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술과 미국과학
미국식 생산 혹은 미국식 산업의 역사
: 미국 과학기술과 산업발전 역사
2> 전쟁기술과 미국과학
김 준 범 | 편집부장
이번에 다룰 내용은 1,2차 세계 대전과 미국 과학기술의 변화이다. 이전시기 미국에서 확립된 기술-생산 체계로서 대량생산 체계에 이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쳐 미국에서 일어난 과학-기술의 변화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현대 산업의 골간을 이루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대학과 기업, 혹은 정부 연구소를 매개로 연결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몇몇 천재들의 손을 떠나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추진되는 현재의 일반적인 양태가 이시기에 이르러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 19세기 미국의 상황
19세기 이전 미국 과학은 유럽의 국가들(영국, 프랑스, 독일)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미국에도 피뢰침으로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과학자는 있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연구가 인정되고 그의 주된 활동무대가 된 곳은 미국이 아닌 유럽이었다. 또 남북전쟁(1861-65) 이전까지 미국의 대학은 전문지식 양성보다는 도덕, 고전, 인문 등이 주를 이룬 교육중심적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미국과학이 전환점을 맞게된 것은 남북전쟁 이후였다. 전쟁이후 미국의 산업구조가 공업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전문지식중심의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기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D.C Gilman이 초대 총장으로 있었던 Johns Hopkins 대학이 설립되었다. Johns Hopkins대는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의 영향을 받아 학부과정을 생략한 과학연구 중심의 대학원중심대학이었다. 엄격한 교수 임용기준을 적용하고 독일식의 세미나 제도와 실험실 제도 등을 도입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교육을 진행했다. Johns Hopkins대학은 1920년까지 1천여 명의 박사를 배출했고 이들은 여러 대학의 교수로 진출하게 된다. Johns Hopkins대의 성공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유사한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미국과학의 수준은 유럽에 비해서는 여전히 모자랐다. A.A. Michelson, J Gibbs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여전히 유럽이었다. 다만 지질학 분야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된 것은 당시 순수과학은 과학자들의 취미활동으로 여겨져 의회의 지원이 축소된 반면 연방정부내 지질 조사국등의 실용 기술을 요구하는 기구들이 생겨난 결과이다. 앞서 설립된 전문교육기관을 통해 배출된 대학생들은 이런 정부기구에 들어가게 된다.
2.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미국과학의 변화
20세기 초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연방정부가 강화되고 각종 전문직종들과 전문인 연합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는 연방정부의 과학활동 지원에 따른 것이었다. 공중보건국, 산림국, 표준국등에 과학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이 취업을 했다. 또한 국가가 운영하는 과학기구들이 성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실용학문에 대한 투자가 국가기구를 넘어선 기업체에서도 이루어지게 된다.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대학에서 전문기술교육을 위한 기초과학교육의 필요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또한 G.E, Bell Lab, AT&T등이 만든 기업체 연구소에서는 순수과학연구자들도 고용하여 기술개발뿐만 아니라 순수연구도 수행했다. 이러한 지원을 통해 1910년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연구성과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당시 첨단 분야였던 원자의 구조들을 이해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젊은 과학자들이 미국의 교육시스템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미국 과학의 수준이 이전시기와는 다른 단계에 올라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에서 기초과학과 실용기술과의 관계이다. 기초과학과 실용기술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던 유럽의 전통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전문교육기관인 대학을 매개로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된다. 