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노래를 찾아서]이것은 제 노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노동자의 노래입니다
연영석 인터뷰
* ‘새노래를 찾아서’를 시작하며
1992년 꽃다지/노래공장/조국과청춘/희망새/천지인 그리고 1993년 노동자문예창작단의 앨범을 기점으로 민중가요는 두드러지게 쇠퇴한다. 같은 해 정태춘․박은옥의 6집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이에 대한 마지막 애도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1992년 대선의 패배에서 최종적으로 확인된 민중운동의 위기와 정확히 시간적으로 일치한다.
안치환/김광석/권진원 그리고 윤도현의 실험(?)을 논외로 한다면,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옥석을 가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당대의 모든 시도들이 1980년대를 부정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들은 ‘새벽’처럼 자신의 시도를 앨범으로 남기지도 못한 채 해산해 버린 경우도 있었고, ‘MayDay’처럼 20세기를 넘기지 못하기도 하고, ‘천지인’, ‘노래공장’처럼 큰 단절을 겪은 곳도 있었다. 그리고 최근 해산한 ‘조국과 청춘’ 그리고 아직도 그 이름이 낯선 무명그룹들과 개인이 있다. 물론 ‘꽃다지’, ‘희망새’처럼 자신을 온전히 하는 곳도 있고 말이다. 전문적인 노래운동 단체 말고 대중조직에도 여러 노래패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민중가요와 대중조직의 흥망과 같이 했음은 물론이다.
해체와 실험을 반복하며 10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오늘 민중가요의 현실이 웅변하듯 아무도 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누가 문제의식을 지속하는지 평가마저 시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90년대의 시도를 기억하고 평가하는 것이 기존 자료에 의존하기 대단히 힘든 상황이어서 ‘새 노래를 찾아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는 시도들에 대한 소개일 수도 있겠다. 물론, 한 개인의 미망일 수도 있을 텐데, 부인하기 곤란함을 밝히면서 지면을 할애해 준 사회진보연대 편집실 동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전문노래패건, 소모임이건 간에 무작위로 찾아다닐 생각이다. 새 노래의 싹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아직까지도 나는 그것을 보고 싶고, 이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래에 대한 소개보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과 게으름이 내게 이를 얼마나 허락할지 몰라 그것이 걱정이다.
이것은 제 노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노동자의 노래입니다.
- 게으른 피, 연영석 문화노동자
노동자 노래패, 노래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
준도 : 노래운동 자체가 오랜 기간 침체에 빠져있습니다. 1~2년도 아니고 10여년이 넘게 요.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러다 보니 노조노래패와 지역노래패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신생 노래패는 물론 10~20년 정도 된 노조․지역 노래패도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활기를 되찾고자 윤도현 들의 노래를 부르는데 과거에는 없던 일입니다. 어떻게 보는지요?
영석 : 윤도현 들의 노래를 아무 생각 없이 부른다고 보지 않습니다. 일반인이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과 이들이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죠. 문제는 그런다고 (노래패의 정체라는) 문제가 해결되느냐는 것입니다.
과거 노동자 노래패는 같이 부르는데 익숙했고, 이 틀에서 (자기 창작 역량이 없다보니) 전문 노래패의 노래를 소화해왔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전문노래패의 합창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과거처럼 당위만 가지고 노래 부르기는 힘들고, 삶이 녹아나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여기에 왜곡된 간극이 존재합니다. 노동자 대중은 물론 노조 노래패조차 문선할 때는 투쟁가를 부르다 일상에서는 부를 노래가 없어 대중가요를 부르는 간극이요. 그렇다고 전문노래패에서도 이를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 이 곤란이 윤도현 노래를 부른다고 해결될 수는 없죠.
준도 : 이렇게 침체된 상황에서 노조 노래패의 활동은 어떻습니까? 존재 양식 말입니다.
영석 : 노조에서 추진하는 공연을 하나 예를 들어보죠. 대개 노조 행사 때 공연을 하면 전문적인 외부 단체를 세워 끝내고 맙니다. 노조노래패가 소멸하고 있어서 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노조노래패를 세우고 또 만들려고 노력해야 할 텐데, 그런 고민들을 안 합니다. 있던 조직들이 워낙 깨져나가니까 만들어봤자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뭔가 만들면 깨지는 건 당연한거고, 소멸되면 생성하는 거고 이런 것일 텐데요.
노동자들에게, 동지들이 이를 해야 한다고 한다고 이야기하긴 하지만,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현장문화패에게 당신들이 당신 이야기를 하라고 했을 때도 무언가 짓눌려 있습니다. 그만큼 위축되어 있다는 거죠. 현장 자체가 위축되어 있으니까 문화패도 위축되어 있는 겁니다.
준도 : 그럼에도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남을 것입니다. 노동조합에서 공연을 준비할 때 노조노래패를 세우라고 문제제기했던 걸로만 봐도 몇 가지 이야기 하실 것이 있을 텐데요.
영석 : 사실 그 문제는 어느 누구도 해답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왕도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도 몇 가지 이야기해보자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노래하고 음악을 하지만, 모두 다 재미있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다 재미있어서 시작하지만 늘 신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제 친구들 음악한지 15년이네 하지만,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다는 거죠. 현장노래패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조건이 다르지만…
현장 노래패 원들이 노래를 시작했던 이유도 다양할 것입니다. 노동운동을 위해서, 문선활동을 하려고 시작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타 치는 것이 좋아서, 원래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서 온 사람들 이렇게 여러 가지인데 지금은 처음의 맘을 찾기가 힘들다는 거죠. 노래 부를 때의 즐거움 말이죠. 그런 사람들한테 재미를 찾으라고 하면 하나마나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한국노총의 경우 취미그룹이 잘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취미그룹이 잘된다고 영원히 잘 유지될 것이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때 몰아치던 것이거든요. 사람이 계속 물갈이 되는 겁니다. 늘 하지는 않습니다. 물갈이 되는 거죠. 그만큼 무게가 없는 거죠. 부담감이 없는 거죠. 여기는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인 마냥 그냥 그렇게 사고하는 무거움이 존재하죠. 일단 그런 무거움 들을 벗어야 합니다. 오히려 더 대중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문선시킬 목적이 아니라, 누구라도 일주일이라도 민중가요를 접해볼 수 있도록 대중화시켜야 합니다. 노래패할 사람들 노래패 하고, 그만두면 너 운동 그만 둘 거냐며 술 들이킬게 아니라(웃음) 자기 활동 하면 되는 거고, 조합 활동 하면 되는 거고 이런 식으로 사고를 가볍게 해야 합니다. 사회는 움직이는 것 아닙니까, 변화하고…
하지만, 10년 씩 넘어가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찾고자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한다면, 여기에 요구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창작이라고 봅니다. 창작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또 즐거움이 있거든요. 경지가 있는 거죠. 그 경지를 가야할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게 되면 그것도 또 마약이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노래패에 있어야 할 자기 근거가 생깁니다. 생기죠. 복합적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무겁기만 했죠.
준도 : 이런 문제는 노조노래패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학생노래패 역시 동일한 상황에 맞부딪혀 있을 텐데요.
영석 : 물론 유사한 점도 있겠지만 노조와 학생들의 경우는 분리해야 할 것입니다. 노조는 싫든 좋든 자기 스스로 강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쨌든 당장 자기 임금 몇% 깎이면 모인단 말이죠. 어쨌든 공동의 목표가 존재하죠. 학교는 다릅니다. 이를 지탱해주던 지적 요구나 사회적인 참여의식 들이 1980년대를 지나면서 붕괴해버렸죠. 그런 공동체성/문화적 균질성이 붕괴된 것입니다. 학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부터 일 것입니다. 학생 노래패들의 공연에서 학생들을 찾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죠.
노조의 경우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무엇을 쌓아갈 것인지가 쟁점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있어 집회장소에 모였기 때문에 뭐가 되었든 일단 본단 말이죠. 이것을 어떻게 기획하고 접근하는가가 학교보다 낫죠. 하지만 불행히도 노조는 여기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무엇을 쌓을 것인가요. 노조 문화패나 문화부장 대부분은 다 따까리고, 노조사업은 대개 한시적입니다. 문화는 축적되는 과정인데, 이를 노동조합이 이를 견디지 못하는 거죠. 성과가 빨리 드러나야 다음 선거도 하는 과정들 때문에 말이죠.
노조 선거와 무관한 현장조직의 끊임없는 흐름이 존재해야 하죠. 노동조합 권력을 쥐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를 갈아먹기도 하니까요. 문화패도 현장조직입니다. 문화패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현장에서 일상적 활동의 지속성을 가져가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노동자 문화를 축적해야 합니다
준도 : 좀 전에 언급하신 것처럼 노조 재생산 메커니즘과 문화적인 문제의식이 돌아가는 메커니즘이 있는데요. 사실 이게 충돌을 안 하면 오히려 예외고, 충돌이 정상일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영석 : 문화, 노래, 그리고 노동운동에 대한 시각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일관되게 노조권력과 관계없이 노동자를 대상으로 자신의 동료를 대상으로 현장에서 관계를 복원시켜내는, 인간 중심만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문제로부터 드러난 시각 말입니다. 파업을 진행한 노동자들이 언론을 다르게 보지 않습니까?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언론을 보다 파업하는 자신에 대해 비난을 일삼는 언론을 보면 언론에 대한 시각이 생기죠. 법에 대해서도 그렇고 사회제반 문제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관심을 갖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의 지속성입니다. 파업이 끝나고 투쟁이 끝나고 일상에 돌아가면 일상 속에서는 지속성을 같지 못하거든요. 이를 어떻게 유지시키고 끄집어낼 지에 대해 일관되게 고민하는 현장조직(문화패)이 있어야 하죠. 노동조합을 통한 것이 아니고 말이죠. 이 과정이 없으면 투쟁의 성과가 소실되는 것은 물론이고 핵심들/침탈에 대한 자기 대응력도 잃게 되고 맙니다.
