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1 여름.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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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 전반기 대북정책과 통일운동

햇볕정책, 통일인가 분단관리인가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실장
[남북한의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역사와 평가]
① 한국전쟁 이후 냉전기의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1960~1987 (2019년 여름) 
② 노태우 정부 전반기, NL·PD 논쟁의 태동 (2019년 가을) 
③ 한소 수교와 남북기본합의서, NL·PD 논쟁의 격돌 (2019년 겨울) 
④ 1990년대 한반도 정세와 통일운동 개괄 (2020년 봄) 
⑤ 김영삼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 (2020년 가을) 

김영삼 정부 시기 남북관계를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 전과 후로 나눠서 살펴보듯이, 김대중 정부 시기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정상회담 전까지 정부 수준의 관계 진전은 매우 더디게 보였으나,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부, 민간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급진전하는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집권 마지막 해, 2002년에 대북송금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불거지고, 켈리 미국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2차 핵 위기가 터져 나오면서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다시금 위기에 직면한다. 먼저 정상회담 이전, 김대중 정부 전반기의 남북관계와 통일운동의 전개 상황을 살펴보자. 


1. 김대중 정부 전반기 대북정책: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전까지 

 
1997~1998년 시점에 남과 북은 각각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다. 김대중 후보는 아이엠에프(IMF) 위기 와중에 집권에 성공했다.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미 북한은 경제난과 식량위기를 뜻하는 ‘고난의 행군’ 중이었다.  

김대중 당선자의 취임 직전인 1998년 2월 19일에 실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대통령의 우선 과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 중 압도적 비율인 81.1%가 ‘경제위기 극복’을 꼽았다. 그다음으로 부정부패 척결(11.2%), 사회복지 등 삶의 질 향상(3.1%), 지역갈등 해소(2.4%), 남북관계 및 통일문제(2.2%)를 지목했다. 그만큼 국민적 관심사가 IMF 경제위기에 전적으로 모여 있었고, 남북관계는 코앞에 닥친 시급한 관심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심지어 남북관계 및 통일문제는 지역갈등 해소보다 순위가 더 낮게 나왔다. 김대중 당선자는 국정 이념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제시했는데, 즉 남북관계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대선 다음날인 1997년 12월 19일, 김대중 당선자는 기자회견에서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시기에 형성된 기본 틀, 곧 남북기본합의서, 북미 제네바합의, 4자회담을 이어나간다는 방침을 밝혔다. 즉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4대국 미일중러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겠으며, 4자회담을 앞으로도 성과 있게 추진하겠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북한 경수로 지원도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 남북한 직접대화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필요하다면 김정일 총비서와 정상회담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으나, 상당히 신중한 톤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대북 3원칙을 제의했다.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다, 셋째,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이다. 여기서 통일 3원칙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대북 3원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 초기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맡았던 임동원 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는 의도적으로 통일정책 대신에 대북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현실적으로 통일은 먼 훗날에 이루어질 일이고, 당장 남북관계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를 다루는 정책은 통일정책보다 대북정책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통일정책이라는 표현이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 의사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므로 피했다고도 했다.  

기실 김대중 정부는 공식적인 통일방안을 1995년 아태평화재단에서 제시했던 ‘3단계 통일방안’이 아니라 노태우 정부에서 수립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으로 삼았다. 임동원 씨는 노태우 정부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수립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는 노태우 정부의 통일방안이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씨의 통일방안을 많이 수용했기 때문에 실제로 큰 차이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은 △공화국 연합제에 의한 남북연합 단계(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을 위한 제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권한이 매우 적은 연합기구), △연방제 통일 단계(1연방과 2지역의 자치정부로, 연방정부는 외교군사 분야에서 전면적 권한을 갖고 주요 내정에서도 주요한 권한을 갖는다), △완전통일 단계(1국가 1정부)로 요약된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적 접근법은 사실 우스갯소리인 ‘코끼리 냉장고에 집어넣기’처럼 말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실현되기 어려운 과정이다. 

먼저 평화공존, 평화교류를 통한 ‘남북연합 단계’에 이르는 길도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남북기본합의서의 사문화 과정을 보더라도 이미 분명히 드러났다. 2012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3주기 추도식 당시 문재인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꿈꾸셨던 국가연합 또는 낮은 단계 연방제 정도는 다음 정부 때 정권교체를 통해 반드시 이루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는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맞붙게 될 18대 대선을 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승리했으나, 박 대통령이 탄핵당한 후,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제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은 현 정부 내에서, 국가연합이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둘째, 설사 예측할 수 없는 어느 미래에 남과 북이 상징적인 수준의 국가연합 창설을 합의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2단계, 곧 연방제 통일 단계로 넘어갈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의 안에서 연방제 통일 단계는 북한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다당제와 자유선거를 허용하는 것이 그 핵심적 전제조건이 된다. 따라서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북한의 개혁, 개방이라는 과도기가 설정된다는 말이다. 북한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일지 전혀 예상할 수 없으므로, 그런 변화가 가능할지, 설사 가능하더라도 그 과도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다. 

따라서 임동원 씨의 설명을 따르면, 1단계 연합 단계든, 2단계 연방 단계든 최소한 통일의 초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므로, 일단 평화공존과 평화교류에 집중하며, 이러한 정책을 통일정책이 아니라, 대북정책이라고 부르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임동원 씨의 현실론에 비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2012년 발언은 오히려 더 비현실적, 주관적 희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통일방안 문제는 2000년 6·15공동선언을 다루며 다시 언급할 것이다.) 

물론 김대중 정부가 통일정책이 아니라, 평화공존, 평화교류를 목표로 한 대북정책을 추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예컨대 과거 장준하가 자처했던 ‘통일지상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통일에 소극적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실제로 남북정상회담 전까지 통일운동 측에서 이런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1) 1998년 정경분리와 상호주의 원칙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2월 25일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특사 교환을 제안하고, 3월 1일 4자회담의 성공을 촉구한 것처럼 김대중 정부는 노태우 정부부터 형성되어 온 기본 틀 위에서 대북정책을 펼치겠다는 입장을 거듭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이전 정부와 달리 강조했던 바는, 남북의 정치적 관계의 악화와 무관하게 경제협력을 추진한다는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상호주의 원칙이다. 김대중 대통령 본인의 말을 빌리면, “정경분리 원칙에 따른 남북 간 거래나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간섭하지 않을 것이나, 국민세금을 기초로 한 예산이 필요한 남북거래(비료 지원 등)에서는 반드시 상호주의를 견지할 것”이다. 

이러한 기조를 반영하여, 민간지원이나 기업의 경제협력 사업에 대한 정책도 속속 발표되었다. 3월 18일 민간 차원의 대북지원을 활성화하는 조치가 나왔는데, 대북지원과 관련된 방북을 허용하며, 이벤트성 모금행사나 언론·기업의 협찬·협력사업 방식의 지원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4월 10일에는 강인덕 통일부장관이 남북경제협력 사업에서 기업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승인기준을 완화하고, 절차를 간소화하며, 대북투자 업종·규모에 대한 제한을 폐지하고, 남북협력기금을 지원하는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러한 정경분리 원칙이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은 북미 제네바합의를 통해서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큰 틀에서 해소되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북한 핵개발 문제가 난맥에 빠지면 정경분리 원칙은 실제로 실행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대북정책이 초기에 큰 기대를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는 현실을 상기해보라. 어쨌든 제네바합의라는 호조건에서 정경분리 원칙은 좀 더 실현성이 있어보였다.

그렇지만 정부의 상호주의라는 원칙은 곧 시험대에 올랐다. 1998년 4월 11~17일 북경에서 열린 남북당국대표회담이었다. 이때 북한은 “남측의 비료 지원은 북남관계 개선의 첫걸음이 되며, 부대조건 없는 지원은 화해, 단합 도모, 북남대화의 새장을 여는 데 기여할 것”이라면서 비료 지원 문제를 우선 결정한 후, 이산가족을 포함한 상호관심사를 논의하자고 했다. 반면 남한은 1995년, 김영삼 정부 시기 쌀 지원 후에도 남북관계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국민이 일방적 지원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비료 지원 문제는 이산가족 문제, 기본합의서 이행 문제 등 남북관계 개선과 연계하여 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4월 13일 남북대화에서 비선조직을 활용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김 대통령에 따르면, 1997년 12월 대선이 끝난 직후 북한이 은밀한 거래를 위해 개인적인 접촉을 희망한다는 신호를 보냈으나, 청와대는 남북대화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남북당국대표회담이 진행되는 중에 이런 사실을 밝힌 것은, 공식적인 대화채널에서의 상호주의 원칙을 북한이 수용해야 한다는 한국 대통령의 의사 표시였을 것이다. 

