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0 가을.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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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의 사회,  어디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

한지원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1. 들어가며

포스트-코로나 사회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진다. 시민들이 체제의 위기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갑게 얼어버린 실물 경제와 달리 스스로 뜨겁게 달궈진 주식시장, 이 와중에도 국민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인들, 바이러스의 세계적 확산에도 도리어 커지는 국가 간 분쟁. 우리는 시장과 정치가 동시에 실패하는 역사적 과정을 이렇게 경험하는 중이다.

본 글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코로나19 이후의 사회와 이행에 대해 여러 쟁점을 검토한다.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코로나 대안들의 타당성, 사회의 위기가 가지는 의미,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이행이었던 봉건제 변혁이 오늘날에 주는 시사점, 대안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현재적 쟁점 등을 살펴볼 것이다.
 

2.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코로나 대안들

4차 산업혁명론의 코로나 버전이라 할 언택트 시대론,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환경보호로 설정하는 그린뉴딜, 재난지원금을 계기로 목소리가 커진 기본소득론, 한계기업을 모두 국유화하자는 고전적 사회주의론. 그야말로 백가쟁명식 대안 경쟁이 뜨겁다. 코로나19 위기가 여러 정치세력에 자신의 대안을 선전할 기회를 준 셈이 됐다.

하지만, 이런 대안들은 몇 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다. 최근 유행하는 여러 대안들, 특히 경제와 관련된 대안들의 문제점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짧게 비판해보겠다.
 

(1) 언택트 사회

최근 언론에서 가장 많이 소개하는 포스트-코로나 담론은 ‘언택트 사회’이다. 언택트(Untact)는 ‘접촉하다’라는 의미의 ‘콘택트(contact)’와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언(un)’의 합성어다. 사람들이 직접 만나지 않는 비접촉 서비스의 확대를 의미하는데,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자동화, 유통, 금융, 교육, 운송 등에서의 무인화, 디지털화 확대가 언택트 사회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이런 변화는 지금까지 4차 산업혁명론의 사례로도 많이 소개됐던 것으로, 언택트 사회는 사실 4차 산업혁명론을 코로나19를 계기로 더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언택트 사회 혹은 4차 산업혁명 전망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언택트 기술이 생각만큼 수익성이 높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감염병 방역 과정에서야 불가피하게 언택트 기술이 사용되겠지만, 방역 이후에도 이 기술이 지속해서 확산하려면 수익성 조건이 추가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사회를 바꿀 정도의 기술 확산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그 기술을 채택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공지능 자동화와 디지털 기술이 이윤율을 높인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로 아디다스는 몇 년 전에 제조업의 대표적 노동집약적 공장인 신발공장을 인공지능 로봇으로 자동화했는데, 수년째 수익성을 맞추지 못해 사치성 고가 신발 생산이나 시장 수요 조사 차원에서만 공장을 이용하는 실정이다. 언택트 유통업의 세계적 상징이라 할 아마존은 수익의 70%를 유통이 아니라 아마존웹서비스(서버 구축 및 데이터 판매)로 벌고 있다. 더구나 언택트 유통업은 배달 부분에서 오프라인 매장에 버금가는 노동력도 이용한다. 언택트 유통업은 수익성에서나 노동을 절약하는 부분에서나 여전히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없다.

언택트 사회의 도래가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란 점은 자본투자 감소와 수익률 하락이 세계 경제의 대세란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대 내내 세계 경제는 자본축적 둔화와 이윤율 하락 추세가 강해졌다. 신기술이 전면적으로 확산하려면, 그 기술이 적당한 자본투자로 충분히 인건비를 줄이면서, 동시에 생산량을 증가시켜 새로 투자된 자본이 충분히 이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전자를 자본생산성의 상승, 후자를 국민소득의 증가라고 보통 말하는데, 현재는 둘 다 그야말로 ‘꽝’인 상태다. 새로운 기술의 전면적 확산은커녕 장기불황이 대세란 이야기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이런 양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2) 그린뉴딜

최근 진보진영의 대표적 대안 중 하나가 그린뉴딜 정책이다. 친환경 투자를 대대적으로 늘려, 환경보호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하자는 주장이다. 그린뉴딜은 미국 민주당 진보그룹에서 소개된 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박쥐 서식지 파괴와 같은 환경파괴와 무관치 않고, 코로나19 복구를 위해 정부 주도 투자도 필요하다는 점에서 최근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린뉴딜을 한국판 뉴딜이란 이름으로 집권 후반기 핵심과제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의 대안으로써 그린뉴딜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뉴딜의 원조인 1930년대와 현재는 경제 조건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무시한다. 1930년대 대공황은 2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는 가운데 경제 제도가 그 혁신을 따라가지 못해서 발생했다. 반면, 현재 경제 침체는 생산성 상승이 장기간 둔화한 가운데 코로나19라는 외부 충격 탓에 발생했다. 비유하자면 1930년대는 건강한 상태로 감염병에 걸린 것이었고, 현재는 기저질환을 앓다가 감염병에 걸린 것이다. 둘의 처방이 같을 수 없다.

사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세계 경제는 장기불황이 예상됐던 상황이었다. 20세기 초가 인류사의 도약기였다면, 21세기 초는 인류사의 쇠퇴기라 할 수 있는 시기다. 2010년대는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된 후 가장 형편없는 성장을 기록한 시기였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 뉴딜이 오늘날에도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당시 뉴딜은 느닷없이 끊어진 성장의 흐름을 다시 잇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현재는 이어야 할 이전의 성장이 아예 없다. 뉴딜이 작동할 조건이 아니란 것이다.

둘째, 그린 투자의 성격 때문이다. 그린뉴딜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투자가 핵심이다. 하지만 코로나19 구제 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상당한 재정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모험적 투자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친환경 에너지는 상당 기간 에너지 비용을 상승시킨다. 그런데 기업 이윤으로 생산이 조직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더군다나 대불황에 버금가는 위기 속에서 이런 비용 상승을 감당하는 투자는 지속성을 확보할 수 없다. 참고로 1930년대 뉴딜은 “비용을 절감하는 생산성 혁신” 속에서 이뤄졌다. 자본주의를 잘 돌아가게 하자는 뉴딜을 어찌 보면 자본주의와 상극일 수도 있는 ‘그린’과 결합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3) 기본소득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이 한 차례 지급되자 기본소득 주창자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한 번 해봤으니, 아예 이를 상시화하자고 주장한다. 정부가 국민 모두에게,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정해진 현금을 지급하자는 것이 기본소득의 요체다. 이런 아이디어가 최근 주목을 받는 것은 4차 산업혁명론과도 관련이 깊다. 4차 산업혁명 주창자들은 하나같이 인공지능 기계의 확대로 일자리가 사라질 테니, 국민의 존엄을 위해 임금을 대체하는 새로운 소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런 기본소득 정책은 근거도, 방향도 잘못된 대안이다.

우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본소득 정책은 기술변화가 초래할 미래를 지나치게 과장한다. 인공지능 발전으로 자동화가 확대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산업 사회에서 인구 다수가 실업자인 상태로 산업혁명이 이뤄질 수는 없다. 자본주의적 기술발전은 노동을 절약(노동생산성 향상)하면서 동시에 노동을 증대(생산량 증가)해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예상하는 고실업 산업혁명 시대는 자본주의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기본소득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이후 국민적 관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기본소득론은 생산과 분리된 분배론이란 결정적 결함이 있다. 결과적으로 복지 축소로 이어지든, 아니면 재정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사진은 2020년 6월에 있었던 YTN의 기본소득 찬반 여론조사 결과이다.

다음으로, 기본소득은 생산과 소득의 관계를 무시한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기본소득은 분배만 생각하지 생산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경제이론에 미달하는 것이다.

예로 신고전파는 소득을 생산에 대한 기여로 규정한다. 소득을 높이려면 생산에 더 많이 이바지해야 한다. 이것이 생산을 자극하는 유인책이 된다. 케인스주의는 생산적 투자를 자극할 소득을 이야기한다. 생산의 주체인 기업이 위험한 설비투자에 나서야 경제가 성장하는데, 정부는 기업이 설비투자에 집중하도록 금융소득을 규제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윤율 동역학을 통해 생산과 소득의 모순을 분석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이윤은 착취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착취가 줄면 투자가 줄고, 고용이 줄면, 노동자 소득이 감소한다. 소득을 얻기 위해 착취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처지이다. 이런 이론을 전제로, 신고전파는 생산성에 비례하는 소득을, 케인스주의는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소득을, 마르크스주의는 임금소득의 모순을 지양할 변혁을 내세운다.

