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1 가을.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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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성장과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동시에 잊힌 전통의 복원

이아림 | 인천지부 사무처장
헨릭 그로스만(Henryk Grossman, 1881-1950)의 대표작으로 1929년에 출판된 『자본주의 체계의 축적과 붕괴법칙 : 동시에 위기이론』(이하 『붕괴법칙』)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1929년 초, 뉴욕 주식시장 붕괴가 일어나기 불과 몇 개월 전에 발간된 이 책은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이 자본주의 체제의 흥망성쇠와 그 원인을 파악하고자 한 것임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그로스만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기순환의 근본적 원인을 조명하면서 마르크스가 발견한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그러나 ‘자동붕괴론’이라는 폄하 속에 그로스만의 문제의식은 잊혔다. 그로스만이 복권되기 시작한 시기는 자본주의의 불황기가 시작되는 1970년대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초입부에는 그로스만 평전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로스만은 자본주의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질 때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참고점이 되어서 다시금 소환되었다. 20세기 미국 자본주의의 끝자락을 목도하고 있는 현재, 그로스만의 문제의식을 곱씹어볼 이유는 충분하다. 
 

그로스만의 이론적 성과를 국내에 소개한 과천연구실은 그로스만이 마르크스의 ‘역사과학’을 복권하고 이윤율 하락설의 관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붕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한다. 과천연구실은 그동안 그로스만의 작업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역사동역학을 발전시키고 체계화했다. 본 서평에서는 이러한 이론적 성과를 바탕으로 『붕괴법칙』 책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책 내용을 검토하기에 앞서 미리 알아두면 좋을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먼저 『붕괴법칙』의 출판과정, 출판된 이후의 반응을 살펴보고 이후 그로스만의 생애를 소개한다. 저자의 생애는 2007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트로츠키주의자 릭 쿤이 출판한 그로스만 평전을 주로 참고하였다.  혁명가로서 저자의 삶은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다음으로는 본격적으로 책 내용을 따라가면서 그로스만의 문제의식을 다룬다. 첫 번째로 『붕괴법칙』의 시대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 사후 붕괴론 논쟁에 대한 설명과 함께 책의 1장에 담긴 그로스만의 비판을 싣는다. 그로스만은 마르크스의 붕괴이론에 관한 현존 문헌을 개관하고 사회주의자들조차도 붕괴이론을 거부하거나 붕괴의 원인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본인의 본격적인 연구 성과를 설명하기에 앞서 기존 연구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는 책의 2장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방법론을 조명하면서 『자본』에서 도출되는 자본축적과 붕괴경향을 경제법칙으로 정립한다. 3장에서는 순수한 형태의 붕괴법칙을 수정하는 반작용 경향을 분석하면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한다. 사실상 이 세 번째 장의 분량이 『붕괴법칙』의 절반을 차지한다. 본 글에서는 그로스만의 설명을 요약하면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그의 이론적 기여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붕괴 경향과 계급투쟁」은 『붕괴법칙』의 첫 번째 결론으로 계급투쟁에 대한 붕괴이론의 함의가 무엇인지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그로스만의 붕괴이론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계급투쟁을 과소평가하고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붕괴할 것을 예언하는 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서, 혁명의 가능성과 필요성 양자를 제시하고 있음을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을 살펴본 뒤 서평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20세기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동역학 분석을 개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로스만의 현재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1. 『붕괴법칙』 : 출판 현황, 초기 반응, 그리고 재평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그로스만 만큼 평가절하된 불운한 경제학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대표 저작인 『붕괴법칙』의 운명만 봐도 그러하다. 1929년 독일어로 출간된 이 책의 최초의 번역본은 일본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히라노 요시타로가 번역한 일역본(1932)이었다. 일본공산당과 가까운 그는 1928~1929년 독일을 방문하면서 그로스만과의 개인적 인연으로 일본어 번역본을 추진했다. 일역본은 그로스만이 직접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후 1956년에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출판되었던 것을 제외하고 『붕괴법칙』은 반세기 동안 사실상 잊혔다. 그러다 그로스만이 복권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몇몇 번역본들이 다시 출판되는데 먼저 1967년에 독일어로 재발행 되었고, 1977년에는 이탈리아어, 1979년에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었지만 국제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1979년에는 인도의 트로츠키주의자 쟈루스 바나지가 600쪽이 넘는 원본을 결론 부분은 생략한 채 1/3로 축약해서 영어로 번역했다. 묻혀있던 이 원고를 영국에서 정식으로 출판한 해는 1992년으로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63년 만의 일이었다. 이번에 번역된 책은 바나지의 편역본을 번역한 내용과 함께 결론의 첫 번째 부분인 「붕괴 경향과 계급투쟁」을 보론으로 담았다. 결론의 두 번째 부분인 「자본주의의 붕괴경향과 총카르텔」은 『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김석진 외, 2001)』 부록에서 볼 수 있다.

『붕괴법칙』은 그로스만이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사회연구소에서 준비한 강의록을 출판한 것이다. 그는 1919년부터 마르크스의 경제위기론을 연구하면서 1922년까지의 성과로 「경제위기 이론」을 발표했다. 출판되지 않은 원고를 보면 1924년까지 그로스만은 『붕괴법칙』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바우어의 재생산표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애초에 『붕괴법칙』을 시작으로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을 다루는 광범위한 작업을 구상했다. 연장선상에서 책을 출판한 이후에는 마르크스의 연구 방법과 재생산표식의 중요성에 대해서 논의하는 「마르크스 『자본』의 본래 플란의 변경과 그 원인」(1929), 「마르크스의 가치-가격 전형과 위기 문제」(1932)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면서 그로스만의 구상은 실현될 수 없었다. 연구소의 방해로 뒤늦게 발표된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그리고 동역학의 문제」(1941), 「고전경제학에 대한 진화주의적 반역」(1943)에서 그로스만은 『자본』의 대상이 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판임을 강조했다. 이 논문은 『붕괴법칙』 후속편으로 예정되어있던 자료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처럼 『붕괴법칙』은 그로스만의 일생을 관통하는, 가장 중심에 위치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그로스만의 저작은 194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가장 잘 알려져 있었는데, 초기 발표 당시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다수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개혁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붕괴 경향을 설명한 그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거부했다. 그로스만이 저작에서 다양하게 비판했던 여러 논자들에게서 직접적인 반박이 있었지만, 주된 비판대상이었던 바우어와 힐퍼딩은 침묵했다. 더욱이 그로스만은 스탈린이 지지한 교리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경제 고문이었던 예브게니 바르가를 “마르크스의 아류” 중 하나로 지목했기 때문에 소련에서도 부정당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대체로 비판받고 묵살되었다. 

