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2007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까지
한국 정부는 지난 6월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이 공동기금을 조성하는 ‘1+1’ 제안을 한 바 있다. 그렇지만 대법원판결을 살펴보면, 한국기업이 공동기금에 참여해야 할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왜 한국기업의 참여를 제안했을까? 이는 한국 측도 피해자 배상 판결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일까? 이 문제를 숙고해 보면, 대법원판결과 청와대의 ‘1+1’ 제안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1+1 제안을 내놓은 데에는 한일청구권협정을 둘러싼 역사적 현실이 작용했다. 그 역사적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민간(개인)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고, 그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노무현 정부는 이를 어떻게 다시 해석하고 어떤 식으로 해결책을 찾고자 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장면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한일교섭
피징용자 보상 문제의 기본 방향은 민주당 장면 정부가 진행하던 한일교섭에서 그 틀이 잡혔다. (5·16 군사 쿠데타 직전인 1960년 5월 10일 한일교섭) 이때 한국 측은 보상대상으로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으로 범위를 확대했으며, 이 보상은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일본 측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을 말하는가”라고 질문했고, 한국 측은 “국가로서 청구하며 개인보상에 대해서는 한국 국내에서 조치하겠다”라고 답변했다. 즉 정부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포함하는) 개인 보상금을 받아서 국내에서 이를 집행하겠다는 기본 틀이 이미 장면 정부 당시 설정되었다는 뜻이다.
1961년 12월 15일, 즉 5·16 쿠데타 이후 재개된 한일교섭에서 한국 측 수석위원은 태평양전쟁 전후로 일본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노무자가 667,684명, 군인과 군속이 365,000명으로 총 1,032,684명이라고 제시했다. 그중 부상·사망자는 군인·군속 83,000명, 노무자 19,603명이었다. 또 한국 측은 피징용자 중 생존자에 대해서는 1인당 200달러로 총 1.66억 달러, 사망자에 대해 1인당 1,650달러로 총 1.28억 달러를, 부상자 1인당 2,000달러로 총 0.5억 달러, 도합 3.44억 달러를 제시했다.
하지만 한일 양측은 개별적인 청구권 금액 산정을 통한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1962년 3월 외상 회담을 계기로 한일교섭은 한일 양측이 청구권 금액의 총액을 제시하고 조율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로써 개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퇴색하고, 청구권 자금의 성격은 포괄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국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오하라 비밀회담에서 한국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에 합의했다.
박정희 정부와 ‘민간청구권 보상’
그 후 실제 한일청구권협정을 타결한 박정희 정부는 1965년 12월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출했다. 196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1970년대까지 국민소득을 배가시키고 이를 위해 청구권 자금을 공평하게 사용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민간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야당이 이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결국 1966년 2월에 공포된 법은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라고만 명기했다. 1967년 두 번째로 대선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재선되면 곧 보상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71년 1월에 이르러서야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증거자료 수집을 위한 법률이었고, 보상을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이때 신고대상 중에 피징용자와 관련된 것은 △군인·군속·노무자로 소집·징용되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한 자라는 항목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에서 1975년부터 2년에 걸쳐 보상금이 지급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단 신고 기간이 너무 짧았고 확실한 증거서류를 구비한 신고만 접수했다. 또한 이 기간에 지급 청구를 하지 않은 경우, 그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간주했다. 그 결과 인명관계 신고수리가 8,910명이었는데, 한일교섭 당시 박정희 정부가 사망자를 77,603명으로 제시했던 것에 비해서 너무 적은 수치였다. 보상 액수도 너무 적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컸다. 전반적으로 보아, 어떤 이유든 간에 박정희 정부가 피해실태를 철저히 조사할 의사나, 보상할 의사가 크게 부족하지 않았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종합하면, 무상 3억 달러에 해당하는 1,097억 원에서 경제개발에 913.5억 원(89.4%), 피해자 보상으로 104억 원(9.7%), 독립유공자 기금으로 20억 원(1.9%)이 집행되었다. 피해자 보상은 대부분 개인재산권 보상이었고, 피징용 사망자 8,552명에 대한 25억 원은 전체 자금의 1.8%에 해당했다.
