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금융위기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 평가
공멸인가 변혁을 향한 전진인가
올해는 2009년 세계 금융위기로부터 10년째 되는 해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노동자운동의 실천은 오늘날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아마도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노동자 간 임금 격차, 최근 경사노위를 둘러싼 민주노총의 혼란은 현재의 노동자운동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왜 지금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나? 우리는 민주노조 운동의 지난 10년을 반성적으로 평가해보려 한다. 항상 눈앞의 투쟁을 전개하는 “현재진행형” 상황의 활동가들에게 당대 정세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후적이라도 과거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일보라도 전진할 수 있다. 이 평가와 반성은 한국 노동자운동의 일부인 사회진보연대 자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다소 거친 이 스케치 이후에는 10여 년간 지체된 여러 쟁점 각각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사회진보연대의 작업이 이어질 것이다.
1.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정세
100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질문을 통해 제국주의 전쟁과 노동착취가 심화되는 야만적 상태로 나아갈지, 아니면 여기서 자본주의를 멈추고 평등과 평화의 사회주의로 나아갈지를 물었다. 우리는 여기에 세 번째 경로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투쟁하는 양 계급의 공멸”이라는 경로가 바로 그것이다. 어느 계급도 사회 경제적 위기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모두가 단기적인 이해에 몰두할 때 그런 가능성이 커진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우리가 주목하는 정세에서는 오히려 세 번째 가능성, “투쟁하는 두 계급의 공멸”의 가능성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자본과 노동자운동의 무능이 함께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붕괴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자본의 대응은 차치하고, 노동자운동 역시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데 실패하고,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들조차 각자의 방어적, 단기적 이해에 매몰되어 있다. 이는 세계 노동자운동의 공통된 곤란이기도 하다.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중화학공업의 위기와 실업 증가로 표현된다.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재벌 중심의 중화학공업은 세계적 이윤율 하락 속에서 추격성장의 한계까지 겪고 있다. 8년째 이어지고 있는 유례없는 제조업 가동률 하락과 반도체를 제외한 수출중화학공업 전반의 위기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의 대위기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제조업 위기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전후방 산업에 영향을 미치며 국민경제 전체의 고용과 임금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제위기에 대한 보수 세력의 전통적 정책은 감세, 서비스규제 개혁, 노동시장 개혁 등으로 제시되었다. 범민주당 세력의 관성적 대안은 경제민주화와 중소기업 육성 등이다. 이런 정책들은 경제 위기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두 방향 모두 성공하기 어렵다. 더구나 한국 부르주아의 특징은 이런 정책개혁조차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은 이른바 “창조경제”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지만, 정부 내의 경제관료조차 창조경제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범민주당의 경제민주화는 집권 후에도 프랜차이즈 닭집의 ‘갑질 근절’ 같은 인기영합적인 생색내기식 정책밖에 없었다. 중소기업육성책도 중소벤처기업부까지 만들어 의욕을 보였지만, 뉴스에도 보이지 않는 무능부처만 만든 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 지배계급과 대결하는 한국의 노조운동은 어땠는가?
노조운동의 정세인식부터 보자. 2008~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인플레이션 관리 정책이 퇴조하고 대신 확장적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과감하게 실행됐다. 한국에서도 이런 확장적 재정정책이 시행되었다. 환경파괴 문제가 있었던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이러한 확장적 재정정책 중 하나였고 나름의 거시경제 효과를 발휘했다. 물론 위기대책의 상수라 할 수 있는 노동조합 탄압 역시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당시 노조운동은 경제위기를 보수 정부의 정책실패로 규정하며, 혹은 오인하며 민주당 주도의 반보수전선에 참여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경제위기 비판은 생략하고 경제민주화로 대표되는 민주당의 포퓰리즘 정책에 동참했다. 따져보면 모든 책임을 이명박 탓으로 돌리며 민주당의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것은 노조운동에게는 오히려 수월한 방법이었다. 주로 정규직 노조의 방어투쟁을 위해 정부에 대응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박근혜 정권 시기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하기보다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에 대부분 반대하며 인기영합적 공약을 덧붙이는 식이었다. 민주당이 정권을 탈환한 이후 새로 출범한 민주노총 현 집행부는 사회적 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며 친민주당-친문재인으로 기울어졌다. 의도했든 아니든 지난 10년 투쟁의 결과가 민주노총을 어디로 끌고 왔는지를 평가해 봐야 한다.