준도 : 그렇다면 활동가들이 문화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지적할 것이 있을 텐데요…
영적 : 그렇습니다. 활동가들의 문화인식은 너무 단기적입니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문화 사업을 놓고 문화부장이 얼마나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지, 너무 한계적이죠. 그러다 보니 문화부장은 짐꾼일 수밖에 없죠.
문화는 왕도가 없는 겁니다. 의식 아닙니까? 상부구조(웃음). 토대가 바뀌면서… 저는 문화를 토대라고 보는데요. 사회가 변한다고 사회의식이 한꺼번에 변하는 게 아니거든요… 조금씩 쌓여가는 건데요. 파업할 때 사람들 의식이 마음이 확 열립니다. 이 열릴 때 어떻게 스스로 교육하고 서로 만나는지가 핵심이거든요. 문제는 축적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제는 문화부장이 상근자도 아닙니다. 전임자가 축소되고 있잖아요. 이때 축소 일 순위가 문화부장이거든요. 문화부장이 현장에서 일하고, 선전도 겸임하는데, 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시다바리 역할마저도 힘듭니다. 대공장은 돈으로라도 뭘 기획해보죠. 외부단체들 동원해서라도 말이죠. 하지만 조그만 중소사업장은 문화부장이 어디 있습니까? 거기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포괄적인 이야기만 하는 거죠.
그렇다고 노동가요는 이렇다고 말한다고 음악만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계급의식/대중의식/그리고 사회와 공장의 관계망 들을 복합적으로 봤을 때에야 가능하죠. 여기서 노래가 어떤 역할을 하냐는 거예요.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노조 간부들도 차별의식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별 말입니다. 좀 활동하는 사람들은 비정규직 그러면, 왠지 미안함, 묘한 감정에 이끌려 움직이는데, 물론 없는 사람도 많지만… 딱 그수준이거든요. 내가 사활을 걸고 달려들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게 깨져야 합니다. 이걸 위해서 조금씩 쌓아가는 거구요.
창작은 차이가 있고 다양한 여러 지형에서 시도되어야
영석 : 1990년대 초반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세대… 노동자 그러면 그냥 노동자인가? 그처럼 단순한 노동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일상, 지역, 자기 생활에서, 다양한 방식들이 녹아 있습니다. 나이․세대, 기혼이냐 미혼이냐 등등 각자의 상태나 조건에 따라 다 다릅니다. 이것을 다 하나의 묶음으로… 경제적 이해를 앞세워 투쟁가요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되면 굉장히 쉽습니다. 문화적으로 획일화된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차이들, 다양함들, 지형들에 대한 문화적 접근들이 더욱 고민되고 일상적으로 세밀화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민중가요가 대중가요처럼 10대 대상이니 식까지는 아니지만, 노래하는 각각의 사람들의 특징들이 있고, 최도은, 박준, 최근의 이반밴드까지 서로의 특징들이 대중들에게 맞아 떨어지는 거죠.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모이는 가죠.
준도 : 모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영석 : 사회적 에너지, 계급적 에너지를 대중들이 드러내는 위대한 힘을 가리킨 것입니다. 대중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자기 싸움을 전개할 때, 60먹은 해고아저씨가 이반밴드의 음악을 평상시에 들어가면서, 머리를 흔들면서 투쟁을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 분들은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이 노래를 부르거든요. 그분들에게는 이 노래가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뙤약볕아래에서 이리 집회하고 저리 집회하고 그러면 말이죠, 젊은 20~30대 노동자들에게 이 노래는 말이죠. ‘오늘도~~~’ (웃음). 같은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었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문화가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은 각각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것들이 곳곳에서 공동으로 드러날 때, 대중의 저항․ 투쟁의 독려 ․ 일상의 깨우침이 어떻게 맞물릴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모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놓고 한판 붙을 때 거기에는 60이고 20이고 없는 거지 않습니까. 그때는 또 물론 부르는 노래가 있죠. 같이 부르는 노래가 있죠. ‘단결투쟁가’는 다같이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 힘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힘도 있는데, 이것을 어느 하나로 환원하기에는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과 상황이 너무 다차원적입니다. 이것을 조직해야죠. 이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조직하는 것이죠. 정서도 조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 자체로 조직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죠. 최근에 고민했던 것이죠.
저는 시대와 상황, 대중들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자는 오히려 다음이죠. 창작자는 더욱 냉정해져야 할 텐데, 그래야지만 창작자들도 그런데서 자유로워질 수 있죠. 창작자도 좀 더 더 자기 고민에서 질적인 부문에서 담보할 수 있는 것이죠.
준도 : 그러면 오늘날 창작경향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영석 : 어떤 노래들을 만들 때, 자신의 역할을 집회현장에서 부를 노래를 만드는 것으로 결론지었다면 저는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고 대중의 에너지를 응축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을 하는 거거든요. 저더러 그것을 하라고 하면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호철 선배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말이죠, 사람들을 놓고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는 아주 다양한 것들이 있죠. 거기에는 갈등과 분도와 좌절과 환희와 사랑과 아주 많은 것들이 녹아 있죠. 노동자가 전경 앞에서 적개심에 불타기만 하는 게 아니 듯 말이죠, 자본가에 대해 적개심만 가지고 24시간을 살아가는 건 아니죠. 사람 환장하지 어떻게 삽니까(웃음). 그렇다면 문제는 각각의 다양한 일상 속에서 계급적인 관점들을 어떤 방식으로 추출해낼 것인가 말이죠.
일상이라는 것은 굉장히 진부한 소재일 수 있습니다. 이쪽에서도 일상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죠. 제 노래도 그렇게 평가를 받는데, 일상이라는 것은요 미학적인 점에서 보자면 말이죠. 대단히 진부한 것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진보적인 것일 수 있거든요. 자기 일상의 작은 역학관계를 어떻게 드러내주고 재해석하는가. 결국 노래는 혼자 만들어서 혼자 부르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소통하느냐가 핵심이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늘 창작자들에게 그런 고민이 많이 빠져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허위의식을 벗고 자신에 대한 다짐을… 문화노동자
준도 : 인터뷰하면 늘 던지게 되는 통상적인 질문 하나 던지겠습니다. 어쩌다 노래를 하게 되셨는지요? 제가 알기로는 미술운동을 하셨던 분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영석 : 왜 노래를 하게 되었을까 참… 뭐가 씌었나 봅니다(웃음). 말하자면 개인의 역사여서 참 구질구질한데… 대학 졸업하고 1993년엔가 생연(문화예술생산자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원래 현장에 들어갈까 생각했었는데, 그냥 아름다운 생각이었죠. 낮엔 일하고 밤에는 (창작) 작업한다, 이런 아주 아름답고 철없는 생각이었죠.
생연을 결성하고 추진위원장, 준비위원장을 맡았는데, 당시 저는 작업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좋은 작업, 자본주의사회에서 제대로 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잘 안되죠. 사람들이 나이도 들고. 조금씩 결혼들 하면서 생계문제가 걸리고, 대학 다닐 때 생각하고 졸업하고 사회활동 하면서 많이 달라졌거든요. 가슴 아프게도 생연 멤버들이 빠져 나간 이유가 대부분 경계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단체를 어렵게 이끌다가 결국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1년을 칩거했습니다. 죽을 맛이었죠. 그땐 정말 죽을 생각도 했었습니다.
당시 작은 하늘(그룹 MayDay 전신)이라는 팀에서 제가 가사를 쓰고 있었는데, 그러다 노래를 하나 만들게 된 거죠. 라면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썼는데, 이 노래 가사는 메이데이에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메이데이는 헤비메탈에 가까웠거든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 노래를 만들었고, 그러면서 내친김에 노래를 몇 개 더 만들었죠.
그러다 앞으로 뭐할까 고민하고… 돈벌고 운동할까 그러다가 죽을 생각하니까 그제야 제가 보였던 거죠. 그러다가 노래를 부르면 밥 세끼는 먹게 되지 않을까(웃음) 연대활동을 다니면 밥은 줄 것 같고요(웃음).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음악을 하면 굉장히 편했고요. 그리고 그때 나의 그릇을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대학교 갓 졸업할 때는 운동이 요구하면 뭐든지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책도 읽고, 어쭙잖게 글도 쓰고, 사람들 만나서 조직하고, 정책도 고민하고, 대표도 하고, 미학학습도 시키고… 그런데 이것이 내 그릇이 아니더란 말이죠. 역시 나는 작업을 해야 하는구나… 그때 음악이 많이 끌렸었습니다. 미술보다는 좀 호소력도 있고, 내가 가고자 하는 동지들 앞에서 노래도 부를 수 있고, 게다가 밥도 얻어먹을 수 있고요(웃음). 이것 중요합니다. 밥 안 먹고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웃음). 이 작업실도 제 꺼가 아니고요(웃음)
준도 : 생산자라는 표현을 쓰셨고, 자신을 소개하실 때 문화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시잖아요. 이유가 있는 듯 합니다. 쭉 일관되게 그렇게 표현을 해 오신 것 같은데, 어떤 맥락에서 그러는지요.
