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중에서
편집자 주 -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본 글은 콜론타이가 1908년 전(全)러시아여성대회에 맞춰 작성한 글이다. 막심 고리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고리키에게 원고를 보내던 중 원고를 분실하여, 결국 이 책은 1909년에 출간된다. 총 4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에서 콜론타이는 여성들의 지위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러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여성 조직들의 강령과 활동을 소개한다. 당시 콜론타이는 여성의 해방은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의 일부이고, 전 인민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들 또한 이 정당과 함께 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여성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투쟁했던 예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콜론타이는 계속해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여성노동자들의 가장 적극적인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 역사적 맥락을 파악해야만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 당시 수많은 부르주아 여권론자들[본문에서 콜론타이는 페미니스트,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은 여성들을 대표해서 의회에 진출해야 한다고, 여성의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문제는 고민하지 않았고, 여성문제는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것으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완전한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런 상황에서 클라라 제트킨이나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권론자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여성운동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과 분리되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옹호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상황을 계급의 시각으로 분석하려는 찾아보기 힘든 시도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글이 가지는 의미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콜론타이의 이런 시도는 엥겔스나 베벨이 추상적인 수준에서 여성문제를 사회주의 이후에 해결될 문제로 보았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본 글은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에서 발췌한 것이며, 출처는 <Alix Holt, Selected Writings of Alexandra Kollontai, 1977, Allison&Busby>이다. 글 중간의 말 줄임표는 원래의 책에서 홀트가 발췌할 때 생략을 표시한 것이다.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 중에서
from <The Social Basis of the Woman Question>
번역 | 여성위원회(준)
부르주아 학자들이 한 성(性)의 다른 성(性)에 대한 우월성의 문제를 논쟁하거나 지력(知力)을 재고 남성과 여성의 심리구조를 비교하는데 열중하도록 놔둔 채, 역사적 유물론의 계승자들은 각각의 성들의 자연적 특성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각각의 개인들이 자기-결정에 있어서 가장 완전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실질적 기회와 모든 자연적인 성향들을 발전시키고 적용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여지를 가져야한다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의 계승자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의제로부터 분리된 여성들만의 의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특정한 경제적 요인들이 여성종속의 원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적인 특성은 부차적인 요인이 되어왔다. 이러한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 즉 과거에 여성들을 종속시켜왔던 권력관계를 전화시키는 것만이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여성들은 새로운 사회관계 및 생산관계에 맞춰 조직되는 세계에서만 진정 자유롭고 평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 체계 안에서 여성의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노동자 계급 의제에 대한 급진적인 해결은 생산관계를 완전히 재구조화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급박한 이해를 만족시키는데 복무하는 개혁들을 위해 일하지 못하는가? 반대로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성과들 하나 하나는 인류가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왕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발걸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이 획득한 권리들은 그녀를 완전한 해방이라는 명확한 목표에 더 가까이 데려다 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제일 먼저 여성들의 권리를 남성들의 권리와 평등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강령에 포함시켰다; 연설과 인쇄매체에서 당은 언제 어디서나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제한들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른 정당들과 정부들이 여성에게 우호적인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제해 온 것은 바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이 정당은 스스로의 이론적인 입장에 있어서 여성들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여성 평등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 경우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equal righters)"들이 이렇게 강력하고 능숙한 당의 지지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실은 그들이 아무리 급진적일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부르주아 계급에 충실하다는 점에 있다. 정치적 자유는 러시아 부르주아의 성장과 권력을 위해서 바로 지금 핵심적인 필요조건이다: 그것이 없다면, 부르주아의 모든 경제적 복지는 사상누각이라는 점이 판명될 것이다. 정치적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삶 그 자체로부터 나온 요구이다.
"직업으로의 접근"이라는 슬로건은 이제 충분하지 않다; 오직 정부에 직접 참여하는 것만이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를 상승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약속해줄 수 있다. 투표권을 얻고자하는 중산계급 여성들의 정열적인 열망과 현대 관료체계에 대한 적의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중산계급 여성들의 정치적 평등 요구에 있어서 러시아의 페미니스트들은 중산계급 여성들에겐 외국 자매와 같이 친밀한 존재이다; 사회민주주의적인 배움이 열어준 넓은 시야는 러시아 페미니스트들에겐 이질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페미니스트들은 현존하는 계급 사회의 틀 안에서 평등을 구한다; 어떤 방식으로도 그들은 이 사회의 기초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특권들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싸운다. 우리는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대표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점은 불가피하게 그들의 사회적 지위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경제적 독립을 위한 투쟁
무엇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계급 모순에 기초한 사회 내에서 단일한 여성운동이 존재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물어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하나의 균질한 대중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편파적인 시각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남성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세계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할되어있다; 한 여성 진영의 이해와 염원은 부르주아 계급에 가까운 반면, 다른 진영은 프롤레타리아의 그것과 관련이 깊고, 그들이 요구하는 해방은 여성 의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진영이 비록 일반적인 "여성 해방"의 슬로건을 따른다 할지라도 그들의 목표와 이해는 다르다. 각각의 진영은 무의식적으로 그들 계급의 이해에 근거한 운동의 출발점을 세우고, 그리고 이것은 다시 각각의 진영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목표와 임무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계급을 낳는다....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해방에 필수적인 현재의 경제와 사회적인 구조의 근본적인 변형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모든 계급의 여성들의 단기적인 과제가 일치할지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운동의 방향과 사용될 전술을 결정하는 두 진영의 최종적인 목표는 첨예하게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현행 자본주의 세계의 틀 안에서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구체적인 결론인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에게 있어서 현 시대의 평등한 권리는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종속에 맞선 투쟁을 전진시키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남성들이 여성에게는 오직 구속과 의무만을 지우면서 남성들만을 위한 모든 권력과 특권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승리는 이전에 남성이 배타적으로 향유했던 특권이 "공평한 성"에게 용인될 때 얻어진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태도는 다르다. 그녀들은 남성을 적이나 압제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녀들은 남성을 그들의 동료로, 일상의 고역을 함께 나누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로 생각한다. 여성과 그녀의 남성 동료는 동일한 사회적 조건에 의해 노예화되어있다; 증오스러운 자본주의의 사슬이 그들의 의지를 짓밟고 그들로부터 삶의 기쁨과 활력을 앗아간다. 여성들이 현재의 체제의 여러 가지 특정한 상황에서 이중의 부담을 지는 것은 사실이며, 고용 노동의 조건이 때때로 여성 노동자들을 남성들의 경쟁자로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원치않는 상황이 누구의 잘못인지 노동자 계급은 알고 있다.
여성 노동자들은 불행한 그녀들의 남자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번뜩거리는 입을 가진 탐욕스러운 괴물을 증오한다. 이 괴물은 오로지 희생양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쥐어짜고 수백만 인간의 삶을 대가로 성장하는 것만을 바라기 때문에, 남성, 여성, 아이 상관없이 누구에게든 똑같은 탐욕스러움을 드러내며 맹렬하게 돌진한다. 수천의 실들이 남성 노동자를 가까이로 데려온다. 다른 한 편으로 부르주아 여성들의 염원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의 마음에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에게 현재 착취당하는 인류의 시선이 바라보아야 할 밝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최종 목표가 현행 부르주아 체제의 틀 내에서라도 지위 개선을 바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열망을 막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장애물들은 언제나 이런 열망을 실현하는 과정을 저지했다. 여성은 오직 사회화된 노동의 세계, 즉 조화와 정의의 세계에서만 평등한 권리를 소유하고,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것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들에게는 법 조항에 공식적으로 평등이 포함될 때, 그들이 압제와 노예화 그리고 구속의 낡은 세계, 그래서 눈물과 고난으로 얼룩진 낡은 세계에서 자신들만을 위한 안락한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대부분에게 남성과 동등한 권리는 단지 불평등을 동등하게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만, "선택받은 소수", 즉 부르주아 여성들에게는 지금까지 부르주아 계급의 남성들만이 향유해왔던 권리와 특권에 새롭고 전례 없는 문이 열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여성들이 획득한 특권은 그녀의 어린 자매들을 착취할 수 있는 또 다른 무기가 될 것이며, 사회적으로 반대되는 두 진영의 여성들 사이의 분할은 더욱 가속될 것이다. 그들의 이해는 더욱 첨예하게 충돌할 것이며, 그들의 염원은 더욱 명백하게 모순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여성 의제"는 어디에 있을까?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외쳐댔던 임무와 염원의 단일함은 어디에 있을까?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보면 그런 단일함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의제"는 정치적 정당의 의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여성 의제의 해결은 오직 모든 정당과 모든 여성들의 참여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애쓰겠지만, 모두 헛된 일이다. 어떤 급진적인 독일 페미니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드러나는 사실들은 우리가 페미니스트들의 이런 안일한 환상을 거부하도록 만들고 있다...
