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3 봄. 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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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교사의 19세기 동아시아

『근대 중국과 일본: 타산지석의 역사』

김영진 | 회원,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차장


1. 주제의식

 
오늘날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국제질서는 그 어느 때보다 위협받고 흔들리고 있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2007~2009 금융위기 이후 지속한 장기침체는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 또한, 2022년 2월 24일 발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장기화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는 국제질서를 흔드는 뇌관과도 같은 곳이다. 중국의 권위주의적, 공격적 대외정책은 대만 침공의 위험을 확산시켰다. 일본 역시 미국과의 군사연대를 강화하며 ‘반격능력’ 보유를 선언했다. 북한 역시 명시적으로 남한에 대한 핵위협을 드러냈으며 국내에서도 전술핵배치를 비롯한 핵무장 강화 주장이 더욱 크게 제기되고 있다. 

이전과 같을 수 없는 국제정세에서 어떤 대응과 행보를 보이는가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이다. 지금의 질서가 대안 없이 파국과 붕괴로만 이어지지 않기 위해선 어떤 대응이 필요한가, 혹은 어떠한 행보를 지양해야 하는가? 대안의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현대로의 이행기에 있던 19세기 동아시아는 위 질문들에 대한 역사적 단초를 제공한다. 봉건제에서 현대로의 전환기에 있던 동아시아 삼국(조선, 청, 일본)은 서구 열강의 위협과 자본주의로의 이행 앞에서 각기 다른 선택을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삼국은 서로 다른 역사적 궤도를 보였다. 중국은 청 황조가 붕괴하고 반식민지로 전락했으나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갔으며, 일본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빠르게 완료했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중국 베이징대 역사학 교수인 왕효추의 『근대 중국과 일본: 타산지석의 역사』는 바로 이 시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중국, 일본의 지식인 간 교류의 관점에서 다루는 책이다. 책에서 저자는 1840년 1차 아편전쟁부터 1911년 신해혁명까지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서로의 국가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국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하며 상대국, 국제정세에 대한 적극적 분석과 주체적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글은 이러한 저자의 강조점에 따라 책 내용을 소개하면서 당시 주요 국면을 개괄하고자 한다. 아울러 책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당대 중국과 일본의 정세변화에 대한 조선의 인식과 대응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보충한다. 이를 통해 각국의 인식 차이가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적 궤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지 도출해보고자 한다.
 
 

2. 천사전감(天賜前鑑, 하늘이 내린 교훈): 
아편전쟁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중국관

 

1) 19세기 중엽 동아시아 상황

책의 저자 왕효추는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아편전쟁 이전 중국과 일본 양국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양국은 공통적으로 폐관, 쇄국정책을 펼쳤다. 중국의 청나라는 1627년(강희제 11년) 당시 대만을 기지로 삼으려는 정성공(鄭成功)의 반청세력을 진압하고자 해금(海禁)정책을 실시한 이래, 점차 폐관령을 확대하여 광저우 한 군데에서만 교역을 허가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규제를 통해 무역을 엄격히 제한했다. 식량, 철물, 지도 등의 수출을 금지했으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선박의 제조와 해외무역을 엄격히 통제했다. 비록 왕래를 막지는 않았지만, 상대국에 번속(藩屬, 속지 또는 속국)관계, 조공책봉관계를 요구하는 등 명분을 중시했다. 

일본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펼쳤다. 1603년 건립된 도쿠가와 막부는 1633년, 국내 천주교도들의 반항을 막기 위해 최초로 쇄국령을 반포했다. 이후 천주교 국가인 포르투갈, 스페인과의 교역을 끊으면서 1641년 쇄국령을 확정했다. 이로써 특허받은 선박을 제외하면 모든 일본 선박과 일본인의 해외이동이 금지됐으며, 제한된 국가와의 교역만 허용됐다. 예를 들어, 중국과 네덜란드는 나가사키에서만 무역할 수 있었다. 또한 수입상선 수와 무역액도 제한되었다. 조선과 유구(오키나와)와는 각각 쓰시마번과 사쓰마번을 통해 제한된 교역을 했다.

