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4 가을.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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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신화’를 파헤치다

흘레브뉴크,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이진호 | 인천지부 사무처장


1. 들어가며

 
2000년에 공식 취임한 푸틴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소련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푸틴은 이 계획을 학교로부터 시작했다. 대통령이 의뢰하여 러시아 일선 학교에서 도입된 역사교사들을 위한 지도서에서 스탈린은 “조국의 현대화를 보장하기 위해 테러작전을 합리적으로 수행했던” “유능한 경영자”로 묘사돼 있다. 푸틴은 스탈린의 범죄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자책하지 말고 ‘영광스러운 소련의 과거’의 건설자로서 스탈린이 이루었던 업적과 균형을 맞추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레크 V. 흘레브뉴크의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영어판 제목은 STALIN: New Biography of a Dictator)은 2015년 러시아와 미국에서 동시에 출판되었다. 그는 ‘스탈린 신화’ 비판이라는 정세적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 특히 최근 광범위하게 떠오르는 ‘현대화 동력으로서 스탈린주의’라는 스탈린 옹호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스탈린 옹호론은 스탈린 테러의 수많은 희생자와 ‘대약진’이 치른 엄청난 대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스탈린주의가 현대화와 전쟁 준비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본다. 푸틴의 스탈린 평가와 통하는 주장이다. 흘레브뉴크는 이 주장에 대해 스탈린의 방식 외에도 대안적 발전경로가 분명히 있었으며, 1937~38년에만 70만 명을 처형한 대숙청이 현대화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저서의 러시아 판에는 러시아 독자를 위한 「스탈린 신화」라는 장이 마지막에 붙어있다고 한다. 흘레브뉴크는 ‘스탈린 신화’ 비판을 통해 푸틴을 비판한 셈이다. 
 

흘레브뉴크는 이 책에서 방대한 자료를 종합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스탈린에 대한 환상을 비판한다. 첫째, 스탈린의 실정은 많은 부분 스탈린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 즉, 당시 시대적 배경,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공통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스탈린’이라는 개인의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냉혹하고 합리적 성격을 가졌으며 독재 권력을 추구했다. 이로 인해 소련의 집단 지도 체제는 파괴되었고, 그는 압도적 권력을 갖고 대숙청의 많은 부분을 직접 지시했다. 둘째, 소련의 현대화에서 스탈린이 택한 길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수행한 ‘위로부터의 혁명’은 일인자가 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의 측면이 있었다. 그 결과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셋째, 스탈린의 테러로 인한 수많은 희생이 전쟁준비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다는 스탈린 옹호론과는 달리, 스탈린은 히틀러의 침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전쟁 초기 소련의 연이은 패전은 그의 무능탓이 컸다. 전쟁 승리는 상당부분 러시아 인민들의 애국심에 의해 가능했다. 

흘레브뉴크의 책을 볼 때 주의할 필요도 있다. 1959년생으로 소련 시기에 대학 교육을 받고 소련 해체를 경험한 그는 전체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같은 이념적 접근법보다 권력집단 내의 미시적인 작동방식에 집중한다. 이는 ‘스탈린 신화’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스탈린의 실정과 무능, 그로 인한 소련의 참상을 살펴보기에는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소련 사회주의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미시적인 정치권력의 문제로 돌리게 될 위험성도 존재한다.  

사회진보연대는 최근 러시아혁명사, 스탈린주의를 되돌아보기 위해 지속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과거의 혁명을 끊임없이 재독해하고 현재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특히,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올랜도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가 수많은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소련의 현실에 접근한다면, 흘레브뉴크의 책은 스탈린이라는 개인이 위로부터 행한 수많은 정책과 조치를 통해 더 풍부하게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스탈린식 인민주의의 폐해를 더 이해하고 ‘스탈린 신화’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2. 혁명 이전

 
이오세브 주가슈빌리(스탈린의 조지아어 본명)는 광대한 러시아 제국 외딴 구석 조지아의 소도시 고리에서 1878년에 태어났다. 아들이 사제가 되길 바란 어머니 예카테리나의 뜻에 따라 스탈린은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교의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스탈린은 조지아 민족주의에 심취하였으나, 그가 결정적으로 끌린 것은 마르크스주의였다. 그의 공식 전기에 따르면 그는 1898년 8월 사회민주당 조직에 가입했고, 1899년 신학교에서 ‘무단 결시’라는 공식 사유로 제적되었다. 볼셰비키가 된 스탈린은 지하 혁명 활동과 체포와 투옥을 반복하다 1912년 볼셰비키 지도부에 진입했다. 이 시기 당의 소수 민족 정책에 대해 혁명 세력이 각 민족별로 분리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글을 써 레닌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그는 청년기를 뒤로 하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스탈린’으로 개조했다(이 무렵부터 그는 러시아어처럼 들리는 스탈린을 이름으로 썼다). 