인류의 역사 내내 생산의 조건과 형태는 여성들을 종속시켰고, 점차 그녀들을 압제와 복종의 지위로 내쫓았으며, 여성들의 대부분이 지금까지도 그 지위에 머무르고 있다.
여성들이 그녀들의 잃어버린 중요성과 독립성을 되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사회, 경제적 구조의 거대한 격변이 필요하다. 한 때 대부분의 탁월한 사상가들에게 너무 어려워 보였던 문제들을 이제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전능한 생산의 조건이 풀어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여성을 노예로 만들어왔던 바로 그 힘이 지금, 즉 발전의 국면에서는 자유와 독립의 길로 그녀들을 이끌고 있다...
여성 의제는 대략 19세기 중반―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노동의 영역에 진입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때―에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자본주의의 포악스러운 성공의 영향 때문에 중간 계급은 난국의 파도에 휩쓸렸다. 경제적 변화는 쁘띠 부르주아들과 중간 부르주아들의 재정상황을 불안정하게 했고, 부르주아 여성들은 위협적인 상황의 딜레마에 직면했다; 가난을 받아들이거나 일할 권리를 얻거나. 이러한 사회계층의 부인과 딸들은 대학, 예술 살롱, 편집학교, 사무실 등의 문을 두드리면서 그들에게 열려진 직업의 세계로 쏟아져 나왔다. 과학과 더 높은 문화적 이득에 대한 접근권을 얻고자 했던 부르주아 여성들의 열망은 그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일용의 양식"을 해결하는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여성들은 처음부터 남성들의 견고한 저항에 부딪혔다. 완고한 전쟁은 "편안한 소일거리"를 고수하는 전문직업 남성들과 일용할 빵 값을 버는 일에 풋내기인 여성들 사이에서 벌여졌다. 이 싸움은 "페미니즘"―함께 모여서 자신들의 적인 남성들에게 대항하여 공동의 힘을 모으고자 했던 부르주아 여성들의 시도―의 열기를 드높였다. 이 여성들은 노동 영역에 들어가게 되자 자신들을 '여성운동의 전위부대'라고 자랑스럽게 일컫기 시작했다. 이 여성들은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이 그들의 어린 자매들의 선례를 따르고 있고, 그 자매들이 물집 잡힌 손으로 빚어낸 결과물을 따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부르주아 여성운동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계 모든 나라에서 수십만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공장과 상점에 내몰려 산업의 이 분야 저 분야를 떠맡아왔는데,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이 노동에 진출하는 길을 선구적으로 개척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 덕분에 부르주아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자랑해마지 않는 사회에서의 독립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투쟁의 역사 속에서 일반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물질적인 조건을 향상시키는데 유의미한 공헌을 했다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질 향상에 있어서 얻은 것은 모두가 노동자 계급의 노력, 그 중에서도 특히 프롤레타리아 여성들 스스로 노력한 결과이다. 더 나은 노동조건과 더욱 풍족한 삶을 위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의 불만이 폭발할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왜 공장 사업주가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고, 더 나은 노동조건을 만들겠는가? "노동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정부가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겠는가?...
사회민주주의가 해온 것처럼 여성을 방어해주는 정당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도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구성원이다. 프롤레타리아 가족 구성원들 각각의 지위와 일반적 복지가 만족스러워질수록, 전체 노동자 계급의 최종적인 이익도 더욱 커질 것이다....
사회적인 어려움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원인을 밝히려는 순진한 투사는 비통한 당황스러움에 빠져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순진한 투사는 일반적인 여성운동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의 조건을 향상시킬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평등을 위해 싸우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세계관을 채택하지 않거나 좀 더 완벽한 사회 체제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인류의 미래는 우울하고, 암울하고, 불확실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가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동안, 그들에게 해방은 불완전하지만 공평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틀림없다. 오직 노동자 계급만이 사회적 관계가 왜곡된 현대 사회에서 도의를 유지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은 확고하고 신중한 발걸음으로 최종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전진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은 여성 노동자들을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용감하게 가시밭길 같은 노동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다리는 처지고, 몸은 찢겨진다. 길을 따라 위험한 절벽이 있고 먹이를 노리는 사나운 짐승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다.
그러나 이 길을 갈 때만이 여성은 멀지만 매혹적인 목적지―새로운 노동의 세계에서 얻을 그녀의 진정한 해방―에 도달할 수 있다. 밝은 미래를 향한 이 어려운 여정동안 최근까지 아무런 권리도 없이 굴욕적으로 짓밟히는 노예였던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그녀에게 달라 붙어있는 노예 근성을 물리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녀는 조금씩 스스로를 사랑에 자유로운 독립적인 노동자, 즉 독립적인 개인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여성들의 일할 권리를 쟁취하는 사람은 바로 노동자의 지위에서 싸우는 그녀요; 미래의 "자유롭고" 동시에 "평등한" 여성들을 위해 토대를 준비하는 사람도 바로 그녀 자신, "어린 자매들"이다.
이 때, 무슨 이유로 여성노동자들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와 단결해야 하는가? 만일 그런 동맹관계가 있더라도 실제로 그 동맹의 이득을 지키려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여성노동자는 결코 아니다. 그녀가 그녀의 구세주일 뿐이다; 그녀의 미래는 그녀의 손안에 있다. 여성노동자는 그녀의 계급적 이해를 수호할 것이고,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세계"라는 거창한 연설 따위에 속지 않는다. 여성노동자는 부르주아 여성의 목표가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회의 틀 내에서 그들만의 복지를 보호하는 것인데 반해 우리의 목표는 낡고 오래된 세계에서 보편적인 노동과 동료들 간의 연대, 기쁨 넘치는 자유의 새로운 사원을 건설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고, 잊지 않을 것이다.
결혼과 가족 문제
이제 우리의 주의를 여성문제의 다른 측면인 가족문제로 돌려보자. 우리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에 있어서 이 급박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다.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 박사나 학사 학위를 받을 권리를 위한 투쟁, 동일한 노동에 동일한 임금을 받을 권리를 위한 투쟁이 평등을 위한 투쟁의 전부가 아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진부하고 억압적인 현재의 가족 형태라는 무거운 사슬을 벗어 던져야 한다. 여성에게 있어서 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독립을 얻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관습과 법에 의해 굳게 다져진 오늘날의 가족 구조 안에서 여성은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억압받고 있다. 대부분의 문명화된 나라에서 민법은 여성들을 남편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보고 남편에게 그녀의 재산을 처분할 권리뿐만 아니라 그녀를 도덕적이고 육체적으로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공식적이고 법률적 예속이 끝나는 곳에서 "여론"이라는 힘이 작용하기 시작된다. "신성한 재산 제도"를 보존하려는 부르주아들이 이 여론을 창조하고 지지한다. "이중규범"이라는 위선은 또 다른 무기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여성의 노동에 아주 낮은 임금을 지불하면서 야만적인 경제적 악덕으로 그녀를 짓밟아 뭉개고 있다. 여성은 스스로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대신에 그녀에게는 결혼이라는 굴종을 자비로운 대안으로 삼거나 성매매―사람들이 공적으로는 멸시하고 박해하지만 사적으로는 고무하고 지원하는―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주어져있다. 결혼생활의 어두운 면과 현존하는 가족 구조에서 여성의 지위 때문에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도 많은 글들이 벌써 쓰여져 있다. 문학작품들은 결혼과 가족 생활의 올가미에 대한 우울한 묘사들로 가득 차있다. 얼마나 많은 심리극들이 상연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삶들이 불구가 되었는가!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현대의 가족구조가 모든 계급과 계층의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관습과 전통은 그녀가 어느 계층에 속하든지 젊은 엄마들을 박해한다; 법은 부르주아 여성, 프롤레타리아 여성, 농민 여성, 이 모두를 그들의 남편의 감시 아래 둔다.
