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40호
성폭력 : 1979 - 1980년의 논쟁
편집자주 - 1979년~1980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반성폭력법’ 입법을 둘러싼 논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1970년대 말, 80년대 초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대중적인 쟁점은 성폭력 문제였다. 이탈리아 의회는 1979년이래 새로운 반성폭력법을 논의해왔다. 그러나, 강간과 성적 학대는 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도덕에 반하는’ 범죄, 즉 풍기 문란죄로 간주되었다. 1979년 ‘이탈리아 여성연합(Union Donne Italiane)'과 여성해방운동(MLD)', '로마페미니스트그룹’ 등은 국민발의 절차를 밟아 반성폭력법의 입법을 추진했다. ‘여성해방운동’이 기초한 초안은 30만 명에 달하는 서명을 받았고 이는 ‘여성의 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운동 내부에서는 이 법안의 입법을 둘러싼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의 주된 쟁점은 법안의 기초 및 제출이 갖는 의미와 여성운동의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 소개되는 세 편의 글은 법 자체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며 페미니즘이 성폭력을 단일 이슈로 삼아 법률 제정 투쟁을 벌이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담고 있다. 토론에 참가했던 여성들은 70~80년의 토론이 여성운동이 운동으로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기독민주당에 의해 이 ‘여성의 법’이 공격받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 법안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견지하던 페미니스트들은 단결하여 이 법안을 방어하는 투쟁에 동참했다. 기독민주당은 강간을 인격에 대한 범죄로 규정한 것을 수정하여 이를 사회적 도덕에 대한 범죄로 규정했다. 그러나 수정을 거쳐 하원을 통과한 법은 성폭력을 인격에 대한 범죄로 규정했다. 하지만 애인과 남편을 처벌대상에서 제외했고, 페미니스트들은 이것이 가족을 폭력의 ‘자유지대’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했던 논점이 현재 ‘성폭력’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논의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 논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날, ‘민주적’여성들의 운동
리디아 캄파냐노
오늘날, 민주적인 여성들의 운동은 성폭력에 관한 법률 초안을 만들고 있다. 여성이 법률을 이용하는 문제에 관해 재논의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지난 토요일 Milan에서 열린 반성폭력 법 논쟁에서, 한 여성은 반성폭력법 입법을 위한 서명운동을 잠시 보류하고 모든 의제들을 보다 충분히 토론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회합의 주최측은 이러한 초안이 많은 노력과 고통을 통해 만들어 졌다는 점을 존중하고 이해해 달라며, 이 여성의 요구를 잠재웠다. 나는 ‘존중’이란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성이 새로운 법 초안을 함께 만드는데 왜 그렇게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걸까?’ 하는 의문을 품어보았고, 그 다음에는 ‘그런 노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러한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열과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번 토요일에 이것은 충분히 발언되지 못하였다. 반성폭력법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여성들은, 이것이 여성운동이며 모든 조직들이 이름을 걸고 청원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에 우리가 낙태에 관한 법률을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우리 중 다수는 운동이 스스로 법 제정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법률의 성격을 띠는 어떤 것도 낙태 혹은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에서 드러나는, 감축할 수 없는 성적 모순을 해결하거나 혹은 공론화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성해방운동(MLD)에 속한 여성들은 서명운동을 계속할 것을 분명히 주장했고, 이렇게 해서 이 사업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제되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여성의 이름, 혹은 현존하는 여성운동 조직의 약칭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운동은 이제 더 이상 소규모도 아니고, 점차 위축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커피한잔을 앞에 놓고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거나, 고상하게 취미 삼아 무의식과 자의식을 훈련하고, 글을 쓰고 분석하는 일도 아니다. 이제 많은 조직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행동하고 법을 만든다. 왜 그들이 그것을 해야 하는가를 걱정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법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우리가 근본적으로 가져온 정치적 사고이다. 나는 이것을 어느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 모든 주제들을 근본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어떤 조직에 속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그들이 페미니스트일 뿐 아니라 여성의 일부임을 잊지 않았었다. 작은 조직에서 일하건, 혹은 다소 유명한 그룹에서 일하건 간에 상관없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항상 그래왔듯이,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각기 다른 여성들, 다양한 방법으로 의식 고양을 꽤하는 여성들 사이에 소통의 채널을 넓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각기 다른 위치와 사고방식을 공통의 것으로 모아낼 수 있을까? 토요일에 벌어졌던 논쟁에서 이 문제는 너무도 빨리 지나쳤고, 모두 정치적으로 익숙한 방식으로 중재와 타협을 택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포기하였다. 예를 들어 로마에서 활동하는 집단인 Pompeo Mango의 여성들은 강간범에 대해 더욱 엄격하게 처벌하고자 하는 바램을 포기해야했다. 여기에 더하여 강간범에게 사형을 내리기를 원하는 여성들도 이를 포기하고 이 법률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여성들도 자신의 환상에 근거하여 결국 타협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서명이다. 서명을 통해 여성들이 함께 하고 소통하며 ‘인민’이 되어갈 것이라 여겼다. 우리는 대중적 발의를 통한 입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인민’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 법의 지지자들은, ‘법률이 비민주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민주적인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렇게 답하는 사람들도, 강간이 ‘인격을 침해하는 범죄’이고, 따라서 국가의 처벌이 자동으로 뒤따르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특정한 정의 - 민주적 여성, 비민주적 여성-는 남성에 대한 정의와 같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감옥을 통해 강간이 쇄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엇이 민주적인가? 여성들이 더 이상 그녀들의 남편과 아들의 강간의 공범자가 되지 않고, 대신 사형을 요구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이러한 정치적인 판단에 직면하거나, 우리가 반성폭력법안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 양당간의 결정을 해야 할 때, 이 법의 지향, 환상, 그리고 선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걷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이는 여성의 정치를 한 쪽을 택하기 위해 무시하는 것이 ‘민주적’이라는 가장 오래된 관습이다. 좀더 명확히 이해하자면 이는 부르주아지의 방법이다. 다른 나라들의 여성운동의 일부는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통합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우리를 ‘계급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난해왔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이러한 정치적 언어에 대한 순종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과 심원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의 공통점을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무엇이 여성들을 하나의 법안을 만드는데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는지 묻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직 누구도 이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기에, 이 법안을 발의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상상해 보려 한다.