양국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약 200년 동안 폐관, 쇄국정책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물질적 기초로서 자급자족의 자연경제와 사상적 기초로서 자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화이질서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들어 양국은 모두 불안정해졌다. 양국 모두 사회 내부적으로 정치가 부패하거나 통치력이 약화하여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또한, 밀무역을 벌이던 서양 식민주의자들과 자주 충돌하게 되다. 양국은 기존의 폐관, 쇄국정책으로 방어했으나, 서양의 해상교통과 군사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점 막아내기 어려워졌다.
 

2)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 일본을 메이지 유신으로 이끌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사실은 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일본은 외국의 사정을 주로 나가사키에 입항한 중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전달받았다. 상인들은 반드시 무역사무 관리인 장기봉행(長崎奉行, 나가사키항 지방장관)에 외국 사정을 보고해야 했다. 일본은 「화란풍설서」(네덜란드 상인이 외국 사정을 보고했던 보고서의 제목)와 「당풍설서」(중국 상인이 외국 사정을 보고했던 보고서의 제목)를 통해 아편전쟁에 대한 보고를 전달받았는데, 일본은 이 보고서들을 종합, 비교하면서 아편전쟁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당풍설서」와 「화란풍설서」 모두 일본에선 비밀문서였기에 원래는 막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만이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으나, 통역을 담당하던 통사와 막부 담당자들이 이를 베껴놓았기에 민간에까지 전쟁 관련 정보가 널리 퍼졌다.

당시 막부의 국내 통치력이 약화하고, 무사들의 불만은 매우 높았던 상황이었기에 일본의 지식인들은 아편전쟁에 큰 위기감을 가졌다. 막부관리(막신)를 비롯해, 제후(다이묘), 유학자, 무사들은 앞다투어 아편전쟁을 ‘천사전감’(天賜前鑑 하늘이 내린 교훈)으로 여기며 외적의 침략에 대한 방어대책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청이 패배한 원인을 총괄적으로 분석하여 교훈으로 삼아 내부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막신, 번사(藩士, 번에 소속된 사무라이)들이 상소를 잇달아 제출하며 아편전쟁을 거울삼아 조상의 법을 변통할 것과 개혁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1840년 포술 전문가였던 다카시마 슈한(高島秋帆)의 의견서는 아편전쟁을 교훈으로 삼아 서양의 대포기술을 받아들여 해방(海防)을 강화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었는데, 막신 사이에서 광범위한 쟁론을 불러일으켰다.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원인이 세계형세에 대한 무지였음을 깨달은 중국의 사대부들은 국제형세를 이해하기 위해 외국의 역사, 지리를 연구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외국에 대한 분석서들이 출간됐는데, 이 저작들은 일본 지식인들에 널리 영향을 미쳤다. 위원(魏源)이 저술한 『해국도지』가 대표적이다. 

당시 일본지식인은 수입된 해외 서적을 앞다투어 번역했다. 그리고 번역, 출판된 책은 서양학을 배우고자 하는 지사(志士)들이 만든 사숙(양학숙)을 거점으로 널리 확산했다. 『해국도지』는 1854년부터 1856년까지 일본에서만 21종의 번역본이 출판되었는데, 책이 출판된 지 수년 안에 다른 나라에 여러 종의 판본, 번역본이 나온 건 세계 출판 사상 드문 일이었다. 『해국도지』와 같은 책을 통해 일본인은 세계 각국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중국 아편전쟁의 교훈을 종합해 해방강화, 내정혁신을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이들은 각각 존황개국론, 존황양이론을 주장하며 막부의 쇄국정책을 비판했다.  