우리는 마침내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단결할 수 있는 여성 문제의 한 측면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그녀들을 억압하는 조건에 맞서 함께 투쟁할 수 없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슬픔과 고통이 계급 적대의 발톱을 완화하고 서로 다른 진영의 여성들에게 공동의 염원과 공동의 행동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공동의 열망과 목적에 기초한 부르주아 여성들과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협동이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스트들은 결혼의 자유로운 형태와 "모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매춘부를 보호하는 일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관계의 새로운 형태를 모색하고 양성간의 "도덕적 평등"을 열정적으로 요구하는 페미니스트 문학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아라. 경제적 해방의 영역에 있어서 부르주아 여성들은 "신여성"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거대하고 강력한 부대에 뒤떨어져있지만, 가족문제를 해결하는 싸움에서 승리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실 아닌가?
이 곳 러시아에서 중산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이 독립적인 임금수입자들은 1860년대에 노동시장에 뛰어들었다―들은 오래 전부터 결혼문제의 혼란스러운 부분들을 실제적으로 해결해왔다. 그들은 용감하게 "고립된" 전통적 기독교 결혼의 가족을 그 사회계층의 요구에 부합하는 좀 더 유연한 유형의 관계들로 교체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개별 여성 차원의 주관적인 해결은 상황을 바꾸지도, 가족생활의 우울한 상을 전반적으로 완화시키지도 못했다. 만약 어떤 힘이 가족의 현대적 형태를 파괴하고 있다면, 그 힘은 다른 여성들보다 좀 더 강한 여성들 개개인의 엄청난 노력이 아니라 생명체는 아니지만 강력한 생산의 힘이고, 이것이 단호하게 새로운 토대 위의 삶을 건설하고 있다.
긴 장갑을 벗어 던지고 어떠한 요구나 구속 없이 "감히 사랑할" 권리를 사회에 요구하는 부르주아 젊은 여성 개개인의 영웅적인 투쟁은 가족의 굴레 속에서 지쳐가는 모든 여성들에게 본보기로 작용해야만 한다 ― 이것이 외국의 좀 더 해방된 페미니스트들과 국내에서 진보적이라는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equal righters)이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즉, 결혼 문제는 외적인 상황과 무관하게 자신의 관점에서만 해결되는 것이다; 결혼문제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과는 무관하게 해결된다. 개인들의 고립되고 영웅적인 노력은 충분하다. 이제 여성이 "감히 할 수 있도록"하자. 그러면 결혼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덜 영웅적인 여성들은 불신에 머리를 흔들었다. "현명한 작가에 의해 그려진 독립심이 강하고, 이타적인 친구들과 특출난 매력을 지닌 축복받은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긴 장갑을 벗어 던지는 것은 매우 잘 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경우엔 어떠한가? 자본도, 충분한 임금도, 친구도 없으며 매력적이지도 않은 여성들 말이다." 모성에 대한 문제는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을 괴롭힌다. "자유로운 사랑"은 가능한가? 현재 우리 사회의 경제적 구조 속에서 자유로운 사랑이 평범한 현상으로, 개인적인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범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 현행의 결혼에서 사적 재산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 있는가? 개인주의적인 세계에서 여성의 이익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결혼 계약을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가? 결혼계약은 모성의 모든 어려움을 여성에게만 부과하지 않겠다는 유일한 보증서이다. 예전에 남성 노동자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이제 여성에게 생기지 않겠는가? 도제의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지 않고 길드 규제를 없앤 것은 자본에게 노동자들을 지배할 수 있는 완전한 권력을 주었다. "노동과 자본에게 계약의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은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의 수단이 되었다. 현재의 계급 사회에 시종일관 소개되고 있는 "자유로운 사랑"은 가족 생활이라는 고역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는 대신 그녀의 어깨에 새로운 짐―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아이를 돌봐야하는 일―을 지울 것이 분명하다.
오직 사회적 관계라는 영역에서의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변혁―의무가 가족에서 사회와 국가로 이행되는 변혁―이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사랑"의 원칙이 어느 정도 충족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계급 국가가 아무리 민주적이 된다 할지라도 오늘날 개인주의적 단위인 가족이 수행해 온 엄마와 아이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게 지우도록 할 수 있을까? 오직 모든 생산 관계가 변혁될 때만이 "자유로운 사랑" 공식의 부정적인 면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필요조건을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조건에서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편리한 딱지를 붙이고 슬쩍 넘어가려는 타락과 기형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회사를 소유하거나 관리하면서 그들의 여성 노동자나 사무직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변덕을 만족시키도록 강요하는, 이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고라는 위협까지 사용하는 그런 남성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자유로운 사랑"을 실행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집 안의 하녀들을 강간하고, 임신한 그들을 길거리로 내쫓아버리는 "집주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공식에 충실한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그런 종류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결혼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두 성을 평등하게 묶어줄 수 있는 '단일한 도덕'을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현재의 섹스 면허증(sexual license)[역주 - 성관계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결혼을 빗대어 한 말]을 반대하고, 오직 진정한 사랑에 기반한 자유로운 결합만을 도덕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은 "자유로운 결혼"이라는 당신의 이상이 현재의 사회에서 실현된다면 성적 자유라는 왜곡된 관습과 별 차이가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모르는가? 오직 여성이 자본과 남편이라는 이중의 의존을 만들어내는 모든 물질적 짐을 덜 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원리는 그 사랑의 결과로 여성이 새로운 슬픔을 느끼게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일하러 나가고 경제적인 독립을 얻을 때, "자유로운 사랑"은 어느 정도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좀 더 좋은 보수를 받는 지식인 여성인 경우에. 그러나 자본에 대한 여성의 의존은 여전히 남아있고, 더욱 더 많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게됨에 따라 이러한 의존은 증가한다.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슬로건이 혼자 먹고살 수 있는 정도밖에 벌지 못하는 이런 여성들의 슬픈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쨌든 "자유로운 사랑"은 이미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실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실현되고 있어서 부르주아들이 몇 차례나 경각을 울려대고 프롤레타리아의 "타락"과 "부도덕"을 퇴치하려고 캠페인을 벌여댔던 것 아닌가? 해방된 부르주아 여성들이 주목하는 결혼 이외의 동거라는 새로운 형태에 페미니스트들이 열광하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되지만, 노동자 계급의 경우가 되면 이런 동거는 "난잡한 육체 관계"라고 경멸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겐 그녀가 기독교에 독실하건 아니건 상관없이 모든 관계가 결과에 있어서는 똑같이 가혹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부인과 어머니에게 가족과 결혼 문제의 핵심은 그 외형적인 형태가 신성한가 세속적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 여성들에게 복잡한 책임을 지우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있다. 물론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벌이를 처분할 권리를 가지는가의 여부, 그녀가 원치 않는 경우에도 남편과 함께 살아야하는 법적 권리가 남편에게 있는지의 여부, 그녀로부터 강제적으로 그녀의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는지의 여부 등은 그녀에게 몹시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그런 민법상의 문구가 아니다. 가족문제를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런 문구들이 아니다. 단지 사회가 사소하지만 (개별적으로 흩어져있는 가족 경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가사 일을 여성들에게서 덜어줄 수만 있어도, 어린 세대를 돌보는 책임을 떠맡아줄 수만 있어도, 모성을 보호해줄 수만 있어도, 적어도 생후 1개월의 아이들에게 어머니를 돌려줄 수만 있어도, 관계의 문제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닐텐데.
합법적이고 성스러운 기독교 결혼 계약에 반대해야 하므로 페미니스트들은 광신적인 믿음에 맞서 싸우고 있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결혼과 가족의 현대적 형태 배후에 있는 요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동안 그들이 양성간의 관계를 변혁하는데도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부르주아적 접근과 프롤레타리아적 접근의 주요한 차이를 발견한다.
현재 계급 사회의 우울한 배경에 맞선 새로운 유형의 가족과 새로운 결혼 관계가 가능하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는 부르주아 진영의 페미니스트와 사회 개혁론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형태를 찾는데 곤경을 겪고 있다. 그들은 삶 자체가 이 형태들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대가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새로운 형태를 발견해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의 사회 체제 하에서도 복잡한 가족 문제를 풀 수 있는 성적 관계의 현대적 형태는 분명 존재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부르주아 세계의 이데올로그들―저널리스트, 작가,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저명한 여성 투사들―은 번갈아 가며 "가족 만병통치약", 즉 새로운 "가족 형태"를 내놓는다.
