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생산 혹은 미국식 산업의 역사 : 미국 과학기술과 산업발전 역사 1]Colt Revolver 에서 Model T 까지
오늘날 과학과 기술 산업의 관계가 밀접함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연적이던 아니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산업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관념은 20세기 내내 부동의 진실로 여겨져 왔다. 그러한 인식을 확장시키는데 미국의 역할이 지대했음은 또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량생산과 소비 그리고 과학과 기술에 대한 적극적 투자는 산업 발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을 낳게 한 미국식 산업 혹은 미국의 산업과 과학기술간의 관계에 대해 차분히 볼 수 있는 기획을 준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식 산업의 발달은 대단히 우연적인 몇 가지 계기들과 필연적인 계기들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이것은 역시 미국의 특수한 상황과 세계적 상황에 이끌린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산업과 과학기술간의 관계가 정립되었고 냉전을 통해 오늘날 미국식 생산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금융화를 진행시키면서 산업과 과학 기술의 관계는 기존의 관계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전적 관계 맺기일지 퇴보일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문제이나 분명히 이는 지난 2세기 동안 형성된 미국식 생산에 비하면 대단히 예외적인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세계적인 휴대폰 반도체 업체인 퀄컴은 군으로부터 불하받은 CDMA기술을 통해 엄청난 이윤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윤은 금융적 이해와 결합하여 전통적인 산업부문을 넘어섰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과학기술이 산업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생산 혹은 산업의 일반적인 형태로서 미국식 생산체계는 변화를 맞고 있다. 이러한 생산의 변화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파생시켰다. 하나는 미국 내 노동관계의 변화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미국식 생산의 붕괴이다. 전제했다시피 이러한 붕괴이후 자본이 순방향의 성장을 이루어 낼지는 미지수이나 현재 미국의 경기 침체는 심각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전쟁보다 경제를' 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구호가 미국 반전시위에 등장할 정도로 미국의 경기침체는 심각하다. 하기에 이번 기획에서는 현재까지 이르는 미국식 생산의 발전 혹은 전개양상을 시기적 구분에 따라 3차례에 거쳐 다룰 것이다. 처음 기획은 미국식 대량생산의 탄생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기획은 1,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산업을 특징짓게 되는 군-기업-과학기술의 관계정립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은 2차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미국 산업-과학기술의 변모이다. 산업을 이루는 다각도의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이번 기획의 목적은 과학과 기술이 미국산업에 미친 영향 그리고 미국식 생산과 산업이 과학기술의 현재적 꼴을 이루기까지의 역사이다.
기획1. "Colt Revolver에서 Model T까지"
왜 미국에서 출발했는가
미국식 생산과 과학기술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왜 미국에서 먼저 기술의 발전을 의미하는 몇 가지 의미 있는 발명 혹은 생산이 이루어 졌는가 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몇 가지 전통적인 답들을 꼽아보면 우선 미국은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론티어 정신이 있다는 설명(1890, 터너의 프론티어 이론)이 있다. 이에 따르면 진취적인 미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 같은 미개한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대고 있다. 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의 성격이 이데올로기로서 복고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기계에 의한 노동력의 대체에 저항했던 성격을 본다면 이러한 증거는 오히려 노동력이 부족했던 미국의 상황 때문에 러다이트적 저항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다른 설명으로 미국은 인구가 적고 노동력이 귀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당시 노동자들의 꿈은 승진도 자신의 공장을 갖는 것도 아닌 대규모 경작지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활한 대토지가 이미 인디언 대학살을 통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에서는 일찍이 노동 대체적인 기계가 등장할 수 있었다. 수확기(C.Mccormick의 Reaper)가 그 예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종교적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미국은 두 번째 에덴(America as a second Eden)이라는 관념이다. 유럽대륙은 타락한 땅이고 미국은 새롭게 세운 낙원이기 때문에 유럽의 상품 보다 자국 상품을 보다 선호하는 경향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수출·입 균형을 보면 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여전히 미국은 유럽대륙으로부터의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흔히 언급되는 것으로 평등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실용적 공리적 사회철학이 있다. 