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 대화의 실패와 2020 노동운동포럼
이번 가을호 특집은 사회진보연대가 9월 26일에 여는 ‘2020 노동운동포럼’의 발표문을 담았다. 코로나 상황을 고려해서 이번 포럼은 온라인으로 진행될 예정인데, 이 자리를 빌려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한다.
이번 호 첫 번째 글, 김성균의 「원포인트 노사정 대화,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나」는 노동운동포럼에 앞서 독자가 먼저 읽기를 바라는 글이다. 이 글은 지난 3월 10일 민주노총이 코로나19 특별요구안과 대정부 교섭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한 때부터 7월 24일 김명환 위원장이 대의원대회에서의 노사정 합의안 부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때까지 민주노총 내부에서 전개된 상황을 되짚어 본다. 필자가 강조하는 바는 첫째, 3월 10일 기자회견에서 김명환 집행부가 방점을 찍은 바는 ‘코로나19 극복 노정협의 태스크포스’의 구성이었다. 반면 민주노총의 특별요구안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급조되었고 결국 노사정 대화가 표류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둘째, 노사정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김명환 집행부는 공식 의결체계 내에서 내실 있는 토론을 진행하기보다는 오히려 논의를 회피하려 했다. 중앙위나 중앙집행위에서 노사정 대화 문제는 논의안건이 아니라 보고안건 형식으로 올라왔다. 셋째, 산별노조 위원장과 총연맹 지역본부장이 참여하는 중앙집행위 역시 코로나 위기 대응이라는 긴급한 과제에 대해 안일했다. 예를 들어 ‘해고 금지’를 핵심 요구안으로 결정했으나, 이러한 요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으로 설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되지 못했다. 요구안의 선정이나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과제는 정책담당자 회의에 일임되었으나, 정책담당자 회의는 산별노조와 지역본부 각각의 요구안을 듣는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민주노총 수준의 정책을 세밀히 검토하고 정선하는 과정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넷째, 노사정 대화 문제가 대의원대회로 넘어간 후, 김명환 집행부는 정부 정책을 그대로 옮겨놓은 최종안을 아름답게 포장하기 바빴고 반대 목소리를 특정 정파의 정치공세로 단정했다. 반면 반대를 조직하는 목소리 중에는 최종안의 문제점을 지나치게 과장하며 사회적 대화 무용론을 펼치는 흐름도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니 대의원대회까지 가는 과정에서도 어떤 생산적 토론이 진행될 수 없었다. 종합해보면 민주노총 외부의 시각에서 볼 때, 이번 상황은 민주노총이 먼저 코로나 위기에 직면하여 노정대화를 요구했고, 정부가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민주노총의 요구를 수용해서 이미 존재하는 경사노위 외부에서 원포인트 대화를 개시하여 몇 개월간 논의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이 대의원대회에서 최종안을 부결해버린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민주노총은 지극히 무책임하거나 아니면 무능한 집단으로 비칠 것이다. 민주노총에 대한 불신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를 이끌어나갈 주도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민주노총은 원포인트 노사정 대화의 실패를 꼼꼼히 복기하며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뼈아프게 성찰해야 한다.