이러한 결혼 형태는 얼마나 유토피아적으로 들리는가. 그러나 현대 가족 형태의 우울한 현실을 조명해볼 때, 이 완화제는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자유로운 관계"와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이러한 공식들이 실행되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의 근본적인 개조가 일어나야만 한다; 더욱이, 도덕적인 규범 및 성적 규범과 인류의 심리상태 전체가 철저한 진화를 겪어야 한다. 현대의 사람이 "자유로운 사랑"에 심리적으로 잘 대처할 수 있는가? 가장 훌륭한 인간의 영혼마저도 삼켜버리는 질투는 어떠한가? 그리고 타인의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마저도 소유하길 원하는 저 뿌리깊은 소유욕은? 타인의 인격을 제대로 존중하지 못하는 무능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종속시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려는 습관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느끼는 끝도 없는 외로움이라는 쓰디쓴 절망적인 황폐한 느낌은? 외로운 사람, 존재의 근본에서부터 개인주의자인 그는 어디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까? 기쁨과 실망, 염원을 함께 하는 공동체는 개개인의 감정적인 에너지와 지적인 에너지를 배출하는 가장 좋은 장소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상호간에 작용하는 영향력을 느끼는 방식으로 이런 공동체와 더불어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오늘날 공동체의 삶이 정말로 개인들의 소소한 기쁨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현재의 적대적인 세계에서는 "단일하고" "유일한" 두 영혼이 없다면 공동체주의자인 사회주의자조차 외로울 뿐이다; 우리는 오직 노동자 계급 안에서만 미래의 좀 더 조화롭고 좀 더 사회적인 관계를 희미하게 볼 수 있다. 가족문제는 삶 그 자체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사회 체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다른 결혼 형태도 제기되고 있다. 결혼결합을 자손 생산 방법으로만 간주하는 진보적인 여성과 사회 사상가들이 꽤 있다. 그들은 결혼 그 자체로는 여성에게 어떤 특별한 가치도 부여해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어머니가 되는 것만이 그녀에게 삶의 목적이고, 신성한 목표이며 부여받은 임무이다. 루스 브레이(Ruth Bray)와 엘렌 키(Ellen Key)와 같이 고무된 주창자들 덕택에 여성을 인간이라기보다 어머니가 되는 여성으로 인식하는 부르주아의 이상(理想)이 진보적인 것이 되는 후광을 얻었다. 외국의 문학은 열정 넘치는 이 "진보적 여성들"이 제기한 슬로건을 붙들었다. 그리고 심지어 이 곳 러시아에서조차 〔1905년의〕정치적 격변 이전, 사회적 가치들이 변화하기 이전의 시기에는 모성의 문제가 일간지의 주목을 받았었다. "모성의 권리"라는 슬로건은 가장 넓은 범위의 여성들에게서 생생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된 페미니스트들의 모든 제안이 비현실적으로 다양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고 화제인 문제라 여성들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없다.
"모성의 권리"는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여성들도 감동시키는 그런 종류의 문제이다.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권리 ― 이것은 "어떤 여성의 마음"에도 바로 꽂혀서 그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황금의 언어이다. "자기 자신의" 아이에게 자신의 모유를 먹이고 아이가 깨어나는 첫 신호를 지켜볼 수 있는 권리, 그 작은 몸을 보살피고 그 연약한 영혼을 삶의 첫 단계에서 겪게되는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권리 ― 어떤 여성이 이러한 요구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시 한번 각기 다른 계층의 여성들 사이의 단결의 순간을 만들 수 있는 이슈를 발견한 것만 같다; 마침내 우리는 두 개의 적대적인 세계에 사는 여성들이 단결할 수 있는 다리를 찾아낸 것만 같다. 급진적인 부르주아 여성들이 "모성의 권리"로 이해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면 우리는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부르주아 여성 투사들이 그리는 모성 문제 해결책에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실제로 동의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열정적으로 변명하는 사람들의 눈에 모성은 대체로 신성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사들은 아이를 낳는 활동이 법률상에서는 신성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을 자연적인 활동―아이를 낳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애쓰면서 막대기를 다른 방향으로 구부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성은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목표가 되었다...
모성의 의무와 가족에 대한 엘렌 키의 강한 애착은 그녀에게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변혁된 사회에서조차 고립된 가족단위는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녀가 보기에 유일한 변화는 편리함이나 물질적 이득이라는 결혼의 부수적인 요소들이 결혼결합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결혼은 의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서로의 기호에 맞추는 것일 뿐이다―사랑과 결혼은 진짜 동의어가 될 것이다. 고립된 가족 단위는 과다경쟁과 압박, 외로움으로 점철된 현대 개인주의 사회의 결과이다; 고립된 가족은 포악한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키는 가족을 사회주의 사회에 남겨주고 싶어한다! 오늘날 혈연과 혈족의 유대가 삶의 유일한 의지로, 고난과 불운의 시기에 찾는 유일한 피난처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에도 도덕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런 유대가 필요할까? 키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상적인 가족", 즉 부르주아 사회 구조의 열렬한 신봉자들이 경의를 표하며 바라보는 중간계층 부르주아들의 이기적인 가족 단위를 너무나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모순 속에서 길을 잃었던 사람은 엉뚱하지만 재능 있었던 엘렌 키만은 아니다. 결혼과 가족 문제만큼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한 문제는 아마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한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흥미진진할 것이다. 가족이 사라질까? 아니면 현재의 가족의 무질서가 일시적인 위기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현재의 가족 형태가 미래 사회에서도 그대로 보존될 것인가, 아니면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함께 매장될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매우 다른 답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육 기능이 가족에서 사회로 이전되면 현대의 고립된 가족을 지탱하던 끈끈한 유대는 느슨해질 것이다; 분해과정은 점점 그 속도가 빨라질 것이고, 미래의 결혼 관계의 희미한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현재 사회의 여러 영향 때문에 이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있을 때 우리는 이 윤곽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의 의무적인 결혼 형태가 사랑하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결합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어야만 하는가?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여성들의 빈곤한 상상력에서 나온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이상(理想)이 양성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가 세우게 될 규범에 어느 정도는 부합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사회적인 영향은 매우 복잡하고 그 영향력의 상호작용 또한 매우 다양하여, 체제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했을 때 관계들이 어떤 모습일까를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천천히 완성되고 있는 양성 관계의 진화는 결혼 의식이나 의무적인 개별 가족은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비평에 답한다: 비록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옹호하려는 우리의 논거가 당신들에게는 잘못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들과 노동 계급의 대표들에게 똑같이 긴급한 요구 자체의 중요성이 감소되는가? 사회적으로 다른 두 진영의 여성들이 공동의 정치적 염원을 위해 그들을 갈라놓는 계급 적대의 장벽을 극복할 수는 없는가? 그러나 정말로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 힘에 맞서 공동으로 투쟁할 수 있는가? 다른 여러 문제들이 관련되어 있는 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분열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특수한 문제의 경우에는 다양한 사회적 계급에 속해있는 여성들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에 힘을 모으자는 페미니스트들의 제안을 노동자 계급의 대표들이 거절했을 때 페미니스트들은 그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당파적 충성심을 발견하고는 안타깝고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위와 같은 논거를 계속 들이댄다. 이것이 진짜 사실인가? 진정으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정치적 염원이 있는가, 혹은 다른 모든 경우들처럼 이 경우에서도 계급적대가 계급을 뛰어넘은 단일한 여성 군대를 조직하는 것을 막게 되는가?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달성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사용할 전술의 윤곽을 그리기 전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적 개혁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일부는 사회주의―물론 먼 미래에 실행될―를 옹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의 지위에서 싸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 대다수는 지금의 사회적 질병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남성들이 상황을 주도해왔기 때문에 깊어진 것이라 보고, 일단 자신들이 대의원 자리를 얻기만 하면 그런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페미니스트 진영들 각각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계급투쟁의 문제가 제기될 때면 언제나 화들짝 놀라 전쟁터를 떠났다. 그들은 이질적인 원인 때문에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보다 친근한 부르주아 자유주의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의 정치적 열망 속의 본심을 억누르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이 정치적 영역에 개입하는 것이 노동자 계급의 여성에게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어린 자매들에게 아무리 확신한다 할지라도, 페미니스트 운동 전체에 침투해있는 부르주아 정신은 평등한 정치적 권리 요구에까지 부르주아적인 색채를 입힐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보편적인 여성들의 요구로 보일테지만... 정치적 권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목표와 이해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여성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을 만들었다. 이것이 두 여성진영의 긴급한 임무가 어느 정도까지는 일치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권력에 가까이 간 모든 계급의 대표자들은 무엇보다도 모든 나라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을 담고 있는 민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에게 좀 더 유리한 노동 조건을 만드는 법적 변화를 촉구한다; 그녀들이 성매매를 합법화하는 규제에 모두 함께 맞선 일 등. 그러나 이러한 긴급한 임무가 일치한 것은 순전히 형식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계급적 이해에 따라 이런 개혁에 대한 두 진영의 태도가 매우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무어라 말하건 간에 계급적 본능은 언제나 "계급을 초월한" 정치라는 고상한 열망보다도 더 강력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곤 했다. 부르주아 여성들과 "어린 자매들"이 똑같이 불평등한 동안은 부르주아 여성들이 여성들의 보편적인 이익을 옹호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장벽이 사라지고 부르주아 여성들이 정치활동의 권리를 얻게되면, "모든 여성의 권리"를 수호하던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이 향유하고 있는 특권을 열광적으로 수호하게 될 것이다. 어린 자매들이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오히려 만족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노동자들에게 "보편적인 여성들"의 원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공동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불신을 갖게 된다. PSSP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 중에서
