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1 가을.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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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여성을 건강하게 하는가

문설희 | 사무국장, 페미니즘팀
2020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낙태죄’는 폐지되었다. 임신중지를 행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비로소 그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임신중지 비범죄화는 최소한의 시작일 뿐이며, 이제 성·재생산 권리의 실질적인 보장을 이룰 수 있는 법과 정책, 사회경제적 지원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무엇보다 건강보험 적용 등 공적 의료제도로 임신중지에 대한 안전성과 접근권을 확대·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여성의 신체와 재생산권에 대한 자율적 결정을 ‘죄’로 처벌해왔던 빈자리를 새롭게 채우기 위한 지속적인 토론과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단 의료서비스에 대한 여성의 접근권 보장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의 권리를 억압해왔던 제도 자체에 대한 변혁이 상상되어야 한다. 이에 여성을 둘러싸고 모순적인 사회관계를 구성해왔던 보건의료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여성의 자율성에 근거한 여성건강을 사고할 수 있도록 하는 두 권의 책을 소개한다.


과학을 ‘도구’ 삼아 신화를 폭로하기

 
1941년과 1948년 미국에서 태어난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와 디어드러 잉글리시(Deirdre English)는 70년대 여성해방운동의 물결 속에서 『마녀, 산파, 간호사: 여성 치료사의 역사』와 『불평과 장애: 병의 성 정치학』이라는 두 개의 팸플릿을 작성하고 이를 방대한 분량으로 보강하여 2004년 『For Her Own Good: Two Centuries of the Experts Advice to Women』을 발간한다. 이는 2007년 국내에 ‘200년 동안의 거짓말: 과학과 전문가는 여성의 삶을 어떻게 조작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소개된다. 

팸플릿 발행 당시 폭발하듯 분출했던 “과학이라는 허울을 쓴 성차별주의에 도전”하는 당대 페미니스트들의 시도와 관련하여, 저자들은 “단지 과학적 사례들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조언을 하는 전문가의 토대 바로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차별화된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즉 “과학과 합리성은 권력자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니라 사이비과학의 신화를 폭로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80년대 페미니즘이 “과학 그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고 ‘포스트모던’ 관점을 수용한 것 역시 비판한다. 록펠러대학교 대학원에서 이론물리학, 분자생물학, 세포생물학을 공부하고 세포면역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한 에런라이크는 이처럼 페미니스트이자 과학자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여성문제’와 부인과학

 
최대한 가정 중심적인 삶을 살라. 
항상 아이들과 함께 있어라.
매 식사 후 한 시간 동안 누워 있어라. 
하루에 단 두 시간만 지적인 생활을 해라.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절대로 펜, 붓, 연필을 잡지 마라.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의 작가로 유명한 샬럿 퍼킨스 길먼은 신경질환으로 쓰러진 후 당시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신경 전문가로부터 위와 같은 처방을 받았다. 길먼은 몇 달 동안은 의사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려 애써 보았지만 “단지 아기에게 옷을 입히고 있을 뿐인데도 그 행동으로 몸을 떨며 울게 되는” 본인의 상태에서 ‘항상 아이들과 함께’ 하라는 처방은 스스로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유해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곧 자기 병의 원인을 이해했는데, 그녀는 ‘가정 중심적인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길먼은 처방을 따르지 않고 남편과 이혼한 뒤 아이, 펜, 붓, 연필을 챙겨서 가정을 떠났고,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각색하여 발표한 후 활동적인 삶을 이어갔다.
 

『200년 동안의 거짓말』은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소위 “불가사의한 유행병”으로 고통받은 여성들과 이러한 “여성 문제”에 대해 과학적 답변을 쏟아냈던 새로운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펼쳐낸다. 저자들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발생한 생활의 공사 영역 분리 등의 변화가 여성 문제가 등장하는 물질적 토대였다고 분석한다. 노동과 생활의 영역이 분리되지 않았던 구질서와 달리 새로운 질서에서 여성은 이질적 존재였다.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던 여성의 전통적 기술은 더는 자랑스러운 게 아니게 되었다. 특히 부르주아 계급의 “숙녀”에게 요구되던 역할은 결혼한 사업가, 법률가, 혹은 교수의 상속인을 낳는 것 외에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여성 문제가 본격적 딜레마로 등장하자, 이를 과학적 수수께끼로 여기고 자연의 이상한 불균형에 골몰했던 이들은 의사였다.