또한 기업체연구소에서의 합동연구와 같은 기풍은 이후 미국과학의 전화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이후 미국에서 연이어 추진된 대규모 프로젝트 성공의 주된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전쟁무기연구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는 당시의 전쟁이 19세기를 통해 이루어진 공업의 발달에 기반을 둔 전쟁무기의 혁신적인 발전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차 대전 이전에도 과학자문위원회(National Adversary Committee)을 통해 전쟁연구를 수행했으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민간기구인 National Research Council(이하 N.R.C)에서 본격적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N.R.C는 당시 유명한 천체학자였던 G.F Hale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합동연구를 통해 잠수함 탐지기술과 방독면 등 전쟁에 유용한 여러 가지 기술들을 개발하였다. 1차 대전 중 연구는 과학자와 기술자의 조직적 연구에 의해 수행되었고 이는 이후 과학자, 과학연구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를 변모시키게된다. 이시기 과학연구의 특징은 집단연구와 공동연구가 일반화되고 국가에 의해 연구과제가 제시되면서 과학연구가 과학자의 실험실을 벗어나 '결과'를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또한 정부에 의한 연구과제의 선정은 무한정의 예산을 과학연구에 투자하게 하였다. 이 결과 과학자는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고 Hale, Millikan, W. Noyes 등의 과학자들은 연구활동 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정부는 당시 과학자문위원회의 의장이었던 Karl Compton(루즈벨트 정부 과학기술담당)이 주장한 과학연구에 대한 연방정부의 예산투자를 연방정부가 거절함으로써 과학자 집단은 연구의 든든한 후원자를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이미 미국과학은 거대 프로젝트라는 군침 도는 요리를 맛본 후였기 때문이다. 정계와 재계에 두루 안면이 있던 Hale등은 과학의 새로운 후원대상으로써 기업체를 찾게 된다. 1차 대전동안의 과학연구 성과에 고무된 기업체들은 이런 과학자들의 요구를 받아 안아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추진했다. 하지만 대공황을 거치면서 기업체의 후원이 줄어들자 미국 과학자 집단은 정부와 재단 그리고 기업을 세 축으로 하는 보다 안정된 후원그룹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과 학제적인 연구와 신분야에 대한 집중지원을 골간으로 하는 자구책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대공황을 통해 미국 과학자 집단이 깨달은 것은 기업의 지원은 경기에 따라 언제든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다 안정적인 후원은 만약 한시적인 기구가 아니라면 정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1차 대전이 보여주었던 것은 전쟁기술의 경우 정부는 언제나 예산을 투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르가 부시(V.Bush)가 제창했던 국방연구의 필요성은 사실상 안정된 후원을 확보하기 위한 과학자 집단에게는 당연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3. 2차 대전, 과학과 정부의 새로운 관계 형성
바르가 부시는 국방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루즈벨트에게 국방연구위원회의 설립을 요구했다. 루즈벨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막대한 예산이 국방연구에 투입되었다. 이미 1차 대전부터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산업수준이 응집된 중공업 무기들의 전쟁에서의 전투력이 이러한 투자의 배경이 되었다. 2차 대전 이전 독일과 유럽에서는 기병과 보병 중심의 전략대신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전투기들을 동원한 대규모 화력전의 전략이 완성되어가고 있었고 미국 역시 그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물론 미국은 독일의 집중적인 전력증강이 본토에 미칠 것을 우려하지는 않았지만 신무기 경쟁에 뒤쳐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기에 국방연구 위원회는 레이더 연구실을 설치하고 2000명의 인원과 매달 천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는 연구를 진행한다. 이 결과 레이더 방해기술과 고체연료 미사일등 괄목할 성과를 얻어냈다. 2차 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신무기 개발과 생산은 공황기 침체되었던 산업을 재활시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당시 전쟁 무기들은 집중된 산업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생산이 다시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2차 대전 이후 과학자 집단은 정부라는 결코 돈이 마르지 않는 막대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4. 핵 개발과 미국과학
