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3 여름.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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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을 버리고 마오와 중국혁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전편)

이아림 | 정책교육국장

중국혁명 다시 보기

 
우리가 말하고 있는 마오주의란 우리가 그것에 대한 부분적 정보들과 그것 자신의 선전을 믿고서 … 먼 외국의 거대한 역사적 경험의 이상화와 결부되어 “혁명적 욕망” 그리고 혁명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의 생산물로서 유럽의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이 발명해 낸 것일까? 
- 「마오: 스탈린주의의 내재적 비판?」, 발리바르, 1988.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은 현재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세기 후반 당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실마리를 마오주의에서 발견했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을 계기로 이루어진 스탈린 격하 운동을 통해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고 치부할 게 아니라면,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로 어떻게 스탈린을 비판할 것이냐는 당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화두였다. 그 시점의 중국은 스탈린식의 생산력 중심주의, 관료제 사회를 비판하며 다른 길을 모색했던 ‘사회주의’ 국가였다. 반면, 오늘날 우리에게 중국은 어떤 의미인가. 

중국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는 보다 높은 가치로 여겨지는 애국주의를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명분으로 활용될 따름이다. 이는 <신시대 애국주의 교육 실시 강요> 제3항에 “현대 중국 애국주의의 본질은 애국, 애당, 애사회주의를 고도로 통일시키는 것이다”라고 규정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는 희미할 뿐이다. 시진핑 주석에 대한 권력 집중과 개인숭배도 강화하고 있는데, 2019년에는 시진핑 주석의 어록과 사상을 담은 온라인 사이트 “쉐시창궈”(學習强國)를 개설했다. 공산당원들은 출근하면 이 사이트에 접속하는데, 접속과 동시에 가산점을 받고, 퀴즈를 풀어 성적이 좋으면 승진 혜택을 받는다고 한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애국청년’ 댓글부대는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이나 외국을 악마화해 사이버 테러를 감행한다. 애국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그에 따른 실천(즉, 사이버 테러)을 강조하는 중국을 보면서 제2의 문화대혁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사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중국혁명의 역사적 결과일까, 아니면 근본적인 일탈일까? 결국 마오쩌둥(毛澤東)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러시아혁명에서 레닌과 스탈린의 역할을 동시에 맡았던 이가 바로 마오이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면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자이자 개척자로서 레닌과 마오를 비교하는 것만큼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자이자 지도자로서 스탈린과 마오를 비교하는 것도 마오라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스탈린과 마오를 비교하기 위해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이후 시기 마오의 발자취에 주목해야 한다. 혁명 이전 “당의 영도권은 구호가 아니라 정책, 명령이 아니라 모범(1940)”이라던 마오는 “사령부를 포격하라(1966)” “모든 반역은 정당하다(1968)”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며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모순적 인간이었던 마오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어떤 시점에서부터 마오는 과거의 자신과 달라진 것일까? 사회주의 역사에서 레닌과 스탈린을 구분해서 평가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과제인데, 하물며 한 사람을 구분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마오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국혁명에 마오가 끼친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 참고할 수 있는 각종 서적이 존재한다. 주로는 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에 초점을 맞추는 책들이다. 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 항변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알아야 할 필요는 있지만, 이러한 책을 통해 왜 ‘선한 의도’로 시작된 혁명이 비극을 초래했는지, 그럼에도 왜 수많은 대중이 이를 지지했는지는 해명하기 어렵다. 때문에 ‘사회주의’를 경험했던 중국에 대해 비난이 아닌 제대로 된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개념적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해당 분야의 진지한 연구자인 모리스 마이스너(1931~2012)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그 필요에 딱 들어맞는 책이다. 마오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마자 출판된 『마오의 중국』(1977)은 이후 덩샤오핑(鄧小平) 시대까지 포함하여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986)로 개정되었다. 그 시점까지 중국 사회를 진정한 자본주의라고 보지 않았던 마이스너는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999) 제3판에서는 관점을 바꾸어 중국 자본주의의 기원과 특징, 사회적 결과에 대해 언급한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두 번이나 증보판을 낸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마오의 사상과 중국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시각이 담겨 있다. 마이스너는 도발적으로, “마오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에서 어떻게 벗어났는가를 아는 것”이 마오주의 이해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마오주의의 가장 이단적인 특징을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유토피아 인민주의라고 규정한다. 더불어, 중국 사회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결과적으로 마오의 중국혁명이 이뤄낸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현대화라고 결론짓는다. 마이스너가 보기에 중국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려는 시도는 “여러 면에서 실패”했고, “사회주의 실험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중국국민당은 무능했기 때문에, 중국이 이룩한 현대화는 그 시점으로 되돌아가더라도 “공산주의자들만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마이스너는 건국 초기에 신민주주의 단계를 성급하게 폐기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들어갔던 시기부터 궤도가 뒤틀렸다고 보았다. 또한, 혁명 이후 마오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동한 변곡점을 대약진운동으로 본다. 

본 글에서는 마이스너가 정리한 중국혁명사를 시대순으로 따라가면서 이러한 관점에 대한 평가를 덧붙여 보았다. 또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혁명가들이 내놓은 답변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후폭풍을 가져왔는지 담아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마이스너의 책에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지만 시기별로 깊게 숙고해 보아야 할 쟁점을 서술했다. 총 두 차례에 걸쳐서 연재하는데, 후속 글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3년 가을호에 실을 예정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혁명의 유산 (1부 혁명의 유산)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내전에서 이기고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소 신화적으로 회자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산당은 국민당에 비해 열세였지만 대장정을 거치면서 농민의 인심을 얻었던 반면, 국민당은 공산당 토벌에 열중하면서 항일투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이 내전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적인 해석과 다른 결로 마이스너는 사회계급과 사상사적 맥락에 주목한다. 

19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구 사회질서가 무너졌지만, 새로운 사회계급은 미약한 불안정한 상황이 형성된다. 기존의 통치계급인 신사·지주층은 기생적이고 부패했으며, 새로운 현대 자본가계급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중국에는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대리인 노릇을 하는 소수의 상업금융 부르주아지와 이보다 더 미약한 소수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났을 뿐이다. “서양 자본주의의 산물이었던 중국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에 상응하는 서양 프롤레타리아트의 창백한 반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회계급도 지배적 위치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세력이 바로 지식인이다.

현대중국에서 지식인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반(反)제국주의와 반(反)전통주의다. 즉, 그들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고 강한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려는 내셔널리즘 경향이 강했고, 중국의 전통사상을 내던지고 서양의 새로운 현대적 사고를 받아들였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서구와 같은 강한 국가를 만들기 어려움을 깨달았던 것이다. 자국 문화에 대한 반전통주의는 신문화운동(1915~1919)에서 정치적 방식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현대중국 지식인의 특징은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사상의 힘을 대단히 신뢰했다는 점이다. 

1919년 서구의 민주국가들이 산둥반도를 일본에 양도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격렬한 내셔널리즘적 분노가 많은 지식인을 정치적 행동주의에 경도되게 했다. 서구와 다르게 레닌은 옛 차르 제국이 갖고 있던 중국에 대한 이권을 깨끗이 포기했다. 이로써 지식인들은 서양의 ‘민주’ 국가들이 중국에 민주와 과학의 원칙을 가르칠 수 있다는 믿음이 깨졌고, 유럽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사회주의 이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현대서양의 가장 선진적인 지적 산물임과 동시에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로 비쳤다. 이러한 기원으로 인해 내셔널리즘은 중국 마르크스주의에서 새로운 교의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은 처음에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중국국민당과 동맹을 맺게 되지만(1차 국공합작), 1924~1927년 노동자, 농민의 대중운동을 거치면서 국민당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마오는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교훈을 얻고 모스크바가 “혁명적 지혜의 유일한 보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유랑 농민을 끌어모아 산적 두목들의 군대와 연합해 그 유명한 대장정을 거쳐 1936년에 옌안에 도착한다. 

