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3 겨울. 1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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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의 마지막 세대가 남긴 반성문

리쩌허우, 『중국현대사상사론』

이아림 | 정책교육국장
 
“국민당의 백색테러 하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금서를 몰래 읽고, 군경이 빽빽이 늘어서 살벌하게 경계를 펴고 있는 가운데 몰래 마오쩌둥의 유인물을 운반했을 당시에 아직 공산당원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가슴에 뜨거운 피와 기백이 가득 차 있었고, 생사를 초월한 혁명의 기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사상사를 연구하면서 개량을 비판하고 혁명을 찬양했던 것 또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분이 시인을 만들어 낼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학문을 이루어 내지는 못하는 법이고, 하늘을 감동하게 해 역사를 바꾸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다」(1993)라는 글에서 리쩌허우(李澤厚, 1930~2021)가 했던 말이다.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리쩌허우는 문화혁명 이후 혁명과 헤어질 결심을 했고, 천안문 사건 이후 완전히 고별을 말하게 된다. 혁명에 고별을 말하게 된 순간부터 리쩌허우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는데(『고별혁명』, 1996; 국역 2003), 필자는 리쩌허우의 입장을 단순히 전향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를 알고 싶었고, 따라서 1987년에 출판된 『중국현대사상사론』(국역 2005)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리쩌허우가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수용되었던 과정을 반성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이제는 투쟁의 철학이 아닌 건설의 철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설파한 책이었다. 리쩌허우의 주장을 살펴보기에 앞서, 책이 출판된 1980년대 중국의 상황을 알아보자. 
 
 

1. 문화혁명 이후의 중국과 리쩌허우

 

1980년대 중국, 탈문혁의 시대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함께 문화혁명이 끝난 직후, 중국에서는 사상해방운동이 일어난다. 문화혁명을 정점으로 한 마오쩌둥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자, 당시 젊은이와 지식인이 느꼈던 상실감과 허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심정은 19세기 말에 ‘아시아의 병자’인 중국이 서구 열강에 침탈당하면서 느꼈던, 청 황조와 중국 전통사상에 대한 회의처럼 강렬했다. 20세기 초 신문화운동 시기에 중국의 지식인이 반(反)전통 기치를 내걸었던 것처럼, 1980년대 중국의 지식인은 중국의 사회주의 경험을 부정하거나 서구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흡수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기존에 교조화된 해석에서 벗어나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처럼 1980년대에 있었던 제2의 신문화운동을 신계몽운동 또는 ‘문화열’(文化熱)이라 부른다. 중국 각지에서 수많은 학술토론회가 개최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문화서원과 연구센터가 건립되었다. 또한 서양 학문을 번역한 책들이 물밀듯이 소개되었다. 문화열을 이끈 학파는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문화혁명 시기 폄하되었던 중국 전통사상인 유학을 다시 복원하자는 유학부흥론이 있었다. 중국을 뒤처지게 했다며 1919년 신문화운동 이래로 비판받았던 유학이 유교자본주의론과 함께 ‘신유가’로 부활한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확실한 반전통의 입장을 내세운 ‘전반서화론’은 주로 젊은 나이에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중국의 낙후성을 절실히 느꼈던 청년 세대가 중심이 되어 설파한 사상이다. 이들의 입장은 서구의 과학사상으로 중국을 철저히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구에서 유행하던 담론을 받아들여 마르크스주의를 ‘인도주의’로 재해석했다. 

마지막으로, 리쩌허우는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따라 서구의 물질문명을 중국의 본체로 삼아야 한다는 ‘서체중용론’을 주장했다. 그는 ‘서체’를 중국에 적용하는 데 있어 전반서화의 방식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다. 이렇게 세 갈래로 나뉘어 치열하게 토론했던 문화열은 1989년 5월 신문화운동 70주년을 기점으로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한 달 후 천안문 사건을 기점으로 흐름이 역전된다.
 

리쩌허우는 누구인가

1980년대 문화열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리쩌허우는 1930년 6월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성 창사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공부한 리쩌허우는 후난 제1사범학교에 재학하던 때 독학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19세에 어머니마저 여읜 그는 잠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1950년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희망찬 신중국의 청년 리쩌허우는 졸업 후 중국사회과학원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학문에 매진하게 된다. 

하지만 빠르게 시련이 찾아오는데, 1955년 반후펑운동 때 후펑분자로 몰려 곤욕을 치르게 된다.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자신이 ‘반혁명’임을 인정하라고 강제를 받은 것이다. 이때 친한 친구가 자살하기도 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 전야에 리쩌허우에 대한 공안부의 심사결과가 나왔는데, 그는 “일부 자료와 사실에는 어느 정도 오차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다행히 심사결과에 서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때 심사결과를 부정했다면 분명히 우파로 몰려 끝장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하방을 당한 리쩌허우는 5·7 간부학교 생활을 하며 문화혁명 시기를 비교적 조용히 보냈다. 그는 문혁 때 그다지 참화를 당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자신이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잘 기억하지 못해 다른 사람과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대신 리쩌허우는 그 시기에 마오쩌둥 선집 밑에 철학 서적을 몰래 깔아 두고 공부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사상해방의 열기 속에서 리쩌허우는 연달아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데, 『비판철학의 비판』(1979), 『중국근대사상사론』(1979), 『미의 역정』(1981) 모두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저가 되었다.

문화혁명의 시기는 리쩌허우에게 도광양회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당시 리쩌허우의 책은 사회과학도는 말할 것도 없고 이공계 대학원생의 서가에도 꽂혀 있었다고 하며, 1980년대 중국 대학생들 사이에 『미의 역정』을 필사하고 통째로 외우는 것이 유행할 정도로 강한 영향을 미쳤다.