그런데 기본소득에는 어떤 생산이론도 없다. 오직 분배만 있다. 이러한 정책은 복지이론에도 미달하는 것이다. 복지이론은 노동시장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임금(사회보장 지출에서 사회보장 세입을 공제한 것) 제도를 설계한다. 독일처럼 낮은 시장임금과 높은 사회임금을 채택할 수도 있고, 스웨덴처럼 높은 시장임금과 낮은 사회임금을 채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현금을 나눠주겠다고 한다. 분배의 대상과 방법만 있지, 시쳇말로 “소는 누가 키우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정부가 실제로 기본소득을 원칙대로 실시한다면, 결국 세입 증가 없는 세출 증가라는 딜레마에 부딪혀 파산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이후 정부 부채가 급증한 상황을 감안하면, 기본소득은 더더욱 국가 경제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4) 국유화 계획경제

거리두기 정책으로 한계기업이 속출하자, 선진국 모든 정부가 기업에 광범위한 지원을 시작했다. 선진국 모두에서 대출, 보증, 자본주입 등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이 사용 중이다. 규모도 국내총생산의 10~20%에 이를 정도로 크다. 이렇게 정부 지원이 확대되자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일부 정치세력은 이 기회에 국유화 계획경제로 나아가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유화 경제는 소련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증명된 것처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다. 법인기업 중심의 미국 자본주의에 뒤처졌거니와 평등과 자유라는 현대의 지향을 추구하는 데도 실패했다. 이미 다른 글에서 여러 차례 쓴 바 있어, 여기서는 요점만 정리하겠다.

우선, 국유화 계획경제는 정부의 실패를 교정할 방법이 없다. 시장의 민간기업은 이윤율에 반응해 생산과 투자를 조정하지만, 계획경제의 국유 기업은 생산과 투자가 효율적인지, 지속 가능한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국유 기업의 관리자와 노동자가 국민경제 전체를 조망하며 생산과 투자를 기민하게 조정할 유인이 없다면, 과잉투자와 노동 낭비를 방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 국유 기업들이 사업을 확장하며 막대한 부채로 중국 경제 전체에 부담이 되는 상황이나, 해외 경쟁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분식회계로 관리자와 노동자가 함께 이득을 보았던 산업은행 소유의 대우조선이 최근 사례이다. 국유화 계획경제의 전제조건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생산 현장에서 대안적 윤리와 동기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이를 당의 선동과 도덕적 책무로 해결하려다 실패했었다. 21세기의 국유화론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다음으로, 국유화 계획경제에 적합한 정치체제는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정치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계획경제에서는 통일성과 일관성이 중요하다. 계획이 중구난방이거나 우왕좌왕하면 안 되니 말이다. 그런데 통일성에는 정부의 막강한 권력이, 그리고 일관성에는 계획 입안의 주체인 당의 독재가 필요하다. 소련이나 중국에서 전체주의 정부와 공산당 독재가 재생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계획경제에 적합한 정치체제가 전체주의 국가란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국유화론은 정치체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자신들은 다르다는 식으로 안일하게 회피할 뿐이다.
 

(5) 소결

포스트-코로나 담론의 문제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20세기 후반부터 이어지고 있는 세계자본주의의 이윤율 위기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4차 산업혁명, 그린뉴딜, 기본소득 같은 대안들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몇 가지 기술혁신이나 정부 역할의 변화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부당하게 전제한다. 하지만 2010년대 이윤율이 반등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윤율 하락 속에서 언택트 기술 투자, 그린뉴딜, 기본소득은 기업과 정부의 부채만 늘릴 가능성이 크다. 둘째, 경제 법칙 또는 역사적 경험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은 경제를 분배 문제 또는 소득 재분배 문제로만 접근한 일종의 반(反)경제학이 이론적 기초이다. 국유화 계획경제는 소련의 실패를 우연한 일탈로 해석한, 역사에 대한 무지에 다름아니다.
 

3. 계급과 사회의 위기

 
코로나19 대유행은 현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저질환을 밖으로 드러냈다. 또 그 기저질환을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 병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내적 모순과도 연결되어 있다. 비대해진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증가한 정부 부채는 현대 경제의 기저질환을 잘 보여준다. 방역의 과학성을 부정하고 대내외 갈등을 키우는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작태 역시 현대 정치의 기저질환을 제대로 보여준다. 경제와 정치가, 즉 그야말로 사회가 위기에 빠졌다.

이번 장에서는 사회의 위기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본다. 현 사회가 예전 상태로 복구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인데, 현 위기의 진행 방향을 점쳐보기 위해 분석의 대상을 중세 봉건제까지 넓혀보겠다.
 

(1) 계급사회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 선언』(공산당선언)에서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 계급투쟁이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는 것으로, 혹은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회의 위기란 바로 이 두 가지 상황과 관련된다. 혁명적 개조 외에는 답을 찾을 수 없는데, 아직 그런 개조가 시작되지 못했거나, 또는 개조의 방향을 아예 찾지 못하고 사회 전체가 몰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 말이다. 이 두 가지가 바로 사회의 위기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먼저 계급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계급은 간단하게 말해 지배하는 집단과 지배당하는 집단 사이의 구분이다. 이때 지배하는 계급은 잉여노동을 배타적으로 취득할 힘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다. 지배당하는 계급은 그 잉여노동을 제공하는 집단이다.

여기서 노동은 사회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의미하며, 잉여노동은 생산자가 지출한 노동 중에 생산에 소모된 것들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제외한 나머지를 의미한다. 잉여노동은 생산과 무관한 욕구 충족에 이용되거나, 아니면 생산 확대를 위한 축적에 이용될 수 있다. 참고로, 이런 잉여노동은 봉건제에서는 “곳간에 가득한 쌀가마니”처럼 지주의 잉여생산물로, 자본주의에서는 “삼성전자 순이익 40조 원”처럼 자본가 또는 기업의 이윤으로 나타난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에서 잉여노동을 더 많이 추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피지배계급의 몫을 줄이는 방법도 있겠고, 몫은 그대로 두더라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겠다. 조선 시대로 예를 들어보면, 농민의 공납이나 군역 부담을 늘리는 ‘가렴주구’ 정책이 전자의 사례, 노비를 소작농으로 만들어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할 동기를 준 후 지대를 걷는 것이 후자의 사례이다. 현대의 한국 사회에서는 1960~1980년대 수익성 낮은 수출 대기업들이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장시간 저임금 노동조건을 유지한 것이 전자의 사례, 1990년대 이후 대기업들이 대규모 자동화 투자와 노동시장 유연화로 생산성과 노동강도를 높인 것이 후자의 사례이다.

그렇다면 지배계급은 어떻게 피지배계급에서 잉여노동을 추출하고 착취할 수 있는가? 

기본은 가장 원초적인 힘, 즉 사람을 해칠 수 있는 폭력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소작농은 지주가 요구하는 지대를 지급하지 않으면 공적, 사적으로 폭행을 당할 수 있었다. 이런 폭력은 전통적으로 가문으로 불린 소수의 혈통 집단이 보유했는데, 이들은 국가의 군대나 가문의 사병을 이용해 천년 넘게 한반도에서 지배계급으로 대대손손 군림할 수 있었다. 이런 지배계급의 구성은 천년 넘게 큰 변화도 없었는데, 예로 조선의 핵심에 있었던 가문들(전주 이씨, 안동 권씨, 파평 윤씨 등)은 그 뿌리가 통일신라 시대 귀족이나 고려 개국 공신이었다.

반면, 피지배계급인 노비나 농민이 조직적인 폭력을 장기간 보유한 사례는 없었다. 지배계급에 대규모로 편입되거나 아예 지배계급의 교체에 성공한 사례도 없었다. 예로 고려 말 망이·망소이의 난부터 조선 말 갑오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농민이 난을 일으키는 경우는 대부분 가혹한 세금으로 생존권이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였는데, 이들은 훈련된 지배계급의 군대를 당할 만큼 제대로 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없었고, 민란의 기간도 길어야 수개월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착취하는 힘은 물리적 폭력에서 경제적 방법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가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능력과 임금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과정이 바로 착취였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노동생산물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며 노동한 시민에게는 임금을 보상으로 지급한다. 그런데 노동생산물의 가치는 항상 임금의 가치보다 크기 때문에 이런 소유법칙을 통해 경제적 방법으로 잉여노동을 취득할 수 있다. 이런 경제적 방식에서 기업은 노동자의 인신을 구속하지 않는다. 해고할 권리로 노동자의 노동능력을 통제할 뿐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처럼 임금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노동자에게 해고는 생존과 직결된 위협이 된다. 인신적 구속이 아니라 자발적 근로계약으로 노예와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경제적 방법에 따른 착취 체계에서 폭력은 국가에 의해 독점된다. 대외적 폭력은 군대가, 대내적 폭력은 경찰이, 그리고 그 폭력의 집행은 법으로 정해진다. 법은 재산의 소유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며,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노동생산물을 소유하고 노동하는 사람은 임금으로만 보상받는다는 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을 수호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폭력을 사용하는 대상을 “소유법칙 수호”에 집중하고 나머지를 모두 시장 법칙에 맡긴다. 이전 사회보다 폭력의 범위와 잔혹성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영역도 시장으로 인해 이전보다 넓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지배계급의 잉여노동 추출과 착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방법이 좀 덜 폭력적으로 진화했을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피지배계급 저항 역시 이전처럼 직접적 폭력 충돌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법의 제정이나 집행 과정에 노동자의 이해를 반영하도록 개입하거나, 매일 매일의 분배를 둘러싼 현장 투쟁에서 임금소득자의 힘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정당과 노동조합이 이런 역할을 하는 대표적 조직이다. 물론 소유권 자체를 흔드는 저항(점거 파업에서부터 급진적 사상의 선전에 이르기까지)에 대해서는 국가가 예전 같은 물리적 폭력을 쓰기도 한다. 폭력이란 지배의 코어는 현대에도 유효하다.