“신경쇠약”, “신경피폐”, “신경과민”, “심박 불완전”, “소화불량”, “류머티즘”, “히스테리” 등 의사들은 다양한 진단명을 붙였다. 그러나 의사의 지속적인 돌봄과 외과 치료, 전기 요법, 물 치료법, 최면 요법, 화학적 치료 등의 개입은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의료는 “질병으로서의 여성성”을 규명해나간다. 19세기에 등장한 부인과학은 “여성의 몸은 심각하게 병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여성의 선천적 허약성, 월경과 출산 자체의 병리적 본성이 강조되었다. 또한 자궁과 난소가 “여성의 몸과 마음의 모든 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핵조차 “변덕스러운 난소”가 원인으로 치부되었던 사례(폐결핵이 생리 중단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증명되기 전의 일이다.)는 질병의 원천을 여성의 재생산 기관에서 찾았던 오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생산 기관은 질병의 원인이자 동시에 치료의 명백한 대상이 되곤 했다. 19세기 중반 거의 모든 여성 통증에 “국부 치료”(손으로 하는 검사 외에도 거머리 붙이기, 주입, 뜸 뜨기 등이 행해졌다.)가 사용되었고, 일시적으로는 음핵 및 난소 절제술이 유행하기도 했다. 세기가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스스로 활동적인 역할을 개척해나가자, “자궁 대 뇌”의 대결구조가 본격화되었다. 지나친 독서나 지적 자극은 재생산 기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의사들은 “여자들이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자궁을 향해 아래로 집중시켜야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러한 관점은 '안정요법'이라는 유명한 치료법의 개발로 이어졌다. 아픈(“또는 다루기 힘든”) 여성은 완벽한 안정(“고립과 감각제거”)을 취해야 한다는 것인데, 의사·간호사를 제외하고 그 어떤 방문도, 읽고 쓰는 것도 허용되지 않은 상태로 6주간 환자는 희미한 불빛 아래 홀로 방에 누워 있어야 했다. (이것이 샬럿 퍼킨스 길먼에게 내려진 처방이었고, 『누런 벽지』 집필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문제는 중상류층의 문제였다. 저자들이 “콜론타이가 존경을 표했다”고 언급하기도 한 산업 현장의 노동계급 여성들은 전염성 질병, 영양부족, 과로와 상해 등에 시달렸다. 하지만 가난한 여성들은 의료 전문직의 관심 밖에 있었다.
 

페미니스트 해법의 실패와 한계

 
앞서 소개되었던 샬롯 퍼킨스 길먼은 병에서 회복된 후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활동가로 활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발달 산업의 서툰 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가족은 자발적 개인들의 연합체가 될 것이다. 여성의 잡일을 물려받을 식당, 유치원, 청소업체는 사업체 형태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페미니스트 해법과 전망에 대한 공포가 여성 문제에 대한 또 다른 해법, 바로 가정 중심성을 고무시켰다면서, “가정 중심성 숭배”는 18세기와 19세기의 ‘낭만주의 운동’과 함께 등장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낭만주의는 “시장을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장으로부터 도망쳐 여성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꼬집는다. “어둡고 악마적인 공장”과 대조되는 “파괴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은 낭만주의자들의 눈에는 “풍요로운 사회”였으며 이러한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회피는 페미니스트 프로그램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가정은 산업사회의 공포로부터 마지막 피난처가 되고 여성은 평화의 장소를 수호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저자들은 당대 페미니즘의 실패 원인을 시장의 편에서 여성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남성과 동등한 발판 위에서 여성을 현대 사회로 받아들이는 것”을 요구한 당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배제의 원인을 깊숙하게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합리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여성운동의 한계도 짚는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기술사회 이전에 존재했던 모계제의 부활이나 여성의 지배를 열망”했던 것이나, 여성의 투표권을 “여성이 종의 수호자인 어머니이기 때문”에 요구했던 당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당시 페미니스트들의 결정적 문제는 당대 페미니즘, 특히 미국의 페미니즘이 ‘가정 중심성’을 받아들이는 타협을 하였다는 데에 있다. 가족제도의 궁극적인 폐지와 집단적 가사노동을 주장했던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있기는 했지만, 남성은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은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에 충실한 남녀 간의 결합이 지배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잡는 과정에 당대 페미니즘의 ‘공모’ 혹은 ‘맹목’이 있었다는 사실을 저자들은 지적하지 않고 있다. ‘가정 중심성의 숭배’가 승리하게 된 주된 이유를 당대 페미니스트 해법에 대한 낭만주의의 반발로 해석하기보다, 산업사회의 작동을 위해 ‘자유로운 시장’과 쌍을 이루는 ‘안식처로서의 가정’이 각각 근대의 제도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전문가들의 ‘배반’인가, 페미니즘의 ‘공모’인가