결국 당국대표회담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한국 정부는 회담을 통해서 남북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상호주의 원칙을 “북한 측에 분명히 인식시켰다”는 점이 그래도 성과라고 주장했다. 반면 북한은 상호주의 원칙에 강력히 반발했다. 북한 《로동신문》은 “국가 간 관계에서나 통용되는 상호주의를 북남관계에 끌어들이고 (…)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다” “상호주의는 주면 받아야 한다는 장사꾼의 논리이며, 속물근성의 표현으로서 언어도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런 연유로 김대중 정부의 집권 첫 해, 남북정부 간 공식대화는 거의 진척이 없었다. 

반면 남한 기업의 대북사업은 점차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500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방북한 사건이다. (이른바 ‘소떼 방북’) 이때 현대그룹은 북한과 금강산 관광사업 계약서를 체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98년 11월 금강호가 북한을 향해 출항을 시작하며 금강산 관광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9년 1월 13일에는 현대가 금강산 지구에 건설할 온천, 골프장, 스키장, 해수욕장, 호텔에 대해 시설별로 30~50년간 장기 독점권을 갖기로 합의했다. 

한편 정주영 회장의 방북 중인 1998년 6월 22일, 북한 잠수정 한 척이 속초 동쪽에서 그물에 걸린 채 발견되어 한국군에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예인, 인양된 잠수정에서는 모두 9명의 승조원과 공작원이 피를 흘리거나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었다. 내분이 발생했고 공작조가 자살을 감행했다는 추정이 나왔다.) 북한은 훈련 중 조난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국방부는 침투 작전 행위로 규정했다. 한국 정부는 정전협정과 남북기본합의서 합의 위반이며, 북측의 시인과 해명, 재발 방지 약속을 요구했다. 북한이 침투 사실을 부인하고 사과를 거부했기 때문에 시신 송환이 어려울 수도 있었으나, 한국 정부는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1998년 7월 3일 9구의 시신을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다. 6월 24일 김대중 대통령은 북 잠수정 사건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은 일관되게 추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는 정경분리와 상호주의 원칙을 내세우며 대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렇지만 북한은 현대그룹과의 금강산 관광 사업은 수용하면서, 상호주의에 입각한 남북정부 간 테이블은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북한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허용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시험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1998년에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2008년 7월 11일에 북한 초병의 총격에 의해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단됐다. 2001년 이후 주춤하던 관광객 수는 2003년부터 육로관광이 시작되면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육로관광의 가격이 해로관광에 비해 절반 정도로 싸졌기 때문이다. 이후 금강산 관광객 수는 대폭 증가해 2005년 6월에 누적 관광객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으며,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감행한 2006년을 제외하면 계속 증가해 2007년에는 34.5만 명을 기록했다. 2008년에는 상반기에만 20만 명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 개성관광객 수는 시범관광이 실시된 2005년에는 1,484명에 불과했으나, 본격적으로 관광 사업이 시작된 2007년에는 7,427명으로 증가했고 2008년에는 10.3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 


2)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이슈의 등장 

한편 1998년 8월 31일, 미국 국방부는 북한이 사정거리 2,000km에 달하는 다단계추진 미사일 발사에 처음으로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북한 동해안 대포동(무수단리의 과거 지명) 미사일 시험발사장에서 발사되었기 때문에 ‘대포동(1호) 미사일’이라고 불렸다. 이때 북한의 발사체는 일본 열도 상공을 지나 1,646㎞를 날아 태평양 공해상에 떨어졌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이에 격렬히 항의했다. 반면 북한은 9월 4일 중앙통신을 통해 “다계단 운반로켓으로 첫 인공지구위성(광명성 1호)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9월 14일 루빈 미 국부무 대변인은 “북한이 아주 작은 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리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를 미국의 우방국과 해당 지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발사체를 미사일이라고 부르든, 인공위성 운반로켓이라고 부르든 간에, 북한이 중거리 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북한의 인공위성, 또는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기로 한국, 미국, 일본의 공동대응이 개시되었다. 예를 들어 한미일 3국의 ‘대북정책협의회’가 구성되었다.
한편, 1998년 8월에 북한 금창리 지하시설 핵의혹도 제기되었다. 8월 17일 《뉴욕 타임스》의 보도는 그 출발점이 되었다. 미국은 현장 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강하게 반발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찰스 카트먼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를 대표로 한 네 차례의 북미회담 끝에, 1999년 3월 뉴욕에서 협상이 체결되었다. 북한은 미국의 금창리 방문을 허용하고, 미국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1999년 5월 실무대표단이 금창리 지하시설을 조사한 결과, 핵시설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3) 1999년 상호주의의 실질적 전환 

집권 2년차인 1999년에 들어 김대중 정부의 상호주의는 점차 ‘느슨한’ 상호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월 5일 정부 고위당국자는 북의 의사를 존중해서 남북당국 간 회담을 비공개라도 추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1월 6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상호주의를 ‘신축적’으로 적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비공개 접촉’ ‘신축적 상호주의’라는 방향 전환에 따라, 1999년 6월 3일, 남북 비공개 접촉에서 차관급 남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1998년의 엄격한 상호주의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남측이 먼저 북한에 비료 20만 톤을 제공하고, 남과 북은 6월 21일부터 차관급 당국회담이 개최해 이산가족 문제를 비롯한 상호관심사를 논의한다는 게 합의였다. 따라서 이런 순서라면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우려는 실제로 현실이 되었는데, 6월 15일 서해상에 교전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이를 ‘1차 연평해전’이라고 부른다.) 남한은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이 명백한 영해침해이자 도발행위라고 규정했고, 북한은 남측의 도발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며, 남측 인사의 평양방문과 접촉을 제한, 중지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6월 20일 북한은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 씨가 감시원에게 귀순을 권유했다며 억류했고, 6월 22일 현대는 금강산 관광 중지를 발표했다. (북한은 6월 25일 관광객을 석방했다. 금강산 관광은 8월 5일, 45일 만에 재개되었다. 또한 9월 정주영 명예회장이 다시 방북해 서해공단 개발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우려한 대로, 대북 비료 지원 합의 후, 이제 이산가족 문제 등 남측의 관심사를 논의해야 할 차관급회담이 6월 22~26일, 7월 1~3일 열리긴 했으나 결국 결렬되었다. 

종합해보면, 북한이 금강산 관광의 중단을 유도하는 조치를 취하긴 했으나, 얼마간의 시간을 끈 후 관광도 재개하고 서해공단 개발 문제도 진척시키며 경제적 실익을 계속 챙기고자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면서 북측이 정부 간 대화를 계속 어렵게 끌고 가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소망하는 남측의 조바심을 불러일으키고 상호주의 원칙을 점점 더 허물어뜨리려 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1999년에 당국자회담은 큰 진전이 없었지만, 상호주의를 엄격히 적용하고 비밀접촉을 하지 않는다는 기존 방침을 바꿈으로써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2002~2003년 대북송금 이슈로 불거졌을 것이다. 
 

4) 북미미사일회담의 진전과 페리 보고서  

반면, 1999년 9월 7~12일 베를린에서 열린 북미고위급회담에서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유예하고 미국은 대북경제제재를 완화하기로 합의했다. 9월 17일 클린턴 대통령은 ‘적성국교역법’, ‘수출관리법’, ‘무기수출통제법’에 의해 규정된 물자 수출입, 금융거래, 투자, 항공기·선박 운항 분야의 제재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테러지원국, 인권침해국, 공산국가에 대한 제재라든가,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관계법에 따른 제재, 적성국교역법의 제재 중 북한자산 동결은 계속 유지되었다.) 12월 14일 일본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 후 취했던 제재, 즉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 중단, 대북 식량 지원 동결의 2개 항을 해제했다. 