요약해보자. 지금까지의 인간 사회 역사(정확히는 기록된 역사)는 곧 계급사회의 역사였다. 폭력을 보유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고, 잉여노동을 추출, 착취한다는 근본 원리는 노예제든, 봉건제든, 심지어 현대의 자본주의든 같다. 계급사회의 법칙이 곧 역사의 법칙인 셈이다.
 

(2) 사회의 위기

사회의 위기는 이런 역사법칙하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계급사회의 위기란 간단히 말해 지배계급이 ‘지배’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렇다면 지배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폭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잉여노동을 충분하게 추출, 착취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노스(Douglass C. North)는 지배계급의 속성을 폭력(violence)과 지대(rent)의 교환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사회에서는 폭력이 사라질 수 없다. 인간 욕구보다 자원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일부가 자원을 충분히 누리기 위해 다른 일부를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즉 무한한 자원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인간 사회는 폭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폭력이 난무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발발하면,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폭력을 관리해야만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 그렇다면 폭력은 어떻게 관리될 수 있는가? 노스는 사회의 해체보다 존속이 누구에게나 이득이기 때문에, 폭력에 우위를 갖춘 사람들 또는 집단들이 폭력을 내려놓는 대신 지대를 공유할 수 있는 질서(social order)를 수립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여기서 지대는 토지 임대료만이 아니라 경쟁이 아닌 방법으로 얻는 모든 이득을 지칭한다. 경쟁을 통해 얻는 이득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와 관련되지만, 지대로 얻는 이득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과 비슷하다. 지배계급의 지대는 피지배계급의 손해와 크기가 같다. 

지배계급은 이런 지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동맹이다. 지대를 얻는 대가로 폭력을 규제하는 규칙에 합의한 집단이다. 예를 들면, 조선 초기 왕족과 공신들이 보유한 사병이 삼군부로 귀속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이 사병을 포기하는 대가로 수조권, 노비, 관직 등의 특권을 충분하게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배계급인 양반은 군대를 거느리는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도, 왕의 군대와 관료제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한 현대에 와서도 이런 폭력과 지대의 교환은 지속됐다. 예로 와인게스트(Barry R. Weingast)와 모종린은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의 지대공유 동맹을 약탈국가, 발전국가, 경제 포퓰리즘, 금권정치로 나누어 분석했다. 약탈국가 동맹에서 이승만 일파, 친일파, 경찰, 반공 깡패 등은 적산과 미군 지원품을 약탈하며 지대를 공유했다. 발전국가 동맹에서는 박정희부터 전두환 정부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유보한 대가로 정부를 독점한 군부와 경제적 힘을 폭력으로 전용하지 않은 대가로 독점을 보장받은 재벌이 지대를 공유했다. 1987년 민주화부터 시작된 경제 포퓰리즘 동맹에서는 군부에 억압당한 일부가 지대를 공유할 자격을 얻은 것이 특징이었는데, 지역개발이나 복지자금 배분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일부 지역 및 계층의 유권자, 그리고 임금인상의 대가로 급진적 행동을 포기한 대기업 노동조합 등이 지대를 공유하는 동맹에 새로 포함됐다. 군부가 정치에서 제거된 후 본격화 된 금권정치 동맹에서는 이전의 동맹에서 재벌이 정부를 포획한 것이 특징이었다. 재벌들은 유력 정치인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했고, 언론을 이용해 여론도 조작했다. 하지만 재벌의 방종이 도를 넘어 1997년 국가가 부도나 버리자, IMF에 의한 강제 개혁이 진행돼 경제 제도의 신자유주의적 합리화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

두 학자가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노무현 이후 지대공유 동맹은 정치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면 타당할 것이다. 재벌의 금권정치 일부분을 개혁/보수 같은 허구적 진영이 가져갔고, 반일민족주의, 권력기관 개혁 같은 내용 없는 선정적 구호를 앞세워 386세대 정치인이 새로운 엘리트 그룹으로 성장했다. 정경유착으로 탄핵당한 박근혜가 금권정치의 유산을 보여줬다면, 촛불시위와 적폐청산으로 권력을 잡은 집권 386세대는 포퓰리즘 정치의 정수를 보여줬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은 개혁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부동산이나 자녀교육 같은 문제에서는 기득권층의 전형적 부도덕함을 가지고 있다. 

폭력과 지대를 교환하는 지배계급의 동맹 맞은 편에는 당연히 그 지대를 공급해야 하는 피지배계급이 존재한다. 조선 시대에는 인구의 30~40%에 달한 노비와 군역과 공납의 짐을 짊어져야 했던 40~50% 상민이 그러한 피지배계급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경제활동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영세자영업, 비정규직, 특수고용, 하청기업 노동자 등이 지대동맹을 떠받치는 집단이다. 조선 시대 피지배계급은 신분제로 재생산되었는데, 현대의 피지배계급은 소득 격차와 자산 격차를 확대하고 고착화하는 다양한 경제적 제도로 재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계급사회의 위기는 지배계급이 폭력의 규제에 실패할 때이다. 폭력과 지대의 교환 메커니즘이 원활하지 않아 동맹 내부에서 이익을 둘러싼 폭력이 증가하거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대해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사회의 존속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폭력과 지대의 교환이 실패하는 상황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폭력이 급증해 기존 제도가 규제에 실패하는 경우이다. 전쟁과 부패가 대표적이다. 

예로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국의 봉건 국가가 무너질 때는 대부분 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발생했는데, 만주나 서역에서 외적의 침입이 강해져 군비가 급증했고, 환관과 외척의 권력이 강해지며 부패가 심각해졌으며, 군비 부담과 부패로 생존위기에 닥친 농민들이 여러 지역에서 봉기했다. 대외 전쟁과 부패가 많아지면, 기존에 유지되던 지대와 폭력의 교환 방식에 교란이 발생한다.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국가가 폭력과 지대의 교환 방식을 다시 세팅해야만 한다. 이것이 2천 년 넘는 중국 봉건제의 역사였다. 물론 현대 국가에서도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보는 것처럼 천연자원 또는 마약 등의 이권이 생길 때 폭력이 급증하며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멕시코와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이나, 콩고와 코트디부아르의 천연자원을 둘러싼 내전이 대표적 사례이다. 노스는 21세기에도 국가가 공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절반 이상이라 분석했다.

둘째, 가장 중요하고 장기적 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잉여노동을 충분하게 착취하지 못해 지배계급이 공유할 수 있는 지대 자체가 감소하는 경우이다.

봉건제 농업경제에서 잉여생산물은 기본적으로 인구증가, 토지증가,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토지가 그대로인 조건에서 인구만 증가하면, 인구 유지를 위해 필요한 식량이 증가해 잉여생산물이 감소할 것이다. 지배계급이 잉여생산물을 그대로 유지하면, 굶어 죽는 피지배계급이 증가하는데, 이런 경우 보통 민란이 발생해 사회가 혼란해진다. 식량을 생산하는 토지 면적이 증가하거나 농법 개선으로 토지당 식량 생산(토지 생산성)이 증가하면, 잉여생산물도 증가한다. 그런데 이렇게 식량 사정이 나아지면 인구도 보통은 함께 증가하게 되는데, 식량 생산의 증가보다 인구의 증가가 빨라질 경우 잉여생산물이 다시 감소하고 나중에는 인구도 정체 또는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인구압력이 증가해 사회적 위기가 닥치는 상황이 바로 이른바 ‘맬서스 함정’이다.