영석 : 하나의 담론입니다. 언어는 사람의 가치체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담론을 계속 던짐으로써, 사람들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의도였던 거죠. 홍대 미대 시절 대학동료들을 봤을 때 허위의식이 너무 많았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요. 사실, 이 사람들 다 실업자 아닙니까. 백수고, 극빈층들이거든요. 그런데 예술갑니다. 굉장히 고귀해요… (웃음) 지식인도 예술가도 아닙니다. 대학교 졸업장 받으면 지식인입니까? 대학원 나오고 박사과정 밟으면 다 지식인입니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꼴통 같은 건지는 모르지만… 그런 허위의식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거예요. 현실을 보란 말이죠. 노동자란 말이죠. 결국은 다들 임시직 계약직이어요. 돈 벌려면 그럴 수밖에 없거든요. 미학과 나온 사람들 큐레이터로 취직하면 얼마 받는지 아십니까? 많이 받으면 100만원이어요. 전부 계약직이고요. 언제 해지될 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개기지도 않아요. 어이가 없죠.
생연 만들 때 처음부터 노동자라는 말을 쓰고 싶었습니다. 문화예술 노동자연합이라고 할 것인가 문화예술 생산자연합이라고 할 것인가 논란이 있었죠. 당시 생각엔 그랬습니다. 왜 문화노동자는 노동조합을 만들 수 없는 걸까? 이런 생각을 했었죠. 그런 고민의 연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노동자라는 말을 쓰기 거부했던 사람들이 있었죠. 중재를 하는 과정에서 생산자라는 말을 썼던 거죠.(웃음) 저는 이걸 통해서 사람들 인식을 바꾸고 싶었던 거죠.
지금은 또 다릅니다. 그런 정세도 아니고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문화예술가들을 끌어당겨야겠다는 욕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매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문화예술가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지식인들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회진보연대한테 미안하기는 하지만서도요(웃음) 역할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고요, 제가 그런 곳에 에너지를 쏟아 붓고 싶지 않다는 말이죠. 지금 문화노동자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저에 대한 다짐입니다. 저의 정체성 말이죠. 내가 누굴 위해서 노래를 부른다거나 싸운다는 뜻이 아니고요,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빈곤한 임시직 계약직 문화노동자로서 내 소리를 내고 싶은 그런 나의 정체성에 대한 다짐이죠.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 대중이 참여하는 예술
준도 :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허위의식이라는 문제를 젖혀놓고 말이죠. 예술가로서 싸운다는 말도 있잖아요. 고용된 노동자로서라기보다는 예술가로서 말이죠.
영석 :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존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 자체가 가지는 말의 무거움을 벗어야 합니다. 이후 사회는 어떤 사회이겠냐는 건데, 일단 노동시간은 월등히 단축될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처럼 자본주의 물신성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노동시간이 단축되더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문화를 형성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소비하려는 것에 기대어서 시간을 소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미래를 어떻게 만들 거냐는 말이죠. 나머지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죠. 문화적 향유로 시간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 것을 자신이 향유할 수도 있고, 스스로 생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매일 잔업철야를 해야 사는 사회라면 아예 불가능하겠지만, 일주일에 삼일만 일해도 되는 사회에서는 자신이 연주하고 싶은 악기를 노래를 연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능적인 부분은 많이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냐 아니냐는 구분이 무의미해지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예술은 너무 폐쇄적이죠. 폐쇄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박준도씨가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에서 예술가에 대한 대우, 그리고 문화생산자로서 우리 생산물에 대한 대중과 소통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 따라서 이에 대해 공공부분처럼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글쎄요, 고민이긴 합니다만, 이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민예총이 지원받은 공공자금을 돌이켜보면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지 주저하게 됩니다.
준도 : 반대로 다른 딜레마에 부딪칠 수 있을 텐데요, 예술인 개인이 직접 유통망을 확보하자는 식의 논리 말입니다. 이는 지금 상황에서 저작권 문제로 이어지고 마는데요.
영석 : 이런 상상을 해보죠.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말고 노래를 부른단 말이죠. 어떤 사람은 노래도 만들고 어떤 사람은 기타도 치고 팀도 만들고 술집에서건 거리에서건 공연도 하고 말이죠. 이 노래가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찾을 것입니다. 물론 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라고 권고하겠죠(웃음). 저는 그 안에서 자기 그릇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위적으로 꾸려지는 것도 아니고, 위에서 마구 뿌려대는 것도 아니고… 저는 이런 시스템이 올바르다고 봅니다.
‘음악은 음악이에요. 진실하면 되죠.’라는 말은 순수주의로 멈추고 맙니다. 예술은 온갖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얽매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홍대 미대 후배들 잘 합니다. 잘해요. 그런데 이 친구들 자본의 흐름을 잘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보여야 나를 상품화할 수 있는지 잘 안단 말이죠. 이런 시스템에 길들여지면, 예술이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정말 음악이 음악다울 수 있도록 내가 예술가로서 이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맞습니다. 이것은 생연의 논리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는 것이야 말로 안이한 발상
준도 :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생연 이야기를 하신 김에 조금 괴로우시겠지만, 생연 실패를 어떻게 평가하실 수 있는지요. 사실, 이는 90년대 새로운 대안적인 흐름들을 찾자는 여러 가지 시도들. 리얼리즘에 대한 재고, 창작역량을 높이고, 생산된 것에 대한 소통구조를 새로 갖추고, 이런 것들에서 활로를 찾자든가 또 다른 문화적 형태들을 찾아서 나서보자 등등 여러 시도들에 대한 평가이기도 할 것입니다.
영석 : 이야기만 하고 만 거죠, 뭐(웃음) 저의 경험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 전부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현장의 흐름은 상당기간 완고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로지 투쟁가 중심이었죠. 그 밖의 흐름들이 있었습니다만 형식적인 변화를 조금 시도한 것 말고는 크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소재의 다양화, 노래 접근 방식의 다양화를 들 수 있겠네요. 그렇다고 이 같은 시도, 예컨대 천지인의 음반을 기왕의 민중가요/노동가요의 형식으로 비판한다면, 그러니까 형식주의자라고 비판한다면 그럴 만큼 자기 근거가 있었을까는 부정적입니다. 그들 역시 그저 새로운 형식을 거부한 것 이상은 아닌 것이죠. 또 다른 형식주의입니다. 형식과 내용을 같이 고민했던 것은 아니죠.
준도 : 1990년대의 시도를 말하기에 앞서 지형 자체의 변화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운동이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대학문화를 위시해서 모든 운동문화가 침체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새로운 형식의 변화만을 추구했던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듯 합니다. 80년대 초반에만 해도 락은 미 제국주의의 똥물이다 식의 비판이 강했습니다. Oxen80에 대한 비판에서 엿보이듯 이요. 좀 어이없는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의 새로운 시도는 뒤집어 져있었습니다. 오히려 대중문화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식이었죠.
자본주의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계승하자라는 취지에서 보아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무언가 간취해야 할 것으로서 왜 록으로 상징하는 대중문화냐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를 ‘록의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이전에 비판받았던 록이 부활했다는 것이죠. 조금 단호한 비판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영석 : 당시 논쟁 자체는 뭐라 할말이 없습니다. 논의를 제기했던 주체를 생각해보면 박준도씨가 이야기하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안일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저도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어느 토론 자리의 발제문에서 ‘우리가 무슨 록의 부활을 꿈꾸나? 우리가 하고자 하는 노동가요와 민중가요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지 록의 부활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었으니까요.
주체를 보면 부정할 수 없죠. 결과로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당시 그런 주장을 했던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는 것이죠. 당시 그런 고민들을 전개했던 사람들 중 지금도 활동하는 사람은 몇 명 없습니다. 아마도 대중문화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 머릿속에 대중문화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들 말이죠. 그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 못했을 뿐이죠.
