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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6.36호

[책과나]천재들의 실패

김중현 | 회원
천재들의 실패
원제 : When Genius Failed
[The Rise and Fall of Long Term Capital Management]
로저 로웬스타인 저/이승욱 역 | 동방미디어 | 2001년 05월
김 중 현 | 회원

1. 그해 가을 월스트리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997년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는 전염병처럼 전 지구적 금융위기를 몰고 왔다. 남한과 러시아 그리고 중남미의 여러 국가들이 차례로 쓰러져갔고, 결국 IMF의 구제금융으로 목숨을 연장해야만 했다. 그 이후에는 잘 알다시피 신자유주의 질서 체제로의 끊임없는 재편과정이었고, 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름하여 IMF 시대의 시작.
1998년 9월, 미국 금융, 아니 세계 금융의 심장부 월스트리트에서는 매우 색다른 회의가 진행되었다.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는 그린스펀이 총재로 있는 FRB(미연방준비은행)의 집행기관 뉴욕연방준비은행은 긴급히 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의 참석자는 JP 모건,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베어스턴스, 체이스맨하튼, 리만브라더스 등 초국적 금융자본의 수장들과 유럽중앙은행 은행장 및 유럽 대표은행들의 은행장들이었다. 이전에는 한번도 같은 회의석상에서 마주치지 않았던, 그리고 이 회의 이후에도 마주칠 일이 없는 그런 쟁쟁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 회의의 목적은 반드시 살려야만 하는 한 회사에 들어갈 천문학적인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이었다. 그 회사는 바로 미국인의 99.9%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Long Term Capital Management'라는 파생금융상품을 취급하는 헤지펀드 회사였다. 이 회사의 파산은 아이러니하게도 월스트리트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전 세계 금융시장의 대혼란이었다. 시간가치가 거래의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는 파생상품의 특성상 파산을 막는 것은 일분 일초를 다투는 급박한 일이었고, 자유로운 금융시장의 수호자인 FRB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반 강제적인 분담 금액 할당을 통해 위기를 지연시킨다. 이것이 전 세계가 금융위기로 요동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여파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던 바로 그때, 월스트리트 교리의 전도사인 FRB가 세계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정확히 말하자면 위기를 지연시키기 위해) 했던 유일한 일이었다.