스탈린의 냉혹성의 근원으로 자주 지적되는 것이 캅카스 출신이라는 배경이다. 흘레브뉴크도 관련 자료를 여럿 인용한다. 러시아 역사학자 외르크 바베로브슈키는 스탈린과 그의 전우들이 당에 “캅카스 변경 지방의 폭력적 문화 - 집단 간의 유혈 보복과 원시적 명예 관념 - 를 들여왔다”고 썼다. 사회민주당 자캅카지예(트랜스 코카서스)지부에서 일했던 멘셰비키 보리스 니콜라옙스키는 스탈린이 ‘지극히 강한 동기와 복수심’을 갖고 당을 지배하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수단’도 동원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캅카스의 풍습이 주입된’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흘레브뉴크는 그의 냉혹성이 ‘캅카스 풍습’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당시 극단주의 폭력은 러시아 전체를 지배했고, 혁명가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증오와 이에 맞서 투쟁하겠다는 결단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혁명가들에 의한 유혈, 방화, 절도 등 폭력행위는 다반사였다. 오히려  흘레브뉴크는 스탈린 개인의 독특한 성격을 더 강조한다. “그에게는 과단성과 신중함, 집착과 냉소가 혁명의 수많은 위험을 탈 없이 뚫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딱 알맞게 배합되어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스탈린은 온건파 카메네프 편에 섰다. 그는 처음부터 레닌의 급진적인 구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가 레닌 지지로 돌아선 것은 1917년 4월 레닌의 추천을 받아 당중앙위원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이후였다. 레닌의 주장을 둘러싼 당내 논쟁은 계속되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볼셰비키가 제헌의회라는 합법적·평화적 수단을 통해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도 봉기 며칠 전인 1917년 10월 18일 캅카스 구역 선거관리위원회에 자신의 출마 확인서를 보내는 일을 잊지 않았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당내 논쟁과 반대 견해를 볼셰비키 외부의 신문에 발표하는 지경에 이르자, 분노한 레닌은 그들의 축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에 반대하며 <프라우다>에 타협적인 사설과 지노비예프의 서한을 나란히 게재했다(그는 <프라우다> 편집장이었다). 흘레브뉴크는 스탈린이 반항한 이유를 트로츠키에 대한 견제에서 찾는다. 1917년 5월 미국에서 귀국한 트로츠키는 즉시 인정받았고 레닌과 강력한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 레닌의 오랜 동지들은 트로츠키의 혜성 같은 부상에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1917년 10월 26일 새벽, 볼셰비키가 임시정부 각료들을 체포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한 인민위원회의를 구성했다. 흘레브뉴크는 레닌의 과단성, 그리고 자신의 전략을 완강하고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태도가 스탈린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몇 년 뒤 ‘위로부터의 혁명’을 추진했을 때 이 교훈, 즉 무제한적인 급진주의 전략에 의지했다. 
 
 

3. ‘반혁명 음모’의 등장과 총간사 스탈린 

 

1) 군사적 무능과 관료적 출세

스탈린은 야만적인 내전 시대의 전형적 산물이었다. 1918년 6월 차리친(나중에 스탈린그라드, 현재는 볼고그라드)에 파견된 스탈린은 당시 전직 제국군 장교들을 활용하던 정책에 반대하여 ‘전문가’들을 내쫓고 직접 작전 지휘를 했다. 그가 모스크바로 보낸 전문에는 ‘전문가’에 대한 적대감이 잘 드러난다. 

우리의 새로운 군대는 새로운 병사들과 더불어 새로운 혁명 지휘관들이 탄생한 덕분에 건설되었습니다. 모두가 아는 배신자들[이어서 스탈린은 여러 군사 전문가들을 열거하고 있다]을 그들에게 억지로 떠안겨서 전선 전체가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지휘를 맡은 지 2개월이 된 1918년 8월, 차리친은 함락 직전에 몰렸다. 패배의 위험에 처한 그는 ‘반혁명 음모’를 색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붉은 군대에 복무 중인 이들을 포함한 전직 제국군 장교, 사업가, 심지어 일반 시민들이 체포의 물결에 휩쓸렸다. 철도 인민위원부 소속이자 ‘부르주아 전문가’인 N. P. 알렉세예프가 ‘반혁명 음모’ 주모자로 몰렸다. 사건은 단 며칠 만에 급조되었고 지역 신문에 처형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이 사건은 혼란에 휩쓸려 몇 달간 수감 되었다가 풀려난 고참 볼셰비키 콘스탄틴 마흐롭스키에 의해 모스크바에 알려졌다. 그는 이 사건이 체카에 의해 조작되었고, 스탈린을 포함한 차리친의 정치 지도자들이 모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관대했다. 같은 해 8월 30일 사회혁명당 소행으로 추정되는 레닌 암살 기도가 있었고, 그 이후 ‘적색 테러’가 공식 정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다른 지역에서도 ‘반혁명 분파들’을 ‘숙청’할 수 있도록 재가해달라고 한 스탈린의 요청을 승인했다. 몇 개월 뒤 레닌은 스탈린이 차리친에서 벌인 일에 대해 ‘실수’라고 지적하긴 했으나, 스탈린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레닌은 스탈린의 조치가 무절제하고 군사 전문성을 저해한다며 소환할 것을 주장한 트로츠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918년 10월 그는 차리친을 떠나야 했고 그의 동지들도 곧 쫓겨났다. 

스탈린에게 군사적 재능은 없었다. 1920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패배에 직접적 책임이 있었다. 전쟁 중에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제1기병군에 대한 재배치 명령을 거부했다. 붉은 군대는 동시에 너무 많은 지역에서 공격 작전을 수행하며 전선이 분산되었고, 이는 곧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스탈린은 다른 지휘관들, 실질적으로 붉은 군대 사령부(결국 트로츠키)를 비난하고 조사위원회를 통해 패배 원인을 규명하자며 책임을 전가하려 했으나, 그의 의견은 거부되었다. 스탈린은 스스로 군무를 사직했다. 당은 그를 “장기적인 업무로 캅카스에 파견”하였으나 오래가진 않았다. 몇 주 뒤 그는 모스크바로 복귀했다. 

종전 후 스탈린은 2급 관료에 머무를 위기에 처해있었다. 갖은 노력 끝에 그는 1922년 초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총간사에 올랐다. 이 직위는 스탈린의 성격에 딱 맞았다. 정치국 회의 의제 설정, 인사 권한이 특히 중요했다. 수많은 중간급 관료가 그에게 경력을 의존하게 된 것이다. 스탈린은 노련하고 자신감 있는 관료이자 레닌의 충성스러운 동지로 여겨졌고, 상당한 지지자를 끌어모았다. 이런 면모는 그의 보좌관 아마야크 나자레의 편지에 잘 드러난다.

