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국제·한반도 정세전망
끝나지 않을 혼란의 시대
2024년 미국 대선은 도널드 트럼프의 귀환으로 끝이 났다. 트럼프는 2000년 조지 W. 부시 이후 처음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로서 전국 총투표 수에서도 민주당에 앞섰다. 같은 날 치러진 상하원 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러한 현실은, 4년 전 바이든의 당선과 그가 선언한 ‘미국의 귀환’으로 미국이 전후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로 돌아왔고,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는 단지 일시적인 일탈이었다는 해석을 무력하게 한다. 미국 인민의 트럼프주의 대중운동과 이에 따른, 미국 양당 체제의 한 축인 공화당의 이념적 변화가 ‘트럼프 열풍’을 뒷받침했다.
트럼프주의의 중요한 축 가운데는 반(反)이민과 같은 국내 정책만이 아니라,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주류 정치권의 “전쟁광, 세계주의자, 네오콘 기득권”이 미국을 세계 각지의 불필요한 전쟁 지원으로 몰고 가 국력을 소진했다는 정세인식이 있다. 아무리 선거에서는 대개 대외정책보다 국내정책이 더 중요한 결정 요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정세인식 또한 대중운동과 선거를 통해 적지 않은 미국 인민의 동의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인민이 ‘세계의 경찰’로서 미국의 역할을 다시금 거부한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미국 패권이 이미 붕괴하였다고 말하기에는 이르다. 과거에 비해 현재 미국의 국력이 줄어들었을 뿐, 미국의 종합적인 국력은 여전히 다른 국가들을 압도한다. 미국이 과거와 같은 패권을 유지할 수 있냐 없냐와 별개로, 대외적으로는 국제연합(UN) 헌장을 위반하여 3년째 침략전쟁을 벌이고 대내적으로는 연방 예산의 절반을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물론이고, 여전히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의 1/6에도 못 미치는 상태에서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와 총인구 감소, 경기침체와 경제성장률 둔화에 부딪힌 중국이 미국 패권을 조만간 대체할 것이란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즉, 앞으로 찾아올 ‘미국 없는 세계’는 미국이 쇠망하고 패권국이 교체됨에 따라 찾아온 것이라기보다는, 트럼프를 선택한 미국 인민의 결정에 따른 결과다. 예컨대,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패권 없는 리더십’이라고 명명한 《포린 어페어스》 기사는 바이든 행정부가 친이스라엘 편향, 핵군축 공약의 포기, 트럼프의 무역 보호주의 계승과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직접적 군사행동이나 오만한 패권적 행태 없이도 외교와 국제적 제도(세계보건기구, 파리기후협정 복귀 등), 격자식 다자주의 틀(쿼드, 오커스, 한미일동맹 강화 등)을 통해 오바마가 주창했던 ‘아시아로의 회귀’를 실질적으로 달성하고 대중국 억제력을 효과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미국이 패권을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전후 세계체제를 설계한 주요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치와 중국, 러시아에 비해 국제사회의 수용성이 높은 소프트파워를 활용하여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것도 가능한 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적어도 트럼프의 미국은 그 길을 탐색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트럼프의 귀환이 국제 정세에 줄 충격을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및 중동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다음으로, 이러한 사건들과도 연관이 깊은 2025년 한반도 정세를 전망한다. 마지막으로 트럼프 2기 행정부 시기 미중관계 전망을 확인한다.
결론을 먼저 언급하자면, 진행 중인 전쟁들은 휴전 또는 종전 합의에 이르더라도 언제든 다시 깨지거나 더 큰 혼란과 전쟁으로 돌아올 수 있는 불안요소들을 남길 것이다. 트럼프와 그의 참모들은 중국 견제에 집중하기 위해 유럽과 아시아에서 힘을 빼겠다고 하지만, 관세 부과와 같은 단기적이고 리스크가 큰 조치 이상의 전략이 부재한 미국과 이에 맞서 미국을 압도하거나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할 역량이 없는 중국의 조합은 지난 호 특집 <트럼프 포퓰리즘 분석>이 전망한 ‘G 마이너스 2’의 세계를 의미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도 기회라기보다는 위험요소일 것이다.
1.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아무도 트럼프를 막을 수 없다’
지난 호의 글에서 트럼프 2기 외교안보정책은 1기 때보다 더 ‘트럼프주의’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전망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전후 미국 정치의 초당적 합의였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인물(‘어른들의 축’)들이 외교안보 주요 보직을 맡았고, 이들은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때로 트럼프의 결정을 가로막았다. 반면 트럼프 2기는 수년 간 트럼프주의 정책을 만들어 왔고 트럼프의 모든 결정에 충성하는 이들이 이끌 것이다.
대선 결과가 나온 직후부터 드러난 인선이 그러하다. 트럼프는 대외전략의 핵심인 국무장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각각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과 마이크 왈츠 하원의원을 지명했다. 둘 다 대중, 대북 강경론자로 알려졌고, 개입주의적 면모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주요 사안에서 트럼프의 입장을 수용하여 말을 바꿔왔다. 하워드 러트닉 인수팀 공동위원장이 ‘대통령 및 정책에 대한 충성도 및 충실도’를 인사원칙으로 꼽고, 트럼프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인물로 내각을 구성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듯,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는 정책 담당자보다 트럼프 본인의 판단이 더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국방장관, 국가정보국장 지명은 훨씬 논란이 되었다. 국방장관으로 지명된 피트 헤그세스는 “좌파들이 애국자들을 사방에서 포위해 살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십자군 전쟁의 구호를 문신으로 새기는 등 극단주의자 의혹을 받고 있다. 미국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장으로 지명된 털시 개버드 하원의원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우크라이나에 미국이 자금을 댄 생화학 무기 실험실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시리아 내전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만나고 “그는 미국의 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의 행보로 공화당 내에서도 논란 대상이다. 트럼프는 주프랑스대사와 아랍·중동문제 고문에는 자기 사돈들을 지명하기도 했다.
즉, 트럼프 2기 행정부에는 소신이나 원칙에 따라 트럼프의 즉흥적 판단과 ‘거래적 접근’을 막을 이가 없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라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불확실성은 급격히 커졌고, 주요 사안에서도 다양한 가능성이 열렸다.
2. 우크라이나 전쟁, 한반도식 분단으로?
1) 트럼프 캠프의 구상
“당선되면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말해온 트럼프는 11월 27일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로 대표적인 친트럼프 싱크탱크인 미국우선주의연구소(AFPI) 미국안보센터장 키스 켈로그를 지명했다. 지난 4월 켈로그가 발표한 보고서 『미국 우선,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그가 트럼프 캠프의 정책고문으로서 작성한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계획의 바탕으로 여겨진다.
『미국 우선,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결론은 “푸틴의 침략이 세계의 안정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를 유지하고 푸틴이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는 결과가 나면 이란, 중국과 같은 다른 불량 국가들이 더욱 대담해질 것이라는 주장의 문제점은, [우크라이나에 불리해진 전선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미 그러한 결과를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다른 나토 지도자들은 푸틴에게 평화회담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나토 가입을 장기간 연기하는 것을 제안해야 하며, 대러 제재 일부 완화도 검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에는 영토 회복은 무력이 아니라 외교로 이뤄져야 하지만, 적어도 푸틴이 퇴임하기 전까지는 그런 외교적 돌파구조차 없을 것임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은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트럼프의 종전 구상, 즉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를 인정한 상태에서의 휴전 합의(‘한반도식 분단’) △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유보 합의 △ 미국 대신 유럽 국가들이 휴전협정 준수·비무장지대 감시와 일치한다. (12월 현재, 유럽 국가들이 휴전 뒤 우크라이나 주둔을 논의 중이라는 비공식 보도들이 있다.)