 
저자들은 19세기 확립된 “가정 중심성”이 20세기 접어들어 “가정과학”과 “육아과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여성과 전문가들 사이의 로맨스”라는 은유로 설명한다. 페미니스트들을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진보와 자유의 편에 서 있던 과학과 합리성을 지지했기에 전문가들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종의 순수성과 낭만성을 전제한 “로맨스”보다는,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되는 새로운 질서에의 편입을 위해 가족을 매개로 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전략적으로 채택한 페미니즘의 타협적 선택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이는 투표권운동을 중심으로 한 분리주의적 여성운동이 주류를 형성했던 미국 페미니즘운동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가사 및 육아와 같은 가정의 일들을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가정과학’은 여성을 위한 고등 교육을 정당화시키는 방편이 되었다. 1916년에서 1917년경까지 미국 공립 고등학교의 20%가 가정경제학(가정과학) 과목을 개설했고, 가정경제학 전공 대학생은 1905년 213명에서 1916년 1만7778명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가정과학자, 교사와 사회복지사 등 여성 전문가들이 대거 양성되고, 수많은 교육받은 가정주부들이 육성된다. 현명한 가정주부들은 과학적인 육아를 실천하는 어머니들이기도 했는데, 『200년 동안의 거짓말』은 “어떤 역할로든 여성의 지위가 점점 더 높아질수록 여성 참정권에 대한 주장은 점점 더 힘을 얻게 될 것이었다”라고 당대 페미니스트들이 ‘가정 중심성’ 숭배에 동참한 까닭을 설명하면서 당시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의 주장을 덧붙인다. “여성은 인류의 어머니요, 무력한 갓난아기의 보호자요, 최초의 선생님이자 가장 열광적인 옹호자이다. 또한 여성은 주부이기에 가족의 삶을 신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그녀에게 달려있다.”

‘육아과학’은 좋은 습관을 습득한 잘 훈련된 건강한 아동을 키워내는 과학적 모성을 설파했다. 규칙적인 수유와 수면이 중요하고, 놀아주기와 안아주기도 정해진 시간에 행해져야 한다는 등의 새로운 육아법이 설파되었다. 이후 양육에 대한 강조점은 아이의 욕구를 세심하게 살피는 사랑과 관대함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과학적 모성의 실행자로서 어머니의 책임에는 변함이 없었고 전문가들의 조언은 계속 추가되었다.

저자들은 “여성들이 전문가에게 부여했던 신뢰를 전문가들이 배반함”으로써 로맨스는 결국 끝이 났고, 가정 중심성 이데올로기는 20세기 후반 조직화된 여성해방운동의 맹공으로 무너져 내렸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즉 전문가들이 제시한 해법들은 여성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진정한 과학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활발해진 페미니즘운동으로 여성들의 자율성이 증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저자들이 앞서 그토록 공을 들여 서술한 전문가들의 등장과 부상의 과정에 비해, 지나치게 싱거운 추락이 아닐지? 또한 주부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그렇게나 강조하던 사회가 왜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것으로 태세를 전환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과소하다.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이 가사 및 양육서비스를 책임지는 성별 분업된 동반자적 가족 형태가 더는 유지되기 어려웠던 경제적 토대의 변화를 도외시한 분석은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일례로 미국에서 1960년 전국 시판이 승인된 경구피임약으로 여성들의 성적 자율성이 확대되고 임신·출산과 학업·직업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나, 피임약의 개발과 보급을 가능하게 했던 산업적 요인 및 피임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사회적 기능에 대한 고려없이 이를 ‘성혁명’으로만 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보건의료제도를 포함한 자본주의적 사회제도와 가족형태가 어떻게 모순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어떠한 선택을 하였으며 또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근본적 고찰 없이 여성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은 의지주의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들은 여성의 자율성이 커진 만큼 “사회의 모든 기관에서 더 많이,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한 “직업적 전문가”로서의 여성(여자 의사를 포함하여) 자신들이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여성들에게 다소 공허하게 들린다. 
 

