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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4.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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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라크 침공, 세계는 어디로 향하는가

류주형 | 정책부장
3월 21일 침공이 시작된 이래 "충격과 공포" 작전으로 명명된,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맹폭이 이라크에 가해졌다. 지금까지 약 4000여명의 희생자가 속출했고 그 중 상당수는 어린이와 여성 등 민간인이라는 소식이 타전되고 있다.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대량학살이 자행된 20세기와는 달리 21세기의 전쟁은 첨단정밀무기체계에 의한 '깨끗한 전쟁'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은 잠시 뿐. 500만 명이 거주하는 바그다드에 집중 포격이 가해졌고 이내 거리는 검은 연기와 붉은 피로 뒤덮였다. 바쁘게 오가는 구급차의 경적 소리와 어디선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찢어질 듯한 절규는 최첨단 정밀타격 최소파괴무기가 실은 무차별 대량살상무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아비규환... "충격과 공포"마저 일상이 되어 차라리 둔감해진, 이 참혹한 역설이 바로 이라크 민중의 현실이다. 이제 "충격과 공포"로 이라크의 해방을 가져오겠다는 미국의 새빨간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어를 위한 공격',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형용모순적 논리구조를 가진 미국의 안보전략의 진실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이라크 민중의 참상과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라크에 가해지는 "충격과 공포"에 의해 세계질서가 덩달아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충격과 공포" 작전은 비단 이라크를 겨냥한 순수 군사적전으로서의 의미를 뛰어넘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지역적 강국'들이나 초강제국으로서 자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준(準)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일종의 상징적 공포를 안겨주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지난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 편에 설 것인가, 테러국 편에 설 것인가'를 강요했듯이 '이번 침략에 동참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아군과 적군으로 양분하고 있다.


탈냉전 이후 세계적 통치성(global governability)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

부시의 등장과 함께, 그리고 특히 911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의 세계정책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간의 설명이 불가피해 보인다.
냉전 질서의 해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10년간 미국의 패권 전략은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동시에 기존의 국가간 체계를 재편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졌다. 유럽연합으로 통합된 (서)유럽 국가들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준제국주의 국가들은 당장 미국의 독보적 지위에 도전할 수준은 아니었을지언정, 잠재적 경쟁자로서 정치적 지역주의를 발전시키고 있었으며 특히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 유럽연합은 자본축적의 지역화된 형태와 결합된 순수 유럽안보공동체를 추구했으며,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동부유럽에 대한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동아시아로의 경제적 진출에 힘쓴 중국, 일본 등은 동아시아 지역 경제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중동과 극동에 산재한 이란, 이라크, 리비아, 북한 등 '지역적 강국'들은 비록 미국중심의 세계체제로부터 주변화되고 배제된 국가들이었지만 미국의 패권 전략에 언제든 반기를 들고, 심각한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높은 '불량 국가'들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군사의 세계화를 통해 주변부에 대한 중심부 국가들의 공동지배를 확립하고 배제된 지역 및 국가의 갈등을 무마, 관리하고자 했다. 미국은 국제질서를 관리함에 있어 미국의 특권을 보호하고, 특히 고(高)기술분야에서 미국의 이익를 위협하는 다른 국가들의 행동을 봉쇄했으며, 광범위한 경제적 쟁점들에 걸쳐 있는 미국의 이익을 옹호하고, 개방 및 양보를 강제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 배제된 지역의 갈등이나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해결책 ― 동등한 국가간 관계를 강조하는 동시에 유엔(UN, 국제연합)의 지원에 기반하고 국제법에 근거한 접근방식― 보다는 주로 군사적 수단에 의존했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적인 정치, 경제의 재조직화와 이로 인한 불평등과 빈곤의 확산은 배제된 지역에서의 반미-반세계화투쟁의 가능성을 높였는데, 미국은 그러한 미래의 위험요소들과 투쟁하기 위한 수단을 개발하는데 주력했다. 즉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잠재적 위협요인들과의 전쟁이 미국의 기본적 대외전략의 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국가의 주권성 보장이라는 유엔의 원칙을 약화시키고, 그러한 주권국가들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질서로서, 기존의 유엔 안보리를 대체하는 중심부 국가들의 권리로서 '제한적 주권 독트린(doctrine of conditional sovereignty)'을 확립하였다. 동시에 위험국가들에 대한 경제봉쇄와 함께 이들 국가 내부의 반란군에 대한 재정적, 행정적 지원과 공중폭격 등을 포함한 '현대적 포위전(modern siege warfare)'이라는 새로운 기법과 수단을 동원했다.
마침 발생한 911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정책이라는 불 위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고 알 카에다의 아프가니스탄과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는 이러한 새로운 원칙이 적용된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의지연합' ― 굴종할 것인가, 배제될 것인가