6·4 천안문 사건과 리쩌허우

천안문 사건을 기점으로 1990년대 지식인의 분위기는 1980년대의 그것과 많이 달라진다. 탈문혁을 위해 한목소리로 중국의 봉건성을 비판하고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를 치열하게 토론하던 지식계가 양극으로 분화한 것이다. 정부와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경제성장을 당면 과제로 삼았던 학계의 주류는 자유주의 경향의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경제사학자, 전문가로 채워졌다. 반면에 비주류는 아예 외국으로 망명해서 반체제 인사의 길을 걷거나, 시장 패권과 독점 엘리트를 비판하며 중국혁명과 마오쩌둥 시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좌파로 결집한다. (2000년대 이후 신좌파는 보수주의적인 신유가와 함께 중국모델론을 수용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리쩌허우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된다.

사실 천안문 사건에서 리쩌허우가 보였던 입장은 미묘했다. 그는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무시하지 말고 귀 기울이라’는 내용의 청원서에 서명해 당국으로부터 시위 교사범으로 지목됐다. 이후 3년간 가택에 연금되었고 결국 1992년 미국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완전히 반체제 인사의 길을 걸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천안문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인민일보》에 했던 인터뷰(1989.4.8.)에서 리쩌허우는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철저한 반전통 현상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홍위병 현상과 매우 흡사”하며, “파괴의 힘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설파했다. 

훗날 리쩌허우는 『고별혁명』에서 5월 중순 대대적인 단식투쟁이 시작된 이후로는 이들의 행동에 찬성하지 않았고, 학생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는 ‘장기간의 반동 시대’일 거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정부가 비무장 국민에게 총을 발사한 것은 흉악한 범죄지만 의도적으로 상황을 격화시켜 대항 국면을 조성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천안문 시위는) 군중운동의 압력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들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혁명’방식이었다.” 그는 ‘선홍빛 피로 인민을 각성시키자’고 외치면서 철수를 반대했던 일부 학생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상당했다. 리쩌허우는 천안문광장의 학생들이 너무 섣부르게 행동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거에 근본적으로 바꿔보려는 사고 자체가 중국 현대사와 지식인사의 결함이라는 문제의식이 강했고 무정부 상태가 만들어 낼 내전의 위험성을 걱정했다.

따라서 천안문 사건 이후 리쩌허우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한편으로는 중국 당국과 공산당을 대표하는 학자들로부터 험악한 비판을 받았고, 청년 학자들로부터도 유사한 강도의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1980년대에 한목소리였던 학계가 1990년대부터 분화했다고 했을 때, 분화 이전의 1980년대를 상징한 리쩌허우는 이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한쪽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현대중국사상사론』은 어떤 저작인가

“중국혁명은 왜 이토록 비참히 실패하였는가?”가 평생 화두였던 리쩌허우는 『현대중국사상사론』에서 중국에 마르크스주의가 수용되었던 역사적 맥락을 꼼꼼히 살펴본 뒤, 마르크스주의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구망의식’에 압도당해 중국의 봉건성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성급히 달려왔던 것이 패착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처럼 『현대중국사상사론』은 리쩌허우 자신도 일말의 기여를 한 중국혁명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녹아있는 저서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한 것은 아닌데, 『현대중국사상사론』에는 구래의 잘못을 인식하고 앞으로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건설의 철학’으로 자리 잡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리쩌허우가 생각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무엇일까? 당시에는 문혁을 거치면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를 ‘인도주의’로 해석하는 흐름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리쩌허우는 단호히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 내용, 즉 유물사관이라는 역사관이 핵심이며 따라서 ‘밥 먹는 철학’이라는 생활수단 발전의 역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 따라 서구로 상징되는 현대공업사회를 생산양식, 즉 ‘체’로 삼아 중국에 적용하자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맥락에 집중해서 저자의 주장을 소개하고 간단한 평가를 담아보았다. 『현대중국사상사론』에는 중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 수용과 관련한 내용 외에도, ‘20세기 중국 문예 일별’과 같은 문예론, ‘신유가 약론’처럼 1980년대 중국의 이론사조에 대한 평가같이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으나 이에 대한 소개는 필자의 한계로 생략한다. 
 
 

2. 계몽과 구망의 ‘이중변주’는 항상 ‘앙상블’이 아닌 ‘불협화음’으로 귀결되었다

 
리쩌허우는 1919년 신문화운동이 발생한 지 70년이나 지난 1980년대 시점에 중국 지식인이 다시 ‘민주주의’와 ‘과학’을 당면 과제로 삼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는 70년 동안 중국이 도돌이표 속에서 맴돌았던 이유에 대해 탐색하기 위해 계몽과 구망(救亡)의 흐름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신문화운동은 1915년 천두슈가 잡지 《신청년》을 발간한 이래로 시작한 계몽운동으로, 1919년 5·4운동을 기점으로 더욱 확대되기에 이른다. 신문화운동이 표방한 기치는 서학으로 중학을 반대하자는 ‘반전통’이며, 이는 신해혁명 이후 이데올로기 공백 상태에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전통적, 봉건적 집단주의를 서구의 개인주의로 대체하고자 시도했다. 중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개인을 집단과 사회관계로부터 분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천두슈는 “시정(時政)을 비평하는 것은 종지(宗旨, 주장이 되는 요지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가 아니다”며 정치가 아니라 정신문화의 개조를 주창한다.

