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세계의 제국주의 질서와 대안
= 아랍세계의 제국주의 질서와 대안 =
엄 한 진(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이 글에서 우리는 폭력적인 이행기로서의 세계화 시대가 낳은 아랍세계의 정치·경제질서와 이데올로기적 지형의 분석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아랍정세에 대해 조망해 보고자 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미국 지배세력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그에 기반한 사악한 음모에 대한 폭로와 분노를 낳았다. 그렇지만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우리가 그나마 이란혁명 이후 가장 효과적인 이슬람마케팅이었던 9.11테러 직후의 문명담론의 포로상태에선 다소 벗어났다 해도 여전히 위의 음모와 비극이 가능했던 아랍세계의 종속과 분열, 무력함의 원인, 즉 아랍문제에 대한 총체적이고 구조적 인식은 미흡하다. 전쟁에 대한 인식과 대응 역시 2차 대전 이후 전쟁과 일상화된 무력사용이 아랍세계에서의 제국주의 이해관철의 핵심적 요소로 작용해왔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 그 자체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과 일시적, 인도주의적 박애를 넘어 총체적 인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베트남, 레바논, 이라크, 소말리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다시 이라크로 전쟁에 대한 그간의 세계의 관심은 일시적이었다. 예를 들어 걸프전 이후 이라크와 이라크 민중의 고통은 잊혀졌었고 1988년 종전 이후에도 지속적인 공습과 무력점령을 경험하고 있는 레바논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또 다른 전쟁을 요구한다. 조만간 또 다른 분쟁과 비극의 지점으로 우리의 관심은 옮아가겠지만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아랍문제가 현 세계의 본질의 특수한 발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그리 먼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I. 아랍세계에서의 제국주의
제국주의를 경제적 착취와 국가간 정치·군사적 지배관계의 중첩, 그리고 세계체제에 대한 일국 현실의 종속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아랍세계에서의 새로운 제국주의는 구 식민본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특히 미국 주도하에 형성된 경제적, 정치적 개방, 이데올로기적 종속, 종족적·종파적 차이의 정치도구화, 그리고 군사적 개입 등으로 실현되어 왔다.
= 경제적 동기와 정치적 압력: 신자유주의와 형식적 민주화 =
경제개방과 정치개방은 90년대 이후 아랍의 지역질서의 변화를 이끄는 핵심적인 동력이다. 식민지 경험, 발전전략 및 근대화 방식, 천연자원 보유 등에 따라 시기와 정도 면에서 국가간 차이가 있지만 아랍세계의 경제개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이들 모두 산업간 연계성에 기반한 통합성있는, 그리고 자주적인 민족경제 건설에 실패하고 심각한 재정위기와 외채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대다수 국가들이 외채문제를 계기로 국제금융기구들에 의해 강요된 개혁프로그램을 채택하게 된다. 이것은 여타 지역에서처럼 거시적 지표의 안정화와 구조조정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조조정과 그 연장선상에서 최근 본격화하고 있는 경제개방 전략은 미국과 유럽연합 주도의 개방적인 지역경제질서 형성과정이다. 그리고 아랍국가들의 경우 이러한 전망은 부정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랍정권들은 분열과 불평등으로 인해 구조적 한계를 지니는 아랍 차원의 지역화가 아닌 서방에의 편입만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은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지만 역사적,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서로 다른 틀에서 이 지역에 대한 경제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먼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어서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큰 유럽연합은 1995년 11월 바르셀로나 회의에서 윤곽이 잡힌 유럽-지중해 차원의 틀에서의 지역화에 집중하고 있다. 경제협력, 이민문제 해결 등을 중심으로 최근 활발해진 유럽의 지중해정책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중동석유 독점 기도,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아랍세계 분열정책이 유럽에 미치는 경제적, 군사적 불안정 효과를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들이 포함된 이 전망 속에는 20세기 초에 그랬듯이 이스라엘이 유럽의 첨병으로 기능한다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미국은 중·근동지역 아랍국가들과 터키, 이스라엘이 포함된 틀에서의 경제통합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이해관계의 차이는 예를 들어 1990년대 후반이래 두 세력 모두에게 대아랍정책의 핵심요소인 반테러정책의 경우, 미국이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과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전쟁과 테러의 빌미로 사용하는데 반해 유럽, 특히 프랑스는 테러조직 유입 방지에 전력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중동정세의 불안정이 유럽본토, 그리고 아랍국들과의 경제관계에 미칠 파장을 막으려는 의도가 크다.