나는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이 아닌, 좋고 흥미로운 환상들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법이나 공적인 영역 속에서 명예, 도덕 혹은 가문으로 상징되지 않는다는 환상 말이다. 법은 스스로를 중요하고 특권적인 위상, 즉 심각한 수준의 사고의 변화를 가져와 결국 그것이 바로 대중의 생각이 되는 그런 위상에 두려는 경향이 있다(실제로 나는 이를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은 아마도 이러한 환상이 법률 조항으로 변하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만약, 예를 들어 여성이 ‘법에 의해’ 시민이 된다면, 그리고 새로 태어날 아이도 시민이 될 것이라면, 만약 어머니가 그 아이를 죽였을 때(역주- 낙태를 의미함), 이는 더 이상 가벼운 형벌로 처리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살인과 범죄로 불릴 것이며 그리고 구금되어야 하는 날들은 증가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원한 것인가? 우리는 어떠한 법도 모자간의 관계를 단순히 두 인간 사이의 관계로 정리하는데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20년이 아니라 단 1년이라도 이러한 여성을 가두어 둔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알고 있다. 토요일에, 나는 이러한 범죄를 공동체들, 상담소들, 피임기구들 등을 통해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회에서 여성의 상태의 진보에 대해 너무도 낙관적이라면, 나는 왜 이 ‘진보’에서 배제된 자들 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필요한지, 그리고 사실상 왜 그들을 변화의 길에 세우는 것을 말 그대로 불가능하게 하고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이 여성이 ‘시민’이 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의 의미란 말인가? 혹은 여성이 법에 의해 통제되고 범죄, 범인, 그리고 처벌을 확인하기 위한, 그러면서도 상처받은 성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은 절대로 아닌, 재판이라는 형태로 공적인 강간을 당하는 것이 그녀를 좀더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인가? 범인에 대한 본보기로서의 형벌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모든 종류의 범죄 예방방법을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강간범이라는 한 인간이 스스로를 많은 종류의 무지, 무관심과 불행들로 복잡하게 변명을 할 수 있다고 느끼며,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우리 모두가 판사와 경찰이 되지 않는 한 성폭력은 범죄로 인식되기 어렵다.
물론 내가 도덕성, 가문의 이름, 권위적 명예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멍에가 법 조항에서 사라진다면 매우 기쁠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새로운 희망을 담아 입법부와 대면하고 있는 여성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그들에게 일어났던 변화들에 대한 조사 작업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한 예들을 제시한 이유는 이 법안이 이러한 희망들을 훨씬 넘어서고 있으며, 사실 법원을 통하여 성적 대립의 모든 폭력들을 없애거나 제한하거나 혹은 철폐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법은 형벌을 너무도 많이 강요한다. 도대체 왜? 나는 누가 ‘운동’을 하고, 누가 안하고에 대해 말했던 토요일의 발언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 여성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게 만들고, 강인함을 보여주기 위해, 지배 권력의 장치들을 활용하고자 하는 그녀들의 소망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지난 수년간의 경험을 통한 변화된 우리의 전략이 가지는 힘과 그 강인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은 타인들이 오랫동안 평가절하하고 정치적인 절멸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가치를 드러내 보이는 방식이다. 그 타인은 비단 강간범들만이 아니다.
강간은 끔찍한 범죄다.
로산나 로산다
강간은 끔찍한 범죄다. 여성들은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겪어왔다. 여성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러나 국민발의를 통한 반성폭력법 입법은 단순히 처벌과 비난이라는 구래의 생각을 다시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성해방운동’이 추진하고 있는 국민발의를 통한 반성폭력법에 관해서 여성들의 운동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쟁이 있다. 논쟁은 특히 몇 가지 측면에 중심을 두고 있다: 사건이 누구의 증거를 통해서도 법원에 제기될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피해를 당한 당사자의 증거를 통해서만 제기될 수 있는가. 첫 번째 경우에, 사회는 스스로를 피해 여성의 직접적인 대표가 되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어떤 방식은 소송을 제기하거나 하지 않을 피해여성의 결정을 침해하기도 한다; 두 번째 경우에 이미 심각하게 상처 입은 여성이 또 다시 책임을 져야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 책임은 그녀에게 너무 과도하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법이라는 도구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사회적 기반을 바꾸고 위와 같은 문제점을 유발한다. 하지만 그 뒤에는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범죄와 일탈, 처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이다. 범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처벌되어야’만 하는가? 누구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 모두는 60년대와 70년대 사이의 운동의 근본적인 특성 중 하나가 법과 국가 장치들, 특히 사법적이고 탄압적인 장치들이 편파적이고 중립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한다. 감옥 체계를 만들어 낸 고발, ‘정치’범들 뿐만 아니라 ‘평범한’ 범죄자들에 대한 전쟁(그들 모두가 ‘정치범’이었다는 의미에서), 사회가 ‘교육과 처벌’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누군들 잊을 수 있는가?
이런 저항의 물결은 유죄의 개념 전체를 문제삼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견고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유죄는 역사적이고 상대적인 판결 뿐만은 아니고, 실제로 사람들이 승인하고 그것을 위반한 모든 것을 공격하는 질서로부터 일탈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질서는 언제나 지배 계급이나 집단이 유지하는 권력 모델에 부합한다. 이 모델에서 일탈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무(無)-통합’을 표현한다. 유죄인 사람들에게 쌓이는 혐오는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보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첫 번째 논쟁이었고, 따라서 ‘일탈’이 단지 입법적 권력의 질서에 관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논쟁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누군가가 길을 건너면서 나를 칼로 찔렀다면, 그 행동의 복잡한 이유와 동기를 추적하는 것이 당연히 가능하지만, 상식적인 질서는 ‘과실’이라는 사고 속에서 이 사실을 부인하고, 지위를 떨어뜨린다. 하지만 ‘나의’ 이유, 내 자신의 불가침성 또한 동시에 부인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1968년 사고의 대혼란의 시기에, ‘일탈’의 문제는 자유의 ‘집합적인’ 원칙, 즉 규범, 법, 개인의 자유에 부과된 한계, 그리고 사회적 조직의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새로운 운동들의 토론 속에서, 모든 사회 규범의 핵심에 놓여있고, 모든 법의 기초가 되는 이런 문제들은 열려진 문제로 남아있거나 단순히 회피되었다. 이후, 그것은 사회적 메커니즘과 연관이 되었다. 사회적 메커니즘은 반드시 국가이거나 법적인 것일 필요는 없었고, 집합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기능을 하고, 동시에 일탈한 사람들을 포괄할 것이었다. 