2) 2024년 우크라이나 전황과 각국의 반응
미국우선주의연구소 보고서가 지적한 대로, 러시아의 군사력과 동원 가능한 인구 수가 우크라이나보다 월등히 큰 상황에서, 획기적인 무기들이 대거 투입되거나 제3국 군대의 참전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이미 교착되어 방어선이 구축된 전선이 극적으로 바뀌기 어렵다. 게다가 핵보유국 러시아가 셀 수도 없이 ‘핵전쟁’과 ‘3차 세계대전’을 위협하고 있어, 그러한 선택지들이 근본적으로 제한된 상황인 것도 사실이다.
2023년 여름의 반격 작전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뒤로, 2024년에도 우크라이나가 교착 상태 속 수세에 있는 상황이 이어졌다. 전쟁 장기화로 사기가 떨어지며 병력 동원에 어려움도 겪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우크라이나 검찰이 올해 1∼10월 동안 직무에서 이탈한 자국 군인 약 6만 명을 기소한 사실을 보도했다. 북한군 파병이 방증하듯 러시아도 병력 동원 문제를 겪고 있으나, 인구가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더 많다. 여기에 최소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북한군까지 10월부터 가세했다.
우크라이나군은 2024년 8월에 개시한 쿠르스크 진격으로 러시아 영토 내 점령지를 만들었지만, 12월 현재 절반 이상을 러시아가 탈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진격은 러시아군이 주둔한 다른 전선에 크게 영향을 주거나, 러시아 내 여론에 심각한 파장을 미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휴전협상 시 러시아와 점령지 맞교환을 논의할 대상은 될 수 있다.
휴전협상을 통한 조기종전을 내세운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뒤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양측 모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협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전투가 과열되었다. 12월 5일 영국 국방부 정보당국은 올해 11월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중 가장 많은 러시아 사상자(추정 45680명)가 발생한 달이었으며, 직전 달인 10월이 그다음으로 많은 사상자(추정 41980명)를 보였다고 보고했다. 러시아가 전쟁 2년차부터 ‘고기 분쇄기’ 인해전술을 채택한 결과 러시아군 사상자는 전쟁 2년차, 3년차로 갈 때마다 급증했으며, 미국 대선을 앞두고 올해 9월부터 가파르게 증가하여 11월에는 러시아군 사상자가 하루 평균 1500명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북한군의 파병은 이와 같이 포탄 공급뿐만 아니라 인원 충원도 러시아에 절실한 상황에서 합의된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당선 이후로 대인지뢰,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 하이마스)용 탄약 등 여러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를 발표하였으나, 이것들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에 전부 우크라이나에 전달되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많다. 마이크 존슨 미국 하원의장은 2025년은 새 대통령의 몫이므로, 바이든 행정부가 요청한 내년도 우크라이나 지원안(240억 달러 규모)을 투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① 나토 가입을 휴전 조건으로 내세우는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정부는 휴전협상을 예비하며, 영토 수복 목표에서 후퇴하는 대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승인을 요구하는 것으로 입장을 변화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당선 뒤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승인된다면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를 수복하지 못하더라도 휴전협상에 임할 수 있으며, 러시아가 점령한 땅은 외교적 방법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는 전쟁 발발 이후 처음이다. 우크라이나 사회의 여론도 전쟁 종식을 위해서는 영토 일부를 당분간 포기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전쟁 초기에 비해 상당히 늘어났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2월 3일 나토 외교장관 회의를 앞두고 바이든 행정부와 유럽 각국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초청을 결정해달라고 촉구했으나, 나토 지도부는 우크라이나의 가입 문제보다 군사지원 논의를 우선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트럼프의 구상 역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전면 폐기하는 대신 러시아, 미국, 영국이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과 영토 존중을 약속한 1994년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각서를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전쟁 개입으로 무참히 깼음에도, 안전보장을 약속했던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결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인식이다. 따라서 가입국이 공격받으면 다른 가입국들이 ‘자동개입’한다는 조항이 포함된 나토와 같은 확실한 안전보장이 없는 한, 어떠한 휴전도 러시아가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침략할 기회를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란 우려가 전쟁 초기부터 제기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점령지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을 향한 더 큰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황은 많다. 한 예로, 12월 초 벨라루스 정부는 러시아와 합동 군사훈련 센터 세 곳을 설립할 계획을 밝혔다. 한 곳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부와 국경을 맞댄 벨라루스 흐로드노 지방에, 한 곳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서부와 국경을 맞대며 발트해를 끼고 있는 러시아 역외영토 칼리닌그라드에, 한 곳은 러시아 서부 니즈니 노보고로드에 지을 예정이다.
따라서 트럼프 행정부가 구상하는 종전안을 우크라이나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젤렌스키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조급한 휴전협상은 우크라이나 정치 내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러시아의 개입 논란 속에 치러진 10월 총선 뒤, 친러정당 총리가 EU 가입 절차를 4년 동안 중단한다고 발표하여 대규모 시위가 진행 중인 이웃나라 조지아가 그 예다.
② 러시아는 무엇을 바라는가?
러시아는 표면상으로 종전·휴전협상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2월 2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서방의 휴전안이 우크라이나를 다시 재무장할 여유를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며 이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11월 29일 러시아 국영통신사 《타스》는, 나토가 평화유지군을 파견한다는 구실로 우크라이나를 점령할 수 있으며, 실제로 서방 국가들의 우크라이나 영토 분할통치안을 입수했다는 러시아 대외정보국의 주장을 보도했다.
그러나 당장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를 대폭 확대하거나 전쟁의 양상을 크게 뒤바꾸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푸틴이 모를 리는 없다. 적어도 구소련 내지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구상에도 전열 정비 없이 지금의 소모전을 지속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푸틴 정부의 강경 정책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 온 측근 콘스탄틴 말로페예프의 인터뷰를 통해 푸틴의 의도를 예측해볼 수 있다. 말로페예프는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푸틴은 켈로그가 제안한 트럼프의 평화 계획을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말로페예프는 트럼프가 미국의 장거리 무기 공급 결정을 철회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을 축출한 다음, 푸틴과 만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핵심이익의 일부로 인정하고, 중동 갈등을 비롯 “세계 질서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를 볼 경우에만, 푸틴 정부가 트럼프의 계획을 “장기적 평화”의 기반으로 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로페예프는 미국이 우크라이나 지원 철회를 거부하면 러시아가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즉, 공약대로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접근할 트럼프에게, 푸틴은 많은 것을 요구하며 거래에 나설 수 있다. 푸틴은 전쟁 초기부터 서방의 대러 제재 해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와 비무장화·중립화,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를 의미하는 ‘비(非)나치화’ 등을 언급해왔다. 트럼프가 구상하는 유럽 군대의 우크라이나 주둔도 푸틴이 달가워할 안은 아니다. 말로페예프가 러시아는 ‘여유’가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던지는 동시에 핵 위협을 가한 것은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11월 27일 러시아 국영통신 《리아 노보스티》에 따르면,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32개월 만에 최저치로 폭락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는 달러당 75~80루블이었는데, 27일에는 120루블을 넘긴 것이다. 지난 21일, 미국이 러시아와 유럽 국가 간 천연가스 거래 결제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 은행을 제재 명단에 포함한 탓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압력에 지난달 기준금리를 이미 연 21%까지 올렸으나, 루블 가치 하락은 수입품 가격을 더욱 올려 인플레이션을 악화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천연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 경제가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푸틴 정권을 위협할 수준의 국내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러시아 정부는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태세를 취하고 있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역대 최대 규모(13조 5000억 루블, 약 192조 원)의 국방비 예산안(올해 대비 25% 이상 인상, 2025년 전체 정부 지출의 32.5%)을 승인했다. 12월 16일,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2025년 러시아군의 목표는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루한스크, 헤르손, 자포리자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이며, 러시아 국방부는 향후 10년 안에 유럽에서 나토와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협상이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을 경우, 트럼프가 기조를 급변경하여 오히려 우크라이나에 바이든 행정부보다 더 치명적인 무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그 경우 미국도 지금까지의 유럽처럼 러시아의 확전과 핵 공격 위협을 받을 것이다. 이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푸틴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트럼프가 선뜻 선택하진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협상을 통한 조기 종전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
한편 러시아의 핵 위협은 어느 때보다 거세지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사거리 약 300km의 에이태큼스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도록 허가하자 그 직후인 11월 19일, 북한의 2022년 핵무력법령과 유사하게, 핵 사용 문턱을 크게 낮춘 핵 교리 개정안을 발표했다. △ 비핵국가 우크라이나가 재래식 공격을 하더라도 그것이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은 것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지원국 양자를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음 △ 러시아와 동맹국(벨라루스)에 대한 미사일·항공기·무인기(드론) 공격이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으면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음을 명시했다. 개정안은 우크라이나가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고, 러시아 영토 내에서 교전을 벌이는 현 상황에서 사실상 언제든 핵 사용을 가능하게 한 셈이다. (기존 안은 핵무기를 보유한 교전당사국만 핵 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러시아가 핵 공격을 받거나 전면전 상황에서 적의 지상군이 모스크바를 위협할 때 등 ‘국가 존립이 위협받는 경우’에 한정해 핵 보복을 허용했다.)