from <The Social Basis of the Woman Question>
번역 | 여성위원회(준)
부르주아 학자들이 한 성(性)의 다른 성(性)에 대한 우월성의 문제를 논쟁하거나 지력(知力)을 재고 남성과 여성의 심리구조를 비교하는데 열중하도록 놔둔 채, 역사적 유물론의 계승자들은 각각의 성들의 자연적 특성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각각의 개인들이 자기-결정에 있어서 가장 완전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실질적 기회와 모든 자연적인 성향들을 발전시키고 적용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여지를 가져야한다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의 계승자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의제로부터 분리된 여성들만의 의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특정한 경제적 요인들이 여성종속의 원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적인 특성은 부차적인 요인이 되어왔다. 이러한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 즉 과거에 여성들을 종속시켜왔던 권력관계를 전화시키는 것만이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여성들은 새로운 사회관계 및 생산관계에 맞춰 조직되는 세계에서만 진정 자유롭고 평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 체계 안에서 여성의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노동자 계급 의제에 대한 급진적인 해결은 생산관계를 완전히 재구조화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급박한 이해를 만족시키는데 복무하는 개혁들을 위해 일하지 못하는가? 반대로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성과들 하나 하나는 인류가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왕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발걸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이 획득한 권리들은 그녀를 완전한 해방이라는 명확한 목표에 더 가까이 데려다 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제일 먼저 여성들의 권리를 남성들의 권리와 평등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강령에 포함시켰다; 연설과 인쇄매체에서 당은 언제 어디서나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제한들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른 정당들과 정부들이 여성에게 우호적인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제해 온 것은 바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이 정당은 스스로의 이론적인 입장에 있어서 여성들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여성 평등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 경우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equal righters)"들이 이렇게 강력하고 능숙한 당의 지지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실은 그들이 아무리 급진적일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부르주아 계급에 충실하다는 점에 있다. 정치적 자유는 러시아 부르주아의 성장과 권력을 위해서 바로 지금 핵심적인 필요조건이다: 그것이 없다면, 부르주아의 모든 경제적 복지는 사상누각이라는 점이 판명될 것이다. 정치적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삶 그 자체로부터 나온 요구이다.
"직업으로의 접근"이라는 슬로건은 이제 충분하지 않다; 오직 정부에 직접 참여하는 것만이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를 상승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약속해줄 수 있다. 투표권을 얻고자하는 중산계급 여성들의 정열적인 열망과 현대 관료체계에 대한 적의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중산계급 여성들의 정치적 평등 요구에 있어서 러시아의 페미니스트들은 중산계급 여성들에겐 외국 자매와 같이 친밀한 존재이다; 사회민주주의적인 배움이 열어준 넓은 시야는 러시아 페미니스트들에겐 이질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페미니스트들은 현존하는 계급 사회의 틀 안에서 평등을 구한다; 어떤 방식으로도 그들은 이 사회의 기초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특권들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싸운다. 우리는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대표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점은 불가피하게 그들의 사회적 지위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경제적 독립을 위한 투쟁
무엇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계급 모순에 기초한 사회 내에서 단일한 여성운동이 존재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물어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하나의 균질한 대중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편파적인 시각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남성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세계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할되어있다; 한 여성 진영의 이해와 염원은 부르주아 계급에 가까운 반면, 다른 진영은 프롤레타리아의 그것과 관련이 깊고, 그들이 요구하는 해방은 여성 의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진영이 비록 일반적인 "여성 해방"의 슬로건을 따른다 할지라도 그들의 목표와 이해는 다르다. 각각의 진영은 무의식적으로 그들 계급의 이해에 근거한 운동의 출발점을 세우고, 그리고 이것은 다시 각각의 진영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목표와 임무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계급을 낳는다....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해방에 필수적인 현재의 경제와 사회적인 구조의 근본적인 변형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모든 계급의 여성들의 단기적인 과제가 일치할지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운동의 방향과 사용될 전술을 결정하는 두 진영의 최종적인 목표는 첨예하게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현행 자본주의 세계의 틀 안에서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구체적인 결론인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에게 있어서 현 시대의 평등한 권리는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종속에 맞선 투쟁을 전진시키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남성들이 여성에게는 오직 구속과 의무만을 지우면서 남성들만을 위한 모든 권력과 특권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승리는 이전에 남성이 배타적으로 향유했던 특권이 "공평한 성"에게 용인될 때 얻어진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태도는 다르다. 그녀들은 남성을 적이나 압제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녀들은 남성을 그들의 동료로, 일상의 고역을 함께 나누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로 생각한다. 여성과 그녀의 남성 동료는 동일한 사회적 조건에 의해 노예화되어있다; 증오스러운 자본주의의 사슬이 그들의 의지를 짓밟고 그들로부터 삶의 기쁨과 활력을 앗아간다. 여성들이 현재의 체제의 여러 가지 특정한 상황에서 이중의 부담을 지는 것은 사실이며, 고용 노동의 조건이 때때로 여성 노동자들을 남성들의 경쟁자로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원치않는 상황이 누구의 잘못인지 노동자 계급은 알고 있다.
여성 노동자들은 불행한 그녀들의 남자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번뜩거리는 입을 가진 탐욕스러운 괴물을 증오한다. 이 괴물은 오로지 희생양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쥐어짜고 수백만 인간의 삶을 대가로 성장하는 것만을 바라기 때문에, 남성, 여성, 아이 상관없이 누구에게든 똑같은 탐욕스러움을 드러내며 맹렬하게 돌진한다. 수천의 실들이 남성 노동자를 가까이로 데려온다. 다른 한 편으로 부르주아 여성들의 염원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의 마음에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에게 현재 착취당하는 인류의 시선이 바라보아야 할 밝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최종 목표가 현행 부르주아 체제의 틀 내에서라도 지위 개선을 바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열망을 막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장애물들은 언제나 이런 열망을 실현하는 과정을 저지했다. 여성은 오직 사회화된 노동의 세계, 즉 조화와 정의의 세계에서만 평등한 권리를 소유하고,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것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들에게는 법 조항에 공식적으로 평등이 포함될 때, 그들이 압제와 노예화 그리고 구속의 낡은 세계, 그래서 눈물과 고난으로 얼룩진 낡은 세계에서 자신들만을 위한 안락한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대부분에게 남성과 동등한 권리는 단지 불평등을 동등하게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만, "선택받은 소수", 즉 부르주아 여성들에게는 지금까지 부르주아 계급의 남성들만이 향유해왔던 권리와 특권에 새롭고 전례 없는 문이 열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여성들이 획득한 특권은 그녀의 어린 자매들을 착취할 수 있는 또 다른 무기가 될 것이며, 사회적으로 반대되는 두 진영의 여성들 사이의 분할은 더욱 가속될 것이다. 그들의 이해는 더욱 첨예하게 충돌할 것이며, 그들의 염원은 더욱 명백하게 모순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여성 의제"는 어디에 있을까?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외쳐댔던 임무와 염원의 단일함은 어디에 있을까?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보면 그런 단일함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의제"는 정치적 정당의 의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여성 의제의 해결은 오직 모든 정당과 모든 여성들의 참여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애쓰겠지만, 모두 헛된 일이다. 어떤 급진적인 독일 페미니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드러나는 사실들은 우리가 페미니스트들의 이런 안일한 환상을 거부하도록 만들고 있다...
인류의 역사 내내 생산의 조건과 형태는 여성들을 종속시켰고, 점차 그녀들을 압제와 복종의 지위로 내쫓았으며, 여성들의 대부분이 지금까지도 그 지위에 머무르고 있다.