핵개발은 2차 대전 중 일어난 미국과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핵개발은 그 자체로서 미국과학의 이전 성과들을 총합한 것임과 동시에 군산복합체라는 특수한 형태의 미국식 생산 체계 확립의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원자폭탄의 개발은 아인슈타인의 저 유명한 상대성이론 E= m c2 에 근거했다. 즉 질량이 감소하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원자폭탄은 이러한 특정 원소의 질량 변화 즉 핵분열을 이용한다. 최초의 핵분열 발견은 1938년 오토 한(Otto Hann), 마이트너(L. Meitner), 슈트라스만(F. Strasmann)으로 구성된 베를린 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 특히 우라늄 235의 분열은 연쇄반응으로 인해 핵분열시 질량 손실이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에 대해 최초의 핵분열 발견자중 하나였던 마이트너는 무기화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이를 히틀러가 개발할 것을 우려했다. 헝가리 출신의 질라르(L. Szilard)를 비롯한 일단의 과학자들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학술지에 연구성과를 발표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아인슈타인에게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을 요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제안에 따라 루즈벨트 행정부는 1939년 우라늄위원회를 건설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우라늄위원회가 실제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핵무기 개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0년 바르가 부시가 국방연구위원회를 만들면서 우라늄위원회는 국방연구위원회 산하로 흡수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도 정부에 원자폭탄 개발을 요구하는 과학자들이 있었으나 히틀러 정부는 이미 재래무기의 효율성을 신뢰하고 있었고 과학자들도 원자폭탄의 실현가능성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서의 원자폭탄 개발은 종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원자폭탄을 구현하는데 걸리는 문제는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우라늄235는 자연상태에서 우라늄238에 섞여 극히 미미한 양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당시 원자폭탄의 개발을 회의적으로까지 생각하게 하는 주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영국의 성과에 의해서다. 1939년에서 1940년 사이 영국은 모드(Maud)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다. 영국의 두 천재적인 과학자 프리시(O. Frisch)와 파이얼스 (R. Peierls)에 의해 당시 원자폭탄 개발의 가장 큰 장애였던 우라늄235의 추출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지속되는 독일의 미사일 폭격에 의해 연구시설을 더 이상 확장할 수 없었던 영국은 미국에 기간의 연구성과들을 넘겨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이러한 영국의 성과에 힘입어 미국에서도 원자폭탄개발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로렌스(Lawrence)는 입자가속기(cyclotron)를 개발하여 입자가속을 통한 우라늄235와 우라늄 238의 분리를 실험하던 중 형성된 플루토늄239가 핵분열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에 고무되어 바르가 부시는 루즈벨트를 설득하여 맨하탄 프로젝트를 실시하게 한다. 1943년 경 연구개발 책임자로 임명된 오펜하이머(R. Oppenheimer)는 로스 알라모스의 과학자들의 도시를 건설하여 원자탄 개발을 현실화시켜낸다. 1944년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어 보어(Bohr)와 질라르 등의 과학자들은 미국정부에 원자폭탄 개발 중단을 촉구하지만 이미 구르기 시작한 수레는 멈추지 않았다. 1945년 5월 18일 독일이 항복하자 원자폭탄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거세졌다. 하지만 이미 원자폭탄은 개발되어 있었다. 미국정부는 전쟁이후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소련에 대한 경고로 그리고 막대한 예산 지출에 대한 의회의 추궁을 의식해 결국 이미 승전이 결정된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지옥의 버섯구름을 피워냈다. 꼬마(Little Boy)와 뚱뚱보(Fat Man)로 각각 명명된 최초의 원자폭탄들은 미국 과학의 위력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었으며 비극의 시작이었다.
