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39호
케테콜비츠
케테 콜비츠
카테리네 크라머 지음, 이순례 외 옮김 , 실천문학사 , 1991년 2월
한 지 원 | 회원, 기자단
그녀의 판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년 전쯤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친구가 읽다 덮어둔 책의 뒷표지가 많이 보던 그림이어서 펼쳐 본 것이 바로 [케테 콜비츠 - 천재여류판화가의 사랑과 분노의 자화상] 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판화를 접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포스터, 자료집의 투쟁성을 나름대로 폼나게 표현해줄 배경그림으로 “전쟁은 이제 그만!”, “우리가 소비에트를 지킨다” 등의 그림을 자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부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민중성’, ‘당대의 시대’에 대한 것보다는 콜비츠의 일기를 바탕으로 그녀의 내적인 변화와 성찰, 그리고 그녀의 판화들이 어떤 예술적 조류들과 관계하고 있는지를 주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콜비츠가 빈민가에서 의료 활동을 펼친 남편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과정, 아들의 사망 이후 변하는 그녀의 예술 등등 작가는 그녀의 삶을 일기를 통해 추적해나간다.
“그것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왜 그런가?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관객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일반 관객을 위한 예술이 평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가벼운 작품도 그들의 마음에 들기는 하겠지만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소박하고 참된 예술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나는 예술가와 민중 사이에 이해가 성립되어야 하며, 그 가장 적절한 시기는 늘상 존재해왔다고 생각한다. 천재가 된다면 훨씬 앞서가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겠지만 좋은 예술가는 천재의 뒤를 쫓으며 그동안 사라진 연결의 끈을 복구시켜야 한다. 순수한 아틀리에 예술은 비생산적이고 무력하다. 살아서 뿌리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 스스로가 인용한 위의 콜비츠의 일기 내용처럼 예술가와 민중 사이의 ‘이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는 못한 듯 하다. 책의 대부분은 그녀의 예술을 콜비츠만의 폐쇄회로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 속의 삽화들이 본문과는 유리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콜비츠가 그토록 추구했던 그녀와 민중 사이의 ‘이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비극’이었던 것 같다. 이는 이전의 나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는데, 나에게 민중과의 ‘이해’는 ‘전선에서의 결의’, ‘굳게 뻗어 올린 팔뚝’ 이었던 반면, 콜비츠에게 그것은 ‘한 밤중에 전쟁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는 어머니’(농민전쟁 연작 6), ‘먹을 것을 보채는 아이들 앞에 고개 숙인 어머니’(빵을!)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에게 ‘민중’이란 ‘언제가 찾아올 승리의 확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희망’이였던 반면 그녀에게 그것은 ‘패배 속의 한(恨)’(농민전쟁 직조공의 봉기의 결말), ‘끝없는 고통’(민중이여, 얼마나 피흘려야 하는가?)이었다.
이는 그녀의 대표작인 ‘직조공의 봉기’, ‘농민전쟁’을 보면 확실하게 나타난다. 직조공의 봉기의 결말은 죽은 직조공들의 시체를 옮기는 장면이며, 농민전쟁의 결말은 체포된 농민들의 모습이다. 특히 농민전쟁의 6번째 작품 [전쟁터]에서 죽은 농민군의 시체 속에서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림을 오랫동안 보기 힘들 정도의 슬픔을 만들어낸다.
진보진영에게 ‘비극’을 민중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사실 낯선 이야기이다. 우리가 공유하고자 했던 것들은 대부분이 ‘희망’ 또는 ‘결의’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반격”, “결사항전”, “우리는 할 수 있다” 등 진보진영의 선전 기조를 생각해보면 콜비츠의 판화들은 바라보는 하나의 작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히 들여다보며 생각해보는 것은 비극의 끝에 이르러야 비로서 ‘희망’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우연한 만남이 민중들의 참을 수 없는 한계 조건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녀의 작품에 넘쳐나는 비극은 어쩌면 해방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지 아닐까?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미국의 침략 전쟁 속에서도 여전히 폭발하지 못하는 진보운동을 바라보면서, 이 시대 진보운동에 필요한 것은 시대의 참혹함을 민중들과 함께 나누는 방법, 결의와 승리의 거짓 선동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과 민중의 상태를 직시하는 냉철한 비극이지 않을까? [전쟁 연작]은 현장은 바로 이라크와 한반도이며, [프롤레타리아 연작]은 바로 오늘, 노동자들의 현실이고, [독일의 아이들이 굶고 있다]는 제3세계 어린이들의 모습 그대로인데, 우리는 아직 콜비츠가 그 당시 표현했던 것만큼 이 비극을 민중과 함께 공유하는 방법을 찾고 있지 못한 듯 하다.