한편 이러한 방식의 세계경제에의 통합과정은 정치적 변화를 수반했다. 1980,90년대이래 군주제 국가와 세속적인 성격의 정권 모두에서 국가주도의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아랍국가들의 정치 지형은 대체로 권위주의 정권, 정치적 이슬람, 시민운동 삼자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구도는 매판적인 정치권력이 지역질서 재편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면서 이로 인해 야기된 정당성의 위기를 절차적 제한된 정치개방과 종교적 담론의 강화로 극복하는 전략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다당제의 도입은 발전전략의 실패로 민족주의적 권력이 약화되면서 남긴 정치적 공백을 메우는 국가 주도의 지배구조재편 과정의 주요 기제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슬람세력과 과거의 반체제세력의 온건한 분파가 제도권 정치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 이집트의 정치개방이 시장개방과 대외종속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정이었듯이 1990년대 초반부터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아라비아반도 군주제 국가들에까지 확산된 정치범 석방, 다당제와 직접선거, 언론의 자유의 도입은 제국주의와 그 매개체로서의 지역정권들 주도하에 이루어진 시장개방의 정치적, 제도적 토대구축과정이었다. 최근에 이루어진 일부 나라들에서의 정치변동과정 역시 경제개방과 정치개방이 동시대적 현상이며 상호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로코의 경우 90년대에 진행된 왕실 주도의 반체제 진영의 체제내 수용과정은 1998년 정권교체를 낳았으며 2000년 새로이 국왕이 된 젊은 모하메드 6세는 경제개방과 정치개방, 그리고 여성문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같은 해에 역시 국왕이 교체된 시리아도 경제개방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특히 2010년 발효될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은 농산물, 석유,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이 나라의 경제부흥의 열쇠로 간주되고 있다. 그 과정의 주역으로서 기술관료들이 정치적으로 부상하였고 정치개혁이 경제개방의 관건으로 논의되고 있다. 군주제 국가 바레인 역시 2001년 위로부터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세계경제에의 편입을 계기로 외부로부터의 압력하에, 그리고 위로부터 진행된 정치변동은 일부 형식적인 민주적 권리의 신장과 시민사회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의 질적 변화나 신자유주의노선에 대한 어떠한 근본적 수정도 이루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도입은 연고적 권위주의의 강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가속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아랍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주된 정치현상의 하나는 민주주의의 강요이다. 198,90년대 개발도상국들에서의 민주화 현상은 대부분 시장개방과 구조조정을 통한 세계경제에의 편입의 제도적 기반으로서 강대국과 국제금융기구로부터 권고 내지 강요된 결과였다. 이는 세계경제체제가 낳은 국지적 위기,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던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실패를 부패, 비효율적 문화와 체제의 성격 등 개별국가 내적 문제로 환원시켰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시장의 투명성 문제로 환원된 민주주의 담론은 아랍정권들의 권위주의를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와 대비시키면서 미국, 프랑스, 영국의 정치·군사적 개입,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사주의를 묵인하는 빌미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정치도구화와 그것의 비민주적 결과는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논리적 결과인 전지구적 차원의 민주주의의 퇴보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세계화에의 적응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고 희망의 근거라는 분위기 속에서 선진국을 포함하여 세계 전 지역에서 민중의 실질적인 정치참여나 민주적이고 관용적인 논의문화의 퇴보를 볼 수 있다. 난해한 용어와 허구적인 수치로 치장된 주요 정책결정은 효율성을 앞세워 소위 전문가들에게 일임되고 경쟁을 빌미로 한 국익, 그리고 대안의 부재 또는 종말을 내세워 반체제적 사회운동과 민주적 논의를 억제하고 있다.
= 종족적·종파적 차이를 이용한 분열 전략 =
근대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유럽은 아랍세계를 그들 각자의 이해에 유용한 매판적 성격을 띤 여러 지역으로 분열시켜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전략의 실현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종족적·종파적 차이의 정치적 이용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레바논 출신 경제학자 꼬름(G. Corm)은 배타적인 유대인적 정체성에 기반을 둔 시온주의(zionism)와 그 정치적 화신인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가 이 지역 정치질서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로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건너온 유대인 이주민들은 차별과 위협에 따른 유럽에서의 그들의 패쇄된 공동체 생활의 경험과 배타적인 탈무드 문화, 그리고 유대교, 유대인만의 국가의 창설이라는 이념으로 인해 다원주의 전통이 강했던 아랍사회가 그들에게 제공했던 공존의 기회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타자에 대한 거부를 본질로 하는 유대국가가 자신의 부당한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지 타민족을 차별, 배제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주변민족들 역시 자신을 배척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자신처럼 배타적인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에 따라 서로 분열, 대립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70년대초까지만해도 이러한 이스라엘 존재의 의미와 그들의 정체성에 따른 분열의 전략은 종교적 차원이 미미했고 종교적인 면에서 관용적이었던 아랍민족주의에 의해 효과적으로 저지되었다.
그런데 이미 1967년 아랍진영의 패배는 이러한 방어벽의 붕괴를 의미했고 그 이후 이 지역 정치질서는 이스라엘의 전략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변형되었다. 즉 각 지역마다 다른 형태로 발전해 온 이슬람 내 분파간 차이를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이슬람근본주의 운동은 이스라엘의 이 지역 분열정책에 크게 기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꼬름은 이슬람근본주의의 발전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레바논 내전(1980-1988)을 야기하며 키워낸, 기독교 종족인 마로니트족(Maronite Christians)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독교운동단체, 팔랑헤주의자(Phalangists)나, 이슬람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배척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이집트의 기독교 집단 꼽트족(the Copt)의 종교적 정치운동도 바로 이 이스라엘의 영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간은 아랍민족주의의 저항으로 온전히 실현되기 어려웠던 경제적 차원을 포함한 온전한 의미의 이스라엘 제국주의의 실현이 이스라엘의 대아랍전략의 핵심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미 이스라엘의 군사적 헤게모니 완성과 미국주도의 평화협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의 온전한 일원으로 암묵적으로 인정되어 그 역사적 정당성 문제가 현실적으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면서 이스라엘이 꿈꾸던 이스라엘 중심의 아랍경제질서 형성은 커다란 장애물을 벗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존재를 사실상 승인한 아랍정권들은 정치적 양보를 하더라도 지역안정을 확보하여 경제부흥의 길을 걷고자 한다.
