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한반도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한반도
- 노무현정부의 무정견, 무대응이 한반도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임필수 | 정책국장
미국이 이라크 침략전쟁을 감행한 후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미국의 정·관계의 신보수주의자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미국 국방차관인 폴 월포위츠, 더글라스 J. 파이스, 전 국방위원회 위원장 리차드 펄, 전 CIA 국장 제임스 울시가 그들이다(언론에서는 그들을 '네오콘'(neocon)이라 부르고 있다).
신보수주의 '스타' 중 한 명인 제임스 울시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이었던 1998년 <새로운 아메리카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결성하여 이라크에 관한 미국의 정책 목표는 "정권교체"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 의회에서 이라크 반체제그룹 특히 <이라크민족회의>(INC)의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1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하자는 "이라크 해방 법"(Iraq Liberation Act)을 통과시키기 위한 로비활동을 펼쳤다. 그는 최근 연설에서 이미 4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고,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은 유럽 중심으로 벌어졌지만 4차 세계대전은 중동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즉 사우디의 라덴과 같은 '와하브' 극단주의자,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아쓰당 '파시스트', 이란의 '신권정치가'와의 전쟁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더글러스 파이스 국방차관과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위원장은 이스라엘 싱크탱크인 '고급전략·정치연구소'가 후원하는 연구모임에 참여해왔다. 이 연구소는 91년 오슬로 이-팔 평화협정의 합의 사항들을 반대하는 보고서를 네타냐후 이스라엘 행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 보고서는 요르단과 터키, 미국의 도움을 얻어 후세인 대통령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시리아와 이란까지 친미정권으로 교체시키는 전략적인 환경 변화를 이뤄내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과의 어떤 협상 조건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였다.
무시 전략 또는 북한 '정권교체'?
문제는 이러한 부류의 인사들이 클린턴 행정부 당시 이루어진 제네바합의(1994년)를 부도덕한 정권과 이루어진 '더러운 거래'이며 '완전한 실수'로 간주했고, 1998-99년 입안된 '페리 프로세스'에 관한 완강한 반대 캠페인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시가 정권을 잡게 되자, 클린턴 정부 말미에 이루어진 '조미 공동코뮤니케'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북한과의 어떤 공식적인 대화도 진척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 의혹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제네바합의와 페리프로세스가 이미 끝장난 것으로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북핵 위기론'이 미국에 의해 조장, 고조되는 가운데 지난 3월 말 윤영관 외교통상부장관은 미국을 방문, 콜린 파월 국무부장관과 함께 대북 정책에 관해 협의했다. 그 시점에서 미국의 어느 상원의원은 “우리는 지금 대북정책이 없다”고 말했다. '나쁜 정책'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페리보고서가 검토했던 '무시' 전략이 실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즉 부시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대북 '무시' 전략을 활용해왔던 셈이다.
하지만 4월 21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의 협상을 승인하기 수일 전 미국이 중국과 함께 압력을 가해 북한 지도부를 축출해야 한다는 '혁신적' 의견을 담은 메모를 정부 내 요인들에게 회람시켰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미 국무부가 지금까지 "우리는 김정일 축출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해온 것과는 정반대며, 국방장관이라는 최고위급 인사의 메모라는 점에서 미국 내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는 분명한 징후다.
북한은 과연 농축우라늄 핵무기를 개발했는가?