1차 아편전쟁에 뒤이어 일어난 태평천국운동(1851~1868)은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더 큰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태평천국운동 직후에는 연이은 전란으로 중국 상선의 일본 진입이 많이 감소하면서 구체적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잘못된 소문들이 돌았는데, 태평천국운동이 명나라 후예들의 복명운동이라든가, 청 황제가 조선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감)할지도 모른다는 등이었다. 그러나 서양 군함, 중국관방 소식들을 종합적으로 접하면서 1854년부턴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게 되었다. 이후 많은 일본 지식인은 태평천국운동과 2차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를 거울삼아, 유신(維新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 지식인에게 청나라 정부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1862년 막부에서 중국 상해로 보낸 교역선 ‘천세환’에 탑승한 나토미 케지로(納富介次郎)는 “현재 청의 쇠퇴는 폭정 때문이다. 만약 사해에 인정을 실시한다면 군사들을 모아 도적 떼를 소탕하는 것이 손을 뒤집는 것처럼 쉬워질 것이다”라며 2차 아편전쟁 후 영국군과 프랑스군에 의존해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는 청 정부를 비판했다. 1864년 무역선 ‘건순환’의 지사들 역시 “중국 전역에 걸친 부정, 부패현상이 장모적(태평군)을 평정하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중국의 내정을 비판했다. 이렇듯, 막말 일본 지식인은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원인과 태평천국운동이 발생한 원인이 내정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내정을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은 메이지 유신을 추진하는 데 이르렀다.

왕효추는 중국과 일본의 개국과정을 비교하면서, 양국의 개국 전 조건과 외부침략의 처지가 유사했으나 이후의 역사발전은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서양의 충격이라는 외부충격을 통치집단이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에 주목한다. 청 황제와 주위 관료, 귀족들은 아편전쟁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지 않고 기존 질서를 고집했다. 오히려 통치력을 유지하기 위해 태평천국운동을 외국의 군대를 빌어 진압했다. 반면, 일본은 아편전쟁을 교훈으로 삼아, 중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서양의 기술, 제도를 학습하고 옛 제도를 개혁해야 함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주도적으로 서양을 배웠으며, 실제로 개혁을 실행했다. 또한, 하급 무사 중심의 유신파 역시 서양의 충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주의를 집중하며 존황양이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했다. 왕효추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러한 주체적 대응의 차이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3. 역보역추(易步易趨, 일마다 다른 사람을 모방하다): 
메이지 유신에 대한 중국인들의 일본관

 

1) 메이지 유신, 중국의 무술유신(변법유신운동)을 이끌어내다

일본의 유신지사들은 ‘존왕도막’(尊王倒幕, 천황을 받들고 막부를 타도한다)의 구호를 내세워 1867년 천황 명의로 왕정복고를 선포하고 막부를 혁파하며 쇼군으로 하여금 관직을 사임하고 봉지(封地)를 반납하게 했다. 이후 1868년, 막부의 구세력과 벌인 무진전쟁에서 막부군을 패퇴시키고 메이지 신정권을 수립한다. 메이지 신정권은 일련의 관제기구 개혁을 포함하는 각종 개혁을 차례로 진행했다. 판적봉환(1869)을 통해 다이묘들의 토지, 백성들을 천황에 반환토록 했고, 폐번치현(1871)을 통해 행정제도를 개편했다. 그리고 신분제 개혁(1869~1873), 사족봉록 폐지(1876), 지세개혁(1873), 헌법제정(1889)의 과정을 거쳐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단행했다.

메이지 유신에 대한 중국 지식인의 반응은 어땠는가? 중국지식인의 메이지 유신에 관한 관심은 1874년 일본의 대만 침공 이후부터 나타났다. 이전까진 일본을 동이(東夷)의 소국으로 여기며 경시했기 때문이다. 일본과 메이지 유신에 대한 중국 지식인의 초기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양무파인 이홍장(李鴻章)과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간 논쟁은 중국 지식인 대다수가 메이지 유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초기의 견해를 잘 보여준다.