시리아 역시 이미 75년부터 레바논에 대한 침략과 내정간섭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수행한 레바논 분열전략의 동조자 역할을 수행해왔다. 걸프전에서의 시리아의 참전은 이 지역 반제·반시온주의 세력의 결정적 패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는데 시리아는 전쟁참여에 대한 대가로 레바논에 대한 자유로운 개입을 보장받았다. 아랍세계가 언어, 종교, 역사를 공유하면서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분열되어 있고 적대감과 경계심이 팽배한 것도 이러한 종족적·종교적 정체성의 정치도구화에 크게 기인한다. 이 전략은 국제사회가 그간 보스니아,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에 적용한 공동체 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여러 공동체가 공존하는 이 지역들의 비극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정체성의 도구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지배의 이데올로기적 측면: 이슬람 담론 =
이슬람근본주의의 대두과정은 바로 제국주의 논리가 관철되는 과정, 즉 70년대이래 미국과 이스라엘 주도로 새로운 지역질서가 형성되는 과정과 동시대적인 현상이었다. 영국의 인도지배에 그 연원을 두고있는 이슬람의 정치도구화는 1970년대 이후 소련과의 경쟁에서 미국이 계승하게 된다. 이 지역의 국가들에서의 재이슬람화는 바로 이러한 석유·사우디 중심의 지역경제질서 재편과 함께 강화된 것이다. 이 변동과정에서 이슬람근본주의의 대두는 새로운 지역질서 형성이 낳은 부산물인 동시에 이 과정의 필수 구성요소였다. 즉 기존 이데올로기들이 무력해진 상황에서 나타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사회통합의 위기에 대한 민중의 대응양식이자 동시에 중동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실현의 축인 사우디아라비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슬람 중심의 지역질서 형성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사우디가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하고 미국이 사우디의 아랍세계 주도권 장악을 도와주는 방식의 미-사우디 관계는 이미 5,60년대 낫세르의 범아랍주의에 대한 견제전략으로 그 모습을 보였었다. 당시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은 팔레비 치하의 이란과 사우디, 쿠웨이트 등 종교적 성격이 강한 군주국들을 통해 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저지하려 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미 CIA의 대리인 역할 수행, 이란혁명 이후 사우디 주도의 대이란전선의 형성, 석유수출국기구(OPEC),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에서 사우디에 의한 미국의 이해대변으로 둘간의 연대가 본격화되었다. 빈 라덴 역시 이 양국관계의 익명의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었다.
참고로 근본주의적 이슬람을 주창하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파키스탄 역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중동에서의 사우디아라비아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미국은 이슬람이 있는 제3세계 모든 곳에서 이슬람을 정치도구화했던 것이다. 또한 이슬람 정치세력의 부상에 따른 정치의 불안정이 미국의 개입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9·11테러 이후 억압적인 여성현실, 비민주적인 정치체제, 아프간 무자헤딘의 지원 등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사우디 비난, 그리고 걸프전 이후에 시작되어 최근 심화된 정권과 여론의 괴리에서 미-사우디 관계의 변화의 조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이스라엘 관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의 군사력을 필요로 하는 사우디 왕가와 사우디 석유의 안정적 공급을 필요로 하는 미국의 공통이해는 여전히 굳건하다.
1980년대에 전 아랍세계에서 주요 정치·사회세력으로 부상했던 정치적 이슬람은 90년대에 들어 알제리 이슬람 저항세력의 비극을 신호탄으로 탈정치화 또는 온건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의 의복문제나 의례의 준수문제와 같은 형식적 측면에 국한해 이슬람을 사고하는 세속화된 아랍민중과 이슬람 운동세력의 정치적 전망과의 괴리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 이제 아랍에서의 이슬람 세력은 이슬람 NGO들의 비정치적 활동과 극소수의 테러리즘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들은 바로 이 후자 덕택에 또는 전자와 후자의 연관성을 부각시키면서 이슬람담론과 문명담론의 생명연장을 꾀하는 것이다. 9·11이 소위 '이슬람세계'의 희생과 이슬람의 평화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루어진 이슬람열기를 통해 유럽의 극우파와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의 강화를 가져왔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군사적 지배 =
최근 미국의 지배전략은 반테러리즘을 빌미로 한 군사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제도의 무력화 시도의 양상을 띠고 있다. 197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의 뒤를 이어 이·팔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걸프전을 기화로 이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개입의 시대를 열었다. 영국의 퇴각을 가져온 수에즈 전쟁부터 걸프전 이전까지만해도 다른 지역들과 달리 중동에서의 직접적인 군사적 역할은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 이스라엘에 맡겨져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은 그 이후 추진된 이·팔 평화협상으로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은, 그리고 일회적인 것에 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걸프전 이후부터 9·11까지의 기간에도 반테러리즘은 아랍의 현 정권들과 이 지역질서의 고착화를 추구하는 미국과 유럽의 주된 이데올로기였다. 걸프전은 코소보전쟁으로 전장을 옮겼을 뿐이고,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반테러리즘 투쟁이 평화협상과 결부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중탄압이 심화되면서 9·11이후의 반테러리즘 전쟁의 토양을 닦아놓았다. 결과적으로 9·11이후의 과정은 테러리즘을 빌미로 구 소련을 포함한 세계 전 지역에 군사기지와 결정적인 군사적 우위의 확립과정이었다.
한편 최근 미국 대외정책의 군사화는 다음과 같은 유일 강대국으로서의 헤게모니의 한계와 연관이 있다. '신경제'와 금융세계화의 환상이 깨어진 21세기의 미국은 더 이상 세계에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상실했으며 과거 동아시아 모델과 같은 모범사례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더불어 세계경제체제의 조절자로서의 능력도 의지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나마 유일하게 압도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는 군사적 차원을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미국의 정치·군사적 개입은 국제사회로부터의 정당성 인정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세계화의 장밋빛 미래의 제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지구화되고 일상화된 위기감을 이용하고 동시에 스스로가 창출한 위기를 해소해줄 수 있는 힘의 과시를 통해 지배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민주주의의 파괴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처럼 미국의 군사주의화 경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헤게모니의 안정성을 침식할 것이다. '예방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전략에는 그간의 세계화가 낳은 일국적, 세계적 차원의 양극화의 심화와 그로 인한 저항의 분출을 예방하려는 긴급한 요구가 담겨있다.
II. 대안적인 아랍질서의 모색
아랍세계는 정치적으로 위기의 상황에 처해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90년대 초반 이후 정치적 이슬람의 쇠퇴가 남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공백을 채울 대안세력이 부상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이미 걸프전 이후 설득력을 상실한 이슬람 담론이 위로부터, 즉 미국·유럽과 아랍정권들에 의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의 반테러리즘이 세계질서의 이데올로기의 주요 구성요소로 등장하고 미국의 이라크지배 이후 가시화되고 있는 종족·종파간 갈등의 정치적 이용은 이슬람 담론의 정치적 위상이 당분간 지속될 것을 예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의 위기 내지 부재는 민중운동의 역량 미흡에 크게 기인한다. 사실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비추어지는 아랍민중의 모습은 억압적인 정치적 조건에서도 분연히 일어서는 의식있고 용기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엄혹한 현실에서도 아랍민중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아랍민족주의와 무슬림들의 연대가 실체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 분출은 1999년 2차 인티파다 이후 무장투쟁 참여열기가 가혹한 탄압의 결과이듯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을 주지해야한다.