봉건제 농업경제에서의 인구압력은 서유럽에서 16~17세기에 심각했다. 14세기 중반 흑사병 창궐로 인구가 대폭 감소한 이후 14세기 말부터 인구와 1인당 소득이 모두 빠르게 증가했는데, 15세기 말에 이르면 인구는 증가하지만, 농업 생산성이 정체해 1인당 소득이 급격히 감소했다. 맬서스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이때부터 유럽 봉건제는 위기에 직면했는데, 백년전쟁 같은 봉토를 둘러싼 전쟁이 발발했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했으며, 종교개혁 운동, 농민전쟁 등도 유럽 전역에서 발생했다. 이후 유럽은 두 세기 넘게 이어진 봉건제 붕괴를 거쳐 현대로 이행을 시작했다. 봉건적 관계로는 지대를 공유하는 동맹을 더는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는 잉여노동을 늘리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를 만들어 원거리 무역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고, 네덜란드는 독립전쟁 이후 발트해 곡물 운송을 시작으로 상업혁명을 일으켰다. 봉건제 변혁의 거대한 물줄기가 이렇게 열리고 있었다.

중국의 경우 중세 유럽 같은 인구압력은 없었다. 논의 쌀 생산이 밭의 밀 생산보다 훨씬 생산성이 좋았고, 13~14세기(송나라 말기부터 원나라까지)에 유럽의 흑사병 창궐 시기와 비슷한 인구 감소가 있기도 했지만, 명청 시기에 농법 혁신, 수리시설 건설 등이 꾸준하게 이어져 6백 년 넘게 인구가 연평균 1% 가까이 지속해서 증가할 수 있었다. 물론 15세기 이후 중국의 1인당 소득은 서유럽보다 낮아지기 시작했는데, 인구증가만큼만 딱 국내총생산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봉건적 지속성장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전쟁과 부패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변화를 겪기도 했지만, 19세기 중반 서유럽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당대 지배계급의 동맹이 근본적으로 변할 만큼 잉여노동의 감소도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자본주의적 산업경제에서는 기술혁신과 자본축적을 통해 인구증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제를 장기간 성장시킬 수 있다. 인구압력은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오히려 경제성장 이후 인구 감소 또는 고령화가 급속히 발생할 때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의 잉여노동 착취와 관련한 문제는 이윤율의 변화로 나타난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윤율 경제의 특징은 상승의 힘과 하락의 힘이 같다는 모순이다. 이윤율 상승의 동력인 기술혁신과 자본축적은 혁신의 곤란이 누적되면서 이윤율을 끌어내리는 힘으로 작동한다. 

자본주의적 착취는 모든 자원을 소모하는 봉건적 착취와 달리 오히려 자본과 인구를 놀리면서, 즉 과잉자본으로서 금융화, 과잉인구로서 실업자를 만들면서 위기에 봉착한다는 특징도 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특징을 분석하며 자본주의적 성장의 필연적 결과가 인류의 비참함(misery)이라고 지적했다. 2008-09년 금융위기에서 경험했듯 금융화는 경제 제도의 혼란을 심화한다. 2020년에는 최악의 감염병 사태 속에서도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이 투기의 전장이 되어 경제적 혼돈을 키우고 있다. 실업자와 반(半)실업자(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등)의 증가는 시민 간 경쟁을 격화시켜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갈등 사태(이른바 인국공 사태) 같은 도덕적 타락을 심화하고, 빈부격차로 표현되는 상대적 빈곤, 그리고 꼰대, 7포 세대 등으로 표현되는 세대적 불공평을 키운다.

요즘 문제가 되는 포퓰리즘 정치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비참함(통상 궁핍화 경향이라고 번역된다)을 성장의 토대로 삼는다. 포퓰리즘 정치는 내적 모순에 눈을 감고 내외부에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격하는 행태를 일컫는데, 인종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의, 세대적 갈등, 입법부 무력화, 사법부 장악, 탄핵의 일상화, 팬덤 정치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지배계급의 현대적 동맹은 18세기 이래 자유주의 민주정의 다양한 제도와 조직을 통해 유지됐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이윤율 하락으로 사회 불안이 커지면서, 자유주의적 동맹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늘어나다 보니 아예 기존 제도를 해체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확대되는 중이다. 미국의 트럼프나, 한국의 문재인이 하는 정치가 정확히 이러하다. 브렉시트를 이끈 영국의 보리스 존슨, 이탈리아의 2천 년대를 망쳐놓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금융위기 이후 정치위기를 상징하는 오성동맹 등도 이윤율 위기가 지배계급의 현대적 동맹의 위기로 이어진 사례이다.
 

(3) 소결

계급사회의 위기는 지배계급의 위기이다.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은 폭력을 보유한 집단들의 동맹이다. 이 동맹은 폭력을 규제하는 대가로 지대를 공유하는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 그런데 이 질서는 외침과 부패로 폭력이 과잉되는 조건이나, 잉여노동 자체가 충분하게 추출되지 않는 조건에서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수천 년간 여러 국가가 흥망성쇠를 겪었을 때의 조건이 전자였다. 그리고 서유럽 봉건제가 몰락하고 현대로 이행을 시작할 때 조건이 후자였다.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잉여노동을 충분하게 추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윤율이 하락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윤율 하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때, 지배계급의 동맹을 현대적으로 제도화한 자유주의 정치체제도 몰락할 수밖에 없다. 포퓰리즘은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타락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포퓰리즘은 폭력과 지대의 교환이라는 지배계급의 사회 질서를 허구적 진영의 투쟁, 모호한 외부의 악마를 상대로 한 투쟁으로 변질시킨다. 인종주의적 린치, 경찰폭력의 확대, 이해관계자들의 직간접적 폭력 행위 등으로 여러 형태의 폭력이 선진국에서조차 크게 확대되고 있다.

코로나19 위기가 심화시킨 것은 현대 사회의 이윤율 하락과 포퓰리즘 정치라는 기저질환이다. 한국의 이윤율은 1990년대 폭락했고,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하락 속도가 느려졌는데, 2010년대 세계금융위기에 이은 코로나19 위기로 다시금 하락이 빨라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이후 본격화된 포퓰리즘 정치는 박근혜 탄핵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 만개했고, ‘내로남불’로 상징되는 현 집권세력은 국민을 진영 간 내전 상태로 내모는 상황이다. 지배계급의 질서가 무너지며 증가하는 폭력은 피지배계급이 계급지배를 지양하는 대안 사회를 건설하지 않는 한, 마르크스가 말했던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로 사회를 이끌 뿐이다.
 

4. 이행의 문제: 봉건제 변혁의 시사점

 
현대 사회가 봉착한 문제의 성격은 단기적, 상황적이라기보다는 장기적, 근본적이다. 해결책이 간단치 않다. 역사적으로 현대 사회의 결함을 근본적으로 해결해보려던 시도는 사회주의였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국유화 경제를 강령으로 삼은 20세기 사회주의는 소련의 몰락과 중국의 타락으로 끝나버렸다. 또한, 21세기의 다양한 사회주의 조류들은 소련의 오류를 답습하거나 자유주의에 미달하는 대안으로 존재할 뿐이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다.

이번 장에서는 기존 사회의 근본적 결함을 해결하며 새로운 사회로 이행한 역사적 사례를 검토하며 오늘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을 도출해본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의식적 노력으로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이룬 사례는 서유럽의 봉건제 변혁이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어진 현대 혁명들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해보자.


(1) 봉건제 표준이었던 중국

중국에서는 기원전 2백 년부터 시작하는 한나라 시기에 봉건제가 정착되었다. 중국 봉건제의 특징은 모든 땅은 황제의 것이라는 왕토(王土)사상, 율령제라 불린 국가 차원의 성문법, 군현제로 불린 황제의 지방관리 파견 등이었다. 유럽과 비교해보면 중앙집권적 봉건제가 중국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왕토사상에 따라 모든 지대는 명목적으로는 황제가 취득했다. 말하자면 지대와 세금이 같았다. 다만, 농민이 황제에게 직접 세금을 납부한 것이 아니라 군현제의 지방관리가 황제의 지대를 대신 수취해(수조권) 그 일부를 황제에게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지방관리는 그 수조권을 세습할 수도 있었는데, 바로 이 지방관리가 중국 봉건제의 지배계급이었다. 이들이 바로 세가(世家)였다. 이들은 이후 황조가 부패로 약해지면서, 작은 지주들의 토지를 겸병해 지방호족 가문으로 성장했다. 이를 문벌(門閥)이라고 불렀는데, 문벌 지주는 나라가 망해도 수백 년간 대대손손 부와 권력을 유지했었다.