이홍장: 귀국이 옛 의복을 버리고 서양식을 따르는 것은 독립정신을 포기하고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인데도 각하께서는 조금도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모리: … 우리는 그러한 변혁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변혁들은 결코 외압을 받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우리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아시아, 미국, 그리고 기타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장점을 발견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우리나라에 이용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홍장: 우리나라는 결코 그러한 형태의 변혁을 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무기, 철로, 전신 및 기타 기계 등은 필요하고 또한 서양의 가장 좋은 장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리: 무릇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그 좋고 나쁨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귀국이 400년 전에 누구도 현재 귀국에서 입는 옷(만주족 옷)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중국과 일본: 타산지석의 역사』, 101~102쪽.

위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홍장으로 대표되는 중국 지식인은 일본의 의복, 정치제도 변혁에 부정적이었다. 유생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중국 지식인은 완고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갖고 있었다. 다만 현지탐방을 하는 중국인이 조금씩 늘면서 중국 지식인 중 일부는 메이지 유신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졌다. 예를 들어, 황준헌(黃遵憲)은 인식의 전환을 겪고 메이지 유신의 성공 경험을 중국이 본받아야 함을 제창했다.

나아가 청일전쟁은 메이지 유신에 대한 중국 지식인의 이해에 전환점이 되었다. 청일전쟁 패배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은 2억 냥을 일본에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했으며(요동반도는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 간섭으로 반환되었다), 조선의 독립을 승인했다. 중국은 재정위기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전례 없는 위기를 맞았다. 이런 위기상황은 중국 지식인의 애국구망운동을 자극하였다.

 그중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와 같은 유신파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던 원인으로 유신에 주목했다. 그들은 중국을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선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변법이 필요하다고 보아, 일본을 스승으로 삼고자 했다. 양계초는 “서양의 여러 학문 서적 가운데 그 정밀한 것은 일본이 모두 번역해 놓았다. 우리는 그들이 성공한 것을 따라 이용하여야 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서양을 소로 삼고 일본인을 농부로 삼아 우리는 앉아서 그것을 먹는 것과 같다. 그 비용은 천만금이 아니니 중요한 책은 모두 모아야 할 것이다”라며 일본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일본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변법 유신을 하기 위한 지름길이었다. 이런 주장엔 일본의 유신이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점과, 청일전쟁 후 러시아의 요동간섭이 심화되는 상황(1897년 러시아의 여순, 대련 점령)에 대한 위기의식도 작용했다.

중국 유신파는 철저히 일본의 현대화 방식을 모방해 변법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메이지 유신을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강유위, 황준헌은 메이지 유신에 대한 분석서인 『일본변정고』와 『일본국지』를 발간했다. 또한 상해 유신파들은 재화(在華) 일본인과 연합해 상해 아세아협회와 같은 학회, 학당을 설립하고, 잡지를 발간하였다. 가장 중요한 일은 황제인 광서제에게 글을 올려, 황제가 군권을 통해 위로부터의 신정개혁을 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1898년 1월 광서제는 강유위를 접견하여 그의 의견에 공감했고, 6월 조서를 내려 유신 변법의 방침과 결심을 알리며 신정을 실시했다. 이후 1898년 9월 21일 자희태후(서태후)의 정변으로 무너질 때까지 약 100일간, 유신파는 메이지 유신의 경험을 소개하고 중국 실정과 결합한 실시방법을 제출하면서 광서제에게 많은 조서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 결과 광서제는 103일간 200여 개의 신정 개혁 내용을 발표했는데, 상당수가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것이었다.
하지만 변법은 자희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보수파와 지방관의 외면 속에 지지부진했다. 이런 와중에 1898년 9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청을 방문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총리를 사임하고 재야 정치인 신분으로 청에 방문했다. 그는 청일전쟁 후 청 정부의 친러경향을 우려하여, 청 정부를 설득하고 일본의 대중국 정책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청 방문 소식은 청 내의 여러 세력에게 기회로 여겨졌다. 친러경향의 보수파는 이토의 내정간섭을 경계하며 정변을 꾀했고, 유신파는 이토 히로부미를 객상(客相, 타국 출신의 수상)으로 삼아 자희태후를 설득하여 유신사업을 전개하고자 했다. 또한 장지동(張之洞), 유곤일(劉坤一) 등 지방 실력자들은 그를 통해 일본 정부의 시국에 대한 태도를 엿보며 일본 정부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이토는 9월 14일 북경에 도착한 후 보수파와 유신파를 두루 만나면서 당시 청의 형세를 파악했고, 이내 유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함을 알아차렸다. 실제로 9월 21일 이토 히로부미가 청에 머무는 도중, 보수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자희태후의 훈정이 시작되고 광서제를 유폐시켰으며, 신정 개혁 명령은 폐지되었다. 유신파 주요 인물 중 담사동(譚嗣同), 양심수(楊深秀) 등 6명이 사형되었고, 핵심인물인 강유위,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렇게 무술유신은 실패로 끝났다. (일본 정부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에서 러시아에 대항하는 영국과 일본의 합작을 중시했기에 일본에 우호적인 강유위, 양계초를 피신시키기는 했으나 보수파의 정변에 대응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2) 메이지 유신에 대한 모방, 무술유신운동을 실패로 만들다