정치변혁에 대한 아랍민중의 전반적인 소극적 태도는 계급구조, 대안의 부재 등 여러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사회해체에 대한 두려움이다. 2000년 2차 인티파다 이후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오랜 내전이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후견으로 이어진 레바논, 서방세계와의 갈등으로 아랍세계에서마저 고립된 리비아, 걸프전 이후의 이라크, 군과 이슬람 무장단체들간의 내전의 참혹한 결과를 겪은 알제리, 그리고 이슬람국가 아프가니스탄의 파괴와 이란의 고립은 아랍민중으로 하여금 이슬람을 통해서든 세속적 이념에 따르든 현 체제에 대한 어떤 거부의 시도도 사회의 붕괴 내지 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지역질서의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세력들처럼 민중도 현실의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에도 소극적이다. 테러리즘과 세계화담론이 심어주는 경제적 환상만이 이들의 고통과 허탈함을 달래줄 수 있는 마약인 것이다. 위로부터의 정치개방의 산물인 측면이 큰 시민사회 담론은 아랍세계와 서양 및 그들의 것으로, 그들의 지배도구로 인식된 민주주의, 인권, 법치국가, 여성해방 등의 근대적 이념과 가치간의 극복할 수 없는 차이만을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이 서구 및 서구적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졌던 정치적 이슬람의 전망과 그것의 구체화로서의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환상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물론 전망을 상실한 아랍민중의 미약한 역량은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주변부의 현실적 힘의 약화,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주변부 민중의 정치적 약화 및 이데올로기적 종속이라는 전반적 현상의 한 부분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방식의 축적위기 극복형태는 결국 주변부와 민중의 대항능력 약화라는 계급관계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자주적이고 민중적인 사회변혁을 주도할 수 있는 주체는 신자유주의나 추상적인 민주주의 담론, 그리고 현 세계질서의 유지에 기여하는 일부 인도주의적 개입세력들이 상정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유리된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이 주체는 공통이해에 근거한, 즉 지난 20년간의 세계화를 통해 생존의 위협에 처한 대다수의 세계민중의 일원으로서의 아랍민중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이데올로기투쟁과 연대의 창출이 요구되는 것이다. 다행히 2000년을 전후해 등장했고 전세계적인 반전열기 속에 강화된 대중운동의 부활에서 그 태동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력의 형성은 다음과 같은 아랍세계의 본질적 과제들의 해결과정 속에서 가능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이 과제들의 미해결이 이러한 세력의 형성을 가로막아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는 팔레스타인국가 수립문제, 동예루살렘의 지위문제, 난민문제와 같은 본질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와 같이 중동질서의 핵심문제인 이-팔분쟁의 근본적 해결이다.
둘째는 종족간·종교간 공존이다. 석유를 매개로 한 세계경제에의 편입이 낳은 대외종속의 심화와 아랍국들간 경제적 격차의 심화,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는 5,60년대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아랍민족주의의 현실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이란-이라크전, 사하라분쟁, 레바논내전을 비롯한 종족간, 종파간, 국가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제 종족·종교간 갈등의 해결은 자율성의 보장과 공존을 지향해야 하며 그 해결은 분리독립이 아닌 다원적인 국가의 건설이라는 원칙하에 역사적, 지역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형태를 모색하는데서 나올 수 있다.
셋째는 제국주의의 매개체로서의 아랍정권의 개혁과 아랍지역차원의 통합이다. 아랍 각국의 미래가 워싱턴이나 파리가 아닌 스스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조건의 창출이 절실하다. 이는 사회통합 능력이 있는 정권에 의해서 가능하며 이러한 정권의 창출은 자주적이고 민중적인 정치세력의 등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미국과 유럽이 이 지역 국가들의 민주화에 무관심하고 연고에 기반한 권력과 지배를 용인 내지 부추기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체제가 그들의 이해실현에 효과적이며 민주적인 정권은 미국이나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보다 자국민의 이해를 대변할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30년간 미국과 유럽에 의해 저지된 이러한 세력의 창출은 현재의 종속적인 지역질서 유지를 위해 행해져온 아랍세계의 분열전략을 극복하고 아랍세계에 속한 국가들간의 경제통합, 아랍차원의 산업 연계구조의 창출이 절실하다.
넷째는 석유자원에 대한 자주적 권리의 확보와 석유수입의 민주적 배분 그리고 산유국을 포함해 경제의 석유의존도의 완화와 산업화 추진을 통한 저발전의 극복이다. 이는 중심부-아랍 산유국-아랍 비산유국으로 이어지는 지배-종속관계와 석유지대의 통제를 기반으로 한 연고주의와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열쇠이다.
다섯째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창하는 방식의 일국내 제도개혁보다 지역차원의 정치·군사적 갈등의 해결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이슬람 중심의 지역질서와 이데올로기 지형의 극복이다. 그간 석유를 매개로 한 세계질서에의 편입이 낳은 아랍사회의 재이슬람화와 정치적 이슬람은 위에서 언급한 아랍세계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 과제는 시급하다.
