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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11.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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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송명관 | 회원, 기자단
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사회주의의 기원에 대해 막연한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를 배울 때를 돌이켜 보자.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3․1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뒤, 1920년경 일본유학생들로부터 유입된 사상이 그 기원이라는 정도로 밖에 알고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혹은 좀 더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수용된 급진이념 정도... 하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이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다. 물론 사회주의는 우리의 내부에서 탄생한 이념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한국에 들어오자 마자 곧바로 내재화될 수 있었던 까닭은 분명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이상향’에 대한 오래된 전통, 성리학을 대체하는 혁명적 정치이념을 제시한 동학, 그리고 이로부터 폭발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반봉건적 계급투쟁을 지적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사회주의 수용의 내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꼽히는 『한성순보』에도 사회주의는 빈번히 등장하였으며, 이후 10년 뒤 발간된『독립신문』이나『대한매일신보』에도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의 동향이 매일 보도되었다. 심지어 남미의 베네수엘라 사회당에 관한 보도도 있었는데,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사회주의의 이념이 민중들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강한 자극제가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최초의 사회주의자 그룹은 급진적 민족주의 운동에서 분화되었다. 이에 대해선 ‘신민회 좌당’ 인사가 한인사회당 결성을 주도했다는 이동휘의 말에서 구체적 분화 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한말의 혁명적 민족주의단체 신민회는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모태였다. 혁명적 민족주의 진영의 좌우분열을 거쳐 그 좌파가 사회주의자로 전화하는 경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대한제국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한 사람들은 그 길을 걸었다. 또 하나의 흐름이 있는데, 이는 일본에 유학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신지식인 층들이었다.

혁명적 국제정세와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출현

모든 일에 적합한 때가 있듯, 한국 사회주의 운동 역시 열혈청년들의 노력만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한 혁명적 국제 정세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3․1 운동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보문서에는 “조선독립시에는 재산을 평등하게 나눠줄 것이므로 빈곤자로서는 무상의 행복이 될 것이라고 칭하면서 독립의 실현을 기대하는 정황이 있다.”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로부터 이미 민중들 사이에 한국독립 이후에 건설될 신국가를 소비에트 러시아와 같은 유형의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인사회주의자들’을 먼저 주목해보자. 1918년 2월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만주로 피신한 ‘신민회의 주요 당국자’ 회의가 열리는데, 그 동안 내부적으로 격화되어온 입장차가 한인 무장부대의 러시아 내전 개입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결국 좌우분열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4월 28일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당인 한인사회당이 창립됨으로서 민족해방운동은 새로운 전화를 맞이한다.
한인사회당은 민족주의 단체였던 대한국민의회에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 내부에서 끊임없는 사상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대립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는 통합과정을 거치는데, 상해임시정부에서 조직통합에 대한 약속을 위반함으로서 대한국민의회는 커다란 내부 논란을 겪게 된다. 한인사회당은 ‘대중획득론’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이 고립을 자초하지 않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단지 부르주아 정부라는 이유로 보이코트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한인사회당은 대승적 관점에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한국민의회 내 소수였던 부활그룹은 독자적으로 부활을 선언하고 한인사회당과 결별하게 된다. 이것이 이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씨앗이 되었다.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 그룹의 등장