너무 엄청난 시간을 잡아먹는 지루한 노동이라 특히 코바(스탈린의 가명이자 애칭)의 철저한 통제 밑에서는 재채기를 하거나 한숨 돌릴 새조차 없어요. (…)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요. 그를 잘 알게 된 지금은 그에게 대단한 존경심을 품고 있지요. 그의 엄격한 태도 밑에는 같이 일하는 직원에 대한 배려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당중앙위원회에 질서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스탈린이 총간사 직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 지도부 내의 투쟁, 특히 레닌과 트로츠키의 갈등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시기 레닌에게 스탈린은 중요한 동맹이었다. 레닌은 스탈린에게는 스스럼없이 대한 반면 트로츠키에게는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쓰며 뻣뻣한 태도를 유지했다. 레닌과 스탈린의 화합은 1922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2) 소결: 스탈린식 테러의 첫 등장

내전 시기 스탈린의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본능적 불신, 남부에서의 농작물 징발과 우크라이나에서의 노동군 조직의 경험은 그가 객관적 제약을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경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는 스탈린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볼셰비키의 국가 운영 경험은 내전 시기에 최초로 형성되었고, 그것은 매우 강압적인 것이었다. 레닌은 종전 후 전시 공산주의에서 신경제정책(NEP, 네프)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이를 장기 정책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전망은 모두가 공유하긴 했으나, 많은 볼셰비키는 혁명이 ‘후퇴’한다고 느꼈다. 훗날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우리는 위기를 ‘반혁명 음모’ 조작과 숙청으로 해결하는 스탈린 특유의 전략이 최초로 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또한 스탈린만의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볼셰비키는 전시 상황에서 체카를 적극 활용하여 테러를 일삼았고, 이는 반볼셰비키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체카는 1918년부터 1919년 전반까지 최소한 8389명을 재판 없이 총살했고, 8만 7천명을 체포했다. 그럼에도 레닌의 시기에는 당 밖의 반대파를 다루는 방식과 내부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당원에게 사용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고참 볼셰비키는 당내 의견 불일치에 비밀경찰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러나 우리는 스탈린이 당내 반대파를 ‘적’으로 규정하고 비밀경찰을 동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한편, 총간사에 오른 스탈린은 그 직위의 힘으로 당 조직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간사국은 지역 당 조직을 이끄는 간사들을 임명했고, 이들을 면직할 수도 있었다. 지역 당 조직은 전국 당 협의회와 대회에 보낼 대표들을 선출했고, 이들 중 간사가 선출되는 일이 점차 흔해졌다. 전국 당협의회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조직국, 그리고 당연하게도 간사국을 선출했다. 즉, 총간사는 정치적 반대파를 처단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당대회를 계속 열어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4. 권력투쟁 

 

1) 레닌의 최후 투쟁

레닌이 말년에 스탈린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흘레브뉴크는 와병 중이던 레닌이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세 명으로 이루어진 ‘트로이카’의 성장에 위기를 느끼고 권력 재조정을 위해 스탈린을 공격했다고 본다. 흘레브뉴크는 1922년 소비에트 공화국들을 단일 국가로 통합하는 프로그램을 둘러싼 논쟁에서 레닌이 스탈린 공격을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당시 스탈린은 모든 주요 공화국과 소수 민족 정치체에 일정한 자치권을 주고 러시아 연방으로 묶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에 반대하고 ‘독립’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대등한 연합을 주장하며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깜짝 놀라 저항했으나, 레닌과 심각하게 대립하지는 못했다. 

뒤이은 대외 무역을 둘러싼 논쟁에서 레닌은 심지어 그동안 대립했던 트로츠키를 동맹으로 삼았다.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다가오는 당 대회에서 대외 무역 문제를 제기하고 소비에트 대회에서도 연설할 것을 권고하는 메모를 구술했다(와병 중인 레닌을 위해 아내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받아 적은 것이다). 이는 스탈린을 포함해 레닌에 반대하는 이들을 망신주기 위함이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 연설을 넣으라는 레닌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는 또 크룹스카야에게 전화를 걸어 그 메모를 받아 적어서 트로츠키에게 보낸 일을 책망했다. 이는 분명한 실수였다. 그는 크룹스카야에게 사과했으나 레닌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1922년 12월 24일 레닌은 “대회에 보내는 서한”으로 알려진 문서에서 스탈린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제 총간사가 된 스탈린 동무는 자기 손에 엄청난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나는 그가 항상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1월 4일 또 다른 서한은 스탈린이 ‘너무 무례하다’는 이유로 총간사직에서 해임할 것을 제안했다. 

이 시기 ‘조지아 문제’가 벌어지며 레닌은 스탈린을 더욱 경계한다. 이 사건은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된 자캅카지예 연방 지도부와 조지아 볼셰비키 그룹 사이의 충돌이었다. 연방 지도부 수장 오르조니키제는 반대파 중 한 명을 구타하여 공격을 자초했다. 스탈린은 오르조니키제와의 친분이 있었기에, 이 문제를 편협하게 바라보았다. 레닌은 진상조사위원회가 오르조니키제 측에 유리한 보고서를 제출하자 불쾌해했고, 제르진스키(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와 스탈린이 오르조니키제를 편들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증거가 레닌이 3월 12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1923년 3월 5일 트로츠키에게 당중앙위원회에서 ‘조지아 문제’에 대한 변론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는 메모를 보냈다. 같은 날, 레닌은 스탈린이 크룹스카야를 책망한 일과 관련하여 그에게 보내는 메모를 구술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무! 당신이 내 아내에게 전화하여 그녀를 야단친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었소…나는 내가 받은 모욕을 쉽게 잊을 생각이 없으며, 내 아내가 받은 모욕이 내가 받은 모욕과 같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한 말을 순순히 철회하고 사과하든지 나와의 관계를 끊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길 바라오.” 레닌은 조지아 볼셰비키에게 보내는 편지도 구술했다. “친애하는 동무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당신들의 일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르조니키제의 무례함과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묵인에 분개하고 있으며, 당신들을 위한 편지와 연설문을 준비 중입니다.” 

아마 레닌은 스탈린을 축출할 생각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권력 재조정 과정의 일부였다. 반면 스탈린 입장에서 이 갈등은 상당한 상처가 되었다. 그는 레닌이 사과를 요구한 메모를 죽을 때까지 보관했다. 스탈린은 본인의 충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적대감을 보인 레닌의 동기를 그의 와병에서 찾았다. 조지아 볼셰비키에게 보낸 편지는 레닌이 구술한 마지막 문서가 되었고 그는 당 대회에서 연설하지 못했다. 레닌은 1924년 1월에 사망했다. 
 