2. Long Term Capital Management 그리고 파생상품(Derivatives)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저 유명한 옵션가격결정모형, 즉 블랙-숄스 공식(Black-Scholes Model)으로 1997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 마이런 숄스와 로버트 머턴, FRB 부의장 출신으로 그린스펀 다음가는 2인자로 불리던 데이비드 뮬린스, 그리고 MIT, 스탠포드 등 일류대학 재무부문 석학들, 월스트리트 최고의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촉망받던 메리웨더와 그의 팀원들이 만든 헤지펀드 회사가 바로 문제의 'Long Term Capital Management'라는 회사이다. 'Long Term Capital Management'는 바로 전 세계 금융시장의 드림팀이 만들어놓은(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이클 조단과 무하마드 알리가 한 팀을 이루고 있는) 회사였던 것이다.
이 회사는 파생상품만을 거래하고 취급한다. 파생상품은 말 그대로 무엇으로부터 파생한(derivative) 상품을 의미한다. 주식, 채권, 화폐, 부동산, 천연자원 등이 일차적인 상품(현물)을 이루고 있다면, 이를 기초로 하여 미래의 특정시점에 상품을 사고 파는 거래(선물거래)와 미래의 특정시점에 상품을 살 수 있는 권리와 팔 수 있는 권리를 다시 사고 파는 거래(옵션거래)등이 파생한다. 이와 같은 정의라면 파생 상품은 비단 금융상품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서 파생할 수 있는 거래이다. 미래의 특정시점의 상품의 특정가격을 알아맞히기만 한다면 돈을 딸 수 있는 '내기'의 다름 아니며, 맞추느냐 못 마추느냐에 따라 돈을 따고 잃는 확률게임이자, 따는 사람이 있으면 잃는 사람이 반드시 있는 '제로섬' 게임인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파생상품은 현물가격의 10%정도만 증거금으로 거래를 하고, 나머지잔금은 미래의 특정시점에서 결제하기 때문에, 현물거래의 같은 금액으로 엄청난 레버리지(*레버리지란 지렛대 효과를 의미, 가령 100원의 자본으로 10000원의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의 거래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차입까지 더해지면 현물거래의 몇 백배에 이르는 거래를 할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투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노벨경제학상에 빛나는 학자들과 현역 최고의 트레이더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무엇일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해진다. 이들은 화려한 명성을 담보로 막대한 돈을 차입했다. 그리고, 회사 설립 후 1~2년간 파생상품 거래를 통한 경이적인 수익률은 이제 모든 투자은행으로 하여금 발벗고 나서 저리로 엄청난 돈을 빌려주게끔 만들었다. 이렇게 차입한 자금을 기반으로 이들은 미국 국채,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국가들 국채 및 회사채, 일본의 채권, 아시아 각국의 통화, 러시아의 채권 등 말 그대로 전 세계를 무대로 닥치는 대로 파생상품 거래를 행했으며, 뉴욕 교외의 조그만 트레이딩 룸에서 불과 20~30여명의 트레이더(물론 핵심 트레이더는 앞서 언급한 5~6명이다.)들이 거래하는 총 금액은 1조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의 눈에는 모든 리스크는 확률분포 하에서 통제 가능한 것이었고, 심지어 최악의 상황도 일정의 패턴을 그리며 위험을 헤지(**헤지란 경제분야에서 가치의 보존을 의미)할수 있는 확률을 주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모든 파생상품 거래는 그 어떠한 경우에서도 최소한의 손실만을 감수하면서 최대의 이익을 포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완전 무결한 투자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동아시아 외환 위기에서도 승승장구하던 이들은 러시아 채무불이행 사태가 터지자 급속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자신만만하던 트레이더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가는, 불과 수시간의 찰나, 파산위기까지 내몰리게 되버린 것이다. 막대한 차입은 계속 페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가는, 한번이라도 쉬면 그대로 고꾸라지는 자전거와 같이 이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거래를 하게 만들었고, 한번의 통제 불가능한 상황은 연쇄적으로 다른거래에까지 파장을 일으켜, 결국은 돌이킬수 없는 파산상태까지 몰아간 것이다. 노벨상도, 확률분포도, 그 어떠한 것도 그러한 파산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과 수 시간 만에 몇 천억 달러의 손실을 보고 이들의 꿈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3. 천재들의 실패

파생상품은 금융화 된 자본주의에 내재된 상품화 욕망의 최종 종착역이다. 그동안 전 사회적 영역에서 자본주의적 질서가 강제되고,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원리들이 우리의 삶에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왔다면,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먼 미래의 어떤 것'마저 상품화하는 이러한 욕망은 섬뜩하기조차 하다. 더욱이 현재 파생상품의 거래 금액이 이른바 현물이라 불리는 주식, 채권, 통화 거래수의 백배에 이르고 있는 이러한 상황은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자본주의를 몰아가고 있다. '없는 것'이 거래되고, '없는 것'이 눈에 보이는 '있는 것'을 능가하고 지배하는 상황인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금융시장이 안고 있는 태생적 불안정성에 이제 파생상품까지 더해지면서 극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국경도, 국적도, 최소한의 윤리도 사라져버린 금융시장에서, 마치 포커판의 '올인' 처럼 거래되고 있는 수백조원들의 돈들은, 만약 금융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붕괴한다면, 그 뇌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분명 당대 투자의 천재들, 수학의 천재들, 공학의 천재들(파생상품과 관련한 투자 영역은 '금융공학'의 영역으로 불리고 있다.)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들의 실패가 일회성이거나 한순간의 실수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금융화된 자본주의에 내재된 태생적 한계는 점점 그 모습을 분명하게 우리 앞에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만약 요동치고 있는 뇌관이 폭발한다면, 새로운 책이 쓰여져야만 할 것이다. 바로 'When Market Failed' [The Rise and Fall of Long Term Capitalism] 이라는 책이.....

<후기>
이 책은 아직도 파생상품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교훈처럼 읽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지요. 하지만 이들의 현란한 트레이딩 기법은 각종 파생상품 교과서에서 버젓이 소개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그 기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입니다.
현재 금융자본주의의 극한의 모습을, 그리고 초국적 금융자본의 더러운 뒷거래들을 생생하게 보고 싶다면 잠깐 짬을 내서 읽어보길 권합니다. 마치 딴 세상 사람들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물론 비전공자분이나, 금융시장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듯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요점은 이들의 거래 기법이 아니라, 이들의 천민성과 부패성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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