하지만, 대중의 흐름과 정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대가 동시대성을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동시대성에서 다양한 흐름들이 존재할 때 거기에서 자기 역할과 관계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죠. 그리고 다양한 삶들을 드러내는 과정으로서 형식들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고요. 작은 하늘이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안에서 다른 견지를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 제가 비판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게요. 제 기준으로 교정하려고 했던 거죠. 물론 그들이 보기에는 제가 자신들을 가두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작은 하늘은 부르스, 스윙 할 것 없이 모든 시도를 다 해보았습니다. 메이데이로 오면서는 기획이 끼고, 하나의 음반으로 드러나야 해서 딱 하나로 정리되긴 했지만요. 당시 가사들은 옛날 가사들과 완전히 벗어간 것들이 혼용되어 있었습니다. 무단횡단 같은 노래는 논법이 많이 달랐습니다. 제가 쓴 가사도 그런데 일조했고요. 저는 이런 실험들에 대해서 존중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류를 극복하고 대중들을 만나고 대중들과의 관계 속에서 깨지고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거구요, 미리 예단하고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박준도씨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만, 또 어떤 문제가 제기 되냐 하면, 창작이라는 것은 이렇게 재고 저렇게 재고 하다보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결국은 김호철 선배의 노래,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노래를 조금 변화시키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히려 창작자가 스스로 자신의 개념과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낼 것이냐는 거죠. 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형식적인 진전이 어렵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과거보다 더 나갔고, 지금도 제가 못할 뿐이지 제 후배들에게 더 나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본격적으로 사회에다 던지라고 말이죠. 민중가요 록그룹 천지인은 현장에 기반을 두지 않았습니다. 지지기반이 학생들이었죠. 학생들 감수성을 그대로 가지고 왔던 것이거든요. 현장 노동자들이 50~60시간 뺑이 쳤다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파격적으로 사회에다 던지라는 거죠. 이는 노동자들의 존재상황과 맞물리는 것입니다.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 비정규직 영세 사업장, 노동자라는 자기의식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 더군다나 그 속에서 점점 더 운동과 멀어지게 된 젊은이들.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층위들과 결합되어 있는 것들 말입니다.
천지인이나 이반처럼 애매한 것, 구체성이 좀 떨어지거든요. ‘체 게바라의 포스터 앞에서’ 이런 거 말고, 구체적인 것 말입니다. 갓 대학 졸업한 사람, 10년 동안 직장 생활하다가 노조도 없고 내가 노동자인지도 모르고, 또는 한 5년 동안 계약직 생활하면서 이리 계약하고 저리 계약하던 사람이 딱 들을 때, 아 제길 내 인생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그냥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좀 더 사회적인 거 말입니다. 2집에서 이야기했듯 사회가 공장이고, 사회와 현장은 끊임없이 맞물려 돌아가니까요. 오히려 우리 같은 경우가 낀 세대입니다. 제가 아무리 젊은 척 해도 386세대고, 제가 고민했던 방식이 있습니다. 제겐 그런 관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후배들이 탁치고 나갔으면 좋겠는데요 없어요. 저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안일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듭니다. 오히려 그게 더 안일하죠. 반대로 말이죠. 그것을 고민하지 않는 게 말입니다.
저번에 노문센터에서 사랑방 토론회할 때 대안문화, 노동문화 글을 썼을 때, 주장했던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예전에 우리가 노동문화가 다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문화가 최고고, 노동문화가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죠. 저는 이것을 부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나름대로 저는 이것을 부정했고요, 우리는 각각 다양한 진보적인 형태의 흐름들 중 하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는 아니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우리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결국 그런 부분에서 우리의 역할, 대중운동 안에서 고리 그 안에서 우리의 역할 들이 맞물려 들어갔을 때, 이것이 수평적으로 이루어지고, 수평적인 연대가 이루어지면서 이것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들이 문화적 연대라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놓치는 않았습니다.
창작의 적극성을 가져야
저는 그래서 현장문화패를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난 당신을 대변해서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닌 타자를 대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노동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질곡들에 대한 내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당신들이 자신의 질곡을 노래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나는 그게 노동문화라고 생각하고 그게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제가 처음 만났을 때 현장 노동자들이 ‘ 연영석 동지는 이것이 부족하고, 현장노동자들과의 정서적 공감이 어렵고’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동지가 여기서 10년이 넘게 일하고 살면서 느끼는 느낌이 있었을 텐데, 동지가 해야 합니다. 그것이 맞지 않습니까? 노동자 대통령 만들면 끝납니까? 국회의원 만들면 끝납니까? 그건 우리의 정치가 아니죠.’ 전 이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잘 만들고 못 만드는 것은 나중 이야기입니다. 그게 무슨 흠이 됩니까? 그것가지고 밥벌이하려면 흠이 될지 모르지만, 일하는 사람이 노래를 만들겠다는 게 왜 흠이 됩니까? 못 만들면 또 어떻습니까? 그것을 그렇게 재단하는 놈들이 미친놈들이죠. 스스로 괜히 부끄러워하고 멋쩍어 하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자기표현에 적극성을 가져야죠.
게으른 피, 일상의 시스템 파괴
준도 : 2집 앨범 제목이 ‘게으른 피’잖아요?
영석 : 아닙니다. 음반 제목은 공장입니다.
준도 : 어 그럼 (표지의) ‘게으른 피’는 뭐였지요?
영석 : 그건 제 닉네임입니다.
준도 : (멋쩍어하며) 왜 자신을 그럼 게으른 피라고 하죠?
영석 : 주변 친구들 꿈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꿈을 자본에 착 달라붙어서 팔고 사는 사람조차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까? 몇몇 잘나가는 경우도 있겠지만요. 나머지는 꿈이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하루가 급급하게 사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았죠. 부지런해라 경쟁시스템에서 아침에 6시에 일어나서 씻고 7시에 나와서 8시까지 출근하고 저녁 7시까지 일하고 집에까지 일 싸안고 와서 일하다가 내일 일해야 하니까 자고… 이런 시스템을 깨자는 거죠. 게으르게 살자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에서 내 의의와 가치를 찾아서 말이죠.
특히 문화가 그렇습니다. 문화가 변하지 않고서 운동의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우리의 삶은 자본주의에 이미 뼈 속 깊이 내재화되어 있죠.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하죠. 유럽 사민주의의가 대중에게 준 것은 이거밖에 없습니다. 자기 주체의식보다는 국가가 해결해 준다는 사회보장제도와 돈 좀 벌어서 자동차 사는 소비체계, 그리고 스포츠, 휴가 - 도시 공동화 , 우리나라라고 안 그럴 것 같습니까? 울산, 휴가 때면 아무도 없습니다. 다 좋은 차 몰고 다니고요, 차 모는 것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그런 쪽으로만 계속 간다는 거죠. 컴퓨터 작업하는 사람들이요, 몇 개월 일해서 계약금 300~400만원 정도 법니다. 그러고는 컴퓨터 장비 업그레이드해요. 이게 무슨 삶입니까. 장비 만드는 회사 먹여 살리는 거죠. 노동조합 활동가들 자기 자식 과외 시키는 분들 많아요. 이런 거 다 깨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공장이라는 거죠. 단지 기름밥 만지는 곳이 공장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만이 현장이 아니라, 사회가 현장이고 공장입니다. ‘노동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 이게 얼마나 피상적입니까? 어떻게 바꿀 건데요? 자기가 노동하고 있는 뼈에 녹아 있는 노동현장과 중첩되어 있는 겁니다. 이걸 의식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활동가들이 현장사업을 해야죠. 노동조합 권력에 국한되지 않는 사업들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삶을 보면 갈 길이 너무 멀죠.
젊은,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부르는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영석 : 저도 제 나름대로 일관성은 있습니다. 가사들이나 고민이나 일관성은 딱 하나입니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아니라 좀 더 멀리, 더 넓게 내다보고 노래를 부르고 싶은 거죠. 그렇다고 정규직을 부정하거나 나이든 노동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멀리 내다봤을 때 젊은 노동자들이 필요한 거구요, 이들이 계속 치고 나와야 하죠. 지금 40대 노동자들, 지금은 노동귀족이네 어쩌네, 욕을 먹고 있기는 하지만 20대 때 박 터지게 싸워서 뛰쳐나왔던 이들이거든요. 젊은 노동자들이 싸워서 나와야 하는데요, 지금은 싸우지 않는다는 거죠. 그들과 함께 하는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이들과 함께 세상을 노래하는 노래가 있어야 하죠. 조직된 노동자가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 젊은 노동자들, 젊은 실업노동자들, 계약직 1순위로 일할 사람들. 제 포맷은 이런 겁니다. 아까 이야기 했던 것처럼 사회에서 던지는, 사회가 현장을, 노동자들을 괄시하고 천대하고, 노동자들 다른 곳에 관심가지지 못하게 하고, 노동자들 동료가 잘려나갈 때 외면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국가, 국익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딴죽 걸고 깨트리느냐 말이죠.
저는 다른 민중가요 가수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음반은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을 위한 음반이다. 네가 주로 가는 현장에서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말이죠. 어쩌면 다른 이들과 달리 저는 그나마 창작을 하니까, 단결투쟁, 노동해방보다는 세세한 구체성을, 그런 정서를 담은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데서 오는 노력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겠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리버럴해 보일 수 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들 한사업장에서 일하면서 줄 쫙 서가지고, 손 쫙쫙 올리고, 단결! 투쟁! 한단 말이죠. 비정규직 노동자들 아르바이트거든요. 머리 노랗게 염색해서 바지 찢어지고, 노동자인지 뭔지, 이 공장 저 공장 왔다 갔다 하면서 습성화된 게 있죠. 하지만 그것을 단지 쁘띠적이고 조직화가 안 되다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나름대로 돌파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돌파구를 제가 조직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게 그들의 무기가 될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기가 되고자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도 아니지만 대중들이 선택하겠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 포맷이고 음악의 포맷입니다. 그게 제가 편해요. 그리고 제 생활도 그렇고요. (웃음)
1992년 꽃다지/노래공장/조국과청춘/희망새/천지인 그리고 1993년 노동자문예창작단의 앨범을 기점으로 민중가요는 두드러지게 쇠퇴한다. 같은 해 정태춘․박은옥의 6집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이에 대한 마지막 애도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1992년 대선의 패배에서 최종적으로 확인된 민중운동의 위기와 정확히 시간적으로 일치한다.