2) 좌익반대파와의 투쟁

흘레브뉴크는 레닌 사후 1924~1925년 일시적인 세력 균형으로 흥미로운 집단 지도 체제가 나타났다고 본다. 개인 간 갈등을 해소할 시스템이 없는 상황에서 집단 지도 체제의 지속은 볼셰비키 과두 3인, 즉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스탈린의 개인적 자질에 달려있었다. 권력을 장악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집단 지도 체제를 흔들었고, 당내에 마지막으로 남은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스탈린은 총간사라는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의도적으로 정치적 갈등을 유발하며 세력관계를 본인에게 유리하게 이동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나마 유연하고 균형잡힌 모습을 보였던 정부 정책은 사라지고 막대한 에너지와 인력이 손실되었다. 

이 시기 세력 균형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1924년 8월 19일 스탈린의 사직서 제출 사건이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와의 대립은 스탈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레닌의 ‘유언장’ 문제, 즉 스탈린 총간사 해임 문제도 적절히 처리되었다(레닌의 유언장은 당 대회에서 공개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전체 회의가 아닌 별도 대의원 회의에서 낭독되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의도적으로 공격했고, 논란 와중에 그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직서를 제출한 건 이 시점이었다. 사직서에서 그는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협소한 틀 내에서’ 진정한 정치적 협력이 불가능하며, 정치국을 사퇴하고 총간사직에서도 사임하며, 2개월의 병가를 내고 그 뒤에는 시베리아 지역의 한직이나 국외로 배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의사가 진심일 리는 없었다. 사직서는 빠르게 정리되었고 그 처리 과정에서 반트로츠키파는 트로츠키를 제외한 정치국 전원과 중앙감찰위원회 의장을 포함하는 세묘르카(7인방)를 뽑았다. 이 사직서 사건으로 스탈린은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절연하고 7인방을 얻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1925년 말에는 새롭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진영’ 대 ‘스탈린과 나머지 7인방’의 구도가 구축되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새로운 전략은 네프를 지속하는 ‘우파’에 맞선 투쟁이었다. ‘좌파’ 트로츠키에 반대해 온 ‘온건파’가 채택하기엔 터무니없었지만, ‘우파’인 정치국 다수에 반대하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은 네프에 반감을 가진 당 관료 집단을 끌어들이려 했다. 이는 오산이었다.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에서 그들은 무참히 패했다. 

1926년 봄에 반대파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트로츠키 간 ‘정략결혼’을 통해 확대되었다. 당시 양 진영이 수행한 정치적 음모 중 가장 강력한 수단은 공안 기관을 활용한 반대파 탄압이었다. 이는 스탈린의 장기였다. 1926년 6월 6일, 수도 외곽의 한 마을에서 반대파에 동조하는 약 70명의 볼셰비키가 모임을 열었고 지노비예프 지지자인 미하일 라셰비치가 발언했다. 반대파 지도자들과 연계를 보여주는 증거는 없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활용해 지노비예프 그룹을 섬멸하려고 했다. 반대는 곧 해당 행위라는 발상이 이를 정당화했다. 1926년 7월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반대파가 자신들의 의견을 합법적으로 옹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연방적 불법조직을 건설함으로써 정도를 넘었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지노비예프는 정치국에서 축출되었고, 몇 개월 뒤 트로츠키와 카메네프 역시 해임되었다. 

갈등은 절정에 다다랐다. 1927년 9월 오게페우(OGPU, 연방국가정치보안부)는 유인물을 조작하여 반대파가 군사 쿠데타를 모의 중인 ‘반혁명 조직’에 속해 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927년 10월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는 당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10월 혁명 10주년인 11월 7일에는 반대파의 시위 시도가 구실이 되어 반대파 다수가 체포되고 유배되었다. 12월 15차 당 대회는 반대파 섬멸을 공식적으로 재가했다. 트로츠키는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되었다가 소련에서 추방되었고 1940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멕시코에서 암살당했다. 반대파 대부분은 1930년대 후반에 죽임을 당했다. 

반대파와의 투쟁이 끝난 1927년 12월, 제15차 당 대회 당중앙위원회 첫 총회에서 스탈린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총간사 재선 출마를 거부한다. 그는 반대파 섬멸로 이제 레닌의 ‘유언장’을 집행할 적기라고 설명했다. 예측대로 사직서는 반려되었다. 스탈린은 레닌이 남긴 유언장을 이겨내고,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식적인 승인을 쟁취했다.
 

3) 소결: 당내 반대파에 대한 테러의 개시

흘레브뉴크는 ‘레닌의 최후 투쟁’이 그의 권력의지를 표현한다고 본다. 그러나 레닌 말년의 스탈린 비판이 오로지 권력투쟁의 일환이라고 보긴 어렵다. 특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구성을 둘러싼 논쟁과 ‘조지아 문제’는 레닌과 스탈린 간 민족 문제를 둘러싼 쟁점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닌은 마르크스를 계승하여 혁명 이전부터 민족자결권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대체로 ‘노동자의 자결’을 주장했는데, 이는 민족자결권을 선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자칫 이를 명분으로 타국에 개입하거나 친소련 정부만 승인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역사는 실제로 그렇게 귀결되었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 이어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명분을 둘러싸고도 첨예한 쟁점을 이루므로 유의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레닌이 스탈린을 ‘무례’하다는 이유로 총간사 해임을 제안한 것도 인상적이다. 흘레브뉴크는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레닌은 1922년 11차 당 대회 보고에서 “능력을 갖추지 못해 우리가 정복한 부르주아 문화보다 앞서가지 못함으로써 부르주아 문화를 역으로 강제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고 언급한다. 레닌은 이 문화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에게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당내의 ‘투기꾼’과 ‘출세주의자’를 걸러내고 적절한 인재를 등용할 필요가 있었다. 흘레브뉴크 또한 스탈린의 냉혹한 기질에 주목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은 ‘무례한’ 스탈린이 자기 손에 권력을 집중시켰을 때 심각한 파국을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한 셈이다. 