왕효추는 메이지 유신과 무술유신을 비교하면서 왜 메이지 유신은 성공하였으나, 무술유신은 그러지 못했느냐에 대해 평가한다. 두 유신 모두 서방의 침입에 대항하여 서방으로부터 학습한 것을 정부의 명령을 통해 추진하고, 입헌군주제 부르주아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양자는 서로 다른 결과로 나타났다. 메이지 유신은 성공 후 일련의 개혁을 통해 현대화로 나아갔다면, 무술유신은 실패했고 개혁신정은 수포로 돌아갔다.

왕효추는 분석에 앞서 왜 메이지 유신과 달리 무술유신이 실패했는지에 대한 양계초의 분석을 살펴본다. 양계초는 피난 후 당시 일본 수상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 광서제를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무술유신의 실패 원인을 세 가지로 든다. ① 광서제의 어머니인 자희태후의 존재, ② 광서제와 자희태후가 같은 공간(궁궐)에 있다는 점, ③ 광서제, 유신파에 병권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왕효추는 양계초의 분석은 단편적이며, 결정적으로 광서제에게 지나치게 주목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유신파 간의 차이에 주목한다. 

먼저 객관적 조건에서 메이지 유신과 무술유신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 당시에는 막부의 통치 불안정성이 심했다. 농민, 시민 폭동이 크게 일어나 에도, 교토 등지의 군경비가 마비상태였으며, 막부와 조슈번의 대립이 보여주듯 막부와 번들과의 모순, 갈등이 심각했다. 반면 중국 무술유신 당시엔 농민들이 잇따라 난을 일으켰으나 이들이 난을 일으킨 주된 이유는 청 정부에 대항한 것이라기보다는 반기독교 투쟁이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진압되었다. 한편 청 정부는 서양세력에 투항, 타협하였고, 지방 군벌관료에 의지하였기에 일시적으로 통치력이 안정화된 상태였다.