여성들이 그녀들의 잃어버린 중요성과 독립성을 되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사회, 경제적 구조의 거대한 격변이 필요하다. 한 때 대부분의 탁월한 사상가들에게 너무 어려워 보였던 문제들을 이제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전능한 생산의 조건이 풀어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여성을 노예로 만들어왔던 바로 그 힘이 지금, 즉 발전의 국면에서는 자유와 독립의 길로 그녀들을 이끌고 있다...
여성 의제는 대략 19세기 중반―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노동의 영역에 진입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때―에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자본주의의 포악스러운 성공의 영향 때문에 중간 계급은 난국의 파도에 휩쓸렸다. 경제적 변화는 쁘띠 부르주아들과 중간 부르주아들의 재정상황을 불안정하게 했고, 부르주아 여성들은 위협적인 상황의 딜레마에 직면했다; 가난을 받아들이거나 일할 권리를 얻거나. 이러한 사회계층의 부인과 딸들은 대학, 예술 살롱, 편집학교, 사무실 등의 문을 두드리면서 그들에게 열려진 직업의 세계로 쏟아져 나왔다. 과학과 더 높은 문화적 이득에 대한 접근권을 얻고자 했던 부르주아 여성들의 열망은 그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일용의 양식"을 해결하는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여성들은 처음부터 남성들의 견고한 저항에 부딪혔다. 완고한 전쟁은 "편안한 소일거리"를 고수하는 전문직업 남성들과 일용할 빵 값을 버는 일에 풋내기인 여성들 사이에서 벌여졌다. 이 싸움은 "페미니즘"―함께 모여서 자신들의 적인 남성들에게 대항하여 공동의 힘을 모으고자 했던 부르주아 여성들의 시도―의 열기를 드높였다. 이 여성들은 노동 영역에 들어가게 되자 자신들을 '여성운동의 전위부대'라고 자랑스럽게 일컫기 시작했다. 이 여성들은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이 그들의 어린 자매들의 선례를 따르고 있고, 그 자매들이 물집 잡힌 손으로 빚어낸 결과물을 따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부르주아 여성운동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계 모든 나라에서 수십만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공장과 상점에 내몰려 산업의 이 분야 저 분야를 떠맡아왔는데,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이 노동에 진출하는 길을 선구적으로 개척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 덕분에 부르주아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자랑해마지 않는 사회에서의 독립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투쟁의 역사 속에서 일반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물질적인 조건을 향상시키는데 유의미한 공헌을 했다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질 향상에 있어서 얻은 것은 모두가 노동자 계급의 노력, 그 중에서도 특히 프롤레타리아 여성들 스스로 노력한 결과이다. 더 나은 노동조건과 더욱 풍족한 삶을 위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의 불만이 폭발할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왜 공장 사업주가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고, 더 나은 노동조건을 만들겠는가? "노동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정부가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겠는가?...
사회민주주의가 해온 것처럼 여성을 방어해주는 정당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도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구성원이다. 프롤레타리아 가족 구성원들 각각의 지위와 일반적 복지가 만족스러워질수록, 전체 노동자 계급의 최종적인 이익도 더욱 커질 것이다....
사회적인 어려움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원인을 밝히려는 순진한 투사는 비통한 당황스러움에 빠져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순진한 투사는 일반적인 여성운동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의 조건을 향상시킬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평등을 위해 싸우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세계관을 채택하지 않거나 좀 더 완벽한 사회 체제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인류의 미래는 우울하고, 암울하고, 불확실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가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동안, 그들에게 해방은 불완전하지만 공평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틀림없다. 오직 노동자 계급만이 사회적 관계가 왜곡된 현대 사회에서 도의를 유지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은 확고하고 신중한 발걸음으로 최종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전진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은 여성 노동자들을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용감하게 가시밭길 같은 노동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다리는 처지고, 몸은 찢겨진다. 길을 따라 위험한 절벽이 있고 먹이를 노리는 사나운 짐승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다.
그러나 이 길을 갈 때만이 여성은 멀지만 매혹적인 목적지―새로운 노동의 세계에서 얻을 그녀의 진정한 해방―에 도달할 수 있다. 밝은 미래를 향한 이 어려운 여정동안 최근까지 아무런 권리도 없이 굴욕적으로 짓밟히는 노예였던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그녀에게 달라 붙어있는 노예 근성을 물리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녀는 조금씩 스스로를 사랑에 자유로운 독립적인 노동자, 즉 독립적인 개인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여성들의 일할 권리를 쟁취하는 사람은 바로 노동자의 지위에서 싸우는 그녀요; 미래의 "자유롭고" 동시에 "평등한" 여성들을 위해 토대를 준비하는 사람도 바로 그녀 자신, "어린 자매들"이다.
이 때, 무슨 이유로 여성노동자들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와 단결해야 하는가? 만일 그런 동맹관계가 있더라도 실제로 그 동맹의 이득을 지키려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여성노동자는 결코 아니다. 그녀가 그녀의 구세주일 뿐이다; 그녀의 미래는 그녀의 손안에 있다. 여성노동자는 그녀의 계급적 이해를 수호할 것이고,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세계"라는 거창한 연설 따위에 속지 않는다. 여성노동자는 부르주아 여성의 목표가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회의 틀 내에서 그들만의 복지를 보호하는 것인데 반해 우리의 목표는 낡고 오래된 세계에서 보편적인 노동과 동료들 간의 연대, 기쁨 넘치는 자유의 새로운 사원을 건설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고, 잊지 않을 것이다.
결혼과 가족 문제
이제 우리의 주의를 여성문제의 다른 측면인 가족문제로 돌려보자. 우리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에 있어서 이 급박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다.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 박사나 학사 학위를 받을 권리를 위한 투쟁, 동일한 노동에 동일한 임금을 받을 권리를 위한 투쟁이 평등을 위한 투쟁의 전부가 아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진부하고 억압적인 현재의 가족 형태라는 무거운 사슬을 벗어 던져야 한다. 여성에게 있어서 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독립을 얻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관습과 법에 의해 굳게 다져진 오늘날의 가족 구조 안에서 여성은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억압받고 있다. 대부분의 문명화된 나라에서 민법은 여성들을 남편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보고 남편에게 그녀의 재산을 처분할 권리뿐만 아니라 그녀를 도덕적이고 육체적으로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공식적이고 법률적 예속이 끝나는 곳에서 "여론"이라는 힘이 작용하기 시작된다. "신성한 재산 제도"를 보존하려는 부르주아들이 이 여론을 창조하고 지지한다. "이중규범"이라는 위선은 또 다른 무기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여성의 노동에 아주 낮은 임금을 지불하면서 야만적인 경제적 악덕으로 그녀를 짓밟아 뭉개고 있다. 여성은 스스로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대신에 그녀에게는 결혼이라는 굴종을 자비로운 대안으로 삼거나 성매매―사람들이 공적으로는 멸시하고 박해하지만 사적으로는 고무하고 지원하는―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주어져있다. 결혼생활의 어두운 면과 현존하는 가족 구조에서 여성의 지위 때문에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도 많은 글들이 벌써 쓰여져 있다. 문학작품들은 결혼과 가족 생활의 올가미에 대한 우울한 묘사들로 가득 차있다. 얼마나 많은 심리극들이 상연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삶들이 불구가 되었는가!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현대의 가족구조가 모든 계급과 계층의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관습과 전통은 그녀가 어느 계층에 속하든지 젊은 엄마들을 박해한다; 법은 부르주아 여성, 프롤레타리아 여성, 농민 여성, 이 모두를 그들의 남편의 감시 아래 둔다.
우리는 마침내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단결할 수 있는 여성 문제의 한 측면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그녀들을 억압하는 조건에 맞서 함께 투쟁할 수 없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슬픔과 고통이 계급 적대의 발톱을 완화하고 서로 다른 진영의 여성들에게 공동의 염원과 공동의 행동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공동의 열망과 목적에 기초한 부르주아 여성들과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협동이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스트들은 결혼의 자유로운 형태와 "모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매춘부를 보호하는 일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관계의 새로운 형태를 모색하고 양성간의 "도덕적 평등"을 열정적으로 요구하는 페미니스트 문학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아라. 경제적 해방의 영역에 있어서 부르주아 여성들은 "신여성"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거대하고 강력한 부대에 뒤떨어져있지만, 가족문제를 해결하는 싸움에서 승리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실 아닌가?