물론 계몽의 궁극적 목표는 여전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였다. 따라서 계몽은 정세에 따라 구망을 위한 반제국주의 정치운동과 쉽게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동포여 일어나십시오!”(‘5·4’ 베이징학계 전체선언)라는 절박한 선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는 나라의 주권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몽운동이 곧바로 구망에 매몰된 것은 아니고, 이때까지만 해도 서로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상호촉진’의 상태였다. 계몽운동이 빠르게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데에는 구망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구망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갈 인적 자원은 계몽운동을 통해 수혈될 수 있었다. 5·4학생운동의 승리는 젊은 지식인의 행위 양식 변화나 여성 해방 의식으로 대표되는 개인주의 계몽운동을 심화했고, 계몽운동의 발전은 점차 엄중한 정치투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구망이 계몽을 압도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두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다양한 이상주의 실험의 실패는 결국 젊은이들이 격렬한 정치개혁안을 선호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중국식 유토피아적 실험이었던 ‘공독호조단’은 두세 달도 안 되어 내부 의견 차이나 경제위기와 같은 모순을 드러나며 해산하기에 이른다. 다음으로, 더욱 결정적인 계기는 러시아 혁명의 승리로 인한 마르크스주의의 수입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즉각 행할 수 있고 이미 옆 나라에서 효과를 본 일련의 구체적인 행동방안과 혁명에 대한 전략전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신문화운동의 주창자인 천두슈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천두슈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정치는 결국 당신을 쫓아다닐 것이다”라며 기존 입장을 정정한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취추바이(瞿秋白)도 “한때 찬란했던 저 ‘5·4’의 옷을 벗어”버리고, “반제국주의의 전투적 깃발 아래 반제문화투쟁에 종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오쩌둥 역시 “만 년은 너무 기니 하루아침에 끝내야 한다”는 입장을 갖게 된다.

따라서 중국 지식인은 이론과 사상에서 깊은 연구를 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곧바로 행동 무대로 뛰어들어 애국과 혁명의 길 위에 자신을 바쳤다. 이로써 구망의 정세가 개인의 존엄이나 권리에 대한 요구, 즉 지식인 집단의 자유·평등·민주주의 요구를 압도하게 된다. 그 결과 중국은 혁명전쟁에는 승리했지만, 농민 소생산자의 봉건의식이 진지하게 청산되지 못한 채 아직은 보잘것없었던 민주주의와 계몽의 관념을 몰아냈다. 

리쩌허우는 이와 같은 과정을 1920, 1930, 1940년대 세 차례의 학술논쟁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시기인 1920년대를 대표하는 논쟁은 과학과 현학 논쟁이다. “서구 현대의 과학적 방법만으로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논쟁은 당시 이데올로기 공백 상태였던 청년 세대가 어떤 인생관을 가져야 국가의 부강과 사회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진정한 쟁점이었다. 이 논쟁은 서구의 학문을 신봉한 과학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다음으로, 1930년대에는 중국 사회에 마르크스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중국 사회성격논쟁이 이어진다. 특히 1931년 일본의 침략으로 구망의 요구는 더욱 긴박한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과학의 대명사였던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을 따라 어떻게 혁명에 성공할 것인지가 ‘과학적 인생관’을 구체화하는 일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반제반봉건혁명을 위해 생활하고 투쟁하라는 구체적인 과제가 요청되었고, 학술논쟁은 점차 정치적 결론에 종속되기에 이른다. 즉, 중국 사회를 어떠한 단계로 분석하는지가 혁명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 긴밀히 결부된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중국 사회에 고착하는데, 예를 들어 트로츠키파가 중국 고대의 노예제를 부인했다는 이유로, 학술적인 관점에서 중국 고대의 노예제를 부인하는 학자 역시 정치적으로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는 했다. 과학은 점차 ‘이데올로기의 고분고분한 노예’가 되어 갔다. 

이러한 양상은 세 번째 시기인 1940년대 문예의 민족형식 논쟁에서도 이어진다. 이 논쟁의 결론은 마오의 「옌안문예좌담회의에서의 강연」(1942)으로 정리되었는데, 이후 마오의 입장은 문예이론의 유일한 경전이 되었다. ‘대중화’(大衆化)보다 ‘대중을 변화시키는 것’(化大衆)이 중점이었던 후펑과 달리,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비단에 수를 놓는 것’이 아니라 ‘엄동설한에 숯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게 마오의 입장이었다. 마오는 “문예가 프롤레타리아 입장에 서서 세계를 개조하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노동자·농민·병사들에게 봉사하는 혁명을 위한 문예, 정치에 종속되는 문예”를 요구했다. 즉, 문학예술계를 군복을 입지 않은 또 하나의 군대로 규정한 것이다. 

이처럼 1920~40년대를 지나며 사상·문화·학술의 영역에서 구망이 계몽을 압도해 갔다. 중국의 지식인은 1920년대 ‘과학적 인생관’을 모색하고 수립하는 것에서, 1930년대 반제반봉건 임무를 명확히 하는 것으로, 나아가 1940년대에 노농병 대중과 결합하는 것으로 인생의 길을 심화해 나갔다.
 
 

3.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수용의 특수성

 
리쩌허우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정세가 분명 큰 작용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빠르게 수용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의 사상적 전통에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청나라 말기부터 중국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사상인 진화론이 빠르게 받아들여진 것도, 진화론이 빠르게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으로 대체된 것도 중국의 사상적 기반에서 찾는다. 