1919년 11월경 이르쿠츠크는 백위파 콜차크 정부의 지배 하에 놓여있었다.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군사혁명단체를 조직하고 러시아공산당에 연락하면서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때 조직된 한인공산당은 ‘러시아공산당 내 고려부’, 즉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 현위원회 산하의 민족별 지부라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은 설립 당초부터 민족단체들과의 공동사업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르쿠츠크파의 특징으로서 한국혁명의 성격을 사회주의혁명으로 간주하며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비혁명세력이라고 이해한 소산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상해파 한인공산당’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게된 주된 원인이었다. 이들은 1920년 7월 이르쿠츠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를 결성하였고, 이는 이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탄생의 모태가 된다.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연대하여 대규모 항일전쟁을 수행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한인 무장부대를 편성하여 국내로 진공해 들어가는 것을 자신의 전략적 방침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또한 민족부르주아지 정부였던 상해임시정부를 명시적으로 부인하였다. 이는 이들이 민족통일전선을 일관되게 부정한 결과였으며, 이로 인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한인사회당과 대립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전략적 차이를 안게 된다.
1920년 8월 극동공화국 관내의 혁명정세는 급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극동공화국과 일본군과의 ‘곤고타 정거장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자바이칼주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이 퇴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서 세묘노프 백위파 정부는 기반이 급격히 붕괴되었고 10월 21일 자바이칼주의 수도 치타 시가 함락된다. 그리하여 극동지역으로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었던 ‘치타장벽’이 해소되게 된다.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는 이때를 한국혁명으로 다가가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했으며 사업의 중점을 극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결국 극동파견원들이 ‘극동’에서 지지세력을 획득하는데 성공하면서 ‘이르쿠츠크 콤그룹’의 태동이 시작된다. 이 지지세력이 바로 대한국민의회 부활그룹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대한국민의회 부활그룹은 일본군에 의한 연해주 참변 이후 아무르주로 활동공간을 옮기는데, 한인사회당과 연계를 갖고 있었던 아무르주 한인공산당과 또 다시 반목을 겪게 된다. 대한국민의회 지도부는 이 시기에 이르러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였고 대한국민의회 내부에 공산당 세포를 조직하였는데, 마침 극동으로 파견되었던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 전권위원’들과 제휴하게 된다. 이로서 이 두 세력의 연합으로 인해 ‘이르쿠츠크 콤그룹’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두 개의 창당대회

1920년 말부터 치타, 블라고베션스크, 상해 등지를 무대로 표출된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내분은 21년 1월에 분기점을 맞는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이르쿠츠크에 설치된 것이다. 그리고 이르쿠츠크 동양부와 수년 전부터 깊은 관계에 있었던 슈마츠키가 극동주재 코민테른 대표자로 임명되게 된다. 이로서 저울추는 이르쿠츠크파로 급격히 이동하게 되었고, 상해 한국공산당과 연계를 갖고 전한공산당 설립대회를 추진 중이었던 ‘치타 극동국 한인부’는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 이들은 슈마츠키의 지시에 거듭 불복하며 예정된 당대회와 전한군사대회를 추진하는데 결국 이들이 추진하던 모든 계획은 물리적으로 제지당하고 만다. 그뿐 아니라 슈마츠키에 의해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는데, ‘반혁명’ 혐의로 지도부가 체포되었으며 치타 한인부 자체도 해체 당하고 만다. 또한 이들과 보조를 같이 했던 ‘아무르주 한인공산당’도 재조직 과정을 거치게 되고 기존 당원 중 2/3가 당적을 박탈당하게 된다.
주도권을 장악한 ‘전로한인공산당’은 1921년 5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를 치르면서 명실상부한 코민테른의 한국지부로서 ‘전한공산당’을 조직한다. 하지만 이 대회는 상해파 한인사회당 참가인사들을 억누른 채 성립한 대회로서, 반발한 상해파 한인사회당 역시 독자적인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를 개최하고야 만다. 상해파 대회에는 러시아에 있는 한인단체들은 거의 참석을 못하였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상당수 참가하는데 여기서 동아시아 공산주의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동양총국’이라는 기관을 조직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성공적으로 조직되었고 ‘사회혁명당’이라는 국내 조직과의 연계하여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도 성공하였으며 만주와 일본 내에서도 지방회를 건설하였다.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