그러다 보니 영역본이 출판되기까지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폴 스위지가 자신의 교과서 『자본주의적 발전의 이론』(1942)에서 평가한 ‘왜곡된 설명’에 영향을 받았다. 스위지는 경제위기의 내재적 원인으로 이윤율 하락에 주목하는 그로스만의 입장을 무시한 채, 위기의 원인을 외부적 교란 요인에서 찾는 미하일 투간-바라노프스키와 같은 학파로 배정하여 설명하였다. 재생산표식을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했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그로스만의 이론을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자동붕괴론으로 설명했다. 스위지의 교과서는 세계적인 영향력이 있었는데, 남한에서도 1970년대까지 스위지 책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직도 그로스만의 이론을 자동붕괴론, 경제결정론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로스만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는 1970년대부터이다. 1970년대부터 오랜 전후 호황이 종료되는 불황기가 시작되었고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 법칙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68세대들’은 마르크스주의자 중 최초로 이윤율 하락에 주목한 그로스만과 그를 소개했던 폴 마틱을 복권했다. 그로스만의 제자이면서 미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평의회 공산주의자인 마틱은 1969년에 『마르크스와 케인스』를 출판하면서 그로스만의 붕괴이론을 조명한다. 당시에 바나지의 축약된 『붕괴법칙』 영어 번역본 백여 권이 복사되어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유통되었다고 한다. 『자본』 발간 이후 두 세대가 지나 붕괴이론이 복권된 것처럼, 『붕괴법칙』 발간 이후 두 세대가 지나고 나서야 그로스만이 복권될 수 있었다. 


2. 그로스만의 생애

 

청년 그로스만(1881-1908) : 혁명을 꿈꿨던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그로스만은 1881년,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갈리시아-로도메니아 왕국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살 무렵 메이데이 행사 때 우연히 목격한 사회주의자의 강렬한 연설에 감동을 받은 그로스만은 그날부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로스만은 1898년경부터 갈리시아 사회민주당(GPSD, Social Democratic Party of Galicia)의 당원 활동을 했다. 갈라시아 사회민주당은 공식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속내는 폴란드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정당이었다. 1899년이 되자 갈라시아 사회민주당은 폴란드 사회민주당(PPSD, thePolish Social Democratic Party of Galicia)으로 당명이 바뀐다. 1890년대는 정치적으로 반유대주의가 출현했고 독립을 염원하는 폴란드 민족주의의 물결이 한층 강화되던 시기였다. 대학생이 된 그로스만은 러시아와 독일의 통치하에 있던 폴란드 전역에서 모인 급진적인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이들을 포괄하는 사회주의 학생 운동 조직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중에는 룩셈부르크와 레오 요기헤스가 이끌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SDKPiL, Social Democracy of the Kingdom of Poland and Lithuania)도 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로스만과 달리, 갈라시아의 낙후된 지역에 살고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광범위한 하층 노동자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로스만은 유대인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집중했다. 

1905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갈라시아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몰아쳤고 계급투쟁이 고조되었다. 1904년에 학위 과정을 이수한 그로스만은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집중한다. 그는 유대인이 폴란드 문화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폴란드 사회민주당으로부터 소외된 유대인 노동자들은 대변하는 역할을 주도했다. 결국, 분당이 일어났고 그로스만은 젊은 나이에 1905년에 설립된 갈리시아 유대인 사회민주당(JSDP, Jewish Social Democratic Partyof Galicia)의 창립 비서 겸 이론가로 추대되었다. 이들은 유대인 부르주아지와 유대인 근본주의자들과 구분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추구하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맞물려 유대인 사회민주당은 발 빠르게 성장했고, 처음으로 많은 유대인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로서의 착취와 유대인으로서의 차별에 대항하는 투쟁을 조직했으며, 광범위한 교육 및 선전 활동을 벌였다. 
 

혁명가로서의 삶, 이론가로서의 삶(1908-1925): 그륀베르크와의 만남, 폴란드에서의 이중생활


러시아혁명이 실패로 끝나게 되고 오스트리아에서도 자본가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많은 혁명가들이 활동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그로스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로스만은 1908년에 박사과정을 마친 뒤, 마르크스 경제사학자 그륀베르크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비엔나 대학에 진학하였다. 따라서 유대인 사회민주당의 지도적 역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로스만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군대에 징집되어 초기에는 동부전선에서 싸웠고 후에 비엔나에 있는 전쟁부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당시에는 전쟁 시기 국가의 경제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는 통계학, 물리학과 수학 등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그로스만의 장래는 밝아 보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중앙통계위원회의 고위직에 내정되었고 학문적 경력을 인정받아 교수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사민주의자들은 새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조성하기 위해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호소하고 강화했다. 특히 전쟁을 거치며 증가한 갈리시아계 유대인 난민들이 비엔나에 머무는 것을 막기 위해, 신정부는 전쟁 전에 주민등록이 된 사람들만 오스트리아 연방의 시민이라고 선언했다. 그로스만은 전쟁 전부터 비엔나에 이주했지만, 고향에 어머니가 홀로 계셨기 때문에 주소지를 변경하지 않았었다. 그는 사민당 정부에 분노하며 비엔나를 떠나야 했다. 얄궂게도 당시 이 조치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외무장관이 바로 『붕괴법칙』의 주요 비판 대상인 바우어였다. 

그로스만이 1919년에 폴란드로 이주했을 때, 이곳에서도 새로운 독립 국가가 건설되고 있었다. 그로스만은 폴란드 중앙 통계청에서 새로운 공화국 최초의 인구 조사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민족주의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인구조사 결과를 조작하는 것을 꺼린 그로스만은 결국 통계청을 떠났고 1922년 폴란드 자유대학에서 경제정책학 교수직을 맡았다. 그는 이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적인 직업과 병행하여 폴란드 공산당(KPP, Komunistyczna Partia Polski)에 가입해 지하 활동을 수행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인해 혁명적인 열기가 무르익을 때였고 동시에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폴란드 공산당은 볼셰비키의 모델을 따라 다양한 민족들을 아우르는 조직이었다. 폴란드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그는 사실상 유대인 독자정당 활동이라는 정치적 입장을 수정했다. 이후 폴란드와 러시아는 전쟁을 벌였고 전쟁에 징집된 그로스만은 목숨을 걸고 러시아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전쟁 이후 탄압이 다소 완화되면서 급진적인 정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로스만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그는 1922년에서 1925년 사이에 다섯 차례 체포되고 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한 후, 독일로 망명하기로 합의하면서 비로소 석방되었다. 독일에서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따라서 그는 독일공산당(KPD,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의 지지자이긴 했지만 당원은 아니었다. 사실상 그로스만은 이 시점부터 정치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25년 독일로 망명을 떠난 그는 같은 해 스승인 그륀베르크가 소장으로 있던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마르크스 사회연구소에 초빙된다.
 

연구 활동에 전념한 이론적 성숙기(1925-1944) :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사회연구소 시절


1924년에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사회연구소는 독일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연구소로, 헤르만 바일이 제공한 기부금으로 설립되었다. 헤르만 바일의 아들 펠릭스 바일은 독일공산당과 가까운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륀베르크가 초대 소장을 맡으면서 그는 동료 마르크스주의자를 한데 모았다. 이들 1세대 연구자들의 주된 관심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경제 분석이었다. 독일은 폴란드보다 덜 억압적이었고 그륀베르크 산하의 연구소는 일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로스만은 처음에는 그륀베르크의 조교로, 1927년부터는 정식으로 자신의 연구와 관련된 과목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로스만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관한 주요 연구를 집중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정당과 거리를 둬야 하는 망명자로서의 처지와 사회연구소에서 그의 위치는 그로스만이 어떤 제약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하고 글을 쓸 수 있게 했다. 1차 세계전쟁 직후부터 경제위기론 연구에 몰두해왔던 그로스만은 그 성과를 모아 연구소에서 정식으로 『붕괴법칙』을 출판했다. 