새로운 주체의 형성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라크 민중의 고통을 댓가로 우리가 이슬람이라는 차이가 아닌 세계화라는 보편적 현상을 통해 아랍세계를 덜 낯설게 느끼게된 지금, 이 지역의 저항운동에 대한 연대 역시 세계질서와 이것의 특수한 구현형태로서의 아랍의 지역질서의 근본적 변화라는 전망을 갖고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상의 과제들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엄 한 진(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이 글에서 우리는 폭력적인 이행기로서의 세계화 시대가 낳은 아랍세계의 정치·경제질서와 이데올로기적 지형의 분석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아랍정세에 대해 조망해 보고자 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미국 지배세력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그에 기반한 사악한 음모에 대한 폭로와 분노를 낳았다. 그렇지만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우리가 그나마 이란혁명 이후 가장 효과적인 이슬람마케팅이었던 9.11테러 직후의 문명담론의 포로상태에선 다소 벗어났다 해도 여전히 위의 음모와 비극이 가능했던 아랍세계의 종속과 분열, 무력함의 원인, 즉 아랍문제에 대한 총체적이고 구조적 인식은 미흡하다. 전쟁에 대한 인식과 대응 역시 2차 대전 이후 전쟁과 일상화된 무력사용이 아랍세계에서의 제국주의 이해관철의 핵심적 요소로 작용해왔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 그 자체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과 일시적, 인도주의적 박애를 넘어 총체적 인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베트남, 레바논, 이라크, 소말리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다시 이라크로 전쟁에 대한 그간의 세계의 관심은 일시적이었다. 예를 들어 걸프전 이후 이라크와 이라크 민중의 고통은 잊혀졌었고 1988년 종전 이후에도 지속적인 공습과 무력점령을 경험하고 있는 레바논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또 다른 전쟁을 요구한다. 조만간 또 다른 분쟁과 비극의 지점으로 우리의 관심은 옮아가겠지만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아랍문제가 현 세계의 본질의 특수한 발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그리 먼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I. 아랍세계에서의 제국주의
제국주의를 경제적 착취와 국가간 정치·군사적 지배관계의 중첩, 그리고 세계체제에 대한 일국 현실의 종속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아랍세계에서의 새로운 제국주의는 구 식민본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특히 미국 주도하에 형성된 경제적, 정치적 개방, 이데올로기적 종속, 종족적·종파적 차이의 정치도구화, 그리고 군사적 개입 등으로 실현되어 왔다.
= 경제적 동기와 정치적 압력: 신자유주의와 형식적 민주화 =
경제개방과 정치개방은 90년대 이후 아랍의 지역질서의 변화를 이끄는 핵심적인 동력이다. 식민지 경험, 발전전략 및 근대화 방식, 천연자원 보유 등에 따라 시기와 정도 면에서 국가간 차이가 있지만 아랍세계의 경제개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이들 모두 산업간 연계성에 기반한 통합성있는, 그리고 자주적인 민족경제 건설에 실패하고 심각한 재정위기와 외채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대다수 국가들이 외채문제를 계기로 국제금융기구들에 의해 강요된 개혁프로그램을 채택하게 된다. 이것은 여타 지역에서처럼 거시적 지표의 안정화와 구조조정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조조정과 그 연장선상에서 최근 본격화하고 있는 경제개방 전략은 미국과 유럽연합 주도의 개방적인 지역경제질서 형성과정이다. 그리고 아랍국가들의 경우 이러한 전망은 부정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랍정권들은 분열과 불평등으로 인해 구조적 한계를 지니는 아랍 차원의 지역화가 아닌 서방에의 편입만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은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지만 역사적,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서로 다른 틀에서 이 지역에 대한 경제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먼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어서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큰 유럽연합은 1995년 11월 바르셀로나 회의에서 윤곽이 잡힌 유럽-지중해 차원의 틀에서의 지역화에 집중하고 있다. 경제협력, 이민문제 해결 등을 중심으로 최근 활발해진 유럽의 지중해정책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중동석유 독점 기도,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아랍세계 분열정책이 유럽에 미치는 경제적, 군사적 불안정 효과를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들이 포함된 이 전망 속에는 20세기 초에 그랬듯이 이스라엘이 유럽의 첨병으로 기능한다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미국은 중·근동지역 아랍국가들과 터키, 이스라엘이 포함된 틀에서의 경제통합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이해관계의 차이는 예를 들어 1990년대 후반이래 두 세력 모두에게 대아랍정책의 핵심요소인 반테러정책의 경우, 미국이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과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전쟁과 테러의 빌미로 사용하는데 반해 유럽, 특히 프랑스는 테러조직 유입 방지에 전력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중동정세의 불안정이 유럽본토, 그리고 아랍국들과의 경제관계에 미칠 파장을 막으려는 의도가 크다.
