원 열사를 제외하면 별 다른 성과가 없었다.
유가족들의 투쟁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유가협은 1998년 4월 서울역에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였고 1998년 11월부터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천막농성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하 '의문사법')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법(이하 '명예회복법')이 제정되었다. 그 이후 유가족들은 의문사법의 올바른 시행령 제정을 위해서 투쟁하였고, 마침내 2000년 10월 17일 대통령 소속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원회'라 한다)가 출범하였다.
의문사위원회에서는 이후 2002년 9월 16일까지 83건의 사건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의문사위원회에서는 63건의 사건을 기각과 진상규명불능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의문사 유가족들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권한 강화, 조사기간 연장을 주장하면서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에서 10월 10일부터 11월 14일까지 36일간 노숙농성을 하였다.
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성과와 한계
의문사위원회는 1948년 반민특위 이후 처음으로 구성된 과거청산 국가기구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의문사 유가족들의 처절한 투쟁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의문사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자체만 해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성과와 한계를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성과부터 확인해 보자. 의문사위원회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벌인 국가폭력의 진상을 일부 규명함으로써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대표적으로 5공의 관제 프락치 공작인 녹화사업, 유신정부에서 정권보위 차원으로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장기수에 대한 고문살해 사건, 삼청교육대의 진상을 상당 부분 규명하여서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반인간성을 폭로하였다. 또한 허원근 일병 사건의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군수사의 문제점과 군의문사 사건의 재조사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를 하였고, 노동자 문용섭에 대한 구사대 폭력 살인, 최종길 교수에 대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고문 살해, 한총련 투쟁국장이었던 김준배에 대한 폭행 살인들을 밝혀냄으로써 민주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의문사위원회는 김준배 사건을 밝혀내면서 국가기구로는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의 개정(폐지)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보고서를 통해서 반인륜적 범죄 또는 국가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를 정부에 권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문사위원회는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남겼지만 활동의 한계 역시 두드러졌다.
첫째, 의문사의 범위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의문사법에 따르면 의문사위원회는 민주화운동 관련성이 상당한 경우에만 의문사로 인정된다. 따라서 경찰이나 정보기관으로부터 아무리 심하게 고문을 당하소 살해당한 사건이라 해도 민주화관련성이 없으면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즉, 국가폭력에 의한 생명권유린의 진상을 규명하여서 과거청산을 하겠다는 애초의 취지가 민주화운동 관련성이라는 '문구'로 심하게 퇴색해 버린 것이다. 또한 의문사법에서 준용하고 있는 명예회복법 민주화운동 정의를 보면 민주화운동을 1969년 삼선개헌 이후의 행위로 국한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해서 의문사위원회의 조사대상 사건은 1969년 이후에 발생한 사건으로 국한되었다.
둘째, 의문사위원회에는 수사권이 없고 그 결과 국정원, 기무사 등 관련기관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넘지 못했다. 현재 임의수사에 해당하는 출석요구, 출석요구 거부자에 대한 동행명령, 진술청취, 자료제출 요구, 실지조사 정도만 의문사위원회가 취할 수 있는 조사의 권한이다. 그러나 참고인이나 특정 기관이 동행명령, 실지조사, 자료제출을 거부하거나 허위 자료를 제출하여도 과태료 1,000만원을 부과하는 것말고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그러므로 돈만 있으면 모두가 의문사위원회의 조사를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검사들과 전직 대통령들은 의문사위원회의 동행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국정원과 기무사에서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요구하는 자료 중에서 일부만 회신하였고, 자료 존안 여부를 투명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자료실 열람을 요청하여도 1∼2사건을 제외하고 모두 거절하였다. 당시 기관 근무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하려고 하여도 아예 회신을 하지 않거나 자체적으로 범위를 최소화해서 회신하였고, 실지조사를 요구하여도 모두 거절하였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1991년에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다가 안양병원에서 의문사한 박창수 사건의 경우 당시 의문사위원회에서 안기부 부산지부 직원 A씨에 대한 국정원의 감찰 기록 제출을 계속 요청하였으나 국정원에서는 관련 자료가 없다고 반복 회신하였다. 이에 의문사위원회에서 A씨를 조사한 결과 국정원에서 세 차례에 걸쳐서 감찰조사를 받았다는 진술을 얻었고 이에 의문사위원회에서 다시 국정원에 자료 요청을 하자 가장 최근의 감찰 자료 1건만 조사종료 이틀 전인 9월 14일에 의문사위원회에 회신하였다. 또한 1989년에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 편집장으로 근무하다가 광주 청옥동 소재 4수원지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 이철규 사건의 경우 의문사위원회에서 당시 안기부 광주지부 직원의 인적사항을 몇 차례 요청했으나 국정원에서는 '국정원이 이철규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내용만 회신하였다. 그러다가 조사 종료 3개월 가량 이전에 단 1명 B씨의 인적사항만 회신하였다. 그리고 의문사위원회에서 B씨를 조사한 결과 안기부에서 간첩단 사건 관련해서 이철규 배후 수사를 했을 가능성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국정원에서는 그 이후 의문사위원회의 인적사항 요청에 대해서 일체 자료를 회신하지 않았다. 이것들은 국정원의 비협조 사례 중 일부에 불과하다. 또한 기무사에서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실지조사를 요구했을 때 '하늘이 무너져도', '대통령이 와도' '들여보낼 수 없다'는 식으로 오만함의 극치를 보인 일도 있다.