한편, 지난 10년간 민주노총은 더욱 분권화되었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로 총노동을 모아내보려는 코포라티즘식 시도는 보수정부 하에서는 당연히 시도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2006년 금속과 공공부문에서 확장된 산별노조 역시 여러 도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앙교섭을 실현하지 못했다. 조직형태를 전환한 무늬만 산별에서 발전을 멈췄다. 총노동을 정치적으로 표현해보겠다던 민주노동당은 2008년 정파 갈등 속에 붕괴했다. 한국 노조운동의 주류였던 국민파, 중앙파의 총노동 프로그램은 좌절됐다. 물론 그렇다고 좌파·현장파의 프로그램이 민주노총을 재건한 것도 아니었다. 현장파는 대기업, 공공기관의 전투적 경제주의에 계급적 수사를 보태거나, 반보수전선의 전투성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역설적이지만 현장파는 전투적 경제주의를 통해 계급 내 격차를 더 키웠고, 결과적으로 “계급적 급진성”과는 더욱 먼 길로 노동운동을 이끌고 말았다.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자본과 노동의 대응에는 몇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자본의 대안은 이윤율 하락에 반작용하는 것이다. 자본생산성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술혁신과 이윤분배율을 상승시키기 위한 자본의 계급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4차 산업혁명론 같은 기술낙관론은 전자에 대한 자본의 기대를 표현하며, 탄력근로제 확대 같은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후자의 시도를 표현한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한국의 자본생산성은 정체와 하락을 반복했고, 이윤분배율도 딱히 높아지지 않았다.
둘째, 노동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이다. 자본의 이윤을 위한 경제를 공동체의 필요를 위한 경제로 전환시키는 변혁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주의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노동자 스스로 생산과 사회에 대한 통제를 높이는 일련의 운동이다. 자본주의에서 이런 사회주의적 지향은 노동자운동이 ‘대중’으로 존재하는 노동자를 ‘계급’으로 단결시키는 과정에서 구체화된다. 하지만 현재의 노동자운동은 이런 사회주의 운동과는 거리가 먼 상태다. 세계적 차원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침체와 함께, 한국 차원에서는 노조운동의 경제주의적 편향이 심화되고 있다. 당장의 예로 자본주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제조업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민주노조 운동은 개별 사업장 차원의 고용안정 외에는 별다른 대안도 제출하지 못한다.
셋째, 노동과 자본이 타협하는 대안이 있다. 문재인 정부나 노동운동 국민파는 “적절한” 지점에서 노동과 자본이 노사정 타협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사관계의 개선과 사회복지, 노동유연화와 임금억제 수용 등이 옵션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으로 한국의 국민경제를 재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노동의 경직성 또는 지나치게 높은 임금분배율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 위기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자본의 능력이 부족해 발생한 것이다. 노사정 타협으로 자본의 능력을 개선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자본과 노동의 공멸이 있다. 자본과 노동 모두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본가와 노동자가 눈앞의 이해에 몰두하며 각자도생의 방법을 찾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가들은 자본과 두뇌를 해외로 유출한다. 노조는 조직된 노동자의 단기적 이해를 앞세운다. 그런데 노동자 입장에서 문제는, 국민경제가 붕괴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도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러 차례의 경제 위기 국면에서 이미 경험했듯이, 재벌과 공기업과 같이 ‘대마불사’ 부문에서는 위기가 지체되어 나타나거나 위기를 겪어도 공적자금을 통해 얼마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위기비용을 국민경제의 나머지 부문에 전가하는 것이므로,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아르헨티나와 같이 붕괴에 직면한 남미 국가들이 정확히 두 계급이 함께 공멸하고 있는 상태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민소득이 정체, 하락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도 비슷하다. 다만 일본은 탄탄한 국부 덕에 붕괴의 효과를 후세대로 지연시켜 당장 남미 같은 상황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한국은 국부가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그 위기는 일본과 남미 사이의 어떤 형태가 될 것이다. 특히 세계 자본주의 위기는 ‘약한 고리’인 주변부와 신흥시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으로 선진국,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국에서 위기가 폭발한다. 이는 지금 남미, 터키, 남유럽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2010년대 저성장-고령화와 ‘헬조선’류의 청년 세대 낙담이 크게 확대되는 가운데, 자본과 노동 모두가 대안 제시에 실패하고 있다. 국민경제가 위기에 처할 때 포퓰리즘이 창궐하는 양상 역시 한국에서 남미와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2. 한국 노동자운동의 지난 10년 주요 쟁점
그렇다면 한국 노동자운동은 어떻게 이런 상태에 이른 것일까? 노동자운동의 지난 10년을 세 가지 테마로 평가해본다. 첫째, 총노동 전선의 표현으로서 민주노총의 대응이다. 둘째, 한국 노동자운동의 실질적 권력인 재벌·공공기관 노조의 상태다. 셋째, 노조운동의 가장 큰 성과라 할 2000년대 새로 조직된 노조들의 성과와 한계다.