1920년 10월 전후 아무르주 영내로 한인 빨치산 부대들이 집결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일본군의 ‘간도출병’으로 인해 심각한 시련에 처한 한인 무장부대들은 대부대 편성의 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계획의 주도권은 아무르주에 위치한 두 한인 단체가 쥐었다. 하나는 대한국민의회였고 다른 하나는 아무르주 한인공산당이었다. 정치 방면에서 서로 갈등을 벌이고 있었던 이 둘은 군사 방면의 경쟁을 거치면서 격화되었고 이것은 곧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립으로 전화되었다.
앞서 말한 ‘치타 한인부’는 이 당시 군대통일안을 가장 먼저 실행에 옮겼는데 ‘전한의병대회’를 열어 최고군사위원회인 ‘전한임시군사위원회’가 1921년 1월에 선출된다. 이 기관의 지도 아래 통합된 한인 연합부대는 ‘대한의용군’ 또는 ‘사할린의용대’로 불리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과 대립하였던 대한국민의회 역시 자신들의 주도하에 군대를 통일하기 위해 이르쿠츠크로 향하였다. 그 당시 이르쿠츠크에서는 또 하나의 최고군사기관이 탄생하는데,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주도 아래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된다. 극동비서부와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는 자신의 지도 아래 한인 무장단체들을 통일한 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극동공화국은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회피할 목적으로 극동공화국내 한인 무장부대를 해산시킬 것을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에 요청한 상태였는데,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한국혁명의 지위를 결코 낮게 보지 않았기에 오히려 반대로 한인들의 군사활동을 강화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극동공화국과 빚어진 정책논쟁에서 극동비서부가 승리하였지만, 조건부 승리였다. 그래서 한인 무장부대를 신속히 결속하고 그 연합부대로 하여금 속히 극동공화국 관내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은 ‘고려혁명군정의회’는 당연히 ‘대한의용군’의 지지를 받기 힘들었고 더욱이 대한국민의회 간부들의 상당수가 지도부를 구성함으로서 이들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아무르주 한인 사회주의자들과 군사지도들에게 심한 반감을 샀다. 결국 1921년 3월 두 개의 군사기관이 출현했으며 한국사회주의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의 과정에서의 반목과 갈등은 군수통수권을 둘러싸고 또 다시 격하게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저울추는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영향력을 점차 강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의용군’ 사령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행동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군대 개편안에 반대하여 극동비서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북간도로 회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독자적인 군사행동은 결국 유혈충돌일 일으키고야 만다. 군정의회는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 작전에 착수하는데 극동공화국 자유시 수비대의 막강한 화력에 고려혁명군이 가세하여 대한의용군의 주둔지로 진격한 것이다. 대한의용군 1400명 중 40%가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었고 60%가 체포되었다.
대한의용군 무장해제 사건은 국내외 한국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건의 진상을 둘러싸고 많은 억측과 소문이 나돌았다. 자유시사변으로 인해 대한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신망은 급격히 실추되었다.