그러나 그들이 제네바합의가 '완전한 실수'라는 주장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 개발은 과연 사실인가?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동아시아태평양차관보가 북한을 다녀간 후, 부시 행정부는“북한이 농축우라늄에 기반한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제시한 증거는“강석주 부주석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과 북한이 원심분리기 제작에 사용될 수 있는 알루미늄을 수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제시한 증거는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북한 외무성 관리는 미국 쪽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들이 주장한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무기 제조계획을 부정했다.”“(미국은) 근거라고 한 위성사진도 내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북한 외무성 관리는 강석주 부주석의 당시 발언이 "지금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미국이 계속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의미였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알루미늄 수입은 어떤가? 이는 현재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이기 전에 펼쳤던 여론공작전의 사례를 살펴보는 게 유용하다. 2002년 9월 미국 <뉴욕타임즈>는 이라크가 우라늄 농축을 목적으로 가스 원심분리기를 제작하고 있으며, 그 증거로 원심분리기의 외장재인 알루미늄 배관을 구입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과 딕 체니 부통령은 미국 방송에 출연하여“정말로 오직 핵무기 원심분리기에만 적합한 설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미국의 핵과학교육재단에서 발행하는 <핵과학자회보>는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이라크가 수입하려 한 품목은 재래식 무기나 산업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무기에 사용될 경우 기껏해야 재래식 로켓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미국이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의 증거로 제시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품목인 코발트 파우더, 고강도 알루미늄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북한의 농축우라늄 문제는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도 이와 유사한 사례였다. 1998년 10월경부터 미국은 위성사진을 근거로 평북 금창리 지역에서 비밀 핵시설을 건설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고, 모든 언론은 연일 떠들썩하게 핵위기론을 제기했다. 온갖 소란이 벌어졌지만 1999년 5월, 미국 조사단은 의혹 시설에 대한 현장 방문 끝에 이는 핵시설과 무관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2000년 5월에도 2차 방문이 이루어졌다). 미국은 자신이 제기한 의혹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것이 무안했던지,‘현장방문이 이루어질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므로 북한이 사태를 은폐할 시간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뉘앙스로 정리했다.
다자회담은 대안이 될 수 있나?
한편, 현재 언급되고 있는 다자간 회담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나? 다자간 회담이 제기되는 맥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국정부와 클린턴 정부의 '접촉정책'(햇볕정책)의 주요 정책가들이 제시하는 대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레이니가 최근 미국의 <외교관계협의회>에 기고한 글은 그 윤곽을 제시하고 있다.
협상의 1단계는 남한과 북한,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공식적으로 한반도 전체의 안보와 안정을 보장하는 포괄적 합의를 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2단계는 여러 소단계로 이루어지는데, 북한이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IAEA를 통한 사찰을 허용하며, 앞서 6개국이 모은 재정적 보상을 대가로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의 개발·생산·실험을 포기하며, IAEA가 북한이 모든 핵무기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북한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포괄적 합의가 이루어진 5년 후 시점에서 동북아안보포럼을 결성하는 것이다. 각각의 과정은 서로 분리된 합의나 협정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과정에서 일본은 북한과 국교를 맺고 관계정상화를 이루며, KEDO는 애초의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들이 제시하는 협상 로드맵은 큰 틀에서 볼 때 페리보고서로 복귀하자는 것인데, 차이점은 일본·중국·러시아를 끌어 들여서 그 비용을 분담시키는 것이다. 페리보고서의 핵심은 미국의 유일한 관심사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제거라는 것이며(북한경제의 개혁은 부차적인 관심사다), 또 동북아에서 미군의 군사력 증강을 꾸준히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자간회담의 핵심은 핵-미사일 프로그램 제거에 소모되는 비용은 주변 국가에게 분담시키고(북한 경제위기의 관리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군사력 증강 프로그램은 협상 의제에 연루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다자주의'를 확대하는 것은 접촉정책의 지지자들에게 충분히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결국 이런 식의 다자주의는 현 단계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는 대재앙을 막는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일 수는 있지만, 기존의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력을 확대재편하며 북한의 군사력은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미국의 기존의 입장의 연장선일 따름이므로, 현재의 위기를 단지 그리 멀지 않은 미래로 지연시킬 뿐이다. 즉 북한의 '정권교체'나 '붕괴'를 목적으로 하는 '시간 벌기'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한반도인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이 기정사실화되면서 "다음은 한반도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곧바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미국이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하는 일련의 조치를 밟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 행정부 일각에서는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지만, 제네바합의 이행을 고의적으로 위반한 후, 분명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위기를 유도하는 일련의 단계를 밟고 있다.
특히 미국은 북한 농축우라늄 파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의 전례를 충분히 따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문제가 진전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집권 이후 북한과 그 어떤 공식적인 외교접촉도 시도하지 않는 부시정부의 태도 때문이다. 미국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라크와 이란, 북한이 서로 모종의 관련을 맺는 것처럼 묘사했다. "선제공격을 통한 방어"(preemptive defence)라는 군사 교리를 만들어 미국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방어를 위한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UN의 무기사찰단이 별다른 제지 없이 사찰 활동을 벌이는 와중에, 독자적으로 이라크 침공을 결정했다. 미국은 뚜렷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제네바합의 파기를 선언했고 중유공급을 중단했다(금창리의 경우, 제네바합의의 틀이 유지되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역시 북한이 영변지역 핵시설을 재가동할 수 있다면서, 그 시설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군사 옵션을 세워야 한다고 일부러 언론에 흘리고 다녔다. 따라서 이러한 미국의 시도는 북한과의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한 의도된 수순인 것이다.