안치환/김광석/권진원 그리고 윤도현의 실험(?)을 논외로 한다면,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옥석을 가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당대의 모든 시도들이 1980년대를 부정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들은 ‘새벽’처럼 자신의 시도를 앨범으로 남기지도 못한 채 해산해 버린 경우도 있었고, ‘MayDay’처럼 20세기를 넘기지 못하기도 하고, ‘천지인’, ‘노래공장’처럼 큰 단절을 겪은 곳도 있었다. 그리고 최근 해산한 ‘조국과 청춘’ 그리고 아직도 그 이름이 낯선 무명그룹들과 개인이 있다. 물론 ‘꽃다지’, ‘희망새’처럼 자신을 온전히 하는 곳도 있고 말이다. 전문적인 노래운동 단체 말고 대중조직에도 여러 노래패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민중가요와 대중조직의 흥망과 같이 했음은 물론이다.
해체와 실험을 반복하며 10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오늘 민중가요의 현실이 웅변하듯 아무도 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누가 문제의식을 지속하는지 평가마저 시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90년대의 시도를 기억하고 평가하는 것이 기존 자료에 의존하기 대단히 힘든 상황이어서 ‘새 노래를 찾아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는 시도들에 대한 소개일 수도 있겠다. 물론, 한 개인의 미망일 수도 있을 텐데, 부인하기 곤란함을 밝히면서 지면을 할애해 준 사회진보연대 편집실 동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전문노래패건, 소모임이건 간에 무작위로 찾아다닐 생각이다. 새 노래의 싹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아직까지도 나는 그것을 보고 싶고, 이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래에 대한 소개보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과 게으름이 내게 이를 얼마나 허락할지 몰라 그것이 걱정이다.
이것은 제 노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노동자의 노래입니다.
- 게으른 피, 연영석 문화노동자
노동자 노래패, 노래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
준도 : 노래운동 자체가 오랜 기간 침체에 빠져있습니다. 1~2년도 아니고 10여년이 넘게 요.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러다 보니 노조노래패와 지역노래패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신생 노래패는 물론 10~20년 정도 된 노조․지역 노래패도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활기를 되찾고자 윤도현 들의 노래를 부르는데 과거에는 없던 일입니다. 어떻게 보는지요?
영석 : 윤도현 들의 노래를 아무 생각 없이 부른다고 보지 않습니다. 일반인이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과 이들이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죠. 문제는 그런다고 (노래패의 정체라는) 문제가 해결되느냐는 것입니다.
과거 노동자 노래패는 같이 부르는데 익숙했고, 이 틀에서 (자기 창작 역량이 없다보니) 전문 노래패의 노래를 소화해왔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전문노래패의 합창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과거처럼 당위만 가지고 노래 부르기는 힘들고, 삶이 녹아나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여기에 왜곡된 간극이 존재합니다. 노동자 대중은 물론 노조 노래패조차 문선할 때는 투쟁가를 부르다 일상에서는 부를 노래가 없어 대중가요를 부르는 간극이요. 그렇다고 전문노래패에서도 이를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 이 곤란이 윤도현 노래를 부른다고 해결될 수는 없죠.
준도 : 이렇게 침체된 상황에서 노조 노래패의 활동은 어떻습니까? 존재 양식 말입니다.
영석 : 노조에서 추진하는 공연을 하나 예를 들어보죠. 대개 노조 행사 때 공연을 하면 전문적인 외부 단체를 세워 끝내고 맙니다. 노조노래패가 소멸하고 있어서 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노조노래패를 세우고 또 만들려고 노력해야 할 텐데, 그런 고민들을 안 합니다. 있던 조직들이 워낙 깨져나가니까 만들어봤자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뭔가 만들면 깨지는 건 당연한거고, 소멸되면 생성하는 거고 이런 것일 텐데요.
노동자들에게, 동지들이 이를 해야 한다고 한다고 이야기하긴 하지만,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현장문화패에게 당신들이 당신 이야기를 하라고 했을 때도 무언가 짓눌려 있습니다. 그만큼 위축되어 있다는 거죠. 현장 자체가 위축되어 있으니까 문화패도 위축되어 있는 겁니다.
준도 : 그럼에도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남을 것입니다. 노동조합에서 공연을 준비할 때 노조노래패를 세우라고 문제제기했던 걸로만 봐도 몇 가지 이야기 하실 것이 있을 텐데요.
영석 : 사실 그 문제는 어느 누구도 해답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왕도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도 몇 가지 이야기해보자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노래하고 음악을 하지만, 모두 다 재미있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다 재미있어서 시작하지만 늘 신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제 친구들 음악한지 15년이네 하지만,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다는 거죠. 현장노래패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조건이 다르지만…
현장 노래패 원들이 노래를 시작했던 이유도 다양할 것입니다. 노동운동을 위해서, 문선활동을 하려고 시작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타 치는 것이 좋아서, 원래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서 온 사람들 이렇게 여러 가지인데 지금은 처음의 맘을 찾기가 힘들다는 거죠. 노래 부를 때의 즐거움 말이죠. 그런 사람들한테 재미를 찾으라고 하면 하나마나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한국노총의 경우 취미그룹이 잘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취미그룹이 잘된다고 영원히 잘 유지될 것이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때 몰아치던 것이거든요. 사람이 계속 물갈이 되는 겁니다. 늘 하지는 않습니다. 물갈이 되는 거죠. 그만큼 무게가 없는 거죠. 부담감이 없는 거죠. 여기는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인 마냥 그냥 그렇게 사고하는 무거움이 존재하죠. 일단 그런 무거움 들을 벗어야 합니다. 오히려 더 대중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문선시킬 목적이 아니라, 누구라도 일주일이라도 민중가요를 접해볼 수 있도록 대중화시켜야 합니다. 노래패할 사람들 노래패 하고, 그만두면 너 운동 그만 둘 거냐며 술 들이킬게 아니라(웃음) 자기 활동 하면 되는 거고, 조합 활동 하면 되는 거고 이런 식으로 사고를 가볍게 해야 합니다. 사회는 움직이는 것 아닙니까, 변화하고…
하지만, 10년 씩 넘어가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찾고자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한다면, 여기에 요구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창작이라고 봅니다. 창작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또 즐거움이 있거든요. 경지가 있는 거죠. 그 경지를 가야할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게 되면 그것도 또 마약이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노래패에 있어야 할 자기 근거가 생깁니다. 생기죠. 복합적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무겁기만 했죠.
준도 : 이런 문제는 노조노래패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학생노래패 역시 동일한 상황에 맞부딪혀 있을 텐데요.
영석 : 물론 유사한 점도 있겠지만 노조와 학생들의 경우는 분리해야 할 것입니다. 노조는 싫든 좋든 자기 스스로 강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쨌든 당장 자기 임금 몇% 깎이면 모인단 말이죠. 어쨌든 공동의 목표가 존재하죠. 학교는 다릅니다. 이를 지탱해주던 지적 요구나 사회적인 참여의식 들이 1980년대를 지나면서 붕괴해버렸죠. 그런 공동체성/문화적 균질성이 붕괴된 것입니다. 학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부터 일 것입니다. 학생 노래패들의 공연에서 학생들을 찾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죠.
노조의 경우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무엇을 쌓아갈 것인지가 쟁점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있어 집회장소에 모였기 때문에 뭐가 되었든 일단 본단 말이죠. 이것을 어떻게 기획하고 접근하는가가 학교보다 낫죠. 하지만 불행히도 노조는 여기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무엇을 쌓을 것인가요. 노조 문화패나 문화부장 대부분은 다 따까리고, 노조사업은 대개 한시적입니다. 문화는 축적되는 과정인데, 이를 노동조합이 이를 견디지 못하는 거죠. 성과가 빨리 드러나야 다음 선거도 하는 과정들 때문에 말이죠.
노조 선거와 무관한 현장조직의 끊임없는 흐름이 존재해야 하죠. 노동조합 권력을 쥐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를 갈아먹기도 하니까요. 문화패도 현장조직입니다. 문화패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현장에서 일상적 활동의 지속성을 가져가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노동자 문화를 축적해야 합니다
준도 : 좀 전에 언급하신 것처럼 노조 재생산 메커니즘과 문화적인 문제의식이 돌아가는 메커니즘이 있는데요. 사실 이게 충돌을 안 하면 오히려 예외고, 충돌이 정상일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영석 : 문화, 노래, 그리고 노동운동에 대한 시각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일관되게 노조권력과 관계없이 노동자를 대상으로 자신의 동료를 대상으로 현장에서 관계를 복원시켜내는, 인간 중심만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문제로부터 드러난 시각 말입니다. 파업을 진행한 노동자들이 언론을 다르게 보지 않습니까?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언론을 보다 파업하는 자신에 대해 비난을 일삼는 언론을 보면 언론에 대한 시각이 생기죠. 법에 대해서도 그렇고 사회제반 문제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관심을 갖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의 지속성입니다. 파업이 끝나고 투쟁이 끝나고 일상에 돌아가면 일상 속에서는 지속성을 같지 못하거든요. 이를 어떻게 유지시키고 끄집어낼 지에 대해 일관되게 고민하는 현장조직(문화패)이 있어야 하죠. 노동조합을 통한 것이 아니고 말이죠. 이 과정이 없으면 투쟁의 성과가 소실되는 것은 물론이고 핵심들/침탈에 대한 자기 대응력도 잃게 되고 맙니다.