미국은 이라크 침공 개시 전부터 이미 "의지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이라는 신개념을 통해 국제법이나 유엔,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국제질서에 결박당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와 의지에 따라 쟁점별로 '유연하게' 동맹체제를 구축할 것을 천명했다. 1990년대말 부시 정권의 등장 이후 주로 미 군부나 공화당의 두뇌집단(think tank)들이 새로운 동맹체제를 구상하는 맥락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의지연합'이란, 요컨대 미국의 방침에 동조, 지지하는 국가들끼리의 동맹관계라는 뜻이다. 예컨대, 2002년 9월 '국가안전보장전략문서'를 통해 선제공격론을 정식화하며 유엔은 물론 나토 등 종래의 동맹체제를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부시 독트린'은 그 전형적인 사례다. 특히 미국 스스로 '국제 테러세력을 지원할 악의 축 국가에 대한 선제공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자국민을 보호하고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국제사회의 승인' 없이 개전할 수 있다는 완강한 외교정책을 고수한 것은 기존 국제질서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번 이라크 침공은 911 테러 이후 '앞으로 닥쳐올 위험을 미리 제거한다'는 새로운 안보전략인 부시 독트린 기치 아래 진행되는 첫 번째 전쟁인 셈이다.
물론 현재로서 미국의 일방적 힘과 의지에 의존한 "의지연합"이 기존의 국제질서를 대체, 새로운 국가간 체계로서 기능할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부시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기정사실화한 2002년 10월 경부터 안보리 2차 결의를 최종까지 고수한 최근까지 독자적 행동이냐, 유엔결의냐를 놓고 갈등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미국이 세계 모든 현안을 혼자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유엔의 승인 없이는 전쟁수행과 전후복구에 필요한 다른 국가들의 도움을 얻기가 훨씬 어렵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결국 유엔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사실상 단독 전쟁을 불사하게 된 데에는 안보리 결의가 어려울 것이라는 상황 논리 이외에도 기존의 유엔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의심과 회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911이후 체계화된 '예방전쟁' 전략을 십분 감안한다면, '의지연합'이 당분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주요한 축을 담당할 것이라는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그 징후는 이번 침공을 앞둔 상황에서 공공연히 터져나온 미국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에서 확인된다. 미국무장관 파월은 지난 3월 5일 <전략 및 국제 연구 센터 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중대한 위협에 처했다고 확신해서 유엔 안보리가 제재를 가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유엔 안보리가 제재를 가할 수 없다면, 그리고 가하지 않겠다면, 우리는 미국의 안전은 물론 지역 및 세계의 안전을 위해, '의지연합'과 함께 행동할 선택지를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미국의 이해를 확고히 관철시키는데 기존의 국제질서가 방해물이 된다면 이조차 무시할 수 있다는 일방적 경고인 셈이다. 리처드 펄 미국방자문위원회 위원장은 한술 더 떠 지난 3월 21일 캐나다 <내셔널 포스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적극 승인하지 않은 유엔 안보리에 맹공을 가한 뒤, "이제 금세기는 새 방식에 의한 새 세계 질서를 희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이라크 침공은 '의지연합'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출발점이다. 미국은 자신의 전쟁을 지지, 지원하는 국가(미국은 이 명단 자체를 '의지연합'이라고 지칭한다)와 그렇지 않은 국가를 명확히 구분, 향후 자신을 중심으로 재편될 국제 질서에서 후자를 배제할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의지연합"에 가담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크게 분기하는 중이다. 선택지는 굴종할 것인가, 배제될 것인가라는 오직 두 개의 항뿐이다.