이소형의 「코로나 위기,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자운동의 과제」는 토론회 발표를 위해 쓰인 글이다. 코로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노사정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나아가 향후 코로나 위기가 진정되면서 경기회복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K자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회복이 되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간의 격차가 더욱 확대될 것이란 뜻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노동조합이 총연맹이나 산별노조 수준의 대응이 아니라 개별 기업 수준의 대응에 매몰된다면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길 것이다. 필자는 먼저 왜 이런 기업별 노조 체계가 한국 노동조합 운동에 뿌리내리게 되었는가를 고찰한다. 물론 그 기원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었는데, 정부의 초기업 노조 봉쇄와 어용노조의 관행에 따라 한국의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를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자본은 노동조합의 전투적 경제투쟁에 직면하여 재벌 중심의 수직하청구조를 완성했고, 이는 기업 간 임금격차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2015년 현대차 노조 정규직의 임금은 한국 자동차산업 평균임금의 2.2배에 도달했다. 이는 대기업, 공공기관 전반에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2018년 5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은 1인당 GDP의 1.91배로 미국과 일본의 수준을 상회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격차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오히려 ‘전투적 투쟁성’의 모범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즉, 민주노총 소속 노조는 재벌 대기업, 공공기관의 임금수준을 기준으로 삼아 임금극대화 전략을 추구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이 존재할까? 노조 규약을 통해 산별노조나 총연맹으로 교섭권을 집중하는 방안, 신규 노조를 다수 조직하여 기존 노조의 교섭권을 상대화하는 방안(‘공급사슬 조직화’), 산별교섭을 법제화하는 방안이 지금까지 시도·검토된 방안이지만 실패하거나 뚜렷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또한 이번 노사정대화 사태가 보여주듯이 총연맹이 어떤 의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교섭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내부적 합의조차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김명환 위원장은 고용보험료 인상,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공동근로복지기금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는데, 총연맹이 이러한 의제에 대해 교섭할 수 있는지 여부가 불분명했다.) 민주노총은 바로 이런 문제부터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나아가 재벌 대기업, 공기업 노조의 이해에 편향된 임금체계를 바꾸는 연대임금 전략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의 대표적 정책인 소득주도성장에 찬동하며, 최저임금 1만 원 요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투쟁은 일견 정당성이 충분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기존의 대기업 노조의 임금극대화 전략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은 저임금 노동자 전반의 임금·고용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지만, 민주노총은 오히려 최저임금 1만 원 요구를 고수하려 했다. 이는 오히려 대기업 노조의 임금극대화 전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노총이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비판해야만, 그와 차별적인 실제적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최저임금 1만 원’ 정책이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민주노총 스스로 구상할 수 있는 연대임금 전략이 무엇인가 모색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민주노총의 활로는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 비판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한지원의 「코로나 이후의 사회, 어디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는 노동운동포럼의 강연문이다. 필자는 먼저 코로나 위기 이후 우후죽순처럼 나오는 다양한 대안 담론을 검토한다. 4차 산업혁명의 코로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언택트 시대론,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환경보호로 설정하는 그린뉴딜론, 재난지원금을 계기로 목소리가 커진 기본소득론, 한계기업을 모두 국유화하자는 고전적 사회주의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 담론은 20세기 후반 이후 이어지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이윤율 위기를 무시하며, 경제법칙이나 인류가 이미 겪은 역사적 경험도 무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으로 필자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이냐는 문제를 다룬다. 계급사회의 위기는 외침과 부패로 폭력이 과잉되는 조건이나 잉여노동 자체가 충분히 추출되지 못하는 조건에서 발생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잉여노동을 충분히 추출하지 못하는 상황은 이윤율의 위기로 나타나며, 지배계급 동맹이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자유주의 정치제도가 타락하며 포퓰리즘이 발흥하는데, 이는 다양한 수준의 폭력을 동반한다. 지배계급의 질서가 무너지며 증가하는 폭력은 피지배계급이 계급지배를 지양하는 대안사회를 건설하지 않는 한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로 사회를 이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안사회로 이행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필자는 ‘봉건제 변혁’으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한다. 필자는 무엇보다 부패한 엘리트와 정세에 적합하지 못한 대중봉기의 조합은 최악의 역사적 퇴행을 낳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조국 수호 촛불집회’가 상징하듯이 문재인 정부의 집권세력은 바로 이 최악의 조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말 중국이나 조선이 겪은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노동자운동은 분노와 보복으로 이어지는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면서 통치에 필요한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대중의 부정적 정념을 극대화하면서 통치역량을 약화시키는 포퓰리즘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단절해야 한다는 뜻이기 하다.