한편 1999년 9월 15일 이른바 ‘페리 보고서’가 의회에 제출되었다. 1998년 8월 북한의 지하 핵시설 건설 의혹이 불거지고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강행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페리에게 한미일 3국의 대북한 정책을 총체적으로 검토하여 대책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 후 10개월 만에 미국 의회에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페리의 의회 보고는 몇 달 전부터 미루어졌던 것이므로,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곧 미국이 앞으로 본격적인 북미협상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페리 보고서는 스스로 이중경로 전략(Two-Path Strategy)이라고 이름을 붙인 포괄적 접근을 통해서, 협상이라는 경로와 군사력의 증강이라는 경로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즉 협상이라는 첫 번째 경로를 통해서 “북한이 위협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압력”을 단계적이며 상호주의적인 방식으로 감축할 수 있다는 것을 협상카드로 삼아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페리보고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의 유보는 그 초기적 조건을 만드는 일이며, 이에 북한이 동의한다면 미국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행사할 수 있는 무역 금지 조치들을 ‘가역적인 조건’으로 완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는 9월의 베를린회담을 통해 실현되었다.

두 번째 경로는 협상의 진행 경과와는 무관하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과 그 동아시아 동맹국들이 군사적인 조치들을 지속적으로 강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군사력의 증강은 북한의 의도나 행동에 대한 추측, 그리고 협상의 성공이나 북한의 내부적 변화에 대한 추측과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며, 만약 협상이 실패한다면 가시적으로 단계화할 것이다. 

일단 북미미사일회담의 최초 단계에서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대북경제제재 완화라는 교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이 시점에 페리 보고서의 미래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보였다.
 

 

2. 김대중 정부 전반기 통일운동 

 
1998~1999년,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 반응은 격렬한 반발이었다. 이 시기 북한의 《로동신문》 사설을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김대중 정부 대북정책의 주요 개념을 모두 전면적으로 비난했다. ‘화해와 협력’ ‘햇볕과 포용’ ‘상호주의’에 대해 ‘실천 없는 공염불’ ‘말장난’ ‘장사꾼의 논리’라고 응답했다. 둘째, ‘지금은 통일보다 교류가 더 중요하다’는 남한 정부의 접근방식이 반통일 정책, 통일거부 정책이라고 규정했다. 셋째,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이 제시하는 ‘북한의 변화’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표시했는데, “화해와 협력의 미명하에 우리를 개혁, 개방으로 유도하여 저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흡수통일하려는 모략 책동”이라고 보았다. 넷째, 정경분리, 상호주의, 안보·협력 병행 추진 방침이 북한 내부를 교란하거나 남북관계를 단절시키는 분열적 대립정책이자, 전쟁 도발을 유도하는 이중적 작태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격렬한 북한의 공식적 반응은 범민련, 범청학련과 같은 1990년대 통일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회고도 있다. 

“90년 후반이었다. 그날도 한총련 총노선 토론이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당시 한총련 총노선 기조는 ‘사대매국반통일 김대중 정권 퇴진’이었다. 나는 당시 김대중 정권을 ‘사대매국반통일 정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퇴진 투쟁에는 더더욱 동의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반대 견해도 언급했다. 사회자 선배는 이런저런 말들을 많이 이어붙였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토론’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김대중 정권은 사대매국반통일 정권이 맞다는 거였다. 주위 동료들도 손을 들고 발언을 하며 내가 잘못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김대중 정권은 그다음 해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뤄냈다.” 

이러한 회고가 말해주는 바가 무엇일까. 1990년대 NL의 주류적 흐름이 북한의 대남 선전기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발생한 혼란상일 것이다. 한국 정부가 사대매국반통일 정권이라고 몇 년간 격렬히 비난하다가,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선전기조가 다시금 바뀐다고 하여 어떻게 하루아침에 남한 정부에 대한 성격 규정을 철회하고, 투쟁 기조를 180도 바꿀 것인가. 아마도 유일한 방어논리가 있다면 북한의 뛰어난 영도력에 남한 정부가 굴복한 승리적 성과라는 식의 논리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더욱더 북한의 선전 기조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특정한 운동 집단 내부에서는 설사 그런 방어 논리가 작동할지 모르겠으나, 북한의 선전 기조에 따라 좌경노선과 우경노선 사이에서 곡예를 펼치는 운동이 남한 사회운동 전체에 미치는 혼란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1) 1998년 8·15 통일대축전의 무산 

1998년 김대중 정부에 들어 처음으로 열린 당국대표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후, 6월 10일 북한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위한 대축전’을 개최하자고 제안하고, 6월 15일 남측 85인의 정당, 단체, 각계 인사에 대한 초청장을 전달했다. 초청장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서리도 포함되었는데, 각각 국민회의 총재와 자민련 명예총재 명의로 정당 대표에게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 외에도 한나라당 조순 총재, 이회창 명예총재도 포함되었다. 북한은 이러한 사업을 진행할 조직으로 6월 10일 ‘민족화해협의회’(위원장: 김영호 사민당 부위원장)를 결성했다. 

북한은 정부 간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을 때, 새로운 해 초중반에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회의 명의로 대민족회의나 8·15 축전을 제안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나, 1998년의 경우는 6월 18일 김대중 대통령이 수용 의사를 시사하고 다음 날 강인덕 통일부 장관이 이를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이는 1990년과 비교해볼 수 있다. 1990년 노태우 정부는 북한의 범민족대회 제안을 사실상 수용했으나, 오히려 북한이 새로운 조건을 계속 제시하면서 결국 대회의 무산으로 몰고 갔다. 

그에 따라 남한에서는 6월 23일 축전 준비위 구성을 위한 실무회의를 열었고, 7월 4일 ‘민족의 화해·평화·통일을 위한 대축전 남측 추진본부’가 결성되었다. 9인의 상임공동대표는 강만길(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 구중서(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김상근(민족회의 감사,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김중배(참여연대 대표), 이우정(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대표), 이창복(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의장), 서영훈(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상임대표), 이세중(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한완상(북한옥수수심기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이었고, 집행위원장은 조성우(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집행위원장), 정책위원장은 이장희(경실련통일협회 운영위원장,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 원장)였다. 한 축으로는 민족회의와 전국연합, 다른 한 축으로는 경실련과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양상으로, 남한에서 8·15대회의 주도권이 확실히 바뀌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판 전체를 불태울 수 있는 불씨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첫째로, 북한이 6월 18일 북측 통일대축전 준비위 회의를 열면서 축전의 전제조건으로 국가보안법 철폐와 안기부 해체를 다시 내세웠다. 북한이 애초 6월 15일 축전을 제의할 때는 이에 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북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던 것인데, 북한의 새로운 제안으로 상황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1998년 6월 22일, 속초에서 좌초된 북한 잠수정에서 시신 9구가 발견되고, 7월 12일에도 동해 묵호동에서 북한 무장공작원 시신과 침투용 추진기가 발견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만약 남한 정부에서 북측에 이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통일대축전 개최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면 이는 성사될 수 없는 조건을 내거는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이 내건 조건이란 경우에 따라 대회 무산까지 염두에 둔 포석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 6월 19일 통일부 장관이 북한의 통일대축전 제안을 수용하면서도 이적단체, 즉 범민련과 한총련(범청학련)의 참여는 불용할 것이라고 표명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1997년 5월 15일 ‘5기 한총련’이 이적단체라고 판결을 내렸고, 5월 16일에도 범민련 남측본부가 이적단체라고 또다시 판결을 내렸다. (그 후 검찰과 경찰은 해마다 새로 구성되는 한총련 지도부에 대해 이적단체 해당 여부를 조사해 왔으며, 법원은 1997년 5기 한총련 때부터 2013년 11기까지 일관되게 이적단체로 판단했다.) 정부로서는 대법원이 이적단체라고 판결을 내린 범민련과 한총련이 정부가 후원하는 정당·사회단체협의회에 참가하는 것을 허용하기 어렵다고 판단을 내린 셈이다. (2000년 남북공동선언 이후에도 남북공동행사에서 범민련, 한총련의 참여 문제는 항상 진통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결성식을 앞둔 7월 3일 범민련 남측본부는 통일대축전 남측추진본부에 범민련의 ‘조직적인’ 참여를 보장하고 공동본부장과 집행위원회에 범민련 인사를 포함할 것을 요구했다. 통일대축전 남측추진본부는 범민련과 한총련 문제로 매우 고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7월 4일 결성식에서 채택한 규약 3조에서 남측추진본부를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에 동의하는 정당, 사회단체 그리고 개인을 폭넓게 망라하여 개인 자격으로 구성한다”고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즉 범민련, 한총련 인사가 ‘개인’ 자격으로 남측추진본부에 참가함으로써 실정법이 가하는 제약을 우회하려 했다. 이러한 방침은 정부와도 조율이 된 듯 보였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가 “범민련, 한총련을 즉각 사면하는 것은 초법적 조치로 삼권분립 정신에도 어긋나고 보수층을 설득할 논리도 부족하다. 축전에 ‘개인 자역 참여’까지 정부가 양보했으므로 축전 성사를 위해 당사자들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민련은 통일대축전의 틀 내에서 범민족대회도 개최하기로 남·북·해외 조직이 이미 결의한 상태였기 때문에 범민련의 ‘조직적’ 참여를 원했던 듯하다. 그에 따라 범민련 남측본부는 통일대축전 남측본부 결성식 시점부터 참여를 유보하기로 하였다.