한편, 흘레브뉴크는 사료를 통해 당내 반대파를 ‘적’이라고 낙인찍는 관행이 이 시기의 스탈린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같은 외부 세력에게만 썼던 ‘적’이라는 낙인은 이제 당내 반대파에게도 가능해졌다. 이때 씌운 ‘전연방적 불법 조직’이라는 낙인은 10년 후 ‘전연방적 반혁명 테러 조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1920년대 말의 탄압은 비교적 가벼웠지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그랬듯이 러시아 혁명 역시 ‘자기 자식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고 고참 볼셰비키들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1928년 1월 1일 고참 볼셰비키 발레리안 오신스키는 레닌이 마르토프를 추방할 때의 배려를 언급하며 스탈린에게 우려를 표명하는 편지를 썼다. 스탈린은 당이 ‘필요한 모든 일’을 다하고 있다며 퉁명스러운 답장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가 1930년대의 대숙청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은 그는 어떤 반대도 용납할 수 없으며 어떤 집단 지도 체제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5. 스탈린 혁명  

 

1) 극좌로의 전환 

1927년 곡물 공급 실패로 위기가 발생하였다. 위기는 가격정책의 오류와 불균형한 산업 투자로 경제 균형이 무너진 탓에 벌어졌다. 이런 위기는 익숙했고 이를 극복했던 성공적 방안도 있었다. 정치국은 합심하여 해결책을 모색했고, 이번에는 농작물 강제 징발 캠페인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 핵심은 국가 지도자들이 농업 생산 지역에 방문하여 지방 공무원들의 더 큰 노력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에 파견된 몰로토프는 다음과 같이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친애하는 코바! 오늘로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지 4일째입니다―사람들 말로는 내가 잘 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게으른 호홀[우크라이나인을 경멸하여 지칭하는 말]들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또 우크라이나의 ‘총국’과 ‘센터’로부터 지방 현장들을 시찰하고 열심히 일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지금 나는 멜리토폴(금광!)에 있습니다. 또 곡물 징발에 으레 따르는 욕설과 함께 한바탕 뒤집어엎고 수색했습니다… 새로 느낀 점이 많습니다. 흙을 만질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돌아가면 다 이야기하겠습니다. 모두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명랑한 어조로 보고한 그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농기계를 수입할 수 있도록 징발한 농작물 일부를 보너스로 지급해달라고도 요청했다. “이는 (생산 촉구와 더불어) 격려를 위해서 긴급히 필요하며 어느 면으로 보나 상책입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렇게 명령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1928년 초 그는 3주 간 시베리아로 떠났다. 정치국 방침과는 다른 급진적 방식이 시작되었다. 그는 전국에 시베리아 농작물을 공급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여 쿨라크(부농)를 공격하고 그들을 ‘투기’ 죄로 처벌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시베리아는 불과 한 달 만에 연간 곡물 할당량의 3분의 1 이상을 채웠다. 행동 대원들은 곡물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농촌을 휩쓸었다. “스탈린 동무가 우리에게 좌우명을 주셨소. 찍어 눌러라, 패라, 짜내라.” 총간사 입에서 직접 떨어진 쿨라크와의 전쟁 명령은 이런 행위의 보편적 허가증으로 여겨졌다. 

스탈린은 이런 폭력 조치에 이의가 제기될 것을 예상했다. 그의 극단적 조치는 승인되었지만, 한편으론 ‘왜곡과 탈선’을 비판하는 결의안도 채택되었다. 반대파와의 4년에 걸친 투쟁은 통합을 향한 열망을 낳았다. 네프의 일부 모순은 지도부를 조금씩 좌로 이끌고 있었으나, 1928년 초 정치국은 통합되어 있었고, 경제적 인센티브도 고려했다. 지도부에는 여전히 잠재적 정적들이 있었다. 스탈린의 친구들도 그가 집단 지도 체제를 깨려고 한다면 지지해줄지 불투명했다.
 
스탈린은 정치 공작과 비밀경찰에 의존했다. 공작의 핵심은 정적들은 분파주의자로 보이게 연출하고, 자신은 부당하게 공격받는 통합 지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음모와 정적들의 실책에 힘입어 그들을 하나씩 약화시켜나갔다. 특히, 1928년 곡물 징수가 쿨라크와의 전쟁으로 전환되면서,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이 진전될수록 적들의 저항도 거세지면서 계급 전쟁이 더 격화된다는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다. ‘적’에 대한 지속적 압박과 적과 연관된 당내 ‘우익’을 섬멸하는 것만이 사회주의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불과 얼마 전 좌익반대파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그는 이제 극좌로 선회하여 부하린과 리코프를 ‘우익’이라고 공격했다. 급진주의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당내 온건 세력은 침묵을 지켰고, 대부분의 정치국원은 스탈린 편에 섰다. 1929년과 1930년, 부하린, 톰스키, 우글라노프, 리코프는 정치국에서 차례로 쫓겨나 좌천되었다. 

스탈린 분파의 승리가 낳은 결과는 ‘대약진 정책’이었다. “늦어도 10년 안에, 우리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간격을 좁혀야 합니다…혹자는 기술을 습득하기가 힘들다고 주장합니다. 허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볼셰비키가 점령하지 못할 요새는 없습니다.” 사회경제적 제약을 무시하고 경제를 ‘점령해야 할 요새’로 취급하는 태도는 나라를 내전 시기의 전시 공산주의로 되돌려 놓았다. 1929년 4월 기존의 5개년 경제 성장 목표는 너무 낮다며 폐기되고, 즉각 50퍼센트, 두 배, 세 배로 높아졌으며, 5개년 계획이 4개년, 3개년 계획으로 바뀌었다. 광란 속에서 더 높은 수치가 날조되었다. 농촌 외부로부터 지원은 없었고, 필요한 자원과 인력은 모두 농촌에서 조달되었다. 농업생산량이 급락하고 징발은 더 무자비해지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스탈린의 결론은 ‘집단화’였다. 1929년 11월, 스탈린은 집단화로의 이행을 점진적으로 수행한다는 과거 당의 결정을 무효화하면서 집단화가 지금 즉시 전국에 걸쳐 수행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12월에는 계급으로서 쿨라크 박멸 요구가 뒤따랐다. 과열되고 폭력적인 운동이 농촌을 장악했다. 많은 재량을 부여받은 당의 출세주의자, 급진주의자들은 열렬히 반응했고 집단화가 성공했다는 보고가 모스크바에 쇄도했다. 