11월 21일에 러시아는 다탄두 각개목표설정 재돌입 비행체(MIRV)를 장착한 극초음속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오레시니크’에 재래식 탄두를 실어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오레시니크’란 개암나무를 뜻한다. 미사일이 대기권에 재진입하면서 다수의 탄두가 흩어지는 것을 열매가 잔뜩 달린 개암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이는 냉전 시기 개발된 MIRV의 첫 실전 사용 사례다. 본래 MIRV는, 핵미사일 수를 제한했던 미소 전략무기제한협정(START)를 우회하여 핵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즉, 다음에는 이 미사일에 핵탄두를 실을 수도 있다는 위협을 가한 것이다.
③ ‘미국 없는 유럽’의 준비가 안 된 유럽
유럽연합(EU) 지도부, EU 주요국과 영국은 트럼프 당선 뒤에도 ‘우크라이나 지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요구도 재차 거절되고, 유럽 국가들의 우크라이나 파병과 같은 특단의 결정이 나온 것도 아니라, 이러한 수사는 한계가 있다.
유럽 각국의 불안정한 정치, 경제 상황도 과연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얼마나 지원할 수 있을지에 관한 우려를 더한다. 주요국 중 정치권이 가장 안정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기조를 유지하는 나라는 독일이다. 사회민주당의 올라프 숄츠 현 총리는, 내년 2월 조기 총선이 결정된 상황임에도 12월 2일 키이우를 방문해 “필요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의 편에 설 것”이라며 6억 5천만 유로(약 1조 원)의 무기 지원을 약속했다. 총선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기독민주당 대표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푸틴에게 24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라고 요구하겠다”며, 푸틴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크라이나에 독일의 ‘타우러스’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게끔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유럽연합의 실질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때처럼 독일의 영향력을 다시 구축할 만한 정치인은 안 보인다는 것이 중론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다. 영국은 올해 7월 총선에서 정권을 탈환한 노동당이 앞선 보수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보였으나, 7월 말~8월 초 전국적으로 ‘이민 반대’, ‘무슬림 반대’를 내세운 극우 폭동이 발생했다. 이 상황에 증세를 하지 않겠다는 총선 공약을 정부가 파기한 것이 겹쳐, 8월 말부터 국정 운영에 대한 부정평가가 51%에 달했다. 노동당의 총선 압승 요인이 정책에 대한 동의보다는, 영국 경제의 장기 저성장과 보수당 장기 집권에 대한 피로였기에 쉽게 지지율 급락이 나타났다고 평가된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트럼프 1기 때부터 ‘유럽군 창설’, ‘유럽에 프랑스의 핵우산 제공’ 등을 언급했고, 서방 정상 중 가장 먼저 우크라이나 파병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야심이 유럽 내에서 신뢰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올해 프랑스의 정치위기가 심각해졌다.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여당 르네상스(구 앙 마르슈)가 참패하자(득표율 15.2%)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6월 30일 총선 1차 투표에서 국민연합(RN)이 프랑스 극우정당 최초로 1위(득표율 33.2%)를 차지하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과반 득표자가 없는 지역구에서 치르는 2차 투표에서는 극우정당 집권을 막기 위한 대규모 후보 단일화로 RN이 3위로 밀려났다.
총선에서 최종적으로 좌파연합이 1위를 차지했음에도 마크롱 대통령이 우파 성향의 공화당 소속 미셸 바르니에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새 내각은 시작부터 불안정했다. 결국 2025년 예산안 문제로 좌파연합과 RN이 함께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통과시켜 12월 4일 바르니에 내각이 붕괴했다. 프랑스에서 내각 불신임안이 통과된 것은 1962년 이후 처음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정해진 임기까지 대통령직을 지키겠다고 밝혔으나, 야권은 대통령 사퇴와 조기 대선을 압박하고 있다.
한편 트럼프주의와 유사하게, 유럽으로 이민자가 유입되는 것에 반대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포함한 대외개입과 각국의 주권을 넘어선 EU 차원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도 유럽 각국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극우정당의 의석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으나, 독일 청년층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득표율이 크게 늘어났고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각각 RN, 이탈리아형제들(Fdl)이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미국과 달리 유럽에는 러시아의 팽창 의지가 ‘실존적 위협’이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넘어서 유럽 자체의 방어가 진정한 문제다. 12월 8일 트럼프는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이 더 많은 비용을 내지 않으면 “당연히” 나토 탈퇴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실제 탈퇴 의사라기보다는 나토 회원국을 압박하는 수사라는 해석이 많지만,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인 나토마저 철저히 ‘거래’ 관점에서 보는 트럼프의 행태는 많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 CSIS의 빅터 차 석좌는 트럼프가 △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보고 있는지, △ 국방비에 국내총생산(GDP)의 3% 이상을 지출하는지에 따라 동맹국 및 파트너들을 평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두 조건을 만족하는, 다시 말해 트럼프가 완전히 만족할 만한 동맹국은 유럽 내에 라트비아밖에 없다. (미국의 아시아 내 동맹과 파트너 중에도 이 두 기준을 모두 만족하는 국가는 없다. 한국, 일본, 대만은 두 기준 중 하나도 만족하지 못한다.)
7월 1일 국제문제 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기획한 “유럽이 미국 이후의 미래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상토론에서 폴란드 외무장관 라도슬라프 시코르스키는 각국 군대를 통합하는 유럽통합군 창설은 실현 가능성이 낮으므로 대신 EU 예산으로 최소 5000명 규모의 연합 신속대응군을 창설할 것을 촉구했고, 미국의 정치 변동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마크롱이 이야기하는)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하기보다는, EU-나토 간 ‘전략적 조화’를 추진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은 이 정도의 계획조차도 추진하지 않고 있다.