또한 다자간 회담이라는 틀이 실제로 가동될 것인가도 문제다. 북한은 다자간 협상의 틀을 수용할 수도 있다는 뜻을 비치면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본심"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미국의 구상은 어떤 작은 빌미나 핑계를 이용해서라도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4월 중순 중국에서 이루어진 북한-미국-중국 3국 회담은 한반도에서 순차적으로 위기를 고조해온 미국이 모종의 다음 행동으로 나가기 위한 "명분 쌓기"용으로 머물 가능성 역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1994년 클린턴 정부가 북한 영변핵시설 폭격을 검토하면서 엄습했던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처럼, 오히려 협상이 벌어질 때가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즉 협상에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무력시위가 병행될 수 있으며, 또한 협상의 결렬은 곧 군사적 충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다자간 회담의 시작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장기간에 걸친 위협의 증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현재의 갈등의 출발점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제네바합의의 고의적 위반 이후 북한에 대한 위협을 계속 높이고 있는 미국의 태도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이에 관한 한국 정부의 무정견, 무대응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농축우라늄 의혹 제기나 제네바합의 파기 선언에 관해 객관적 사실을 보려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반도 선제 핵공격 옵션을 재확인(2002년)한 것이나 이라크 전쟁 중에 한반도에 전폭기를 증파한 문제에 관해서도 무입장으로 일관했다. 특히 이라크가 무기사찰단 활동을 훼방하지 않았고 UN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지도 않았음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지하고 한국군 파병을 자원하고야 말았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이 군사주의와 일방주의를 더욱 노골화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조금의 입도 벙긋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현재 한반도 문제의 한편에는 미국의 '맹동주의'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미국을 건드리면 문제가 더 어려워진다"는 식의 노무현정부의 애처로울 정도의 '보신주의'가 있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에 빠진 노무현 정부를 누가 구원하랴! PSSP
- 노무현정부의 무정견, 무대응이 한반도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임필수 | 정책국장
미국이 이라크 침략전쟁을 감행한 후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미국의 정·관계의 신보수주의자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미국 국방차관인 폴 월포위츠, 더글라스 J. 파이스, 전 국방위원회 위원장 리차드 펄, 전 CIA 국장 제임스 울시가 그들이다(언론에서는 그들을 '네오콘'(neocon)이라 부르고 있다).
신보수주의 '스타' 중 한 명인 제임스 울시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이었던 1998년 <새로운 아메리카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결성하여 이라크에 관한 미국의 정책 목표는 "정권교체"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 의회에서 이라크 반체제그룹 특히 <이라크민족회의>(INC)의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1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하자는 "이라크 해방 법"(Iraq Liberation Act)을 통과시키기 위한 로비활동을 펼쳤다. 그는 최근 연설에서 이미 4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고,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은 유럽 중심으로 벌어졌지만 4차 세계대전은 중동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즉 사우디의 라덴과 같은 '와하브' 극단주의자,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아쓰당 '파시스트', 이란의 '신권정치가'와의 전쟁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더글러스 파이스 국방차관과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위원장은 이스라엘 싱크탱크인 '고급전략·정치연구소'가 후원하는 연구모임에 참여해왔다. 이 연구소는 91년 오슬로 이-팔 평화협정의 합의 사항들을 반대하는 보고서를 네타냐후 이스라엘 행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 보고서는 요르단과 터키, 미국의 도움을 얻어 후세인 대통령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시리아와 이란까지 친미정권으로 교체시키는 전략적인 환경 변화를 이뤄내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과의 어떤 협상 조건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였다.
무시 전략 또는 북한 '정권교체'?