열세이던 이들이 10년 안에 100만 이상의 군대로 성장해 내전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의 침략이라는 정세적 조건이 컸다. 전쟁은 국민당 정권의 모든 기반을 무너뜨렸다. 특히 농촌에서 국민당의 행정적 권위가 대부분 무너졌고 게릴라전이 익숙한 공산당이 농촌지역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일본점령 8년 동안 공산당의 권력은 급속하게 확대된다. 열정적인 내셔널리스트였던 공산주의자들은 농촌의 단순 소박한 반외세 감정을 현대적인 내셔널리즘 의식으로 전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빈곤 상태에 있던 농민들에게 토지개혁의 매력은 더욱 커졌다. 일본 침략군은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국민당 군대와 관료들을 제거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혁명에 공헌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운동의 좌절이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줬다고 볼 수 있다. 현대적 사회세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부르주아지는 현대국가를 수립할 역량이 없었다. 현대적 산업화를 완수하는 과업은 혁명 후 공산주의자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객관적 상황이 그러해도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레닌이 없었다면 10월 혁명이 발생할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마이스너는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 중심이 아니라) 농촌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마오주의의 이단성에 주목한다. 마이스너는 마오쩌둥의 사상을 몇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주의주의였다. 마오에게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필수요소는 사회발전의 객관적 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이었고, 혁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혁명가의 의지였다. 현실적으로도 뿔뿔이 흩어진 게릴라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상개조’와 ‘의식개조’ 캠페인은 중요한 요소였다. 

마오쩌둥의 주의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의 결정론적 경향을 희석”했던 것만큼 마오쩌둥의 강력한 내셔널리즘 경향 역시 마르크스주의를 중국혁명의 필요에 맞게 변용시켰다. 마오는 “혁명은 반드시 고조될 것이며 이는 서방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빨리 일어날 것”, 즉 중국혁명이 세계혁명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마오는 적대적인 자본주의-제국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중국이 잠재적인 프롤레타리아 국가이고 진짜 적은 제국주의 외세라는 내셔널리즘 신앙을 지녔다. 이러한 신앙은 외세에 맞서는 중국‘인민’ 안에 혁명적 사회주의 의식이 내재한다는 인민주의적 경향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마이스너가 보기에 마오의 사회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보다 아나키즘에서 출발했다. ‘후진성의 이점’ ‘상호부조 개념’ ‘연방주의’(federalism) 등의 아나키즘적 개념은 마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마오는 진정한 혁명적 지식과 창의성이 인민 자신에게 나온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지식인과 전문가에 대한 심한 불신, 관료제에 대한 깊은 혐오, 도시에 대한 편견, 영웅적·혁명적 자기희생에 대한 낭만적 정서를 가졌다. 마오는 혁명가의 정신과 이데올로기가 도시화로 인해 부패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 농촌을 이상화했다.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이후 중국혁명 과정에서 반복되는 갈등의 핵심 지점이 된다.

대장정(1934~1935)과 옌안 시기(1936~1946)를 거치면서 국가 수립 이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일들이 일어났다. 마이스너는 이를 ‘옌안의 유산’이라고 부른다. 결정적으로는 마오의 권력이 공고해졌다. 마오의 권력을 견제하던 소련 유학파 출신 ‘28인의 볼셰비키’는 거의 사라졌고, 대장정 기간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마오에게 엄청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1937년에 벌써 마오쩌둥은 ‘불사신’으로 통하고 있었다.) 또한, 옌안 시기를 통치하면서 반(反)관료주의 운동, 하방·하향 운동 등 이후 중국 역사에서 반복되는 정치운동이 시작됐으며, 전쟁시기 자급자족,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 운용을 경험하기도 한다. 
 

쟁점①: 중국혁명의 농민적 기원과 인민주의라는 문제

마이스너의 설명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바로 마오주의의 이단성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마이스너는 마오의 주의주의, 인민주의적 경향이 소련과 다른 노선을 걷게 되는 핵심이라고 보았다. 마오는 계발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대중에 대한 신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대중의 후진성, 무식이 혁명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신념으로 대중을 신뢰했다. “빈곤(농민)과 백지(청년)”가 이점이라는 마오의 사고는 이후에도 계속 반복된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농민의 혁명적인 역할을 강조하며 농촌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인민주의자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자리 잡았다. 이는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지적 신념보다는 러시아혁명의 정치적 메시지를 먼저 수용한 이후에 그 교리를 학습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연유했다. 인민주의자로 시작한 플레하노프가 사상적 전향을 거쳐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러시아에 전파했던 것과 달리,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인 리다자오는 마르크스주의를 인민주의적으로 해석했으며 청년 지식인에게 브나로드 운동을 제안했다. 마오는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1894)에서 인민주의자를 비판했던 레닌과 달랐다. 레닌은 지식인의 ‘의식성’과 대중의 ‘자생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입장과 정세에 따른 기준이 있었다면, 마오는 이 둘의 긴장을 제대로 숙고하지 못했다. 이후 마오는 대중의 무한한 자생성을 옹호하다 대중운동이 당의 입장과 대립하는 곤란한 상황이 초래하자 이를 폭력적으로 덮어버리게 된다. (이는 후속 글 문화대혁명 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이처럼 러시아와 다르게, 인민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중국에서 역설적으로 농촌기반이라는 독특한 혁명전략이 출현할 수 있었다. 마오의 인민주의적 성향은 신민주주의 시기를 급속히 종결하는 과정에서, 대약진운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쌍백운동이 반우파투쟁으로 역전되는 상황에서, 문화대혁명의 시작과 끝에서 즉, 중국혁명의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일정한 질곡으로 작용한다.
 
 

신민주주의 시기의 조기종결 (2부 새로운 질서: 1949~1955년[1])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은 4년이 채 되지 않는 경제적 회복기를 거쳐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선포한다. 이 시기를 신민주주의 시기로 부르는데, 마이스너는 신민주주의의 급속한 종결을 섣부른 결정이라 지적한다. 국유부문과 민간부문의 공존했던 신민주주의 시기는 개혁개방 시기를 거치면서 복권된다. 마치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쳐 레닌의 신경제정책이 복귀되듯이 말이다. 신민주주의는 왜 빠르게 종결했는가? 신민주주의의 조기종결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나? 이를 짚어보기 위해 마이스너의 설명을 따라 신민주주의 시기를 살펴보자.

중국의 공산주의자는 러시아보다 훨씬 낙후한 경제를 물려받았고 전쟁의 피해도 극심했다. 따라서 경제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립하는 일이 우선시 되었고, “3년 회복, 10년 발전”이라는 차분한 슬로건이 당시의 상황을 대변했다. 마오쩌둥은 “우리의 현 정책은 자본주의를 통제하는 것이지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신민주주의 시기는 자본주의적(적어도 반(半)자본주의적) 발전단계가 상당 기간 지속되리라 약속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으로 중국 공산당은 신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경제회복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신민주주의 시기는 노동자·농민 동맹에 기초하되 노동계급의 지도 아래 있는 ‘인민민주독재’ 국가를 의미했다. ‘인민’에는 프티부르주아지와 민족부르주아지도 속했다. 신중국 건설에 민주적 지식인과 개인사업가를 포섭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행정기관에서 많은 비공산주의자가 고위직을 차지하거나 높은 직함을 얻었다. 단적으로 6명의 공화국 부주석 가운데 3명이 공산당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는 새 정권이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반영했다. 계급동맹정책은 국가사업을 위해 비공산주의자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고, 개인 사업가와 과학기술 지식인에게 자본주의적 기업을 당분간 허용할 것임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는 새 정부의 약속에 어느 정도의 신뢰감이 형성되었다. 