여기에 주체적 조건에서 일본의 유신파는 하급무사가 주축이 되어 막부에 반대하는 강번들과 연합해 보수파를 압도하였으며, 충분한 역량을 갖추었다. 반면, 중국 유신파는 보수파와 비교해 훨씬 미약했다. 구성원은 소수의 사대부 지식인이었으며 병권, 재정권이 없는 광서제에게 의존했다. 이들은 학문은 높았을지언정, 정치 경험과 책략이 부족하였고 여타 세력에 관한 관심도 부족했다. 그런 가운데 개혁의 성공만을 급히 추구한 결과, 오히려 수구파들을 결집시켜 반격하도록 하였다. 1898년 9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21일 갑자기 정변이 발생하여 태후가 정권을 장악하니 이는 황제가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만사를 일본으로부터 본받아 심지어 의복까지도 서양식으로 바꾸고자 하였다”라고 썼는데, 중국 유신파가 당시의 시세에 맞게 움직이지 않고 메이지 유신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아닌 모방만 했을 뿐임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왕효추는 메이지 유신의 성공이 긍정적이기만 하고 무술유신의 실패가 부정적이라고만 보진 않는다. 일본 메이지 유신에서의 봉건적 잔재는 대외확장을 추진하고 군국주의를 배양하여 일본 사회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으며, 무술유신 이후 유신파는 애국구망을 주장하며 서양 학설을 소개하고 계몽을 통해 점차 혁명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음을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무술유신의 역사적 공헌을 잊어선 안 됨을 강조한다. 
 
 

4. 우후춘순(雨後春筍, 비 온 뒤 봄싹이 돋아나다): 
중국 신해혁명, 일본의 다이쇼 정변으로 이어지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 후, 일본의 대외침략 야심과 군국주의가 심화되었다. 무술유신 좌절 이후 등장한 의화단의 반제애국운동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를 중국 침략의 기회로 보았다. 1900년 일본수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한만(韓滿)교환론을 주장하는 일본 정부 내 일부 인사들보다도 더 나아가, 중국 남방 진출을 노렸다. 중국이 열강들에 의해 과분(瓜分, 박을 쪼개듯 분할. 특히 강대국이 약소국의 영토를 분할하는 것을 가리킴)될 것이니, 중국으로 세력 범위를 확장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에 따라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영국, 미국의 지원으로 팔국연합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가장 많은 군대를 파병하면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대량의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에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으로 발돋움했다. 일본 통치집단은 대내적으로 군국주의 전제통치를 강화하고 국내 민주세력을 억압했으며, 대외적으론 식민주의 영토확장, 경제약탈을 강화했다. 신해혁명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정부는 청국에 대해 우세한 지위를 점유하고,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함과 동시에 동북지역, 내몽고지역을 차지하고자 했다. 동시에 중국의 신해혁명과 공화국 건립은 일본제국의 황실중심주의와 충돌하기에 두려움과 적대감을 보였다. 그리하여 청 황실을 유지하고자 기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과 달리, 혁명의 급격한 발전으로 1912년 1월 공화국의 성격을 가진 남경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 2월 청 황제(선통제)가 퇴위하면서, 중국에서 군주정체를 유지하려는 일본의 시도는 실패했다.

중국에서 공화정이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일본 지식인의 관심을 받았다. 신해혁명에 대해 많은 분석이 제출되고 강연회가 열렸으며, 중국문제 연구를 위해 다양한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결성된 단체와 그 구성원은 각기 다른 목적과 주장이 있었다. 일부는 신해혁명을 근거로 삼아 일본 번벌정부를 비판하며 혁명을 지원했다면, 일부는 신해혁명을 기회로 중국침략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들의 활동은 일본에서 신해혁명의 영향을 확대하고 일본 민중 사이에서 중국혁명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왕효추는 특히 신해혁명으로 다이쇼 천황 초년의 호헌운동과 다이쇼 정변(大正政變)이 촉발되었음에 주목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헌법을 반포(1889)하고 국회를 소집하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천황의 절대권력 하에서 번벌들이 통치하는 전제통치에 가까웠다. 특히 20세기 초 연이은 대외전쟁으로 군벌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당시 군부는 국가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육군 2개 사단 증편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수상을 압박하여 내각을 사퇴하게 했다. 그리하여 육군대장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조각했다. 이러한 군벌의 헌정 파괴에 민중의 분노가 커져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 중국 신해혁명의 폭발은 호헌운동을 벌이던 일본인을 크게 자극, 고무했다. 일본 지식인은 중국에서의 신해혁명을 일본에서의 민주 권리 쟁취와 연계시키며 번벌, 관료의 전제통치를 비판했고, 헌정 유지와 민주적 권리를 주장했다. 호헌운동의 열기는 1913년 2월 10일 히비야 공원에서의 국민대회와 이후의 국회 포위로 절정에 달했다. 투쟁 열기에 가쓰라 내각이 53일 만에 사퇴했으며, 후임인 야마모토 곤베(山本權兵衛) 군벌 내각 역시 군대 증강을 강행하다 민중 저항으로 1년 만에 사퇴했다. 이는 일본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민중항쟁을 통해 내각을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한편, 호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에 손문(孫文)이 일본에 방문했다. 그는 일본에서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중국혁명의 경험을 공유하는 한편, 정당정치 발전이 중, 일 양국의 공통적 과제임을 지적하고 삼민주의와 공화제에 관해 연설했다. 이런 손문의 행보는 일본인의 민주 쟁취, 헌정 유지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왕효추는 신해혁명이 일본의 군국주의에 맞선 민주주의 발전 흐름 강화에 영향을 끼쳤음에 주목하며, 두 사건 간의 긍정적 연관성을 강조한다.
 