집단화를 위한 최종 계획은 1930년 초 당중앙위원회 내 소위원회 특별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위원들은 스탈린 집단화 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이를 몇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추진하며 농민들에게 작은 텃밭이라도 남겨 두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농민의 재산을 국가로 완전히 몰수하는 편을 선호했다. 집단화 계획은 농민을 겨냥한 군사 작전에 가까워졌다. 집단화 일정은 급격히 단축되어 주요 농업 지역은 1930년 가을까지 완료되어야 했다. 쿨라크의 집단농장 편입은 금지되었고, 쿨라크와 그 가족은 체포·구금하고, 유배를 보내거나 총살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농민 사유지를 공존시키자는 모든 제안은 깨끗이 삭제되었다. 

집단화는 서류상으로는 단기간 내에 엄청난 성과를 달성했다. 전국에서 집단농장에 소속된 농민 가구는 1929년 10월 1일 7.5퍼센트에서 1930년 2월 20일 52.7퍼센트로 급증했다. 이 통계 뒤에는 비극적 현실이 있었다. 농촌은 반란으로 내몰렸다. 반란이 정점에 다다랐던 1930년 3월 6,500건 이상의 대규모 소요에 150만~200만 명이 가담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파편화된 농민은 조직적 진압에 버틸 수 없었다. 무엇보다 봄 파종을 위해 농민은 다시 들판으로 돌아가야 했다. 1930년 추수기에 대다수 농민은 강제로 집단농장에 편입되었다. 
 

2) 대기근 

1차 5개년 계획의 성과를 발표할 때가 되었을 때, 스탈린은 실제 수치를 단 한 건도 인용하지 않고 계획의 조기 달성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기적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극도로 비효율적인 산업화 방식이었다. 대약진정책의 또 다른 결과는 1932~1933년 겨울에 정점에 도달한 대기근이다. 500만~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은 영구적 장애를 입었다. 1933년 초의 몇 달간 작성된 오게페우와 당 기관 비밀 보고서는 만연한 식인에 대한 보고로 가득 차 있다. 흘레브뉴크는 이를 ‘스탈린 기근’이라 부른다. 

분명히 기근을 완화할 수 있는 조치들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위기를 악화시켰다. 그는 기근이 ‘적’과 쿨라크의 사보타주 때문이며, 악의적으로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기근이 한창이던 1933년 5월,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동조했던 미국인 레이먼드 로빈스 대령을 만났다. 스탈린은 로빈스가 소련 사정에 밝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고 솔직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1932년의 부진한 수확량에 대한 질문에 ‘현재 일부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음’을 가까스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뻔뻔하게도 기근에 시달리는 것은 게으른 농민들이며, 국가는 다른 농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돕고 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이 대화를 통해 그가 기근을 사실로 인정했으며, ‘적들의 음모’가 그 원인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로빈스와의 대화에서 적과 쿨라크의 방해공작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1933년 4월 4일 미하일 숄로호프가 스탈린에 보낸 편지는 그가 읽었음이 확실한 문서다.

저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광경을 보았습니다…[곡물 납부를 이행하지 못한 죄로] 자기 집에서 쫓겨난 가족이 한길에 모닥불을 피우고 그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누더기로 감싸고 불로 녹인 땅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아이들의 끝없는 울음소리가 길거리를 가득 채웠습니다…바스콥스키 집단농장에서는 아기를 데리고 있는 한 여자를 내쫓았습니다. 그녀는 아기와 자신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안에 들여보내 달라고 사정하며 밤새도록 마을을 배회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집안에 들이지 않습니다[‘태업 분자’를 도우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에 그 아기는 엄마 품에서 얼어 죽었습니다. 

스탈린은 숄로호프가 사는 지역에 곡물을 추가로 지급하고 학대 행위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숄로호프에게 농민들의 파괴 행위에 눈을 감고 편향적이라고 비난하는 답장을 보냈다. 학대 행위로 중형을 받았던 지역 지도부는 나중에 무죄로 풀려났다.  
 

3) 스탈린의 후퇴

잔혹한 정책에도 1932년 곡물 징수량은 1931년에 비해 20퍼센트 감소했다. 축산 부문에서는 떼죽음이 발생했다. 강제적 산업화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국제적 긴장도 고조되었다. 1931년 말 일본은 만주를 점령했고, 1933년 1월 독일에서는 나치가 정권을 장악했다. 소련은 서구 민주 진영과의 동맹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1933년 12월 19일 정치국은 소련이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독일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폴란드 등 서구 국가들과 지역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는 문제에 대한 극비 결의안을 채택했다. 스탈린은 이제 소련이 ‘정상’ 국가라는 신호를 보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드디어 스탈린은 이미 여러 해 전에 취할 수 있었고 또 취해야만 했던 조치들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첫째가 농민에 대한 양보 조치였다. 1933년 1월, 정부는 무제한적 징발이 끼친 막대한 피해를 사실상 인정하며 곡물 징수 한도를 설정했다. 또한 약간의 개인 텃밭도 허락되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양보였다. 집단농장에서 일하며 거의 아무 것도 받지 못했던 농민들은 이제 개인 텃밭을 경작할 수 있었고, 개인 텃밭의 생산성은 비상하게 높았다. 1937년부터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개인 텃밭이 온 나라 채소와 감자의 38퍼센트, 고기와 유제품의 68퍼센트를 공급했다. 