셋째, 또 하나의 불씨는 ‘보수’ 단체와 정당으로부터 피어나왔다. 7월 6일 통일부는 남측 준비위 구성을 위해 정당, 민간단체 간담회를 주선했는데 4개 정당과 8개 사회단체가 참여했다. 간담회에서는 통일대축전 남측본부에 일부 ‘보수’ 단체와 정당이 배제되어 있어 대표성이 미흡하므로 새로이 결성될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가 새로운 추진본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반면 기존 추진본부에 참여하던 단체는 남측 추진본부의 성립절차, 목적, 참여의 폭을 볼 때 새로운 추진본부 설립을 불필요하며, 대신 추진본부 구성에서 빠진 정당을 고려해 ‘사회단체, 정당 협의회’를 구성하고, 그 성격을 북한 민화협에 대한 파트너로 삼자고 제안했다. 즉 추진본부는 민간차원의 8.15 통일대축전 사업기구이고, 새로이 구성될 정당, 사회단체 협의회는 북에 대한 상설적 민간 대화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통일대축전은 어떻게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는가. 통일대축전 북측준비위가 《중앙방송》을 통해 ‘범민련 남측본부 축전준비위가 제안한 7월 중순 실무회담을 수용한다’ ‘실무회담에는 범민련 남측본부가 주도적 역할을 견지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8·15 통일대축전의 실제 개최는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범민련 남측본부도 7월 15일 의장단 회의를 개최하여 범민련이 중심이 된 통일대축전 준비위 구성을 공식화했다. 7월 30일 범민련 남측본부는 ‘통일대축전 남측추진본부’가 범민련 남측본부, 한총련의 조직 참여를 보장하고 7월 21일 베이징에서 열린 통일대축전 북측준비위와 해외준비위, 범민련 남측본부 통일대축전준비위로 구성된 3자 실무회담의 합의를 수용할 경우 대등한 조직 대 조직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7월 28일 통일대축전 남측추진본부는 범민련 남측본부와 북측의 통일대축전준비위가 실무회담을 연 사실에 유감을 표시하고, 7월 31일 별도의 실무회담을 8월 7일에 열자고 북측에 제안했으나 무산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결국 통일대축전 남측준비위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세 개의 8·15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8월 13~15일 범민련과 한총련(범청학련)이 주축이 되어 서울대에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위한 대축전’과 ‘9차 범민족대회’를 열었고, 여기에는 3,000명 정도가 참여했다. 또한 8월 15일 판문점 북측지역에서도 남측의 한총련 대표 2명, 황선, 김대원과 문규현 신부가 참여한 가운데 통일대축전과 제9차 범민족대회를 열었다. 반면 8월 15일 통일대축전 남측추진본부(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대축전’을 임진각에서 진행했고,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은 ‘98 자주·통일 결의대회’를 장충단 공원에서 개최했다. 세 개의 대회는 세 개의 조직으로의 분화를 예고했다. 

1998년 8·15대회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남과 북이 공동으로 ‘민간’ 통일행사를 추진한다고 할 때, 남측에서의 파트너를 선택하는 권한을 궁극적으로 북한이, 더 정확히 말하면 북한 당국이 행사한다는 사실이다. 남측의 어떤 사회단체도 북한 당국에 대해 독립적인 북측의 사회단체와 독자적인 교류 사업을 진행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남측 파트너를 고를 수 있는 상황이 고착된다. 뒤에 다시 언급하지만, 그래서 민화협은 “북측이 남측 통일운동의 사정에 부당하게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2) 통일대축전 무산 이후, 통일운동 조직의 분화 

1998년 통일대축전의 무산은 통일운동 단체 간에 또다시 상흔을 남겼다. 8월 11일 대축전 남측추진본부는 ‘통일대축전 실무회담 무산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실무회담 무산 책임이 “우리들에게도 있으며, 북측에도 있고, 범민련·한총련 측에도 있다”고 하면서도 특히 범민련·한총련, 북측, 남측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즉 △남측본부는 범민련과 한총련이 참석할 수 있도록 개인별 가입이라는 지혜를 발휘했으나, 범민련과 한총련이 분열주의로 나아갔다, △북측은 오히려 범민련 남측본부가 구성한 대축전준비위와만 대화하겠다거나, 혹은 남측의 통일운동에서 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통일운동 내에서 분열을 확대하고 남측 통일운동 내부 사정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남측 정부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어 있는 북과 함께 대축전을 성사시켜 민족화해의 길로 나서자고 하는 마당에 ‘이적단체’인 범민련과 한총련 배제 방침을 발표하여, 북측의 날카로운 반응을 초래하고 축전 성사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다, 나아가 △범민련·한총련 문제를 포함해 민간 통일운동의 자율성에 맡겨야 할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개입하면서 축전 성사에 먹구름을 드리운 것이나, 여당이 지나치게 주도하려 함으로써 정당·사회단체 간 통일운동 협의체인 ‘민족화해협의회’에 관제어용 시비를 자초했다.  

반면 남측본부를 비판하는 반론도 있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상임대표 홍근수 목사는 “대축전 준비과정에서 정부 측의 범민련·한총련 배제 방침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개인자격 가입이라는 얕은 수를 쓴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평통사가 8월 5일 발표한 「통일운동의 혼선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서는 “한총련, 범민련 동지들에게 고언을 드린다”며 “남쪽 통일운동 진영의 취약성이나 역량의 정도를 무시한 점은 없는지, 3자연대와 연방제의 정당성이나 당위성에만 매여 그 탄력성이나 현실적 구체성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남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친북편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인식됨으로써 남쪽 대중들의 신뢰와 호응을 잃지는 않았는지 깊이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과 비타협적인 자세로 원칙을 견지하는 것은 고귀한 것으로 보이나 대동단결에는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즉 범민련과 한총련의 행동방식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한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홍 목사는 “민화협을 제외한 나머지 통일운동 세력들의 새판 짜기를 제안하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입장 차이는 곧 조직적 분화로 이어졌다. 
 
(1)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탄생 

통일대축전 남측추진본부는 1998년 9월 4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의 공식 출범으로 이어진다. (민화협 준비위원회는 8월 5일 결성되었다.) 민화협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회원으로, 정관에 “정당 및 사회단체로 구성되는 민간상설협의체”라고 스스로 규정했다. 출범 당시 정당 및 사회단체 59개가 참여했고, 초대 대표상임의장은 한광옥 국민회의 부총재였다. 민화협의 주축을 이룬 것은 한편으로는 정당,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의 여당 인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회의 소속 인사였다. 1기 상임의장 중 한 명으로 이창복(민족회의 상임의장), 1기 집행위원장으로 조성우(민족회의 집행위원장)가 참여했다.  