그러나 1929년에 그륀베르크가 은퇴하고 호르크하이머가 새로운 소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처지는 곤란해졌다. 우선 객관적 이유가 있었다. 1933년 히틀러가 부상하자 연구소는 독일을 떠나 제네바로 향했고 이후 1934년에 뉴욕시로 이주했다. 연구소가 뉴욕으로 망명길에 오르자 호르크하이머는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로스만의 작업을 출판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도 분명했다. 호르크하이머는 그로스만의 연구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을 넘어 오히려 출판을 방해했다고 볼 수 있는데, 사민주의자였던 그 나름의 계급투쟁이었다. 점차 그로스만을 포함하여 그륀베르크가 초빙한 초창기 연구원 대다수가 소외당하게 된다. 따라서 연구소가 미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스만의 『붕괴법칙』이 영역되지 않은 이유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영역되지 않은 데에는 연구소의 경제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연구소 기금을 증권에 투자하다가 1930년대 대불황기에 탕진했기 때문이다. 

호르크하이머와 그로스만이 결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그리고 동역학의 문제」의 출판이 4년 동안이나 지연된 데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그로스만이 철학자로서 마르크스를 경제학자로 격하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논문 출판을 거부했다. 그로스만이 사보타주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자 늦게나마 해당 논문은 출판되었지만, 또 다른 논문인 「고전경제학에 대한 진화주의적 반역」은 결국 연구소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의 《경제학잡지》에 발표되었다. 1940년대가 되자 대부분의 연구원이 해고되고 그로스만도 1944년에 파면된다.

그로스만은 1933년 이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나 스탈린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마틱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정치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로스만은 스탈린의 영향권에 있는 독일 공산당에 비판적이면서도 파시즘을 타도하기 위한 유일한 세력으로써 소련을 지지했다. 특히나 스페인 내전을 거치면서 지지 입장이 더욱 확고해졌다. 물론 소련을 지지한 것과 스탈린주의를 지지한 것은 별개였다. 경제 이론의 영역에서 그는 한 번도 소련의 공식적인 입장에 대해 지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스탈린주의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 속에서 소련을 비판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운한 말년(1944-1950) : 미국에서 동독으로의 귀환과 죽음까지


1937년부터 비교적 고립되어 있었던 그로스만은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고 눈에 띄게 건강도 악화되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정부 당국의 집요한 감시에 시달리던 그는 1949년에 미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건설된 동독에서는 나치 동조자들을 모두 해고하면서 교수의 3/4이 서독으로 떠나 인력난이 심각했다. 따라서 지식인 유치에 적극적이었고 그로스만은 1949년에 동독에 있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스탈린화된 동독에서 자리를 잡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1950년에 초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국민상 후보에 올랐지만, 정부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수상하지 못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로스만은 1950년 11월에 사망했다. 그로스만의 저작 중 어떤 것도 동독에서 출판된 적이 없는데, 오히려 동독의 경제 교과서는 그의 위기 분석을 비판했다. 그가 다시 복권되기까지는 그 뒤로도 몇십 년의 긴 세월이 필요했다. 
 

3. 마르크스 사후 붕괴론 논쟁과 그로스만의 개입 : 「1장 현존 문헌에서 자본주의의 몰락」

 
“마르크스주의자는 정치혁명에 관해서는 광범위한 문헌을 저술했지만, 문제가 되는 경제적 측면을 이론적으로 다루는 것을 무시했으며, 마르크스 붕괴이론의 진정한 내용에 담긴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여기서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이런 공백을 채우는 일이다(『붕괴법칙』, p.13).”
 

마르크스 『자본』의 결론, 자본주의의 종착지에 관한 논쟁 


마르크스 생전에 출판한 『자본』 1권(1867)과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출판한 『자본』 2권(1885), 3권(1894)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오랜 논쟁이 전개된다. 3권은 초고에 불과한 상태였고 2권의 재생산표식은 마치 자본주의가 영원히 지속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처럼 보였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에서 ‘자본주의는 자신의 부정을 창출한다’는 자본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언급했지만 어떻게 발현되는 것인지, 어떠한 원인이 그러한 방향으로 이끄는지 명확히 언급하지 않았다. 『자본』 3권에서 다루는 이윤율 하락의 경향적 법칙에 대한 설명은 구조적 위기의 원인에 대한 서술로써는 불충분했다. 이처럼 자본축적과 붕괴 경향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자본』의 결론에 대한 논쟁이 불가피했다. 게다가 19세기 말이 되자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과 함께 대중들의 요구를 수용한 노동자정당이 성장하면서 개량화의 물결이 커지고 마르크스의 정치적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정주의의 흐름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자본주의는 과연 붕괴하는가, 그렇다면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를 둘러싼 일대 논쟁이 전개된다. 

러시아의 합법 마르크스주의자 투간-바라노프스키는 『자본』 2권의 재생산표식을 이용하여 불비례설을 주장했다. 생산의 개별 영역 간의 불균형이 위기를 야기하지만 적절한 조정을 통해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의 붕괴, 즉 절대적이며 극복할 수 없는 자본축적의 한계는 없으며 자본주의의 무제한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은 “만약 사회주의의 승리가 진정으로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필연이라면, 그것은 현존 사회질서의 경제적 붕괴가 불가피하다는 증명에 기초해야 한다”며 그러한 증명이 불가능함을 근거로 붕괴이론을 거부했다. 그러자 칼 카우츠키는 오히려 “붕괴이론”을 베른슈타인의 발명으로 묘사하면서 마르크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마르크스의 이론을 왜곡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노동자들 궁핍의 증가 만이 아니라 조직의 성숙과 힘의 증가도 예견했다는 것이다. 당시 권위 있는 이론가였던 카우츠키조차도 붕괴이론을 부정한 상황에서 룩셈부르크가 등장한다. 베른슈타인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룩셈부르크의 반박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붕괴이론은 『자본』의 기본적 교훈이고 과학적 사회주의의 초석이라고 생각했다.

투간-바라노프스키의 불비례설을 수용한 힐퍼딩의 『금융자본(1910)』이 출간되면서 독일사민당 내의 중앙파 힐퍼딩과 그에 대항한 좌파 룩셈부르크 사이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고 붕괴론의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는 마르크스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자본』 2, 3권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힐퍼딩, 바우어와 같이 투간-바라노프스키의 불비례적 접근법을 수용한 사람들은 자본이 개별 산업부문에 균형적으로 분배된다면, “조직화된 자본주의”가 과잉생산을 야기하지 않고 한계 없이 팽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역으로 노동자계급이 장악한 국가를 통해서 사회화된 금융자본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함의로까지 확장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롭고 고통 없는 전환이 가능해진다. 