산업정책의 변화도 불가피했다. 스탈린은 1933년 1월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제2차 5개년 계획의 속도를 늦출 거라고 약속했다. 이 방향 전환은 1934년 11월 총회에서 배급제 폐지를 논의하던 중에 그가 한 발언에 잘 나타난다. 

우리는 왜 배급제를 폐지하려 할까요? 우선 무엇보다도 화폐 경제를 강화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화폐 경제는 우리 사회주의자들이 최대한 활용해야 할 몇 안 되는 부르주아 경제 기구 중 하나입니다…상거래를 확대하고, 소련 상업을 확대하고, 화폐 경제를 강화하는 것 - 이것이 우리가 이 개혁을 추진하는 주된 이유입니다…돈이 돌기 시작하고 유행하게 되는, 오랫동안 없었던 일이 일어날 것이며, 화폐 경제가 강화될 것입니다.

테러의 고삐도 느슨해졌다. 1933년 5월, 스탈린은 ‘경범죄’로 체포된 사람들을 포화 상태의 형무소에서 석방하고 비밀경찰의 대량 체포와 추방을 금지한다는 특별 지시에 서명했다. ‘사회주의적 적법성’이 강조되며 1934년 2월 오게페우는 폐지되었고 정치경찰은 신설된 내무 인민위원부(NKBD, 엔카베데) 밑에 배치되었다. 1934년 9월에는 ‘해독분자’와 ‘첩자’를 상대로 한 사건을 조사하는 위원회 설치 지시가 내려졌다. 이 위원회는 한동안 진지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934년 12월 1일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로 위원회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4) 소결: ‘계급의 적’에 대한 테러와 집단화 정책 실패의 악순환  

‘현대화 동력으로서 스탈린주의’라는 스탈린 옹호론에서, 스탈린의 급진적 정책 전환과 ‘농민과의 전쟁’은 현대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된다. 흘레브뉴크는 이 주장을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자연스레 반박하는 셈이다. 첫째, 스탈린의 극좌로의 선회는 현대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일인자가 되기 위한 의도적이고 정치적 선택이었다. 스탈린은 급진적 경로에 도박을 걸어 의도적으로 집단 지도 체제를 파괴하려 했다. 이는 그가 통제하기 수월한 새로운 다수파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고,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둘째, 스탈린의 경로가 아니더라도 훨씬 온건하게 현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대안적 경로가 존재했다. ‘우파’ 부하린, 리코프와의 투쟁은 네프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했다. 이들은 네프 유지를 주장하며 ‘농민과의 전쟁’에 반대하고 제1차 5개년 계획의 목표를 현실화할 것을 요구했다. 1차 5개년 계획은 엄청난 실패였으며, 농업집단화는 반드시 그의 주장처럼 급진적일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네프를 유지했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 비슷한 수준의 성장이 달성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파국이 닥치자 스스로 후퇴했는데, 이는 이미 위기가 닥치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된 요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집단화는 스탈린 독재 체제의 시금석이었다.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농민 계급에 대한 대규모 폭력은 거대한 탄압 기구를 성장시켰고 수용소 체제와 유형지를 창조해냈다. 전통적으로 존재해 온 사회적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어 사회의 원자화를 가속했고, 이는 이념 조작을 더 수월하게 했다. 이후 영영 복구되지 않은 충격도 남겼다. 1930~1932년 수십만 명의 ‘해독분자’와 ‘쿨라크’가 총살되거나 수용소에 갇혔고 2백만 명 이상의 ‘쿨라크’와 그 가족들이 유배되었다. 농업 생산은 곤두박질쳤고 축산 부문도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집단농장은 소련 시기 내내 전 국민을 충분히 먹여 살리지 못했다. 

한편, 흘레브뉴크는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이 레닌의 혁명 전략을 채택한 것이라고 본다. 즉, 좌익적 과격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온건파’를 약화시키며, 극단적 정책을 통해 급진파를 동원하려 했다는 것이다. 흘레브뉴크는 1928년 초 스탈린의 시베리아 행을 1917년 4월에 레닌이 망명지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온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레닌의 혁명론을 이처럼 ‘정치적 급진주의’로만 보긴 어려울 것이다. 베틀렘과 발리바르는 정정을 거친 레닌이 자본주의의 ‘사멸’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 국가자본주의’라는 사회주의관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네프로 나타났으며, 레닌은 네프가 장기 전략이라고 분명히 인식했다. 반면 스탈린에게 레닌과 같은 정치노선이나 이론이 존재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에게는 권력을 잡고 강압적으로 혁명을 이끌어나가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6. 대숙청의 리허설 

 

1) 키로프 암살 

키로프는 1934년 12월 1일에 레닌그라드 볼셰비키 본부에서 암살되었다. 암살자는 당원이자 레닌그라드 주 당위원회 직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였다.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무엇보다 키로프가 자신의 아내와 내연 관계에 있다고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12월 1일 저녁 타브리다 궁전에서 예정된 당 활동가 회의에서 키로프를 암살하기로 결심한 그는 초대장을 얻기 위해 본부에 들렀다가 우연히 키로프를 목격하였고 암살에 성공했다. 누가 봐도 정신이 불안정한 인물에 의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 해명은 스탈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 소련 신문들은 키로프가 “노동계급의 적의 패역한 손에”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정치국원이 ‘인민의 적’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쓰러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니콜라예프를 지노비예프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쪽으로 사건을 조작하라고 지시했다. 예조프는 후일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 동무가…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노비예프주의자들 사이에서 살인자를 색출하시오.” 물론 니콜라예프가 반대파 조직에 속한 증거는 전혀 없었다. 증거는 조작되었다. 사료를 통해 스탈린이 직접 이 사건의 재판 과정을 지휘하고 피고인 명단을 짰음을 알 수 있다. 1934년 말부터 1935년 초까지 잇따라 재판이 열렸고, 반대파 출신 수십 명이 총살형이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조작된 증거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었다. 