사실 회복 조치는 특별히 ‘공산주의적’인 부분은 없었다. 어느 강력한 정부든 그 상황에 부닥쳤다면 취했을 법한 정책이었다. 내전 당시 강력한 반(反)도시 정서를 가진 공산당, 홍군 간부가 도시에 진입했을 때, “그들은 전깃불을 어떻게 끄는 줄도 모르는” 상태였다. 당시 도시는 엄청난 실업과 부패로 얼룩졌고 영양실조가 만연했다. 깡패조직, 지하조직이 판을 쳤고, 아편중독자, 매춘이 횡행하고, 위생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이 가진 유일한 자산은 국민당에 대한 시민의 반감이었다. 국민당이 실패했던 것과 달리, 공산당은 행정질서를 복구하면서 혼란한 도시를 빠르게 정화했다. 3년이 채 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아편중독자는 사라졌다. 

경제정책 역시 특별히 ‘공산주의적’이지 않았다. 물론, 자유방임주의 경제는 아니었고 국가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특성이 경제체제 안에 공존했다. ‘관료부르주아지’가 소유했던 공업 및 상업 조직과 은행은 국유화되었다. ‘민족부르주아지’는 공업기업과 상업기업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자본주의 방식으로 경영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물론 공산주의자가 완전 몰수와 전면적인 국유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는 부르주아만이 갖고 있던 관리기술과 전문기술을 이용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던 측면도 있었다. 

농촌에서는 신민주주의의 주된 약속 중 하나였던 토지개혁을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이는 새정권에 대한 농민의 지지를 공고하게 해줄 수 있었다. 토지개혁은 다소 온건하게 진행되었는데 동맹에 기반한 경제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정부기조도 있었지만, 무분별한 살상이 자행되었던 옌안 시기 토지개혁의 악몽 때문이기도 했다. 부농은 고농(雇農)을 고용할 수 있었고, 토지의 일부를 소작농에게 임대할 수 있었다. 부농에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펼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적 소유권이 발전할 수 있었는데, 정부는 새 토지소유자에게 땅문서를 발급했고, 이 땅문서 소유자는 법적으로 자유롭게 땅을 매매·임대할 수 있었다. 토지개혁은 개별농민 경작자라는 거대한 프티부르주아 계급을 낳았다. 역설적으로 사유재산 폐지를 목표로 하던 공산당이 농촌지역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가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신민주주의는 4년도 채 되지 않아 종결한다. 러시아가 맞닥트린 상황과 유사하게, 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자 중국에도 빠른 공업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한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5개년계획을 모방한다. 1953년 1월 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1953년 10월 1일, <사회주의 과도기의 총노선>을 선포한다. 즉,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완료했고 사회주의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다.

이렇게 신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이 깨졌다. 1951년 관료의 부패·낭비·관료주의에 반대하는 3반(反)운동과 민간자본가의 뇌물공여·세금포탈·부실생산·국가재산절취편취·국가경제정보절취에 반대하는 5반(反)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5반운동을 계기로 민간자본의 대대적인 국유화가 진행된다. 은행은 모두 공사합영은행이 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자본가는 “제국주의 및 장개석 집단과 결탁돼 있다”는 명목으로 탄압했다. 이를 통해 국가가 모든 사영기업의 자금줄을 쥐었다. 1949년 국영공업 대 사영기업의 비중(생산액 기준)은 34.2% 대 63.3%에서 1952년 52.8% 대 39.0%로 역전된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각종 상업신문은 공사합영이 되었고, 1952년 7월부터 자산계급사상을 선전할 수 없게 통제되었다. 공산당은 캠페인을 통해 지식인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이후 쌍백운동 시기가 되면 이때의 억압으로 인해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게 파였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게 신민주주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쟁점②: 왜 신민주주의는 조기종결 되었는가

마이스너는 신민주주의 조기종식은 상당 부분 마오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실제 신민주주의가 폐기되는 과정을 보면 신민주주의를 종결하는 데에 마오의 의중과 역할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신민주주의 시기는 사회주의적 부문과 자본주의적 부문이 서로 공존하며 “경제적 경쟁”을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 경제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강제적 방법보다는 체제적 우위를 가져가면서 점진적으로 사회주의 이행을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1948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점쳐지자 마오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변한다. 마오쩌둥은 민간자본을 대중운동의 방법을 통해 “몰수”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문제는 건국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터졌는데, 몇몇 급진적인 지역에서 부농을 억제하고 농업집단화를 가속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류사오치(劉少奇)는 신민주주의 시기의 정책과 공동강령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 반대하지만 마오는 류사오치를 비판하고 반대세력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렇다면 마오가 원래 약속을 저버리고 신민주주의를 빠르게 종결한 원인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선 마이스너는 소련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지적한다. 마이스너가 보기에 마오는 신중국을 건설하기 전까지는 스탈린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혁명전략을 만들어 이 자리까지 왔지만, 혁명 이후 발전전략에 대한 스탈린의 방식에 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은 사회주의 정권의 주도로 경제적 후진국이 어떻게 공업화를 이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유일한 역사적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중국은 국가 수립 이후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서 소련의 기술자와 경제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냉전이라는 국제정세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코앞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지원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조건으로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이 큰 제약이 되었다. 반혁명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중국 사회는 정치적 공포의 시대로 치달았다. 결국 1951년에는 공포정치가 시행되었고 온건하던 토지개혁도 점차 가혹해졌다. 이렇듯 온건정책에 균열이 발생했다. 또한 전쟁을 거치면서 국방강화를 위한 중화학 공업의 발전이 절박해졌다는 이유도 존재했다. 유용태 역시 당시 소련의 압력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중국의 정책 전환은 냉전의 고조와 함께 동유럽에서 이뤄진 급속한 스탈린화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 마이스너는 신민주주의가 빠르게 종식된 이유의 상당 부분은 마오의 사상적인 측면에 있다고 주장한다. 마오는 항상 자본주의에 대한 인민주의적 성향의 적대감을 품고 있었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전제해야 한다는 이론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와 같은 옌안 시기의 마오주의가 서서히 복류하기 시작했고 중국혁명의 앞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남주는 지나치게 빠르게, 넓은 영역에서 집단화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강제하려고 했던 급진주의의 토대가 신민주주의의 폐기과정에서 구조화되었다고 평가한다. 신민주주의론 폐기의 원인은 곧 이후 마오쩌둥 시기의 정책적 오류, 급진주의의 원인과 일맥상통한다는 평가인데, 마이스너의 평가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쟁점③: 신민주주의 조기종식의 후과는 어떠했나