1) 민주노총의 대응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 제조업 위기에 대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대응은 ‘총고용 유지’ 또는 ‘정리해고 분쇄’로 요약된다. 자본이 경영위기 대응으로 정리해고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에 반작용한 결과였다. 최근 10년 내에는 쌍용차와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 저지투쟁이 격렬했다.
두 투쟁 이후 제조업 구조조정에서 갈등 양상은 변했다. 노조와 자본 모두 격렬한 정리해고 반대투쟁에 부담이 컸다. 자본은 대규모 정리해고 대신 비정규직(하청) 우선 해고와 명예퇴직을 통한 고용조정을 선호했고, 정부(산업은행)는 대규모 해고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정책자금을 후하게 지원했다. 궁극적으로 국가의 채무인 공적자금을 이용하여 한계기업의 생존과 소속 정규직 노동자의 상대적 고임금을 보장하는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런 타협은 대우조선, 한국GM 등 대기업에서만 가능했다. 노사정 합의로 ‘대마불사’가 재생산된 것이다. 그런데 노조는 ‘총고용 보장’은 주장했지만 현실은 멀었다. 중소기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총고용의 대상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소리 없는 해고”가 확대됐다. 민주노총이나 산별노조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대기업 노동조합은 이 과정에서도 상대적 고임금의 방어를 계속 이어갔다.
공공부문 노조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긴축(임금·복지 억제)과 구조조정, 민영화에 맞서 방어적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공공기관 노조의 2009년(‘선진화’정책 반대), 2016년(성과연봉제 반대) 연대파업과 철도노조의 2013년 민영화 반대 파업이 대표적이었다. 공공부문 노조는 상대적 고임금을 전제로 한 고용과, 과거에 획득한 성과의 방어에 집중하면서도, 민주노총과 함께 자신의 투쟁을 ‘사회공공성’을 위한 것으로 제시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긴축)이 공공서비스의 약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투쟁이 정치적 정당성이 없지 않지만, 실상 경제적 방어투쟁의 성격이 짙었다. 공공부문 노조는 현재도 문재인 정부에 “촛불혁명”의 지분과 “적폐청산”이라는 명분으로 지난 10년간 침해된 기존 권리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세계 금융위기 이후 10여 년간, 위기에 처한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제시보다는 재벌·공공부문의 기업별 투쟁을 지원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물론 단위노조는 정리해고나 임금삭감을 방어하는 경제투쟁에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민주노총조차 그러한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은 문제다. 민주노총은 제조업·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대해 거시적, 장기적, 계급적 대안을 만들지 못하고 재벌·공기업 단위노조의 입장을 관성적으로 그대로 수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재벌·공기업 노조의 방어투쟁을 총노동의 대안으로 포장하여 정당화하는 사이, 정작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위한 실질적 대안은 뒤로 미뤄뒀다. 더욱 커져가는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는 어떻게 좁힐 수 있는지, 불황이라는 거시경제 조건에서 노동자가 서로 경쟁하지 않을 방도는 무엇인지, 이런 질문이 사실 민주노총이 답해야 할 것들이었으나, 민주노총은 이런 질문을 피하면서, 광우병 촛불, 세월호 참사 대응 등을 ‘사회연대운동’으로 규정하며, 정작 노동조합 총연맹으로서 했어야할 사회적 역할은 우회했다.
앞서 말했듯 민주노총은 2008년 경제위기로 인한 임금격차 확대와 고용불안을 보수정부의 정책 탓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사실 객관적 지표를 보면 격차와 고용불안은 오히려 이전 민주당 정부에서 훨씬 급격히 확대되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기가 우리나라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의 전성기였다. 당장 한미FTA만 봐도 체결은 이명박 정부가 했지만, 실제 책임은 노무현 민주당 정부에게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지난 10년간 ‘정권교체’를 위한 대정부 투쟁에 집중했다. 단위노조의 투쟁에서도 문제의 원인을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규정했다. 그리고 경제투쟁의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은 곧 반 박근혜 투쟁으로 집중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런 투쟁은 자연스럽게 “촛불 집회”라는 장소에서 민주당과도 만나게 된다.