문제는 이러한 부류의 인사들이 클린턴 행정부 당시 이루어진 제네바합의(1994년)를 부도덕한 정권과 이루어진 '더러운 거래'이며 '완전한 실수'로 간주했고, 1998-99년 입안된 '페리 프로세스'에 관한 완강한 반대 캠페인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시가 정권을 잡게 되자, 클린턴 정부 말미에 이루어진 '조미 공동코뮤니케'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북한과의 어떤 공식적인 대화도 진척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 의혹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제네바합의와 페리프로세스가 이미 끝장난 것으로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북핵 위기론'이 미국에 의해 조장, 고조되는 가운데 지난 3월 말 윤영관 외교통상부장관은 미국을 방문, 콜린 파월 국무부장관과 함께 대북 정책에 관해 협의했다. 그 시점에서 미국의 어느 상원의원은 “우리는 지금 대북정책이 없다”고 말했다. '나쁜 정책'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페리보고서가 검토했던 '무시' 전략이 실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즉 부시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대북 '무시' 전략을 활용해왔던 셈이다.
하지만 4월 21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의 협상을 승인하기 수일 전 미국이 중국과 함께 압력을 가해 북한 지도부를 축출해야 한다는 '혁신적' 의견을 담은 메모를 정부 내 요인들에게 회람시켰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미 국무부가 지금까지 "우리는 김정일 축출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해온 것과는 정반대며, 국방장관이라는 최고위급 인사의 메모라는 점에서 미국 내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는 분명한 징후다.
북한은 과연 농축우라늄 핵무기를 개발했는가?
그러나 그들이 제네바합의가 '완전한 실수'라는 주장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 개발은 과연 사실인가?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동아시아태평양차관보가 북한을 다녀간 후, 부시 행정부는“북한이 농축우라늄에 기반한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제시한 증거는“강석주 부주석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과 북한이 원심분리기 제작에 사용될 수 있는 알루미늄을 수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제시한 증거는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북한 외무성 관리는 미국 쪽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들이 주장한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무기 제조계획을 부정했다.”“(미국은) 근거라고 한 위성사진도 내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북한 외무성 관리는 강석주 부주석의 당시 발언이 "지금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미국이 계속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의미였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알루미늄 수입은 어떤가? 이는 현재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이기 전에 펼쳤던 여론공작전의 사례를 살펴보는 게 유용하다. 2002년 9월 미국 <뉴욕타임즈>는 이라크가 우라늄 농축을 목적으로 가스 원심분리기를 제작하고 있으며, 그 증거로 원심분리기의 외장재인 알루미늄 배관을 구입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과 딕 체니 부통령은 미국 방송에 출연하여“정말로 오직 핵무기 원심분리기에만 적합한 설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미국의 핵과학교육재단에서 발행하는 <핵과학자회보>는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이라크가 수입하려 한 품목은 재래식 무기나 산업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무기에 사용될 경우 기껏해야 재래식 로켓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미국이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의 증거로 제시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품목인 코발트 파우더, 고강도 알루미늄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북한의 농축우라늄 문제는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도 이와 유사한 사례였다. 1998년 10월경부터 미국은 위성사진을 근거로 평북 금창리 지역에서 비밀 핵시설을 건설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고, 모든 언론은 연일 떠들썩하게 핵위기론을 제기했다. 온갖 소란이 벌어졌지만 1999년 5월, 미국 조사단은 의혹 시설에 대한 현장 방문 끝에 이는 핵시설과 무관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2000년 5월에도 2차 방문이 이루어졌다). 미국은 자신이 제기한 의혹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것이 무안했던지,‘현장방문이 이루어질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므로 북한이 사태를 은폐할 시간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뉘앙스로 정리했다.
다자회담은 대안이 될 수 있나?
한편, 현재 언급되고 있는 다자간 회담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나? 다자간 회담이 제기되는 맥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국정부와 클린턴 정부의 '접촉정책'(햇볕정책)의 주요 정책가들이 제시하는 대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레이니가 최근 미국의 <외교관계협의회>에 기고한 글은 그 윤곽을 제시하고 있다.
