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7-8.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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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8오늘여성-정지영.hwp

여성의 권리로서 모성을 사고하기 위하여

정지영 | 정책부장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준)는 한 달에 한 번씩 토론회를 한다. 거창하게 토론회라고 할 것까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회진보연대 여성 회원들이 모여서 그 날의 주제에 대해 경험과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공간이니 보통 말하는 토론회와는 사뭇 다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이 공간은 참 소중하다. 각자의 현실과 생활에서 여성이기에 느끼는 문제와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참가자들의 한풀이가 아니다. 토론회는 그동안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혼자 감수해왔던 문제들이 혼자의 문제가 아니고, 구체적인 상황들은 다르지만 여성들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이 가질 수 있기에 소중한 공간이다. 또한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힘은 여성들 자신에게서 나오고, 그 힘을 모으기 위해 우리가 함께 있는 공간이기에 소중하다. 아직 명확한 해답과 방식은 잘 모르지만, 그것을 풀어가기 위해 여성들이 모여서 여성의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
지난 토론회는 여성 활동가들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것이 주제였다. 이번엔 ‘모성’이다. 지난 토론회를 정리하면서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실들의 문제를 하나 하나씩 주제로 이야기해보자고 했는데, 제일 처음 주제가 ‘모성’이 되었다. 여성위원회(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토론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사람들의 수는 어림잡아 20명 남짓, 그 중에 결혼한 사람들은 한 손에 꼽히고, 그 중에서도 아이가 있는 사람은 더 적은 상황에서 모성이 첫 주제로 잡히다니... 연애나 섹슈얼리티의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모성에 대한 여성활동가들의 고민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지 싶다. 아이를 낳고 싶으면 낳고, 싫으면 안 낳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의 여러 조건은 “결혼 = 활동의 발목을 잡히는 것”, “출산 = 여성의 무덤”이라는 생각만 드니 고민이 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그렇게 시작한 토론은 주로 모성이 여성의 고유한 능력이자 권리로서 정의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조건 상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한 ‘적나라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모성이 현재 어떤 방식으로 정의되고, 어떻게 강요되고 있는지, 여성들이 모성에 대한 권리를 제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


아이 낳길 강요하는 사회

요즘 낮은 출산율을 두고, ‘출산파업’이라는 새로운 말이 등장했다. 남한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란다. 지금 출산율이 추세대로 가면 2075년에는 인구가 절반으로 2150이 되면 인구자체가 제로가 된다고 하니, “여성들은 지금 출산파업 중”이라는 힐난성 비유가 나올 법 만한 심각한 상황이다. 최근의 출산율이 감소를 보고 나오는 반응은 대개 2가지 정도인 것 같다. 우선, 여성들이 직업이니 뭐니 밖으로 나돌다보니 겉멋이 들어서 애는 안 낳고 쓸데없이 힘들다는 떼만 쓴다고 비난하는,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는 신념을 갖고 사는 사람들. 두 번째는 여성들의 자기계발과 자아실현도 중요하므로 밖에서도 열심히 일하고, 애도 잘 키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전자는 어쩐지 시대착오적이고 마초적인 것 같고, 후자는 합리적이고 합당한 논리 같지만 둘 모두 공유하는 점이 있다. 여성들은 어떻게든 꼭 아이를 낳아야만 사회에 있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즉, 모성에 대한 선택권이 여성에게 없다는 점이다. 60년대 우리나라의 인구가 가히 폭발적으로 증가할 때, 식량부족 등의 문제가 생기자 정부가 내건 슬로건은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였다. 이제 출산율 저하가 문제가 되자 정부는 ‘출산 보조금’이니, ‘결혼 장려금’이니 하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여성들의 조건과 생각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국가의 인구정책에 따라 억압되기도 했다가 장려되기도 하는 것이 여성들의 모성이니, 이것은 마치 공장에서 재고량을 보며 생산량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마치 여성이 ‘애 낳는 기계’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출산파업’이라 말해지는 상황은 어떤 요구를 가진 여성들의 집단행동이기 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생존적 본능에 가까운 현상인 것 같다. 의무로 정의되는 모성은 결코 여성에게 유리하지 않다. 누구보다 여성들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정부의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인프라 구축 정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기피하는 여성들은 늘어가는 현실이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들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오히려 부담으로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길러야하는 의무는 여성들에게 가족이라는 공간을 우선적으로 할당한다. 하지만 맞벌이를 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대다수 가족의 현실이기 때문에 여성들도 직장을 가져야한다. 이런 상황은 여성들에게 직장과 가정이라는 이중의 부담을 맡기는 것인데, 누구나 생각할 수 있듯이 여성도 인간인 마당에야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여성들은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조건이 있다는 말이다.


모성애: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어머니의 사랑?