한편 이러한 방식의 세계경제에의 통합과정은 정치적 변화를 수반했다. 1980,90년대이래 군주제 국가와 세속적인 성격의 정권 모두에서 국가주도의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아랍국가들의 정치 지형은 대체로 권위주의 정권, 정치적 이슬람, 시민운동 삼자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구도는 매판적인 정치권력이 지역질서 재편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면서 이로 인해 야기된 정당성의 위기를 절차적 제한된 정치개방과 종교적 담론의 강화로 극복하는 전략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다당제의 도입은 발전전략의 실패로 민족주의적 권력이 약화되면서 남긴 정치적 공백을 메우는 국가 주도의 지배구조재편 과정의 주요 기제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슬람세력과 과거의 반체제세력의 온건한 분파가 제도권 정치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 이집트의 정치개방이 시장개방과 대외종속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정이었듯이 1990년대 초반부터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아라비아반도 군주제 국가들에까지 확산된 정치범 석방, 다당제와 직접선거, 언론의 자유의 도입은 제국주의와 그 매개체로서의 지역정권들 주도하에 이루어진 시장개방의 정치적, 제도적 토대구축과정이었다. 최근에 이루어진 일부 나라들에서의 정치변동과정 역시 경제개방과 정치개방이 동시대적 현상이며 상호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로코의 경우 90년대에 진행된 왕실 주도의 반체제 진영의 체제내 수용과정은 1998년 정권교체를 낳았으며 2000년 새로이 국왕이 된 젊은 모하메드 6세는 경제개방과 정치개방, 그리고 여성문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같은 해에 역시 국왕이 교체된 시리아도 경제개방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특히 2010년 발효될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은 농산물, 석유,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이 나라의 경제부흥의 열쇠로 간주되고 있다. 그 과정의 주역으로서 기술관료들이 정치적으로 부상하였고 정치개혁이 경제개방의 관건으로 논의되고 있다. 군주제 국가 바레인 역시 2001년 위로부터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세계경제에의 편입을 계기로 외부로부터의 압력하에, 그리고 위로부터 진행된 정치변동은 일부 형식적인 민주적 권리의 신장과 시민사회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의 질적 변화나 신자유주의노선에 대한 어떠한 근본적 수정도 이루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도입은 연고적 권위주의의 강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가속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아랍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주된 정치현상의 하나는 민주주의의 강요이다. 198,90년대 개발도상국들에서의 민주화 현상은 대부분 시장개방과 구조조정을 통한 세계경제에의 편입의 제도적 기반으로서 강대국과 국제금융기구로부터 권고 내지 강요된 결과였다. 이는 세계경제체제가 낳은 국지적 위기,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던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실패를 부패, 비효율적 문화와 체제의 성격 등 개별국가 내적 문제로 환원시켰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시장의 투명성 문제로 환원된 민주주의 담론은 아랍정권들의 권위주의를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와 대비시키면서 미국, 프랑스, 영국의 정치·군사적 개입,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사주의를 묵인하는 빌미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정치도구화와 그것의 비민주적 결과는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논리적 결과인 전지구적 차원의 민주주의의 퇴보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세계화에의 적응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고 희망의 근거라는 분위기 속에서 선진국을 포함하여 세계 전 지역에서 민중의 실질적인 정치참여나 민주적이고 관용적인 논의문화의 퇴보를 볼 수 있다. 난해한 용어와 허구적인 수치로 치장된 주요 정책결정은 효율성을 앞세워 소위 전문가들에게 일임되고 경쟁을 빌미로 한 국익, 그리고 대안의 부재 또는 종말을 내세워 반체제적 사회운동과 민주적 논의를 억제하고 있다.
= 종족적·종파적 차이를 이용한 분열 전략 =
근대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유럽은 아랍세계를 그들 각자의 이해에 유용한 매판적 성격을 띤 여러 지역으로 분열시켜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전략의 실현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종족적·종파적 차이의 정치적 이용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레바논 출신 경제학자 꼬름(G. Corm)은 배타적인 유대인적 정체성에 기반을 둔 시온주의(zionism)와 그 정치적 화신인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가 이 지역 정치질서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로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건너온 유대인 이주민들은 차별과 위협에 따른 유럽에서의 그들의 패쇄된 공동체 생활의 경험과 배타적인 탈무드 문화, 그리고 유대교, 유대인만의 국가의 창설이라는 이념으로 인해 다원주의 전통이 강했던 아랍사회가 그들에게 제공했던 공존의 기회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타자에 대한 거부를 본질로 하는 유대국가가 자신의 부당한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지 타민족을 차별, 배제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주변민족들 역시 자신을 배척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자신처럼 배타적인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에 따라 서로 분열, 대립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70년대초까지만해도 이러한 이스라엘 존재의 의미와 그들의 정체성에 따른 분열의 전략은 종교적 차원이 미미했고 종교적인 면에서 관용적이었던 아랍민족주의에 의해 효과적으로 저지되었다.
그런데 이미 1967년 아랍진영의 패배는 이러한 방어벽의 붕괴를 의미했고 그 이후 이 지역 정치질서는 이스라엘의 전략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변형되었다. 즉 각 지역마다 다른 형태로 발전해 온 이슬람 내 분파간 차이를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이슬람근본주의 운동은 이스라엘의 이 지역 분열정책에 크게 기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꼬름은 이슬람근본주의의 발전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레바논 내전(1980-1988)을 야기하며 키워낸, 기독교 종족인 마로니트족(Maronite Christians)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독교운동단체, 팔랑헤주의자(Phalangists)나, 이슬람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배척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이집트의 기독교 집단 꼽트족(the Copt)의 종교적 정치운동도 바로 이 이스라엘의 영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간은 아랍민족주의의 저항으로 온전히 실현되기 어려웠던 경제적 차원을 포함한 온전한 의미의 이스라엘 제국주의의 실현이 이스라엘의 대아랍전략의 핵심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미 이스라엘의 군사적 헤게모니 완성과 미국주도의 평화협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의 온전한 일원으로 암묵적으로 인정되어 그 역사적 정당성 문제가 현실적으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면서 이스라엘이 꿈꾸던 이스라엘 중심의 아랍경제질서 형성은 커다란 장애물을 벗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존재를 사실상 승인한 아랍정권들은 정치적 양보를 하더라도 지역안정을 확보하여 경제부흥의 길을 걷고자 한다.