미국의 일방주의적 전략과 유엔과 나토의 운명

그렇다면 20세기 내내 미국의 세계패권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던, 유엔과 나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일단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지난 90년대 유엔은 르완다, 리베리아, 발칸반도의 사태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제재받지 않은' 침공에 대처하는데 허수아비였다. 유엔이 표방하는 '평화유지활동'이 발생한 분쟁사태의 최종적인 해결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분쟁사태를 진정시켜 평화적 해결의 여건을 만드는 간접적인 분쟁해결을 도모하는 소극적인 방식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군사 전문기관인 렉싱턴 연구소의 수석 군사분석가는 최근 기고문을 통해 "이는 유엔 구조에 의도적으로 장착된 결함"이라면서 유엔이 '힘의 정치'를 막을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부시 역시 911 1주기에 즈음한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유엔에 이라크에 대한 '행동'을 촉구하면서 유엔이 국제사회 현안에 무관한 조직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쓸모 없는 조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엄포였다. 이후 전개된 미국의 유엔 외교도 이러한 시각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이라크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원한다거나 유엔의 틀을 존중하고 사찰단에 기회를 주겠다고 밝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보리에서 논의가 진행 중인데도 이라크 침공준비를 차곡차곡 진행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라크 침공의 명분으로 제시한 이라크의 대량파괴무기 은닉이나 알 카에다 연계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필요에 따라 국제사회의 이해부족이나 사찰단의 무능만을 탓했다. 리처드 하스 미국 국무부 정책실장도 911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에 관해 밝히면서 "우리는 거역 못할 주장에 대해서는 청취하고 배우며 정책을 수정하겠지만 함께 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함께 가지는 않겠다"고 말해 선택적으로 다자주의를 택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이와 함께 나토 역시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원 포 올, 올 포 원(one-for-all, all-for-one)'이라며 전쟁 발발 시 회원국의 전쟁 지원을 사실상 의무화한 나토 조약 제5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독일-벨기에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시 나토 동맹국인 터키에 대한 방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신 미국은 '신유럽' 국가로 불리는 동유럽 국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고, 그 대가로 동유럽은 폴란드의 파병, 불가리아의 미국 지원 등 미국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기존 나토의 동맹관계가 와해되고 새로운 동맹관계가 수립될 가능성마저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미국은 이라크 사태 논의 과정에서 심각한 분열을 보였던 나토의 의사결정구조를 바꾸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실제로 90년대 들어서 미국으로부터 독자적인 군사블럭과 이에 따르는 군사행동을 모색하며 '평화유지'와 '국제적 공헌'을 명분으로 나토의 외연적 확대(즉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기존의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인과 중부유럽에 대한 '동진정책')를 추진했던 유럽 국가들은 발칸 전쟁을 통해 그 무능함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유럽국가들은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만을 쳐다볼 따름이었고, 미국 역시 이에 대해 어색한 자세를 취했을 뿐, 나토의 존립근거 자체를 위협하는 유럽 한복판에서의 분쟁은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 평화협상안은 '코소보 지역으로부터 세르비아군을 철수시키며 향후 3년간 코소보지역의 자치를 실시하며 이를 감시하기 위해 나토 지상군 2만여명을 주둔시킨다'는 것만을 담고 있을 뿐, 그 미래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보장하지 않았고 보장할 수도 없었다. 즉 군사개입을 통해서건 아니면 '평화적' 수단을 통해서건 (또는 '불개입' 노선을 통해서건) 나토 스스로가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수단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에 부시 행정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수주의 매파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리처드 펄 미국 국방정책위원장은 지난 3월 26일 독일 일간지 베를리너 차이퉁과 한 회견에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보스니아 분쟁 당시 유엔과 유럽연합이 개입을 거부해 미국이 지도력을 떠맡았다면서 당시 유럽의 지도력이 시험대에 올랐으나 수 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죽어야만 했다고 말하면서 전후에 나토와 유엔의 중요성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대규모 비용을 들여가며 유럽 대륙 기지에 거대한 군사조직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사실 유럽 주둔 미군의 대대적 재편은 옛 소련과 동구권 붕괴 이후 미국 정부 안팎에서 줄곧 거론돼 왔고 특히 911 이후 변화한 미국의 안보개념과 재정적자 확대 등이 재편론을 가속화했다. 냉전이 한창일 때 30만 명에 달했던 유럽 주둔 미군 수는 현재 239개 기지, 11만9000명으로 줄었고 3분의 1로 줄어든 병력이 서유럽 외에 발칸반도에서 코소보까지 광대한 지역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미국이 유럽 주둔군 규모를 축소 또는 현상 유지하면서 새 '맹방'이 된 동유럽과 남유럽에 미군을 배치하려면 서유럽 주둔 병력을 빼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동구권 국가들은 미국의 '안보우산'에 편입되는 정치적 효과와 함께 그에 상응하는 경제원조와 미군 주둔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
이렇듯 2차 세계 대전 이후 출범한 유엔과 나토를 부차화하고 미국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상하는 미국의 구상을 일컬어 일각에서는 '미국이 동맹 없는 새 시대로 진입했다(U.S. Enters a New Era of Non-Alliance)'고 논평하기도 했다. 딕 체니 부통령도 국제기구와 동맹은 "20세기의 갈등을 다루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 어쩌면 우리가 당면한 일련의 위협을 다룰 전략이나 정책, 제도가 아닐 수 있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바야흐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이 주축이 되어 창안한 국제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이라크전의 전망 ― 세계의 체계적 불안정성의 도래