민화협 결성은 당시 여론으로부터도 큰 관심을 모았다. 《한겨레》(8월 13일)는 “축전 준비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민화협 준비위라는 통일단체들의 광범위한 연대기구가 결성된 것은 그나마 적지 않은 성과로 지적되고 있다. 비록 공동축전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노선과 활동방향이 크게 다른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한 목표 아래 결집한 것 자체가 민간 통일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다”라며 민화협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일보》(8월 11일)도 “자칫하면 보수단체는 구색이나 갖춰주는 가운데 일부 진보성향단체가 민화협을 좌지우지할 가능성마저 있어 당초의 균형성 원칙이 자칫 훼손될 우려도 있다”며, 그래서 “민화협이 대북교류를 위한 효율적인 민간통합기구가 되기 위해서는 이념적 성향이 다른 인사들이 균형적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초기단계에서는 정부가 적절하게 조정해주고, 보수적인 단체들도 통일운동은 일부 진보단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서 자체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한겨레》는 민화협의 결성 자체가 큰 의의를 지닌다고 보았고, 《조선일보》도 보수단체더라도 민화협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광옥 대표상임의장은 민주노총, 전국연합이 가입을 유보하고, 한총련과 범민련은 가입자격이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이들이 민화협의 취지에 반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변화를 전제로 한다면 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벽돌을 쌓듯이 차근차근 인내를 가지고 대화로 풀어가겠다”며 여지를 남겨두었다. 

반면, 기존 통일운동 흐름에서는 민화협을 강하게 비판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북미주조국통일동포회의’ 명의로 나온 글,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왜 민화협 준비위에 들어가서는 안되는가」라는 글이 널리 읽혔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쟁점을 제시했다. △김대중 정부는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이 10년 전에 만들어 놓은 북방정책에 덧칠한 햇볕정책을 내놓고 있다, 또한 민화협은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에 대한 동의를 가입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는데, △햇볕정책이 추구하는 북한의 개혁, 개방은 남북기본합의서와 양립할 수 없다, 나아가 △남북기본합의서는 조국통일 3대원칙에 비해 함량미달이다. 특히 남북기본합의서는 당시의 정세적 환경변화에 따른 남북의 ‘내용적 합의’라기 보다는 ‘절충적 봉합’에 가깝다. (정치, 군사적 문제에 대한 북한의 관심과 경제, 문화 교류에 대한 남한의 관심의 봉합.) 따라서 △민간통일운동세력은 민화협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새로운 상설적 협의기구를 조직해야 한다. 

실제로 범민련, 한총련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전국연합의 민화협 가입은 성사되지 않았다. 또한 1999년 민화협이 ‘7·4남북공동성명 채택 27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나, 8·15 행사의 일환으로 ‘남북정당, 사회단체 공동회의’와 ‘겨레손잡기대회’의 공동주최를 북측 민화협에 제의하였으나 이 역시 성사되지 않았다. 북측은 “민화협과는 일절 대화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98년 출범 이후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는 민화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출범 이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나온 논문은 민화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민화협은 남북교류협력 사업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진행한다는 측면에서 아젠다의 자율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북한과의 파트너십 형성에 대한 승인과 재정 지원을 정부에 의존하고 있으며, 조직의 주요 임원이 친정부적 인사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정부와 협력관계에 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정부정책에 대해 반대하거나 비판적 태도를 적극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정부는 남북교류협력 분야에서 북한당국과 직접적 접촉을 피하면서 정부의 정책을 민화협을 통해 대리 이행하게 한다는 점에서 정부와 민화협의 관계는 보완관계에 있다 (…) 재정적인 측면에서 민화협은 회원의 회비와 후원기관의 후원금 또는 찬조금으로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남북교류협력 사업의 경우 상당부분 남북협력기금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 남북교류협력에서 북한과 마찰이 발생할 때 6·15위원회가 대체로 북한의 입장을 수용하는 반면에 민화협은 대체로 남한(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두 조직은 북한과의 파트너십 성격이 상반된다 (…) 200개에 달하는 참가단체들 간 관계가 밀접한 것은 아니다. 조직 운영을 중앙조직이 주도하다보니 내부조직들 간의 네트워크는 중앙조직을 중심으로 한 망라형 조직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2)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결성

한편 1999년에는 민화협 외부에서 새로운 통일운동 협의기구를 구성하려는 흐름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3월 9일, 통일운동 협의기구 구성을 위한 대표자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는 민주노총, 전국연합을 비롯한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결정한 바는 △관변단체가 아닌 모든 민간 통일운동 단체가 참여하는 통일운동 협의기구가 필요하다, △이 협의기구에 범민련과 한총련이 결합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앞으로 구성할 단체의 성격은 연합단체가 아닌 협의체로 한다는 것이었다. 4월 20일자의 자통협 제안문은 민주노총(이갑용 위원장), 전국농민회총연맹(정광훈 의장), 전국빈민연합(양연수 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오종렬 상임의장), 국민승리21(권영길 대표), 평통사(문규현 대표) 명의였는데, ‘노농빈’ 대중조직이 주도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1999년 5월 7일 <민족화해 자주통일 협의회>(자통협)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을 주축으로 하고 전농, 전빈련, 평통사, 국민승리21, 청년진보당, 정치연대 등이 참여했다. 

자통협은 사무실을 전국연합에 두고 사무처와 상근자를 전국연합에서 주로 충원할 정도로 전국연합의 역할이 컸다. 1997년 전까지 전국연합은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를 지지했으나, 1997년 이후로 지도부가 새롭게 교체되면서 민족회의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과거 노선을 수정하여 자통협 건설을 주도하게 되었다. 전국연합의 새 지도부는 범민련과 협력관계를 맺는 데에도 그 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그렇다면 자통협과 범민련의 실제 관계는 어떠했나? 자통협 건설을 준비하던 3월 19일 준비소위에서 확인된 바, “범민련은 협의기구 구성에는 동의하나 참여는 유보한다”는 것이었다. 자통협 상임대표 중 한 명이던 홍근수 목사는 출범 당시 인터뷰에서 범민련과 한총련, “두 단체가 자통협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지향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사안에 따라 연대할 수 있다는 정도로 입장을 정리했다. 범민련의 경우 자통협이 범민련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자통협을 구성하는 주요 단체가 범민련과 협력관계를 맺는 데에는 적극적이었으나, 범민련이 자통협에 가입해야 하는가, 자통협이 범민련에 가입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갈등은 참으로 ‘심오한’ 쟁점을 담고 있었다. 남북해외가 연대하는 유일무이한 통일운동 연합체라는 범민련의 자기 위상 설정에서 볼 때, 범민련의 자통협 가입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범민련은 자신의 위상을 사수하는 것을 사활적인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양 단체의 협력관계는 순탄하게 풀려나갈 수가 없었다. 범민련이 스스로 설정한 위상에 따르면 자통협을 비롯해 다른 모든 통일운동 단체가 범민련에 가입해야 마땅했다. 
 

3) 1999년 통일운동과 ‘점 콤마 논쟁’

1999년 8·15 대회 개최를 두고 자통협과 범민련이 지속적인 갈등을 빚는데, 이것이 ‘점 콤마 논쟁’이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과 통일연대 사무처장을 맡았던 민경우 씨는 2008년 시점에 이 논쟁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필자가 감옥에서 통일운동의 역사를 정리하자니 숱한 논란과 분쟁의 기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96년 8·15 대회 명칭 논란, 99년 ‘점, 콤마 논쟁’(…) 2000년 ‘이범, 강범’ 논쟁 등등 (…) 85~90년 범민련이 만들어지기까지 문익환, 임수경, 전대협이 벌였던 장쾌하고 시대를 선도하는 역사적인 투쟁에 비해 위의 논쟁은 너무 초라하고 왜소하다. 나름대로 필요한 논쟁이었다고 자위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굳이 이를 정리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통일운동의 발전에 필요한 실천적인 교훈이 들어있지 않았고 대중에게 전해줄 무엇인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대부분 대의보다는 파당을 앞세운 소아적 태도 때문이고 이를 양산한 것은 써클주의였다. 

민경우 씨는 이 논쟁을 “정리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했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필자는 이 논쟁을 정리하고자 한다. 당시 양측 핵심인사가 아니라면 잘 알기 어려운 내용도 많을 터라, 필자가 파악하는 수준에서 정리해보겠다. 