결국 정세인식과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전투적 투쟁의 한편에서는 민주당과의 암묵적인 공명라는 요소도 있었다. 그리고 문재인 집권 이후 김명환 민주노총 집행부가 들어섰다. 김명환 집행부는 경사노위 구성에 협조하다가, 탄력근로제 확대 문제가 불거진 후 경사노위 참여 여부로 혼란에 혼란을 반복 중이다. 반보수라는 전선을 부여잡지만 반보수전선 그 내부에서 민주당의 반노동정책이 표면화될 때마다 좌충우돌을 반복한다.
민주노총은 옳든 그르든 국민경제의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국민경제 전체의 구조적 대안을 찾는 것보다, 관성적인 정권 반대와 조직 노동자의 이해를 추구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최근에도 2019년 1/4분기의 마이너스 성장을 계기로 거시경제와 임금격차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민주노총은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별다른 검토도 없이 소득주도성장론을 지지하다가, 소득주도성장의 내적 모순이 드러나자 침묵하는 것으로 대응할 뿐이다.
지금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목도한 노동자 계급 상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동자 간, 주로 재벌·공공부문과 민간 중소영세 부문 사이의 임금격차 확대와 이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심각한 분할, 그리고 제조업 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와 구조조정, 국민경제의 위기였다. 그런데 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운동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실효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거나 이 모순과 대결하는 자신의 투쟁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는가? 사업장을 넘어선 정치적·사회적 투쟁은 왜 민주당과 구별되지 않는 “촛불항쟁”으로 수렴되고 말았는가?
2) 재벌·공기업 노조의 개혁
재벌·공기업 노조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방어하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경향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재벌·공공부문은 경제위기의 파괴적 영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가장 먼저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이나 대기업 사내하청도 민간부문 비정규직이나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처우를 개선할 여지가 많았다.
한국의 재벌은 큰 고정자본 투자와 기술혁신을 통해 중소기업에 비해 높은 생산성을 실현한다. 시장 독점과 하청 구조를 통해 저임금을 활용함으로써 더 높은 수익률을 확보한다. 재벌 대기업 노조는 이러한 유리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임금을 인상한다. 생산성과 관계없이 정책의지로 인건비가 책정되는 공공부문 노조도 높은 고용안정과 연공급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임금상승을 실현한다. 이처럼 재벌·공기업 노조는 재벌과 공기업이 누리는 특권적 위치에 안주하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현대차를 보자. 역사적으로 현대차노조의 상대적 고임금은 노동조합의 전투적 임금투쟁과 노조를 기업 내에 가두어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려는 현대차 노무전략이 결합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고임금-사회적 고립의 대가는 하청 또는 전후방 산업의 저임금-사회적 배제와 공존하는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고임금의 기반이 되는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생산성은 해당 노동자들의 숙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업의 높은 고정자본투자와 자동화에 의한 것이다. 같은 숙련과 기술을 가진 노동자가 현대자동차라는 회사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임금을 받기 힘들다. 자동차 산업 또는 연관 산업의 평균임금이 현대차노조의 임금만큼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다.
전력·철도·공항 등 공기업도 마찬가지이다. 공공부문은 경쟁 시장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독점을 보장하며 민간의 생산성 상승을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민간기업과 달리 임금 수준의 기준이 시장법칙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공부문(정규직)의 임금수준은 사실 국민경제 전체의 생산성이나, 민간 전체의 평균임금 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공공부문 임금이 민간보다 월등히 높다면, 이는 결국 민간의 소득 일부를 조세와 공공요금을 통해 국민경제에 대한 기여 이상으로 이전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공공부문 노조는 담합적 노사관계(한국노총)나 전투적 경제투쟁(민주노총)을 통해 민간부문에 비해 높은 임금을 실현했다.