3) 소결: 우크라이나의 미래가 중요하다
유럽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을 지켜보았고, 2024년 현재에도 푸틴의 야욕과 트럼프의 ‘유럽은 유럽인들에게’ 정책에 직면해 있다. 이에 따라 유럽의 단결과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논의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으나, 실질적인 조치는 지지부진했다. 당장 트럼프의 미국이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한다면, 유럽 국가들이 이를 계속 진정한 유럽의 전쟁으로 끌고 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나아가 ‘미국 없는 유럽’이 어떻게 평화와 번영을 이뤄낼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트럼프의 ‘거래’와 유럽의 무력함으로 우크라이나에서 한반도식 분단이 이뤄진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트럼프와 평화운동 일각이 공유하는 태도, 즉 ‘반전’을 표방하며 러시아 점령지를 인정하는 식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결하자는 입장은 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침략전쟁을 일으켜서 점령한 땅이 그대로 사실상 침략국의 영토로 인정되는 현실은 군비증강을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일과 일본의 재무장, ‘중립국’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 대호황을 맞은 세계 방산 산업이 이를 증명한다. 적어도 푸틴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한, 러시아의 야욕이 우크라이나에서 그칠 리 없다는 의혹도 불식될 리 없다. 서방이 나치 독일을 달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일부를 할양한 일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2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지 못했듯, 푸틴의 러시아를 회유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큰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주장도 계속되고 있다.
올해 초 퇴임한 차이잉원 전 대만 총통은 11월 23일, 단기적으로는 미국이 대만보다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이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크라이나의 승리는 [중국의 대만 침략을 포함하여]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장래의 침략을 가장 효과적으로 억제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는 단지 일국이 감내할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전체에 여파를 미친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켈로그의 주장은 트럼프의 귀환을 통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떠한 후속 대응을 하냐에 따라, 이 전쟁이 세계에 남길 결과는 여전히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구체적인 미래가 관건이다. 분단과 휴전이 결코 온전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불안정한 평화가 정치위기를 낳는다는 것은 한반도의 역사가 증명한다. 휴전협상은 우크라이나 민중의 선택을 존중하며, 러시아의 재침략에 대한 우크라이나인의 정당한 우려를 고려하고, 이를 불식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포함해야 한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주권이라는 쟁점이 있다. 휴전이 이루어진다면, 국제사회는 러시아를 억제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가 경제와 국방력을 재건하고, 우크라이나 민중 다수의 바람대로 정치 문화와 제도를 유럽연합과 통합해나가도록 도울 수 있다. 우크라이나 사회운동은 우크라이나의 외채 탕감을 포함하여, 전후 우크라이나의 재건을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해왔다. 반대로 냉전 시기 핀란드처럼, 우크라이나가 중립을 선언하되 실제로는 러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가 내정을 간섭받도록 종용하여 러시아를 ‘달래려’ 할 수도 있다. 후자의 방식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중립화·‘비나치화’라는 푸틴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한다. 여기에서 국제사회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전쟁의 지속 여부와 별개로 세계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3. 이스라엘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1) 하마스, 헤즈볼라, 이란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이스라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만 1년을 넘겼다. 가자지구에서 공습과 교전이 계속되는 와중이던 4월, 이스라엘은 주시리아 이란 영사관을 폭격하여 이란 ‘혁명수비대’ 고위급 지휘관을 제거했다. 그 후 이란과 이스라엘이 서로 영토를 공격하고(이란이 이스라엘 영토를 직접 공격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9월에는 이스라엘이 헤즈볼라 대원들을 겨냥하여 무선호출기 수백 대를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시키는 등,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며 국제전으로 비화됐다.
12월 현재 상황은, 이스라엘이 생존한 자국민 인질 전원의 귀환을 제외하고는 당초 목표 상당수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하마스의 지도력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스라엘은 7월 31일, 하마스 최고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를 암살하고 그 뒤를 이은 야히야 신와르도 10월 16일 사살했다. (신와르는 2023년 10월 7일 공격의 기획자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눈엣가시였던 레바논의 무장정파이자 정당인 헤즈볼라도 크게 약화했다. 9월 27일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헤즈볼라를 32년 간 지도해온 하산 나스랄라가 사망하고, 10월 3일 나스랄라의 후계자인 하셈 사피에딘도 사살되며 헤즈볼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멈추지 않았고, 대헤즈볼라 작전을 명목으로 레바논 곳곳을 공습했다. 레바논 보건부는 이로 인한 사망자가 최소 3645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10월 1일, 이란이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위한 보복 차원에서 이스라엘 전역을 탄도미사일 200여 발로 공격했다. 이에 같은 달 26일, 이스라엘은 이란 수도 테헤란 외곽 군 기지, 미사일 생산시설, S-300 미사일 방공포대와 레이더 등을 공습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공습으로 테헤란의 방공망이 무너져 이란이 단기간에 보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미국, 이스라엘 당국자들의 판단을 보도했다. 국가 지도부와 핵 시설 등을 이스라엘의 재공격 위협에 노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12월 현재까지 이란은 별다른 반격을 하지 않았다.
2) 이스라엘-헤즈볼라 휴전과 시리아 내전의 종결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11월 26일, 60일 간의 휴전에 전격 합의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대국민 담화에서 휴전은 △ 이란의 위협에 집중하고 △ 군인들의 휴식과 무기 보충을 통해 전열을 가다듬고 △ 헤즈볼라를 상대하는 북부 전선과 하마스를 상대하는 남부 전선을 분리하여 하마스를 고립시키고 더 크게 압박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네타냐후가 이번 전쟁을 하마스와 헤즈볼라, 이란에 가능한 한 큰 타격을 입혀 이스라엘의 안보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는 관측이 많다.
이스라엘-헤즈볼라 휴전협정은 세부 사항이 모호하고, 이를 감시하기로 한 국제 감시·관리 위원회도 체계화되지 않았다. 휴전 시작 직후부터 양측은 서로 합의 위반을 주장하며 공격을 주고받고 있다. 그러나 양측 모두 60일 내에 휴전을 완전히 파기할 동기는 크지 않다.
이스라엘 측에서 헤즈볼라와의 휴전 다음의 과제는 하마스가 붙잡은 인질 귀환과 휴전 협상이다. 트럼프는 자신이 취임할 2025년 1월 20일 전까지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정리하라는 메시지를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자에 보냈다. 12월 들어 미국과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언론들은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60일 휴전 협상 논의가 진전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휴전 협의 때도 전투와 민간인 희생이 계속됐듯, 휴전을 앞두고 전투가 더 격화될 가능성이 있다. 12월 6일에도 이스라엘군의 공습과 총격으로 가자지구 북부 카말 아드완 병원 안팎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10월 26일~11월 25일 동안에도 팔레스타인인이 하루 평균 42명, 총 1230명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는 6개월 전과 큰 차이 없는 수치다.
양측이 얼마나 진심으로 휴전을 추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헤즈볼라와 달리 하마스는 협상 카드로 사용할 이스라엘인 인질을 잡고 있다. 이스라엘 내에는 이번 기회에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의 전망을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트럼프 당선 직후, 베잘렐 스모트리 이스라엘 재무장관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 이스라엘의 존재를 위협할 것이라는 데에 넓은 공감대가 있다”며 재무부와 국방부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통치하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등에 설치된] 정착촌에 이스라엘 주권을 적용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시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한편, 이스라엘-헤즈볼라 휴전의 영향으로 13년 넘게 지속된 시리아 내전에서 반군이 승리하여 중동 정세에 다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의 뒷배인 러시아와 이란이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개입하며, 힘의 공백이 생긴 상태에서 알아사드 정권과 협력하던 헤즈볼라까지 이스라엘과 휴전하자, 그 직후 수니파 이슬람주의 무장조직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파죽지세로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했다. HTS는 본래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에서 파생된 조직이나, 2016년 알카에다와 연계를 끊고 지하디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뒤 상대적으로 온건한 이슬람주의를 내세웠다. 12월 8일, 반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무려 53년간 지속한 알아사드 가문의 철권통치가 종식되었다.