5. 결론 :: 미국과학과 전쟁기술
미국과학과 전쟁기술은 핵무기 개발이라는 매우 집중적이고 특별한 경험으로 대표된다. 독일과 영국 등의 노력에도 역사상 최초의 핵무기를 개발한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것은 미국이 상당히 효율적인 연구 동원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전술했다시피 공동연구의 기풍이 강했던 미국적 체계에서 원자폭탄 개발이 제기한 숱한 문제들은 막대한 예산과 효율적인 연구를 통해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은 이후 미국과학을 막대한 예산 투입한 거대프로젝트 중심으로 변화시켰고 꿈과 같은 거대과학을 탄생시켰다. 또한 미국 과학자 집단의 독특한 성격-전문연구자이자 정계와 재계의 기획자-으로 인해 냉전시기 광적인 무기경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꾸준한 파생산업을 문어발처럼 거느리게 했다. 이는 지금 미국이 더 이상 적이 없는 상황에도 광적으로 무기개발에 열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기관차처럼 전쟁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미국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1,2차 대전 그리고 냉전이 만든 총동원체계의 떡고물이다. 과학자와 정치가 기업이 얽혀있는 이 총 동원체계야 말로 지금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PSSP
: 미국 과학기술과 산업발전 역사
2> 전쟁기술과 미국과학
김 준 범 | 편집부장
이번에 다룰 내용은 1,2차 세계 대전과 미국 과학기술의 변화이다. 이전시기 미국에서 확립된 기술-생산 체계로서 대량생산 체계에 이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쳐 미국에서 일어난 과학-기술의 변화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현대 산업의 골간을 이루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대학과 기업, 혹은 정부 연구소를 매개로 연결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몇몇 천재들의 손을 떠나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추진되는 현재의 일반적인 양태가 이시기에 이르러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 19세기 미국의 상황
19세기 이전 미국 과학은 유럽의 국가들(영국, 프랑스, 독일)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미국에도 피뢰침으로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과학자는 있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연구가 인정되고 그의 주된 활동무대가 된 곳은 미국이 아닌 유럽이었다. 또 남북전쟁(1861-65) 이전까지 미국의 대학은 전문지식 양성보다는 도덕, 고전, 인문 등이 주를 이룬 교육중심적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미국과학이 전환점을 맞게된 것은 남북전쟁 이후였다. 전쟁이후 미국의 산업구조가 공업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전문지식중심의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기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D.C Gilman이 초대 총장으로 있었던 Johns Hopkins 대학이 설립되었다. Johns Hopkins대는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의 영향을 받아 학부과정을 생략한 과학연구 중심의 대학원중심대학이었다. 엄격한 교수 임용기준을 적용하고 독일식의 세미나 제도와 실험실 제도 등을 도입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교육을 진행했다. Johns Hopkins대학은 1920년까지 1천여 명의 박사를 배출했고 이들은 여러 대학의 교수로 진출하게 된다. Johns Hopkins대의 성공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유사한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미국과학의 수준은 유럽에 비해서는 여전히 모자랐다. A.A. Michelson, J Gibbs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여전히 유럽이었다. 다만 지질학 분야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된 것은 당시 순수과학은 과학자들의 취미활동으로 여겨져 의회의 지원이 축소된 반면 연방정부내 지질 조사국등의 실용 기술을 요구하는 기구들이 생겨난 결과이다. 앞서 설립된 전문교육기관을 통해 배출된 대학생들은 이런 정부기구에 들어가게 된다.
2.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미국과학의 변화
20세기 초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연방정부가 강화되고 각종 전문직종들과 전문인 연합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는 연방정부의 과학활동 지원에 따른 것이었다. 공중보건국, 산림국, 표준국등에 과학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이 취업을 했다. 또한 국가가 운영하는 과학기구들이 성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실용학문에 대한 투자가 국가기구를 넘어선 기업체에서도 이루어지게 된다.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대학에서 전문기술교육을 위한 기초과학교육의 필요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또한 G.E, Bell Lab, AT&T등이 만든 기업체 연구소에서는 순수과학연구자들도 고용하여 기술개발뿐만 아니라 순수연구도 수행했다. 이러한 지원을 통해 1910년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연구성과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당시 첨단 분야였던 원자의 구조들을 이해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젊은 과학자들이 미국의 교육시스템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미국 과학의 수준이 이전시기와는 다른 단계에 올라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에서 기초과학과 실용기술과의 관계이다. 