요컨대 대기업, 공공부문 노조의 임금투쟁은 ‘지대추구적’이라는 비난에 취약할 수 있다. 장기침체기에 노동자운동이 임금투쟁에만 매몰되어 사회적 주도세력이 될 역량을 상실하고 다른 미조직된 집단의 희생을 방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재벌과 공공부문의 조직된 노동자들 투쟁이 나름대로 경제적 이해의 방어에 성공하는 중에, 노동시장에서는 대기업·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중소 영세 사업장 간 임금격차가 계속 벌어졌다. 500인 이상 대기업 대비 노동자 평균임금 비율은 58.2%(2007)에서 10년 사이 54.2%(2017)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경향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유연화가 확대되며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민간부문의 중소영세 사업장에서는 생산성 증가만큼의 임금인상도 실현하지 못하고 계속 지체되었다. 재벌 체제의 모순으로 기업 간 생산성 자체의 격차 역시 벌어지고, 중소영세 사업장에서는 초기업 교섭의 토대가 거의 없는 가운데 노동조합도 별로 조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국민경제와 산업구조에 대한 비판이, 후자는 노조운동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대목이다. 한편, 영세 자영업자들의 소득도 2000년대 들어 20년째 만성적으로 정체되었고 재벌·공공부문 노조가 주력인 민주노총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민주노총은 임금격차 축소를 위한 방안으로 ‘상향 평준화’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정책수단으로 ‘최저임금 인상’과 재벌개혁을 주장한다. 그러나 ‘상향 평준화’의 실현가능성은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았다. 대기업의 임금수준이 상당히 높은 상황에서 전체 노동자가 이들을 따라 잡는 것이 가능할지, 그러한 수준으로 임금을 추격하는 것이 과연 구조적 위기 시기에 노조운동이 추구해야할 지향이기는 한지, 그 무엇도 검토되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보면, 노조운동이 최저임금 인상 투쟁에 집중한 것은 대기업 노조들의 책임 방기에 대한 고육책이었다. 세계적으로 익히 알려진 것처럼 임금격차 완화나 저임금 개선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단체협약의 적용범위를 최대한 넓히는 것이다. 그리고 전국교섭이나 산별교섭으로 단체협약 적용 범위를 넓히는 데 중요한 것은 중소영세, 저임금 노동자의 조직화와 더불어 교섭력이 있는 대기업, 공공기관 노조의 역할이다. 하지만 금속노조나 공공운수노조 내에서 완성차, 공공기관은 산별교섭을 만들고 확장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다. 심지어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대안마저도 민주노총의 주력인 재벌·공기업 노조들에게는 진정성 있는 투쟁 목표가 아니다. 사실 민주노총이 최저임금1만원이라는 급진적 요구를 내걸면서도 최저임금을 가지고 총파업을 조직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재벌·공기업 노조의 개혁은 가능할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들 노조의 변화 없이 한국 노조운동이 변화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민주노조 운동이 힘과 뜻을 모아야한다.
민주노총의 주력인 이들 노조를 계급적 이해에 맞도록 개혁하려면, 장기적 관점에서 정세분석과 대안을 꾸준히 제시하고, 활동가들을 이념적으로 재조직화해야 한다. 느리더라도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단기적 이해관계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나열하거나 포장한다고 이들 노조가 전체 노동자와 함께 투쟁할 리 없어서다.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이해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국민경제 위기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재벌·공기업 노조도 거시경제 정책과 산업정책의 큰 영향을 받는다. 역설적으로 한국 국민경제의 장기적 구조적 위기에서 잃을 것이 가장 많기도 하다. 또한 재벌과 공공부문은 국민경제의 가장 주요한 부문이라는 점에서 이 부문에서 노동자가 책임감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가질 수 있다. 재벌〮공공기관 노조 개혁에 총연맹과 산별노조의 정책 역량이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장기 관점에서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기업•공공기관 노조 조합원들도 관심의 대상이다.
더구나 이들은 어쨌거나 민주노조 운동을 건설해왔고 1987년 노동자대투쟁, 1996년 총파업과 같은 한국사회를 뒤흔든 노동자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기업 안에서 경제적 이해를 추구했지만, 사업장을 넘어 투쟁해본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이기도 하다. 활동가들이 경제적 이해에 매몰되지 않고, 장기적, 변혁적 관점에서 거시경제와 한국사회 미래 모습에 대해 조합원들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3) 2000년대 새로 조직된 노조들
2000년대 새로 조직된 노조들은 대부분이 비정규직이었다. 노동운동이 자본의 전략에 어느 정도 대응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조들은 노동자를 더 크게 단결시키는 징검다리가 되고 있을까? 세계 금융위기 이후 비정규직 운동의 특징을 살펴본다.