정권을 넘겨받은 HTS는 히잡 착용 강요 금지, 언론의 자유와 인신의 자유 보장, 포용적 정책 등을 선언했다. UN, 미국 등이 HTS를 테러 집단으로 지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다. UN, 아랍 8개국, 미국 등 국제사회는 시리아 내전의 재발을 막기 위해 HTS에 다양한 정치·사회 세력 포용과 폭력 배격을 주문했다.
이스라엘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시리아의 혼란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시리아 반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자마자, 이스라엘군은 1974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시리아 국경을 넘어 골란고원 내 시리아군 기지를 점령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골란고원의 영원한 영유권을 선언하고, 골란고원 내 이스라엘인 인구를 2배로 늘리는 안을 승인했다. 이스라엘군은 13일까지 시리아 전역을 480여 번 공습하여 시리아군의 핵심 전략 자산을 80% 가량 파괴했고, 방공 시스템의 86%를 제거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새 시리아 정권을 무장해제했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 영공 제공권을 확보하여 이란이 시리아를 통해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무기를 공급하는 보급로를 차단했다. 나아가 향후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 공격을 감행하기도 쉬워졌다. (HTS는 이스라엘의 시리아 공습을 규탄했으나, 현재는 분쟁을 원치 않으며 재건이 우선순위라고 밝혔다.)
반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해온 러시아와 이란은 체면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타격을 입었다. 푸틴의 시리아 내전 개입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을 복원한 일로 여겨졌다. 알아사드 정권과 계약하여, 러시아가 아프리카에 개입할 기반이 되는 흐메이밈 공군기지, 러시아군이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시리아 서부 해안 타르투스 해군기지를 49년간 임차한 전략적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러시아는 알아사드 정권이 HTS의 진격을 막는 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고, 정권이 무너지자 시리아 내 군사기지에서 철수하고 있다.
수니파가 다수인 시리아의 시아파 알아사드 정권을 같은 시아파로서 지원해온 이란도 중동 내 시아파 맹주로서 위상에 손상을 입었다. 게다가 반이란 성향인 HTS의 비협조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이라크 민병대 등을 지원할 시리아 내 보급로를 잃었다. 외신들은 시리아 야권이 입수한 문서를 통해 시리아의 대이란 채무가 500억 달러(71조 7천 300억 원)에 달한다고 밝히며, 이란이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막대한 채권을 회수하기 힘든 상태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3)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을 지원할 것인가?
이스라엘 언론 《하아레츠》에 따르면,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 10월 하마스와의 전쟁 1주년을 맞아 열린 내각 회의에서 이번 전쟁을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전쟁을 가리키는 ‘코메미유트 전쟁’으로 부르자고 주장했다. 이번 전쟁을 제2의 건국으로, 자신을 이를 이끈 지도자로 남기겠다는 뜻이다. 이는 전쟁 이전 사법부 무력화 시도로 국내외의 지탄을 받았을뿐더러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이스라엘 민간인 사상자를 낳은 하마스의 공격을 막지 못한 책임을 추궁당하는 네타냐후의 정치적 생명과도 직결된다. ‘제2의 건국’의 궁극적 목표는 이란을 이스라엘에 심각한 위협을 끼칠 수 없을 정도로 약화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자 네타냐후 정부는 크게 환영했다. 트럼프 1기는 ‘역대 미국 정부 중 가장 친이스라엘 정부’를 자임했다. 1947년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종교적, 정치적 상징성이 큰 예루살렘을 어느 쪽도 아닌 UN이 관할하는 특별지역으로 두었으나,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미 대사관을 그곳으로 이전했다. 또한, 국제사회 대다수의 입장과 이전까지 미국의 공식 입장과도 어긋나게,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휴전협정에 반하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영유권 주장을 인정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워싱턴 DC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무소를 폐쇄하고, UN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 자금 지원을 중단하는 등 압박해왔다. 이번 대선 뒤 트럼프가 차기 주이스라엘 대사로 지명한 마이크 허커비도 “팔레스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온 대표적인 친이스라엘 인사로,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합병 구상을 지지한다.
미국 대선에서 국내 사안이 중점이었기에, 트럼프의 중동 관련 공약은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의 평화를 되찾겠다”는 선언 정도로,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란에 대한 초강경 기조를 공유하는 네타냐후 정권을 지원할 의지를 밝혀왔다. 트럼프는 1기 때도 이란 핵 합의를 파기하고,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암살하는 등 강경한 반이란 기조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올해 11월 미국 검찰이 트럼프를 암살하려던 이란 혁명수비대의 계획을 적발했다고 밝히면서, 트럼프 2기가 개인적 원한에 따라 이란에 더욱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대이란 제재를 강화하고 이란의 석유 수출을 옥죄는 ‘최대 압박’의 재현이 예상된다.
나아가 12월 13일 《월스트리트 저널》은 트럼프 정권 인수팀 안에서 이란 핵시설 공습 옵션이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의 핵 능력은 위협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공격과 알아사드 정권 붕괴로 이란이 타격을 입은 지금이 적기라는 의견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또한 이란이 핵무장 능력을 완전히 갖추기 전에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해왔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핵무장을 막기 위해 해당 국가의 핵 시설을 폭격한 바 있다.) 트럼프도 대선 기간에 이스라엘이 이란 핵 시설을 공격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중동에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축소하겠다는 트럼프의 기조를 고려하면, 향후 이란 핵시설 공격을 실행한다 해도 미국이 직접 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작전을 미국이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
4) 소결: 네타냐후와 트럼프는 중동의 평화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하마스의 2023년 10월 7일 공격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행태에 아랍과 전 세계의 규탄이 지난 1년 동안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마스 지도부를 제거하고 헤즈볼라와 이란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시리아에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전투를 벌여오며 그 지도부 수십 명을 살해했음에도 하마스를 궤멸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극단적 폭력이야말로 하마스를 성장시키는 양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동은 역내 갈등과 행위자가 많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스라엘-헤즈볼라 휴전이 급작스런 시리아 내전 종결로 이어졌듯, 하나의 사건이 생각지 못한 사태로 비화하거나,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세력이 다시 세를 키워 나타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정책이 네타냐후 정권과 트럼프 2기에 의해 다시 한번 반팔레스타인, 반이란 기조로 뭉쳐졌다. 이 기조의 단기적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 중동의 진정한 평화 정착과 거리가 멀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트럼프 1기의 중동 정책 중 가장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던 아브라함 협정(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들의 외교 관계 수립)은 팔레스타인의 고립을 전제했고, 결국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으로 이어졌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직접 충돌을 자제해 왔지만, 대이란 제재가 강화되거나 핵시설에 공격이 이뤄지면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트럼프 2기 중동 정책은 4년 뒤, 지금보다 더 위태로운 중동 정세를 낳을 수 있다.
한편,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UN 대북제재 대상인 북한과 협력함으로써 UN을 무력화시켰는데, 또 다른 상임이사국인 미국 역시 바이든 행정부가 안보리 회의에서 이스라엘을 비호하며, ‘규칙 기반 세계질서’를 내세우는 미국이 실제로는 자국의 이해에 따라 ‘이중기준’을 적용한다는 비판이 크게 일어났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즉각 휴전을 촉구하는 UN 안보리 결의안은 올해 3월에야 미국이 거부권 행사를 포기하여 처음으로 통과됐다.) 세계질서의 유지에 관심 없는 모습을 보여준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에는 미국의 이러한 행보가 심화할 수 있다.
4. 트럼프의 귀환과 한반도
트럼프의 귀환이 한반도에 끼칠 영향도 주목된다. 먼저, 트럼프는 김정은 위원장과 초유의 북미정상회담을 진행한 당사자였으며 대선 기간에도 이를 자신의 성공적인 외교정책으로 묘사해온 만큼, 정상외교를 포함한 북미대화 재개 여부가 초점이다. 둘째로, 트럼프의 영향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조기에 끝날 시 이것이 북러협력에 미칠 영향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트럼프 2기에서의 한미관계 내지 한미일관계라는 문제가 있다.