우선 중국에는 학문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경세치용의 전통이 존재했다. 춘추시대 이래로 “(백성을) 늘게 하며 부유하게 하며 가르치게 한다”는 사상관념은 한 번도 잊힌 적이 없었다. 따라서 경제와 지리 등 사회의 물질적 존재조건으로서 정치의 성쇠나 민생빈부를 연구하는 사상인 경세사학이 발달했다. 이러한 경세학적 전통은 역사관을 중시하는 전통으로 이어졌고, 이는 순환론적 역사관이나 복고적 역사관을 극복하고 진화론적 역사관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 발전의 필연성을 통해 세계에 모종의 객관적 법칙이 있음을 설명하는데, 이는 중국 전통사상의 ‘천도’와 맥이 닿아있었다. 

다음으로, 중국의 사회사상에는 줄곧 유토피아의 전통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가의 ‘치국평천하’와 ‘삼대의 치세로의 복귀’라는 희망 외에도, 도가·묵가와 심지어는 불교까지도 모두 각기 다른 이상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훙슈취안·캉유웨이·쑨원이 각기 그들의 대동세계에 대한 전망을 구축했다. 따라서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유물사관의 ‘과학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사상의 발전 과정에서도 아주 순조로운 일이었으며 중국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모종의 사회주의 유토피아인 대동세계의 이상을 품고서 이를 위해 분투하고 인생의 의미를 여기에 맡기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이는 종교가 없는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사실상 종교적인 기능을 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서구의 종교심과 달리 ‘실용이성’이 중시되었다는 점도 마르크스주의가 빠르게 수용되는 데 이바지했다. 중국에는 종교심이 없었기 때문에, 지식인이 자신의 이성을 이용하여 사물을 판단하고 가늠하고 평가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중국 전통에는 현실의 생존을 추구하고 세속의 생활을 긍정하는 동시에 거기에 복무하는 실용이성이 존재했고, 이는 민족정신이자 국민성을 의미하는 ‘문화심리구조’ 속에 녹아있다. 기독교도가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21세기인 지금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중국에서 진화론을 순조롭게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유물사관으로 나아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리쩌허우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는 원래 서구의 현대 자유주의 사상이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자유·평등·민주주의라는 우량한 전통과 사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리쩌허우는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문명의 진보를 전제로 한다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보다도 개인의 자유를 더욱 발본적으로 옹호하고, 대중의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여 모두가 풍요롭고 실질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중국은 자유주의가 자리 잡지 못했다. 구망을 염원하는 다급한 정세에 밀려 자유주의자들은 정치활동의 무대에 오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자유주의자들의 연구나 토론은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는 공리공론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결국 중국화 된 마르크스주의로 흡수되거나 장제스 독재정권에 몸을 의탁했다. 이것은 중국 현대 사상의 특이점이며 비극이기도 했다. 
 

러시아와 비교해 봤을 때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러시아의 경우 플레하노프에 의해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가 소개되고 연구됨으로써 준비 단계를 거친 것과는 달리,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처음부터 당면한 행동을 지도하는 직접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자본』을 비롯해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이론 저작들은 중국에 마르크스주의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중국어로 번역되지 않았으며, 리다자오, 천두슈, 마오쩌둥 등 중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 역시 당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 가운데 상당수를 거의 읽은 적이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일본인이 저술하거나 번역한, 여러 소책자에서 소개되고 해설된 마르크스주의였다. 

결국 구망이 계몽을 압도하는 과정에서 서투르게 수용된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식으로 쉽게 변형되었다. 처음에는 반제반봉건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점차 반봉건이라는 문제의식은 시간이 갈수록 사라졌다. 극복되지 않은 봉건성은 중국화 된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 되는데, 바로 평균주의, 도덕주의, 인민주의다. 

이는 인애의 윤리로 대표되는, 중국 하층사회의 전통윤리와 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봉건주의는 사회주의의 가면을 쓴 채 기승을 떨치면서 자본주의에 ‘반대’했다. 이는 마오가 점차 현대 경제생활의 실제를 연구하지 않고, 공급제로 상징되는 옌안 시대의 군사 공산주의를 그리워하며, 봉건적 개인숭배까지 가는 과정을 통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4. 중국혁명에 대한 반성: 평균주의, 도덕주의, 인민주의로 귀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에 대한 답으로 리쩌허우는 중국 사회에 극복되지 않은 봉건성이 마르크스주의라는 형식을 빌려 중국 현대사에 계속해서 등장했다고 보았다. 중국혁명기에 남아있었던 봉건주의에 대한 그의 설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큰솥 밥’ 평균주의