‘거짓말’ 폭로에서 한 걸음 나아가야

 
『200년 동안의 거짓말』은 18~19세기 의료가 현대적인 방식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의 투쟁 양상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방대한 자료는 분명 매우 흥미롭고, 저자들의 열정은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아메리카 핵가족 내에서 여성의 역할 및 가족 관계에 대해 전문가들이 어떻게 조언했는지를 ‘세균과 가사노동의 생성’, ‘아동의 세기’, ‘병리적 모성’, ‘피학적 모성에서 성적 시장으로’와 같이 특징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솜씨도 대단하다. 그러나 표면화된 갈등의 양상에 치중하여 ‘행위’ 중심으로 시대상을 묘사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여성이 건강할 수 없었던 문제의 원인을 재벌과 손잡은 전문가 집단이라는, 엘리트주의에 의한 권력 독점의 문제로 바라보는 한계도 여실하다. 아쉬움과 한계를 짚고, 저자들이 발굴해낸 풍부한 이야기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우리의 몫이다.

저자들은 신과 가부장의 권위를 뒤엎고 구질서를 해체하는 혁명에 큰 역할을 했던 과학이 이내 새로운 질서의 안정에 기여하는 체제유지의 도구로 전락했을 뿐만 아니라, 권위 그 자체가 되었음을 개탄하며 “전문가(대표적으로 의사)들의 손에 비틀린” 과학, 즉 ‘사이비과학’을 열정적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과학과 보건의료제도의 결함에 대한 내재적·근본적 비판 없이 전문가주의라는 외재적·형식적 비판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명백히 한계적이다. 과학을 ‘도구’ 삼아 ‘전문가의 토대’ 및 ‘사이비과학’의 신화를 폭로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지만, 이는 의료 전문직들이 의료의 성격을 조작했다는 비판에 그친다. 즉 엘리트집단이 자신의 권력 독점을 위해 과학을 조작하고 여성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했다는 주장이다.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성장한 보건의료제도가 단순히 억압과 통제의 기능에 그친 것이 아니라 치료하고 보살피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여성의 삶을 둘러싼 모순적인 사회관계를 형성해왔던 사실은 상대화되고 갈등의 핵심은 의료전문직과 환자의 관계 문제로 치환된다. 그러나 억압의 주요 행위자로 격상된 전문가들 역시 과학과 제도의 일부분이었다. 그들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과학 자체에 대한 거부로 귀결될 수 있다. 이처럼 과학을 도구적으로 활용하여 가짜와 진짜를 가늠하겠다는 저자들의 기획은 그들의 의지만큼 성공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접근 관련해서는 「자본주의와 보건의료의 역사」, 『보건의료 : 사회·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공감, 2006.)를 참조 바란다).

따라서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던 전문가들에 의해 과학이 ‘사이비’가 되었다는 폭로보다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체계적으로 제도화된 과학과 여타 사회조건들과의 상호작용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처한 문제와 혼란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19세기의 ‘부인과학’의 경우 빅토리아적 가족 모델이 필연적으로 야기한 문제, 즉 여성의 수동성과 병약성을 나름대로 설명하고자 했던 ‘합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결과는 철저한 오류투성이였지만 말이다. 또한 저자들이 소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20세기 ‘성과학’의 경우(1920년대 1차 성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제공한 ‘성과학’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부인과학’의 한계를 ‘정신분석학’으로 해결하고자 한 프로이트의 시도가 간단히 소개된다. 그리고 1960년대 성혁명[2차 성혁명]은 여성해방운동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빅토리아적 가족 모델의 무성적 여성의 존재를 성욕을 가진 존재로 재정의하여 20세기 초 동반자적 가족 모델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의 욕망은 가족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출산을 통해 완성되는 여성성)으로 철저히 제한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 과학과 보건의료는 여성의 삶과 건강에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 성별 분업에 기초한 동반자적 가족 모델은 해체되었으나, 공사 영역 모두에서 평등한 남녀관계를 바탕으로 한 가족이 강화되는 경향 속에서 오늘날 여성들에게 생명공학기술의 발달과 재생산의학의 발전이 미치고 있는 모순적 영향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젠더와 건강의 정치경제학