한편 붕괴이론을 거부하는 수정주의의 흐름이 제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세기 말, 비교적 평화로운 자본주의의 발전 국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혁명의 영향과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고 국내의 계급투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평화로운 전환은 점차 불가능해 보였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1913)에서 불비례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위기를 제국주의 문제와 결부시켰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축적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잉여가치를 모두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구매할 임금이 충분치 않고 자본가들은 잉여가치의 일부만 소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축적의 목적을 위한 잉여가치의 실현은 노동자와 자본가로만 구성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잉여가치는 외부 시장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량으로 생산한 상품을 판매할 시장이 계속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가 자본주의적인 질서로 통합되면 될수록 자본주의는 붕괴의 경향으로 나아간다. 
 

그로스만의 비판


그로스만은 힐퍼딩, 바우어, 카우츠키와 같은 논자들을 마르크스주의로 위장된 개혁주의자라는 의미에서 “신조화주의자”라고 비꼬았다. 그로스만이 봤을 때 투간-바라노프스키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불균형에서 발생하는 부분적이고 해소 가능한 위기가 아니라, 생산 부문의 전 분야를 포함하여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에 의해 야기되는 ‘자본 과잉’의 경향이었다. 부문 간 균형 상태가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자본축적의 과잉은 자본주의의 내적인 원인에 의하여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금융자본의 집단적 소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힐퍼딩의 입장은 “신용을 통해 산업을 지배할 힘을 갈망하는 은행가의 꿈에 조응하며 이것은 경제학으로 번역된 블랑키의 폭동주의”라고 혹평한다. 

그로스만은 투간-바라노프스키와 힐퍼딩과 달리, 룩셈부르크에게는 경의를 표했다. 그녀는 붕괴이론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사회주의 사례의 핵심 요소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로스만이 봤을 때 룩셈부르크의 노력은 한계적이었다.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에 관한 그녀의 추론은 축적과정의 내재적 법칙에 뿌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비자본주의적 시장의 부재라는 사실에 뿌리를 두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시장의 결핍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정반대로, 마르크스는 시장을 확대하고 축적을 가속화했던 바로 그 원인이 이윤율도 저하시킨다고 말한다. 그녀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때야 비로소 자본주의의 불가능성이 나타날 것이라는 모순적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로스만은 룩셈부르크와 달리 제국주의는 자본수출을 특징으로 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고 봤다(제국주의의 쟁점은 「3장 반경향의 수정」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로스만은 마지막으로 카우츠키의 최근 저서인 『유물론적 역사관』(1927)에 대해서도 비판을 덧붙인다. 그는 카우츠키가 자본주의의 붕괴라는 개념을 거부하다가 결국은 25년 전에 자신이 비판했던 투간-바라노프스키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로스만이 보기에 “30년 전에는 나는 위기 문제를 다루었다. 그 이후로 자본주의는 수많은 위기에서 살아남았고, (...) 오늘 자본주의는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십 년 전보다 훨씬 더 생존 능력이 크다”는 카우츠키의 주장은 본인의 일생에 거친 작업을 부인하는 일이었다. 카우츠키가 도출한 결론 즉, 자본주의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사회주의를 순전히 경제외적인 근거, 정치적인 문제로 치환하는 퇴보였다. 그로스만은 카우츠키처럼 유물론을 포기하게 되면 결국 사회주의는 프루동이 분배의 정의를 요구했던 75년 전으로 후퇴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4. 경제법칙과 수학적 모형의 구성 : 「2장 자본주의의 붕괴법칙」 


“축적과정은 머지않아 자본주의적 생산의 붕괴를 야기할 것이다. 반경향, 즉 구심력 효과와 함께 지속적인 탈집중화 효과를 발휘하는 반경향이 없다면 말이다(『붕괴법칙』, p. 53).”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명백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왜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붕괴이론을 부정했을까. 그로스만이 보기에 『자본』 3권이 출판되었을 때는 독일 경제가 한창 잘나가던 때라 관심 자체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없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도달해야 비로소 자본주의의 붕괴라는 질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 자신의 시대를 한참 앞서갔고,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었다. 그로스만은 자본주의가 성숙한 현시점에서야 비로소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으며 이제 마르크스의 붕괴이론을 재건할 시간이 왔다고 선포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붕괴이론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역사과학으로서 타당한 경제법칙의 수립이 중요했다. 마르크스가 초판 서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자본』의 궁극적 목적은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의 발견’이었다. 그로스만은 그 해답으로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자본주의 체계의 ‘축적과 붕괴법칙’을 제시한다. 『붕괴법칙』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윤율 하락에 따른 자본축적의 한계를 경제법칙으로 요약하고 더 나아가 법칙의 반작용요인으로서 제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한다. 지금부터 그로스만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이를 확인해보자. 
 

『자본』에 숨어있는 마르크스의 연구 방법


그로스만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연구 방법에 대해 강조하며 이를 근사화 방법(method of approximation)이라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메커니즘을 연구하기 위해 덜 근본적인 측면을 사상(捨象)하고 나서 분석을 시작한다. 분석의 출발점에서 마르크스는 화폐가치가 불변이고 수요와 공급이 일치함으로써 가격도 불변이라고 가정한다. 경제위기는 가격 변동으로부터도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러한 위기는 마르크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일단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위기만을 고려한다. 또한 경쟁을 배제하고 이윤분배율도 일정하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처음부터 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생산과정 외부에서 끌어와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배제한다. 이러한 초기 전제 속에서 분석한 결과는 잠정적이며 점차 가정을 완화하여 설명을 추가함으로써 실제 현실에 다가간다. 마르크스의 연구 방법은 오히려 가격 변동과 경쟁에 대해서 훨씬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로스만이 강조하듯이 마르크스의 연구 방법은 잉여가치라는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다. 뉴턴의 동역학이 힘의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추상적 이론의 분석 결과가 구체적인 현실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증명되는지 살펴봄으로써 이론의 과학성을 입증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적 방법론의 목적은 축적과정에서 잉여가치 크기의 변화를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현실을 더 근사(近似)하게 설명하기 위함이다. 마르크스는 기업가는 오직 자신의 이윤을 확대할 수 있을 때만 생산을 지속하고 확대할 것이라고 보았다. 즉 처음에 투하된 자본에 덧붙여지는 가치의 증가분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경제학에서 수학을 최초로 사용했을 만큼 『자본』에 많은 수식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우어의 재생산표식 비판을 통한 수학적 모형의 구성


그로스만은 “나는 공황의 기본 법칙을 수학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바람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로스만의 저작을 통틀어서 가장 공을 들인 비판의 대상은 룩셈부르크를 비판한 바우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로스만은 『붕괴법칙』에서 바우어의 재생산표식의 반론을 계산으로 증명하고 이를 근거로 붕괴이론에 대한 수학적 모형을 구성하였다. 당시 룩셈부르크는 『자본』 2권에 등장한 재생산표식에서는 마르크스의 붕괴이론이 도출될 수 없다고 보았고 마르크스의 재생산표식을 비판했다.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결함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가 반영되어있지 않고, 부문 간 비례성이 지켜지지 않았고, 이윤율 하락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바우어는 마르크스의 재생산표식을 재구성하여 룩셈부르크가 지적했던 결함을 피해 가면서도 자본의 팽창이 인구 성장에 비례한다면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안정적으로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우어는 이윤율 하락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생산된 잉여가치에서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를 위해 남겨지는 이윤의 비율도 지속적으로 감소하지만, 이 역시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산의 절대적인 규모가 증가하면서 그를 상쇄할 만큼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의 절대량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바우어는 이를 4차 연도까지의 계산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로스만은 그 이후로 계산을 연장해 보았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21차 연도부터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는 전년도에 비해 감소하고 35차 연도부터는 마이너스가 된다. 그러나 마이너스 소비는 불가능하므로 36차 연도부터 과잉자본과 과잉인구가 발생하면서 자본축적이 한계에 봉착한다. 초기 조건을 수정하지 않는 한 일정한 시점이 지나자 이윤 생산 자체가 불충분해지면서 과잉축적이 발생하고 자본축적이 중단되는 것이다. 바우어의 주장대로 자본축적 초기에는 이윤율이 하락하더라도 이윤량이 증가하고, 자본가의 소비도 함께 증가할 수 있다. 하지만 과잉축적 단계에 접어들면 축적에 사용되어야 할 잉여가치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 그로스만은 자본가의 소비가 0이 되는 시점의 연도를 공식으로 유도함으로써 붕괴법칙에 대한 수학적 모형을 구성했다. 