이 곳 러시아에서 중산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이 독립적인 임금수입자들은 1860년대에 노동시장에 뛰어들었다―들은 오래 전부터 결혼문제의 혼란스러운 부분들을 실제적으로 해결해왔다. 그들은 용감하게 "고립된" 전통적 기독교 결혼의 가족을 그 사회계층의 요구에 부합하는 좀 더 유연한 유형의 관계들로 교체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개별 여성 차원의 주관적인 해결은 상황을 바꾸지도, 가족생활의 우울한 상을 전반적으로 완화시키지도 못했다. 만약 어떤 힘이 가족의 현대적 형태를 파괴하고 있다면, 그 힘은 다른 여성들보다 좀 더 강한 여성들 개개인의 엄청난 노력이 아니라 생명체는 아니지만 강력한 생산의 힘이고, 이것이 단호하게 새로운 토대 위의 삶을 건설하고 있다.
긴 장갑을 벗어 던지고 어떠한 요구나 구속 없이 "감히 사랑할" 권리를 사회에 요구하는 부르주아 젊은 여성 개개인의 영웅적인 투쟁은 가족의 굴레 속에서 지쳐가는 모든 여성들에게 본보기로 작용해야만 한다 ― 이것이 외국의 좀 더 해방된 페미니스트들과 국내에서 진보적이라는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equal righters)이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즉, 결혼 문제는 외적인 상황과 무관하게 자신의 관점에서만 해결되는 것이다; 결혼문제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과는 무관하게 해결된다. 개인들의 고립되고 영웅적인 노력은 충분하다. 이제 여성이 "감히 할 수 있도록"하자. 그러면 결혼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덜 영웅적인 여성들은 불신에 머리를 흔들었다. "현명한 작가에 의해 그려진 독립심이 강하고, 이타적인 친구들과 특출난 매력을 지닌 축복받은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긴 장갑을 벗어 던지는 것은 매우 잘 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경우엔 어떠한가? 자본도, 충분한 임금도, 친구도 없으며 매력적이지도 않은 여성들 말이다." 모성에 대한 문제는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을 괴롭힌다. "자유로운 사랑"은 가능한가? 현재 우리 사회의 경제적 구조 속에서 자유로운 사랑이 평범한 현상으로, 개인적인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범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 현행의 결혼에서 사적 재산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 있는가? 개인주의적인 세계에서 여성의 이익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결혼 계약을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가? 결혼계약은 모성의 모든 어려움을 여성에게만 부과하지 않겠다는 유일한 보증서이다. 예전에 남성 노동자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이제 여성에게 생기지 않겠는가? 도제의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지 않고 길드 규제를 없앤 것은 자본에게 노동자들을 지배할 수 있는 완전한 권력을 주었다. "노동과 자본에게 계약의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은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의 수단이 되었다. 현재의 계급 사회에 시종일관 소개되고 있는 "자유로운 사랑"은 가족 생활이라는 고역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는 대신 그녀의 어깨에 새로운 짐―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아이를 돌봐야하는 일―을 지울 것이 분명하다.
오직 사회적 관계라는 영역에서의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변혁―의무가 가족에서 사회와 국가로 이행되는 변혁―이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사랑"의 원칙이 어느 정도 충족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계급 국가가 아무리 민주적이 된다 할지라도 오늘날 개인주의적 단위인 가족이 수행해 온 엄마와 아이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게 지우도록 할 수 있을까? 오직 모든 생산 관계가 변혁될 때만이 "자유로운 사랑" 공식의 부정적인 면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필요조건을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조건에서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편리한 딱지를 붙이고 슬쩍 넘어가려는 타락과 기형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회사를 소유하거나 관리하면서 그들의 여성 노동자나 사무직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변덕을 만족시키도록 강요하는, 이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고라는 위협까지 사용하는 그런 남성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자유로운 사랑"을 실행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집 안의 하녀들을 강간하고, 임신한 그들을 길거리로 내쫓아버리는 "집주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공식에 충실한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그런 종류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결혼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두 성을 평등하게 묶어줄 수 있는 '단일한 도덕'을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현재의 섹스 면허증(sexual license)[역주 - 성관계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결혼을 빗대어 한 말]을 반대하고, 오직 진정한 사랑에 기반한 자유로운 결합만을 도덕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은 "자유로운 결혼"이라는 당신의 이상이 현재의 사회에서 실현된다면 성적 자유라는 왜곡된 관습과 별 차이가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모르는가? 오직 여성이 자본과 남편이라는 이중의 의존을 만들어내는 모든 물질적 짐을 덜 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원리는 그 사랑의 결과로 여성이 새로운 슬픔을 느끼게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일하러 나가고 경제적인 독립을 얻을 때, "자유로운 사랑"은 어느 정도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좀 더 좋은 보수를 받는 지식인 여성인 경우에. 그러나 자본에 대한 여성의 의존은 여전히 남아있고, 더욱 더 많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게됨에 따라 이러한 의존은 증가한다.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슬로건이 혼자 먹고살 수 있는 정도밖에 벌지 못하는 이런 여성들의 슬픈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쨌든 "자유로운 사랑"은 이미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실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실현되고 있어서 부르주아들이 몇 차례나 경각을 울려대고 프롤레타리아의 "타락"과 "부도덕"을 퇴치하려고 캠페인을 벌여댔던 것 아닌가? 해방된 부르주아 여성들이 주목하는 결혼 이외의 동거라는 새로운 형태에 페미니스트들이 열광하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되지만, 노동자 계급의 경우가 되면 이런 동거는 "난잡한 육체 관계"라고 경멸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겐 그녀가 기독교에 독실하건 아니건 상관없이 모든 관계가 결과에 있어서는 똑같이 가혹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부인과 어머니에게 가족과 결혼 문제의 핵심은 그 외형적인 형태가 신성한가 세속적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 여성들에게 복잡한 책임을 지우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있다. 물론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벌이를 처분할 권리를 가지는가의 여부, 그녀가 원치 않는 경우에도 남편과 함께 살아야하는 법적 권리가 남편에게 있는지의 여부, 그녀로부터 강제적으로 그녀의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는지의 여부 등은 그녀에게 몹시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그런 민법상의 문구가 아니다. 가족문제를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런 문구들이 아니다. 단지 사회가 사소하지만 (개별적으로 흩어져있는 가족 경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가사 일을 여성들에게서 덜어줄 수만 있어도, 어린 세대를 돌보는 책임을 떠맡아줄 수만 있어도, 모성을 보호해줄 수만 있어도, 적어도 생후 1개월의 아이들에게 어머니를 돌려줄 수만 있어도, 관계의 문제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닐텐데.
합법적이고 성스러운 기독교 결혼 계약에 반대해야 하므로 페미니스트들은 광신적인 믿음에 맞서 싸우고 있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결혼과 가족의 현대적 형태 배후에 있는 요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동안 그들이 양성간의 관계를 변혁하는데도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부르주아적 접근과 프롤레타리아적 접근의 주요한 차이를 발견한다.
현재 계급 사회의 우울한 배경에 맞선 새로운 유형의 가족과 새로운 결혼 관계가 가능하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는 부르주아 진영의 페미니스트와 사회 개혁론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형태를 찾는데 곤경을 겪고 있다. 그들은 삶 자체가 이 형태들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대가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새로운 형태를 발견해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의 사회 체제 하에서도 복잡한 가족 문제를 풀 수 있는 성적 관계의 현대적 형태는 분명 존재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부르주아 세계의 이데올로그들―저널리스트, 작가,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저명한 여성 투사들―은 번갈아 가며 "가족 만병통치약", 즉 새로운 "가족 형태"를 내놓는다.