시리아 역시 이미 75년부터 레바논에 대한 침략과 내정간섭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수행한 레바논 분열전략의 동조자 역할을 수행해왔다. 걸프전에서의 시리아의 참전은 이 지역 반제·반시온주의 세력의 결정적 패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는데 시리아는 전쟁참여에 대한 대가로 레바논에 대한 자유로운 개입을 보장받았다. 아랍세계가 언어, 종교, 역사를 공유하면서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분열되어 있고 적대감과 경계심이 팽배한 것도 이러한 종족적·종교적 정체성의 정치도구화에 크게 기인한다. 이 전략은 국제사회가 그간 보스니아,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에 적용한 공동체 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여러 공동체가 공존하는 이 지역들의 비극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정체성의 도구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지배의 이데올로기적 측면: 이슬람 담론 =
이슬람근본주의의 대두과정은 바로 제국주의 논리가 관철되는 과정, 즉 70년대이래 미국과 이스라엘 주도로 새로운 지역질서가 형성되는 과정과 동시대적인 현상이었다. 영국의 인도지배에 그 연원을 두고있는 이슬람의 정치도구화는 1970년대 이후 소련과의 경쟁에서 미국이 계승하게 된다. 이 지역의 국가들에서의 재이슬람화는 바로 이러한 석유·사우디 중심의 지역경제질서 재편과 함께 강화된 것이다. 이 변동과정에서 이슬람근본주의의 대두는 새로운 지역질서 형성이 낳은 부산물인 동시에 이 과정의 필수 구성요소였다. 즉 기존 이데올로기들이 무력해진 상황에서 나타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사회통합의 위기에 대한 민중의 대응양식이자 동시에 중동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실현의 축인 사우디아라비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슬람 중심의 지역질서 형성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사우디가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하고 미국이 사우디의 아랍세계 주도권 장악을 도와주는 방식의 미-사우디 관계는 이미 5,60년대 낫세르의 범아랍주의에 대한 견제전략으로 그 모습을 보였었다. 당시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은 팔레비 치하의 이란과 사우디, 쿠웨이트 등 종교적 성격이 강한 군주국들을 통해 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저지하려 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미 CIA의 대리인 역할 수행, 이란혁명 이후 사우디 주도의 대이란전선의 형성, 석유수출국기구(OPEC),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에서 사우디에 의한 미국의 이해대변으로 둘간의 연대가 본격화되었다. 빈 라덴 역시 이 양국관계의 익명의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었다.
참고로 근본주의적 이슬람을 주창하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파키스탄 역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중동에서의 사우디아라비아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미국은 이슬람이 있는 제3세계 모든 곳에서 이슬람을 정치도구화했던 것이다. 또한 이슬람 정치세력의 부상에 따른 정치의 불안정이 미국의 개입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9·11테러 이후 억압적인 여성현실, 비민주적인 정치체제, 아프간 무자헤딘의 지원 등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사우디 비난, 그리고 걸프전 이후에 시작되어 최근 심화된 정권과 여론의 괴리에서 미-사우디 관계의 변화의 조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이스라엘 관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의 군사력을 필요로 하는 사우디 왕가와 사우디 석유의 안정적 공급을 필요로 하는 미국의 공통이해는 여전히 굳건하다.
1980년대에 전 아랍세계에서 주요 정치·사회세력으로 부상했던 정치적 이슬람은 90년대에 들어 알제리 이슬람 저항세력의 비극을 신호탄으로 탈정치화 또는 온건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의 의복문제나 의례의 준수문제와 같은 형식적 측면에 국한해 이슬람을 사고하는 세속화된 아랍민중과 이슬람 운동세력의 정치적 전망과의 괴리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 이제 아랍에서의 이슬람 세력은 이슬람 NGO들의 비정치적 활동과 극소수의 테러리즘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들은 바로 이 후자 덕택에 또는 전자와 후자의 연관성을 부각시키면서 이슬람담론과 문명담론의 생명연장을 꾀하는 것이다. 9·11이 소위 '이슬람세계'의 희생과 이슬람의 평화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루어진 이슬람열기를 통해 유럽의 극우파와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의 강화를 가져왔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군사적 지배 =
최근 미국의 지배전략은 반테러리즘을 빌미로 한 군사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제도의 무력화 시도의 양상을 띠고 있다. 197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의 뒤를 이어 이·팔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걸프전을 기화로 이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개입의 시대를 열었다. 영국의 퇴각을 가져온 수에즈 전쟁부터 걸프전 이전까지만해도 다른 지역들과 달리 중동에서의 직접적인 군사적 역할은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 이스라엘에 맡겨져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은 그 이후 추진된 이·팔 평화협상으로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은, 그리고 일회적인 것에 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걸프전 이후부터 9·11까지의 기간에도 반테러리즘은 아랍의 현 정권들과 이 지역질서의 고착화를 추구하는 미국과 유럽의 주된 이데올로기였다. 걸프전은 코소보전쟁으로 전장을 옮겼을 뿐이고,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반테러리즘 투쟁이 평화협상과 결부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중탄압이 심화되면서 9·11이후의 반테러리즘 전쟁의 토양을 닦아놓았다. 결과적으로 9·11이후의 과정은 테러리즘을 빌미로 구 소련을 포함한 세계 전 지역에 군사기지와 결정적인 군사적 우위의 확립과정이었다.
한편 최근 미국 대외정책의 군사화는 다음과 같은 유일 강대국으로서의 헤게모니의 한계와 연관이 있다. '신경제'와 금융세계화의 환상이 깨어진 21세기의 미국은 더 이상 세계에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상실했으며 과거 동아시아 모델과 같은 모범사례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더불어 세계경제체제의 조절자로서의 능력도 의지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나마 유일하게 압도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는 군사적 차원을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미국의 정치·군사적 개입은 국제사회로부터의 정당성 인정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세계화의 장밋빛 미래의 제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지구화되고 일상화된 위기감을 이용하고 동시에 스스로가 창출한 위기를 해소해줄 수 있는 힘의 과시를 통해 지배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민주주의의 파괴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처럼 미국의 군사주의화 경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헤게모니의 안정성을 침식할 것이다. '예방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전략에는 그간의 세계화가 낳은 일국적, 세계적 차원의 양극화의 심화와 그로 인한 저항의 분출을 예방하려는 긴급한 요구가 담겨있다.
II. 대안적인 아랍질서의 모색
아랍세계는 정치적으로 위기의 상황에 처해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90년대 초반 이후 정치적 이슬람의 쇠퇴가 남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공백을 채울 대안세력이 부상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이미 걸프전 이후 설득력을 상실한 이슬람 담론이 위로부터, 즉 미국·유럽과 아랍정권들에 의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의 반테러리즘이 세계질서의 이데올로기의 주요 구성요소로 등장하고 미국의 이라크지배 이후 가시화되고 있는 종족·종파간 갈등의 정치적 이용은 이슬람 담론의 정치적 위상이 당분간 지속될 것을 예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의 위기 내지 부재는 민중운동의 역량 미흡에 크게 기인한다. 사실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비추어지는 아랍민중의 모습은 억압적인 정치적 조건에서도 분연히 일어서는 의식있고 용기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엄혹한 현실에서도 아랍민중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아랍민족주의와 무슬림들의 연대가 실체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 분출은 1999년 2차 인티파다 이후 무장투쟁 참여열기가 가혹한 탄압의 결과이듯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을 주지해야한다.