케테 콜비츠-천재 여류판화가의 분노의 자화상은 ‘시대’와 ‘민중’이 빠졌다는 점에서 많이 부족한 책이지만, 콜비츠의 작품에 한 발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을 법한 책인 것 같다.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채워야 할 부분이리라. PSSP
참고로 그녀의 그림들은 http://www.iotastudio.com/kollwitz/ , http://kollwitzgallery.cafe24.com/main.html에서 대부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나 같은 여류 예술가가 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똑바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길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감동을 느끼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리프크네히트의 정치노선을 추종하지는 않지만, 리프크네히트를 애도하는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또 그 그림을 노동자들에게 증정할 권리가 있다." - 케테 콜비츠의 일기 중
카테리네 크라머 지음, 이순례 외 옮김 , 실천문학사 , 1991년 2월
한 지 원 | 회원, 기자단
그녀의 판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년 전쯤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친구가 읽다 덮어둔 책의 뒷표지가 많이 보던 그림이어서 펼쳐 본 것이 바로 [케테 콜비츠 - 천재여류판화가의 사랑과 분노의 자화상] 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판화를 접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포스터, 자료집의 투쟁성을 나름대로 폼나게 표현해줄 배경그림으로 “전쟁은 이제 그만!”, “우리가 소비에트를 지킨다” 등의 그림을 자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부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민중성’, ‘당대의 시대’에 대한 것보다는 콜비츠의 일기를 바탕으로 그녀의 내적인 변화와 성찰, 그리고 그녀의 판화들이 어떤 예술적 조류들과 관계하고 있는지를 주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콜비츠가 빈민가에서 의료 활동을 펼친 남편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과정, 아들의 사망 이후 변하는 그녀의 예술 등등 작가는 그녀의 삶을 일기를 통해 추적해나간다.
“그것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왜 그런가?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관객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일반 관객을 위한 예술이 평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가벼운 작품도 그들의 마음에 들기는 하겠지만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소박하고 참된 예술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나는 예술가와 민중 사이에 이해가 성립되어야 하며, 그 가장 적절한 시기는 늘상 존재해왔다고 생각한다. 천재가 된다면 훨씬 앞서가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겠지만 좋은 예술가는 천재의 뒤를 쫓으며 그동안 사라진 연결의 끈을 복구시켜야 한다. 순수한 아틀리에 예술은 비생산적이고 무력하다. 살아서 뿌리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 스스로가 인용한 위의 콜비츠의 일기 내용처럼 예술가와 민중 사이의 ‘이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는 못한 듯 하다. 책의 대부분은 그녀의 예술을 콜비츠만의 폐쇄회로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 속의 삽화들이 본문과는 유리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콜비츠가 그토록 추구했던 그녀와 민중 사이의 ‘이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비극’이었던 것 같다. 이는 이전의 나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는데, 나에게 민중과의 ‘이해’는 ‘전선에서의 결의’, ‘굳게 뻗어 올린 팔뚝’ 이었던 반면, 콜비츠에게 그것은 ‘한 밤중에 전쟁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는 어머니’(농민전쟁 연작 6), ‘먹을 것을 보채는 아이들 앞에 고개 숙인 어머니’(빵을!)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에게 ‘민중’이란 ‘언제가 찾아올 승리의 확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희망’이였던 반면 그녀에게 그것은 ‘패배 속의 한(恨)’(농민전쟁 직조공의 봉기의 결말), ‘끝없는 고통’(민중이여, 얼마나 피흘려야 하는가?)이었다.
이는 그녀의 대표작인 ‘직조공의 봉기’, ‘농민전쟁’을 보면 확실하게 나타난다. 직조공의 봉기의 결말은 죽은 직조공들의 시체를 옮기는 장면이며, 농민전쟁의 결말은 체포된 농민들의 모습이다. 특히 농민전쟁의 6번째 작품 [전쟁터]에서 죽은 농민군의 시체 속에서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림을 오랫동안 보기 힘들 정도의 슬픔을 만들어낸다.
진보진영에게 ‘비극’을 민중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사실 낯선 이야기이다. 우리가 공유하고자 했던 것들은 대부분이 ‘희망’ 또는 ‘결의’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반격”, “결사항전”, “우리는 할 수 있다” 등 진보진영의 선전 기조를 생각해보면 콜비츠의 판화들은 바라보는 하나의 작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히 들여다보며 생각해보는 것은 비극의 끝에 이르러야 비로서 ‘희망’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우연한 만남이 민중들의 참을 수 없는 한계 조건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녀의 작품에 넘쳐나는 비극은 어쩌면 해방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지 아닐까?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미국의 침략 전쟁 속에서도 여전히 폭발하지 못하는 진보운동을 바라보면서, 이 시대 진보운동에 필요한 것은 시대의 참혹함을 민중들과 함께 나누는 방법, 결의와 승리의 거짓 선동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과 민중의 상태를 직시하는 냉철한 비극이지 않을까? [전쟁 연작]은 현장은 바로 이라크와 한반도이며, [프롤레타리아 연작]은 바로 오늘, 노동자들의 현실이고, [독일의 아이들이 굶고 있다]는 제3세계 어린이들의 모습 그대로인데, 우리는 아직 콜비츠가 그 당시 표현했던 것만큼 이 비극을 민중과 함께 공유하는 방법을 찾고 있지 못한 듯 하다.
케테 콜비츠-천재 여류판화가의 분노의 자화상은 ‘시대’와 ‘민중’이 빠졌다는 점에서 많이 부족한 책이지만, 콜비츠의 작품에 한 발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을 법한 책인 것 같다.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채워야 할 부분이리라. PSSP
참고로 그녀의 그림들은 http://www.iotastudio.com/kollwitz/ , http://kollwitzgallery.cafe24.com/main.html에서 대부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나 같은 여류 예술가가 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똑바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길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감동을 느끼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리프크네히트의 정치노선을 추종하지는 않지만, 리프크네히트를 애도하는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또 그 그림을 노동자들에게 증정할 권리가 있다." - 케테 콜비츠의 일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