마르크스는 임시 막사를 의미하는 ‘바라크’라는 말을 조합해 ‘바라크 공산주의’를 비판한 적이 있다. 여기서 바라크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여러 곳에서 산업 노동자가 제대로 된 거처가 아니라 막사형 원시 기숙사에서 거주했던 것을 뜻한다. 즉, 모두가 배를 곯지만 평등한 환경을 공산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리쩌허우는 마르크스의 이 말을 빌려, ‘큰솥 밥’ 평균주의라는 중국식 용어를 사용한다. ‘큰솥 밥’에 한데 모여 모두가 평등하게 음식을 나누는, 가난하지만 평등한 중국의 농촌 사회의 모습이 공산주의는 아니라는 의미다. 개인의식이나 생산력의 미발전으로 어쩔 수 없이 집단생활을 하는 것은 공산주의의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대다수의 간부나 인민에게 공산주의는 이렇게 이해되었다. 지식인들도 “이러한 사회정의와 인간평등이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16~17년 동안 매월 56원의 월급으로 사회적 평등 아래에서 생활하는 재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부족한 것을 탓하지 않고 균등하지 못한 것을 탓한다’는 중국의 전통사상은 사회주의 중국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러나 리쩌허우는 오로지 정부에 의존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어떻게 인격의 독립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한다. 리쩌허우가 보기에 이러한 ‘큰솥 밥’ 평균주의는 전쟁 시기의 배급제와 다름없고, 이는 마오의 전쟁경험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전쟁이란 사회적 비상시기일 뿐,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평균주의는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봉건주의적 ‘집단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데,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선공후사’라는 명목으로 ‘개인’이라는 개념 그 자체까지도 청산되어야 할 이단이자 해로운 부르주아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 중국공산당은 개인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개인의 연애와 혼인 그리고 감정과 같은 일상생활 전체를 간섭하고 구속했다. 정풍운동과 사상개조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부르주아지의 개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는 도덕주의라는 특징으로 이어지는데, “당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민족해방과 인류해방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공산주의 도덕의 최고표현”이 되었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주의

사상개조와 개인 수양을 강조하는 도덕주의는 마오에게서 잘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는 청년 시절 스승 양창지의 영향을 받아, ‘사상과 도덕’을 함께 사고했다. 양창지는 아침식사를 폐지하고 냉수 목욕을 하고 먼 길을 혼자 다니는 일을 몸소 실천하면서 개인 수양을 강조했으며, 천하의 사람이 모두 성인이 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마오는 심력을 다해 매진한다는 전제하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여겼다. 이러한 도덕주의는 두 계급 간 노선 대립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사고로 이어진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 오랜 군사 투쟁에서 누적된 ‘양군대전’(兩軍對戰)의 관념은 신중국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에 따르면, 세상 만물은 좋은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나쁜 것은 부르주아라는 범주로 나뉘었다. 이로써 특정한 역사적 내용을 가지고 있던 유물사관이 중국에서는 시대를 초월하는 도덕윤리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도덕주의는 현재 중국의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의미하는 ‘중국몽’은 중국의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인식에 기초한 도덕주의적 접근이며, 중국이라는 대국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공산주의적 인간은 ‘개성의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도덕이 고상하고 의식이 순결하며 정치 각오가 높은 성현’을 의미하게 된다. 『마오쩌둥 어록』은 윤리 도덕주의를 극도로 고양하는 대표적인 기제였다. 이 도덕주의는 잔혹한 생사투쟁 속에서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 희생정신에 대한 칭송과 숭배로 표현된다. 지식인은 생사를 걸고 싸우는 농민대중 병사들 앞에서 자괴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사상감정을 ‘개조’해야 한다는 결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레이펑 학습운동이나 문화혁명 당시의 대중운동은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과 사명감을 요구한 범 정치운동이자 범 도덕운동이었다. “굶어 죽는 것은 사소한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이 큰일이라”는 전통적 관념은 개인 수양의 자세로는 훌륭했지만, 모든 시민에게 요구하는 사회 전체의 도덕으로 확대되어서는 안 되었다. 리쩌허우는 아주 높은 수준의 요구인 종교적 도덕과 비교적 낮은 수준의 사회적 도덕은 구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자가 물에 사람이 빠졌을 경우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해 가면서 무조건 달려가 구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경찰에 알려 인명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을 실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도덕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되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도덕을 요구하고 방기하면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할 수는 없겠지만, 물에 빠진 사람의 것을 훔쳐 가는 행위는 범죄가 되는 것처럼 처벌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진행된 공산주의 교육은 종교적 도덕, 즉 최대주의적 도덕만을 요구했으며,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소수를 타깃 삼아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법치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유지가 가능한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도덕적 가치는 교화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오히려 최대주의적인 도덕을 요구하게 되면서 재수 없게 걸리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식의 정서를 나았으며, 결과적으로 중국에 법률이나 질서와 관련된 제도가 자리 잡는 데 어려움을 야기했다. 
 

농민 중심의 유격전쟁, 인민주의

러시아에서는 농민의 혁명적인 역할을 강조하며 농촌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인민주의자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자리 잡았던 것과 달리, 인민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중국에서는 역설적으로 인민주의와 결합한 마르크스주의가 농촌을 기반으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혁명전략은 마오쩌둥의 농민유격전쟁 노선으로 대표되는데, 이에 영향을 준 두 명의 사람을 꼽자면 리다자오와 취추바이가 있다. 중국공산당 최고의 이론가인 리다자오는 “도시에는 수많은 죄악이 있지만 농촌에는 수많은 행복이 있다”, “도시의 생활은 거의 귀신의 생활이나 마찬가지지만 농촌의 활동은 완전히 인간다운 활동이다”라며 청년 지식인에게 브나로드 운동을 제안했다. 취추바이는 처음으로 농민의 무장투쟁에 이론적으로 주목했다.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마오쩌둥은 ‘농촌에 의한 도시의 포위’라는 유격전쟁을 성공하며, 군사전략을 철학적, 혁명적 세계관으로 격상했다.

마오는 계발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대중에 대한 신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대중의 후진성과 무식이 혁명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신념으로 대중을 신뢰했다. 마오의 이러한 인민주의 경향은 농민의 잠재적인 정치적 중요성을 재고했는데, 중국공산당의 상당수가 농민 출신의 홍군 병사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의 깃발에 그려진 망치는 항상 도끼로 오인되었다.” 유격대 정신은 중국혁명의 과정에서 항상 마오쩌둥의 ‘초심’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사소한 정책 하나까지도 군사작전과 유사하게 추진하는 등 ‘진한 화약 냄새’를 풍기는 사회가 된다.