그/녀를 공적인 제재라는 비현실적 관념과 도덕적 매도 양자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그/녀를 회복시키고, 복구시킴으로써. 이것은 해방적이고, 비-억압적이며, 문화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계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의 한계는 국가와 법적인 개입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다른 ‘사회 형태’, 즉 ‘인민 공동체’, ‘각각의 차이에 대한 보호’와 같은 말일 수 있는 ‘모두에 대한 보호’를 사고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법적 권력의 추상성과 억압적 비-중립성에 대한 비판이 옳았다는 것도 사실이며, 나에게는 반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1968은 근본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간다. 규칙들이 혹은 다른 어떤 것이 ‘평등’의 집합체를 구성할 수 있거나, 구성해야만 하는가 - 그리고 사회에서 평등과 해방을 위한 운동은 그 자체로 어떠한 실천을 고안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아마도 깊은 사회적 변화의 운동 속에서 삭제될 때까지 해결되지 않을 운명을 가진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신좌파의 비판은 그 문제를 다루었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 문제가 떠맡은 것을 해결한 것 같다. 사실, 규칙 없는 사회를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면, 처벌 없는 사회를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심지어 감옥이 없는 사회를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처벌로부터 일탈을 사실상 분리시킬 수 있게 되었다. 부과된 처벌은 야만스러운 보상이거나 ‘처벌을 통한 재교육’이라는 의미 없고 앙심 품은 가설이다. 비록 우리가 사회는 항상 타인에게 위험한 사람들 일부를 생산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등급, 방어 혹은 억제의 체계가 반드시 처벌로 남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강조되고 있는 논쟁을 잠시 제쳐두면―즉, 하나의 다른 조직과 각기 다른 가치들이 많은 수의 ‘범죄들’을 막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의 사회가 ‘범죄’를 복수 당한 것이라기보다는 상처받은 것으로 사고할 수 있고, ‘보상받아야 할’ 무엇인가로 범죄를 사고하는 것을 그만 둘 수도 있다. 만약 그 범죄가 모두의 유산과 가장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격의 경우가 아니라면. 사회는 일탈자와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에게 더 이상 복수를 짐 지우지 않고, 그에게 일종의 집합적인 계약을 수용하는 것으로 이끌기 위해서. 처벌의 원칙은 이것이 투옥이라는 방법으로 진행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방법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말이다. 만약 다른 길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면, 이것이 급진적으로 금이 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쉽다. 그러므로 일탈에 관해서는, 특히 투옥과 좀 더 일반적으로는 입은 상처와 배상 사이의 ‘교환’에 관해서는 ‘보복적인’ 요소들에 대항한 신좌파의 투쟁은 나에게는 여전히 전적으로 유효하고, 사회적 조직의 실행 가능한 형태들에 가는 길로 이끌 수 있다.
이런 변화를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던 이 같은 신좌파가 절대 실천적이지 않았다는 점은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현재 다시 일어나는 법의 형식주의에 대한 열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법의 형식주의는 우리의 사법적 친구들 중 일부가 역사를 ‘법의 파괴’와 ‘다음 법의 제정’ 사이의 일련의 갑작스런 움직임, ‘공식적인 보증’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다른 지점에서 이 논쟁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휠씬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신좌파는 감옥에 대해 극구 비난해왔지만, 그 자신이 그것을 실시했다. 신좌파는 부르주아 정의를 비난했지만 그것에 의지했었다. 신좌파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접근에 반대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스스로는 그것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누구에 대한 감시와 처벌인가? 물론 인민의 적이고, 인민은 탄압 받는 사람들, 방어 받지 못하는 사람들, 아이들, 여성들, 측근들에 의해 비난받는 동료들이다.
이것에 관해 새로운 것은 없다. 신좌파는 단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나리오를 예행 연습한 것이다. 우선, 우리가 모두 공산주의자가 될 때까지, 탄압은 유용한 도구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신좌파가 이렇게 할 때마다, 신좌파가 억압적 국가장치로서 국가의 가치를 되살림으로써 그것의 최초의 지위와 모순되었고, 반면에 전체적으로 신좌파가 계속해서 ‘과도기적 국가’가 우리의 것만큼이나 복잡한 사회의 혁명적인 공식을 진전시켜야만 한다는 복잡한 문제는 피해왔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은 오늘날 특히 여성들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모순이다. 모든 새로운 운동 중에서, 여성들의 운동은 가장 단호하게 반-제도적이었고, ‘법의 추상성’에 가장 적대적이었으며, 개인의 차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주창자였다. 여성과 정치 사이의 관계는 어렵다. 여성과 국가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이고, 여성과 정의(justice) 사이의 관계는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괴한 점이 있다. 마치 ‘일탈’은 오로지 남성들에게만 연관된 남성적 틀 안에서 사고될 수 있는 것처럼, 남성들의 정의(justice)는 여성들을 그다지 많이 범죄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의 약함은 특별한 종류의 약함이고 그래서 그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폭력의 수준으로부터 비교적(정말 비교적) 보호받고 있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고, 그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으며, 그들을 특별히 위험하거나 해로운 기능에서 보호하는 법률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의 남-녀 관계에 있어서 그들은 누구보다 더 폭력에 노출되어있다. 이것은 불평등한 권력의 관계이다.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 수준에서 여성은 약하다(혹은 그녀들은 더 약하도록 키워졌다). 그녀들은 강간을 당할 수도 있고, 혹은 어쨌든 맞을 수도 있다. 그녀들은 더 가난하고, 덜 조직되어있다. 그녀에게 가해지는 이 세 가지 불평등 중에 첫 번째(신체적)것이 가장 야만적이고, 여성들은 저항하기 시작한다. 저항을 위해서 그녀들은 셀 수 없는 사회적 금기를 극복해야한다. 그리고 그녀들을 침묵 속에서 고통받게 했던 사회적 금기들을 극복했을 때, 여성들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하고, 그녀들을 덜 이해하며, 그녀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남성들이 만든 정의(justice)를 처리해야만 한다.
그래서 법에 대한 이런 의존은 다른 누구보다 여성들에게 더욱 어렵다. 그것은 탄압받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같은데, 그들은 법정을 경계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녀들이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다면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타인(남성들)에 대한 적개심과 그녀들 자신이 깊이 가지고 있던 신념을 억누르면서 법으로 달려간다. 정말 갑작스럽게 그녀들은 법을 인정하고, 그것이 ‘적용되기를’ 바란다. 인민 발의에 의한 이 법과 더불어 그녀들은 또한 국가 장치들이 그녀들의 권리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녀들은 소란스럽게 스스로의 처벌을 통한 보상의 원칙을 만든다. 신좌파의 가장 ‘반-체계적인’ 부분이 초(hyper)-체계적이 되었다.