 
두 번째로 소개하는 책에서는 현대의학을 구성하는 개념틀 자체의 한계를 깊숙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여성건강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무엇이 여성을 병들게 하는가: 젠더와 건강의 정치경제학』의 레슬리 도열(Lesley Doyal)은 여성의 현실을 다층적으로 분석하며 여성건강 문제를 위한 이론적·실천적 과제를 논쟁적으로 제시하는 저자의 탁월한 안목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매우 크다. (다만 이 책이 1995년 발간되어 국내에는 2010년 소개된 책이기에 글에서 다뤄진 각종 통계와 사례 등은 현재 상황과 다소 거리가 있는 편임은 고려해야 한다. 일례로 임신중지와 여성 건강의 상관관계를 주제로 한 부분에서 소개된 임신중지 약물의 경우 “극소수 여성만이 이 약을 사용”하고 있다고 언급되었으나, 2021년 현재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는 확대되고 있으며 대한민국 식약처 역시 임신중지 약물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저자는 “여성은 정말 약한 성인가?”라는 질문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통상 여성은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져 왔지만, 실은 남성에 비해 더 많은 생물학적 장점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에서 ‘약한 성’이라는 규정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여아보다 남아가 더 많이 잉태되지만, 자연적으로 유산되거나 사산되는 경우도 남아가 더 많고, 성인 시기에도 여성은 완경기 전까지는 허혈성 심질환을 방지하는 내부 호르몬이 나온다는 생물학적 이점도 있다. 경제 개발과 사회 변화에 의해 감염성 질환과 임신의 위험이 줄어든 후 여성은 더욱 장수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성은 더 많은 질병과 고통에 처해있다. 미국 여성은 건강 문제로 활동 제한을 받는 경우가 남성보다 25% 정도 더 높고, 급성 질환으로 앓아눕는 일수는 35% 정도 많았다. 영국에서 우울증과 불안으로 일 년 동안 일반의에게 상담을 받는 여성의 비율은 각각 남성의 3배, 2.5배다. 또한 여러 국가에서 경증의 진정제를 처방받는 여성은 남성의 최소 2배다. 고령 여성은 관절염, 알츠하이머, 골다공증, 당뇨병 등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 특정 질환의 유병률이 더 높지만 같은 연령대의 남성 노인보다 친척 혹은 친구에게서 받는 지원은 적은 편이다. 젊은 여성은 임신과 출산(또는 임신중절)이라는 ‘정상’적 과정에서 의료의 기능이 향상하고 있는 경향에 따라 의료 서비스를 더 자주 이용한다. 한편 제3세계 국가의 수백만 명의 여성들은 만성적 쇠약 상태이다. 이는 빈혈의 발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선진국 여성의 빈혈 유병률은 12%인 반면 제3세계 국가에서는 적어도 44%의 여성이 빈혈을 앓고 있다. 인도 여성의 경우는 88% 정도가 빈혈을 겪는다. 빈곤으로 인한 감염성 질환과 영양실조도 심각하다. 풍토병의 위험은 남성과 같지만, 생물학적·사회적 요인으로 질병에 노출될 기회가 많고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면 말라리아, 간염, 나병 등은 임신 중인 여성에게 특히 위험하며 여성은 가사 활동으로 수인성 감염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제3세계 여성들은 대부분 남성보다 의료 서비스를 적게 받는다. 특히 농촌 지역 여성은 현대적 의료 서비스는 물론, 산과 치료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진다. 의료진 없이 출산하는 비율은 선진국에서는 1%에 불과하나, 남부 아시아에서는 75%, 아프리카에서는 62%이다. 