리쩌허우는 단적으로 마오쩌둥의 농민중심의 혁명전략을 중국 최후의 농민봉기였던 훙슈취안의 태평천국운동과 비교한다. 그는 두 사람의 구상이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는 데 주목한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훙슈취안을 쑨원과 함께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사람은 모두 형제다”는 관념을 통해 평균주의와 금욕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태평천국운동은 역사상의 어떠한 농민봉기보다도 엄격한 군사규율을 가졌다. 심지어는 ‘길가나 민가에서 대변을 보면 안 된다’는 것까지 규정했다. 이는 농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고, 홍군의 엄격한 규율과도 비슷했다. 또한 태평천국운동은 노동대중에 대해 높은 신임을 지녔으며, 지주계급의 지식인을 이용하기는 했으나 절대 중용하지 않았다. 훙슈취안이 군대와 전체 사회의 사상교육 공작을 아주 중시한 것도 닮았다. 

태평천국운동은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에 곧바로 전쟁 시기의 방식을 사회 전체로 확대해 모든 것을 집단화, 군사화했다. 엄격하게 조직된 집단생활과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사회구조를 만들어 행정 권력에 의해 모든 것이 지배되는 체제를 형성했다. 남경은 군사와 생산, 정치와 경제, 행정과 종교가 모두 일체화된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일한 대가에 따라 받지 않고 모든 것을 균등하게 분배받았다. 중국에서 운영한 인민공사도 비슷한 외양을 띄었다. 실제로 마오는 1958년 인민공사의 건립을 추진하면서 『장루전』(張魯, 훙슈취안의 본보기이자 태평천국운동의 합일체제를 실제로 실현했던 후한 말의 종교 지도자)을 인쇄하여 고급간부에게 읽도록 했다.
 
 

5. 리쩌허우의 결론

 

‘서체중용’이 필요하다

리쩌허우가 ‘마르크스주의는 필연적으로 구망의 압도로 귀결될 운명이었다’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또한, 구망 자체를 기각한 것도 아니다. 망국을 두려워한 중국인이 급속한 개혁과 혁명을 통해 종족을 보존하고 나라를 구하려 한 것은 결코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구망이 압도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고 당시에는 그런 선택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었으나 시급한 일이 어느 정도 끝난 뒤 나중에라도 진지하게 돌아보고 연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히려 과거보다도 더 토론이나 연구가 어려워졌던 것이 패착이라는 문제 제기다. 따라서, 리쩌허우는 이제라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정치적 잣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혁명 과정에서 유보되고 약화한 계몽의 과제를 뒤늦게라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계몽에 대한 구망의 독주를 끝내고 계몽과 구망의 앙상블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리쩌허우는 그 방법으로 ‘서체중용’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중체서용은 겉으로는 현대화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봉건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서구로부터 흡수한 것들을 모두 동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훙슈취안이 들여온 서양 기독교가 ‘중국화’를 거치며 ‘봉건화’ 된 것처럼 말이다. 반면, 급진주의 경향의 ‘전반서화’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고 리쩌허우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1919년의 신문화운동과 1980년대의 전반서화의 공통점인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식의 태도는 위험했다. 전반서화는 서구를 단순하게 모방하고 중국이 이미 가지고 있던 각종 전통을 철저하게 부정했기 때문에, 이를 추종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중국 현실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반서화의 보편성과 중체서용의 특수성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서체중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서체중용의 ‘체’는 단순히 서학의 ‘학문’이 아니라 사회 존재의 본체, 즉 현실적 일상생활을 의미한다. 즉, 현대적 공업과 과학기술을 토대로 하는 현대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서구의 본체를 수용하되, 이를 중국에 잘 적용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의 전통에서 쓸만한 부분은 활용해 보자는 것이 ‘중용’이다. 이는 성급한 ‘반전통’으로 또다시 급진적인 계몽운동의 발흥, 구망의 압도, 계몽운동의 재출현과 같은 과거의 순환을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리쩌허우는 서구의 자유, 독립, 인권, 민주주의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중국에서는 그동안 구망의 과제에 쫓겨 서구 현대사상에 대한 학습 자체가 미진했고, 아직도 ‘인민을 위하여 주인이 되는’ 중국 전통 민주주의와 ‘인민이 주인이 되는’ 서구의 민주주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운용에는 파시즘이나 무정부 상황과 같은 최악을 막기 위해 엄밀한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법률로 제한되는 자유가 필요한데, 중국에서는 당의 기율이 국가의 법률을 대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리쩌허우는 관은 무서워하면서도 법은 아랑곳하지 않는 추악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중국식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보다는 서구의 사회 최저한도의 요구가 더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다. 즉, 도덕이 아니라 법률로 통치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혁명은 역사의 지름길이 아니었다