1) 북미 톱다운 대화가 돌아올 것인가?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는 미국도 북한도 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트럼프 2기에는 양측 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미국 대선 결과가 나오자 “미국과 협상으로 갈 만큼 가봤지만 확인한 건 공존 의지가 아니라 침략적이고 적대적인 대북정책이었다”고 발언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실제로는 ‘적대적 대북정책 철회’라는 대화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트럼프 쪽에서도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드러냈다. 11월 26일 《로이터》는 트럼프의 정권 인수팀이 김 위원장과의 직접 대화 추진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도 12월 12일 《타임》지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각각 또는 둘 다 끝나면 우리[트럼프와 김정은]는 [협상장에] 앉을 것”이라고 밝혔다. 14일에는 측근인 리처드 그레넬 전 주독일 대사를 북한 등을 담당하는 특별임무 대사로 지명했다.
미국 대선 직후에는, 미국 국내 현안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무역갈등,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 등 숱한 국제 사안을 고려하면 적어도 2025년 내에 북미협상이 시작될 가능성이 낮다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 북한도 단기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활용하여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통해 핵능력을 제고할 것으로 점쳐졌다. 그러나 예측하기 어려운 트럼프의 행보를 고려하면, 양측의 의지가 있으니 북미협상이 조기에 재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예컨대,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중동 문제에서 생각만큼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오히려 서둘러 북미대화를 개시하려 할 수도 있다.
다만, 트럼프 임기 내에 북미대화가 진행되더라도 그것이 실질적인 합의를 낳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10월 발표된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25년 북핵 쟁점: 군축·군비통제 담론 대응 중심으로』는 북미 양측의 목표가 상이하고 타협의 여지가 적기에 북미협상은 결실을 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NPT 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이나, 이는 NPT 체제를 심각히 손상시킬 것이므로 미국이 받아줄 수 없다. 중국,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 미국이 북한과 상호 핵군축을 하겠다고 나설 리가 만무한 상황에서,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대북 안보 인센티브는 주한미군 규모를 줄이거나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한미 ‘워싱턴 선언’을 파기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여기에 대북제재 일부 완화를 더하더라도, 북한이 이에 만족해 완전한 비핵화를 전제한 핵능력 규제에 동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9월 13일 북한의 보도는 우라늄 농축시설의 핵심인 원심분리기와 핵물질 생산시설로 추정되는 장비들을 최초로 공개했다. 과거 영변 우라늄농축시설을 방문했던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 등 전문가들은 바로 이곳이, 2019년 북미정상회담 결렬(‘하노이 노딜’) 당시 트럼프가 영변 핵시설과 함께 폐기할 것을 요구했으나 김 위원장이 거절했던 강선 핵시설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즉, 북한의 강선 핵시설 공개는 영변 핵시설 폐기만으로는 주요 대북제재를 해제할 만큼의 북한 핵능력 해체가 되지 않는다는 당시 트럼프 측 주장을 사후적으로 입증한다.
2) 북러 군사협력은 2025년에도 계속될 것인가?
2023년 9월 정상회담 이후 급물살을 탄 북러관계는 올해 7월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조약’ 체결로, 김 위원장의 표현에 따르면 “동맹 관계에 올라섰다.” 북한이 포탄, 미사일, 대전차 로켓, 자주포, 방사포 등의 무기를 러시아에 지원하는 상황에서, 올해 10월 러시아 쿠르스크 전장에 북한군 파병이 시작된 사실이 알려졌다. 북한 역사상 첫 대규모 지상군 국외 파병이다. 그 대가로, 11월 벨로우소프 러시아 국방장관, 러시아 총참모부 군사아카데미 대표단 등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러 간 군사, 과학기술 협력을 논의하였다. 12월 16일, 미국 정부가 북한군 사상자 발생을 처음으로 확인했고, 같은 시기 복수의 러시아 군사 블로거, 텔레그램 채널도 북한군이 우크라이나군과 전투 중이라고 주장했다. “쌍방 중 어느 일방이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4조)는 구절이 포함된 북러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조약이 12월 4일 공식 발효한 만큼, 향후 북한과 러시아가 북한군 파병을 공식화할 수도 있다.
심화하는 북러협력은 한반도 비핵화의 걸림돌이다. 러시아가 UN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에 거부권을 행사하여, 올해 4월 30일 대북제재위가 사실상 해체되었다. 9월 26일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북한에 대한 ‘비핵화’ 용어 사용은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북러정상회담 이후 러시아가 제공한 인공위성 기술 덕에 북한이 군사정찰위성 ‘만리경 1호’ 발사에 성공했다고 추정되는데, 이처럼 러시아는 기술 이전으로 북한의 핵, 미사일 고도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외화 수입이나 경제협력보다도 이러한 군사기술 이전이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얻고자 한 핵심이익으로 보인다.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UN 안보리 제재 대상인 북한과 군사협력까지 하게 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실용적 필요 때문이나, 전쟁이 끝나더라도 러시아 입장에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내부 담론을 소개한 한국개발연구원(KDI) 《북한경제리뷰》 기사에 따르면, 다수의 러시아 정책 전문가는 우크라아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회복이 수십 년은 어려울 수 있으며, 2023년 캠프 데이비드 합의와 같은 한미일동맹 강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북한과 협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현대적 무기 제공이나 군사기술 이전과 같이 가치와 리스크가 매우 높은 대북지원을 해야 하냐에 관해서는, 러시아 전문가들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개 상황, 동북아 안보 지형에 대한 러시아의 전략적 인식, 북한에 대한 신뢰도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보다 우선적으로 북한에 개입해온 중국의 입장, 한미일동맹 강화의 빌미가 될 가능성, 러시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잃을지 모르는 위험성 등도 쟁점이다.
그러나 러시아 안팎에서 여러 현실적 근거를 이유로 “1961년 북소동맹조약의 부활”(푸틴의 표현)인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조약 체결이나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음에도, 푸틴과 김정은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이와 같이 두 정상이 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심화된 군사협력, 예를 들어 푸틴이 11월에 언급한 북러 합동군사훈련뿐만 아니라 러시아 핵잠수함의 원산항 기항, 북러 방공망 통합 등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기사의 결론이다.
3) 정치적 공백 상태에 빠진 한미일동맹
한미일동맹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와 윤석열 정권, 일본 자민당 정권은 트럼프가 당선된 뒤에도, 11월 15일 한미일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지속가능한 3국 파트너십을 강조했다. 성명은 지난해 8월의 ‘캠프데이비드 3국 정상회의’ 합의를 재확인하고, 이를 조율·이행하기 위한 ‘한미일 사무국’ 설립도 발표했다.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을 규탄하고,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불법적 해상 영유권 주장을 반대하고, 대만해협의 평화를 강조하며 동북아정세에 대한 이해도 같이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떠난 뒤에는 한국과 일본이 이러한 한미일 협력 기조를 함께 압박하자는 구상이었으나, 같은 달 사도광산 추도식이 한국의 보이콧과 일본의 단독 진행으로 파행을 보였듯 한일의 긴밀한 공동행보에는 장애물이 많다. 일본 자민당 정권은 비자금 스캔들과 물가상승 등으로 인해 낮은 지지율로 고전하다, 신임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중의원 해산과 10월 27일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띄웠으나, 자민당과 연립 여당 공명당의 단독 과반이 15년 만에 붕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시바 총리는 한일관계에서 유화적인 입장으로 알려졌지만, 당내 장악력이 약하며 트럼프와 조기 회동을 성사하지 못하는 등 외교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부인 아베 아키에,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등이 트럼프를 만나 리스크 줄이기에 나섰다.