준도 : 그렇다면 활동가들이 문화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지적할 것이 있을 텐데요…
영적 : 그렇습니다. 활동가들의 문화인식은 너무 단기적입니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문화 사업을 놓고 문화부장이 얼마나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지, 너무 한계적이죠. 그러다 보니 문화부장은 짐꾼일 수밖에 없죠.
문화는 왕도가 없는 겁니다. 의식 아닙니까? 상부구조(웃음). 토대가 바뀌면서… 저는 문화를 토대라고 보는데요. 사회가 변한다고 사회의식이 한꺼번에 변하는 게 아니거든요… 조금씩 쌓여가는 건데요. 파업할 때 사람들 의식이 마음이 확 열립니다. 이 열릴 때 어떻게 스스로 교육하고 서로 만나는지가 핵심이거든요. 문제는 축적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제는 문화부장이 상근자도 아닙니다. 전임자가 축소되고 있잖아요. 이때 축소 일 순위가 문화부장이거든요. 문화부장이 현장에서 일하고, 선전도 겸임하는데, 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시다바리 역할마저도 힘듭니다. 대공장은 돈으로라도 뭘 기획해보죠. 외부단체들 동원해서라도 말이죠. 하지만 조그만 중소사업장은 문화부장이 어디 있습니까? 거기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포괄적인 이야기만 하는 거죠.
그렇다고 노동가요는 이렇다고 말한다고 음악만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계급의식/대중의식/그리고 사회와 공장의 관계망 들을 복합적으로 봤을 때에야 가능하죠. 여기서 노래가 어떤 역할을 하냐는 거예요.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노조 간부들도 차별의식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별 말입니다. 좀 활동하는 사람들은 비정규직 그러면, 왠지 미안함, 묘한 감정에 이끌려 움직이는데, 물론 없는 사람도 많지만… 딱 그수준이거든요. 내가 사활을 걸고 달려들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게 깨져야 합니다. 이걸 위해서 조금씩 쌓아가는 거구요.
창작은 차이가 있고 다양한 여러 지형에서 시도되어야
영석 : 1990년대 초반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세대… 노동자 그러면 그냥 노동자인가? 그처럼 단순한 노동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일상, 지역, 자기 생활에서, 다양한 방식들이 녹아 있습니다. 나이․세대, 기혼이냐 미혼이냐 등등 각자의 상태나 조건에 따라 다 다릅니다. 이것을 다 하나의 묶음으로… 경제적 이해를 앞세워 투쟁가요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되면 굉장히 쉽습니다. 문화적으로 획일화된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차이들, 다양함들, 지형들에 대한 문화적 접근들이 더욱 고민되고 일상적으로 세밀화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민중가요가 대중가요처럼 10대 대상이니 식까지는 아니지만, 노래하는 각각의 사람들의 특징들이 있고, 최도은, 박준, 최근의 이반밴드까지 서로의 특징들이 대중들에게 맞아 떨어지는 거죠.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모이는 가죠.
준도 : 모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영석 : 사회적 에너지, 계급적 에너지를 대중들이 드러내는 위대한 힘을 가리킨 것입니다. 대중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자기 싸움을 전개할 때, 60먹은 해고아저씨가 이반밴드의 음악을 평상시에 들어가면서, 머리를 흔들면서 투쟁을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 분들은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이 노래를 부르거든요. 그분들에게는 이 노래가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뙤약볕아래에서 이리 집회하고 저리 집회하고 그러면 말이죠, 젊은 20~30대 노동자들에게 이 노래는 말이죠. ‘오늘도~~~’ (웃음). 같은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었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문화가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은 각각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것들이 곳곳에서 공동으로 드러날 때, 대중의 저항․ 투쟁의 독려 ․ 일상의 깨우침이 어떻게 맞물릴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모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놓고 한판 붙을 때 거기에는 60이고 20이고 없는 거지 않습니까. 그때는 또 물론 부르는 노래가 있죠. 같이 부르는 노래가 있죠. ‘단결투쟁가’는 다같이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 힘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힘도 있는데, 이것을 어느 하나로 환원하기에는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과 상황이 너무 다차원적입니다. 이것을 조직해야죠. 이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조직하는 것이죠. 정서도 조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 자체로 조직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죠. 최근에 고민했던 것이죠.
저는 시대와 상황, 대중들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자는 오히려 다음이죠. 창작자는 더욱 냉정해져야 할 텐데, 그래야지만 창작자들도 그런데서 자유로워질 수 있죠. 창작자도 좀 더 더 자기 고민에서 질적인 부문에서 담보할 수 있는 것이죠.
준도 : 그러면 오늘날 창작경향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영석 : 어떤 노래들을 만들 때, 자신의 역할을 집회현장에서 부를 노래를 만드는 것으로 결론지었다면 저는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고 대중의 에너지를 응축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을 하는 거거든요. 저더러 그것을 하라고 하면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호철 선배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말이죠, 사람들을 놓고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는 아주 다양한 것들이 있죠. 거기에는 갈등과 분도와 좌절과 환희와 사랑과 아주 많은 것들이 녹아 있죠. 노동자가 전경 앞에서 적개심에 불타기만 하는 게 아니 듯 말이죠, 자본가에 대해 적개심만 가지고 24시간을 살아가는 건 아니죠. 사람 환장하지 어떻게 삽니까(웃음). 그렇다면 문제는 각각의 다양한 일상 속에서 계급적인 관점들을 어떤 방식으로 추출해낼 것인가 말이죠.
일상이라는 것은 굉장히 진부한 소재일 수 있습니다. 이쪽에서도 일상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죠. 제 노래도 그렇게 평가를 받는데, 일상이라는 것은요 미학적인 점에서 보자면 말이죠. 대단히 진부한 것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진보적인 것일 수 있거든요. 자기 일상의 작은 역학관계를 어떻게 드러내주고 재해석하는가. 결국 노래는 혼자 만들어서 혼자 부르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소통하느냐가 핵심이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늘 창작자들에게 그런 고민이 많이 빠져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허위의식을 벗고 자신에 대한 다짐을… 문화노동자
준도 : 인터뷰하면 늘 던지게 되는 통상적인 질문 하나 던지겠습니다. 어쩌다 노래를 하게 되셨는지요? 제가 알기로는 미술운동을 하셨던 분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영석 : 왜 노래를 하게 되었을까 참… 뭐가 씌었나 봅니다(웃음). 말하자면 개인의 역사여서 참 구질구질한데… 대학 졸업하고 1993년엔가 생연(문화예술생산자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원래 현장에 들어갈까 생각했었는데, 그냥 아름다운 생각이었죠. 낮엔 일하고 밤에는 (창작) 작업한다, 이런 아주 아름답고 철없는 생각이었죠.
생연을 결성하고 추진위원장, 준비위원장을 맡았는데, 당시 저는 작업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좋은 작업, 자본주의사회에서 제대로 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잘 안되죠. 사람들이 나이도 들고. 조금씩 결혼들 하면서 생계문제가 걸리고, 대학 다닐 때 생각하고 졸업하고 사회활동 하면서 많이 달라졌거든요. 가슴 아프게도 생연 멤버들이 빠져 나간 이유가 대부분 경계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단체를 어렵게 이끌다가 결국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1년을 칩거했습니다. 죽을 맛이었죠. 그땐 정말 죽을 생각도 했었습니다.
당시 작은 하늘(그룹 MayDay 전신)이라는 팀에서 제가 가사를 쓰고 있었는데, 그러다 노래를 하나 만들게 된 거죠. 라면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썼는데, 이 노래 가사는 메이데이에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메이데이는 헤비메탈에 가까웠거든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 노래를 만들었고, 그러면서 내친김에 노래를 몇 개 더 만들었죠.
그러다 앞으로 뭐할까 고민하고… 돈벌고 운동할까 그러다가 죽을 생각하니까 그제야 제가 보였던 거죠. 그러다가 노래를 부르면 밥 세끼는 먹게 되지 않을까(웃음) 연대활동을 다니면 밥은 줄 것 같고요(웃음).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음악을 하면 굉장히 편했고요. 그리고 그때 나의 그릇을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대학교 갓 졸업할 때는 운동이 요구하면 뭐든지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책도 읽고, 어쭙잖게 글도 쓰고, 사람들 만나서 조직하고, 정책도 고민하고, 대표도 하고, 미학학습도 시키고… 그런데 이것이 내 그릇이 아니더란 말이죠. 역시 나는 작업을 해야 하는구나… 그때 음악이 많이 끌렸었습니다. 미술보다는 좀 호소력도 있고, 내가 가고자 하는 동지들 앞에서 노래도 부를 수 있고, 게다가 밥도 얻어먹을 수 있고요(웃음). 이것 중요합니다. 밥 안 먹고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웃음). 이 작업실도 제 꺼가 아니고요(웃음)
준도 : 생산자라는 표현을 쓰셨고, 자신을 소개하실 때 문화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시잖아요. 이유가 있는 듯 합니다. 쭉 일관되게 그렇게 표현을 해 오신 것 같은데, 어떤 맥락에서 그러는지요.