첫째, 세계 금융위기 이후 조직된 노조들은 상당수가 공공부문에 집중되어 있다. 진보교육감 시대를 계기로 조직된 8만여 명의 학교비정규직(교육공무직) 노동자가 대표적이다. 법적으로 교육청이 사용자로 인정되면서 단체협약을 통해 고용을 보장받고, 지속적으로 임금을 인상했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에 따라 인천국제공항을 비롯한 공공기관과 지자체 비정규직도 수만 명이 조직됐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조들은 많은 경우 “제대로 된 정규직화”, 즉 공무원 또는 공공기관 “정규직의 호봉제(연공급)”를 쟁취하는 것을 명시적 또는 암묵적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2010년대 이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한국의 호봉제(연공급)는 60~70년대 고도성장과 인구증가를 전제로 만들어진 임금체계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연공급이 확산된 마지막 계기는 80년대 말이었다. 노동자대투쟁 시기 생산직 노동자들은 사무직 같은 호봉표 쟁취를 중요한 요구로 내걸었다. 3저 호황이라는 경제조건은 이런 요구를 자본이 수용할 수 있도록 한 이례적인 정세였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마지막으로 재벌기업에서 제조업 생산직까지 연공급이 확산됐다. 그리고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에는 고용안정이 유지된 재벌·공공부문의 정규직 노동자들에만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의 연공급은 근속에 따른 임금 인상에서 가파른 기울기를 갖기 때문에 더 쟁점이 된다. 제조업 노동자의 근속연수별 임금격차를 살펴보면, 한국은 초임과 20~30년 근무자의 임금차이가 2.83배에 이른다. 독일의 1.88배, 프랑스의 1.34배, 스웨덴의 1.13배에 비해 상당히 크며, 연공급 성격이 강한 일본의 2.54배보다 높다. 문제는 연공급이 도입되고 확산된 배경이던 고성장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조건이나 세계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반복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즉 현재와 같이 가파른 기울기를 가진 정규직의 연공급은 저성장〮저인구 시대에는 지속되기 어렵다.
연공급은 노동생산성 증가가 지속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임금이 지속적으로 인상된다. 그런데 현재 한국 경제는 물론 미국 경제마저도 노동생산성이 정체되고 있는 중이다. 노동생산성 상승 없는 임금 상승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속가능하지 않다. 다음으로, 연공급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인구가 감소할 때도 피라미드식 임금형태(승진·승급 구조)가 유지된다. 그런데 노동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가 진행되면 신입 직원들이 기존 직원의 임금 일부를 부담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기업 내 근속을 전제로 하는 기업별 임금체계에서는 연공급과 장기근속이 가능한 재벌·공공부문과 그렇지 않은 민간 중소기업 사이에 임금격차가 확대된다.
이런 조건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조들이 정규직 호봉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신규 채용 경쟁을 하는 청년들과 경쟁이 격화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충돌하기도 한다. 이는 청년(취업준비생)들의 노동기본권 의식이 낮아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공공부문 일자리 경쟁이라는 객관적 근거가 있다. 특히 공공부문에서는 고용형태를 불문하고 적자재정을 통해 임금부담을 납세자나 후세대로 넘기기 용이하다. 그래서 더 많은 노동자가 공공부문 일자리를 두고 경쟁한다.
둘째, 재벌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조가 활발하게 조직됐다. 제조업 불법파견 이슈를 던진 완성차 사내하청 노동자 투쟁이 대표적이다. 불법파견 처리냐 신규채용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현대차와 기아차에서는 투쟁의 결과로 사내하청이 상당히 감소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하지만 이런 재벌대기업의 정규직화 운동 역시 계급적 단결과는 거리가 있다. 결과적으로 재벌대기업 사내하청의 정규직화는 전체 한국 노동자 중 상위 10% 임금소득자를 약간 더 늘리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완성차 내부의 차별해소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나라 노동자계급의 격차 완화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진짜 격차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더 나아가서는 제조업 대기업과 민간 서비스부문 사이에 존재한다. 정규직화 된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정규직 노조의 혁신세력으로 조직되지도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완성차 사내하청 노조들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보다 더 많은 정규직화, 제대로 된 정규직화(신규채용 대신 경력인정, 불법 파견에 대한 사용자 법적 처벌 등)를 요구한다. 이는 구조적 위기 속에서도 대기업 대마불사를 믿고 투쟁하는 정규직 노조와 유사하다.