무엇보다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시도 이후로 한국 외교는 사실상 불능 상태에 빠졌다. 바이든 행정부는 계엄 시도를 거세게 비판하며 윤 대통령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고, 이시바 총리는 2025년 1월 예정됐던 방한을 취소했다. 탄핵소추안 가결 뒤에도 헌법재판관 공석 인선에서부터 여야가 마찰을 빚고, 윤 대통령이 수사를 늦추며 법리 다툼을 준비하는 형국이라 이러한 공백이 최소 몇 달은 지속할 것이다. 비상계엄 시도가 트럼프 진영과 북한에 준 영향은 아직 불명이다. 트럼프는 당선 직후 윤 대통령과 첫 통화에서 미국 조선업에 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으나, 계엄 시도 이후 한국 관련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12월 16일 대선 이후 첫 기자회견에서 중국, 일본, 북한에 관한 생각을 밝혔으나 한국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은 대내로나 대외로나 침묵을 지키다 11일에야 《노동신문》을 통해 북한 주민에게 남한의 계엄 소식을 알렸다.
탄핵 인용과 조기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서, 현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게 된다면 한국 외교안보정책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민주당은 1차 탄핵소추안에까지 윤석열 정부의 “북한과 중국, 러시아 적대시”,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정책” 비판을 포함했다. 특히 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대표는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반일 행보를 보였고, 대만 문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으며(“중국에도 셰셰, 대만에도 셰셰”), 북한 방문을 위한 불법 대북송금 재판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민주당 진영과 보수세력 모두 트럼프 2기를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관철하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 민주당의 한반도 및 동아시아 정책은 트럼프주의 정책과 공감대가 많은, 소위 ‘국익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12월 9일 《월스트리트 저널》 인터뷰가 한 예다. 이 대표는 한국 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비판하며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을 목표하는 것을 칭찬하고, 자신이 ‘현실주의자·실용주의자’라는 점에서 ‘한국의 트럼프’로 불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조선일보》와 국민의힘 일각 등 보수층은 트럼프 1기 때와 마찬가지로, 트럼프의 집권을 오히려 미국 전술핵무기의 남한 재배치나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한 기본적 핵능력 확보 계기로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5. 트럼프 2기 미중관계 전망
1) 트럼프는 과연 중국과 ‘전략적 경쟁’을 할 것인가?
트럼프 1기 당시 백악관이 미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은 대중국 전략에 대한 공화당, 민주당 양당 간 초당적 합의의 산물로, ‘미중 전략적 경쟁’의 개시를 선언했다. 《계간 사회진보연대》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적 접근’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냉전식 봉쇄정책이나 강압적인 체제전환을 추구하지 않지만, 지난 20년간 미국이 펼친 ‘관여정책’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원칙에 입각한 현실주의’). △ 중국이 경제, 가치(이데올로기), 안보에 미치는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전략적 경쟁’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 미국이 추구하는 ‘규칙에 기반한 세계질서’에 중국이 참여할지 여부는 중국이 결정할 문제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적 접근’을 실제로 의식하며 움직인 것은 바이든 행정부였고,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정책은 그렇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트럼프의 무역전쟁은 ‘규칙에 기반한 세계질서’라는 원칙을 파괴하며 매우 좁은 의미의 국익을 추구하면서도, 무역적자 감소와 같이 사실상 매우 부적합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중국에 대한 보호주의적 관세, 투자 제한, 제재 강화 등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WTO 같은 틀보다는 직접적 방식으로 미중 간 경제적 상호작용을 줄이고자 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국정책 또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심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질서를 교란하는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다자간 국제질서를 재편한다는 목표를 기각하고, 오히려 미국이 국제질서 교란에 앞장서는 셈이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 전망은 이번 호에 실린 임지섭의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가 자세히 다룬다.) 역설적으로 이는 과연 미국의 협소한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조차 의문인데, 수입관세에 따라 미국 소비자와 생산자가 입는 피해, 중국의 보복관세에 따른 피해, 국제협력의 기반을 무너뜨린 데 따른 피해가 미국에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번 호에 실린 정성진의 「트럼프 인민주의 정권은 미국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보라.)
가치(이데올로기)와 안보 측면에서도 유효한 전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주의자들이 가치 중심의 개입주의를 뜻하는 ‘윌슨주의적 세계주의’를 혐오하듯, 가치를 축으로 한 세계 전략은 이들의 구상일 수 없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꿈’(‘중국몽’)을 중화민족이 아닌 이들이 함께 꿀 수 없듯, 트럼프주의의 ‘미국 우선주의’나 ‘미국 예외주의’는 다른 나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기도 하다. 동맹국, 파트너들과 다양한 연합을 통한 대중국 포위와 같은 종합적인 전략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안보 전략도 ‘힘을 통한 평화’라는 명목 하에 미국 내 군수산업을 확대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선에서 제시된다. 한국과 일본, 유럽 등 동맹국과의 관계를 거래로 치환하고 미국이 언제든 철수할 수 있다고 위협하는 것이나, 중국에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유럽과 중동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근시안적 행보라는 비판은 공화당 진영 안에서도 나온다.
2)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가
그러나 트럼프의 미국이 세계 지도자로서 역할을 줄이고 오히려 국제질서 교란에 나선다고 해서, 중국이 그 공백을 대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정세전망은 중국의 국력이 이미 정점을 찍었고 하락세에 접어들었다고 규정했다. 요약하자면, 중국은 여전히 미국의 1/6, 세계 71위에 지나지 않는 1인당 GDP, 급속한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총인구 감소 시작,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저학력 노동력으로 인한 중진국 함정 고착화, 부동산 경기 붕괴, 시진핑 1인 권력 집중으로 인한 통치 유연성 상실에 직면했다.
더구나 세계 차원의 패권국으로 서기 위해서는 국력 이상의 요소들이 필요하다. 세계 경제와 무역, 금융 질서를 주도해야 하며, 이념 등 소프트파워도 키워야 한다. 영미 패권 교체기의 미국에 비교하면 중국은 이 모든 것이 크게 부족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브레튼우즈 체제와 세계무역기구(WTO)를 대체할 만한 틀을 만들어왔다기보다는, 그동안 현존 틀을 이용하고 교란한 것에 가깝다. 제3세계 개발도상국에 막대한 투자를 했으나, 이는 지원대상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성공한 전후 미국의 마셜 플랜, 일본, 한국 지원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다르다. 오히려 ‘일대일로’ 사업은 개발도상국의 디폴트와 반정부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중국식 권위주의와 디지털 감시 기술은 일부 권위주의 국가에 영향을 주고 있으나, 설령 중국 경제가 지금보다 더 비약적으로 성장하더라도 민주주의가 정착한 세계 국가 다수는 중국식 권위주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중국식 권위주의를 떠받치는 논거는 인류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아니라, ‘중화민족’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민주주의’라는 특수성에 기초한다.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상대국을 동등한 대상으로 존중하지 않는, 중국 주도의 지역 질서 관념이 드러난다. 2010년 7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ASEAN) 외교장관회의 당시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이 “중국은 대국이고, 다른 나라는 소국이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발언한 것이 상징적이다. 한국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2016년 천하이 중국 외교부 아주국 부국장이 사드 배치 문제를 두고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느냐”라고 발언한 일, 2021년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정의용 외교장관에게 “옳고 그름을 파악해 올바른 입장을 견지하라”고 훈계한 일, 2023년 이재명 대표와 회동에서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가 “중국 인민이 시진핑 주석님의 지도하에 중국몽이란 위대한 꿈을 이루려는 확고한 의지도 모르며 중국의 패배를 베팅하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위협성 발언을 한 일이 그렇다. 그때마다 이런 논지는 개인의 발언에 그치지 않고 중국 국영매체에서도 드러냈으며,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됐다.