}}. 의문사 사건은 일반 변사사건과 다르게 자료의 확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관련 기관에서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다면 많은 사건들의 진상규명이 한계에 부딪힌다{{) 의문사 사건은 짧게는 5년 이전, 보통은 10∼20년 이전, 길게는 30년 이전에 발생한 사건으로 조사의 출발점인 변사현장이나 사체, 유류품 등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변사자료, 부검사진 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건도 여러 건 있다. 따라서 경찰, 국정원, 기무사, 국방부, 검찰에서 보관하고 있는 정보보고, 내사자료, 수사자료의 확보가 의문사진상규명에 있어서 관건이다.
}}. 아울러 의문사 사건의 경우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이 사건 발생, 사후 조작, 은폐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의문사위원회에 수사권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방식으로는 현재 의문사위원회의 위원이 특별검사로 임명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셋째, 피진정인으로 의문사위원회에 출석한 과거(또는 현직) 수사기관, 정보기관 직원들이 허위진술을 하여도 의문사위원회에서는 처벌할 수 없다. 의문사 사건은 앞서 기술한 것처럼 발생 시간이 오래 지난 관계로 자료가 극히 부족하다. 피진정인들은 위원회의 이런 미약한 법적 권한을 이용하여 허위 진술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부천 '수영기계'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시흥역에서 사망한 박태순 사건(실종사건으로 의문사위원회에서 사체를 발견)의 경우 박태순이 사망하는 장면을 목격한 기무사 핵심 참고인 C씨가 시종일관 진술을 번복하였다. 허위 진술을 계속하다가 의문사위원회에서 기무사 자료를 일부 확보하여서 근거를 제시하면 다시 진술을 번복하였던 것이다. 또한 장석구 사건(인혁당 사건)의 경우 1974년 사건 당시 조사를 받았던 피해자들 다수가 고문을 가했던 특정인 이름을 정확하게 지목하고 당시 구체적 상황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당시 고문 장면 목격 경찰의 진술 역시 존재하는데도 주요 고문수사관으로 실명이 거론된 경찰들과 중정 수사관은 극구 고문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 의문사 사건은 증거가 보존되지 않았으며 자료가 대부분 폐기되었고 관련 참고인이 다수 사망한 관계로 검찰에서 수사하는 사건보다 훨씬 진상을 규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형사소송법에 근거해서 검찰이나 경찰처럼 허위진술 처벌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현재 검찰에서도 피의자 고문치사 사건 이후 인권보호 차원에서 허위진술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기존의 법체계는 정의로운 국가, 정부, 경찰, 검찰을 전제로 하고 제정된 것이지만 의문사 사건은 이미 전제가 무너진 사건이라는 것이 반드시 확인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허위 진술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도입되어야 하며, 그러한 방향으로 현재 국회에서 적용되는 청문회가 의문사위원회에도 도입되어야 한다{{) 「국회에서의 증언, 감정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참고인이 출석을 거부하거나 청문회에서 선거를 거부하는 경우, 그리고 허위 진술을 하는 경우 형사처벌을 하게 되어 있다.
}}.