물론 평등과 민주주의가 말 그대로 미국에 있었는지는 심각하게 회의적이고 또 그러한 사상이 대량생산과 표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는 논쟁적이지만 표준화와 대량생산이 미국식 생산의 특징이라는 언급은 중요하다. 이상의 전통적인 해석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려보면, 인구에 비해 광활한 토지와 노동력의 부족은 미국이 산업에 기계를 도입하는데 대한 적극적 동인을 마련해 주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앞선 전통적 해석에서 언급한 요인들이 어느 정도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앞서 말했던 인구에 비해 광활한 토지와 노동력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인들을 통해 노동력의 대체를 위한 기계의 생산과 기계의 생산을 위한 기계 도입이 빠르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 생산의 특성과 정착
미국식 생산의 특성은 기계와 비숙련 노동에 의해 제작된 표준화되고 호환가능한 부품들에 의한 대량생산이다. 이러한 미국식 대량생산이 처음으로 이루어 진 것은 19세기 초엽 정부의 지원을 받은 병기창에서 소총을 생산하면서부터 이다. 남부가 부유해지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조면기(목화씨를 빼는 기계)를 만든 일라이 휘트니(Eli Whitney)가 1798년 정부와 2년간 1만 5천정의 소총을 공급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최초의 대량생산은 하퍼스 페리 병기창(Harpers Ferry Armory)의 존 홀(John Hall)에 의해 실현되었다. 홀에 의해 실제로 대량생산된 소총은 10년간 5천 500정에 불과했다. 다소 엉뚱한 휘트니의 호언장담은 하지만 호환가능한 부품들과 표준화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애초 생산의 목적이 대량생산이었던 관계로 대량생산을 가능케하는 조건인 표준화는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숙련의 정도를 노동자 개개인에게 맡기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 과정과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표준화에 의한 호환가능한 부품들의 생산은 생산에 있어 숙련을 부차화 시켰고 이는 대량생산에 물꼬를 튼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기에 휘트니의 호언은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가능성있는 확신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소총을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다양한 공작기계들을 개발한 홀에 의해 대량생산방식은 다양한 산업분야로 전파되었다. 서부영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1830년대 개발된 콜트 리볼버(Colt Revolver)는 바로 이러한 대량생산방식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 대량생산기술은 1860년대의 Singer재봉틀과 1870년대 자전거생산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국식 생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생산방식이 발전하였으나 아직 두 인물을 만나기 전까지 미국식 생산은 아직 걸음마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두 인물은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Tailor)와 헨리포드(Henry Ford) 이다.
헨리 포드의 혁명 : 자동차의 대량생산, 노동자의 대량생산
헨리 포드의 혁명적 업적은 당시까지는 장인과 숙련공의 영역이었던 자동차 생산을 비숙련노동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자동차 기술자이기도 했던 포드는 자동차 시장이 보다 확장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동차를 적정한 가격으로 만들 수 있다면 시장은 부유층에서부터 시골에 까지 무한대로 확장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까지 자동차는 자전거가 스피드를 위한 레저였던 것처럼 다만 레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포드는 자동차의 적정 가격을 500불 정도로 제시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1905년 경 개발한 Model N은 여전히 높은 가격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나 3년 후 개발한 Model T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포드는 거듭되는 개량을 통해 1912년경 Assembly Line 과 Conveyer belt 시스템을 완성했다. 포드의 영향은 다만 생산방식의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14년1월 1일 포드는 종래 2,3달러였던 급여를 5달러로 인상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Five-Dollar Day). 그와 동시에 포드사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한 Sociological Dept가 만들어졌고 포드는 작업장내에서 뿐만 아니라 작업장 외에까지 노동자들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자들의 일상에 대한 통제가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드사에 지원하는 노동자들의 줄은 줄어들지 않았고 자동차의 표준으로 포드의 생산방식이 확립되었다. 포드의 성공은 다만 대량생산방식의 개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전반을 아우르는 생산과 노동 그리고 소비에까지 포드가 미친 영향은 컸다. 거대한 공장과 자본의 집중과 강화는 생산에 있어 표준으로 확립되었고 노동은 탈 숙련화 되었으며 소비는 대량소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생산에 있어 노동의 탈 숙련화 와는 다른 양산으로 고도로 숙련화된 기계가 인간의 숙련을 분절하여 대체했다. 포드는 다양한 공작기계들을 개발함으로써 이에 성공을 거두었고 포드가 개발한 생산공정과 기계들은 산업에서 생산의 표준으로 확립되었다. 물론 그가 꿈꾸던 노동자를 포함한 생산의 완전한 기계화와 함께 말이다.