 

5. 반면교사(反面敎師, 따라선 안 될 본보기): 
19세기 중후반 조선의 대응

 
아편전쟁을 비롯한 서양의 충격에 대한 조선의 반응은 어떠하였으며, 이후 어떻게 대응했는가? 조선 역시 당시의 청,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펼쳤으며 이양선의 위협과 대내적으로 발생한 민란으로 혼란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발한 1840년 1차 아편전쟁은 조선 조정의 큰 관심을 받았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대외 소식을 접하는 경로로 청나라에 매년 정기적으로 보내는 연행사절(燕行使節)이 있었다. 조선조정은 이들 연행사절을 통해 전쟁의 원인, 경과, 결과를 접했다. 따라서 청조가 작성한 관변문서와 같이, 청조의 입장이 반영된 정보를 통해 아편전쟁을 인식했다.

그렇기에 조선 조정과 지식인은 아편전쟁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으며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는 청이 비록 영국에 패배했으나 영토를 상실하지 않았고, 사행원 다수가 자의적으로 아편전쟁을 해석하고 판단하면서 위기의식이 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에 아편전쟁은 아편에 대한 경각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한편, 위원의 『해국도지』 역시 1845년에 수입되며 관심을 받았다. 이는 일본보다 대략 10년이나 빨리 유입된 것이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을 제외하곤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전체 내용 중 극히 일부분인 천주교 관련 내용에 대한 반감만이 더욱 확산하였다. 그 결과, 아편전쟁 이후 조선 조정의 대외정책은 쇄국정책 유지로 이어졌다.

이후 조선은 태평천국운동, 2차 아편전쟁에 대해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엔 위기의식을 가진 사신들의 보고가 있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다 1860년 12월 북경이 함락되어 청나라 황제가 열하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이 들리고서야 비로소 조선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이때에도 청과의 협력을 공고히 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조선 지식인 대부분은 청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낙관했고, 서양의 침략을 받을 시 청의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기대하는 공리적 목적으로 청과의 연합을 강화하자는 주장에 동조했다. 일부 재야 지식인 중엔 청의 혼란을 틈타 북벌을 감행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조선은 1876년 일본의 무력위협에 의해 개항할 때까지도 변화한 국제정세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고, 따라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도 없었다. 