마이스너는 신민주주의 시기를 빠르게 종식한 것이 이후 중국혁명에 질곡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조기종식을 계기로 마오의 급진주의가 점차 부활했고 이후 중국혁명에서 계속해서 정책적 오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민주주의의 폐기가 어떠한 함의를 갖는지 알기 위해서 시계를 돌려 신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해서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소영에 따르면 신민주주의론은 쑨원(孫文)의 절제자본론(민간자본을 통제하여 국가자본을 발전시킨다)과 평균지권론(토지를 국유화하되 경작권을 갖는 중농을 육성한다)을 계승한 것이고 더 나아가, 레닌의 신경제정책에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쑨원은 ‘러시아를 스승으로 삼자’(以俄爲師)고 말하며 신경제정책을 받아들여 기존의 민생주의에 절제자본론을 추가했고,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쑨원의 절제자본론은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민족부르주아지를 대변했던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민주동맹, 중간파 지식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은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소련의 경제발전에 매력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은 레닌의 신경제정책과 쑨원의 절제자본론을 계승한다는 입장에서 신민주주의론을 채택했지만, 쑨원의 후계자를 자임했던 장제스(蔣介石)는 절제자본론과 정반대인 관료자본을 양산하고 있었다. 이에 신민주주의론의 이론적 기반인 관료자본주의론을 정초한 천보다(陳伯達)는 장제스를 비판하는 저술활동을 통해 이름을 알린다. 이로써 일종의 반(反)장제스, 반(反)관료자본주의 연맹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물론, 절제자본론과 신민주주의론의 핵심적 차이는 존재했다. 전자를 지지했던 다양한 세력은 이러한 경제체제를 시행할 주체로 다당제 의회민주주의 국가를 설정했지만, 후자의 경우는 공산당의 지도력을 인정하는 계급연합정부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여한 중간파 세력은 계획자로서의 공산당의 지도는 인정하면서도 절제자본론의 기조가 유지되기를 기대하며 건국에 참여했다. 이로써 신민주주의 시기 기대되었던 공존과 온건정책은 계급동맹의 실질적 토대로 기능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임시헌법인 인민정협 공동강령(1949.9)에서 명문화된다.

따라서 신민주주의의 폐기는 결과적으로 소련에서 신경제정책이 조기에 종식된 효과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계급동맹의 파기다. 레닌은 농촌을 희생해 급속한 공업화를 달성한 전시공산주의 정책의 부정적 효과를 반성하고 사회주의를 장구한 이행기로 사고하면서 신경제정책을 제안하게 된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을 종식한 후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주도로 5개년계획을 시행한다. 스탈린은 농촌 수탈을 통한 빠른 속도의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농민과의 계급동맹을 파기한다. 볼셰비키는 그로 인한 반발을 폭력으로 억압하게 되고, 테러를 당한 사람들은 사회의 불순분자가 되어 계속 감시당하며 폭력에 노출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중국 역시 유사한 순환고리가 작동했다. 신민주주의의 폐기를 거치면서 민간자본가, 비공산주의자, 부농은 정책과 모범을 통해 설득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강제적 방식을 동원해야 하는 계급의 적이 되었다. 중국은 비교적 공포정치의 시기가 짧았는데, 급속하게 정리된 것처럼 보였던 사태는 이후 다시 복류한다. 급격한 사상개조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불만은 이후 쌍백운동에서 당에 대한 비판으로 분출하게 되고 이를 반우파투쟁으로 덮어버리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처럼 신민주주의의 조기종식의 결과는 이후 중국혁명의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을 잉태했다. 
 
 

1953년,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선포하다 (2부 새로운 질서: 1949~1955년[2])

 
1953년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다. 중국의 5개년계획은 소련에 비해서도 중공업 발전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었다. 공업에 투자한 국가자본 가운데 88.8%가 중공업에 투자됐지만 경공업 투자비율은 11.2%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경제 입안자들은 의욕이 넘쳤는데, 스탈린마저도 중국의 성장률이 ‘무모한’ 목표라고 보아 목표치를 20%에서 15%로 하향조정할 것으로 요구할 정도였다. 결과는 1952~57년 연 16~18%의 성장률이라는 놀라운 성공이었다. 

이러한 성공에는 대가가 따랐다. 소련식 경제 모델을 따라가면서 중국에 소련식 정치조직과 국가 행정방식이 이식된다. 1954년에는 국가감찰부가 확대되었는데, 이들의 임무는 공업부문의 비효율성과 부패를 감시하고 국가의 경제지표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공장관리자의 전문성을 키우는 ‘1인 관리제’와 함께 물질적 인센티브를 강화해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을 확대하는 임금정책이 시행되었다. 간부는 “대중의 선생이자 학생”이 되어야 했으나 점차 “책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관료로 변모했다. 오히려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간부의 향촌습성, 유격대정신이 비판받았다. 마오주의의 혁명적 유산이 암묵적으로 부정당하고 있었다. 5개년계획의 사회적 후과도 지대했다. 공업화를 위한 자본은 기본적으로 농촌에서 조달했기에,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가 심화했다. 소련의 교육방식을 빌려온 새로운 교육체계는 특권화된 기술지식인을 양성했고, 이는 고위 당정 관료, 지식인, 기술자의 자녀와 같이 특권화된 계층에게 유리했다. 

혁명정신의 쇠퇴, 소련의 정치적 침투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인민공화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대적인 관료 숙청이 발생한다. 일명 가오강 사건인데, 가오강은 스탈린의 대변자로 비쳤고 만주 지방에 ‘독립왕국’을 세우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자살한다. 이후 광범위하게 ‘숨은’ 반혁명 분자 박멸운동이 이어졌다. 이는 지식인에 대한 탄압으로도 번지게 된다. 문학비평가 후펑(胡風)은 국민당과 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묘사되었고 ‘반혁명분자’로 체포된다. 
 
마오가 보기에 5개년 계획의 결과는 사회주의 미래로 가까이 다가서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마오는 농촌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당시 농촌에서는 토지개혁 이후의 과제로 집단농장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는 토지에 대한 농민의 집착을 알았기 때문에 농업집단화는 먼 미래의 목표로 인식했다. 따라서 세 단계를 상정했는데, 여섯 개 이상의 가구가 협동작업을 벌이는 ‘호조조’(互助組)에서, 모든 토지를 취합하여 협동 경작하지만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각 농가에 있는 ‘초급 합작사’로, 나아가 토지소유권이 폐지되고 “각자의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 원칙에 입각한 ‘고급 합작사’(집단농장)라는 순서였다. 제1차 5개년계획에서는 농가의 1/3만을 초급 합작사로 조직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역시도 자발적인 권유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생산성이 생각만큼 오르지 못했고, 합작사에 대한 농민들의 열의도 높지 않았다. 점진적인 계획조차 실패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정부는 농촌지역에 당 조직을 부활하고 합작화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물론 군대가 투입되고 유혈이 낭자했던 소련의 교훈을 잊지 않고 질서정연하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추진하자는 것이 3년간 논쟁의 결론이었다. 그런데 마오는 독단적으로 당의 합의를 깨고 목표를 앞당긴다. 자신이 소수파에 속했던 중앙위원회가 아니라 당 위원회 서기회의에서 <농업합작화에 관한 문제>(1955)라는 연설로 포문을 연 것이다. 마오는 농촌의 합작사가 너무 성급하게 건설되고 있다고 느끼는 당 지도부와 달리, 너무 더디게 진행된다고 선언했다. 다시 말해 관료가 외려 혁명대중의 열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오는 “대다수 농민이 사회주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적극성”을 갖는 데 반해, 많은 당원은 “전족을 한 여인같이 항상 다른 사람들이 너무 빨리 간다고 불평하며 뒤뚱뒤뚱 걷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5개년계획에 점차 회의하고 있던 마오는 5개년계획을 통해 도시를 공업화하는 방식을 우회해 오히려 혁명적인 농촌에서 사회주의를 먼저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오에게는 5개년계획이 농촌을 착취한 데 대한 깊은 분노와 ‘소련식’ 사회경제 발전 모델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었다. 마오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대대적인 집단농장운동이 전개된다. 러시아와 달리 빈곤 상태에 있던 농민의 수가 많았던 중국은 큰 저항 없이 집단화에 성공한다. 중국의 농민은 집단화로 잃을 것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집단화가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초급 합작사에서 고급 합작사로의 전환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데는 초급 합작사가 당면하고 있던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공업화 방식이나 농촌문제의 해결 등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싸고 당 내부의 대립이 시작된다. 이러한 대립은 이후 1958년 대약진운동을 거치며 당내에 치유할 수 없는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쌍백운동에서 반우파투쟁으로 (3부 유토피아적 이상주의: 1956~1960년[1])

 
1956년 초 중국공산당 지도자의 눈에는 중국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완성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경제 영역에서 사유재산이 폐지되었다. 남은 과제는 중국 경제의 후진성 극복, 즉 경제발전이었다. 하지만 마오가 보기에 새롭게 형성된 정치적, 경제적 엘리트는 사회주의 목표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관료주의는 중국 사회를 잠식하고 있었고 노동자는 혹독한 노동규율 속에서 파업까지 일으켰다. 마오와 대다수 당 지도부의 견해가 점차 갈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오는 1956년,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는 쌍백운동을 일으킨다(百花齊放百家爭鳴, 백 가지 꽃이 만발하게 하라 백 가지 학문이 경쟁하게 하라, 여기서 화(花)는 예술, 가(家)는 과학을 의미). 그러나 쌍백운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반우파투쟁으로 반전된다. 이러한 극적인 전환은 문화대혁명의 예고편이자 축소판과 같았다. 왜 이러한 반전이 발생했는가?