기초과학과 실용기술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던 유럽의 전통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전문교육기관인 대학을 매개로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된다. 또한 기업체연구소에서의 합동연구와 같은 기풍은 이후 미국과학의 전화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이후 미국에서 연이어 추진된 대규모 프로젝트 성공의 주된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전쟁무기연구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는 당시의 전쟁이 19세기를 통해 이루어진 공업의 발달에 기반을 둔 전쟁무기의 혁신적인 발전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차 대전 이전에도 과학자문위원회(National Adversary Committee)을 통해 전쟁연구를 수행했으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민간기구인 National Research Council(이하 N.R.C)에서 본격적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N.R.C는 당시 유명한 천체학자였던 G.F Hale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합동연구를 통해 잠수함 탐지기술과 방독면 등 전쟁에 유용한 여러 가지 기술들을 개발하였다. 1차 대전 중 연구는 과학자와 기술자의 조직적 연구에 의해 수행되었고 이는 이후 과학자, 과학연구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를 변모시키게된다. 이시기 과학연구의 특징은 집단연구와 공동연구가 일반화되고 국가에 의해 연구과제가 제시되면서 과학연구가 과학자의 실험실을 벗어나 '결과'를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또한 정부에 의한 연구과제의 선정은 무한정의 예산을 과학연구에 투자하게 하였다. 이 결과 과학자는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고 Hale, Millikan, W. Noyes 등의 과학자들은 연구활동 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정부는 당시 과학자문위원회의 의장이었던 Karl Compton(루즈벨트 정부 과학기술담당)이 주장한 과학연구에 대한 연방정부의 예산투자를 연방정부가 거절함으로써 과학자 집단은 연구의 든든한 후원자를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이미 미국과학은 거대 프로젝트라는 군침 도는 요리를 맛본 후였기 때문이다. 정계와 재계에 두루 안면이 있던 Hale등은 과학의 새로운 후원대상으로써 기업체를 찾게 된다. 1차 대전동안의 과학연구 성과에 고무된 기업체들은 이런 과학자들의 요구를 받아 안아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추진했다. 하지만 대공황을 거치면서 기업체의 후원이 줄어들자 미국 과학자 집단은 정부와 재단 그리고 기업을 세 축으로 하는 보다 안정된 후원그룹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과 학제적인 연구와 신분야에 대한 집중지원을 골간으로 하는 자구책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대공황을 통해 미국 과학자 집단이 깨달은 것은 기업의 지원은 경기에 따라 언제든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다 안정적인 후원은 만약 한시적인 기구가 아니라면 정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1차 대전이 보여주었던 것은 전쟁기술의 경우 정부는 언제나 예산을 투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르가 부시(V.Bush)가 제창했던 국방연구의 필요성은 사실상 안정된 후원을 확보하기 위한 과학자 집단에게는 당연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3. 2차 대전, 과학과 정부의 새로운 관계 형성
바르가 부시는 국방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루즈벨트에게 국방연구위원회의 설립을 요구했다. 루즈벨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막대한 예산이 국방연구에 투입되었다. 이미 1차 대전부터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산업수준이 응집된 중공업 무기들의 전쟁에서의 전투력이 이러한 투자의 배경이 되었다. 2차 대전 이전 독일과 유럽에서는 기병과 보병 중심의 전략대신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전투기들을 동원한 대규모 화력전의 전략이 완성되어가고 있었고 미국 역시 그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물론 미국은 독일의 집중적인 전력증강이 본토에 미칠 것을 우려하지는 않았지만 신무기 경쟁에 뒤쳐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기에 국방연구 위원회는 레이더 연구실을 설치하고 2000명의 인원과 매달 천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는 연구를 진행한다. 이 결과 레이더 방해기술과 고체연료 미사일등 괄목할 성과를 얻어냈다. 2차 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신무기 개발과 생산은 공황기 침체되었던 산업을 재활시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당시 전쟁 무기들은 집중된 산업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생산이 다시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2차 대전 이후 과학자 집단은 정부라는 결코 돈이 마르지 않는 막대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4. 핵 개발과 미국과학