넷째,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할 수 없다. 의문사 사건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났다. 따라서 조사 결과 범죄사실이 확인되어도 처벌이 불가능하다. 기소를 하고 처벌을 할 수 있어야 정의가 바로 설 수 있으며, 처벌이 가능할 때에만 양심선언자들을 사면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제법이나 독일, 프랑스의 경우와 같이 의문사 사건을 비롯한 반인륜적 범죄 또는 국가폭력에 의한 범죄의 경우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공소시효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조사 기간이 턱없이 짧다. 지난 9월 26일, 대구 와룡산에서 개구리 소년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현재 43명의 수사전담반이 수사를 하고 있다. 물론 전문인력까지 포함하면 수사참여 인력이 100명을 훨씬 넘는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에서 조사하는 사건들과 유사성이 있다. 자·타살 여부(법의학 감정 결과 발표 이전), 범행 동기, 용의자{{) 의문사 사건의 경우 용의기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 불분명하고 사회적 관심사가 높으며, 사건 발생 시점이 11년 전이라는 것들을 고려해 보면 의문사위원회는 그동안 개구리 소년과 같은 사건을 83건이나 조사한 셈이다. 그런데 개구리 소년 사건은 유골이 발견되고 본격적으로 수사를 진행한지 2개월이 지나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다. 무려 43명이나 되는 수사인력이 동원되었는데도! 의문사 사건처럼 조사관 2명이 조사했다고 가정하면 경찰은 벌써 40개월을 소비하고도 사건 하나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기관이 되는 것이다. 물론 경찰을 탓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의문사 사건 해결에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지난 22개월 동안 의문사위원회에서는 한 명의 조사관이 평균 2∼3건의 의문사 사건을 조사하였고, 어떤 민간 조사관들의 경우 책임감과 사건에 대한 열정이 높다 보니 6∼7건의 사건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33건이 불능으로 결정되고 30건의 사건이 기각으로 결정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2인 1조로 하나의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면, 현재 개정된 1년 연장 법안으로 63건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다시 한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의문사진상규명을 하려면 조사기간을 4∼5년 연장하던가 아니면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조사기간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 국회에서는 이런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법적 한계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 몇 가지 살펴보았다. 즉, 법적 한계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민간 조사관들의 자질이나 파견 조사관들의 의문사법에 대한 이해와 열정, 조사 지휘와 사건 평가·점검 및 조사지원 체계, 조직의 민주적 운영, 국민참여사업 및 언론사업 등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상술을 피하도록 하겠다.
4. 의문사진상규명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앞에서 간략하게 의문사진상규명운동 과정에서 유가족들이 어떻게 투쟁해 왔고, 의문사위원회의 22개월 동안의 활동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지난 3년 여 시간 동안 각 급의 계급대중조직, 민주사회단체, 진보정당 등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에서 의문사진상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에는 51개 단체가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이중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와 유가협 산하 의문사 유가족들이 주도적으로 결합하였고, 민주노총에서 노동사건을 중심으로 위원회 외부에서 지원을 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조직의 활동은 미약했다. 여기에는 각 조직별 내부 상황 문제도 있을 것이고 의문사진상규명운동, 크게 봐서는 과거청산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중 후자의 문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은 과거청산운동이다. 과거청산운동의 범위는 의문사 사건 이외에도 앞에서 다루었던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 일반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 모두 포함된다. 그렇다면 과거청산운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과거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규명하고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하며, 유족들에게 국가의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재심을 통해서 무죄임이 확인되어야 한다. 즉, 기본적인 진상규명과 국가적 진실 인정, 피해자 구제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이다. 정부기관과 군, 경에 의한 무고한 양민학살과 정권보위를 위한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의 역사를 국가가 기억하고 교과서에 수록하여서 후세에 끊임없이 교육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당성이 허울좋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 모두가 인정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민초들의 저항의 역사를 복권시킴으로서 이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이 민중들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을 4,800만 동시대인의 뇌리에 정확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법령과 사회제도, 사회관행을 개선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사회보호법 따위의 악법을 철폐하고 수사기관의 고문관행을 종식시키는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필자는 여기에 보다 정세적으로 과거청산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을 더하고 싶다.