마오는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대중운동의 한 부분으로 지식인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당 간부 역시 기술발전을 중시하면서 지식인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모종의 서먹서먹한 상태”를 끝내고 싶어 했다. 점차 지식인이 복권되고 당원으로도 충원되었다. 하지만 마오의 초점은 당 관료를 비판하기 위해 비당원 지식인을 동원하는 데 있었다. 마오는 지식인의 자유를 감소시킨다는 맥락에서 관료주의를 비판했다. 쌍백운동을 통해 관료주의의 병폐가 폭로되고 당 관료의 고압적 자세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마오는 경제정책의 전환을 모색했다. 공산당 간부들이 제2차 5개년계획을 수립해 소련 모델을 이어가고자 했던 1956년에, 마오는 <10대 관계론>을 발표해 소련식 경제발전 모델의 포기를 요구한다. 세부적으로 경공업과 농업발전, 낙후된 내륙과 오지의 발전, 농촌지역의 중소규모 공업 육성 등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중앙집권적인 관료기구가 아니라 지방의 자율적인 공동체에 권한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마오의 말은 잘 먹히지 않았는데, 당시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을 계기로 1956년 제8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 사상에 의해 지도받는다”는 문구가 삭제되고 집단지도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1957년 2월 마오는 그 유명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이하 <인민 내부의 모순>)라는 연설을 진행한다. 인민 내부의 모순은 비적대적이기 때문에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설득과 교육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러나 내용과 별개로 이 연설은 마오의 당내 권력 문제와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연설은 공산당이 반드시 올바른 사상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지도자가 틀리고 ‘인민’이 옳을 수도 있다는 정치적 함의를 띄었다. “올바르고 좋은 일이 종종 처음에는 향기로운 꽃이 아니라 독초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오는 평생토록 자신의 뜻이 독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은 것 같다.) 또한 이 연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은 계속되며 사상투쟁의 형식을 띤다는 관점을 내포한다. 이는 불과 몇 달 전 제8차 당대회의 공식 견해, 즉 사회주의는 승리했으며 계급 간 차이는 계급 내 분업문제에 불과할 뿐이라는 견해와 전적으로 모순되었다. 

당 지도부가 아니라 ‘인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이 연설은 관료층에 대항하는 쌍백운동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이제 계급투쟁이 사상투쟁으로 전환되었고, 잘못된 사상을 가진 이는 ‘계급의 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었다. 이는 마오의 반대자에게 무시하지 못할 위협이 되었다. 오랫동안 억눌려 온 지식인은 당 지도부를 매서운 어조로 비판했다. 심지어 공산당의 정치권력 독점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발언도 있었다. “하나의 당이 국가를 농단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그랬듯이 ‘사회주의 법제’의 실행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언론·출판·거주의 자유, 특히 ‘침범할 수 없는 인신의 자유’라는 헌법상의 권리는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전된다. 1957년 『인민일보』 6월 8일 자 사설은 ‘우파’가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공격하기 위해 자유를 남용하고 있다고 선포한다. 반우파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불과 몇 달 전 행해졌던 마오의 연설은 중요한 부분들이 수정되어 배포되었다. “백화제방의 방침이 독초를 생산할”까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으며 어떤 독초는 오히려 유익할지도 모른다던 2월 원문과 달리, 6월의 수정본에서는 “향화와 독초”를 구별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반우파투쟁은 제일 먼저 ‘민주정당’의 지도자들을 강타했다. 가장 조심스런 비판자 가운데 속했는데도 가장 널리 선전된 공격목표가 되었다. 이들은 정풍회의와 신문의 끊임없는 비난 앞에 무릎을 꿇고, 사회주의 체제에 대항하여 “보이지 않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동맹의 실질적 책임자이자 인민정협 부주석을 역임한 장보쥔(章伯鈞)은 “위대한 공산당은 나를 이미 한 번 구해준 적이 있으며, 오늘 또 한 번 나를 구해주었다. 당과 마오 주석의 지도와 가르침 아래 새 생명을 얻고, 당과 사회주의를 사랑하는 위치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는 처절한 자기비판을 수행했다.

대중 앞에서 자기고백을 강요하는 일은 스탈린 치하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과 똑같았다. 이러한 사상개조 처분은 특히 당 간부나 학생보다는 만만한 지식인에게 가장 가혹했다. 이 과정에서 하방운동이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이는 훗날 문화대혁명의 사회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마오 자신이 지식인을 쌍백운동으로 초대해 놓고 이들을 박해하는 데 참가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비극적인 일이었다. 
 

쟁점④: 왜 쌍백운동은 반우파투쟁으로 역전되었나?

마이스너는 설명이 쉽지 않다고 전제하면서도 마오에게 이론적 모순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마이스너가 봤을 때 백화정책이 제시한 언론, 사상의 자유는 모든 인민이 현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한다는 것이 전제였다. 그렇기에 인민 내부의 모순은 비적대적 모순이라 칭한 것이다. 동시에 쌍백운동이 기초하고 있던 가정은 투쟁은 그 자체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운동은 “단결-비판-단결”이라는 공식으로 발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7년 5월과 6월에 터져 나온 비판의 내용은 사실상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이로써 지식인이 친사회적이라는 마오의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인민’은 기본적으로 단결된 통일체라는 전제와 모순되므로 사안은 적대적 계급모순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이제 ‘치밀하게 시비를 가리는 방법’ 대신 ‘강제적 방법’이 가능해지게 된다. 그 결과 이단색출이 광범하게 일어난다. 마이스너는 스탈린주의적인 사회경제 발전방식과 결별하고자 했으면서도 마오쩌둥은 정치적·지적 영역에서 스탈린주의 방식과 결별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확실히 쌍백운동이 반우파투쟁으로 역전된 상황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당시 정치지형을 살펴보면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겠다. 마오의 이론비서 천보다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공동작업했고 쌍백운동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특히 ‘백가쟁명’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천보다는 후에 “반우파(투쟁)가 이후 그렇게 확대된 것은 덩샤오핑 동지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회고했다. 실제 덩샤오핑은 이 전환으로 인해 이득을 보았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덩샤오핑은 급부상해 중국공산당의 초대 총서기가 된다. 