한편, 삼성전자서비스, 대기업 케이블하청노동자, 현대모비스 사내하청 조직화도 2010년대의 대표적 성과다. 삼성전자서비스의 경우 무노조 상징인 삼성에서 노조를 조직했다는 점에서, 케이블하청노조는 정규직 연대로 집단교섭을 이뤘다는 점에서, 현대모비스는 공급사슬의 핵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직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성과가 작지 않다. 이들은 정규직 따라잡기보다 초기업 노동조합 건설과 원청 사용자에 대한 투쟁을 시도했다.
셋째, 건설노조처럼 정부의 경기부양 효과를 타고 조직이 확대된 곳도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경제위기에 따른 내수침체를 부동산 경기로 완화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4대강사업부터 신도시개발까지 부동산 개발이 크게 이뤄졌다. 이런 조건에서 건설노조는 현장 노동력 공급을 통제하면서 노동시장 경쟁을 완화했고, 조직화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노동력 공급 통제는 불황기에는 호황기(확장기)와 다른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시장이 불황으로 돌아서면, 공급을 더 줄여야 하는데, 이는 결국 더 많은 노동자를 배제해야만 가능하다. 이주노동자나 다른 지역 노동자에 대한 배제가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다. 공급통제 방식의 운동이 지속가능할지, 불황이 길어질수록 노조의 연대성과 계급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과제다.
한편, 비정규직 노조들이 노동운동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1990년대 노동자운동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주역이었던 대기업 노조들의 리더십을 기반으로 했고, 민주노총 건설로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현재 급격하게 확대된 비정규직 노조들은 피해자 정체성에 머무르고 있어, 전체 노동운동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지 적극적으로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즉 새로운 리더십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예로 지난해 조직된 “비정규직 그만쓰개, 비정규직 100인 대표자 투쟁”은 현재 비정규직 운동이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들은 완성차 사내하청 정규직화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자회사가 아닌) 직접고용을 핵심 요구로 제시했다. 참여 조직의 현안 해결이 중심이 된 운동이자, 재벌·공기업 정규직을 따라잡는 것이 목표가 된 운동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표하는 운동으로 제시된 셈이다. 전체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의 요구와는 거리가 있다. 더구나 노동운동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을 접어두고, 모든 것을 청와대가 해결하라는 식으로 운동하는 것도 문제였다. 정부는 결과적으로 지불능력이 있는 자본을 압박하기 때문에 상대적 고임금 정규직이 될 수 있는 비정규직 일부만이 이 운동의 대상이 된다. 이런 운동으로는 재벌·공공부문의 조직된 (비정규직) 노동자를 넘어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 전체를 대표하는 운동으로 나아갈 수 없다.
3. 어떤 다른 실천이 가능했을까
민주노총은 세계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드러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거시경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민주노총이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주·객관적 조건이 있다. 무엇보다 노조운동 안에서는 ‘경제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정권과 자본의 노조 억압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다. 실제로 1990년대부터 정부는 경기침체를 근거로, 자본은 기업의 재무위기를 근거로 노조의 요구를 자주 거부했다. 그러다 보니 경제 위기에 대한 조합원의 인식은 대정부·대자본 투쟁을 약화시킨다는 정서가 팽배해 있다. “경제위기론은 허구”라는 식으로 객관적 위기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노조는 경제위기를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보다, 정부와 자본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경제위기 비판이 지난 10년 동안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 쉽게 치환된 이유다. 물론 노동자운동의 경제위기 비판은 정부와 자본의 대응과 당연히 달라야 한다. 하지만 위기 자체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인식이 없으면 제대로 된 방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이 주체적으로 다른 실천을 할 수 있었다면, 어떤 주체적 대안이 가능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늦었더라도 나아가기 위해, 앞으로의 과제를 생각해보기 위해 검토해보자.
먼저, 당시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분석했다고 가정해보자. 민주노총은 경제 위기를 분석하고 대안을 만들기 위해 정책 역량을 확충하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했을 것이다. 자본가 혹은 민주당과는 다른, 노동자 계급의 국민경제의 대안을 마련하여야하기 때문이다. 노조 간부와 활동가들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인식하고 단기적·실리적·기업별 이해를 추구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늬만 산별”이 아니라 한 단계씩이라도 초기업 교섭·투쟁으로 발전해 가는 데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장기불황 시기에도 자본은 “성장의 종말”같은 낭만주의를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윤분배율을 높여 이윤율 감소를 벌충하려고 나선다. 그래서 자본의 위기론은 노동조합과 임금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때 노조운동은 공세에 대해 방어적으로 각자도생을 추구하기 쉽다. 하지만 이런 방어적 경제투쟁으로는 국민경제의 붕괴를 막을 수 없고, 결국 애초 방어하고자 했던 임금과 노동조건도 지킬 수 없다.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운 계층이 먼저 희생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민주노총의 대응도 달랐을 것이다.