협상의 1단계는 남한과 북한,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공식적으로 한반도 전체의 안보와 안정을 보장하는 포괄적 합의를 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2단계는 여러 소단계로 이루어지는데, 북한이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IAEA를 통한 사찰을 허용하며, 앞서 6개국이 모은 재정적 보상을 대가로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의 개발·생산·실험을 포기하며, IAEA가 북한이 모든 핵무기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북한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포괄적 합의가 이루어진 5년 후 시점에서 동북아안보포럼을 결성하는 것이다. 각각의 과정은 서로 분리된 합의나 협정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과정에서 일본은 북한과 국교를 맺고 관계정상화를 이루며, KEDO는 애초의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들이 제시하는 협상 로드맵은 큰 틀에서 볼 때 페리보고서로 복귀하자는 것인데, 차이점은 일본·중국·러시아를 끌어 들여서 그 비용을 분담시키는 것이다. 페리보고서의 핵심은 미국의 유일한 관심사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제거라는 것이며(북한경제의 개혁은 부차적인 관심사다), 또 동북아에서 미군의 군사력 증강을 꾸준히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자간회담의 핵심은 핵-미사일 프로그램 제거에 소모되는 비용은 주변 국가에게 분담시키고(북한 경제위기의 관리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군사력 증강 프로그램은 협상 의제에 연루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다자주의'를 확대하는 것은 접촉정책의 지지자들에게 충분히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결국 이런 식의 다자주의는 현 단계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는 대재앙을 막는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일 수는 있지만, 기존의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력을 확대재편하며 북한의 군사력은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미국의 기존의 입장의 연장선일 따름이므로, 현재의 위기를 단지 그리 멀지 않은 미래로 지연시킬 뿐이다. 즉 북한의 '정권교체'나 '붕괴'를 목적으로 하는 '시간 벌기'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한반도인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이 기정사실화되면서 "다음은 한반도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곧바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미국이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하는 일련의 조치를 밟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 행정부 일각에서는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지만, 제네바합의 이행을 고의적으로 위반한 후, 분명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위기를 유도하는 일련의 단계를 밟고 있다.
특히 미국은 북한 농축우라늄 파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의 전례를 충분히 따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문제가 진전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집권 이후 북한과 그 어떤 공식적인 외교접촉도 시도하지 않는 부시정부의 태도 때문이다. 미국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라크와 이란, 북한이 서로 모종의 관련을 맺는 것처럼 묘사했다. "선제공격을 통한 방어"(preemptive defence)라는 군사 교리를 만들어 미국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방어를 위한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UN의 무기사찰단이 별다른 제지 없이 사찰 활동을 벌이는 와중에, 독자적으로 이라크 침공을 결정했다. 미국은 뚜렷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제네바합의 파기를 선언했고 중유공급을 중단했다(금창리의 경우, 제네바합의의 틀이 유지되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역시 북한이 영변지역 핵시설을 재가동할 수 있다면서, 그 시설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군사 옵션을 세워야 한다고 일부러 언론에 흘리고 다녔다. 따라서 이러한 미국의 시도는 북한과의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한 의도된 수순인 것이다.
또한 다자간 회담이라는 틀이 실제로 가동될 것인가도 문제다. 북한은 다자간 협상의 틀을 수용할 수도 있다는 뜻을 비치면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본심"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미국의 구상은 어떤 작은 빌미나 핑계를 이용해서라도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4월 중순 중국에서 이루어진 북한-미국-중국 3국 회담은 한반도에서 순차적으로 위기를 고조해온 미국이 모종의 다음 행동으로 나가기 위한 "명분 쌓기"용으로 머물 가능성 역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1994년 클린턴 정부가 북한 영변핵시설 폭격을 검토하면서 엄습했던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처럼, 오히려 협상이 벌어질 때가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즉 협상에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무력시위가 병행될 수 있으며, 또한 협상의 결렬은 곧 군사적 충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다자간 회담의 시작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장기간에 걸친 위협의 증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현재의 갈등의 출발점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제네바합의의 고의적 위반 이후 북한에 대한 위협을 계속 높이고 있는 미국의 태도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이에 관한 한국 정부의 무정견, 무대응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농축우라늄 의혹 제기나 제네바합의 파기 선언에 관해 객관적 사실을 보려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반도 선제 핵공격 옵션을 재확인(2002년)한 것이나 이라크 전쟁 중에 한반도에 전폭기를 증파한 문제에 관해서도 무입장으로 일관했다. 특히 이라크가 무기사찰단 활동을 훼방하지 않았고 UN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지도 않았음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지하고 한국군 파병을 자원하고야 말았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이 군사주의와 일방주의를 더욱 노골화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조금의 입도 벙긋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현재 한반도 문제의 한편에는 미국의 '맹동주의'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미국을 건드리면 문제가 더 어려워진다"는 식의 노무현정부의 애처로울 정도의 '보신주의'가 있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에 빠진 노무현 정부를 누가 구원하랴!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