이는 마르크스의 설명과도 일치한다.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하락하지만 이를 상쇄하기 위한 이윤량이 증가하는 국면을 상대적 과잉축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윤율의 하락이 지속되면서 결국 이윤의 증가가 정지하고 심지어 이윤이 전년도에 비해 감소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절대적 과잉축적이라고 불렀다. 그로스만이 설명하는 자본주의의 붕괴는 마르크스의 절대적 과잉축적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한 다수의 논자들은 이윤을 조금이라도 산출하는 한 절대적 의미에서 과잉축적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팽창한 자본이 그보다 작은 규모의 자본일 때보다 잉여가치를 더 많이 산출하지 못할 때” 과잉축적이 개시된다고 정의한다. 자본주의가 자본축적을 지속할수록 종국에는 국민소득이 감소하고(역성장) 고정자본이 축소된다는 의미이다(감가상각에 비해 신규투자가 작은 상태). 혁신적인 기술진보 없이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노동자 1인당 자본이 증가함에 따라(자본의 기술적 구성이 고도화됨에 따라) 성장이 점차 둔화된다는 점은 경제성장사에서도 관찰되는 객관적 사실이다. 붕괴이론은 이러한 경향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에 대해서 설명력을 갖는다.
 

과잉축적의 결과 : 과잉자본과 과잉인구(산업예비군)


그로스만처럼 자본축적의 내재적 한계와 절대적 과잉축적을 사고할 때에 비로소 과잉자본과 과잉인구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을 논리적 충돌 없이 이해할 수 있다. 불황기에 접어들면 산업부문의 낮은 이윤율로 인해 생산 현장에 투입되지 않는 과잉자본이 형성된다. 그와 동시에 생산 현장의 고용이 증가하지 않으면서 상대적 과잉인구인 산업예비군이 형성된다. 이러한 두 가지 경향에 대해 그로스만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을 통해 증명한다. 영국과 같이 자본축적 수준이 높은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기술진보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고 임금이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또한 미국의 경우 1928년 3월 현재, 과잉자본, 투자 기회의 부족, 부동산과 주식에 대한 거대한 투기와 더불어 400만 명의 실업자라는 잉여노동 인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붕괴이론은 동시에 위기이론이다 


그로스만은 일단 근본적인 원인들이 규명되면 자본축적 궤적의 주기적인 이탈(순환적 위기)을 설명하는 것은 손쉬운 과제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책 제목에도 나오듯이 마르크스의 축적이론과 붕괴이론은 동시에 (붕괴와 구별되는 순환적) 위기이론이다. 순환적 위기는 고정자본의 가치잠식, 평가절하를 통해 이윤율을 상승시킴으로써 구조적 위기를 다소 완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순환적 위기를 ‘정화(淨化)의 위기’라고 부른다. 그로스만은 순환적 위기가 발생하는 이유를 반경향 요인으로 설명한다. 붕괴경향에 대한 여러 가지 반경향요인으로 인해 붕괴가 일시적 위기로 변형되고 따라서 축적과정의 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고 주기적 순환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본축적에 내재하는 법칙 자체가 점차 반경향을 약화시키게 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다시 이윤율이 상승하더라도 고정자본이 더 큰 규모로 축적되므로 순환적 위기를 통한 가치잠식이나 평가절하의 규모도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고, 위기의 지속 시간과 강도가 높아진다. 순환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더 이상 구조적 위기를 회피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도래한다. 반경향이 점차 한계에 달하면 결국 붕괴 경향이 우위를 차지하고 최종적 위기라는 형태로 영향을 발휘한다. 따라서 순환적 위기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구조적 위기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일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엔트로피법칙 


그로스만은 이상의 설명을 ‘자본주의적 축적의 엔트로피법칙’으로 요약한다. 자본주의는 체계에 내재한 메커니즘을 통해 최종적 종착지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경제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를 의미한다.

그로스만은 마르크스의 위기이론은 다른 특별한 원인을 원용할 필요가 없는 체제 내적인 위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다른 모든 경기순환 이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른 경기순환 이론들은 모두 균형을 전제한다. 그 이론들은 체계 그 자체로부터 위기를 연역할 수 없고 균형의 파괴는 오직 외생적인 요인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위기이론에는 그러한 결함이 없다. 균형을 가정하면서 시작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균형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한다. 붕괴법칙은 마르크스의 사고에서 그 전체 구조를 지탱하는 근본법칙이다. 


그로스만 모형의 결함


그로스만의 이론적 기여와는 별개로 그가 구성한 수학적 모형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그로스만은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자본축적의 중단을 『자본』 2권에 등장하는 재생산표식을 통해 증명하는데, 이는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의 재생산표식은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재생산이 어떠한 조건에서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모델이다. 자본축적의 붕괴 경향은 『자본』 1권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노동에 비해 자본을 더 소비하는 편향적 기술진보의 결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재생산표식을 도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생산표식에는 기술진보나 이윤율 하락이 전제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재생산표식을 도입한 이유는 『자본』 3권에서 나오는 생산가격이 결정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이윤율이 다른 두 부문을 상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생산표식에 기술진보와 이윤율 하락을 도입해서 붕괴를 증명할 이유가 없다. 자본주의의 붕괴에 관한 모형은 성장에는 한계가 있음을 표현하는, 그로스만도 이미 상정하고 있었던 로지스틱 곡선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5.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하다 : 「3장 반경향의 수정」, 「결론 붕괴경향과 계급투쟁」