사회주의운동의 지각변동

1921년 말 1922년 초에 한국 사회주의운동은 지각변동을 겪었다. 운동의 중심이 해외로부터 국내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운동의 주된 형태가 무장투쟁에서 대중투쟁으로 전환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혁명적 정세가 이때부터 퇴조기로 전환한 데서 찾을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발발과 더불어 고양된 한국의 혁명적 정세는 3년 정도 지속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1921년 말에서 22년 초, 태평양 일대의 이권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을 외교적 수단으로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워싱턴회의’가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인정한 채 끝남으로서 외교론에 치우쳤던 민족주의자는 물론 실력양성론자 조차 커다란 실망에 잠기게 된다. 단지 사회주의자들만이 전혀 아무런 기대를 갖지 않았기에 이러한 타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결정적 투쟁의 시기는 가고 장기간의 고난에 찬 준비기가 도래하였다. 민족주의자에게나 사회주의자에게나 준비기에 걸맞은 새로운 전략과 전술이 요청되었다.
혁명적 정세의 퇴조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전술전환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독립전쟁론은 이제 현실성을 상실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그 대안을 대중 속에서 찾았다. 3․1운동의 용광로 속에서 날카로운 정치의식을 획득한 거대한 대중의 역동성이 한국 국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광범한 군중을 조직화, 의식화하여 혁명투쟁의 주인공으로 나서게끔 사업을 하는 일이 바로 독립전쟁론을 대체한 대중운동론이었다. 그리하여 운동의 중심이 국내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1921년 말 1922년 초부터 국내 사회주의자들 속에서 기존의 양대 공산당을 배격하는 거센 힘이 분출되었다. 바로 그 힘이 지각변동을 초래한 진정한 원인이었다.
이르크쿠츠파 공산당은 1921년 6월에 있었던 자유시사변의 업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 혁명운동의 정화라 할 수 있는 4000여 명의 독립군을 무력충돌로 이끌게 한 책임을 져야 했다.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은 동족상잔의 추악한 범죄자들로 지목되었다. 이 낙인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상해파 공산당 역시 모스크바 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그 정책노선이 공산당의 것인지 의심받을 정도로 우경화 됐다는 비난도 받았다. 결국 상해파 공산당은 모스크바 자금을 탐내어 제멋대로 공산당을 참칭한 사이비 공산당으로 지목되었다. ‘사기 공산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별명이 되었다.
1922년 1월 마침내 해외 양파의 주도성에 반대하는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행동에 착수했다. 1922년 1월부터 6월까지 발생한 일련의 상해파 배격운동은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었던 상해파 공산당 국내부의 영향력을 여지없이 깨뜨리고야 만다. 대중조직에 있었던 상해파 간부들이 대거 축출되었고 반상해파 운동의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혹은 ‘통일조선공산당 창립대회 소집준비위원회’가 결성된다. 이들의 ‘중립당’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상해파 뿐만 아니라 이르쿠츠크파 국내세력도 강한 배척을 받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속하고 있던 대중조직에서조차 축출 당하고야 만다. 중립당은 해외 양파(兩派)의 파벌영향력 약화에 성공한 데 힘입어 1922년 6월경에는 서울청년회, 노동공제회, 노동대회 등을 통해 국내 합법 공개영역의 대중운동 속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에 기초해서 중립당은 자신의 위상을 통일조선공산당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자신의 위상은 ‘통일조선공산당 창립대회 소집준비위원회’가 되며, 각도에는 도위원회를, 각 군에는 세포단체를 결성하기로 결정한다.
이리하여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첫 국면은 막을 내렸다. 1917년부터 1921년까지 5년 동안 지속된 이 국면에서는 국내외 광활한 지역에서 한인사회주의단체들이 활화산처럼 분출되어 나왔다. 수많은 단체들 속에서 두 개의 중심이 형성되었다. 창립대회 개최지를 빌려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라 불리던 두 고려공산당은 당권, 군사통수권, 혁명론과 정책노선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다. 그러나 두 공산당의 전성기는 1921년 말 1922년 초를 고비로 하여 저물었다. 이제 ‘해외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국내 대중운동 속에 뿌리박은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다. ‘각파 공산주의그룹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마치며

워낙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그 줄거리를 소개하는 데에만도 발제문 수준의 내용이 되고야 말았다. 3번 정도 다시 읽었던 같은데, 저자의 치밀한 연구노력과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사회주의운동 초기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숨결이 나를 내내 감동시켰다. 불과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역사이다. 하지만 그 역사 속에는 좌절과 고뇌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해방을 향한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비극적 서사의 클라이맥스”가 있었다.
그럼 우리가 80년여 전 벌어졌던 5년의 역사 속에서 되돌아 볼 것은 무엇인가? 전한공산당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나는 자조직 중심주의에 치우친 인간의 탐욕만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 레닌의 전위당 모델은 대단한 성공사례였고 국제사회주의운동의 대세였다. 전위당 건투는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라도 자임해야 할 임무였다. 하기에 그들의 ‘진정성’을 몇 가지 과오로 재단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전위당을 자임했던 다수의 ‘진정성’들이 충돌할 때, 그것이 어떻게 검증되고 조정되어야 했는가를 묻는 것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의 출발점이라고 생각된다. 그 질문의 결론은 당대 이후에 역사 속에서 평가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자극을 후대에게 전달하였다. 결국 그 ‘진정성’의 충돌이 ‘양파 배격운동’을 겪으면서 조선공산당(중립당)으로 귀결되었음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지금 21세기, 격동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새로운 사회주의운동의 전망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 시대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어떤 방식으로 검증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회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역사는 결코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기에.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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