자통협은 5월 7일 결성식에서 99통일대축전을 남북한과 해외동포에게 제안했고, 7월 3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남측추진본부’ 결성식을 열었다. 자통협은 “8월 통일행사를 반드시 단결된 하나의 대회로 치른다”는 방침을 정했고, 구체적인 방안은 “99통일대축전과 10차 범민족대회를 같은 장소에서 시차를 두고 치르되, 공동의 전야제 혹은 문화행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른다면 8월 통일행사의 명칭은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약칭: 범민족통일대축전)로, 즉 ‘콤마’(쉼표)가 들어가야 했다. 여기서 콤마라는 것은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분리된 별도의, 대등한 행사라는 것을 의미했다. 즉 자통협이 범민련 행사에 참여하고, 범민련이 자통협 행사에 참여하는 상호협력과 같은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물론 이럴 경우, 참가자들은 거의 동일한 행사를 왜 두 번 하느냐는 의문이 생겨 항의할 것이다. 사실 2000년대에는 연대체의 구조가 옥상옥으로 중복되면서 이런 겹치기 행사가 매우 많았다.) 

하지만 범민련 남측본부는 5월 19일 의장단회의에서 8·15대회 명칭을 ‘민족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10차 범민족대회.99통일대축전’으로 결정했고, 7월 4일에는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10차 범민족대회(약칭: 범민족통일대축전) 남북해외 공동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즉 범민련이 추진하는 대회의 명칭에는 ‘점’이 들어가는데, 이는 범민족대회가 전체 민족의 통일대회이고, 99통일대축전(자통협의 대회)은 그 대회에서 하나의 ‘부문’ 행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나의 대회를 둘러싼 양측의 입장 차이는 결국 통일운동의 대표체가 누구이냐를 둘러싼 조직 간 갈등을 담고 있었다. 이는 결코 간단히 해소될 수 없는 쟁점이었고, 복잡다단한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데 결국 끝까지 혼란이 이어졌다. 

8월 5일 북경에서 열린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민족대토론회’는 남측의 전국연합, 북측의 (북)민화협이 주관하고 범민련 남측본부와 북측본부 인사도 참여하여 열렸다. 그런데 전국연합이 공개한 공동결의문에서는 합의된 명칭이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범민족통일대축전)’라고 한 반면, 범민련이 공개한 공동결의문에서는 그 명칭이 ‘99통일대축전.10차 범민족대회(범민족통일대축전)’라고 했다. 놀랍게도, 동일한 토론회를 하고도 전국연합과 범민련이 완전히 상반되는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한편 범민련이 주도하는 남북해외공동준비위원회는 8월 12일, 대회명칭을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로 정했고, 특히 “점과 콤마를 모두 뺐음을 명확히 밝힌다”라고 범민련과 전국연합에 전했다. 그렇지만 점과 콤마를 모두 뺐다는 것이 함의하는 바조차도 각자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8월 10일 전국연합은 “올해 통일행사는 범민족대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결정한 반면, 민주노총 상집은 8월 대회를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범민족통일대축전)'의 명칭으로 치를 것을 결의했다. 그리하여 범민련이 주도하는 8·15 행사가 서울대에서 개최되고 자통협의 행사는 경희대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행사 직전까지 혼선이 지속되어, 결과적으로 서울대 행사에는 전국연합, 민주노총, 전농 등이 참여하고, 전국연합 내 경기동부연합만이 경희대 행사로 향하게 된다. 

범민련은 1999년 8·15 대회를 매우 승리적으로 평가했다. 당시 민주노총 통일위원장이었고 2005년부터 범민련 의장을 맡은 이규재 의장은 2018년 시점에 이렇게 평가했다. 

10차 범민족대회는 새통체(새로운통일운동체), 범민련 해체, 3자연대 부정 등 90년대 중반 이후의 여러 논쟁들이 종식되고 범민련과 범민족대회의 역사적 정당성이 확인돼 기억에 많이 남는다. 통일운동의 합법화·대중화를 명분으로 3자연대를 부정하고 범민련 해체를 주장하던 당시 개량적 흐름들이, 역대 대회 사상 최상의 수준으로 3자연대가 실현된 이 대회를 통해 일거에 정리됐다. (…) 특히 10차 범민족대회를 통해 조국통일 3대헌장을 민족공동의 통일 대강임을 확인하고 이를 폭넓게 합의했다.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 연방제 통일 방안,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은 조국통일의 근본원칙과 방도들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조국통일 3대헌장이라 정의하고 이를 범민련의 기본정치노선으로 확정했다. (…) 나창순 고문·범민련과 범청학련(한총련), 전국연합 등 6명이 방북하여 평양에서 진행된 범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했다. 남북해외성원이 모두 모이는 실질적인 범민족대회를 개최하면서 3자연대가 민족대단결의 생명이며 조국통일의 지름길임을 다시 확인한 행사였다. (…) 범민련의 주동적인 역할과 노력으로 범민족대회를 성공시키고 전국연합·자주연합을 비롯한 남과 해외의 통일운동단체들과의 연대연합이 결실을 맺었다. 범민련의 위상과 역할을 민족대단결의 구심체로 더욱 비상히 높여내고 통일운동의 주체역량을 한층 강화했다.

여기서 역대 대회 사상 최상의 수준으로 3자연대가 실현되었다는 말은 전국연합과 민주노총, 전농 등이 사실상 범민족대회에 참여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2일 민족회의가 발족할 때는 전노협과 전농이 참여하고(아직 민주노총 공식 출범 전이었다), 전국연합의 여러 지역조직이 참여했는데, 1999년에 이르러 상황이 역전된 셈이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기 때문인가. 1998년 민족회의가 민화협의 주축이 된 상황에서, 민화협을 ‘관변어용’ 단체로 강하게 낙인을 찍으며 민중단체가 민족회의로부터 이탈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1999년 통일운동의 단결이라는 명분으로 범민련과 자통협이 하나의 대회를 개최하려는 흐름이 형성되면서 범민족대회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희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1980년대 말부터 근 10년 동안 진행된 범민족대회를 주축으로 형성된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이 (민족회의의 주축을 이루는) 그 이전 세대에 비해 훨씬 더 범민족대회에 친화적이었던 것도 내적 요인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범민련은 1999년 대회를 통해 조국통일 3대헌장이 조국통일의 대강이라고 폭넓게 합의했다고 자평했는데, 여기서 조국통일 3대헌장이란 무엇인가. 이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6차 대회에서 제시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1993년 4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제시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을 말한다. 이를 두고 조국통일 3대헌장이라고 처음으로 부른 사람은 북한의 김정일 총비서로, 1996년 11월 24일 그가 판문점을 시찰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이 세 가지가 “조국통일의 3대 기둥, 3대 헌장”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평양방송이 1997년 1월 16일 보도했다. 

범민련 이규재 의장의 주장대로라면 1999년 범민족대회에 참여한 조직들이 북측의 통일방안을 아무런 여과 과정도 없이, 즉 ‘조국통일 3대헌장’이라는 북측의 표현 그대로 완전히 수용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과장이거나,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단지 북한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 외에도, 참가한 단체가, 예를 들어 민주노총이 내부 논의 과정을 통해서 이를 합의한 적이 있냐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자통협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99년 5월경 자통협이 결성됐다. 자통협은 결성하면서 남북해외에 99대축전을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해 7월경 범민족통일대축전 북측준비위는 자통협에 ‘범민족통일대축전이 아닌 다른 축전을 위한 실무회담을 하자는 것은 통일운동의 단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자통협은 이전 민족회의와는 달리 3자연대와 4대 정치적 과제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기본 정치노선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통협은 독자적인 3자연대를 하려고 했으며 범민련을 제쳐두고 통일운동의 대표세력을 자임하려고 했다. 결국 이것은 민족대단결의 구심인 범민련을 부정하고 새로운 통일운동의 구심으로 서려고 했던 중대한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자통협의 건설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주노총 통일위원장이 2018년 시점에서 자통협이 범민련을 제쳐두고 통일운동 대표세력을 자임하려 한 행동이 중대한 오류였다고 평가하는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논리를 따르면 자통협, 또는 자통협 소속 단체들이 범민련에 가입하지 않거나 범민족대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오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1999년 시점에 어떤 사회단체가 민화협과 민족회의의 노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더라도, 범민련과 범민족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므로, 1999년의 8·15 대회는 여러 심각한 쟁점을 남기게 되었다. 이는 자통협에 참여한 각 단체 내에서도 심각한 논란을 빚을 수 있는 사안이었으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 미리 말하자면, 범민련이 강령, 규약에 담긴 ‘연방제 통일 방안’과 ‘범민족대회 개최’를 폐기하기 때문이다. 1999년 대회의 가장 중요한 성과가 범민족대회를 최고 수위로 개최하고, 연방제 통일 방안(조국통일 3대헌장)을 광범위하게 합의한 것인데, 2년 후 곧 그러한 내용을 강령, 규약에서 폐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4) 민혁당 사건의 발발 

민족혁명당(민혁당) 문제는 《계간 사회진보연대》 2019년 겨울호에 실린 「한소 수교와 남북기본합의서, NL·PD 논쟁의 격돌」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다. 그 글에서는 1992년 3월 16일 민혁당이 창당한 시점까지를 살펴보고,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는 상황에서 북한이 남한 내 지하당 건설을 시도한 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나 밝혀보고자 했다. 그런데, 민혁당의 존재가 외부에 밝혀지는 것은 1999년, 곧 김대중 정부 2년차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민혁당의 해산, 민혁당 사건의 발발이 지닌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짚어보겠다. 
 