『중국현대사상사론』에서 리쩌허우가 계몽에 대한 구망의 압도를 초래했던 ‘혁명’에 대해 헤어질 결심을 하며 강하게 경고했다면, 『고별혁명』에서는 이제 ‘혁명’이라는 방식으로 사태를 급변하려는 행위 자체에 대해 이별을 고하게 된다. 천안문 사건을 거친 이후 급진주의, 행동주의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강하게 갖게 된 것이다. 물론 리쩌허우가 고별을 말한 ‘혁명’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바람직하게 변혁하기 위한 활동 일반이라기보다는, 군중의 폭력과 같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으로 기존의 제도와 권위를 전복시켜 사태를 악화하는 ‘격렬한 행동’을 가리킨다. “이는 절차를 무시한 폭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학기술 문화와 사회생활 각 방면의 신속하고 거대한 변혁이나 폭력과 무장을 통해 외부의 침략과 수탈에 대항하는 민족혁명은 (고별의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1996년 홍콩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2003년 출간된 『고별혁명』은 중국에서는 아직 정식 출간되지 못했다.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다”라는 테제가 중국에서 숱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별혁명』에도 수록된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다」(1993)에서 리쩌허우는 이 테제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면서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이 중국 사상사 연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혁명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라는 사실을 믿었기에, 캉유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변법자강운동의 개량사상이 20세기 초의 혁명에 반대하면서 점차 ‘반동적’이게 되었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쩌허우는 문혁을 겪으면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1978년에 출판된 『중국근대사상사론』에는 리쩌허우가 혁명을 옹호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서술한 부분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평등’을 강조한 프랑스보다 ‘자유’를 중시한 영국의 자본주의가 훨씬 안정적이고 견고하다는 내용이다. 또한 중국에서 ‘자유’가 개량파의 신조라면, ‘평등’은 혁명파의 신조가 되었다고 서술한다. 1980년대 들어서 그는 신해혁명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캉유웨이나 량치차오가 제시했던 ‘군주 입헌’의 길, 개량의 길을 택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감히 글로 쓰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을 떠난 뒤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리쩌허우는 혁명적 방법이 봉건주의가 새로운 현대적 형식과 결합하도록 만들고 반혁명의 진압이 격화되도록 만들었다고 말한다. 혁명은 통쾌하지만 부작용이 크고, 개량은 훨씬 힘들고 번거롭고 완만하지만 올바른 길이라는 결론이다. 40년 동안 공부한 결론 끝에 자신의 뜻을 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그 근거로 리쩌허우는 1978년에 제기했던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프랑스식 급진주의와 영국식 개량주의를 비교한다. 현대적 정치체제가 비교적 빠르게 자리 잡은 영국과 달리, 혁명을 경험한 프랑스는 100년이 넘는 시기 동안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정치체제는 혼란을 거듭했다. 리쩌허우는 당시 프랑스 혁명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던 단두대에 누가 올라가야 하는지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로 결정되었다며, 혁명의 폭력성과 부작용을 말한다. 결국 단두대에서 많은 사람을 처형한 혁명가조차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리쩌허우는 프랑스식 혁명 방식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며, 혁명은 그 자체로 건설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리쩌허우가 보기에 입헌파가 밀려나고 혁명파가 득세한 20세기 중국은 프랑스처럼 장기간 파괴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진정한 건설의 시기는 너무 짧았다. 리쩌허우는 량치차오가 쑨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국에서 곧바로 황제를 폐위할 경우 왕위 쟁탈을 위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예측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량치차오는 꼭두각시 황제가 똑똑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황위를 잠시 유보한 후에 제도적인 개혁을 해야만 폭력혁명을 피하고 사회가 치명적인 혼란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기에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리쩌허우는 폭력혁명의 방식이 심지어 ‘아Q’ 같은 인물도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믿게 할 정도로 중국에 심각한 재난을 몰고 왔음을 강조한다. 그에게 혁명은 역사의 지름길이 아니라 긴 시간을 둘러서 가는 우회로였다.
 


6. 평가

 
리쩌허우의 시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과연 리쩌허우의 바람대로 이후 중국에서 건설의 철학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자리 잡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중국의 잃어버린 세대는 결국 마르크스주의를 쇄신하지 못한 채 포기했다. 중국의 주류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사실상 천안문 사건을 겪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의 입장까지 고려하면 리쩌허우 역시도 잃어버린 세대의 자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쩌허우 본인은 스스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혁명이 아닌 개량이다”라는 테제의 실제 내용은 베른슈타인의 사민주의와 유사하다는 평가가 있다. 리쩌허우는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로부터 베른슈타인에 이르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는 경제를 근본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레닌은 자본주의가 이미 소멸의 단계에 처해 있으며 세계는 이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야에 도달했다고 보았지요. 저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의 견해에 찬성합니다.” 리쩌허우는 마르크스와 베른슈타인을 한 데 뭉뚱그려 레닌과 구분해 얘기하지만, 이는 적절하지 못하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그 내재적인 작동 메커니즘으로 붕괴 경향에 처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하므로 계급 간의 조화와 공평한 조절을 통해 사회를 진보시키자는 “개량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 자본주의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도 우리가 확인하는 현실이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뜻을 이어받아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실천한 것은 레닌이었다. 