영석 : 하나의 담론입니다. 언어는 사람의 가치체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담론을 계속 던짐으로써, 사람들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의도였던 거죠. 홍대 미대 시절 대학동료들을 봤을 때 허위의식이 너무 많았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요. 사실, 이 사람들 다 실업자 아닙니까. 백수고, 극빈층들이거든요. 그런데 예술갑니다. 굉장히 고귀해요… (웃음) 지식인도 예술가도 아닙니다. 대학교 졸업장 받으면 지식인입니까? 대학원 나오고 박사과정 밟으면 다 지식인입니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꼴통 같은 건지는 모르지만… 그런 허위의식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거예요. 현실을 보란 말이죠. 노동자란 말이죠. 결국은 다들 임시직 계약직이어요. 돈 벌려면 그럴 수밖에 없거든요. 미학과 나온 사람들 큐레이터로 취직하면 얼마 받는지 아십니까? 많이 받으면 100만원이어요. 전부 계약직이고요. 언제 해지될 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개기지도 않아요. 어이가 없죠.
생연 만들 때 처음부터 노동자라는 말을 쓰고 싶었습니다. 문화예술 노동자연합이라고 할 것인가 문화예술 생산자연합이라고 할 것인가 논란이 있었죠. 당시 생각엔 그랬습니다. 왜 문화노동자는 노동조합을 만들 수 없는 걸까? 이런 생각을 했었죠. 그런 고민의 연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노동자라는 말을 쓰기 거부했던 사람들이 있었죠. 중재를 하는 과정에서 생산자라는 말을 썼던 거죠.(웃음) 저는 이걸 통해서 사람들 인식을 바꾸고 싶었던 거죠.
지금은 또 다릅니다. 그런 정세도 아니고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문화예술가들을 끌어당겨야겠다는 욕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매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문화예술가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지식인들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회진보연대한테 미안하기는 하지만서도요(웃음) 역할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고요, 제가 그런 곳에 에너지를 쏟아 붓고 싶지 않다는 말이죠. 지금 문화노동자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저에 대한 다짐입니다. 저의 정체성 말이죠. 내가 누굴 위해서 노래를 부른다거나 싸운다는 뜻이 아니고요,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빈곤한 임시직 계약직 문화노동자로서 내 소리를 내고 싶은 그런 나의 정체성에 대한 다짐이죠.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 대중이 참여하는 예술
준도 :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허위의식이라는 문제를 젖혀놓고 말이죠. 예술가로서 싸운다는 말도 있잖아요. 고용된 노동자로서라기보다는 예술가로서 말이죠.
영석 :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존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 자체가 가지는 말의 무거움을 벗어야 합니다. 이후 사회는 어떤 사회이겠냐는 건데, 일단 노동시간은 월등히 단축될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처럼 자본주의 물신성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노동시간이 단축되더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문화를 형성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소비하려는 것에 기대어서 시간을 소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미래를 어떻게 만들 거냐는 말이죠. 나머지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죠. 문화적 향유로 시간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 것을 자신이 향유할 수도 있고, 스스로 생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매일 잔업철야를 해야 사는 사회라면 아예 불가능하겠지만, 일주일에 삼일만 일해도 되는 사회에서는 자신이 연주하고 싶은 악기를 노래를 연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능적인 부분은 많이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냐 아니냐는 구분이 무의미해지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예술은 너무 폐쇄적이죠. 폐쇄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박준도씨가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에서 예술가에 대한 대우, 그리고 문화생산자로서 우리 생산물에 대한 대중과 소통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 따라서 이에 대해 공공부분처럼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글쎄요, 고민이긴 합니다만, 이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민예총이 지원받은 공공자금을 돌이켜보면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지 주저하게 됩니다.
준도 : 반대로 다른 딜레마에 부딪칠 수 있을 텐데요, 예술인 개인이 직접 유통망을 확보하자는 식의 논리 말입니다. 이는 지금 상황에서 저작권 문제로 이어지고 마는데요.
영석 : 이런 상상을 해보죠.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말고 노래를 부른단 말이죠. 어떤 사람은 노래도 만들고 어떤 사람은 기타도 치고 팀도 만들고 술집에서건 거리에서건 공연도 하고 말이죠. 이 노래가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찾을 것입니다. 물론 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라고 권고하겠죠(웃음). 저는 그 안에서 자기 그릇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위적으로 꾸려지는 것도 아니고, 위에서 마구 뿌려대는 것도 아니고… 저는 이런 시스템이 올바르다고 봅니다.
‘음악은 음악이에요. 진실하면 되죠.’라는 말은 순수주의로 멈추고 맙니다. 예술은 온갖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얽매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홍대 미대 후배들 잘 합니다. 잘해요. 그런데 이 친구들 자본의 흐름을 잘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보여야 나를 상품화할 수 있는지 잘 안단 말이죠. 이런 시스템에 길들여지면, 예술이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정말 음악이 음악다울 수 있도록 내가 예술가로서 이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맞습니다. 이것은 생연의 논리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는 것이야 말로 안이한 발상
준도 :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생연 이야기를 하신 김에 조금 괴로우시겠지만, 생연 실패를 어떻게 평가하실 수 있는지요. 사실, 이는 90년대 새로운 대안적인 흐름들을 찾자는 여러 가지 시도들. 리얼리즘에 대한 재고, 창작역량을 높이고, 생산된 것에 대한 소통구조를 새로 갖추고, 이런 것들에서 활로를 찾자든가 또 다른 문화적 형태들을 찾아서 나서보자 등등 여러 시도들에 대한 평가이기도 할 것입니다.
영석 : 이야기만 하고 만 거죠, 뭐(웃음) 저의 경험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 전부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현장의 흐름은 상당기간 완고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로지 투쟁가 중심이었죠. 그 밖의 흐름들이 있었습니다만 형식적인 변화를 조금 시도한 것 말고는 크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소재의 다양화, 노래 접근 방식의 다양화를 들 수 있겠네요. 그렇다고 이 같은 시도, 예컨대 천지인의 음반을 기왕의 민중가요/노동가요의 형식으로 비판한다면, 그러니까 형식주의자라고 비판한다면 그럴 만큼 자기 근거가 있었을까는 부정적입니다. 그들 역시 그저 새로운 형식을 거부한 것 이상은 아닌 것이죠. 또 다른 형식주의입니다. 형식과 내용을 같이 고민했던 것은 아니죠.
준도 : 1990년대의 시도를 말하기에 앞서 지형 자체의 변화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운동이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대학문화를 위시해서 모든 운동문화가 침체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새로운 형식의 변화만을 추구했던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듯 합니다. 80년대 초반에만 해도 락은 미 제국주의의 똥물이다 식의 비판이 강했습니다. Oxen80에 대한 비판에서 엿보이듯 이요. 좀 어이없는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의 새로운 시도는 뒤집어 져있었습니다. 오히려 대중문화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식이었죠.
자본주의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계승하자라는 취지에서 보아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무언가 간취해야 할 것으로서 왜 록으로 상징하는 대중문화냐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를 ‘록의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이전에 비판받았던 록이 부활했다는 것이죠. 조금 단호한 비판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영석 : 당시 논쟁 자체는 뭐라 할말이 없습니다. 논의를 제기했던 주체를 생각해보면 박준도씨가 이야기하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안일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저도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어느 토론 자리의 발제문에서 ‘우리가 무슨 록의 부활을 꿈꾸나? 우리가 하고자 하는 노동가요와 민중가요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지 록의 부활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었으니까요.
주체를 보면 부정할 수 없죠. 결과로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당시 그런 주장을 했던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는 것이죠. 당시 그런 고민들을 전개했던 사람들 중 지금도 활동하는 사람은 몇 명 없습니다. 아마도 대중문화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 머릿속에 대중문화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들 말이죠. 그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 못했을 뿐이죠.