지금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중국 정부도 알고 있다. 이것이 애초 대만 문제가 부각된 이유다. 중국공산당의 통치와 중국 인민의 정치적 자유 억압을 정당화했던 경제성장이 둔화하자, 시진핑 정권은 민족주의적 역사관에서 비롯된 영토적 완전성 추구를 국가적 목표로 세우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중화민족주의의 강화로 인한 2016년 ‘쯔위 사과 사건’,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진압 등은 대만 민중의 마음을 돌려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양안 통일’이 불가능한 지형을 만들었다. 쯔위 사건은 2016년 대만 총통선거 전날에 일어났고, 그 결과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후보가 압승했다. 중국이 내세우는 공식 양안통일 방안인 ‘일국양제’가 홍콩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본 대만의 여론은 80% 이상이 일국양제 통일에 반대하고 있다.
심화하는 정치위기, 경제위기로 인해 올해 세계 곳곳에서 다수의 집권세력이 실각한 것과 달리, 대만에서는 민주진보당이 3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이 또한 민진당의 국내 정책 요인보다는 대만의 주권, 민주주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기조에 힘입은 것으로 분석된다. 성균관대 성균중국연구소 『2024년 대만 선거 특별리포트』는 대만에서 친중 여론이 몰락하면서, 전통적인 선거 구도 자체가 변화했다고 설명한다. 친중 정당이었던 국민당조차 중국과 아무 연관이 없는 본성인 출신 허우여우이를 대선 후보로 택했다. 허우는 중국의 바람과 달리, ‘하나의 중국’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를 의미하는 ‘92 컨센서스’ 수용을 선언하지 않았다. 중국은 총통선거 기간에 군사훈련을 통한 압박뿐만 아니라 중국 푸젠성과 대만을 묶어 통합적인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대만 여론은 중국 자본의 유입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홍콩의 사례를 들며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대만 수복’을 실행할 방도가 무력밖에 남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세계 패권 경쟁에서도, 지금이 중국이 국력 저하가 더 뚜렷해지기 전에 위험한 도박에 나설 수 있는 시기라는 점에서 더욱 우려된다. 결코 객관적 조건이 자국에 유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국력의 정점을 지난 후발 국가가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전쟁을 감행한 사례로 이미 1차 세계대전의 독일, 태평양전쟁의 일본이 있다.
다행히 2024년 중국의 움직임은 대내외 모두 ‘상황 관리’에 들어갔다는 인상을 준다. 올해 중국은 중러정상회담과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했으나, 세계 질서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러시아와 북한의 행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기보다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왔다. 북중러 간에 한미일동맹에 맞선다는 공통의 기반이 사라지지는 않겠으나,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 냉각을 숨기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함께 산책한 것을 기념해 설치했던 ‘발자국 동판’을 철거하고, 중국 내 북한 노동자 전원에게 일시 귀국을 통보하고, 북한행 화물 검색과 통제를 대폭 강화했다. 또한 북중수교 75주년임에도 북한 전승절 행사에 불참했다. 시 주석은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뒤 “불에 기름을 붓지 않고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조속히 완화해야 한다”며 북러협력 가속화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반면 한국, 일본과는 한중일정상회의 등 고위급 교류를 재개하고, 한국의 주장을 수용하여 공동선언에 ‘한반도 비핵화’를 포함하고(이에 북한 외무성은 ‘난폭한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다), 무비자 관광을 개방하는 등 관계 관리에 나섰다.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현재 중국의 위치에 대한 신중한 판단에 따른 것일 수 있다. ‘전랑외교’와 ‘일대일로’ 같은 기존의 공격적 행보는 각국의 반발을 불러왔다. ‘잃을 것이 없는’ 북한, 러시아에 비해 중국은 훨씬 많은 나라와 경제 관계로 얽혀있고 대외 무역 의존도도 높다. 경제구조가 취약하고 경제규모에도 한계가 있는 북러와의 경제협력은 이를 대체하지 못한다. 중국이 미국 주도 세계질서를 대놓고 깨거나 대체하려 시도하기보다는, 이를 활용하여 영향력과 국력을 최대한 키우는 전략을 취해온 것의 연장선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대만이라는 ‘핵심이익’과 관련한 문제는 예외가 될 수 있다.) 예측하기 힘든 트럼프 2기에 대해서도 선제적으로 나서기보다는 미국의 정책에 대응하며, 트럼프가 유발한 국제사회의 혼란에 개입하는 식으로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2024년 중국 경제성장률이 정부 목표치에 미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올해 발표된 경제 정책은 중국 경제의 ‘시한폭탄’으로 꼽히는 지방정부 재정건전성과 부채 문제를 관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청년 실업률이 2023년 6월 21.3%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자, 중국 정부는 국제노동기구(ILO) 기준과 달리 대학 재학생을 실업률 통계에서 제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변경에도 올해 8월 청년 실업률이 18.8%를 기록했다. 이와 같이 경제 위기가 가중되고 중국 인민의 불만이 쌓이는 현실 또한 대외정책 완화에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대미 군사력 열세를 가장 빠르게 메울 수 있는 부분인 핵전력 강화에 있어서는 공세적이다. 2023년 말까지 핵탄두 500개, 2030년까지 1천 개를 목표로 핵 보유량을 늘리고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숫자를 2000년 대비 4배까지 늘리고, 극초음속 미사일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력을 개량하기로 했다. ICBM·SLBM·전략폭격기라는 핵 3축 체계의 현대화를 이뤄 대미 핵 보복 능력을 높이고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핵 작전 능력을 확대하는 구상이다.
6. 우리가 견지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2025년은 미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한반도가 해방과 동시에 분단에 접어들고, 국제연합(UN)과 브레튼우즈 체제가 상징하는 전후 세계질서가 작동하기 시작한 1945년으로부터 80주년을 맞는 해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는 냉전 종식 후 어느 때보다 가시화된 핵 위협, 보호무역이 확산하며 경기침체가 가속화되고 각국의 극단적 민족주의가 일어나 결국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진 1930년대를 연상케 하는 관세정책의 귀환, UN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러시아의 침략전쟁과 또 다른 상임이사국 중국의 묵인으로 인한 UN의 무력화를 마주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는 적어도 5천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세계 곳곳에 만 기 이상의 핵무기가 있는 반면, 새로운 국제질서와 공공재를 제공할 패권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의 귀환이라는 폭풍 앞에서, 역사의 교훈을 차분히 되새길 때다.
먼저, ‘미국 없는 세계’가 그 자체로 진보한 세상일 것이라는 기대는 안이하다. ‘하나의 세계’를 실현하려는 각고의 노력 없이는, 마치 서로마 제국의 붕괴 직후 유럽처럼, 세계대전 후의 다자주의적 질서와 탈냉전 이후 세계화의 순기능, 즉 정보의 자유로운 교류를 통한 인류 공동의 발전이 후퇴하고 정치적 불안성이 커지는 세계가 올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특히 전후 세계질서의 위기가 한반도 민중에게 의미하는 바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열강의 식민지 확보 경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1945년 이후 성립한 세계질서는 명목상으로 모든 민족국가의 주권과 평등을 명시하였고, 강대국들의 무력행사를 공동으로 통제하는 집단안보 체계를 갖추었다. 한반도 민중과 같은 약소민족의 해방과 번영은 이러한 전후 세계질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러한 질서가 흔들릴 때에도 한국이 주변 강대국들과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은 환상이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의 충격이 잊힌 지금, 세계 핵 확산 통제 체제는 위협받고 각국은 핵전력 강화와 핵정책의 공격적 수정에 돌입해 있다. 적어도 인류 절멸의 핵전쟁만큼은 막아내기 위한 핵무기 전면 철폐 운동이 냉전 종식 후 어느 때보다도 긴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