그러므로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이 주제에 관한 신좌파의 다른 명백한 모순들이 침묵 속에서 넘어가는 반면에, 여성들에 대한 이 모순은 신좌파들 사이에서와 다른 부분들 내에서 폭풍과 같은 논쟁을 생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희생자의 연약함과 장치들의 억압 사이에서 양립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순진한 숙고를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덜 단면적인 반영은 법-기만적인 사회와 국가의 형태에 의존하는 ‘개혁주의자’와 ‘혁명적인’ 분파들 안에서 가능할 것이다. 법을 파괴하기 위해 법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차이를 드러내는 사회적 기능과 응답을 통해서 법을 소용없게 만들기.
아마도 남성들의 성적 일탈과 그것의 억제, 억압 사이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용감하게 사고할 수 있는 시간도 무르익은 것 같다. 감옥이라는 억제력이 정말 모호한 심리적 메커니즘들이 지배하는 이 영역에서 어떤 영향력을 갖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Gortyna의 시대에서처럼 여성들이 그들의 침해된 성적 자유에 대한 ‘배상’을 원하는 것이 가능한가? 감옥이라는 수단으로? 다른 방법은 없는가? 우리는 다른 방식을 상상하는 것조차 시작할 수 없는가? latina의 재판에서처럼. 우리는 상처와 처벌 사이의 ‘교환’이라는 생각을 무효라고 선언하는 원칙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인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가치, 문화적 원칙, 법의 자유로운 사용을 선언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는 또한 이것을 뛰어넘을 수 없는가? 여성들은 거부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시작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가?’라고. 우리는 마땅히 겸손하게 [선언, Il manifesto]에게 이것은 비록 항상 성공하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언제나 고수하고자 노력해왔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가 여성들이 그들 안에 가능할 수 있는 집합적인 관계에 관한 다른 생각의 싹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을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위선적인 것이다.
중요한 진전
레아 멜란드리
우리의 정치적 실천으로 사랑과 폭력, 합의와 강요, 행복과 불행을 딱 잘라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밝혀내는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다행히도 사랑이라는 쟁점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엄숙한 회의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 법에 관하여 내가 우려하면서도 약간은 우스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당신이 물리적 폭력(구타, 강간 등)과 사랑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나는 로마냐에 있는 거대한 소농 가족 출신인데, 우리 가족은 정욕에 의해 다스려졌고, 가족 내에서 구타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모두가 다른 모든 가족구성원(며느리, 시누이, 남편, 아내, 조부모 등)을 때렸고, 거의 모든 식구가 함께 자다시피 했기 때문에, (구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서로 성관계를 가졌다. 당시 나는 여성들이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문을 품을 여지가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확실히 그들이 이것에 동의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동의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 나는 서로를 때리거나 정사를 나눌 때나 똑같이 분노하며 어쩔 수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정치적 실천을 통해 얻어낸 중요하고 독창적인 진전은 우리가 남성-여성간의 복잡한 관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랑이 우리가 지금 아는 대로인 한, 사랑과 폭력, 동의와 강요,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법은 여성이 남편과의 성적 관계를 동의할 때와 동의하지 않을 때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의’라기 보다는 ‘이용할 수 있음’(availability)이라고 말하는 편이 낳을 것이다. 아무도 여성이 남편에게 자신을 이용하도록 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는 외압과 폭력행위가 동반된다. 모든 형태의 남녀관계(모자, 남편-부인, 어떤 관계이든)는 이러한 여성의 이용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종종 여성들을 완전히 고갈시키는 지점에 도달하기도 한다.
여성의 신체를 동의 없이 폭력적으로 사용한 것이 명백한 강간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자아 상실과 에너지 소모와 함께 달콤하고 바람직해 보이는 것- 아들과 어머니가 갖는 관계 - 끝없는 기다림, 가족이 집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도 함께 보아야 한다. 나는 단지 여기 있는 다른 여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타인의 생존에 집중하는 여성들의 삶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항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종종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들- 예를 들어 가족들의 애정, 아이들-을 놓치곤 한다. 내가 보기에, 두 성간의 관계에 관한 복잡한 이슈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여성들의 신체를 폭력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논의할 수 없다. 남녀관계에서 여성의 이용가능성은 여성의 생존 조건을 한계 짓는다. 여성 자신의 삶은 그녀의 아들의 삶과 동일시되며, 그녀가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힘과 역량은 아들 혹은 남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더 이상 사랑 받지 않을 때 경험하는 외로움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인식, 비참함과 인간적인 나약함. 역사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여성들의 ‘동의’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 법은 이런 것들을 양으로 측정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하루 밤은 좋고 하루 밤은 싫다.)
남을 살리기 위한 삶: 여성들은 자신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바꾸어 내야 할 가장 극적이고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몇 년간에 걸친 정치적 실천조차도 이러한 인식에 있어서의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늘날의 많은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과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관계(성적인 관계를 포함하여)를 맺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여성들이 자신의 생존 공간으로서 남성, 아들 혹은 아버지에게 집착한다는 사실은 논쟁거리도 안 된다. 이 두 가지 사실의 간극은 고립으로부터 탈출하고, 생존하기 위해 여성들이 기대는 축은 여전히 똑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의 영역은 종종 섹슈얼리티의 영역과 분리되어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기로는 남성의 법은 항상 우리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따라다닌다.
이는 우리에게, 그리고 살인자나 강간범처럼 아버지의 법에 통합되는 데 문제를 지니고 있는 남성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형사사건의 사례처럼 보인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많은 여성들과 어머니들은 이런 것에 관한 경험을 가지 고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부적응자’ 혹은 ‘비행청소년’이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추방하려는 처벌규칙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그들의 행동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이후 그가 18살이 되면, 아버지와 자매들을 구타하는 강간범이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우리의 적으로 낙인찍는다. 나는 살인자나 강간범에게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는 한번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 남성들의 역사보다 훨씬 나에게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왜 여성들은 법제화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끼는 것일까?
나는 이 제안된 법률이 강간 센터의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이 센터에서 활동한 여성들은 다른 여성의 고통을 듣고, 조언해주는 등의 일에 매우 곤란함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여성들을 위한 150시간 코스의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나는 매일같이 고통과 학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궁금한 것은 왜 일부의 여성들이 여성의 종속에 관한 복잡한 문제들과 직면하여, 법이라는 수단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반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존에 대한 필요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실천이다.
기쁨과 자기파괴, 행복과 의존사이의 혼동은 우리의 삶에 극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어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상태이다. 우리가 아무리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심을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확인했다.
오직 여성들이 스스로의 의사를 표현하고, 밖으로 나올 때, 그들 자신이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이러한 의존의 사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법에 의지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뿐 아니라, ‘여성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줄 모른다’라는 사실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되는 무력감과 괴로움을 가져다준다.