『덩샤오핑 평전』의 저자 벤저민 양은 “반우파 운동에서 덩이 결정적 역할, 어쩌면 마오까지 포함하여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고 평가한다. 덩샤오핑은 반우파투쟁을 확대·강화했고 쌍백운동에서 반우파투쟁으로의 전환을 극적으로 만든 데에 이바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사정을 알기 어렵지만, 인민 내부의 모순을 비적대적인 방식으로 풀어가려던 천보다의 노력은 덩샤오핑의 활약으로 극적으로 반전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마오의 책임이 가장 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전체적인 과정을 돌아보면, 1956년 집단지도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1957년 시점에 마오는 당내의 유일무이한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고 ‘우려’했기에 당에 대한 비판을 개방한 것이었으나, 일정 정도 효과를 달성하고 운동이 임계점을 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을 봉쇄했다고 볼 수 있겠다. 마오가 벌여놓은 일련의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쌍백운동을 통해, 누군가는 반우파투쟁을 통해 사태에 개입했고 결과적으로 2여 년의 짧은 시간 동안 중국 사회는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된다. 

1956~57년을 거치면서 중국은 당에 의한 사상통제를 더욱 강화했고, 반지식인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된다. 그 거울 쌍으로 마오의 개인숭배가 강화된다. 사실 천보다가 공동작업한 <인민 내부의 모순>에는 헝가리와 같이 공권력을 동원해 반체제 지식인을 진압해서는 안 되며, 세계관의 변화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강제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지식인 숙청과 유일사상의 심화라는 정반대의 결과가 벌어졌다.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가 내부 모순의 적대적 폭발로 귀결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반복되었는데, 문화혁명을 사실상 반우파투쟁의 연장, 부활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한편, 이 과정에서 가장 피해를 본 세력이 민주동맹계열이라는 점은 신민주주의의 폐기라는 성급한 결정의 후과가 계속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지식인을 이용하고자 했던 마오의 결정으로 쌍백운동이 시작되긴 했지만, 들불처럼 운동이 확대된 이유는 신민주주의의 조기종식 이후 민주계열과 지식인 사이에 불만이 상당했다는 배경이 있다. 건국 초기 계급동맹으로 시작했던 그들은 사상개조운동을 경험하며 세력이 움츠러들었고 이제 반우파투쟁을 거치며 ‘계급의 적’이 되었다. 
 
 

스탈린주의를 넘어선 마오주의? (3부 유토피아적 이상주의: 1956~1960년[2])

 
대약진운동은 제2차 5개년계획에 대해 도전한 마오의 <십대관계론>에서 예견되었다. 반우파투쟁이 종료된 이후 당권을 잡은 마오는 1958년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선포한다. 일명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다. 사회주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입한 급속한 도시 공업화 계획인 5개년계획은 그 방법이 틀렸는데, “사회주의적 목적은 사회주의적 방법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 공업화의 폐단을 치료하기 위한 마오의 방식은 농촌 공업화였고 그 핵심은 농촌인민공사의 건설이었다. 인민공사는 사회주의적 목적과 방법을 조화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매개체였다.

대약진운동이 근거한 이념은 ‘부단(不斷)혁명’이다. 모든 혁명 과정은 공산주의가 실현될 때까지 끝없는 사회적 모순과 투쟁의 연속이라는 의미인데, “균형상태는 일시적이고 상대적이지만 불균형상태는 정상적이고 절대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계급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탈린주의의 이론을 전면 거부하는 것이었다. 혁명의 승리 이후 10년 동안 중국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을 지나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약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마오의 견해였다. 마이스너가 보기에 이러한 단계론은 부단혁명과 만나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 빠르게 단축되었다. 이제 중국은 “쇠가 달구어졌을 때 쳐야”한다는 마오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국가 수립 이후 10년 만에 마오주의가 대대적으로 부활했다. 물질적 전제조건은 열정과 신념으로 창출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1958년 1월 마오는 “15년 안에 영국을 능가하자”고 주장한다. 의식을 올바르게 전환할 수 있는 잠재력은 도시주민이 아닌 ‘선진적인 농민’에게 있었다. 따라서 혁명의 진정한 근원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 있었다. 이 시기 가장 널리 사용된 슬로건 하나는 “농촌의 도시화, 도시의 농촌화”였다. 1958년 4월에 마오는 중국인민의 특별한 혁명적 미덕인 ‘빈곤과 백지’ 개념을 주장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고” “얼룩이 없는 깨끗한 백지에는 가장 아름다운 글자가 쓰일 수” 있었다. 

한편 대약진운동 때 실제로 행해진 경제정책은 마이스너가 보기에 그렇게 비합리적인 조치는 아니었다. 당시 도시의 실업과 농촌 불완전고용의 증가는 긴박한 문제였다. 외국자본의 대규모 투자를 기대하기 힘든 조건에서 자본집중적 중공업 발전경로가 맞느냐는 질문은 타당했다. 중국이 소련의 방식을 계속 따른다면 농촌의 희생은 ‘사회주의의 원시적 축적’이라는 명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중국의 농촌은 러시아보다도 가진 것이 없었다. 중국이 소련 모델을 추진하려면 소련보다 더 가혹하고 억압적인 농촌정책이 필요했다. 

마오가 대약진 시기 추진한 새로운 경제전략은 중공업뿐만 아니라, 적은 자본으로 많은 노동력을 이용하는 농업·경공업·중소규모 공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른바 중공업-경공업-농업의 ‘동시발전’ 이었다. 경공업을 진흥시켜 농민이 소비할 수 있는 저가의 소비재를 생산한다면 농민은 농업생산량을 더욱 증가시키려 노력할 것이며, 이에 따른 농업생산의 증가는 다시 경공업의 발전을 자극할 것이고 결국 이는 국가가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충분한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도시의 중공업에 투자하는 자본을 줄이지 않고서 어떻게 경공업과 농업의 ‘대약진’에 투자할 자금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마오의 대답은 중국의 거의 무한한 노동력이었다. 대약진 시기에 농한기 잉여노동력이 100% 이상 활용되었다.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좋게, 더 싸게” 생산을 해내야만 했다.

또한, 마오가 보기에 과학기술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었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기술의존을 깨기 위해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나아가 기술 엘리트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대중이 스스로 현대 과학기술을 터득해야만 했다. 마오가 유토피아적으로 상상한 ‘만능인’은 생산을 병행하며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기술을 성공적으로 익힐 수 있어야 했다. 더 오래 일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상교육과 도덕적 설교가 물질적 보상을 대체했다. ‘3년의 고투’ 뒤에는 ‘공산주의 천년 낙원’이 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모든 흐름은 인민공사운동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사실 인민공사의 도입은 치밀한 사전 계획하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인민공사에 착안하게 된 것은 대약진운동이 한창인 1958년 늦여름이었다. 최초의 인민공사는 1958년 4월 허난성에서 실험적인 형태로 등장했다. 같은 해 7월 천보다는 파리코뮌을 모방해 ‘인민공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 운동에 의미부여를 했다. 마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국가의 ‘소멸’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임무라고 대중에게 선전했다. 인민공사에서는 심지어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원칙에 따라 분배가 이뤄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노동의 질과 양을 계산하는 것보다는 잉여를 똑같이, 아니면 각 개인이 실제로 필요한 만큼 또는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만큼 분배하는 것이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마오주의자들은 인민공사는 생산조직일 뿐 아니라 “경제·문화·정치·군사 업무를 결합”하고 “노동자·농민·상인·학생·병사가 일체화”된 조직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사람은 정신노동자인 동시에 육체노동자다. 모든 사람은 철학자·과학자·작가·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교육과 생산의 결합”은 인민공사의 기본원칙이었다. 야간학교, 여가를 활용한 교육 프로그램, 각종 ‘일하면서 배우기’(半工半讀) 계획이 도입되었다. 