(1) 민혁당 해산 이전의 논쟁

1992년 민혁당이 결성되었으나, 중앙위원장 김영환은 점진적으로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민혁당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기 훨씬 전 시점인 1995년 4월에 나온 《말》에 김영환의 인터뷰 「반미, 북한 그리고 1990년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실린다. 이 글에서는 당시 NL의 시각에서는 충격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엄밀하게 이론적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미국의 식민지는 아니다’ ‘미국과의 관계를 평등한 우호협력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이론화하는 데 문제도 많고 더디다’(북한에서는 이론을 자유롭게 연구하고 비판하는 풍토가 되어 있지 못하다), ‘북한추종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 북한추종주의는 남한을 위해서나 북한을 위해서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대표적이었다. (이러한 발언은 북측에도 충격을 주었고, 이에 대해 북한은 1995년 6월 4일 “총책의 진의, 연락원을 통해 보고 바람”이라는 지령이 내려왔으나, 김영환은 이에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로도 김영환의 어떤 전환을 암시하는 입장 표명이 이어졌다. 그는 1996년 1월 ‘푸른사람들’ 기관지에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는 글을 기고했다. 저자의 진의가 투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여기에도 분명한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구절이 있었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나 구 사회주의권에서나 참여민주주의를 위해 좋다는 제도들은 있는 대로 다 사용해 봤으나 모두 비참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일정 수준의 민주화가 이룩된 조건에서의 참여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이것이 잘 보여주고 있다”는 대목은 북한에 대한 우회적 비판으로 읽힐 수 있었다. 또한 “이제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도 더 이상 과거의 전선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진용을 짜야 하며 새로운 깃발을 내걸고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기존 정치]세력들은 사고구조 자체가 그러한 과제의 해결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는 대목은 그동안 김대중 씨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민주대연합론)으로 기울었던 국내 NL 운동 전반에 대한 비판이자, 나아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노선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었다. 1995년 말부터 전국연합과 한청협(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내에서 정당 건설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 전국연합과 한청협 내에서 쓰인 표현은 ‘민족민주(단일)정당’, ‘현대적 국민정당’, ‘진보적 개혁정당’ 등 다양했다. 그렇지만 정당 건설을 지지하는 입장은 전통적인 ‘반제통일전선론’을 고수하는 입장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받는다. 반제통일전선론은 정당 건설이 반미-반김영삼 투쟁을 이완시키고, 통일전선을 약화시키는 개량주의적 노선이라고 규정했다. 즉 NL 정통노선과 반미-반독재투쟁의 명분을 앞세우며 정치조직 건설의 위험성, 무용론, 역효과론을 설파했다. 

그런데 김영환 씨 본인의 회고나 박찬수의 『NL 현대사』에 따르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민혁당 내부의 분란으로 이어졌다. 당시 전국연합 지역조직인 울산연합의 집행위원장 정대연 씨가 한청협이 발간하는 《자주의 길》 2호(1996년 3월)에 「세상은 바뀌어도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글을 통해서 김영환이 “그간 변혁운동을 이끌어온 세력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청년단체 내부의 논쟁이었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실상 민혁당 내부의 논쟁이었던 셈이었다. 

김영환은 1997년 6월에도 《월간중앙》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황장엽의 주체사상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황장엽은 망명하여 1994년 4월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주체사상에 관해 연구하면 할수록 주체사상과 거리가 먼 북한의 현실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체사상을 가장 깊이 연구한 황장엽 비서가 북한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도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수령론이 “주체사상으로부터 나왔다는 증거가 거의 없다”면서 수령론과 주체사상이 충돌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제 민혁당 내에서 갈등과 균열은 점점 더 커져, 하나의 조직으로서 기능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그리하여 1997년 7월 김영환이 주도하여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2:1의 찬성으로 <민족민주혁명당> 자체 해산을 결의했다. (김영환은 민혁당의 해체 사실조차 북쪽에 전달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를 전달하면 북한이 새로운 연결선을 찾으려 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훗날 말했다.) 
 
(2) 민혁당 해산 이후의 논쟁  

민혁당 중앙위는 해산을 결정했으나, 1997년 10월 울산 ‘부부간첩단 사건’, 1998년 12월 여수 반잠수정 격침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과거 존재했던 민혁당의 실체가 공안당국에 의해 발각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서, 김영환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수위의 발언을 쏟아내었다. 그는 《말》 1998년 5월호에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조금씩’ 변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첫째, 남한의 진보운동권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북한의 태도와 정책에서 느끼는 배신감이 쌓였다. “하나의 조국을 주장하던 북한이 남북한 UN 동시가입에 찬성하는 등 남한의 진보운동권이 북한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든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무엇보다 남한 진보운동권이 북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범민련 때문이었다.” 

둘째, 90년대 초부터 탈북자들의 증언을 비롯해서 북한에 관련된 생생한 정보가 쏟아지게 되었고, 북한의 실상을 보다 정확히 알게 되었다. 정보를 종합해보면 북한은 기본권이 전혀 보장이 안 되며,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극심하며, 무능과 비능률로 가득 차 있다. 

셋째, 북한이 주체사상의 기본원리를 전혀 지키지 않고 단지 독재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오히려 극심한 압박과 통제, 공포정치가 실행되고 있다.   

이 글을 두고도 큰 논란이 발생했다. 《말》 6월호, 즉 김영환의 글이 실린 후 바로 그 다음 호에 신준영 기자가 쓴 「김영환식 주체사상 비판의 10가지 오류」라는 글이 실렸다. 신 기자에 따르면, “주체사상과 결별하겠다는 글을 비판한다면 영락없이 ‘주사파’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반론이 불가능하게 쓰인 글을 여과 없이 게재한 (…) 책임을 《말》지는 어떻게 질 것이냐”는 문제제기가 있었고, 그런 문제제기가 타당하기 때문에 취재기사 형식으로 (취재원 일부는 익명으로 처리하여) 반론을 실었다. 