결혼한 커플의 성생활에서, ‘권위’와 ‘사탕발림’으로 왜곡된 동의가 이루어졌을 때, 이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법 조항이 있다. 그러나, 사랑이 타인에 대한 완전한 헌신이 되었을 때, ‘사탕발림’과 사랑을 어떻게 분리해 낼 수 있는가? 만약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외로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임무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남성이 있다면 이 남성에게는 ‘권위’가 없는 것인가? 우리가 강간을 입증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권위’와 ‘사탕발림’을 통해 이루어진 복종을 법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성으로 하여금 이런 모순적인 방식으로 유대를 맺고 있는 남성을 비난하도록 만드는 것은, ‘물론 여성이 매저키스트이고 고통을 즐긴다면, 법은 그들을 억압하는 이들로부터 해방시켜 자율성을 얻도록 작성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게 말도 안되며 여성들 스스로가 이를 거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PSSP
오늘날, ‘민주적’여성들의 운동
리디아 캄파냐노
오늘날, 민주적인 여성들의 운동은 성폭력에 관한 법률 초안을 만들고 있다. 여성이 법률을 이용하는 문제에 관해 재논의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지난 토요일 Milan에서 열린 반성폭력 법 논쟁에서, 한 여성은 반성폭력법 입법을 위한 서명운동을 잠시 보류하고 모든 의제들을 보다 충분히 토론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회합의 주최측은 이러한 초안이 많은 노력과 고통을 통해 만들어 졌다는 점을 존중하고 이해해 달라며, 이 여성의 요구를 잠재웠다. 나는 ‘존중’이란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성이 새로운 법 초안을 함께 만드는데 왜 그렇게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걸까?’ 하는 의문을 품어보았고, 그 다음에는 ‘그런 노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러한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열과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번 토요일에 이것은 충분히 발언되지 못하였다. 반성폭력법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여성들은, 이것이 여성운동이며 모든 조직들이 이름을 걸고 청원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에 우리가 낙태에 관한 법률을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우리 중 다수는 운동이 스스로 법 제정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법률의 성격을 띠는 어떤 것도 낙태 혹은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에서 드러나는, 감축할 수 없는 성적 모순을 해결하거나 혹은 공론화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성해방운동(MLD)에 속한 여성들은 서명운동을 계속할 것을 분명히 주장했고, 이렇게 해서 이 사업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제되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여성의 이름, 혹은 현존하는 여성운동 조직의 약칭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운동은 이제 더 이상 소규모도 아니고, 점차 위축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커피한잔을 앞에 놓고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거나, 고상하게 취미 삼아 무의식과 자의식을 훈련하고, 글을 쓰고 분석하는 일도 아니다. 이제 많은 조직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행동하고 법을 만든다. 왜 그들이 그것을 해야 하는가를 걱정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법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우리가 근본적으로 가져온 정치적 사고이다. 나는 이것을 어느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 모든 주제들을 근본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어떤 조직에 속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그들이 페미니스트일 뿐 아니라 여성의 일부임을 잊지 않았었다. 작은 조직에서 일하건, 혹은 다소 유명한 그룹에서 일하건 간에 상관없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항상 그래왔듯이,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각기 다른 여성들, 다양한 방법으로 의식 고양을 꽤하는 여성들 사이에 소통의 채널을 넓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각기 다른 위치와 사고방식을 공통의 것으로 모아낼 수 있을까? 토요일에 벌어졌던 논쟁에서 이 문제는 너무도 빨리 지나쳤고, 모두 정치적으로 익숙한 방식으로 중재와 타협을 택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포기하였다. 예를 들어 로마에서 활동하는 집단인 Pompeo Mango의 여성들은 강간범에 대해 더욱 엄격하게 처벌하고자 하는 바램을 포기해야했다. 여기에 더하여 강간범에게 사형을 내리기를 원하는 여성들도 이를 포기하고 이 법률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여성들도 자신의 환상에 근거하여 결국 타협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서명이다. 서명을 통해 여성들이 함께 하고 소통하며 ‘인민’이 되어갈 것이라 여겼다. 우리는 대중적 발의를 통한 입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인민’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 법의 지지자들은, ‘법률이 비민주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민주적인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렇게 답하는 사람들도, 강간이 ‘인격을 침해하는 범죄’이고, 따라서 국가의 처벌이 자동으로 뒤따르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특정한 정의 - 민주적 여성, 비민주적 여성-는 남성에 대한 정의와 같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감옥을 통해 강간이 쇄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엇이 민주적인가? 여성들이 더 이상 그녀들의 남편과 아들의 강간의 공범자가 되지 않고, 대신 사형을 요구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이러한 정치적인 판단에 직면하거나, 우리가 반성폭력법안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 양당간의 결정을 해야 할 때, 이 법의 지향, 환상, 그리고 선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걷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이는 여성의 정치를 한 쪽을 택하기 위해 무시하는 것이 ‘민주적’이라는 가장 오래된 관습이다. 좀더 명확히 이해하자면 이는 부르주아지의 방법이다. 다른 나라들의 여성운동의 일부는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통합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우리를 ‘계급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난해왔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이러한 정치적 언어에 대한 순종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과 심원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의 공통점을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무엇이 여성들을 하나의 법안을 만드는데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는지 묻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직 누구도 이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기에, 이 법안을 발의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상상해 보려 한다.
나는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이 아닌, 좋고 흥미로운 환상들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법이나 공적인 영역 속에서 명예, 도덕 혹은 가문으로 상징되지 않는다는 환상 말이다. 법은 스스로를 중요하고 특권적인 위상, 즉 심각한 수준의 사고의 변화를 가져와 결국 그것이 바로 대중의 생각이 되는 그런 위상에 두려는 경향이 있다(실제로 나는 이를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은 아마도 이러한 환상이 법률 조항으로 변하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만약, 예를 들어 여성이 ‘법에 의해’ 시민이 된다면, 그리고 새로 태어날 아이도 시민이 될 것이라면, 만약 어머니가 그 아이를 죽였을 때(역주- 낙태를 의미함), 이는 더 이상 가벼운 형벌로 처리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살인과 범죄로 불릴 것이며 그리고 구금되어야 하는 날들은 증가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원한 것인가? 우리는 어떠한 법도 모자간의 관계를 단순히 두 인간 사이의 관계로 정리하는데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20년이 아니라 단 1년이라도 이러한 여성을 가두어 둔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알고 있다. 토요일에, 나는 이러한 범죄를 공동체들, 상담소들, 피임기구들 등을 통해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회에서 여성의 상태의 진보에 대해 너무도 낙관적이라면, 나는 왜 이 ‘진보’에서 배제된 자들 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필요한지, 그리고 사실상 왜 그들을 변화의 길에 세우는 것을 말 그대로 불가능하게 하고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이 여성이 ‘시민’이 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의 의미란 말인가? 혹은 여성이 법에 의해 통제되고 범죄, 범인, 그리고 처벌을 확인하기 위한, 그러면서도 상처받은 성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은 절대로 아닌, 재판이라는 형태로 공적인 강간을 당하는 것이 그녀를 좀더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인가? 범인에 대한 본보기로서의 형벌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모든 종류의 범죄 예방방법을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강간범이라는 한 인간이 스스로를 많은 종류의 무지, 무관심과 불행들로 복잡하게 변명을 할 수 있다고 느끼며,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우리 모두가 판사와 경찰이 되지 않는 한 성폭력은 범죄로 인식되기 어렵다.