개항 후에도 조선은 청과의 번속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수신사 일행에 러시아의 남하 위협을 경계할 것을 촉구하며, 강화도조약의 후속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기수를 비롯한 수신사 일행은 전통적 외교 관행을 내세워 거부했다. 조선은 이후에도 청, 일본과의 전통적인 사대교린 외교질서를 유지하며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청 역시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 전통적인 번속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런데 청은 초기엔 전통관례대로 조선의 대외정책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이후 러시아의 남진과 일본의 유구 병합에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다. 특히 갑신정변 후엔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 원세개(袁世凱)를 파견하며 대외정책과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다. 이러한 조선과 청의 번속관계는 그렇게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배해 시모노세키 조약에 조선의 독립이 명시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청일전쟁 이후에 오히려 황권을 강화하면서 쇄신의 길을 차단했다. 고종은 국가재정보단 왕실재정을 우선시하였고, 개혁을 추구한 개화파 인사의 상당수를 내쳤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결론: 정확한 정세 분석과 주체적 대응의 중요성


“『시경』의 「소아·학명」편에 다음과 같은 두 구절의 시가 있다. ‘남의 산에 있는 돌도 숫돌을 만들 수 있고(他山之石, 可以爲錯), 남의 산에 있는 돌도 옥을 만들 수 있다(他山之石, 可以攻玉) …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로 표현해본다면, 다른 나라의 경험과 교훈을 진지하게 조사, 분석해야만 본국의 건설을 위한 거울로 삼을 수 있고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근대중국과 일본: 타산지석의 역사』, 240쪽.

왕효추는 책 마지막 장에서 중국 지식인들의 일본 유학, 탐방 기록들을 소개하면서 책의 부제에 관해 설명한다. 그는 다른 나라에 대한 분석이 자국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사실 『근대 중국과 일본』 전체를 관통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앞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일본은 이 부분에서 중국보다 민첩하고 철저했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 무술유신, 신해혁명 등 중국의 일대사건들에 대해 일본의 지식인은 중국의 상황을 분석하고 교훈으로 삼아 자국의 쇄신을 도모하며 현대로 이행할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봉건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해 적극적인 분석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청은 청일전쟁에서 패배했으며, 이후에도 청나라 정부는 이를 교훈 삼고자 하지 않았다. 소수 유신파의 개혁시도는 당시 정세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로 모방만 하다 좌절하였으며,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략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좌절의 경험을 교훈 삼아 중국은 이후 혁명을 통해 근대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조선의 경우는 중일 양국에 미달한다. 조선은 주변국의 정세 급변에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과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중국 중심의 봉건질서에 낙관적이었으며,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며 경시했다. 정세변화에 대해 분석하지 않았으며, 쇄신보다는 오히려 퇴행적인 황권 강화로 대응했다. 이러한 내부에서의 혁신, 쇄신 실패로 조선은 외부에 의한 강제적 현대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렇듯, 19세기 중후반 동아시아 삼국이 서세동점에 대응하던 태도의 차이는 오늘날 동아시아 정세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속 중국의 권위주의 팽창, 북한의 핵위협 증가와 평행한 일본의 군사력 강화와 한국 내 핵무장, 전술핵 도입론의 대두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떠한 대응을 하는 것이 필요한가? 분명한 건 변화하는 정세에 대한 게으른 분석과 대응은 과거 청, 조선이 보여주듯, 국가와 사회가 무너져 버릴 수도 있는 위기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사회운동은 오늘날 변화하는 정세에 대해 민첩하고 치밀하게 분석하고 이에 맞는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기존 정세에 안주하거나 의지만을 앞세운 대응을 이어간다면 위기를 더욱 심화하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며, 결국 그 피해는 민중이 가장 크게 받을 것이다. 1900년대 초반,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이 중심부의 자본주의적 동학에 대한 반대에만 초점을 맞춰, 식민지나 식민지 인민의 권리에 관해 모호한 입장을 취했던 결과, 세계 민중이 마주한 고통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던 역사를 고려하면 그 중요성은 더욱 크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쟁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현재의 사회운동 역시 19세기 말 조선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국제정세 변화에 놀랍도록 무관심하거나, 냉전 시기의 세계관을 관성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식인으로서, 민중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활동하는 활동가로서 동아시아 삼국의 19세기 역사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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