모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와 모성애는 절대로 동의어가 아닌 것 같다. 모성애라는 말은 종종 여성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본성 중의 하나로 말해진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사전을 찾아보면 모성애는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정의되어있다. 반면 부성애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정의되어있다. 말장난 같지만, 왜 어머니의 사랑은 본능적이고, 아버지의 사랑은 그렇지 않을까? 나는 이런 모성애에 대한 정의와 강박이 가족을 보살피는 일, 그 중에서도 특히 출산을 여성들에게 의무로 짐 지우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누구나 자식에게는 본능적인 사랑을 가지고, 베풀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일은 여성에게 본성을 발휘하는 일이다. 여성이 당연히 해야할 일이 되고, 오히려 여성과 부합하는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혼의 여성들은 당연히도 이후 ‘어머니가 될 사람’으로 간주된다. 결혼은 당연히 하는 것이고, 이후 아이의 건강과 순수한 혈통을 위해 여성의 육체는 통제되어야 한다. 결혼한 여성은 모성애를 발휘하여 가정을 돌봐야한다.
이러한 모성애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이 모성이 여성의 권리라고 인식하고 제기하는 것을 방해한다. 만약 어떤 여성이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하거나,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여성은 ‘나쁜 여성, 피도 눈물도(모성애가) 없는 독한 년’이 되는 것이고, 사회적인 비난과 도덕적인 단죄가 뒤따른다. 얼마 전 한 여성이 3명의 자식을 죽이고, 자살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어미가 새끼한테 그럴 수가...’였다. 그 여성을 그렇게 몰아간 원인과 구조, 즉 극심한 빈곤과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언급은 될지언정 사회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렇게 빈곤에 내몰리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위대한 모성(애)’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이 모성을 적극적인 자신의 권리로 인식하여 모성을 제한하고, 위협하는 구조적인 원인들에 문제제기 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여성들이 감내해야 할 것, 아니면 위대한 어머니가 될 자신이 없어서 포기해야 할 것이 된다.


모성에 대한 권리는 여성의 권리이다.

모성은 여성이 사회를 위해 이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다. 모성은 여성의 고유한 역능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여성의 권리이다. 이는 임신, 출산, 수유라는 모성을 이루는 과정이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임신, 출산, 수유의 과정은 모두 여성들의 육체와 정신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게다가 여성들의 고유한 특성인 모성은 사회적인 노동이다. 여성들의 모성이 없이 재생산될 수 있는 사회는 없다. 하지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체제는 여성들의 이러한 능력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가운데, 자본의 논리와 이해에 부합하여 활용해왔다. 여성의 육체에 대한 통제와 활용은 비단 모성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된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여성이 온전히 여성으로 살기 위한 권리 중의 하나로 모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온전히 스스로 소유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모성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구체적인 결론은 아니지만, 여성이 자신의 능력과 권리를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기 위한, 즉 모성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기 위한 조건들일 수 있다.

․ 여성의 노동권 : 모성을 이유로 여성들이 노동과정에서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노동과정에서 여성의 모성은 보호받아야 한다.
․ 출산을 자유롭게 선택 : 아이를 낳고 싶지만 낳을 수 없게 하는 조건을 제거해야한다. 이에 대해서는 양육과 보육의 사회화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미혼모와 이혼녀의 생활에 대한 지원과 차별을 제거하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어야한다. 낙태권의 문제인데 현재 여성들의 조건 속에서 낙태의 문제를 ‘생명을 죽이는 일’로 몰아가는 것을 반대한다. 낙태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책임 있는 모성을 실현하는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
․ 여성들의 건강권 : 만약 모성이 여성이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권리로 인식된다면, 모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건강과 건강을 위한 환경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 아내와 자녀가 아버지와 맺는 관계는 사적인 소유권의 개념에 의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자이고, 딸은 다른 남성(즉, 남편)에게 속할 미래를 가진 아버지의 소유물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의 아이에 대한 권리가 근대적인 소유권 개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사회에서 법적인 문제는 포함될 수도 있겠다. 자식에 대한 친권과 같은 것. 어쨌든 근본적으로는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아버지의 계보를 잇는 자식들이라는 설정을 어머니와의 계보를 통해서 바꿔낼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 가족의 전화 : 위의 조건들을 실현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가족은 전화되어야 한다.

아직까지는 가설적인 이런 조건들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고 추가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이 여성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권리들이 통합적으로 제기되는 가운데 모성의 문제도 온전히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다. 모성권과 여성노동권, 성적 자기결정권과 같이 여성의 여러 가지 권리로 호명되는 것들이 서로 서로를 제한하는 구도를 지양하고,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확인되었다.

모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는 과정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이다. 여성의 해방을 말하는 문제라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금 출발을 해야한다. ‘출산파업’을 진행 중이라는 수많은 여성들과 함께 말하고, 연대하고, 여성들의 보편적인 권리로 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여성들의 모성에 대한 거부(?) 혹은 포기를 더욱 급진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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