경제위기의 구조적 성격을 이해한다면 민주노총, 산별노조, 대기업, 공공기관 노조들은 자본의 경제위기 공세에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변혁적 실천을 조직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구조적 위기의 정세에서는 이전 같은 임금투쟁은 제한된다는 점,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가 임금 극대화를 계속 추구한다면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인상이 쉽지 않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대기업•공공부문 노조는 자신만 수혜를 얻는 임금 인상보다는 일자리 확대와 함께 하청·비정규직의 고용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함께 투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민간 중소영세·비정규직 조직화에 노조의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대기업 공공부문 노조들은 자신들의 교섭권을 산별노조와 민주노총에 집중하고, 기업 내 쟁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힘을 모을 수 있다. 비정규직 운동도 재벌·공공부문의 특수한 조건을 활용하여 정규직을 추격하는데 집중하기보다 더 많은 중소영세·민간부문에 확장될 수 있는 요구를 가장 중시하면서 투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직화도 재벌·공공부문을 넘어 나아갔을 것이다. 기업 내 제한된 연공급을 넘어 2천만 노동자 모두의 임금 격차 축소를 위해 한국 노동시장 전체에 적용되는 노동표준을 만들어가는 투쟁에 민주노총, 산별노조가 힘을 쏟았다면 조직화와 계급적 단결에 다른 전망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민주노총이 국민경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비판적 입장을 갖는 것은 정치·사회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진단이 다르면 대안도 다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분명히 드러난 자본주의의 장기적 변화를 인식할 수 있다면 민주노총은 기업별 종신고용과 연공급 같은 호황기 일본 모델이나, 유럽에서 전후 호황기 가능했던 복지국가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모두 검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지양하는 사회주의 역시 진지하게 대안의 하나로 검토를 시작할 수 있다. 이럴 때 민주당, 문재인 정부와도 분명히 구분되는 노동자 계급의 입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체제변혁의 대안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상당히 지적인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상당한 노력과 정치적 결단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노동자운동은 족벌경영이 싫다고 주주나 펀드에게 경영을 감시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재벌 체제를 그냥 둘 수도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거대한 재벌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아야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집단적으로 경영과 생산, 산업에 관한 지식을 쌓고 개입해야한다. 저임금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별다른 근거는 제시하지는 못한 채 도덕적으로 법정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만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운동과는 달랐을 것이다(지금 민주노총의 흐름대로라면 별다른 근거 없이 최저임금을 노동자 평균임금 이상까지 계속 올리자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임금격차를 확대하는 구조적 요인, 즉 국민경제의 조건과 노사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 다시 시작해야한다. 임금소득 상위 15%에 속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단체협약과 투쟁으로 저임금 노동자를 살릴 수 있을지, 대기업-중소기업, 수출산업-내수산업,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시장을 노동자가 주도하는 어떤 제도로 통제할 수 있을지 대안이 필요한 대목이다.
지난 시기를 거쳐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지금이다. 세계 자본주의와 한국 국민경제의 위기가 진행되는 속도에 비해, 노동자운동이 기존의 기업별 경제주의적 운동을 넘어 노선을 전환할 수 있을지 낙관하기는 쉽지 않다. 자본주의가 구조적 위기 상황이라는 점, 앞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아 온 모든 경제적 조건이 변화할 것이라는 점은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주류 경제학자들도 대부분 인정하고 대책을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다.
만약 노동조합이 기업 내에서 단기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본다면, 거시경제의 진단과 국민경제 붕괴의 위기에 애써 무관심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주력인 재벌·공공부문 사업장에서는 임금과 고용안정을 상대적으로 쉽게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 성장기라는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상황이다. 따라서 노동자운동은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지, 다시 전망을 수립하지 않는다면 현상유지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이념과 노선의 변화는 ‘중장기적’인 과제일 수밖에 없지만 시급히 착수해야 할 과업이기도 하다.
필자는 현재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