중국에서는 4~5세기 위진남북조 시대 번성했던 문벌 지주가 6~9세기 수당 시대에 약화했고, 10세기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서 과거제로 선발된 품관(品官)으로 교체되었다. 중앙집권적 봉건제가 재건된 셈이었다. 토지개간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위해 황제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줬고, 더불어 지방관리가 수조권이 아니라 토지만 상속할 수 있도록 개혁(지주전호제)한 것도 중요한 개혁이었다. 제도는 중앙집권화하면서 소유제는 분권화한 것이다. 11~13세기 정점에 이른 중국 봉건제는 품관 지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이 여러 혁신을 바탕으로 토지 생산성을 크게 상승시켰다. 그 결과 송나라 기간에 인구가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강남 개발에 성공해 화북 농업보다 강남 농업 생산량이 더 커졌고, 강남에서 면화 재배가 일반화되어 면직물도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농서 간행도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편, 중세 유럽의 경우 로마가 몰락한 이후 6세기부터 9세기까지 약육강식의 약탈이 반복되는 무정부적 암흑기가 이어졌다. 무정부적 상태에서 지역 토호들이 서로 토지와 노예를 빼앗기는 싸움을 3~4백 년간 계속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영주들은 소작인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땅을 빌려줬고, 시간이 흐르며 이 땅은 상속이 가능한 봉토(封土, feud)가 되었으며, 봉토를 받은 소작인은 그 대가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봉토를 받은 사람이 이렇게 봉신(封臣, vassal)이 됐고, 봉토가 매매 가능한 부동산이 되면서, 봉신은 봉토의 영주(lord of manor)로 커졌다. 영주 중의 영주라 할 왕도 비슷한 방식으로 전쟁을 위한 충성을 확보했다. 왕은 더 많은 땅을 가졌고 당연히 치를 수 있는 전쟁의 크기도 컸다. 온 사방에서 싸움이 빈번했던 영주들은 이런 왕의 보호를 받아야만 봉건적 관계와 지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형 지주인 왕과 중소형 지주인 영주들이 왕국(kingdom)이란 이름의 카르텔을 형성한 것이 바로 10세기 완성된 서유럽 봉건제의 특징이었다. 중국과 비교해보면 문벌이 주도했던 위진남북조 시기 봉건제와 비슷한 셈이었다.
 
14세기는 세계적 봉건제의 위기 시기였다. 중국은 명나라 건국을 통해 봉건적 제도를 혁신하는데 성공한 반면, 유럽은 100년 전쟁 후유증, 비잔틴제국의 몰락, 흑사병 대유행 등에 타격을 받으며 봉건제를 유지하기 위한 혁신에 실패한다. 하지만 혁신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봉건제 변혁의 동기가 되었다. 14세기의 대분기는 체제 보존을 위한 혁신이냐, 체제 이행을 위한 변혁이냐에 대해 오늘날에도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준다. 사진은 유럽의 흑사병 진행 경과이다. [출처: wikipedia]

유럽에서 중앙집권적 봉건제가 들어선 것은 14~15세기에나 들어서였다. 백년전쟁으로 불리는 장기간의 전쟁 효과로 지방 영주 권력이 약해지며 왕권이 강해졌다. 14세기 흑사병으로 인구가 많이 감소해, 공황 시기 기업 간 인수합병처럼 중소 영주에 대한 왕과 대형 영주들의 흡수가 많아진 것도 중앙집권적 국가 건설이 가능했던 이유였다. 어쨌거나 이때까지는 중국 봉건제가 서유럽보다 400~500년 앞섰다고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가 봉건 선진국, 유럽이 봉건 후진국이었다.

봉건제의 성장과 변화를 기준으로 보자면, 봉건제의 표준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우리가 워낙 서유럽 중심 역사를 배워서 그렇지, 사실 약한 왕권의 유럽 봉건제는 로마제국 몰락 이후 중국과 같은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만드는 데 실패한 결과였다. 중국의 경우 한나라가 몰락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가 3세기 초부터 6세기 말까지 3백 년 넘게 이어졌는데, 서유럽은 이 과정을 몇 배 더 길게 겪은 셈이었다.

봉건제 표준을 중국으로 본다면, 봉건제의 쇠퇴는 14세기 명나라 시기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 대대적 개혁과 농법 혁신을 통해 세수를 두 배 이상 늘리기도 했지만, 곧이어 환관의 전횡으로 부패가 만연했다. 그리고 향신(鄕紳) 지주의 토지 겸병 증가와 농민반란이 빈번해지며 결국 청나라에 패망하고 말았다. 참고로 향신은 과거는 합격했지만, 임명을 받지 못한 대기자들을 지칭하는데, 이들이 관료의 특권을 부여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토지겸병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해 명청 시기 지배계급의 뿌리가 되었다. 한편, 17세기 청나라는 건국과 함께 세제개혁과 농법 혁신으로 체제 위기를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역시 곧이어 환관과 향신의 부패로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는데, 19세기부터 유럽의 침략과 개신교 영향을 받은 농민반란이 발발해 봉건제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행한 영국의 혁명

유럽의 경우 10세기 즈음 자리를 잡은 봉건제가 중국과 비슷하게 14세기부터 위기에 빠졌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해 봉건 영주들은 농사를 위해 임금노동자를 고용했고, 더불어 거래의 효율을 위해 지대도 화폐로 받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인건비의 대폭적 상승을 낳아 지배계급의 잉여생산물 착취를 어렵게 만들었다. 더구나 아시아와 거래도 증가했는데, 사치재 수입이 증가해 무역적자가 크게 발생했다. 이런 식으로 서유럽에서는 상품, 화폐, 시장의 확대가 진행됐다. 다만 이런 변화가 자본주의적 관계의 등장까지는 아니었고, 폴 스위지의 지적처럼 봉건제도 자본주의도 아닌 어정쩡한 체제가 2백 년 가까이 이어진 것이었다.

중국과 서유럽의 분기점은 이 시기 봉건제 위기에 대한 양쪽의 반작용 차이에서 비롯됐다. 앞서 본 것처럼 중국은 명청 시기에 나름대로 혁신에 성공했던 반면, 유럽은 혁신에 실패하면서 변혁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잉글랜드의 경우 왕이 세금을 걷을 능력이 안 돼 영주들을 모아 의회를 만들었다. 왕은 법을 만들기 위해 많을 때는 700명 넘는 영주에게 동의를 얻었어야 했다. 나중에는 농노였지만 도시로 도망와서 상인으로 성공한 사람들까지 의회에 참여시켜 동의를 구했다. 이런 의회는 지금 보면 민주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봉건제 기준으로 보면, 무능이었을 뿐이다. 15세기 이후의 왕권 강화 역시 혁신의 결과라기보다는 봉건제 혁신의 실패 결과로 영주들이 몰락한 결과였다. 역설적이지만, 서유럽은 혁신의 실패로 말미암아 봉건제 변혁으로 떠밀려 갔다. 

대대적 변화가 시도된 곳은 16세기 중반의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스페인)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네덜란드 귀족들과 상인들은 과도한 세금과 종교탄압에 불만이 많았다. 이런 와중에 네덜란드에 파견된 에스파냐 총독이 모든 상품거래에 10% 세금을 매기자 귀족과 상인이 폭발했다.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조직되어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고 80년간의 전쟁 끝에 독립된 왕국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이때 네덜란드 귀족과 상인이 독립혁명의 대의로 내세운 것이 바로 자유였다. 네덜란드 귀족과 상인은 자유를 번영과 정의의 원형으로 규정했고, 세금이 번영과 정의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금으로부터의 자유는 독립혁명이 발전하면서 에스파냐 왕조에 대한 자유, 즉 네덜란드의 국가 주권 이념으로 발전했다. 예속과 복종이란 봉건적 질서에 대항한 자유와 주권이라는 현대의 이념이 이렇게 출현했다.

네덜란드의 자유는 영국(잉글랜드)혁명에서 새로운 정치체의 이념으로 발전했다. 17세기 중반 잉글랜드의 왕들은 수시로 세금을 걷어 귀족과 상인들의 반발을 자주 샀는데,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즈음 찰스 1세는 전쟁자금을 구하려 납세자인 귀족과 거대상인들을 의회로 모았다. 앞서 봤듯 의회는 충분하지 못한 왕권을 보완하는 제도로 세금 문제를 협의하는 납세자 대표들의 회의장이었다. 하지만 이 의회는 찰스 1세의 의도와 달리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결국, 왕은 군대를 동원해 의회 내 반대파를 체포하려 했고, 의회로 결집한 귀족과 상인들은 크롬웰을 사령관으로 삼아 국왕의 군대를 쳐부수고 찰스 1세를 처형했다. 그리고 의회가 주도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그런데 사령관이었던 크롬웰은 전쟁이 끝난 후 의회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호국경으로 칭하며 독재자로 군림했다. 그리고 크롬웰이 사망한 뒤 왕권파에 의해 군주정이 복권됐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왕 제임스 2세가 종교탄압을 자행하며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모방하려 하자, 의회가 네덜란드 오렌지공 윌리엄과 함께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를 끌어내렸다.