물론 내가 도덕성, 가문의 이름, 권위적 명예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멍에가 법 조항에서 사라진다면 매우 기쁠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새로운 희망을 담아 입법부와 대면하고 있는 여성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그들에게 일어났던 변화들에 대한 조사 작업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한 예들을 제시한 이유는 이 법안이 이러한 희망들을 훨씬 넘어서고 있으며, 사실 법원을 통하여 성적 대립의 모든 폭력들을 없애거나 제한하거나 혹은 철폐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법은 형벌을 너무도 많이 강요한다. 도대체 왜? 나는 누가 ‘운동’을 하고, 누가 안하고에 대해 말했던 토요일의 발언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 여성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게 만들고, 강인함을 보여주기 위해, 지배 권력의 장치들을 활용하고자 하는 그녀들의 소망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지난 수년간의 경험을 통한 변화된 우리의 전략이 가지는 힘과 그 강인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은 타인들이 오랫동안 평가절하하고 정치적인 절멸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가치를 드러내 보이는 방식이다. 그 타인은 비단 강간범들만이 아니다.
강간은 끔찍한 범죄다.
로산나 로산다
강간은 끔찍한 범죄다. 여성들은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겪어왔다. 여성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러나 국민발의를 통한 반성폭력법 입법은 단순히 처벌과 비난이라는 구래의 생각을 다시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성해방운동’이 추진하고 있는 국민발의를 통한 반성폭력법에 관해서 여성들의 운동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쟁이 있다. 논쟁은 특히 몇 가지 측면에 중심을 두고 있다: 사건이 누구의 증거를 통해서도 법원에 제기될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피해를 당한 당사자의 증거를 통해서만 제기될 수 있는가. 첫 번째 경우에, 사회는 스스로를 피해 여성의 직접적인 대표가 되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어떤 방식은 소송을 제기하거나 하지 않을 피해여성의 결정을 침해하기도 한다; 두 번째 경우에 이미 심각하게 상처 입은 여성이 또 다시 책임을 져야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 책임은 그녀에게 너무 과도하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법이라는 도구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사회적 기반을 바꾸고 위와 같은 문제점을 유발한다. 하지만 그 뒤에는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범죄와 일탈, 처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이다. 범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처벌되어야’만 하는가? 누구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 모두는 60년대와 70년대 사이의 운동의 근본적인 특성 중 하나가 법과 국가 장치들, 특히 사법적이고 탄압적인 장치들이 편파적이고 중립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한다. 감옥 체계를 만들어 낸 고발, ‘정치’범들 뿐만 아니라 ‘평범한’ 범죄자들에 대한 전쟁(그들 모두가 ‘정치범’이었다는 의미에서), 사회가 ‘교육과 처벌’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누군들 잊을 수 있는가?
이런 저항의 물결은 유죄의 개념 전체를 문제삼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견고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유죄는 역사적이고 상대적인 판결 뿐만은 아니고, 실제로 사람들이 승인하고 그것을 위반한 모든 것을 공격하는 질서로부터 일탈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질서는 언제나 지배 계급이나 집단이 유지하는 권력 모델에 부합한다. 이 모델에서 일탈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무(無)-통합’을 표현한다. 유죄인 사람들에게 쌓이는 혐오는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보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첫 번째 논쟁이었고, 따라서 ‘일탈’이 단지 입법적 권력의 질서에 관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논쟁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누군가가 길을 건너면서 나를 칼로 찔렀다면, 그 행동의 복잡한 이유와 동기를 추적하는 것이 당연히 가능하지만, 상식적인 질서는 ‘과실’이라는 사고 속에서 이 사실을 부인하고, 지위를 떨어뜨린다. 하지만 ‘나의’ 이유, 내 자신의 불가침성 또한 동시에 부인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1968년 사고의 대혼란의 시기에, ‘일탈’의 문제는 자유의 ‘집합적인’ 원칙, 즉 규범, 법, 개인의 자유에 부과된 한계, 그리고 사회적 조직의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새로운 운동들의 토론 속에서, 모든 사회 규범의 핵심에 놓여있고, 모든 법의 기초가 되는 이런 문제들은 열려진 문제로 남아있거나 단순히 회피되었다. 이후, 그것은 사회적 메커니즘과 연관이 되었다. 사회적 메커니즘은 반드시 국가이거나 법적인 것일 필요는 없었고, 집합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기능을 하고, 동시에 일탈한 사람들을 포괄할 것이었다. 그/녀를 공적인 제재라는 비현실적 관념과 도덕적 매도 양자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그/녀를 회복시키고, 복구시킴으로써. 이것은 해방적이고, 비-억압적이며, 문화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계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의 한계는 국가와 법적인 개입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다른 ‘사회 형태’, 즉 ‘인민 공동체’, ‘각각의 차이에 대한 보호’와 같은 말일 수 있는 ‘모두에 대한 보호’를 사고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법적 권력의 추상성과 억압적 비-중립성에 대한 비판이 옳았다는 것도 사실이며, 나에게는 반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1968은 근본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간다. 규칙들이 혹은 다른 어떤 것이 ‘평등’의 집합체를 구성할 수 있거나, 구성해야만 하는가 - 그리고 사회에서 평등과 해방을 위한 운동은 그 자체로 어떠한 실천을 고안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아마도 깊은 사회적 변화의 운동 속에서 삭제될 때까지 해결되지 않을 운명을 가진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신좌파의 비판은 그 문제를 다루었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 문제가 떠맡은 것을 해결한 것 같다. 사실, 규칙 없는 사회를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면, 처벌 없는 사회를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심지어 감옥이 없는 사회를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처벌로부터 일탈을 사실상 분리시킬 수 있게 되었다. 부과된 처벌은 야만스러운 보상이거나 ‘처벌을 통한 재교육’이라는 의미 없고 앙심 품은 가설이다. 비록 우리가 사회는 항상 타인에게 위험한 사람들 일부를 생산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등급, 방어 혹은 억제의 체계가 반드시 처벌로 남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강조되고 있는 논쟁을 잠시 제쳐두면―즉, 하나의 다른 조직과 각기 다른 가치들이 많은 수의 ‘범죄들’을 막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의 사회가 ‘범죄’를 복수 당한 것이라기보다는 상처받은 것으로 사고할 수 있고, ‘보상받아야 할’ 무엇인가로 범죄를 사고하는 것을 그만 둘 수도 있다. 만약 그 범죄가 모두의 유산과 가장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격의 경우가 아니라면. 사회는 일탈자와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에게 더 이상 복수를 짐 지우지 않고, 그에게 일종의 집합적인 계약을 수용하는 것으로 이끌기 위해서. 처벌의 원칙은 이것이 투옥이라는 방법으로 진행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방법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말이다. 만약 다른 길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면, 이것이 급진적으로 금이 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쉽다. 그러므로 일탈에 관해서는, 특히 투옥과 좀 더 일반적으로는 입은 상처와 배상 사이의 ‘교환’에 관해서는 ‘보복적인’ 요소들에 대항한 신좌파의 투쟁은 나에게는 여전히 전적으로 유효하고, 사회적 조직의 실행 가능한 형태들에 가는 길로 이끌 수 있다.