테일러의 혁명 : 노동자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
테일러가 노동과 생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하버드 진학대신 기계공의 도제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22살 되던 해 Midvale Steel에 입사한 테일러는 6년 만에 수석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는 당시 노동자들의 은밀한 태업에 주목하고 그를 없앨 수 있는 다각도의 방법을 찾는 한편 작업을 분석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정리하려 했다. 테일러는 그의 신조대로 작업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오직 한가지의 길(One best way to do a job)에 매달렸다. 이는 당시 숙련 노동자들의 은밀한 태업(soldiering)에 속수무책이던 관리자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테일러는 베들레헴 철강공장에 자신의 방식을 적용시켜 200%의 생산성을 상승시킴으로서 스스로의 이론을 증명했다. 베들레헴 철강공장의 독일계 운반 노동자 슈미트에 대한 실험은 전형적인 테일러의 성공을 보여준다. 테일러는 그의 동선을 분석하여 불필요한 동작을 없애고 효율적인 동작을 지시했다. 그 결과 하루 12.5 톤의 물품을 운반하던 슈미트는 테일러의 지시 하에 하루 47.5톤의 물품을 나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임금은 50%가 올랐다. 이 결과는 당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11년 발표한 논문에서 밝힌 테일러의 작업에 대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시간에 대한 분석, 작업에 대한 분석, 경제적 인센티브, 기능적 직장(foreman)과 계획 부서를 통한 경영의 중요성이다. 노동자의 노동을 기능적 직장을 통해 분할하고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 성과급뿐만 아니라 목표량을 달성 못한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차별급여의 도입까지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노동자는 임금에 따라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 부속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테일러주의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노동자들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통제에 저항했고 회사의 소유자들도 테일러의 방식이 스스로의 경영권을 침범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테일러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테일러의 방식은 미국에서 여러 가지 변형을 통해 노동과 생산과정의 통제로 그의 후예들에 의해 자리잡았다.
소결 : 미국식 생산방식의 완성과 기술의 산업에의 도입
테일러와 포드에 의해 드디어 미국식 대량생산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노동자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와 노동의 탈 숙련화를 통해 대량생산의 전형을 창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미국에서는 기술과 생산간 관계의 전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공학의 정립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대학에 생기기 시작한 공학(engineering) 학과들은 공장에서 기술공의 도제로서 6년 동안 고된 노동을 통해 기계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실험실에서의 실험과 기계설계를 강조했다. 공학은 작업장의 숙련을 연구실의 숙련으로 옮겼고 이는 노동자에게서 숙련을 박탈하는 대신 새로운 숙련계층을 만들어 냈다. 이 새로운 숙련계층은 미국 산업에 있어 중요한 집단으로 성장했다. 물론 이 배후에는 테일러의 영향이 있었다. 테일러의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경영전문가라는 새로운 계층은 대부분 작업공정을 알고 이를 분석-개량할 수 있는 엔지니어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공학중심의 미국 대학들의 설립은 공학과의 교양학부로서 기초과학연구자를 필요로 했고 이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과 육성이 이루어졌다. 유럽에서의 순서와 정확히 반대 순서가 미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미국식 생산방식이 바야흐로 자신의 완결된 몸을 갖게 된 것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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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Colt Revolver에서 Model T까지"
왜 미국에서 출발했는가