명예혁명에서 의회는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의회 중심의 입헌정치를 제도화했다. 이것이 현대 정치제도의 원형 중 하나인 입헌군주제이다. 혁명 과정에서 자유는 왕을 처형한 대의명분이었다. 자유는 왕에 대한 자유이자, 인민을 대표하는 의회의 주권을 표현했다. 혁명 이후 선포된 권리장전에서 국왕도 건드릴 수 없는 의회와 국민의 제반 권리가 정해졌다. 입헌군주제는 경제 제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회는 혁명이 세금으로 촉발된 것이니만큼 왕의 재정권을 세세하게 제한했다. 왕은 관세를 징수할 수 없었다. 왕에게는 4~5년간의 단기 수입만 의회의 허가를 전제로 허용됐다. 

그런데 이런 왕권에 대한 제한이 의도치 않게 경제 제도를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우선, 명예혁명 이후 국가 재정에 경제 원칙이 적용됐다. 마음대로 세금을 걷을 수 없게 된 왕이 왕정의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재산 증식과 상업 활동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 왕들이 전쟁을 위해 자산 대부분을 썼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이었다. 재정정책이라 부를 수 있는 국가 제도가 이렇게 탄생했다. 다음으로, 중앙은행과 법정화폐가 만들어졌다. 당시 공동 군주가 된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재정 파탄 상황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의회에 재정권이 있어서 전쟁자금을 조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왕정은 런던의 은행가들에게 손을 벌렸다. 은행가들은 이 과정에서 엄청난 돈벌이 기회를 찾아내, 국가에 금화를 빌려주는 대신 왕이 지불을 보증하는 은행권을 만들었다. 

당시 은행의 사업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예치된 금화 중 일부를 대출해주고 이자 수입을 얻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리고 18세기 들어 런던의 은행들은 신종 대출기법으로 금 예치증서인 은행권을 만들어 유통했다. 무겁고 나누기도 불편했던 금화 대신 은행권이 크게 인기를 얻어 급속도로 보급됐다. 그런데 이 은행권은 수량에 제한이 많았다. 은행이 예금으로 보유한 금만큼만 발행할 수 있었고, 은행이 파산할 경우 은행권도 휴짓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이때 은행가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정부가 보증하는 법정 은행권이었다. 은행가들은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공동출자로 잉글랜드은행을 만든 후 정부에 120만 파운드의 금화를 대출했다. 그리고 채무에 대한 영구이자와 국가가 보증하는 은행권을 발행할 권리를 요구했다. 법정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은 예금 유치에서나, 은행권 유통에서나 엄청난 이득이었다. 잉글랜드은행은 예금보다 더 많은 은행권을 발행해도 정부 보증으로 파산 위험을 낮출 수 있었다. 사용자들도 정부가 보증하는 은행권이니만큼 일시에 금화로 태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현대적 중앙은행이 이렇게 탄생했다.

중앙은행과 법정 은행권의 긍정적 효과는 단지 소수 은행가의 이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법정 은행권이 유통되는 경계가 국가주권의 경계와 같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주권과 경제적인 주권이 결합했고,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국가경제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현대를 만드는 혁명을 통해 자본순환의 범위로서 국가가 만들어졌다. 자유는 영국혁명을 거치며 이런 식으로 시장경제 또는 화폐경제와 깊숙이 결합했다.

영국혁명의 자유는 개인의 권리로도 확장됐다. 당대 혁명의 사상적 기초를 만든 로크는 자유를 개인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로 정의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소유권은 신이 인간 개개인 모두에게 준 자연법으로 타인이나 국가가 침해할 수 없다. 이 재산은 개인이 노동으로 생산한 것이다.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노동을 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는 지주에 구속되어 노동을 하는 농노와 달리 개개인이 자신의 육체와 의식을 소유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소유권으로써 자유는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소유하는 것이다. 개인의 소유권을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인 국가는 소유권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부르주아 혁명이 이렇게 시작됐다.
 

(3) 프랑스의 실패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재산을 가진 자본가 계급과 무산자 계급이 공화국을 만드는 과정에서 충돌했다. 18세기 말 프랑스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왕정의 무능과 사치로 국가 재정은 고갈됐고, 군주제를 지지하는 보수파, 헌법과 군주의 공존을 주장하는 중도파, 그리고 완전한 공화제로 이행하자고 주장하는 급진파가 서로 투쟁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 주변국들까지 군사적 침략을 감행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1793년 공화국이 건설됐고,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에서는 1789년 국민의회가 채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을 계기로 자유와 평등의 관계가 전면에 등장했다. 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은 자유, 재산, 안전, 저항 등 자연법적인 불가침의 권리를 갖는 시민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지롱드파가 주도한 공화국의 첫 헌법은 그 평등한 인간을 납세액에 따라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나눈 후에 능동적 시민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1793년 국민공회에 난입해 지롱드파를 축출했다. 그리고 국민공회의 급진파를 대표했던 자코뱅파가 권력을 잡았다.

자코뱅파에게 권력을 쥐여준 것은 상퀼로트로 불리던 파리 서민계층의 대중운동이었다. 상퀼로트는 프랑스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세력이다. 제헌의회 설립과 인권선언 채택의 토대가 된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국왕이 민심을 상실한 계기가 된 1791년 샹드마르스 국왕퇴위 시위, 제1공화정 설립과 루이 16세 처형의 계기가 된 1792년 튈레르 궁 습격과 봉기코뮌 결성, 지롱드파 몰락과 자코뱅파의 집권을 이뤄낸 1793년 민중봉기 등이 모두 상퀼로트가 주도한 것이었다. 심지어 자코뱅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도 ‘반동분자’의 척결을 외쳤던 상퀼로트의 요구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수공업자, 소상인, 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상퀼로트는 평등주의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소유권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 평등을 위해 소유권이 제한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상퀼로트의 지지로 집권한 자코뱅파는 1793년 새 헌법에서 신성불가침의 권리였던 소유권을 법질서 내의 제한적 권리로 조정했고, 생존권이 소유권에 앞선다는 점도 명시했다. 다만, 1793년 헌법은 실제 실현되지는 못했는데, 자코뱅 지도자들이 헌법을 정치적 장식 정도로 생각했던 탓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당시 관심은 유산자와 무산자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민중을 대외 전쟁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결국 계급 갈등은 애국주의로 봉합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로베스피에르는 상퀼로트 민중운동을 탄압했고 자코뱅 내 급진파를 숙청했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이라 할 인권선언은 자유와 평등을 동등한 것으로 표현했다. 인권선언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또 권리에서 평등하다”라고 시작했다. 신분제 같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인간이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는 없고, 노예와 같은 자유가 없는 인간이 평등할 수도 없으니, 자유와 평등은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불완전한 것은 자명했다. 자유와 평등이 서로의 조건이 된다는 점은 당대 프랑스 혁명가들의 논리적 결론이었다.

하지만 평등과 자유는 논리적 자명성과 달리 현실에서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소유권이 문제였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루소는 자유와 평등이 충돌하는 것을 소유권의 필연적 결과라고 설명했다. 선한 개인도 집단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다른 이를 질투하는데, 생산력 발전으로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이 증가하면 이를 두고 새로운 형태의 경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재산을 더 소유하기 위한 착취와 약탈이 선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을 억압한다. 그래서 자유로운 개인이 동시에 평등해지려면 “최초의 인간이 갑자기 주변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 땅은 내 땅”이라고 선언했을 때, 모두들 달려가 그 울타리를 부수고 땅에서 나는 결실은 공동의 소유이며, 땅 자체도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고 주장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루소처럼 재산 소유권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의 사회적 관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을 주도한 자본가들(부르주아지)도, 인구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농민들도 사적 재산권을 필사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산자 계급인 노동자들도 재산의 재분배를 바랐지, 재산 소유가 없는 세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루소의 평등은 현실의 이해관계 앞에서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을 끌어 내리는 ‘질투’를 기반으로 한 평등으로 타락할 가능성을 내포했다.

어쨌거나 프랑스는 1789년 혁명, 1792년 제1공화정 수립, 1799년 나폴레옹 쿠데타, 1804년 제1제정, 1814년 왕정복고, 1848년 2월 혁명과 제2공화정, 1848년 루이 보나빠르트 대통령 당선, 1852년 제2제정, 1871년 보불전쟁 패배, 파리코뮌, 제3공화정으로 그야말로 한 세기 가까운 좌충우돌의 시기를 거쳤다. 정치체제 현대화가 19세기 말에야 끝났다. 결과로 놓고 보면, 영국은 물론이거니와 미국보다도 한 세기나 뒤진 것이었다. 프랑스의 이러한 정치적 정체 상태는 당연히 경제적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688년 대비 1871년 1인당 GDP를 보면, 영국이 160% 증가한 반면, 프랑스는 77% 증가에 그쳤다. 프랑스의 경우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독일에도 경제력이 뒤처졌다.
 