노무현 정부와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노무현 정부는 2004년 2월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입법했고, 여러 과정을 거쳐, 2007년 12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리 자문기구로 구성된 민관공동위원회의 2005년의 검토 결과,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강제동원 피해 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1조는 이 법이 “국가가 태평양 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급함으로써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시했다. 그렇다면 왜 보상금(또는 위자료)이 아니라 ‘위로금’이라는 표현을 썼는가? 이는 한국 정부가 이미 1975년에 시행한 보상으로 인해, 정부의 법적 보상 의무는 없지만, 그 보상이 불완전, 불충분하였다는 것을 정부가 인정하여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이에 대해 위로금 또는 지원을 보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기존 보상을 보충하는 인도적 지원으로, 보상의 성격을 담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법적 보상은 아니라는 복잡한 논리 구조를 동반했다.
그렇다면 2007년의 ‘지원’은 1975년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신고자 수가 크게 늘어 22만 건 이상의 신고를 접수했고, 11만 건에 대해 지원이 이뤄졌다. (현재까지 대략 6,000억 원 이상의 지원금이 지급되었다.) △사망자뿐 아니라, 생존자, 부상자, 미수금 피해자를 지원대상에 포함했다. (생존자는 위로금 2,000만 원, 부상자는 위로금 1,000만 원, 생존자에게는 연간 80만 원의 의료지원. 미수금은 1엔당 2,000원으로 환산) △유족 범위가 뒷순위 유족인 형제, 자매로 확대되었다. △정부의 적극적 조사로 피해자의 증명 책임이 경감되었다.
노무현 정부 ‘희생자 지원’의 이면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만사형통이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논란도 동반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다. 왜 이런 일이 있었나? 애초 정부와 국회 행정자치위가 합의한 원안은 생존자에 대한 지원으로 매년 50만 원의 의료지원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이 생존자에게 500만 원의 위로금을 추가 지급하라는 내용의 수정안을 본회의에 제출했다. 국회에서는 수정안이 통과되었고,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당시 정부 당국자는 수천억 원대의 추가예산을 투입해야 하며, 특히 생환 후 사망한 분들과 형평성 문제가 있기 때문에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생환 후 사망자의 유족에게도 위로금을 지급할 경우, 재정투입이 급격하게 증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는 노무현 정부의 거부권 행사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그 후 생존자 위로금은 삭제됐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2월에야 다시 법안이 통과되었다.
또 하나의 논란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문제였다. (국내 징용에는 ‘일반징용’과 이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의 ‘현원 징용’이 포함된다. 현원 징용은 조선총독부가 중점산업으로 인정한 공장의 현직노동자를 고용한 공장에서 그대로 징용하는 방식이다. 즉 기존 공장에서 계속 일하되 이직이나 퇴사가 금지되는 셈이다. 게다가 국내 강제동원에는 연간 연인원 수백만 명에 이르는 근로 보국대나, 징용령 이전 시기부터 존재하던 ‘관 알선’ 노동자도 포함한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불거진 이후로, 최근이라고 말할 수 있는 2019년 7월 11일에도 서울행정법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가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보상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을 각하했다. 이미 2011년 2월 헌법재판소는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을 제외하는 게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국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법을 제정해 국내 강제동원자들도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자로 지정해 희생을 기리는 조치를 한 점 등을 고려하면 국가의 지원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전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5년 한일수교회담문서공개등대책기획단은 국내 동원을 지원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그 근거는 △국내 강제동원은 연인원 650만 명으로 대상자 수가 너무 많아 정부의 재원에 문제가 있다는 점. △한일협상 당시 일본에 요구한 보상범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제시한 두 가지 쟁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2007년의 지원법의 불가피성을 재확인하든, 아니면 그 미흡함을 인정하고 새로운 국민적 합의를 하든 무언가 판단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역대 한국 정부가 취한 조치들에 관해서는 판단을 미룬 채, 모든 문제를 일본 측에 미루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한일갈등의 배경, 전망, 쟁점, 대응방향」의 각주 15를 보라.)
객관적 역사인식으로부터 국민적 합의를
2007년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당시, 우리는 이 법률을 제정하는 역사적 함의에 대해 명확히 인식했던가. 다시 말해, 1975년의 보상 이후에 한국 정부가 추가적인 지원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인가. 덧붙여, 당시 법률제정 이면에도 다양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인 만큼, 우리는 그 문제들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한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는가. 만약 2007년 지원책에도 미흡한 측면이 있다고 인식한다면, 우리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합의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현재의 한일 갈등을 파해하는 외교적 합의점의 도출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