미국식 생산과 과학기술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왜 미국에서 먼저 기술의 발전을 의미하는 몇 가지 의미 있는 발명 혹은 생산이 이루어 졌는가 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몇 가지 전통적인 답들을 꼽아보면 우선 미국은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론티어 정신이 있다는 설명(1890, 터너의 프론티어 이론)이 있다. 이에 따르면 진취적인 미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 같은 미개한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대고 있다. 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의 성격이 이데올로기로서 복고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기계에 의한 노동력의 대체에 저항했던 성격을 본다면 이러한 증거는 오히려 노동력이 부족했던 미국의 상황 때문에 러다이트적 저항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다른 설명으로 미국은 인구가 적고 노동력이 귀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당시 노동자들의 꿈은 승진도 자신의 공장을 갖는 것도 아닌 대규모 경작지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활한 대토지가 이미 인디언 대학살을 통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에서는 일찍이 노동 대체적인 기계가 등장할 수 있었다. 수확기(C.Mccormick의 Reaper)가 그 예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종교적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미국은 두 번째 에덴(America as a second Eden)이라는 관념이다. 유럽대륙은 타락한 땅이고 미국은 새롭게 세운 낙원이기 때문에 유럽의 상품 보다 자국 상품을 보다 선호하는 경향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수출·입 균형을 보면 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여전히 미국은 유럽대륙으로부터의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흔히 언급되는 것으로 평등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실용적 공리적 사회철학이 있다. 물론 평등과 민주주의가 말 그대로 미국에 있었는지는 심각하게 회의적이고 또 그러한 사상이 대량생산과 표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는 논쟁적이지만 표준화와 대량생산이 미국식 생산의 특징이라는 언급은 중요하다. 이상의 전통적인 해석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려보면, 인구에 비해 광활한 토지와 노동력의 부족은 미국이 산업에 기계를 도입하는데 대한 적극적 동인을 마련해 주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앞선 전통적 해석에서 언급한 요인들이 어느 정도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앞서 말했던 인구에 비해 광활한 토지와 노동력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인들을 통해 노동력의 대체를 위한 기계의 생산과 기계의 생산을 위한 기계 도입이 빠르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 생산의 특성과 정착
미국식 생산의 특성은 기계와 비숙련 노동에 의해 제작된 표준화되고 호환가능한 부품들에 의한 대량생산이다. 이러한 미국식 대량생산이 처음으로 이루어 진 것은 19세기 초엽 정부의 지원을 받은 병기창에서 소총을 생산하면서부터 이다. 남부가 부유해지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조면기(목화씨를 빼는 기계)를 만든 일라이 휘트니(Eli Whitney)가 1798년 정부와 2년간 1만 5천정의 소총을 공급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최초의 대량생산은 하퍼스 페리 병기창(Harpers Ferry Armory)의 존 홀(John Hall)에 의해 실현되었다. 홀에 의해 실제로 대량생산된 소총은 10년간 5천 500정에 불과했다. 다소 엉뚱한 휘트니의 호언장담은 하지만 호환가능한 부품들과 표준화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애초 생산의 목적이 대량생산이었던 관계로 대량생산을 가능케하는 조건인 표준화는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숙련의 정도를 노동자 개개인에게 맡기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 과정과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표준화에 의한 호환가능한 부품들의 생산은 생산에 있어 숙련을 부차화 시켰고 이는 대량생산에 물꼬를 튼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기에 휘트니의 호언은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가능성있는 확신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소총을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다양한 공작기계들을 개발한 홀에 의해 대량생산방식은 다양한 산업분야로 전파되었다. 서부영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1830년대 개발된 콜트 리볼버(Colt Revolver)는 바로 이러한 대량생산방식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 대량생산기술은 1860년대의 Singer재봉틀과 1870년대 자전거생산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국식 생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생산방식이 발전하였으나 아직 두 인물을 만나기 전까지 미국식 생산은 아직 걸음마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두 인물은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Tailor)와 헨리포드(Henry Ford) 이다.