(4) 일본의 추격

아시아에서의 현대화 추격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부터 시작됐다. 청나라에 패전은 큰 충격이었는데, 청나라는 1856~60년 2차 아편전쟁 패전 이후부터 중체서용을 내걸고 양무운동을 개시했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을 진압한 지방의 한족 관료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는데, 그 내용은 서구 무기를 수입하고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배후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청나라는 1890년대 초까지 대규모 함대를 갖추며 그럭저럭 무력을 증강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청일전쟁에서 대패하며 그 허술함이 폭로되었다. 

중국 현대화의 실패 원인은 무엇보다 변법운동의 실패, 즉 산업화에 적합한 정치체제를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었다. 양무운동은 군수산업 육성을 하면서 동시에 황제 권력 강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황궁은 서태후부터 외척과 환관까지 지대추구 경쟁을 하는 부패의 전당이었다. 무기를 수입한다며 매판적 축재를 하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산업화에 필요한 능력 있는 인재나, 민간과 정부의 효율적 협동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19세기 말 강유위와 광서제가 청일전쟁 패배를 계기로 서양 정치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제2단계'의 근대화 운동, 변법운동을 추진했다. 모델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이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서태후와 기득권 세력의 반격으로 시행 백일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20세기 초 유럽과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되며 중국의 현대화 개혁은 반(半)식민지 상태에서 진행됐다. 중국은 현대화의 타이밍을 놓쳤다.
 
체제 변혁과 이행에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에 적합한 정치체제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19세기 말 일본은 양무운동과 뒤이은 메이지유신으로 현대화에 성공했고, 중국은 양무운동 후에 변법자강에 실패하면서 현대화에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 오늘날 사회에서 변화에 적합한 정치체제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사진은 변법자강운동 즈음 청나라 광서제의 모습. [출처: http://historyworldsome.blogspot.com/]

일본의 경우 막부와 번주들이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보다 더 정열적으로 서구 정세를 수집했다. 청나라가 지배계급의 약화를 두려워해 정보를 숨긴 것과 대조적이었다. 서구에 공포를 느낀 일본 지배계급은 1850년대부터 양무운동과 비슷한 군사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일본판 양무운동 와중에 미국 페리에 의해 강제 개항이 이뤄졌고,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연달아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며 막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번주들은 막부의 무능을 공공연하게 비판했고, 사무라이 계급은 서양을 물리치기 위해 천황을 다시 세우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조직했다. 물론 그 명분과 달리 존왕양이 운동의 실제 내용은 막부 타도가 핵심이었다.

지배계급의 분열로 1868년 막부 체제가 타도됐다. 그리고 천황제가 복권됐다. 그런데 이때 천황제는 단순한 왕정복고가 아니었다. 입헌군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변곡점이었다. 1868년의 변화가 퇴행이 아니라 진보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인은 크게 보아 세 가지였다. 첫째, 번주들이 일본식 양무운동으로 1850년대 광범위하게 서유럽 정보를 수입한 것과 촉망받는 젊은 사무라이들을 서유럽으로 유학 보낸 것이 영향을 미쳤다. 예로 이 유학생 중 하나가 일본 현대화의 주역이라 할 이토 히로부미였다. 둘째, 사쓰마번과 조슈번 같은 대형 번들이 메이지유신으로 집권한 이후 퇴행적 권력 쟁투가 아니라 현대화에 매진했다. 그리고 이토와 같은 젊은 세대 혁명가들에게 빠르게 리더십을 이양했다. 셋째, 메이지 천황이 왕권을 고집하지 않았던 덕분에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 청나라와 조선의 사례를 보면, 왕권을 둘러싼 내전이 현대화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메이지 천황은 청나라의 서태후나 조선의 고종과 달리, 왕권에 집착하지 않고 젊은 세대 리더들에게 힘을 싣고 유신을 뒤에서 지지하며 이끌었다.

평가해보면, 메이지유신은 세계의 현대화 프로그램 중 가장 체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핵심 엘리트가 총출동해 유럽과 북미를 1년 가까이 사찰할 정도로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결과였다. 막번 체제를 타파한 후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와 조세체계를 갖췄고, 내각제, 입헌, 의원제, 정당제 등을 20세기 초까지 차례로 도입했다. 물론 여러 갈등으로 내각이 1~2년 만에 교체되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 계속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한쪽 정파가 다른 쪽을 숙청하거나 죽이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일본 내각은 실직한 사무라이들이 주축이 된 자유민권운동 같은 급진파의 요구도 부분적으로 수용을 했는데, 그 결과 대중적 봉기를 방지할 수도 있었다. 지배계급의 새로운 현대적 동맹이 이렇게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5) 시사점

현대로 이행했던 각국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비교해보면 아래와 같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① 분권적 권력이 변화를 선택하는 데 유리하다.

구조적 위기 시기에는 기존 제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럴 때 폭력이 커진다. 중앙집권적 권력은 폭력을 감축하기 위해 지대를 내주는 데 유리하다. 폭력과 지대의 교환을 통해 기존 상태를 유지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기가 커질수록 지대에 만족하지 못한 세력은 폭력을 키우고, 이 폭력을 관리하지 못하면 결국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진다. 

중국의 사례를 보면 폭력과 지대를 교환하는 데 적합했던 것이 바로 제왕적 권력이었다. 반면, 의회 정치의 확대나 다양한 조직 사이의 협력은 아무래도 폭력과 지대의 교환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쪽에 힘을 싣게 된다. 이해관계자가 다양할수록 지대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해관계의 조정은 고도의 지적, 도덕적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탐욕, 질투 같은 부정적 감정을 통제한다는 점도 이득이다. 잉글랜드의 경우 일찍부터 발달한 의회 제도와 젠트리로 불린 상인 출신 하층 귀족 의원들이 이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사정에 비추어 보면, 폭력과 지대의 교환은 제왕적 대통령을 중심으로, 80년대까지는 군부와 재벌이, 90년대 이후에는 여기에 특정 지역의 유권자와 대기업, 공공부문 정규직 노조까지 더해졌다. 한편,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의회와 정당은 과소발전하고 무능해졌다. 노동운동 역시 노총과 산별노조 같은 계급 내부의 조정기구가 과소발전했다. 한국은 14~18세기 영국보다는 명청 시기 중국의 경로를 따라가고 있는 격인데, 물론 사회의 변화 속도는 그때보다 현재가 수십 배 빠르다.
 

② 올바른 사상으로 정세에 적합한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유럽의 부르주아 혁명은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것이지 어떤 청사진을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다. 로크만 해도 통치론(정부에 관한 두 논거)을 명예혁명 직후에 썼지 명예혁명을 예상해 쓴 것이 아니었다. 중앙은행 제도도 구상을 먼저 가지고 설계한 게 아니라, 왕이 전쟁을 위해 은행가들과 협상하다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판단들은 결국 전반적으로 타당한 방향의 변화로 이어졌다. 1687년 뉴턴의 프린키피아, 1688년 명예혁명, 1689년 로크의 통치론, 1776년 스미스의 국부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이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상의 흐름이 인간과 사회에 관한 과학을 추구하며 인간의 인식과 감정을 탐구하고, 법과 정의를 규정하고 적용하는 정부의 원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국가의 통치원리를 만드는 학문을 경세학(statecraft)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의 경우 춘추전국 시대부터 유학이 경세학으로 뿌리를 잡았다. 유가의 경세학은 민본(民本)을 기본으로 삼아, 토지 겸병을 위한 패권 전쟁을 지양하고, 백성의 평온을 만드는 왕도(王道)정치를 추구했다. 또한, 중농주의를 토대로 농민에 대한 토지 배분 정책을 강조했다. 중국이 봉건제 선진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서유럽보다 수백 년 앞선 유가의 경세학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유학은 명나라 이후 신유학으로 불리며 경세학에서 과거 준비를 위한 학문으로 타락했고, 이후 유학은 개인의 수양을 위한 학문으로 성격이 변했다. 유학에서 유교로 발전한 이 지적 전통은 점점 더 경세학의 성격을 잃어버렸는데, 봉건제 쇠퇴기에 서유럽이 오히려 경세학을 발전시킨 반면, 중국은 역으로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경세학마저 무시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포퓰리즘 정치는 역사의 변곡점에서 매우 위험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사진은 세계 포퓰리즘 정치인의 대표적 사례인 미국 도날드 트럼프와 브라질 자이르 보우소나루.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사상 흐름이 중국의 역설과 비슷한 효과를 내고 있다. 경세학의 기본은 사회 존속을 위해 인간 감정의 부정적 측면(분노, 질투, 공포 등)을 관리하고, 사회의 풍요를 늘리기 위해 개인적, 사회적 역할을 서로가 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과 사회를 둘러싼 조건을 제대로 분석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를 입안할 수 있어야 하는데, 포퓰리즘은 인간 감정의 부정적 측면을 극대화해서 특정 세력이 권력을 잡는 것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③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면서 통치에 필요한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봉건제 변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혁명의 감정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의 혁명은 앞서 봤듯 분노가 반복해서 이어졌다.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심지어 그의 사촌까지 대중의 이런 감정을 잘 이용했다. 그런데 왕의 목을 베었지만, 왕권은 반복해서 부활했고, 혁명 열정은 공화국의 제도를 만드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국에서 명예혁명과 뒤이은 개혁이 분노의 조절을 제도적 목표로 삼았던 것과 비교된다. 로크가 명예혁명 직후 통치론에서 보복을 자제하고 징벌을 타당하게 만드는 입법의 중요성과 개인의 권리와 정부의 제한된 역할을 강조했던 반면, 루소의 후예를 자처한 로베스피에르는 분노의 대상이 됐던 왕과 반동분자를 처형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 결과 영국이 명예혁명 이후 큰 쿠데타 없이 정치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는 분노와 응징이 한 세기 가까이 반복하는 비극을 겪었다.