여성의 건강을 둘러싼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의 해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놀랍게도 저자는 의학은 여성의 건강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고 밝히고 있다. “의학은 여러 질문과 현실의 변화에 단지 제한된 설명만을 제공할 뿐”이라는 것이다. 현대의학의 ‘생의학적 모델’의 한계, 즉 “건강하지 못함은 인체 시스템 한 부분의 기계적 작동이 실패한 것이며 의학의 역할은 그 손상을 수리하는 것”이라는 개념틀의 문제를 지적하며, 저자는 “이러한 모델에서는 정신과 신체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탐구하지 않으며, 개인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와 문화적 맥락에서 분리된다.”고 비판한다. 특히 여성건강에 대한 현대의학의 접근방식은 매우 협소했는데, “생산과 재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경우에도 너무나 많은 여성 문제를 생식기관의 탓으로만 돌려왔다.”고 그 과오를 짚는다. 이는 의학을 ‘남성의 세계’로 여기고 불신한다거나, ‘사이비 과학’으로 여기며 상대화하는 입장과 구별된다. 현대의학 및 보건의료제도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실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현대의학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역사,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인류학, 문화적 연구를 포함하는 다양한 분야의 방법과 시각이 통합되고 상호작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여성의 ‘공통된 차이’에 주목하는 방법

 
한편 저자는 여성 건강에 대한 분석에 있어 “단순한 일반화와 복잡한 차이 이론을 모두 거부”한다고 밝힌다. “다른 사회적 차별보다 성을 우위에 놓고 모든 여성이 같은 피억압 계층의 일원이라고 일반화”하는 생각을 거부하고 “인종, 계급, 성의 복잡한 관계”를 사고하되, 동시에 “여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문화적으로 매우 다양하고 특별해서 사회 분석의 유용한 카테고리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관점과도 거리를 둔다. 대신 “여성의 상태에서 공통점을 파악하는 동시에 사회·경제·문화적 다양성을 고려”하는 문제 접근방식, 즉 여성의 ‘공통된 차이’(common difference)에 주목하는 방법만이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남성과 다르지만, 여성만이 공유하고 있는 차이인 ‘공통된 차이’에 주목하면서 여성들이 처한 다양한 조건을 함께 사고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여성의 보편적 권리로서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제기한다. 저자는 여성 건강을 둘러싼 각종 문제를 섭렵하면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점과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른 유의미한 차이를 분석한다. 여성이 처한 현실 및 그로 인한 질병과 건강의 문제를 전 지구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동시에 지역적 특성 역시 놓치지 않는 저자의 감각과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 건강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성의 ‘공통된 차이’에 주목하면서 비단 의료에 그치지 않는 정치경제학적 조건들까지 고려하는 방법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여성은 지역별 문화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상 가사와 보살핌을 책임지는 존재이다. 저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직업적 위험요인을 분석하며 그것이 여성 건강에 더욱 특별한 위협이 되는 현실을 짚는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성이 더 많은 소득과 부, 정서적 지지, 우월한 지위와 의사결정을 갖지만, 가계의 어려움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 여성에게 귀속된다. 권리와 책임의 비대칭성은 여성의 과잉노동을 야기하고,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여성이 가정에서 자신의 시간을 갖거나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경우가 드물며, 가계가 빈곤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된다. 이제까지 거의 밝혀진 바가 없는 여성의 성생활과 건강 간의 관계도 살펴본다. 성적 학대, 성폭력, 강간, 생식기 감염 등과 같은 문제와 더불어 여성의 만족스러운 삶에 도움이 되는 섹스를 위해 규명되어야 할 지점들에 대해서도 환기한다. 또한 여성이 건강하고 자율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 재생산은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인데, 임신과 출산 등 모성은 최적의 환경에서 능동적으로 선택될 때에 충만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가족, 종교, 국가주의와 인구증가정책, 사회우생학과 사회적 통제라는 “복잡한 거미줄”이 여성의 생식과 관련된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각종 피임기술, 임신중지 시술 등 ‘재생산 의료화’가 전 세계 여성들의 건강과 삶에 어떠한 모순적 기능을 해왔는지를 확인한다. 중심부 지역에서는 재생산의 과잉의료화가 여성의 건강증진에 오히려 장애가 되는 반면, 제3세계에서는 모성사망과 같은 기본적인 보건의 영역에조차 적절한 자원이 지원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불임과 관련해서 저자는 “불임은 종신형인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지는데, 불임 치료 서비스에 대한 필요를 감소시키는 예방적이고 포괄적인 전략과 더불어 “생물학적 양육보다 사회적인 양육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면서도, 아이를 갖지 못한 제3세계 여성 수백만 명의 비참함, 사회적 배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주의 깊게 다루고 있다. ‘정상적’인 성인 여성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어머니라는 위치는 불임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데다, ‘어머니’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교육받지 못한 여성에게 불임은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비극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임금노동과 여성의 건강과 관련하여 저자는 “여성의 신체적 건강이 임금노동을 함으로써 좋아진다.”는 대부분의 연구 결과를 언급하며 임금노동의 명백한 잠재적 혜택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러나 가사노동 및 자녀 양육과 함께 임노동 병행 시 이른바 ‘여성적’ 직종의 경우 낮은 지위와 과도한 감정노동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소진에다가 성희롱이라는 위험이 추가되기도 한다는 현실을 짚는다. 또한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은 건강을 위협하는 물질로 가득하고 산업적 유해요소들은 재생산 기능과 관련해서 여성에게 추가적 위험을 야기한다는 점도 폭로한다. 나아가 여성의 음식(섭식장애), 음주(알콜남용), 담배 및 안정제 등의 소비를 앞서 다룬 불평등 및 차별과 연결하여 살펴본다.
 