헨리 포드의 혁명 : 자동차의 대량생산, 노동자의 대량생산
헨리 포드의 혁명적 업적은 당시까지는 장인과 숙련공의 영역이었던 자동차 생산을 비숙련노동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자동차 기술자이기도 했던 포드는 자동차 시장이 보다 확장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동차를 적정한 가격으로 만들 수 있다면 시장은 부유층에서부터 시골에 까지 무한대로 확장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까지 자동차는 자전거가 스피드를 위한 레저였던 것처럼 다만 레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포드는 자동차의 적정 가격을 500불 정도로 제시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1905년 경 개발한 Model N은 여전히 높은 가격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나 3년 후 개발한 Model T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포드는 거듭되는 개량을 통해 1912년경 Assembly Line 과 Conveyer belt 시스템을 완성했다. 포드의 영향은 다만 생산방식의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14년1월 1일 포드는 종래 2,3달러였던 급여를 5달러로 인상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Five-Dollar Day). 그와 동시에 포드사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한 Sociological Dept가 만들어졌고 포드는 작업장내에서 뿐만 아니라 작업장 외에까지 노동자들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자들의 일상에 대한 통제가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드사에 지원하는 노동자들의 줄은 줄어들지 않았고 자동차의 표준으로 포드의 생산방식이 확립되었다. 포드의 성공은 다만 대량생산방식의 개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전반을 아우르는 생산과 노동 그리고 소비에까지 포드가 미친 영향은 컸다. 거대한 공장과 자본의 집중과 강화는 생산에 있어 표준으로 확립되었고 노동은 탈 숙련화 되었으며 소비는 대량소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생산에 있어 노동의 탈 숙련화 와는 다른 양산으로 고도로 숙련화된 기계가 인간의 숙련을 분절하여 대체했다. 포드는 다양한 공작기계들을 개발함으로써 이에 성공을 거두었고 포드가 개발한 생산공정과 기계들은 산업에서 생산의 표준으로 확립되었다. 물론 그가 꿈꾸던 노동자를 포함한 생산의 완전한 기계화와 함께 말이다.
테일러의 혁명 : 노동자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
테일러가 노동과 생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하버드 진학대신 기계공의 도제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22살 되던 해 Midvale Steel에 입사한 테일러는 6년 만에 수석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는 당시 노동자들의 은밀한 태업에 주목하고 그를 없앨 수 있는 다각도의 방법을 찾는 한편 작업을 분석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정리하려 했다. 테일러는 그의 신조대로 작업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오직 한가지의 길(One best way to do a job)에 매달렸다. 이는 당시 숙련 노동자들의 은밀한 태업(soldiering)에 속수무책이던 관리자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테일러는 베들레헴 철강공장에 자신의 방식을 적용시켜 200%의 생산성을 상승시킴으로서 스스로의 이론을 증명했다. 베들레헴 철강공장의 독일계 운반 노동자 슈미트에 대한 실험은 전형적인 테일러의 성공을 보여준다. 테일러는 그의 동선을 분석하여 불필요한 동작을 없애고 효율적인 동작을 지시했다. 그 결과 하루 12.5 톤의 물품을 운반하던 슈미트는 테일러의 지시 하에 하루 47.5톤의 물품을 나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임금은 50%가 올랐다. 이 결과는 당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11년 발표한 논문에서 밝힌 테일러의 작업에 대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시간에 대한 분석, 작업에 대한 분석, 경제적 인센티브, 기능적 직장(foreman)과 계획 부서를 통한 경영의 중요성이다. 노동자의 노동을 기능적 직장을 통해 분할하고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 성과급뿐만 아니라 목표량을 달성 못한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차별급여의 도입까지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노동자는 임금에 따라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 부속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테일러주의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노동자들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통제에 저항했고 회사의 소유자들도 테일러의 방식이 스스로의 경영권을 침범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테일러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테일러의 방식은 미국에서 여러 가지 변형을 통해 노동과 생산과정의 통제로 그의 후예들에 의해 자리잡았다.
소결 : 미국식 생산방식의 완성과 기술의 산업에의 도입
테일러와 포드에 의해 드디어 미국식 대량생산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노동자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와 노동의 탈 숙련화를 통해 대량생산의 전형을 창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미국에서는 기술과 생산간 관계의 전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공학의 정립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대학에 생기기 시작한 공학(engineering) 학과들은 공장에서 기술공의 도제로서 6년 동안 고된 노동을 통해 기계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실험실에서의 실험과 기계설계를 강조했다. 공학은 작업장의 숙련을 연구실의 숙련으로 옮겼고 이는 노동자에게서 숙련을 박탈하는 대신 새로운 숙련계층을 만들어 냈다. 이 새로운 숙련계층은 미국 산업에 있어 중요한 집단으로 성장했다. 물론 이 배후에는 테일러의 영향이 있었다. 테일러의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경영전문가라는 새로운 계층은 대부분 작업공정을 알고 이를 분석-개량할 수 있는 엔지니어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공학중심의 미국 대학들의 설립은 공학과의 교양학부로서 기초과학연구자를 필요로 했고 이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과 육성이 이루어졌다. 유럽에서의 순서와 정확히 반대 순서가 미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미국식 생산방식이 바야흐로 자신의 완결된 몸을 갖게 된 것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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