이러한 결혼 형태는 얼마나 유토피아적으로 들리는가. 그러나 현대 가족 형태의 우울한 현실을 조명해볼 때, 이 완화제는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자유로운 관계"와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이러한 공식들이 실행되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의 근본적인 개조가 일어나야만 한다; 더욱이, 도덕적인 규범 및 성적 규범과 인류의 심리상태 전체가 철저한 진화를 겪어야 한다. 현대의 사람이 "자유로운 사랑"에 심리적으로 잘 대처할 수 있는가? 가장 훌륭한 인간의 영혼마저도 삼켜버리는 질투는 어떠한가? 그리고 타인의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마저도 소유하길 원하는 저 뿌리깊은 소유욕은? 타인의 인격을 제대로 존중하지 못하는 무능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종속시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려는 습관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느끼는 끝도 없는 외로움이라는 쓰디쓴 절망적인 황폐한 느낌은? 외로운 사람, 존재의 근본에서부터 개인주의자인 그는 어디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까? 기쁨과 실망, 염원을 함께 하는 공동체는 개개인의 감정적인 에너지와 지적인 에너지를 배출하는 가장 좋은 장소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상호간에 작용하는 영향력을 느끼는 방식으로 이런 공동체와 더불어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오늘날 공동체의 삶이 정말로 개인들의 소소한 기쁨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현재의 적대적인 세계에서는 "단일하고" "유일한" 두 영혼이 없다면 공동체주의자인 사회주의자조차 외로울 뿐이다; 우리는 오직 노동자 계급 안에서만 미래의 좀 더 조화롭고 좀 더 사회적인 관계를 희미하게 볼 수 있다. 가족문제는 삶 그 자체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사회 체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다른 결혼 형태도 제기되고 있다. 결혼결합을 자손 생산 방법으로만 간주하는 진보적인 여성과 사회 사상가들이 꽤 있다. 그들은 결혼 그 자체로는 여성에게 어떤 특별한 가치도 부여해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어머니가 되는 것만이 그녀에게 삶의 목적이고, 신성한 목표이며 부여받은 임무이다. 루스 브레이(Ruth Bray)와 엘렌 키(Ellen Key)와 같이 고무된 주창자들 덕택에 여성을 인간이라기보다 어머니가 되는 여성으로 인식하는 부르주아의 이상(理想)이 진보적인 것이 되는 후광을 얻었다. 외국의 문학은 열정 넘치는 이 "진보적 여성들"이 제기한 슬로건을 붙들었다. 그리고 심지어 이 곳 러시아에서조차 〔1905년의〕정치적 격변 이전, 사회적 가치들이 변화하기 이전의 시기에는 모성의 문제가 일간지의 주목을 받았었다. "모성의 권리"라는 슬로건은 가장 넓은 범위의 여성들에게서 생생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된 페미니스트들의 모든 제안이 비현실적으로 다양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고 화제인 문제라 여성들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없다.
"모성의 권리"는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여성들도 감동시키는 그런 종류의 문제이다.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권리 ― 이것은 "어떤 여성의 마음"에도 바로 꽂혀서 그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황금의 언어이다. "자기 자신의" 아이에게 자신의 모유를 먹이고 아이가 깨어나는 첫 신호를 지켜볼 수 있는 권리, 그 작은 몸을 보살피고 그 연약한 영혼을 삶의 첫 단계에서 겪게되는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권리 ― 어떤 여성이 이러한 요구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시 한번 각기 다른 계층의 여성들 사이의 단결의 순간을 만들 수 있는 이슈를 발견한 것만 같다; 마침내 우리는 두 개의 적대적인 세계에 사는 여성들이 단결할 수 있는 다리를 찾아낸 것만 같다. 급진적인 부르주아 여성들이 "모성의 권리"로 이해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면 우리는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부르주아 여성 투사들이 그리는 모성 문제 해결책에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실제로 동의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열정적으로 변명하는 사람들의 눈에 모성은 대체로 신성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사들은 아이를 낳는 활동이 법률상에서는 신성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을 자연적인 활동―아이를 낳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애쓰면서 막대기를 다른 방향으로 구부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성은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목표가 되었다...
모성의 의무와 가족에 대한 엘렌 키의 강한 애착은 그녀에게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변혁된 사회에서조차 고립된 가족단위는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녀가 보기에 유일한 변화는 편리함이나 물질적 이득이라는 결혼의 부수적인 요소들이 결혼결합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결혼은 의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서로의 기호에 맞추는 것일 뿐이다―사랑과 결혼은 진짜 동의어가 될 것이다. 고립된 가족 단위는 과다경쟁과 압박, 외로움으로 점철된 현대 개인주의 사회의 결과이다; 고립된 가족은 포악한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키는 가족을 사회주의 사회에 남겨주고 싶어한다! 오늘날 혈연과 혈족의 유대가 삶의 유일한 의지로, 고난과 불운의 시기에 찾는 유일한 피난처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에도 도덕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런 유대가 필요할까? 키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상적인 가족", 즉 부르주아 사회 구조의 열렬한 신봉자들이 경의를 표하며 바라보는 중간계층 부르주아들의 이기적인 가족 단위를 너무나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모순 속에서 길을 잃었던 사람은 엉뚱하지만 재능 있었던 엘렌 키만은 아니다. 결혼과 가족 문제만큼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한 문제는 아마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한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흥미진진할 것이다. 가족이 사라질까? 아니면 현재의 가족의 무질서가 일시적인 위기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현재의 가족 형태가 미래 사회에서도 그대로 보존될 것인가, 아니면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함께 매장될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매우 다른 답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육 기능이 가족에서 사회로 이전되면 현대의 고립된 가족을 지탱하던 끈끈한 유대는 느슨해질 것이다; 분해과정은 점점 그 속도가 빨라질 것이고, 미래의 결혼 관계의 희미한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현재 사회의 여러 영향 때문에 이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있을 때 우리는 이 윤곽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의 의무적인 결혼 형태가 사랑하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결합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어야만 하는가?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여성들의 빈곤한 상상력에서 나온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이상(理想)이 양성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가 세우게 될 규범에 어느 정도는 부합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사회적인 영향은 매우 복잡하고 그 영향력의 상호작용 또한 매우 다양하여, 체제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했을 때 관계들이 어떤 모습일까를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천천히 완성되고 있는 양성 관계의 진화는 결혼 의식이나 의무적인 개별 가족은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비평에 답한다: 비록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옹호하려는 우리의 논거가 당신들에게는 잘못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들과 노동 계급의 대표들에게 똑같이 긴급한 요구 자체의 중요성이 감소되는가? 사회적으로 다른 두 진영의 여성들이 공동의 정치적 염원을 위해 그들을 갈라놓는 계급 적대의 장벽을 극복할 수는 없는가? 그러나 정말로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 힘에 맞서 공동으로 투쟁할 수 있는가? 다른 여러 문제들이 관련되어 있는 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분열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특수한 문제의 경우에는 다양한 사회적 계급에 속해있는 여성들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에 힘을 모으자는 페미니스트들의 제안을 노동자 계급의 대표들이 거절했을 때 페미니스트들은 그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당파적 충성심을 발견하고는 안타깝고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위와 같은 논거를 계속 들이댄다. 이것이 진짜 사실인가? 진정으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정치적 염원이 있는가, 혹은 다른 모든 경우들처럼 이 경우에서도 계급적대가 계급을 뛰어넘은 단일한 여성 군대를 조직하는 것을 막게 되는가?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달성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사용할 전술의 윤곽을 그리기 전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적 개혁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일부는 사회주의―물론 먼 미래에 실행될―를 옹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의 지위에서 싸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 대다수는 지금의 사회적 질병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남성들이 상황을 주도해왔기 때문에 깊어진 것이라 보고, 일단 자신들이 대의원 자리를 얻기만 하면 그런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페미니스트 진영들 각각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계급투쟁의 문제가 제기될 때면 언제나 화들짝 놀라 전쟁터를 떠났다. 그들은 이질적인 원인 때문에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보다 친근한 부르주아 자유주의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의 정치적 열망 속의 본심을 억누르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이 정치적 영역에 개입하는 것이 노동자 계급의 여성에게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어린 자매들에게 아무리 확신한다 할지라도, 페미니스트 운동 전체에 침투해있는 부르주아 정신은 평등한 정치적 권리 요구에까지 부르주아적인 색채를 입힐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보편적인 여성들의 요구로 보일테지만... 정치적 권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목표와 이해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여성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을 만들었다. 이것이 두 여성진영의 긴급한 임무가 어느 정도까지는 일치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권력에 가까이 간 모든 계급의 대표자들은 무엇보다도 모든 나라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을 담고 있는 민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에게 좀 더 유리한 노동 조건을 만드는 법적 변화를 촉구한다; 그녀들이 성매매를 합법화하는 규제에 모두 함께 맞선 일 등. 그러나 이러한 긴급한 임무가 일치한 것은 순전히 형식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계급적 이해에 따라 이런 개혁에 대한 두 진영의 태도가 매우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무어라 말하건 간에 계급적 본능은 언제나 "계급을 초월한" 정치라는 고상한 열망보다도 더 강력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곤 했다. 부르주아 여성들과 "어린 자매들"이 똑같이 불평등한 동안은 부르주아 여성들이 여성들의 보편적인 이익을 옹호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장벽이 사라지고 부르주아 여성들이 정치활동의 권리를 얻게되면, "모든 여성의 권리"를 수호하던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이 향유하고 있는 특권을 열광적으로 수호하게 될 것이다. 어린 자매들이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오히려 만족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노동자들에게 "보편적인 여성들"의 원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공동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불신을 갖게 된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