정치변혁에 대한 아랍민중의 전반적인 소극적 태도는 계급구조, 대안의 부재 등 여러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사회해체에 대한 두려움이다. 2000년 2차 인티파다 이후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오랜 내전이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후견으로 이어진 레바논, 서방세계와의 갈등으로 아랍세계에서마저 고립된 리비아, 걸프전 이후의 이라크, 군과 이슬람 무장단체들간의 내전의 참혹한 결과를 겪은 알제리, 그리고 이슬람국가 아프가니스탄의 파괴와 이란의 고립은 아랍민중으로 하여금 이슬람을 통해서든 세속적 이념에 따르든 현 체제에 대한 어떤 거부의 시도도 사회의 붕괴 내지 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지역질서의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세력들처럼 민중도 현실의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에도 소극적이다. 테러리즘과 세계화담론이 심어주는 경제적 환상만이 이들의 고통과 허탈함을 달래줄 수 있는 마약인 것이다. 위로부터의 정치개방의 산물인 측면이 큰 시민사회 담론은 아랍세계와 서양 및 그들의 것으로, 그들의 지배도구로 인식된 민주주의, 인권, 법치국가, 여성해방 등의 근대적 이념과 가치간의 극복할 수 없는 차이만을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이 서구 및 서구적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졌던 정치적 이슬람의 전망과 그것의 구체화로서의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환상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물론 전망을 상실한 아랍민중의 미약한 역량은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주변부의 현실적 힘의 약화,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주변부 민중의 정치적 약화 및 이데올로기적 종속이라는 전반적 현상의 한 부분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방식의 축적위기 극복형태는 결국 주변부와 민중의 대항능력 약화라는 계급관계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자주적이고 민중적인 사회변혁을 주도할 수 있는 주체는 신자유주의나 추상적인 민주주의 담론, 그리고 현 세계질서의 유지에 기여하는 일부 인도주의적 개입세력들이 상정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유리된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이 주체는 공통이해에 근거한, 즉 지난 20년간의 세계화를 통해 생존의 위협에 처한 대다수의 세계민중의 일원으로서의 아랍민중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이데올로기투쟁과 연대의 창출이 요구되는 것이다. 다행히 2000년을 전후해 등장했고 전세계적인 반전열기 속에 강화된 대중운동의 부활에서 그 태동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력의 형성은 다음과 같은 아랍세계의 본질적 과제들의 해결과정 속에서 가능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이 과제들의 미해결이 이러한 세력의 형성을 가로막아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는 팔레스타인국가 수립문제, 동예루살렘의 지위문제, 난민문제와 같은 본질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와 같이 중동질서의 핵심문제인 이-팔분쟁의 근본적 해결이다.
둘째는 종족간·종교간 공존이다. 석유를 매개로 한 세계경제에의 편입이 낳은 대외종속의 심화와 아랍국들간 경제적 격차의 심화,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는 5,60년대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아랍민족주의의 현실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이란-이라크전, 사하라분쟁, 레바논내전을 비롯한 종족간, 종파간, 국가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제 종족·종교간 갈등의 해결은 자율성의 보장과 공존을 지향해야 하며 그 해결은 분리독립이 아닌 다원적인 국가의 건설이라는 원칙하에 역사적, 지역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형태를 모색하는데서 나올 수 있다.
셋째는 제국주의의 매개체로서의 아랍정권의 개혁과 아랍지역차원의 통합이다. 아랍 각국의 미래가 워싱턴이나 파리가 아닌 스스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조건의 창출이 절실하다. 이는 사회통합 능력이 있는 정권에 의해서 가능하며 이러한 정권의 창출은 자주적이고 민중적인 정치세력의 등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미국과 유럽이 이 지역 국가들의 민주화에 무관심하고 연고에 기반한 권력과 지배를 용인 내지 부추기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체제가 그들의 이해실현에 효과적이며 민주적인 정권은 미국이나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보다 자국민의 이해를 대변할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30년간 미국과 유럽에 의해 저지된 이러한 세력의 창출은 현재의 종속적인 지역질서 유지를 위해 행해져온 아랍세계의 분열전략을 극복하고 아랍세계에 속한 국가들간의 경제통합, 아랍차원의 산업 연계구조의 창출이 절실하다.
넷째는 석유자원에 대한 자주적 권리의 확보와 석유수입의 민주적 배분 그리고 산유국을 포함해 경제의 석유의존도의 완화와 산업화 추진을 통한 저발전의 극복이다. 이는 중심부-아랍 산유국-아랍 비산유국으로 이어지는 지배-종속관계와 석유지대의 통제를 기반으로 한 연고주의와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열쇠이다.
다섯째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창하는 방식의 일국내 제도개혁보다 지역차원의 정치·군사적 갈등의 해결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이슬람 중심의 지역질서와 이데올로기 지형의 극복이다. 그간 석유를 매개로 한 세계질서에의 편입이 낳은 아랍사회의 재이슬람화와 정치적 이슬람은 위에서 언급한 아랍세계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 과제는 시급하다.
새로운 주체의 형성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라크 민중의 고통을 댓가로 우리가 이슬람이라는 차이가 아닌 세계화라는 보편적 현상을 통해 아랍세계를 덜 낯설게 느끼게된 지금, 이 지역의 저항운동에 대한 연대 역시 세계질서와 이것의 특수한 구현형태로서의 아랍의 지역질서의 근본적 변화라는 전망을 갖고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상의 과제들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