여성해방에 관한 중국혁명의 유명한 실험은 대약진운동 기간에 일어났다. 남성 농민이 관개사업과 대규모 건설사업에 차출되거나, 새로운 공업기업으로 옮겨가자, 농업부문에서는 노동부족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여성의 노동력이었다. 더불어 여성이 전통적인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농업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은 “가사노동의 사회화”로 찬양되었다. 그러나 남성노동과 여성노동을 강도 높게 동원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공동생활은 기존의 가족구조를 바꾸지 못했다. 

인민공사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58년 늦가을이 되면서 농민의 급격한 탈진과 사기저하가 운동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게다가 농민을 각종 공업·관개·건설사업에 동원하느라 농업인력이 부족했고 식량부족현상이 나타났다.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대중의 불만이 커지자 당 지도부는 1958년 11월에 우한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당 관료들은 인민공사운동을 “성급한 시도”라 비판했고, 이후 인민공화국 주석직은 류사오치에게 넘어갔다.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의 실책을 비판한다. 그러자 마오는 대약진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며 자신은 “농촌으로 달려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고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결국 펑더화이는 “우익 기회주의 반당 군사그룹”으로 낙인찍혀 쫓겨난다. 

그러나 마오가 거둔 정치적 승리는 속 빈 강정이었는데, 대약진의 후과가 실로 막대했기 때문이다. 대약진을 거치면서 곡물 생산량이 1958년 2억 톤에서 1959년 1억 7천만 톤으로, 1960년에는 1억 4천만 톤으로 감소하자 기근이 만연했다. 여기에 급속히 악화한 중소관계로 중국에 파견된 러시아 전문가가 송환되자 중국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인구학자들은 아사자 수가 천오백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요인들까지 합친다면 사망자 수가 삼천만 명 정도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에는 정치적 배경도 있는데, 눈부신 결과를 내라는 압력을 받은 농촌간부들은 생산량을 엄청나게 부풀렸다. 또한 ‘우경 기회주의자’에 대한 마녀사냥이 성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두려움에 찬 지방간부들은 농민의 참혹한 곤경을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거짓 보고를 했다. 그러자 곡물 생산이 감소하여 기근이 만연한 상황에서도 곡물의 시장 출하량은 계속해서 증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마오는 대약진운동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쟁점⑤: 대약진운동은 왜 실패했는가

대약진운동을 무리하게 일으켰던 마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이스너는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는 데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상당히 멀어진 마오주의의 특수성에 있음을 지적한다. 마오가 ‘프롤레타리아화’가 ‘기계화’에 선행해야 한다는 점을 확신했다는 측면에서, 마이스너는 “대약진운동은 마르크스주의가 규정하는 경제적 전제조건으로부터 공산주의를 분리하는 교의로서 마오주의가 스스로를 선포한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특히 ‘후진성의 이점’에 대한 찬양이야말로, 객관적인 역사의 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신념이 마오에게 부재하다는 방증이라는 것이다. “인민들이 빈곤하면 할수록 그만큼 혁명을 원할 것”이라 본 마오는 자신감을 가지고 공산주의로 사회의 건설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스탈린식 공업화가 아니라면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 마오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더 크게 앞서거나. 5개년계획의 속도조차 느리다고 생각했던 마오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이에 중화학 공업화에 집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이에 더해 농업 공업화도 자력갱생을 통해 이뤄내겠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선택과 집중을 통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동시달성을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는 인민들을 두 배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농업 공업화를 추진했던 전략은 고급 합작사에서 인민공사로 전환하는 대규모의 농업집단화 방식이었다. 마오의 주장은 “일대이공”(一大二公)이었는데, 집단화에서 규모가 클수록, 공유화의 정도가 높을수록(공유의 대상이 되는 재산의 범위가 확대될수록) 공산주의에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 스탈린과 유사하게 마오는 자본주의 공업처럼 대공장화 되어야 농업도 생산력을 향상할 수 있다고 전제했다. 그래서 중농이나 부농의 존재를 부정하고 빈농을 핵심세력으로 삼아 집단화라는 방식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생산력을 향상해 잉여생산물이 늘어날수록 농민 대다수가 집단화에 반대한다는 사실은 사회주의 역사에서 정형화된 사실로 드러난다. 또한, 농업에서의 생산력은 집단농장의 규모가 커질수록 증가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소하거나 정체했다는 점이 확인된다. 

“엄청난 인간비극을 초래한 것에 마오쩌둥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마이스너의 지적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약진운동에서 공산주의적 실험이라고 알려진 ‘긍정적인 요소’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컸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 제약조건을 무시한 대약진운동은 농업 노동력을 탈진에 이르게 한다. 대약진운동을 시작하면서 마오가 했던 “우리의 혁명은 전쟁과 같다”는 말처럼, 대약진 기간은 전시명령체제의 동원식 경제와 유사했다. 농민들은 “철강생산량이 목표치에 도달하면 중국이 자동으로 공산주의의 낙원으로 바뀔 것”, 즉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믿고 24시간 밤낮없이 일했다. 마오가 꿈꿨던 ‘공산주의적 노동’의 실상은 ‘공산주의적 토요일’의 중국식 버전이었다. 스탈린주의를 다급하게 넘어서려고 했던 마오쩌둥은 결과적으로 스탈린주의를 다양한 산업에서 ‘압축적으로’ 모방했다. 
 
 

문화대혁명으로 가는 길 (4부 테르미도르의 반동: 1960~1965년)

 
중국은 러시아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됐고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나라였다. 따라서 사회 깊숙이 봉건적인 관료제 전통이 강했다. 이런 조건에서 방대한 관료기구가 지배적인 사회세력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만큼 심하지는 않았는데 주된 이유는 마오가 관료제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는 모든 공식 조직기구를 초월하여 인민과 특별한 사적(私的)인 관계를 추구했다. 마오의 반(反)관료주의 성향은 소싯적 무정부주의 영향도 있었지만, 본인의 권위를 위협하는 관료조직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스탈린이 관료들끼리 서로를 견제하게 해서 그 목적을 달성했다면 마오는 대중을 동원해 관료를 공격했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실패 이후 대중들이 혁명에 냉담해지자 관료제는 번창하기 시작했다. 마오가 물러나고 류사오치, 덩샤오핑의 지도 아래 질서로 회귀하는 일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환영받았다. 이윽고 ‘대중의 자발성’은 비난받기 시작한다. 점차 당의 무오류성이 강조되면서 대약진의 책임은 하급 당 간부 개인에게 돌려진다. 관료주의는 이미 당에 잠재해 있던 입신 출세주의 경향을 부채질했다. 관료제는 대약진 이후 경제 회복에 효율적으로 기능한 측면이 있었다. 1961년 말이 되자 경제가 안정되었고 생산은 3년 연속 감소에서 마침내 증가세로 돌아섰다. 중국공산당의 조직적 효율성과 관료기구의 정확한 업무처리능력이 이뤄낸 놀라운 성과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류사오치, 덩샤오핑이 추진한 조정기의 경제정책을 자본주의로 후퇴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이 시기 당 지도자들을 ‘수정주의자’ ‘주자파’로 몰아 숙청했다. 그런데 실제 조치를 살펴보면 러시아의 신경제정책보다도 조심스러운 점진적 개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당 지도부는 인민공사의 통제력을 약화하고 농촌지역에 원조를 시행했다. 또한 ‘공사화(公社化)했던’ 개인 혹은 가정의 재산을 농민에게 돌려주었다. 물질적 인센티브도 부활했다. 농가의 자류지(自留地)는 가경지의 6%를 넘을 수 없었지만 실제로 갑절로 늘었고 대부분 농민은 자연스럽게 집단노동보다 자신의 자류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사적 생산이 농가소득의 1/3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농업을 국민경제와 공업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정책하에 진행되었다. 농업부문에 우선을 두고 5개년계획, 대약진 시기보다 더딘 속도로 공업을 발전시킬 것을 약속했다. 당 지도부는 중공업에 농업을 종속시키는 스탈린주의 정책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투자의 많은 부분이 도시의 공업발전에서 농업으로 이동했다. 화학비료와 신식 농기구 생산을 늘리고, 종자개량 연구를 하는 등 농촌 전력화계획이 시작되었다. 