 
들어가기에 앞서 역사를 설명한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단순하게 나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역사를 인간이 만든 제도를 통해 인과관계에 따라 설명함으로써 자본주의 역사의 발전 양태를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장에서의 설명처럼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자본주의가 붕괴하는 것이 필연적인 경제법칙이라고 한다면 법칙은 왜 순수하게 관철되지 않는 것일까. 그로스만은 이윤율의 하락 경향에 반작용하는 역사적 요인으로 이를 설명한다. 이는 현실적인 설명력을 가지는데 만일 19세기 영국자본주의에 반작용하는 법인자본이라는 역사적 제도가 없었다면 1차 세계전쟁과 1930년대의 대불황 시기에 이미 자본주의는 붕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경향의 작동은 현실 세계에서 붕괴 경향이 중단되고 (순환적) 위기에 의해 다시 성장의 시기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스만은 저작의 절반에 걸쳐 법칙의 순수한 경향이 현실에서 반작용에 의해 어떻게 수정되는지 살펴본다. 그는 이러한 고찰을 통해 붕괴법칙의 정합성을 주장한다. 가격변화, 경쟁 등 기존에 불변으로 가정했던 부분을 수정하고 모델에 새로 도입하면서 이론의 현실 적합성을 높여간다. 그로스만은 『붕괴법칙』에서 반경향을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국내시장과 관련되는 자본의 내재적인 반작용요인, 대표적으로는 ‘자본의 구조조정’이다. 두 번째는 세계시장과 관련되는 자본의 외재적인 반작용요인, 대표적으로는 ‘제국주의’이다. 이와 함께 최후의 반작용 요인으로써 ‘금융화’ 경향을 분석한다. 제국주의와 금융화 현상은 과잉자본을 조정함으로써 이윤율 하락에 반경향으로 작용한다. 물론 반경향은 한계가 존재하는 일시적인 효과이기 때문에 최후의 순간에는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자본의 내재적인 반작용요인 : ‘자본의 구조조정’


그로스만은 붕괴 경향을 늦추기 위해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완화되거나 불변자본의 가치가 감소하거나 잉여가치율을 증가시키는 방법이 필요함을 도출한다(각주 18을 참고하라). 그는 잉여가치의 생산, 실현, 분배의 측면에서 자본주의 내재적인 메커니즘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반경향 요인을 설명한다. 특히 잉여가치 생산에서의 반경향이 중요한데, 불변자본의 가치를 감소시키는 수정요인이 대표적이다. 지금까지는 자본가계급이 단일한 실체라고 간주했지만 이제는 개별 자본가의 상호경쟁을 고려해야 한다. 개별 자본 간의 경쟁을 통해 산업 합리화, 즉 구조조정이 진행된다. 합병의 결과로 등장한 새로운 기업의 경우 노동력을 방출하여 산업예비군을 증가시키고 생산성이 증가하면서 이윤율이 상승한다. 이를 통해 다른 기업도 합리화를 결정하고 점차 기존의 축적의 한계를 넘어 자본축적이 더욱 증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기술진보로 인해 고정자본의 주기적인 가치하락을 동반하는 사회적 마모가 발생할 수 있다. 또 전쟁으로 인한 고정자본의 파괴 역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불변자본의 가치감소뿐만 아니라 잉여가치율을 증가시키는 내재적 요인도 있다. 그로스만은 분석의 초기에 전제한 가상적인 균형 상태에서는 노동력 상품이 완전히 고용되고 노동력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고 가정했지만, 이러한 가정을 하더라도 자본축적의 특정 수준에서는 산업예비군이 필연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산업예비군을 통해 노동력 가치 미만으로 임금을 인하하려는 압박이 형성되고 임금이 노동력 가치 미만으로 하락하면서 잉여가치율이 상승한다. 이는 가치증식의 추가적인 원천이 되며, 붕괴 경향을 극복하는 또 다른 수단이 된다.

세 번째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더 낮은 새로운 생산 영역의 출현이다. 자본축적이 진행되면서 원래 존재하던 자본의 일부분이 스스로 분리되어 새롭고 독립적인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다. 소규모 자본은 현대 산업이 단지 드문드문 존재하거나 불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생산 영역으로 몰려 들어간다. 이러한 영역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낮은 곳이며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노동자가 고용된다. 또한 지금까지는 매년 기술변화가 발생하고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된다고 가정했는데, 주변에서 새로운 생산방법이 도입되더라도 과거의 생산방법에 기초한 자본이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사회의 총자본이 성장한 만큼 이윤율이 하락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자본 간의 경쟁이 존재하는 한 지속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인구와 관련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본의 양이 충분하다면 인구 자체가 증가해서 가치증식의 토대를 더욱 확대하거나 고용되는 노동자의 수(경제활동인구)가 확대되면 잉여가치량이 증가할 것이고 붕괴 경향은 약화될 것이다. 산업화가 급속히 출현하는 시기에는 노동력 부족이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을 편입시키고 식민지로 눈을 돌리는 등 가변자본을 확대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인구가 팽창하고 있는 국가에서조차 과잉축적의 위험은 내재적인데 불변자본이 인구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축적 기간이 지난 후 과잉인구가 발생한다. 따라서 문제는 세계의 이곳저곳에 대규모의 인간이 있느냐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곳에서 그들을 이용할 수 있느냐 여부다. 이러한 그로스만의 분석은 자본주의에서의 인구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며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마찬가지로 잉여가치 실현과 분배의 영역에서도 반경향이 발생할 수 있다. 재생산표식에서는 자본의 회전 기간을 1년으로 가정했지만 생산성의 향상으로 회전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고 교통의 개선으로 유통기간을 단축하고 보관 비용을 절감시킬 수 있다. 또한, 회전 기간이 단축될수록 생산과정에서 분리된 여분의 화폐자본이 발생하고 이러한 화폐자본은 호황기가 개시될 때마다 재생산 규모를 더욱 확대하는 데 이용된다. 화폐자본의 일부분이 유리되면 생산에 투입된 자본이 감소하면서 단기에는 이윤율을 증가시킬 수 있다. 잉여가치 분배의 영역에서도 반경향이 존재하는데, 바로 지대와 상업이윤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이다. 자본주의적 지대는 독점 덕택에 지주가 이윤에 부과하는 단순한 세금이다. 지대의 증가는 자본주의의 붕괴 경향을 가속화 한다. 마찬가지로, 산업자본에 비해 상업자본이 더 클수록 산업 이윤율은 하락하고 붕괴를 가속화한다. 여기서 그로스만은 카르텔과 트러스트를 분석하는데 그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판매거래와 수입거래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수익성을 증가시키는 데 통합의 목적이 있음을 설명한다. 채굴과 생산단계가 한 기업 내부에서 수직적으로 통합되면서 중개 상업이 일소되고 상업자본에 이윤이 돌아가지 않게 된다. 그로스만의 이러한 통찰은 20세기 법인자본의 형성을 반경향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자본의 외재적 반작용요인 : 세계시장 지배를 통한 수익성 회복을 추구하는 ‘제국주의’


마르크스는 분석의 초입에서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어떤 외부적 관계도 맺지 않는 고립된 실체라고 가정했었다. 이제는 국제무역을 고려해야 한다. 즉 폐쇄경제를 먼저 분석한 후 개방경제 분석을 추가함으로써 분석을 구체화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연구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스만은 국제무역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면서 제국주의의 역사를 설명한다. 

국제무역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잉여가치가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기적 구성이 다른 산업의 이윤율이 균등화되고 자본가 간 가치가 이전되는 메커니즘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로스만의 설명에 따르면 유기적 구성이 높은 선진국의 상품은 가치보다 높은 생산가격으로 판매될 것이며 유기적 구성이 낮은 후진국의 상품은 가치보다 낮은 생산가격으로 판매되면서 잉여가치가 이전된다. 따라서 선진국의 붕괴 경향은 완화된다. 이는 자본축적의 후기 단계에서 제국주의적 팽창과 경쟁이 왜 격렬해지는지를 설명한다. 자본축적이 한계에 다다를수록 국외의 잉여가치를 흡수하기 위한 추동력이 커진다. 또한, 저렴한 원료를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행위는 독점이윤의 기회뿐만 아니라 해당 산업 그 자체의 통제로까지 나아간다. 영토를 자본주의적으로, 그 후로는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쉼 없는 추동력으로서 제국주의의 경제적 뿌리는 바로 자본축적 한계에서 비롯된 불완전한 가치증식에 있다. 그로스만은 석유를 향한 영미권의 투쟁이 분명한 사례임을 지적한다. 