둘의 차이는 민중봉기와도 관련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상퀼로트의 민중운동에 의해 제1공화정과 제2공화정이 수립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민중이 경세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는 점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도착지는 나폴레옹 제1제정이었고, 1848년 2월 혁명의 도착지는 루이 보나빠르트의 제2제정이었다. 1871년 파리의 혁명적 코뮌은 그 희생에도 불구하고 기회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제3공화정에 프랑스 공화국의 전통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렇게 통치를 할 수 있는 인간과 사회에 관한 적합한 과학, 그리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봉기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프랑스 혁명들의 교훈이라 하겠다. 

영국의 경우 크고 작은 투쟁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정부의 전복까지 가지는 않았다. 예로 왕정복고를 노리고 스코틀랜드를 거점으로 삼아 일어난 자코바이트 반란은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 현대화 운동에 복속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스코틀랜드 젠트리의 무시로 큰 희생 없이 진압되었다. 19세기 중반의 차티스트 운동은 계급적 갈등을 투표권으로 전면화한 것이었는데,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제도적 진보를 이루며 19세기 말 보통선거권 쟁취로 이어졌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사회운동들은 질투와 분노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계간 사회진보연대>에서 수차례 다룬 바 있다. 구체적 내용은 생략한다. 이행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프랑스 사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는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회운동이 ‘경세’를 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분노와 질투 같은 부정적 감정은 시민이 건설하는 제도들을 통해 승화되어야 한다.
 

④ 부패한 엘리트와 적합하지 못한 봉기의 조합이 최악의 퇴행을 만들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이 다른 길을 간 원인은 대략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 왕권과 엘리트 세력의 태도가 달랐다. 중국은 서태후로 상징되는 지배 세력이 나라가 몰락하는 그날까지 기득권 사수를 위해 총력을 다했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 천황이 현대화를 지원했고, 번주들도 기득권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왕의 자질과 신진 리더들의 자질 차이가 두 나라의 미래를 가른 것이다.

둘째, 종교적 농민전쟁의 유무였다. 중국은 아편전쟁 직후 태평천국 농민전쟁이 발발했다. 그런데 기독교적 종말론으로 무장한 농민의 반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지방호족의 기득권 권력이 오히려 강해졌다. 태평천국 운동은 패배 이후에 남는 것도 별로 없었는데, 분노와 기득권만 강화한 채 외세의 개입을 불러와 청나라의 이행에 더 큰 짐을 얹었다. 일본의 경우 소규모 농민반란은 여럿 있었지만, 종교적 이념의 대규모 반란은 없었다. 몰락한 사무라이의 운동도 있었지만, 입헌을 가속하는 것을 요구했던 터라 영국적 자유주의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촛불혁명’으로 불리는 탄핵 사태 이후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분기점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박근혜 탄핵 이후 집권한 민주당 세력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개혁이 아니라 검찰을 비롯한 모든 권력기관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기 위한 권력 쟁투에 집중했다. 참여연대, 민변 등 시민단체들도 촛불시위 이후 현 집권세력과 혼연일체가 되어 합리적 개혁정책이 아니라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반보수 투쟁에 매몰되었다. 이에 반발하는 보수세력은 대규모 촛불시위를 조직해 2016년 광화문 촛불 뒤집기에 나섰는데, 2019년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퇴진을 두고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보수와 개혁이 동시에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사건도 발발했다.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은 태평천국 농민반란과 서태후의 권력 쟁투로 나라가 풍비박산 난 19세기 말 청나라와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이후 한국 사회는 역사적 분기점에서 퇴행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 결론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현대 사회의 치명적 기저질환이 드러났다. 시민들도 대안에 목말라 한다. 하지만 현재 유행하는 대안들은 현대 사회의 치명적 기저질환에 눈을 감는다. 그래서 자칫 아니함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의 결함은 계급사회의 모순, 즉 지배계급이 잉여노동을 충분히 추출하여 착취할 수 있을 때만 그 존속이 보장된다는 점에 있다. 주인-노예, 지주-소작농의 관계가 자본가-노동자의 관계로 바뀌었고, 잉여생산물이 이윤으로 바뀌었지만, 폭력과 지대의 교환으로 지배계급을 유지하며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계급사회의 근본 속성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 사회의 위기는 이윤율 하락으로 나타나는데, 이윤율 하락으로 과잉자본과 과잉인구가 증가하며, 지배계급의 경제적 방종이 커지고 피지배계급의 도덕적 타락과 상대적 빈곤이 심화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현대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는, 사회주의적 변혁이 여전히 그 방향을 찾고 있지 못한 현재, 봉건제를 변혁한 경험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봉건제 변혁의 시사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체제의 분권적 권력이 변화를 선택하는 데 유리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사회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반드시 개혁될 필요가 있다. 또한, 노동자운동이 노동조합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지역과 현장에서 많이 조직하는 것도 중요하다. 둘째, 미래의 청사진이 아니라 매시기 정세에 적합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판단을 위해서는 시대에 걸맞은 경세학이 필요한데, 필자는 이를 마르크스주의라고 생각한다. 셋째,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면서 통치에 필요한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대중의 정념을 극대화하며 통치역량을 약화하는 현재의 포퓰리즘 정치세력은 뿌리를 뽑아야 한다. 다섯째, 부패한 엘리트와 적합하지 못한 봉기의 조합이 최악의 퇴행을 만들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세력이 이 최악의 조합을 보여준다. 노동자운동이 지적, 도덕적 역량을 시급히 키워 이들을 대체해야 한다.

대안을 특정하기 어려운 오늘날 같은 정세에서는 변화의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계급사회의 지양을 추구하는 한국의 노동자운동이 그 방향을 잡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노동자운동은 포퓰리즘 정치의 노동운동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주의에 친화적이다. 노동자주의는 임금소득자가 특별한 역사적 지위를 가진다는 전제 위에서, 노동조합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역사적 진보라고 여긴다. 자본가라는 가해자와 노동자라는 피해자의 선악 구도 속에서 노동조합이란 영웅이 악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다는 메시아주의 레토릭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다른 글에서 분석하고 있듯, 오늘날 대기업, 공공부문 기업별 노동조합은 1990년대 이후 오히려 폭력과 지대의 교환 과정에 동참한 광의의 지배계급 동맹에 속해 있다. 노동조합운동은 지대공유 동맹에서 떨어져나와 70%의 나머지 임금소득자와 연대해야 한다. 노동자주의를 노동조합운동 내부에서 혁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마르크스 계급투쟁의 역사법칙을 노스의 “폭력과 사회질서”에 관한 이론으로 보완했다. 사회의 근본 모순과 이행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는 둘의 조합이 설명력을 가진다.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정치체제와 동맹, 특히 이행의 문제를 생각하는 데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가시모토 미오, 미야지마 히로시, 『현재를 보는 역사 조선과 명청』, 너머북스, 2014. 데이비드 파커 외, 『근대유럽을 만든 좌우익 혁명들, 혁명의 탄생』, 교양인, 2009. 모종린, 배리 와인게스트, 『한국발전론』, 서울셀렉션, 2015. 백영서 외, 『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 갈래』, 창비, 2009. 사회진보연대, 『코로나19 사태의 원인과 전망』, 2020. 윤소영,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 I, II』, 공감, 2020. 한지원, 「오늘날의 사회주의」, 『2019년 노동운동포럼 자료집』, 사회진보연대, 2019. 한지원, 「코로나19 이후 세계: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0년 여름호. Douglass C. North, John Joseph Wallis, Barry R. Weingast, Violence and Social Orders: A Conceptual Framework for Interpreting Recorded Human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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