따라서 레닌의 혁명주의와 달리,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신봉하는 사민주의의 주장은 20세기 출현한 현대자유주의의 제도 안에 포섭될 수 있었다. 실제로 리쩌허우가 덩샤오핑의 현대화론을 지지하면서 주장하는 ‘4단계론’은 로스토우가 말하는 ‘현대화론’과 큰 차이가 없다. 리쩌허우는 중국이 경제발전, 개인주의의 정착, 사회적 불평등의 해결, 정치 민주화의 순서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적 기초가 없으면 개성과 자유가 성장할 토양이 없으므로, 자유는 언제든지 회수되고 만다는 얘기다. 로스토우도 경제의 이륙(take off)이 이뤄진 다음에야 비로소 성숙단계에 접어들면서 사회구조와 정치체제, 가치관의 변화가 나타나며, 그 뒤로도 더 시간이 지나야 사람들이 사회복지와 사회정의에 관심을 두게 된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리쩌허우는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생산력주의로 파악했으며, 문혁과 같은 비극을 겪을 바에야 자본주의의 길이 더 옳았다고 생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나아가 리쩌허우의 논리는 덩샤오핑 이래로 추진해 온 개혁개방정책과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정당화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는 4단계론이 필연적인 법칙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선후와 경중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있다고 얘기한다. 즉, 중국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경제발전이며 정치민주화는 최후의 과제라는 의미다. 리쩌허우는 천안문 사건을 겪은 뒤 『고별혁명』(1996)에서 섣부른 민주화는 내전의 위험을 부른다며 이렇게 말한다. “중국공산당을 전복하려는 어떤 기도에도 반대한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은 이를 대신할 만한 다른 역량과 기구, 체제와 지지대가 출현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대당 제도를 포함한 다당제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당장 중국 정치에 도입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이러한 리쩌허우의 시각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나친 비관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리쩌허우가 현시점의 중국 사회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2010년대에 들어 리쩌허우는 “개혁개방이 병목 현상에 부딪치고 부패가 심각해지고 공공 이성이 자리 잡지 못한 시점에서, 중국은 종교가 없기 때문에 민족주의·국가주의가 최대의 정치종교가 되어 애국정서의 열광을 불러올 수도” 있으며,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합류는 바로 ‘국가 사회주의’, 즉 나치즘”인데, 이는 중국이 어디론가 나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위험한 방향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민영기업을 발전시키고 미시 경제에 대한 정부의 관여와 국유기업의 독점을 되도록 빨리 감소시켜 시장이 진정으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재 시진핑이 추구하고 있는 당-국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리쩌허우의 입장은 중국의 특수한 현실을 앞세워 공산당의 일당 체제를 옹호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정치 민주화를 늦춤으로써 나타나는 사회 전반의 문제, 그 때문에 개인주의, 자유주의, 법치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는 현실, 또한 이러한 중국의 정치구조가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데까지 이른 현재 상황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더욱 그렇다. 현재 중국의 시진핑 체제가 덩샤오핑과 무관하게 형성되었다고 말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달성한 이후에도 개인의 자유와 법치주의가 확립되기는커녕 당의 권한과 무오류성만 강화되었고, 당이 국가의 모든 존망을 책임지는 구조는 여전히 확고하다.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리쩌허우식 4단계론의 한계는 명백하다고 할 수 있겠다.
 
리쩌허우의 저서를 읽으면서 필자는 그가 문화혁명으로 막을 내린 중국혁명의 마지막 세대로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임무가 아니라 과거의 잘못된 유산을 차단하기 위해 문을 제대로 닫는 역할을 부여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중국현대사상사론』과 『고별혁명』에서 진행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반성은 계몽운동으로 시작해 결국 혁명에 성공했지만 70년이 지나서 봉건주의 타파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중국의 비극을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가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한다. 리쩌허우의 저서의 진가는 여기에 있다.

리쩌허우의 저서를 읽다 보면,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구망에 압도되어 봉건의식을 청산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의 혁명가들이 봉건제 하의 농민운동과 자본주의의 계급투쟁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중국혁명 기간 내내 그렇게 계급투쟁을 그렇게 중시했으면서도, 정작 중국에서는 계급투쟁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했던 것 아닐까? 리쩌허우가 마오쩌둥의 “투쟁의 철학”을 “밥 먹는 철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얘기하며 계급‘투쟁’을 기각한 이유는 중국 역사에서 ‘계급’과 ‘계급투쟁’이 잘못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중국혁명 내내 계급을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개인이나 지주의 자식이라는 신분제로 이해하면서 계급투쟁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되었다. 생산관계의 변형이라는 과제를 특정한 개인을 교체하면 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계몽과 구망의 이중변주가 ‘불협화음’이 아니라 ‘앙상블’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르크스의 이상은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며,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바는 ‘개인성과 집단성의 지양’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에서 개인은 자유주의에서 획득한 권리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민이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격 또한 갖춰야 한다. 이러한 대전제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긴 것이 패착 아니었을까? 이러한 지점에서 리쩌허우의 문제의식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리쩌허우는 『중국현대사상사론』의 후기에서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주제는 중국 근현대의 여섯 세대에 걸친 지식인들(17~25세 때 공통적인 사회 경험을 갖는 사람들, 신해혁명 세대, 5·4 세대, 대혁명 세대, 유격전쟁 세대, 해방 세대, 문화혁명 세대)”이었다고 말한다. 책 자체가 외부인이 알기 힘든 저간의 사정을 직접 겪은 지식인의 자기 고백서인 셈이다. 1930년대 생으로서 해방 세대이자 문화혁명을 경험한 리쩌허우만큼 이러한 반성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적임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리쩌허우의 반성이 아직도 현실에서 영향력을 갖게 된 데에는 문화혁명을 제대로 비판하고 반성하지 못했다는 현실이 있었기에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현재 중국에는 리쩌허우가 하고자 했던 작업과 반대되는 흐름도 보인다. 사실에 근거하여 문혁을 연구, 비판, 성찰하려는 자유주의 지식인에 대해서 중국 당국은 억압과 감시를 늦추지 않지만, 신좌파가 자유주의의 자유, 민주, 법치를 비판하는 것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들은 오히려 문혁에 대해서도 긍정하는데,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무너지지 않은 이유로 조반정신과 의지주의로 대표되는 문혁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에서 문혁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채 문혁의 비극은 잊힌 과거가 되었다. 제대로 과거를 반성하지 못했기에 새로운 시대는 아직 요원한 상황에서 리쩌허우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살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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