시론으로 싣는 이유미의 「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은 지난 5월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불거진 정의연 운동에 대한 평가를 담는다. 필자는 이번 사태가 벌어진 일차적 원인이 문재인 정부의 모호한 태도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대선공약으로 2015년 한일합의 재협상을 내걸었으나, 막상 정부가 출범한 후에는 합의를 파기하지는 않으나 재협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방침을 제시했고, 그 후 지금까지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용수 할머니로서는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어정쩡한 상태를 계속 연장하려는 정부의 태도에 큰 문제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가 여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자 이를 배신으로 여겼을 수 있다. 정의연은 2015년 합의의 파기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규탄과 투쟁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현 상황을 보면, 문재인 정부가 집권을 위해 위안부 이슈를 통해 반일민족주의를 조장하고, 박근혜 정부와 당시 여당을 친일파로 몰아붙였지만, 집권 후에는 일본 탓, 전 정부 탓만 하며 문제해결을 방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연이 문 정부의 행태를 사실상 묵인하면서 윤 전 대표의 국회의원 공천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합의 파기를 선언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게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1993년의 고노 담화나 2015년의 한일합의를 검토하면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이라는 사죄, 배상 형식에 집착한다면, 현재와 같은 교착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임필수의 「김영삼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은 ‘사회운동사’ 연재의 다섯 번째 글이다. 지난 호에서 ‘누가 탈냉전을 거부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이번 호에서는 ‘왜 통일운동은 탈냉전기에 오히려 심각한 위기에 빠졌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번 ‘페미니즘 읽기’는 문설희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질문, “모성이란 무엇인가?”」를 싣는다. 여성=엄마=모성이라는 등식에 균열이 생긴 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나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등식은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저자는 『임신중지』, 『모성애의 발명』, 『어머니의 탄생』을 읽으며 모성의 ‘발명’, ‘탄생’을 한편으로는 역사적 관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관점에서 검토하며 가족제도와 모성은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며 전진적으로 변혁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책소개로 싣는 김태훈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한국사회성격 논쟁(중)」은 지난 호에 이어 윤소영 선생이 올해 2월에 출판한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Ⅰ, Ⅱ를 소개한다. 한국 지식인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왜 386세대의 지식인은 인민주의로 전향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고자 한다. 독자투고, 최윤정의 「한국과 대만의 코로나19 대응 비교」는 대만 방역정책과의 비교를 통해서 문 정부가 내세우는 ‘K 방역’의 맹점을 지적한다. ‘필자가 독자에게’는 임필수, 김진영, 김유미가 지난 호 기사에 대한 독자의 질문에 답한다.
여러 사정으로 이번 호 발간이 매우 늦어졌다. 독자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다음 호를 준비할 때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다.
이번 호 첫 번째 글, 김성균의 「원포인트 노사정 대화,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나」는 노동운동포럼에 앞서 독자가 먼저 읽기를 바라는 글이다. 이 글은 지난 3월 10일 민주노총이 코로나19 특별요구안과 대정부 교섭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한 때부터 7월 24일 김명환 위원장이 대의원대회에서의 노사정 합의안 부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때까지 민주노총 내부에서 전개된 상황을 되짚어 본다. 필자가 강조하는 바는 첫째, 3월 10일 기자회견에서 김명환 집행부가 방점을 찍은 바는 ‘코로나19 극복 노정협의 태스크포스’의 구성이었다. 반면 민주노총의 특별요구안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급조되었고 결국 노사정 대화가 표류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둘째, 노사정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김명환 집행부는 공식 의결체계 내에서 내실 있는 토론을 진행하기보다는 오히려 논의를 회피하려 했다. 중앙위나 중앙집행위에서 노사정 대화 문제는 논의안건이 아니라 보고안건 형식으로 올라왔다. 셋째, 산별노조 위원장과 총연맹 지역본부장이 참여하는 중앙집행위 역시 코로나 위기 대응이라는 긴급한 과제에 대해 안일했다. 예를 들어 ‘해고 금지’를 핵심 요구안으로 결정했으나, 이러한 요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으로 설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되지 못했다. 요구안의 선정이나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과제는 정책담당자 회의에 일임되었으나, 정책담당자 회의는 산별노조와 지역본부 각각의 요구안을 듣는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민주노총 수준의 정책을 세밀히 검토하고 정선하는 과정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넷째, 노사정 대화 문제가 대의원대회로 넘어간 후, 김명환 집행부는 정부 정책을 그대로 옮겨놓은 최종안을 아름답게 포장하기 바빴고 반대 목소리를 특정 정파의 정치공세로 단정했다. 반면 반대를 조직하는 목소리 중에는 최종안의 문제점을 지나치게 과장하며 사회적 대화 무용론을 펼치는 흐름도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니 대의원대회까지 가는 과정에서도 어떤 생산적 토론이 진행될 수 없었다. 종합해보면 민주노총 외부의 시각에서 볼 때, 이번 상황은 민주노총이 먼저 코로나 위기에 직면하여 노정대화를 요구했고, 정부가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민주노총의 요구를 수용해서 이미 존재하는 경사노위 외부에서 원포인트 대화를 개시하여 몇 개월간 논의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이 대의원대회에서 최종안을 부결해버린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민주노총은 지극히 무책임하거나 아니면 무능한 집단으로 비칠 것이다. 민주노총에 대한 불신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를 이끌어나갈 주도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민주노총은 원포인트 노사정 대화의 실패를 꼼꼼히 복기하며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뼈아프게 성찰해야 한다.