여성건강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저자는 결론의 장에서 전 세계적으로 펼쳐진 여성건강운동의 전략을 조명한다. 의료 개혁뿐만 아니라 재생산의 권리와 직업 건강과 안전을 위한 싸움, 환경과 개발 정책에서 여성의 역할 등 폭넓은 이슈도 포함한다. 여성이 양질의 보건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개선 투쟁은 분명 여성의 건강증진에 기여하였으나, “의료만으로는 여성 건강의 최적화를 보장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다양한 정치적 투쟁이 동반된 과정을 소개한다. 참고로 저자는 「여성보건과 성별 분업」(1985)이라는 다른 글에서 여성건강운동의 전략을 보다 깊이 있게 평가한다. 영국 여성건강운동의 역사를 개괄하고 사회경제적 변화, 특히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복지국가의 해체에 대응하여 여성보건활동가들의 관심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살펴본다. 여성보건이라는 쟁점에 관한 사회주의 페미니즘 분석의 이론적·정치적 의의도 소개한다(『보건의료: 사회·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공감, 2006)에 번역되어 수록되어 있다). 여성이 자신의 육체에 관한 정보를 얻을 권리, 성차별적이지 않은 치료를 받을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 소비자나 환자에 국한되지 않는 여성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이해, 즉 보건의료의 생산자이자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및 여성에 대한 억압구조에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로서 운동의 전략을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저자의 모든 저작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관된 주장이다.

『무엇이 여성을 병들게 하는가』는 여성의 건강상태가 남성보다 열악하게 되는 근본 원인 및 현대의학의 한계를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한다. 미국의 법인자본주의와 상호작용하며 발달한 보건의료제도는 질병의 치료와 예방보다는 증상의 완화를 통한 노동력의 보존을 중시하고, 여성의 성욕과 재생산을 통제하며 특정한 가족형태 및 성적 동일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의료서비스의 혜택을 제공하는 모순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따라서 여성 건강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여성 육체의 고유성을 생식기관의 해부학적 차이로만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합적으로 반영하는 의학적 지식과 제도의 모색이 필요하다. 더불어 성별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가족형태와 이를 물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변혁이 동시에 요구된다. (관련해서는 「가족과 여성보건」, 『보건의료: 사회·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공감, 2006.)를 참조 바란다.)

저자 레슬리 도열이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는 “여성의 건강과 관련된 권리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적절하게 수립하는 것은 여성주의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개발, 정치적 자유, 경제사회적 정의를 위한 광범위한 운동에서도 중심적인 고려 사항이 되어야만 한다.”는 당부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성건강과 관련된 실천 전략을 만들어 가는 것은 ‘낙태죄’ 폐지 이후 여성운동을 포함한 노동자 사회운동의 몫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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