이런 변화를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던 이 같은 신좌파가 절대 실천적이지 않았다는 점은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현재 다시 일어나는 법의 형식주의에 대한 열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법의 형식주의는 우리의 사법적 친구들 중 일부가 역사를 ‘법의 파괴’와 ‘다음 법의 제정’ 사이의 일련의 갑작스런 움직임, ‘공식적인 보증’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다른 지점에서 이 논쟁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휠씬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신좌파는 감옥에 대해 극구 비난해왔지만, 그 자신이 그것을 실시했다. 신좌파는 부르주아 정의를 비난했지만 그것에 의지했었다. 신좌파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접근에 반대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스스로는 그것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누구에 대한 감시와 처벌인가? 물론 인민의 적이고, 인민은 탄압 받는 사람들, 방어 받지 못하는 사람들, 아이들, 여성들, 측근들에 의해 비난받는 동료들이다.
이것에 관해 새로운 것은 없다. 신좌파는 단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나리오를 예행 연습한 것이다. 우선, 우리가 모두 공산주의자가 될 때까지, 탄압은 유용한 도구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신좌파가 이렇게 할 때마다, 신좌파가 억압적 국가장치로서 국가의 가치를 되살림으로써 그것의 최초의 지위와 모순되었고, 반면에 전체적으로 신좌파가 계속해서 ‘과도기적 국가’가 우리의 것만큼이나 복잡한 사회의 혁명적인 공식을 진전시켜야만 한다는 복잡한 문제는 피해왔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은 오늘날 특히 여성들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모순이다. 모든 새로운 운동 중에서, 여성들의 운동은 가장 단호하게 반-제도적이었고, ‘법의 추상성’에 가장 적대적이었으며, 개인의 차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주창자였다. 여성과 정치 사이의 관계는 어렵다. 여성과 국가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이고, 여성과 정의(justice) 사이의 관계는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괴한 점이 있다. 마치 ‘일탈’은 오로지 남성들에게만 연관된 남성적 틀 안에서 사고될 수 있는 것처럼, 남성들의 정의(justice)는 여성들을 그다지 많이 범죄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의 약함은 특별한 종류의 약함이고 그래서 그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폭력의 수준으로부터 비교적(정말 비교적) 보호받고 있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고, 그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으며, 그들을 특별히 위험하거나 해로운 기능에서 보호하는 법률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의 남-녀 관계에 있어서 그들은 누구보다 더 폭력에 노출되어있다. 이것은 불평등한 권력의 관계이다.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 수준에서 여성은 약하다(혹은 그녀들은 더 약하도록 키워졌다). 그녀들은 강간을 당할 수도 있고, 혹은 어쨌든 맞을 수도 있다. 그녀들은 더 가난하고, 덜 조직되어있다. 그녀에게 가해지는 이 세 가지 불평등 중에 첫 번째(신체적)것이 가장 야만적이고, 여성들은 저항하기 시작한다. 저항을 위해서 그녀들은 셀 수 없는 사회적 금기를 극복해야한다. 그리고 그녀들을 침묵 속에서 고통받게 했던 사회적 금기들을 극복했을 때, 여성들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하고, 그녀들을 덜 이해하며, 그녀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남성들이 만든 정의(justice)를 처리해야만 한다.
그래서 법에 대한 이런 의존은 다른 누구보다 여성들에게 더욱 어렵다. 그것은 탄압받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같은데, 그들은 법정을 경계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녀들이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다면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타인(남성들)에 대한 적개심과 그녀들 자신이 깊이 가지고 있던 신념을 억누르면서 법으로 달려간다. 정말 갑작스럽게 그녀들은 법을 인정하고, 그것이 ‘적용되기를’ 바란다. 인민 발의에 의한 이 법과 더불어 그녀들은 또한 국가 장치들이 그녀들의 권리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녀들은 소란스럽게 스스로의 처벌을 통한 보상의 원칙을 만든다. 신좌파의 가장 ‘반-체계적인’ 부분이 초(hyper)-체계적이 되었다.
그러므로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이 주제에 관한 신좌파의 다른 명백한 모순들이 침묵 속에서 넘어가는 반면에, 여성들에 대한 이 모순은 신좌파들 사이에서와 다른 부분들 내에서 폭풍과 같은 논쟁을 생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희생자의 연약함과 장치들의 억압 사이에서 양립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순진한 숙고를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덜 단면적인 반영은 법-기만적인 사회와 국가의 형태에 의존하는 ‘개혁주의자’와 ‘혁명적인’ 분파들 안에서 가능할 것이다. 법을 파괴하기 위해 법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차이를 드러내는 사회적 기능과 응답을 통해서 법을 소용없게 만들기.