하지만, 대중의 흐름과 정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대가 동시대성을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동시대성에서 다양한 흐름들이 존재할 때 거기에서 자기 역할과 관계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죠. 그리고 다양한 삶들을 드러내는 과정으로서 형식들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고요. 작은 하늘이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안에서 다른 견지를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 제가 비판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게요. 제 기준으로 교정하려고 했던 거죠. 물론 그들이 보기에는 제가 자신들을 가두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작은 하늘은 부르스, 스윙 할 것 없이 모든 시도를 다 해보았습니다. 메이데이로 오면서는 기획이 끼고, 하나의 음반으로 드러나야 해서 딱 하나로 정리되긴 했지만요. 당시 가사들은 옛날 가사들과 완전히 벗어간 것들이 혼용되어 있었습니다. 무단횡단 같은 노래는 논법이 많이 달랐습니다. 제가 쓴 가사도 그런데 일조했고요. 저는 이런 실험들에 대해서 존중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류를 극복하고 대중들을 만나고 대중들과의 관계 속에서 깨지고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거구요, 미리 예단하고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박준도씨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만, 또 어떤 문제가 제기 되냐 하면, 창작이라는 것은 이렇게 재고 저렇게 재고 하다보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결국은 김호철 선배의 노래,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노래를 조금 변화시키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히려 창작자가 스스로 자신의 개념과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낼 것이냐는 거죠. 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형식적인 진전이 어렵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과거보다 더 나갔고, 지금도 제가 못할 뿐이지 제 후배들에게 더 나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본격적으로 사회에다 던지라고 말이죠. 민중가요 록그룹 천지인은 현장에 기반을 두지 않았습니다. 지지기반이 학생들이었죠. 학생들 감수성을 그대로 가지고 왔던 것이거든요. 현장 노동자들이 50~60시간 뺑이 쳤다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파격적으로 사회에다 던지라는 거죠. 이는 노동자들의 존재상황과 맞물리는 것입니다.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 비정규직 영세 사업장, 노동자라는 자기의식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 더군다나 그 속에서 점점 더 운동과 멀어지게 된 젊은이들.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층위들과 결합되어 있는 것들 말입니다.
천지인이나 이반처럼 애매한 것, 구체성이 좀 떨어지거든요. ‘체 게바라의 포스터 앞에서’ 이런 거 말고, 구체적인 것 말입니다. 갓 대학 졸업한 사람, 10년 동안 직장 생활하다가 노조도 없고 내가 노동자인지도 모르고, 또는 한 5년 동안 계약직 생활하면서 이리 계약하고 저리 계약하던 사람이 딱 들을 때, 아 제길 내 인생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그냥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좀 더 사회적인 거 말입니다. 2집에서 이야기했듯 사회가 공장이고, 사회와 현장은 끊임없이 맞물려 돌아가니까요. 오히려 우리 같은 경우가 낀 세대입니다. 제가 아무리 젊은 척 해도 386세대고, 제가 고민했던 방식이 있습니다. 제겐 그런 관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후배들이 탁치고 나갔으면 좋겠는데요 없어요. 저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안일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듭니다. 오히려 그게 더 안일하죠. 반대로 말이죠. 그것을 고민하지 않는 게 말입니다.
저번에 노문센터에서 사랑방 토론회할 때 대안문화, 노동문화 글을 썼을 때, 주장했던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예전에 우리가 노동문화가 다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문화가 최고고, 노동문화가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죠. 저는 이것을 부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나름대로 저는 이것을 부정했고요, 우리는 각각 다양한 진보적인 형태의 흐름들 중 하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는 아니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우리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결국 그런 부분에서 우리의 역할, 대중운동 안에서 고리 그 안에서 우리의 역할 들이 맞물려 들어갔을 때, 이것이 수평적으로 이루어지고, 수평적인 연대가 이루어지면서 이것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들이 문화적 연대라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놓치는 않았습니다.
창작의 적극성을 가져야
저는 그래서 현장문화패를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난 당신을 대변해서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닌 타자를 대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노동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질곡들에 대한 내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당신들이 자신의 질곡을 노래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나는 그게 노동문화라고 생각하고 그게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제가 처음 만났을 때 현장 노동자들이 ‘ 연영석 동지는 이것이 부족하고, 현장노동자들과의 정서적 공감이 어렵고’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동지가 여기서 10년이 넘게 일하고 살면서 느끼는 느낌이 있었을 텐데, 동지가 해야 합니다. 그것이 맞지 않습니까? 노동자 대통령 만들면 끝납니까? 국회의원 만들면 끝납니까? 그건 우리의 정치가 아니죠.’ 전 이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잘 만들고 못 만드는 것은 나중 이야기입니다. 그게 무슨 흠이 됩니까? 그것가지고 밥벌이하려면 흠이 될지 모르지만, 일하는 사람이 노래를 만들겠다는 게 왜 흠이 됩니까? 못 만들면 또 어떻습니까? 그것을 그렇게 재단하는 놈들이 미친놈들이죠. 스스로 괜히 부끄러워하고 멋쩍어 하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자기표현에 적극성을 가져야죠.
게으른 피, 일상의 시스템 파괴
준도 : 2집 앨범 제목이 ‘게으른 피’잖아요?
영석 : 아닙니다. 음반 제목은 공장입니다.
준도 : 어 그럼 (표지의) ‘게으른 피’는 뭐였지요?
영석 : 그건 제 닉네임입니다.
준도 : (멋쩍어하며) 왜 자신을 그럼 게으른 피라고 하죠?
영석 : 주변 친구들 꿈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꿈을 자본에 착 달라붙어서 팔고 사는 사람조차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까? 몇몇 잘나가는 경우도 있겠지만요. 나머지는 꿈이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하루가 급급하게 사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았죠. 부지런해라 경쟁시스템에서 아침에 6시에 일어나서 씻고 7시에 나와서 8시까지 출근하고 저녁 7시까지 일하고 집에까지 일 싸안고 와서 일하다가 내일 일해야 하니까 자고… 이런 시스템을 깨자는 거죠. 게으르게 살자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에서 내 의의와 가치를 찾아서 말이죠.
특히 문화가 그렇습니다. 문화가 변하지 않고서 운동의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우리의 삶은 자본주의에 이미 뼈 속 깊이 내재화되어 있죠.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하죠. 유럽 사민주의의가 대중에게 준 것은 이거밖에 없습니다. 자기 주체의식보다는 국가가 해결해 준다는 사회보장제도와 돈 좀 벌어서 자동차 사는 소비체계, 그리고 스포츠, 휴가 - 도시 공동화 , 우리나라라고 안 그럴 것 같습니까? 울산, 휴가 때면 아무도 없습니다. 다 좋은 차 몰고 다니고요, 차 모는 것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그런 쪽으로만 계속 간다는 거죠. 컴퓨터 작업하는 사람들이요, 몇 개월 일해서 계약금 300~400만원 정도 법니다. 그러고는 컴퓨터 장비 업그레이드해요. 이게 무슨 삶입니까. 장비 만드는 회사 먹여 살리는 거죠. 노동조합 활동가들 자기 자식 과외 시키는 분들 많아요. 이런 거 다 깨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공장이라는 거죠. 단지 기름밥 만지는 곳이 공장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만이 현장이 아니라, 사회가 현장이고 공장입니다. ‘노동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 이게 얼마나 피상적입니까? 어떻게 바꿀 건데요? 자기가 노동하고 있는 뼈에 녹아 있는 노동현장과 중첩되어 있는 겁니다. 이걸 의식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활동가들이 현장사업을 해야죠. 노동조합 권력에 국한되지 않는 사업들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삶을 보면 갈 길이 너무 멀죠.
젊은,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부르는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영석 : 저도 제 나름대로 일관성은 있습니다. 가사들이나 고민이나 일관성은 딱 하나입니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아니라 좀 더 멀리, 더 넓게 내다보고 노래를 부르고 싶은 거죠. 그렇다고 정규직을 부정하거나 나이든 노동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멀리 내다봤을 때 젊은 노동자들이 필요한 거구요, 이들이 계속 치고 나와야 하죠. 지금 40대 노동자들, 지금은 노동귀족이네 어쩌네, 욕을 먹고 있기는 하지만 20대 때 박 터지게 싸워서 뛰쳐나왔던 이들이거든요. 젊은 노동자들이 싸워서 나와야 하는데요, 지금은 싸우지 않는다는 거죠. 그들과 함께 하는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이들과 함께 세상을 노래하는 노래가 있어야 하죠. 조직된 노동자가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 젊은 노동자들, 젊은 실업노동자들, 계약직 1순위로 일할 사람들. 제 포맷은 이런 겁니다. 아까 이야기 했던 것처럼 사회에서 던지는, 사회가 현장을, 노동자들을 괄시하고 천대하고, 노동자들 다른 곳에 관심가지지 못하게 하고, 노동자들 동료가 잘려나갈 때 외면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국가, 국익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딴죽 걸고 깨트리느냐 말이죠.
저는 다른 민중가요 가수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음반은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을 위한 음반이다. 네가 주로 가는 현장에서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말이죠. 어쩌면 다른 이들과 달리 저는 그나마 창작을 하니까, 단결투쟁, 노동해방보다는 세세한 구체성을, 그런 정서를 담은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데서 오는 노력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겠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리버럴해 보일 수 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들 한사업장에서 일하면서 줄 쫙 서가지고, 손 쫙쫙 올리고, 단결! 투쟁! 한단 말이죠. 비정규직 노동자들 아르바이트거든요. 머리 노랗게 염색해서 바지 찢어지고, 노동자인지 뭔지, 이 공장 저 공장 왔다 갔다 하면서 습성화된 게 있죠. 하지만 그것을 단지 쁘띠적이고 조직화가 안 되다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나름대로 돌파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돌파구를 제가 조직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게 그들의 무기가 될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기가 되고자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도 아니지만 대중들이 선택하겠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 포맷이고 음악의 포맷입니다. 그게 제가 편해요. 그리고 제 생활도 그렇고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