‘키로프 탄압’은 1937~1938년 대숙청과 스탈린 독재 체제의 최종적 공고화로 가는 전 단계로 널리 여겨진다. 스탈린이 키로프 암살로 얻은 정치적 이득이 명백한 나머지 그가 이 암살의 배후라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충직한 부하인 키로프를 살해할 그 어떠한 근거도 찾기 어렵다. 
 

2) 고참 볼셰비키 숙청

놀랍게도 1935~1936년 숙청은 ‘온건’ 정책과 공존했다. 1935년 1월 31일, 정치국은 ‘외래 분자’로 참정권이 박탈되었던 수많은 집단에게 투표권을 돌려주는 새 소련 헌법을 통과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1935년 12월 초 콤바인 기사 대회에서는 스탈린의 “자식은 아버지의 과오에 책임이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발언이 나왔다. 연좌제 완화를 의미하는 이 발언은 청년들을 정권의 편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이 온건 정책에는 대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 위협은 소련을 서구 민주주의 쪽으로 이끌었다. 1935년 5월 소련은 프랑스 및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상호 원조 조약에 서명했고 그해 여름 제7차 코민테른 세계 대회에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민전선 개념이 승인되었다. 

다른 자유화 캠페인도 병행되었다. 비정치적 범죄로 기소된 수십만 명이 석방되거나 복권되었다. 1935년에는 개인 텃밭 경작권을 법으로 보호하고 얼마간 확대하였다. 산업 부문에도 비슷한 개선이 이루어졌다. 1935년 11월 스탈린은 “살기가 더 좋아졌다. 살기가 더 즐거워졌다!”라는 새 슬로건을 제안했다. 배급제는 단계적으로 폐지되기 시작했고, 급료 인상의 제한이 일부 사라졌으며, 금전적 인센티브가 생산성을 끌어올렸다. 소련 경제의 호시절이었다. 

스탈린은 온건 노선을 더 확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스탈린이 느낀 두 가지 위협이 작용했다. 첫째는 정치국 내의 ‘집단 지도 체제’의 유산이었고, 둘째는 과거 반대파의 생존이었다. 모두 스탈린 1인 독재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고참 볼셰비키들은 그의 과거를 기억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스탈린이 한때 레닌에 의해 정치 경력이 끝날 수 있었고, 1920년대 그가 리코프-부하린 그룹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당중앙위원회의 지지 덕분이었으며, 1930년대 당 정책이 처참한 실패를 거두었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자리다툼을 하던 많은 이 중의 한 명이었다. 또한 고참 볼셰비키는 오랜 기간 협력을 통해 사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독재자에게 봉사하면서도 별도의 후원자를 두고 있었다. 스탈린은 상황이 악화되면 언제나 그들이 뒤를 찌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복자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려면 피정복자의 죽음이 필요하다.” 스탈린은 그의 서재에 있던 한 책에서 칭기즈칸이 말했다고 하는 이 구절에 밑줄을 쳐 놓았다. 그는 고참들을 자신에게 충성하는 젊은 당원으로 교체하고 권력 최상층부를 쇄신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키로프 암살로 니콜라이 예조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니키타 흐루쇼프 세 명의 젊은 관료들이 부상했다. 
 

특히 ‘키로프 사건’에서 능력을 발휘한 예조프의 승진은 의미심장했다. 그에게는 ‘크레믈 사건’을 처리하라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1935년 초 크레믈 내의 관청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스탈린 반역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체포, 기소되었다. 이 사건에 카메네프, 그리고 뜻밖에도 스탈린의 오랜 친구 예누키제가 엮였다. 스탈린은 그를 이용하여 집단 지도 체제의 내구성을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다. 시험은 성공적이었다. 정치국의 저항은 미약했고 예누키제는 총살되었다.  

스탈린은 속도를 냈다. 전환점은 1936년 8월 과거 반대파 지도자들을 상대로 열린 첫 번째 모스크바 공개 재판이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와 기타 유력 당 인사들은 테러 분자이자 스파이로 선언되었고 총살당했다. 두 번째 전시용 재판은 1937년 1월, 경제·산업 부서 고위직인 과거 반대파를 상대로 열렸다. ‘방해 공작’, ‘간첩 활동’ 죄목이 붙었고 스탈린의 가까운 동료들도 굴복했다. 오르조니키제는 부하들의 체포를 막기 위해 스탈린과 충돌했다가 자살했다. 오랜 전우들도 세력이 균열되어 스탈린의 환심을 사려고 경쟁했다. ‘우익 일탈파’ 부하린과 리코프는 체포되어 1938년 3월 세 번째 모스크바 공개 재판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탄압은 엔카베데와 군대에도 닥쳤다. 엔카베데의 새로운 수장이 된 예조프는 전임자 야고다와 그의 많은 동료들을 처리했다. 1937년 6월, 국방 부인민위원 미하일 투하쳅스키를 포함한 다수 고위 장교들이 ‘반소 친트로츠키 군사 조직’의 일원이라는 날조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3) 소결: 대숙청의 예고편

‘키로프 탄압’과 ‘온건 정책’이 공존했던 1935~1936년은 ‘대숙청’이 필연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나라가 테러 분자들에게 위협받는다는 증거는 없었고, 스탈린 또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일상적으로 업무를 보았고 남부로 휴가도 떠났고 심지어 이따금 인민과의 연대를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 속에 섞이기도 했다.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개선되던 시기에 스탈린은 다시 탄압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롯이 독재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한 스탈린 개인의 판단이었다. 

초기의 탄압은 주로 정부, 당, 국가 안보 기관, 군의 핵심 요인들을 겨냥했고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흘레브뉴크는 만약 숙청이 당-국가의 노멘클라투라에게만 한정되었다면, 스탈린의 목표가 창당 주역을 제거하고 신세대 관료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라 하면서도, 1937년 하반기부터 벌어진 ‘대숙청’은 질적으로 달랐다고 본다. 이는 훨씬 광범위한 소련 주민들을 휩쓸었고, 그 규모로 보거나 희생자들의 사회적 분포로 보거나 초기의 숙청을 압도적으로 능가했다. 상층부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전 사회적으로 의심스러운 ‘제5열’을 축출하는 일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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