또한 자본축적의 후기단계에서 자본수출이 발생하는 이유를 제국주의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곧바로 절대적 과잉축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축적의 과정에서 자본가의 소비가 전년도에 비해 줄어드는 시점부터(앞에서 계산한 재생산표식에 따르면 21년도부터) 이미 수익성이 더 높은 곳으로 자본을 수출하거나 추가적 잉여가치를 획득하려는 노력을 경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라는 위기의 새로운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레닌은 독점의 지배에 기초를 둔 당대 자본주의가 자본수출이라는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고 설명하는데, 그로스만이 보기에 이는 올바른 설명이었다. 국내 주식자본의 집중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면 주식 거래 투기가 추동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고 결국 자본수출로 향하게 된다. 1825년 이후 처음 50년 동안 영국은 사실상 고립된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자본축적의 위기는 격렬한 공황과 붕괴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과잉자본을 위한 외국의 배출구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면서 위기가 지연되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등장으로 위기의 성격이 변화했다. 자본수출국의 수가 증가하는데 비례하여 수익성이 높은 배출구를 향한 경쟁과 투쟁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제국주의라는 반경향은 또한 필연적으로 국내의 위기를 첨예하게 만들 것이다. 
 

최후의 반작용요인으로써 ‘금융화’


자본수출과 마찬가지로 투기의 원인은 생산에서 기회가 없는 유휴자본 때문에 발생한다. 투자처를 찾는 과잉자본은 더 이상 생산에 유익하게 사용될 수 없게 되고 이내 증권 거래 쪽으로 돌아선다. 이는 위기의 말기나 불황기에 과열된 증권 거래 활동이 수반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증권 거래를 통해서는 잉여가치가 창출되지 않는다. 자본은 증권시장 시세에 따라 그저 이동될 뿐이다. 투기는 증권 거래에 발생하는 다수의 소규모 자본가의 손실로부터 흘러나온 이익을 통해서 생산적 활동에서의 가치증식 부족을 상쇄하는 수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투기는 화폐자본의 집중을 일으키는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그로스만은 이 모든 과정을 1926-1928년 당시 미국의 경제적 상황과 결부시켜 설명한다. 

자본축적의 최후 단계에 다다를수록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관계가 변형되는 금융화 현상이 발생한다. 힐퍼딩은 산업에 대한 금융자본의 지배, 즉 은행이 점점 더 산업에 투자되는 자본을 통제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로스만이 보기에 힐퍼딩의 주장은 자본주의 구조에서 생산 그 자체의 중요성을 논하는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을 기각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로스만은 자본의 축적법칙과 연계하여 은행과 산업자본의 상호관계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설명한다. 낮은 수준의 자본축적 단계에서는 산업은 비산업계층으로부터 신용의 유입에 의존한다. 은행은 산업신용의 중개자이자 제공자로서의 막대한 권력을 획득한다. 그러나 축적이 더욱 진전되면서 은행과 산업의 상호관계가 변화한다. 화폐자본의 과잉이 발생하고 산업은 독립성을 확보한다. 축적이 매우 높은 단계에 이르면 산업은 자기가 조달할 수 있는 자금도 많아지고 더욱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까 힐퍼딩의 주장은 특정한 국면에서 관찰되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일반화한 것이다. 문제는 이 세 번째 국면에서 기업은 수익성 있는 투자를 보장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기업은 이윤율 하락을 만회하고자 이윤량 확보를 위해 다른 산업을 자신의 영향권 내로 끌어들인다. 특정 산업의 과잉축적된 자본이 축적 수준이 더 낮은 다른 산업을 인수합병 하기 위해 자금을 뉴욕 화폐시장으로 돌리고 그 자금은 그곳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산업 자본가는 자신의 과잉자본을 활용하여 수익성이 높은 투자를 보장하기 위해 은행에 자기 자산을 보유하거나 자신의 금융제도를 구축한다. 즉, 산업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지배가 아니라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기 어려운 산업자본이 점차 금융자본화 된다. 
 

그로스만의 기여


마르크스는 『자본』 3권에서 반작용요인을 다루는데,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신이 제시하는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결합하지는 못한 채로 남겨두었다. 그로스만은 남겨진 과제를 해결했는데, 이윤율 하락의 반경향으로써 반작용요인들을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등장한 여러 제도로써 분석했다. 이는 역사동역학에 적합한 자본주의 체계사의 모태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로스만이 자본수출과 제국주의 분석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의 정세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제국주의를 세계시장에서 민족자본의 경쟁력을 통해 잉여가치를 획득함으로써 붕괴를 지연하는 수단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영국자본주의의 분명한 특징이다. 다만 현재 미국자본주의는 발권이익과 금융화 기법을 통해 과잉자본을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수입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그로스만의 설명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자본의 구조조정이라는 반작용요인이다. 그로스만은 외부금융이 아니라 내부금융, 수평통합이 아니라 수직통합에 주목한다. 자본의 구조조정이라는 반작용 요인을 법인자본주의론으로 발전시켜 20세기 미국자본주의의 성장기를 분석할 수 있다. 또한 최후의 반작용요인인 금융화를 통해서 현재의 불황기를 분석할 수 있다. 과학적 이론의 적합성은 현실에 대한 설명력으로 입증된다고 할 때, 그로스만이 본질적으로 제로섬 게임인 금융화가 중단되면서 자본주의의 붕괴가 개시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시점은 뉴욕증시가 붕괴되기 1년 전인 1928년 12월경이었다는 사실은 자못 시사적이다.
 

『자본』의 또 다른 결론, 궁핍화 경향과 계급투쟁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제시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보편적 법칙의 결론은 과잉자본과 과잉인구, 즉 금융화와 궁핍화로 요약할 수 있다. 과잉자본의 종착지로써 금융화에 대한 설명으로 본문을 끝내고 있는 그로스만은 결론 부분에서 궁핍화 경향을 다룬다. 이와 함께 계급투쟁에 대한 붕괴이론의 함의를 설명한다. 