첫 번째, 한국사회에서 과거청산 문제는 중요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과제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국민들 다수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신화를 인정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버스에서 만나는 장년, 노년층의 국민들은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가 더 살기 좋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이승만 '박사'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박근혜, 김종필은 이러한 '국민정서' 아래에서 계속 생명력을 유지했고 보수세력은 이러한 정서를 계속 활용하면서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말 비참한 '민주공화국'이다. 과거청산운동은 이러한 관념, 즉 현재의 한국사회가 구성된 조건에 대한 문제제기다. 필자는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체계적으로 폭로하고 여러 경험 속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된 민중의 의식과 관념을 변화시키는 것이 정치활동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저항주체의 형성은 결코 단일한 정치활동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와 경험에 대한 체계적인 폭로가 분명한 정치활동의 과제라면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은 더 이상 과거청산운동에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일례로 의문사위원회에서 발표한 사건 중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검토해 보자. 유신헌법은 반민주 악법이며 유신체제는 박정희로 국가시스템이 집중되는 극단적인 독재체제다. 그러나 국민들은 유신 이전의 박정희를 기억할 뿐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유신정부에서 정권보위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이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접한 국민들은 놀라움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박정희에 대해서 '조국근대화의 아버지'와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라는 두 개의 이미지가 부딪히게 된다. 공식화된 폭로의 효과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은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사실을 더욱 체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두 번째, 과거청산운동은 신자유주의 사회에 만연한 국가폭력을 비판하고 보수화된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계기임이 분명하다. 한국사회에서 폭력과 학살의 역사는 신자유주의의 이름 아래 반복되고 있다. 금융화된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기간산업의 사유화, 대량 실업 사회, 비정규직화된 노동구조, 노동기본권의 후퇴 등 IMF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민중이 참을 수 있는 최저한도를 계속 침범하고 있다. 그만큼 민중의 저항은 필연적이고 이를 막으려는 국가폭력도 필연적이다. 2001년 대우 자동차 노조원에 대한 폭력진압, 올해 여중생 살해에 분노하는 시민들에 대한 폭력진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 미군의 니노와 워커에 대한 무죄판결과 여기에 뒤이은 심상명 법무부 장관의 '미군 재판이 공정했다'는 발언을 보더라도 신자유주의의 대부 미국에 철저히 종속된 한국사회에서 제국주의와 이를 옹호하는 국가폭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원인과 형태는 과거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국가폭력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폭력과 학살의 과거를 청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아래 자행되는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편 과거청산이라는 과제는 필연적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모순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70∼8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보수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민주당류의 '개혁주의' 세력과 집권중심의 진보정당운동은 타협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만큼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애매하게 절충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외국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 등 남미에서는 군사정권 시기를 종식하고 민간정부가 들어서도 정부가 군부와 타협하여서 군부의 학살에 의한 실종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철저하게 하지 않고 있다. 특히 책임자들은 공무를 수행하였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있다.
}}. 그리고 국정원, 기무사, 검찰, 경찰, 국방부 등의 권력기관은 과거청산 운동을 방해하고 있고 이러한 권력기관을 필요로 하는 정부는 과거청산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철저한 과거청산은 생산공간과 생활공간에서 민중들이 전선을 형성하고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낼 때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조건 속에서 과거청산운동은 단순히 과거를 '청산'하는 운동이 아니라 현재의 한국사회 모순을 분명히 드러내는 운동인 것이다.
5. 통합적인 과거청산운동의 전망
현재 의문사위원회는 1년의 생명을 수혈 받았다. 하지만 수사권과 기소권 등 법적 권한은 극히 미약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정치권도 철저한 진상규명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의문사유가족들이 한나라당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동안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의문사위원회에 특별검사제도와 청문회 제도 도입을 비롯한 여러 개혁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민주당 국회의원들 역시 의문사법 개정을 당론으로 정하기는 하였으나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의문사법을 통과시킬 때는 정작 참여도 하지 않았다.
}}. 이런 가운데 이회창이나 노무현 어느 쪽이 당선되더라도 2기 의문사위원회에서 분명한 성과를 낳을 것이라는 보장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과거의 국가폭력을 진상규명하고자 하는 운동이 새로운 출발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후 1년 동안 운동주체들은 보다 확실한 경험과 인식을 얻게 될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현재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처벌을 요구하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군의문사 가족들은 군의문사 진상규명과 군 폭력 근절을 위한 가족협의회를 구성해서 활동하고 있고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은 삼청교육대 인권운동연합을 구성해서 진상규명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 고문의 피해자들이 속속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이 새로운 실험이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구체적인 운동의 흐름들과 결합해서 그동안의 성과를 보다 확장시켜야 한다. 즉, 해방 이후 자행된 국가폭력에 대한 통합적인 과거청산 운동을 차분히 준비할 시점이다. 현재의 의문사진상규명운동과 이후 통합적인 과거청산 운동의 준비 과정에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 국가폭력의 처절한 피해자들이 올바르게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의 국가폭력의 적극적 반대자로 나설 수 있도록 지지·엄호해야 한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