그러나 미국을 비롯, '의지연합'이 이라크 침공을 통해 의도하는 새로운 국제체계는 장기적으로 세계질서의 불안정성을 높이고 신중세적 무질서가 창궐하는 효과를 낳을 공산이 크다.
우선 당초 미국의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전쟁 양상은 '속전속결'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비록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측면이 적지 않지만,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전쟁은 자칫 장기전으로 돌입할 태세다. 작전 초기부터 미군은 적지 않은 손실을 경험하고 있다. 정작 전쟁이 발발하면 내전을 일으킬 것이라던, '후세인 독재 체제 하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이 연합군에 맞서 항거하고 있다. 지난 20년 간 전쟁의 참화가 끊이지 않았던, 따라서 '전쟁이 곧 삶의 일부'인 이곳에서 사람들은 '조용한 분노'를 쌓아왔던 것이다.
또 장기불황의 침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세계경제가 '전시경제'를 통해 회복되리라는 전망 역시 어둡다. 오히려 연간 2백억 달러(약 24조원)씩 최소한 5년 간 총 1000억 달러에 달할 전후 주둔비와 747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 게다가 3천4억 달러 가량의 기록적인 적자와 6조4천억 달러에 달하는 미 정부의 채무를 고려한다면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호주머니를 폭격할 것'이라는 암담한 전망이 차라리 설득력을 지닌다.
중동지역에 누적된 지정학적 사안 역시 이번 침공을 통해 그 모순이 더욱 첨예해질 것이 분명하다. 미국이 비록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친미자유정권을 수립한다해도, 그 유지비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며 되레 중동 전역에서 이슬람 민족주의 혹은 강경 원리주의 세력의 부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이번 침공은 중동 전역에서 이슬람의 분노를 더 키워 장기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안보에 불안요소를 키울 뿐이며 그나마 존재하던 친미국가 내부의 반정부세력의 입지를 강화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무엇보다도 유라시아 전역에서 안보의 불안정성은 증폭될 것이다. 미국의 예방전쟁에 거부감을 느끼는 러시아와 중국·프랑스·독일과 같은 아류 제국들의 반발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며 중동 패권을 둘러싼 지역적 갈등은 심화될 것이다. 당분간 미국을 좇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을 적과 아로 나누며 무소불위의 군사력으로 패권을 강화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목적하는 자국의 안보와 시민의 안전은 점차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911 이후 미국이 보여준 일련의 과정, 즉 세계질서를 주도하던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 질서를 폐기한 것은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 무엇인지를 의심케 하기 충분했다. 징벌과 폭력이 잠재된 군사적 수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부시 행정부의 외교노선 역시 항시적인 위험과 불안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결국 '의지연합'이 상징하는 오늘날 세계질서는 '체계적 불안정'으로 묘사될 수 있을 따름이다. 2차 대전 이후 창설된 국제기구들이 자명한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의지연합"이 주도할 새로운 세계질서가 이전 세기에 비해 평화와 안전을 안겨주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도리어 이번 침공은 기존 질서의 균열과 공백을 불러와 세계를 점증하는 불안의 공포로 몰아넣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야만"의 도래와 세계사회운동의 과제

이미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전후(戰後) 50년간 유지되어온 미국의 세계전략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참화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고삐풀린 망아지' 미국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일방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동시에, 무질서와 혼돈을 낳을 이번 전쟁은, 또한 타락한 제국의 질서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희망을 포함한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미국이 구상해왔고 지금 현실에 등장시키려 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새롭게 각오를 다져야 한다.
미국과 초국적자본의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맞선 전세계 민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즉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적 세계화에 맞선 세계사회운동들의 연대를 실현하는 것만이 지금의 "야만"과 위기를 헤쳐나갈 유일한 길임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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