이소형의 「코로나 위기,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자운동의 과제」는 토론회 발표를 위해 쓰인 글이다. 코로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노사정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나아가 향후 코로나 위기가 진정되면서 경기회복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K자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회복이 되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간의 격차가 더욱 확대될 것이란 뜻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노동조합이 총연맹이나 산별노조 수준의 대응이 아니라 개별 기업 수준의 대응에 매몰된다면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길 것이다. 필자는 먼저 왜 이런 기업별 노조 체계가 한국 노동조합 운동에 뿌리내리게 되었는가를 고찰한다. 물론 그 기원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었는데, 정부의 초기업 노조 봉쇄와 어용노조의 관행에 따라 한국의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를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자본은 노동조합의 전투적 경제투쟁에 직면하여 재벌 중심의 수직하청구조를 완성했고, 이는 기업 간 임금격차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2015년 현대차 노조 정규직의 임금은 한국 자동차산업 평균임금의 2.2배에 도달했다. 이는 대기업, 공공기관 전반에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2018년 5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은 1인당 GDP의 1.91배로 미국과 일본의 수준을 상회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격차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오히려 ‘전투적 투쟁성’의 모범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즉, 민주노총 소속 노조는 재벌 대기업, 공공기관의 임금수준을 기준으로 삼아 임금극대화 전략을 추구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이 존재할까? 노조 규약을 통해 산별노조나 총연맹으로 교섭권을 집중하는 방안, 신규 노조를 다수 조직하여 기존 노조의 교섭권을 상대화하는 방안(‘공급사슬 조직화’), 산별교섭을 법제화하는 방안이 지금까지 시도·검토된 방안이지만 실패하거나 뚜렷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또한 이번 노사정대화 사태가 보여주듯이 총연맹이 어떤 의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교섭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내부적 합의조차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김명환 위원장은 고용보험료 인상,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공동근로복지기금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는데, 총연맹이 이러한 의제에 대해 교섭할 수 있는지 여부가 불분명했다.) 민주노총은 바로 이런 문제부터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나아가 재벌 대기업, 공기업 노조의 이해에 편향된 임금체계를 바꾸는 연대임금 전략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의 대표적 정책인 소득주도성장에 찬동하며, 최저임금 1만 원 요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투쟁은 일견 정당성이 충분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기존의 대기업 노조의 임금극대화 전략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은 저임금 노동자 전반의 임금·고용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지만, 민주노총은 오히려 최저임금 1만 원 요구를 고수하려 했다. 이는 오히려 대기업 노조의 임금극대화 전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노총이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비판해야만, 그와 차별적인 실제적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최저임금 1만 원’ 정책이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민주노총 스스로 구상할 수 있는 연대임금 전략이 무엇인가 모색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민주노총의 활로는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 비판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한지원의 「코로나 이후의 사회, 어디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는 노동운동포럼의 강연문이다. 필자는 먼저 코로나 위기 이후 우후죽순처럼 나오는 다양한 대안 담론을 검토한다. 4차 산업혁명의 코로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언택트 시대론,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환경보호로 설정하는 그린뉴딜론, 재난지원금을 계기로 목소리가 커진 기본소득론, 한계기업을 모두 국유화하자는 고전적 사회주의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 담론은 20세기 후반 이후 이어지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이윤율 위기를 무시하며, 경제법칙이나 인류가 이미 겪은 역사적 경험도 무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으로 필자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이냐는 문제를 다룬다. 