아마도 남성들의 성적 일탈과 그것의 억제, 억압 사이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용감하게 사고할 수 있는 시간도 무르익은 것 같다. 감옥이라는 억제력이 정말 모호한 심리적 메커니즘들이 지배하는 이 영역에서 어떤 영향력을 갖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Gortyna의 시대에서처럼 여성들이 그들의 침해된 성적 자유에 대한 ‘배상’을 원하는 것이 가능한가? 감옥이라는 수단으로? 다른 방법은 없는가? 우리는 다른 방식을 상상하는 것조차 시작할 수 없는가? latina의 재판에서처럼. 우리는 상처와 처벌 사이의 ‘교환’이라는 생각을 무효라고 선언하는 원칙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인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가치, 문화적 원칙, 법의 자유로운 사용을 선언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는 또한 이것을 뛰어넘을 수 없는가? 여성들은 거부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시작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가?’라고. 우리는 마땅히 겸손하게 [선언, Il manifesto]에게 이것은 비록 항상 성공하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언제나 고수하고자 노력해왔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가 여성들이 그들 안에 가능할 수 있는 집합적인 관계에 관한 다른 생각의 싹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을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위선적인 것이다.
중요한 진전
레아 멜란드리
우리의 정치적 실천으로 사랑과 폭력, 합의와 강요, 행복과 불행을 딱 잘라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밝혀내는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다행히도 사랑이라는 쟁점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엄숙한 회의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 법에 관하여 내가 우려하면서도 약간은 우스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당신이 물리적 폭력(구타, 강간 등)과 사랑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나는 로마냐에 있는 거대한 소농 가족 출신인데, 우리 가족은 정욕에 의해 다스려졌고, 가족 내에서 구타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모두가 다른 모든 가족구성원(며느리, 시누이, 남편, 아내, 조부모 등)을 때렸고, 거의 모든 식구가 함께 자다시피 했기 때문에, (구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서로 성관계를 가졌다. 당시 나는 여성들이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문을 품을 여지가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확실히 그들이 이것에 동의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동의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 나는 서로를 때리거나 정사를 나눌 때나 똑같이 분노하며 어쩔 수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정치적 실천을 통해 얻어낸 중요하고 독창적인 진전은 우리가 남성-여성간의 복잡한 관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랑이 우리가 지금 아는 대로인 한, 사랑과 폭력, 동의와 강요,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법은 여성이 남편과의 성적 관계를 동의할 때와 동의하지 않을 때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의’라기 보다는 ‘이용할 수 있음’(availability)이라고 말하는 편이 낳을 것이다. 아무도 여성이 남편에게 자신을 이용하도록 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는 외압과 폭력행위가 동반된다. 모든 형태의 남녀관계(모자, 남편-부인, 어떤 관계이든)는 이러한 여성의 이용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종종 여성들을 완전히 고갈시키는 지점에 도달하기도 한다.
여성의 신체를 동의 없이 폭력적으로 사용한 것이 명백한 강간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자아 상실과 에너지 소모와 함께 달콤하고 바람직해 보이는 것- 아들과 어머니가 갖는 관계 - 끝없는 기다림, 가족이 집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도 함께 보아야 한다. 나는 단지 여기 있는 다른 여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타인의 생존에 집중하는 여성들의 삶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항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종종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들- 예를 들어 가족들의 애정, 아이들-을 놓치곤 한다. 내가 보기에, 두 성간의 관계에 관한 복잡한 이슈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여성들의 신체를 폭력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논의할 수 없다. 남녀관계에서 여성의 이용가능성은 여성의 생존 조건을 한계 짓는다. 여성 자신의 삶은 그녀의 아들의 삶과 동일시되며, 그녀가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힘과 역량은 아들 혹은 남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더 이상 사랑 받지 않을 때 경험하는 외로움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인식, 비참함과 인간적인 나약함. 역사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여성들의 ‘동의’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 법은 이런 것들을 양으로 측정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하루 밤은 좋고 하루 밤은 싫다.)
남을 살리기 위한 삶: 여성들은 자신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바꾸어 내야 할 가장 극적이고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몇 년간에 걸친 정치적 실천조차도 이러한 인식에 있어서의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늘날의 많은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과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관계(성적인 관계를 포함하여)를 맺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여성들이 자신의 생존 공간으로서 남성, 아들 혹은 아버지에게 집착한다는 사실은 논쟁거리도 안 된다. 이 두 가지 사실의 간극은 고립으로부터 탈출하고, 생존하기 위해 여성들이 기대는 축은 여전히 똑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의 영역은 종종 섹슈얼리티의 영역과 분리되어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기로는 남성의 법은 항상 우리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따라다닌다.
이는 우리에게, 그리고 살인자나 강간범처럼 아버지의 법에 통합되는 데 문제를 지니고 있는 남성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형사사건의 사례처럼 보인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많은 여성들과 어머니들은 이런 것에 관한 경험을 가지 고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부적응자’ 혹은 ‘비행청소년’이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추방하려는 처벌규칙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그들의 행동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이후 그가 18살이 되면, 아버지와 자매들을 구타하는 강간범이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우리의 적으로 낙인찍는다. 나는 살인자나 강간범에게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는 한번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 남성들의 역사보다 훨씬 나에게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왜 여성들은 법제화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끼는 것일까?
나는 이 제안된 법률이 강간 센터의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이 센터에서 활동한 여성들은 다른 여성의 고통을 듣고, 조언해주는 등의 일에 매우 곤란함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여성들을 위한 150시간 코스의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나는 매일같이 고통과 학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궁금한 것은 왜 일부의 여성들이 여성의 종속에 관한 복잡한 문제들과 직면하여, 법이라는 수단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반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존에 대한 필요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실천이다.
기쁨과 자기파괴, 행복과 의존사이의 혼동은 우리의 삶에 극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어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상태이다. 우리가 아무리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심을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확인했다.
오직 여성들이 스스로의 의사를 표현하고, 밖으로 나올 때, 그들 자신이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이러한 의존의 사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법에 의지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뿐 아니라, ‘여성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줄 모른다’라는 사실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되는 무력감과 괴로움을 가져다준다.
결혼한 커플의 성생활에서, ‘권위’와 ‘사탕발림’으로 왜곡된 동의가 이루어졌을 때, 이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법 조항이 있다. 그러나, 사랑이 타인에 대한 완전한 헌신이 되었을 때, ‘사탕발림’과 사랑을 어떻게 분리해 낼 수 있는가? 만약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외로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임무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남성이 있다면 이 남성에게는 ‘권위’가 없는 것인가? 우리가 강간을 입증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권위’와 ‘사탕발림’을 통해 이루어진 복종을 법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성으로 하여금 이런 모순적인 방식으로 유대를 맺고 있는 남성을 비난하도록 만드는 것은, ‘물론 여성이 매저키스트이고 고통을 즐긴다면, 법은 그들을 억압하는 이들로부터 해방시켜 자율성을 얻도록 작성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게 말도 안되며 여성들 스스로가 이를 거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