붕괴법칙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가 언급한 궁핍화 경향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혼란을 겪었다. 겉으로 봤을 때 노동자계급의 삶의 질이 점차 향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은 궁핍화 경향을 부정하면서 임금을 경제법칙과 관련된 이론이 아니라 계급투쟁으로 결정되는 사회학으로 이해한다. 룩셈부르크도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생산적 자본의 양에 대한 이용 가능한 노동력의 관계라는 수요공급으로 임금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결국 임금 수준은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급의 힘과 조직에 의존한다. 그녀는 궁핍화 경향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고 노동자계급의 조직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임금은 상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하린의 경우 궁핍화 경향을 빈곤화로 해석하면서 유럽, 미국 노동자들 외의 식민지 인민들에게는 빈곤화 경향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로스만이 봤을 때 부하린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오직 빈곤화 이론으로만 해석하며 전체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이 개선될 가능성을 부정해버렸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의 영향력 덕택에 노동력 가격이 개선되었다는 식으로 또다시 외재적 요인으로 임금 상승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로스만은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에만 기초하여 임금 상승 경향을 설명한다. 노동력 상품은 완전히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고 가정해야 하며, 노동력 가격을 그 가치 미만으로 떨어트리는 자본의 시도와 실질임금을 올리려는 노동조합의 행동도 배제하고 분석을 시작한다. 우선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생리학적 최저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고정적이며 사전에 결정된 생활 수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진척될수록, 평균적인 노동강도가 증가하고 노동의 재생산 비용도 증가한다. 과거에 비해 기계사용에 익숙해진 특수한 노동자층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노동의 속도와 노동의 강도가 증가하고 노동자의 교육 훈련 수준이 높아진다. 단순한 노동과 응축되고 노동강도가 높은 집약적 노동은 재생산 비용이 동일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이 발전하면 할수록 노동강도는 필연적으로 증가하며 노동력 가치에 조응했던 과거의 임금은 빠르게 그 가치 미만으로 하락하게 된다. 노동력 가치의 상승은 임금투쟁과 생활 수준 상승을 추동한다. 

자본축적 초기에는 생산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양의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편입시키면서 임금 수준의 상승에 기여한다. 하지만 특정한 수준에 이르면 노동력을 방출하는 반대 과정이 발생하여 임금 하방압력이 발생한다. 실질임금의 상승 경향과 모순되는 점증하는 궁핍화 경향은 상이한 자본축적의 단계를 보여준다. 자본축적이 특정 시점에 이르면 임금이 노동력 가치 미만으로 하락하거나 산업예비군이 증가한다. 따라서 이는 단지 과거사로 치부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궁핍화는 자본축적의 후기 단계에 그 결과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 이르면 구조적 실업자들이 양산되고 노동자계급의 단결 없이는 노동조합의 강력한 저항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노동조합 경제투쟁의 객관적 한계가 존재한다. 그로스만은 “노동자계급의 일상적 요구 투쟁은 최종목표를 위한 정치투쟁과 융합해야만 한다”다며 마르크스의 정치적 결론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계급투쟁은 대중들의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위한 투쟁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의 변화에 관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붕괴이론의 정치적 결론 : 경제주의와 의지주의 양자에 대한 비판


그로스만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붕괴이론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한다. 객관적 조건이란 붕괴를 향한 경향인 구조적 위기이며, 주체적 요인이란 경제투쟁을 지양하는 정치투쟁이다. 객관적 조건을 무시하는 경향이 의지주의, 주체적 요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경제주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객관적인 조건은 고려하지 않은 채 혁명가들의 주관적인 의지에만 의존해서 혁명을 언제라도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자발주의, 폭동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그로스만은 “노동자계급이 거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활로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를 전환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자본주의의 붕괴 경향과 경제위기는 노동자대중의 주체적 행동의 객관적 결과가 아니라 주체적 행동을 위한 객관적 조건으로 인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동붕괴론과 같이 계급투쟁을 무시하고 역사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인식도 비판해야 한다. 붕괴론의 정치적 함의는 변혁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붕괴의 불가피성이라는 객관적 조건이 계급투쟁과 모순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양 계급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 영향을 받지만 그러한 행동에는 특정한 한계와 조건이 존재한다. 한계와 조건을 사고하는 행위는 그 조건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붕괴이론의 역사관은 자동붕괴론이나 목적론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목적론은 역사철학적 개념으로, 역사의 목적과 방향이 존재하고 이를 실현하는 주체를 상정한다. 그러나 붕괴론에는 정해진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긍정적 통과점’과 자본주의의 재건이라는 ‘부정적 통과점’, 여기에 ‘투쟁하는 두 계급의 공멸’이라는 파국의 가능성도 열려있다. 역사적 방향이 아니라 분기를 강조하는 것이 역사과학, 역사변증법의 중요한 함의이다. 
 

6. 그로스만의 현재성 : 자본주의 역사동역학

 
마르크스는 고전경제학의 몰역사적 개념을 비판하면서 개념과 역사의 결합을 시도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지향을 ‘개념으로 설명된 역사’ 또는 ‘이론적 역사’라고 부를 수 있다.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역사동역학으로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그로스만의 이론적 작업은 그 단초를 제공한다. 자본주의의 축적법칙을 엔트로피법칙으로 설명하고 자본축적의 한계를 로지스틱 곡선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로스만의 성과를 바탕으로 경제사의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자본주의 역사동역학으로 체계화한 것은 과천연구실의 성과이다. 동역학이란 힘이라는 원인과 운동이라는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과학이며, 역사동역학이란 이윤율이라는 원인과 자본축적이라는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역사를 분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천연구실은 자본주의의 역사동역학을 구조와 기능이라는 체계론적 관점에서 발전시킨다. 역사동역학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역사를 생산관계라는 구조와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적합한 자본・국가 제도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사를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성과를 발전시켜 그로스만의 분석을 바탕으로 20세기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 반작용요인을 통해 이윤율을 반등시킨 성장기와 반작용요인이 힘을 잃고 이윤율 하락 경향이 우세해진 불황기를 구분해서 살펴보자. 먼저 미국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 경향을 극복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은 자본의 제도 측면에서는 법인혁명과 관리자혁명이었다. 그로스만도 주목했던 수직통합을 법인자본이 주도하면서 이윤율을 반등시킬 수 있었다. 또한 컨베이어벨트의 도입으로 대표되는 관리자혁명을 통해 노동과정을 효율적으로 설계하고 노동강도를 강화시킴으로써 생산성을 대폭 상승시킨다. 국가의 제도 측면에서는 케인즈혁명이라 불리는 거시경제정책을 통해 증권시장의 투기적 활동과 국제적 자본이동을 규제함으로써 불안정성을 해결하고 자본주의를 소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반작용요인의 효과는 힘을 잃었고 1970년대부터 불황기가 이어진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절대적 과잉축적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최후의 반작용요인이 출현하는데,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은 달러 발권이익을 통해 국채와 증권을 전 세계에 판매하는, 자본수입을 지속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창출했다. 이를 통해 극적으로 이윤율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반작용요인은 결국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고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미국 자본주의는 최종적 국면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통해 그로스만의 통찰력과 현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던지는 무거운 질문

 
그로스만은 마르크스에게 존재했던 역사과학이라는 중요한 단초를 복원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역사의 분기를 강조하는 붕괴이론의 정치적 결론은 우리에게 이행의 조건을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로스만은 자본주의의 붕괴 경향과 경제위기가 노동자대중의 주체적 행동의 객관적 결과가 아니라 주체적 행동을 위한 객관적 조건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붕괴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 위한 주체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분석이 후대에 남기는 질문의 무게는 무척이나 무겁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들이 지난 역사 속에서 저지른 과오와 현시점에서의 타락을 쉽사리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붕괴법칙』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는 그로스만이 마르크스의 붕괴이론을 “복원”했듯이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의 “복원”을 꿈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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