계급사회의 위기는 외침과 부패로 폭력이 과잉되는 조건이나 잉여노동 자체가 충분히 추출되지 못하는 조건에서 발생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잉여노동을 충분히 추출하지 못하는 상황은 이윤율의 위기로 나타나며, 지배계급 동맹이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자유주의 정치제도가 타락하며 포퓰리즘이 발흥하는데, 이는 다양한 수준의 폭력을 동반한다. 지배계급의 질서가 무너지며 증가하는 폭력은 피지배계급이 계급지배를 지양하는 대안사회를 건설하지 않는 한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로 사회를 이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안사회로 이행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필자는 ‘봉건제 변혁’으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한다. 필자는 무엇보다 부패한 엘리트와 정세에 적합하지 못한 대중봉기의 조합은 최악의 역사적 퇴행을 낳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조국 수호 촛불집회’가 상징하듯이 문재인 정부의 집권세력은 바로 이 최악의 조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말 중국이나 조선이 겪은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노동자운동은 분노와 보복으로 이어지는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면서 통치에 필요한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대중의 부정적 정념을 극대화하면서 통치역량을 약화시키는 포퓰리즘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단절해야 한다는 뜻이기 하다.
시론으로 싣는 이유미의 「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은 지난 5월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불거진 정의연 운동에 대한 평가를 담는다. 필자는 이번 사태가 벌어진 일차적 원인이 문재인 정부의 모호한 태도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대선공약으로 2015년 한일합의 재협상을 내걸었으나, 막상 정부가 출범한 후에는 합의를 파기하지는 않으나 재협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방침을 제시했고, 그 후 지금까지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용수 할머니로서는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어정쩡한 상태를 계속 연장하려는 정부의 태도에 큰 문제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가 여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자 이를 배신으로 여겼을 수 있다. 정의연은 2015년 합의의 파기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규탄과 투쟁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현 상황을 보면, 문재인 정부가 집권을 위해 위안부 이슈를 통해 반일민족주의를 조장하고, 박근혜 정부와 당시 여당을 친일파로 몰아붙였지만, 집권 후에는 일본 탓, 전 정부 탓만 하며 문제해결을 방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연이 문 정부의 행태를 사실상 묵인하면서 윤 전 대표의 국회의원 공천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합의 파기를 선언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게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1993년의 고노 담화나 2015년의 한일합의를 검토하면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이라는 사죄, 배상 형식에 집착한다면, 현재와 같은 교착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임필수의 「김영삼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은 ‘사회운동사’ 연재의 다섯 번째 글이다. 지난 호에서 ‘누가 탈냉전을 거부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이번 호에서는 ‘왜 통일운동은 탈냉전기에 오히려 심각한 위기에 빠졌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번 ‘페미니즘 읽기’는 문설희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질문, “모성이란 무엇인가?”」를 싣는다. 여성=엄마=모성이라는 등식에 균열이 생긴 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나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등식은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저자는 『임신중지』, 『모성애의 발명』, 『어머니의 탄생』을 읽으며 모성의 ‘발명’, ‘탄생’을 한편으로는 역사적 관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관점에서 검토하며 가족제도와 모성은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며 전진적으로 변혁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책소개로 싣는 김태훈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한국사회성격 논쟁(중)」은 지난 호에 이어 윤소영 선생이 올해 2월에 출판한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Ⅰ, Ⅱ를 소개한다. 한국 지식인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왜 386세대의 지식인은 인민주의로 전향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고자 한다. 독자투고, 최윤정의 「한국과 대만의 코로나19 대응 비교」는 대만 방역정책과의 비교를 통해서 문 정부가 내세우는 ‘K 방역’의 맹점을 지적한다. ‘필자가 독자에게’는 임필수, 김진영, 김유미가 지난 호 기사에 대한 독자의 질문에 답한다.
여러 사정으로 이번 호 발간이 매우 늦어졌다. 독자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다음 호를 준비할 때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다.
2020년 9월 13일
편집장 임필수
편집장 임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