공업에서도 전문가, 관리자가 ‘독립경영권’이라 불리는 자율적인 제도를 통해 기업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하기 시작했다. 성과급, 상여급 등 금전적 인센티브가 도입되었다. 생산을 증대하자는 국가의 호소에 도시의 시민들은 ‘네 가지 선호품’(四大件), 즉 시계·자전거·라디오·재봉틀을 사기 위해 소득을 늘리려는 지극히 비마오주의적인 열정으로 대응했다. 중국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가시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1963년에서 1965년 사이 공업생산은 연평균 약 11%, 공업 부문 취업자 수는 7%, 노동생산성은 5.5% 증가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위해 지불한 사회적 대가가 존재했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부유한 농민계층이 농촌사회에 출현했다. 제1차 5개년계획보다 완화된 형태일지라도 공업생산성이 농업생산성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에 도시와 농촌지역 사이의 격차는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교육기관이 도시와 농촌지역에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시 지향적인 교육정책은 이어졌고, 의료 및 사회복지 제도의 불평등한 분배가 지속했다. 마오는 “인민의 위생부가 아닐진대 왜 이름을 도시위생부, 혹은 양반나리 위생부, 혹은 도시 양반나리 위생부로 바꾸지 않는가?”라며 신랄하게 당을 비판했다.

1960년대 초는 확실히 마오의 기나긴 정치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시기였다. 훗날 그가 불평했던 것처럼 마오는 “죽은 조상” 취급을 받았다. 마오는 결국 반동계급의 복귀와 자본주의 사회로의 회귀를 강박적으로 우려하면서 새로운 혁명에 착수했다. 1962년 8기 10중전회에서 마오는 당 수뇌부를 향해, “당신들이 쫓겨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마오는 점점 커지는 수정주의의 위험을 언급하고 이와 싸우기 위해 계급투쟁의 필요성과 불가피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마오가 새롭게 착수한 운동은 바로 ‘사회주의 교육운동’이었다. 대표적으로 사청(四淸)운동은 간부들이 어떻게 노동점수를 결정하고(淸工分), 장부를 처리하며(淸帳目), 물품을 분배하고(淸財物), 저장소와 곡물창고를 관리하는지(淸倉庫)를 조사해 부패한 관료를 고발했다. 마오는 “반혁명세력의 주요 부분을 개혁하고 이들을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하는 거대한 운동”이라며 운동에 의미를 부여했다. 류사오치나 덩샤오핑은 당에서 파견한 공작조의 지도하에 운동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마오는 기층 농민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운동이 분출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65년 1월 마오는 <23조>라는 문건에서 운동의 초점을 농촌의 기층간부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당 내부의 실권파”로 바꿀 것을 명령했다. (10년 전 그의 연설에서 유명해진 은유를 다시 사용하여) “우리는 전족을 한 여인 같아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농촌에서 일어나는 부패를 고발하는 데 국한되었던 ‘사청’은 이제 “정치·경제·조직·사상 청소”로 확대되었다. 특히 마오는 지식인의 수정주의 경향을 반우파투쟁 때와 마찬가지로 매섭게 비판했다. “배우·시인·극작가·작가를 도시에서 농촌으로 쫓아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관료의 보수주의와 싸울 정치적 도구로서 인민해방군이 마오에 의해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국가기구 중 가장 관료적이고 위계적인 군대가 반관료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도구로 인식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마오주의자들이 보기에 인민해방군은 보통의 군대와 달리, 혁명 기간에 농민 게릴라 전사들로 만들어진 고도로 정치화되고 평등한 대중의 군대였다. 인민해방군이 정치의 무대에 등장하면서 목적의식적으로 진행한 일은 바로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의 부활이었다.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는 대장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측면이 있지만, 농업집단화 운동 과정에서 마오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당의 권위보다 더 높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조장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이를 심각하게 훼손했기 때문에, 그 권위를 다시 복원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했다. 인민해방군은 『마오 주석 어록』, 『마오쩌둥 선집』을 출판해 마오와 그의 사상을 ‘신성화’했다.

인민해방군까지 동원한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결과적으로 관료의 저항과 대중의 무관심으로 실패했고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의 좌절과 공포는 더욱 커졌다. 1964년에 이르러 마오는 유해한 ‘수정주의’ 영향을 덜 받은 청년들 가운데 ‘혁명의 후계자’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호소했다. 즉 혁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당에 더는 의존할 수 없다는 가정이자, 본인의 진정한 후계자는 당에 없다는 말이었다. 마오는 1965년에 “관료계급은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부르주아 성원”이 되었고, 이들은 “투쟁의 대상이며 혁명의 대상”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했다. 마오는 중국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 참을 수 없었고 그보다도 더 자신의 권력 상실 상태를 참을 수 없었다. 

마이스너는 대약진운동 이후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1960년대 초반 마오의 심리상태에서 나타난 특징으로 행동주의와 조급함을 짚는다. 실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큰 타격을 입고 몇 년 뒤 문화대혁명을 개시하기 전까지의 시기는 마오의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순간이었다. 이 시기 그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그의 모순적인, 일탈적인 행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마오쩌둥의 평전을 통해 필자가 추측해 보자면, 당시 세 가지의 감정이 마오를 지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불안감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에 위협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오는 소련은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당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여겼다. 1964년에는 “제국주의(미국)와 수정주의(소련)가 손을 맞잡고 우리의 문을 두들기고 있다”고 말하면서, 국가의 존망 자체를 걱정했다. 물론 객관적으로 정당한 우려였는지는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다음으로 마오는 당 간부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공산당 주석으로 그가 1961년과 1966년 사이에 중앙위원회를 소집한 것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사실상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망가진 경제를 착실히 복구하는 과정을 괴롭게 지켜보았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의 말에 고개는 끄덕였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고 그에게 보고하는 것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회의 때는 반대편에 앉아 난처한 질문이나 엉뚱한 지시를 피하려고 했다. 그들이 마오의 말에 동의해 줘도 마오는 이를 ‘적들’이 권력 강화를 꾀하는 것으로 의심했다. 1961년 그는 생애 그 어느 해보다 많은 시를 썼는데, 대부분 군대의 소박한 미덕을 찬양하거나 과거 혁명의 순간을 추억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애정과 갈채를 갈구”했고, “당 내부에서 그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자 동의를 얻으려는 그의 갈증도 높아졌다”고 한다. 점차 마오 주위에 린뱌오(林彪), 캉성(康生), 장칭(江青) 등의 역할이 증대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마오는 옛 동지를 자본주의 길을 걷는 주자파, 즉 ‘계급의 적’으로 몰아세운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은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식인에 대한 혐오를 강화한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과정에서 마오는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정신이 굳어진다.” “지식인이 권력을 가지면 상황은 악화되고 국가는 무질서에 빠진다.” “공자는 중학교나 대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수많은 과학자는 실천과정에서 독학했다”면서 지식인, 지식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실패하자 그러한 생각은 더욱 심해졌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는 길을 잃었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 마오는 고심 끝에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내부의 적’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제 당 관료들로 대표되는 그들은 더 이상 중국혁명을 함께 이끌어 온 옛 동지가 아니라 ‘인민의 적’이 되었다. 스탈린주의를 넘어서려는 마오의 시도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순환’은 더 파괴적인 방식으로 문화대혁명에서 또다시 반복될 예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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