이 글은 북한 연구자 김근식 씨와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80년대 운동권은 주체사상과 북한의 현실을 ‘절대선’으로 파악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러나 북한은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체제이며 결코 절대선일 수가 없다. 북한체제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자 그는 북한체제를 절대악이라고 비난하는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연구자 김귀옥 씨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북한체제에 일정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함께 떠안고 나아가야 할 반쪽이라는 민족애적 관점이 북한을 바라보는 기본 자세가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김영환의 문제제기는 히스테리이거나 민족애적 관점이 없다는 말이었다. 현 시점에서 볼 때 이런 반론은 북한 ‘정권’에 대한 김영환의 비판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 어느 정권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뭉개는 결과를 낳았다. 연구자라면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인지,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탐구해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해, 1999년 6월 《월간조선》에 실린 김영환 서면 인터뷰 제목은 더 충격적이었다. 「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한 좌우대합작을 제안한다. 좌파일수록 김정일 타도에 앞장서야」. 글 내용 중에는 북한정세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주민들이 기아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을 때조차도 통일의 방법으로 전쟁을 무조건 기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도 있었는데, 이러한 주장은 ‘전쟁불사론’이라는 식으로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이 기사 이후로 《말》에는 김영환을 공격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김영환과 함께 활동했던 심진구의 「중증 소영웅주의자에게는 육체노동이 처방약」(7월호), 하영옥의 「네 멋대로 사는 건 좋지만 더 이상 운동을 팔지 마라」(7월호)가 대표적이고, 전혀 다른 시각이지만 진중권도 「김영환 씨,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으시라」(12월호)라는 글로 가세했다. 김영환 입장을 얼마간 옹호해주는 정대화의 「그는 소영웅주의자가 아닌 고독한 혁명가」(9월호)라는 글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 모든 논란은 9월 10일 국정원이 민혁당 사건을 발표하면서 종말을 향했다. 하루 전 9월 9일 국정원은 김영환이 전향 의사를 밝히고 조직원의 자수를 적극 권유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는 이유로 공소보류 의견으로 구속 송치했다. 반면 전향하지 않은 하영옥 등은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되었다. 그 후 10월 11일 김영환의 반성문 요지가 일간지에 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어떤 결과를 낳았나. 주체사상을 국내에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인물, 또는 운동 경향이 어떤 의미에서든 간에 자기반성과 비판을 수행했던 과정이 결국 공안당국을 매개로 한 ‘전향’ ‘자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최악의 결과였다. 그에 따라 김영환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그가 제기한 여러 심각하고도 복잡한 쟁점을 일일이 반박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제 그가 ‘안기부의 프락치’여서 그랬다는 식으로 간단히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그는 정말 안기부 프락치였을까. 이에 관해 박찬수 기자는 ‘여러 정황을 볼 때 그가 1999년 국정원 수사에 협조한 것은 맞지만 그 이전부터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정보기관 프락치로 활동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런데도 프락치설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면서, 따져보면 그 이유는 놀랍게도 김영환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즉 김영환이 과거 『강철서신』에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글을 썼다는 점을 환기한다. 정치적 경쟁자를 ‘적의 스파이’로 몰아가는 수법이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이 아니냐, 즉 자업자득 아니냐는 말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1998~1999년 김대중 정부가 대북포용정책, 햇볕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 시점에 김영환의 주장은 시류와 전혀 맞지 않았다. 그의 주장처럼 북한민주화, 북한인권을 먼저 앞세운다면 북한 정권을 자극하고 긴장을 초래할 게 자명했다. 햇볕정책, 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의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북한인권 개선을 도모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인식이 주류적이었다. 김영환의 주장은 오히려 냉전·보수파의 논리와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회운동 내에서는 사실은 좀 더 논의가 필요했던 북한의 대남노선 문제나 주체사상 문제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게다가 그 다음 해, 2000년에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는 있어도 제거될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발한다. 2007~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2012~2013년 연이어 터진 통합진보당 사건을 계기로 한 논쟁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3) 민혁당과 학생운동 

과거 민혁당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낸 『나의 고백』(이종철 외, 시대정신, 2012)을 통해서 민혁당계 학생운동의 흐름도 대략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학생운동 주체사상파 내에서 1995~1996년 민혁당계가 주류로부터 뚜렷이 분화되어 나타난다. 이는 ‘자주적 학생회론’(비민혁당계)과 ‘사람사랑 학생회론’(민혁당계)의 충돌이라는 형태로 가시화한다. 1996~1997년에는 민혁당계 내부에서도 다시 또 분화가 나타나는데 이때는 한총련 탈퇴(민혁당 해산파) 대 혁신(민혁당 재건파)이라는 형태로 가시화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1995~1996년 한총련 내에서 ‘자주적 학생회론’을 비판하는 ‘사람사랑 학생회론’이 부상한다. 여기서 ‘자주’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주체사상파는 ‘자주’라는 표현에 그들의 사상과 노선을 함축하고자 했다. 즉 그들의 역사인식에서 북한은 자주화되고 민주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결국 식민지독재국가인 남한 정부를 전복해 북한의 지도를 받는 혁명정부를 세우고, 연방제 형식의 통일을 통해 북한 정권을 한반도의 통일정권으로 수립하자는 것이 그들의 혁명노선이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고리가 ‘자주’다. 자주적 학생회 역시 그 본연의 임무는 식민지 조국의 자주적 투쟁의 주체로 학생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고, 창조적이고 대중적인 사업방법과 작풍을 통해 이를 구현해 나가야 한다는 게 자주적 학생회론의 요체였다. 사람사랑 학생회론은 ‘자주’가 아닌 ‘사람사랑’이 학생회의 새로운 사상이자 운영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자주적 학생회론자들은 이러한 노선이 수정주의, 개량주의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양자는 같은 주사파이면서도 한 학교 내에서도 서로 충돌하여, 학생회 선거에 따로 출마하는 사태로 이어진다. 강경 주사파는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라는 1993년 한총련 출범 당시의 학생회론을 폐기하고 자주적 학생회론을 다시금 강조했고, 1996년 이후 한총련을 장악했다. 

외부에서 보기에 양자의 입장 차이는 이론적으로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고 1995~1997년 실천방침상의 차이로 드러났다. 자주계는 범민련을 지지한 반면 사람사랑계는 민족회의를 지지했고, 또한 사람사랑계는 북한동포돕기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자주계는 이를 반대했다. 자주계는 전민항쟁을 통한 김영삼 정권 타도 투쟁을 강조한 반면 사람사랑계는 ‘현대적 국민정당 건설’을 지지했다. 

그 다음으로 1996~1997년 민혁당계 내부의 분화를 살펴보자. 1996년 연대사태 후 한총련 내부에서 심각한 논란이 발생했다. 민족혁명당(민혁당)계가 주축인 한총련 혁신계는 “대중의 정서와 맞지 않는 폭력적인 김영삼 정권 타도 투쟁으로 학생운동이 고립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비(非)민혁당계 주사파였던 자주계는 “여기서 투쟁을 끝낼 것이 아니라 김영삼 정권의 폭력성이 드러날 때까지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3개월간 지도부 내에서 논쟁이 벌어지다가 총학생회장들로 구성된 중앙위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던 자주계(비민혁당계)가 민혁당계 집행간부를 밀어내면서 민혁당계가 패배했다. 

그 후 혁신계는 수원 경희대학교에서 모여 한총련 혁신 방안을 토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원들 사이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과 김정일 지도노선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때 전북총련 쪽에 속한 성원은 “한민전의 지도노선이 정세와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 것 아니냐” “김정일이 과연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지 의문이다”라고 말했고, 경기동부총련과 서총련 쪽에 속한 성원은 이에 반응하여 혁신모임을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몇 개월 후 전북총련은 한총련을 공식적으로 탈퇴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북한인권운동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민혁당도 1997년에 해체되었다.) 나머지 경기와 서울권의 그룹은 한총련에 그대로 남았고, 지속적으로 한총련을 접수하려고 노력했다(한총련 혁신운동). 이는 아마도 민혁당을 해산하려는 흐름과 재건하려는 흐름, 그 양자와 궤를 함께 했을 것이다.


5) 1998~99년, 김대중 정부 초기 통일운동이 남긴 것 

1998~99년 통일운동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첫째,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정당, 사회단체 협의회 형식의 민화협이 출범하고, 이에 대항할 목적으로 자통협이 건설되었다. 자통협과 범민련이 1999년 ‘하나의 대회’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이 범민련이 주도하는 범민족대회에 참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국연합과 전노협은 범민련 노선을 비판하는 민족회의에 합류했던 바 있으나, 불과 몇 년만에 과거로 회귀한 셈이다. 특히 이를 통해서 민주노총이 전통적인 NL적 통일운동에 훨씬 더 친화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둘째, 북한의 대남노선을 추종하는 민혁당을 스스로 해산하려는 흐름이 공안당국에 대한 자수, 전향이라는 형식으로 막을 내리고, 나아가 ‘뉴라이트’를 자처하는 흐름으로 나아간 반면, 민혁당을 재건하려는 흐름은 공안당국에 검거되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오히려 북한의 대남노선이나 주체사상파 운동에 대한 남한 사회운동 내부의 평가가 더 진척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 햇볕정책 기조에서 이런 문제는 유야무야 시야에서 사라지기 쉬웠다. 그러나 이처럼 잠복된 쟁점은 2000년대 진보정당 운동, 즉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폭발하고야 만다. (김대중 정부 후반부 통일정책과 통일운동은 다음 호에서 다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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