핵개발은 2차 대전 중 일어난 미국과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핵개발은 그 자체로서 미국과학의 이전 성과들을 총합한 것임과 동시에 군산복합체라는 특수한 형태의 미국식 생산 체계 확립의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원자폭탄의 개발은 아인슈타인의 저 유명한 상대성이론 E= m c2 에 근거했다. 즉 질량이 감소하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원자폭탄은 이러한 특정 원소의 질량 변화 즉 핵분열을 이용한다. 최초의 핵분열 발견은 1938년 오토 한(Otto Hann), 마이트너(L. Meitner), 슈트라스만(F. Strasmann)으로 구성된 베를린 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 특히 우라늄 235의 분열은 연쇄반응으로 인해 핵분열시 질량 손실이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에 대해 최초의 핵분열 발견자중 하나였던 마이트너는 무기화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이를 히틀러가 개발할 것을 우려했다. 헝가리 출신의 질라르(L. Szilard)를 비롯한 일단의 과학자들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학술지에 연구성과를 발표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아인슈타인에게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을 요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제안에 따라 루즈벨트 행정부는 1939년 우라늄위원회를 건설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우라늄위원회가 실제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핵무기 개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0년 바르가 부시가 국방연구위원회를 만들면서 우라늄위원회는 국방연구위원회 산하로 흡수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도 정부에 원자폭탄 개발을 요구하는 과학자들이 있었으나 히틀러 정부는 이미 재래무기의 효율성을 신뢰하고 있었고 과학자들도 원자폭탄의 실현가능성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서의 원자폭탄 개발은 종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원자폭탄을 구현하는데 걸리는 문제는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우라늄235는 자연상태에서 우라늄238에 섞여 극히 미미한 양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당시 원자폭탄의 개발을 회의적으로까지 생각하게 하는 주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영국의 성과에 의해서다. 1939년에서 1940년 사이 영국은 모드(Maud)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다. 영국의 두 천재적인 과학자 프리시(O. Frisch)와 파이얼스 (R. Peierls)에 의해 당시 원자폭탄 개발의 가장 큰 장애였던 우라늄235의 추출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지속되는 독일의 미사일 폭격에 의해 연구시설을 더 이상 확장할 수 없었던 영국은 미국에 기간의 연구성과들을 넘겨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이러한 영국의 성과에 힘입어 미국에서도 원자폭탄개발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로렌스(Lawrence)는 입자가속기(cyclotron)를 개발하여 입자가속을 통한 우라늄235와 우라늄 238의 분리를 실험하던 중 형성된 플루토늄239가 핵분열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에 고무되어 바르가 부시는 루즈벨트를 설득하여 맨하탄 프로젝트를 실시하게 한다. 1943년 경 연구개발 책임자로 임명된 오펜하이머(R. Oppenheimer)는 로스 알라모스의 과학자들의 도시를 건설하여 원자탄 개발을 현실화시켜낸다. 1944년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어 보어(Bohr)와 질라르 등의 과학자들은 미국정부에 원자폭탄 개발 중단을 촉구하지만 이미 구르기 시작한 수레는 멈추지 않았다. 1945년 5월 18일 독일이 항복하자 원자폭탄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거세졌다. 하지만 이미 원자폭탄은 개발되어 있었다. 미국정부는 전쟁이후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소련에 대한 경고로 그리고 막대한 예산 지출에 대한 의회의 추궁을 의식해 결국 이미 승전이 결정된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지옥의 버섯구름을 피워냈다. 꼬마(Little Boy)와 뚱뚱보(Fat Man)로 각각 명명된 최초의 원자폭탄들은 미국 과학의 위력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었으며 비극의 시작이었다.
5. 결론 :: 미국과학과 전쟁기술
미국과학과 전쟁기술은 핵무기 개발이라는 매우 집중적이고 특별한 경험으로 대표된다. 독일과 영국 등의 노력에도 역사상 최초의 핵무기를 개발한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것은 미국이 상당히 효율적인 연구 동원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전술했다시피 공동연구의 기풍이 강했던 미국적 체계에서 원자폭탄 개발이 제기한 숱한 문제들은 막대한 예산과 효율적인 연구를 통해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은 이후 미국과학을 막대한 예산 투입한 거대프로젝트 중심으로 변화시켰고 꿈과 같은 거대과학을 탄생시켰다. 또한 미국 과학자 집단의 독특한 성격-전문연구자이자 정계와 재계의 기획자-으로 인해 냉전시기 광적인 무기경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꾸준한 파생산업을 문어발처럼 거느리게 했다. 이는 지금 미국이 더 이상 적이 없는 상황에도 광적으로 무기개발에 열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기관차처럼 전쟁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미국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1,2차 대전 그리고 냉전이 만든 총동원체계의 떡고물이다. 과학자와 정치가 기업이 얽혀있는 이 총 동원체계야 말로 지금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