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취임 한 달, 세계에 미친 영향
트럼프의 미국, 미국이 설계한 전후 국제질서를 무너뜨릴 것인가
트럼프 1기 행정부는 2017년 말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2017」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흔드는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2025년 현재, 트럼프의 미국 역시 수정주의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온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기존 제도를 공격하고 일방적 관세 부과를 주장하는 트럼프주의의 득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설계하고 주도한 세계질서를 미국이 직접 무너뜨리는 셈이라는 말이다. “마지막 지푸라기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는 서양 속담처럼, 트럼프의 미국은 이미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부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위기에 빠진 전후 국제질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25년 1월 20일 취임한 뒤 한 달 남짓 동안 진행된 일들은 그러한 우려를 입증한다. 이번 글은 트럼프의 귀환이 전후 미국 헤게모니의 핵심인 자유무역과 ‘규칙 기반의 세계질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파괴하는 양상을 정리한다. 미국 청년들의 트럼프주의 대중운동과 부통령 J. D. 밴스가 대표하는 ‘탈자유주의 우파’ 이념이 대두하고, 심지어 노동조합 일각에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지난 한 달 사이 나타난 양상이 트럼프의 임기 4년을 넘어 훨씬 오래 지속될 변화의 시작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1. 국제경제: “하나님, 아내와 가족, 사랑 다음은 관세”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관세’가 대표한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1월 20일) 미국의 전체 수입 규모의 42%(2024년 기준)를 차지하는 세 국가, 즉 중국에 10%의 추가 관세를, 캐나다와 멕시코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대로 지키지는 않았지만, 트럼프는 각국에 관세 부과를 예고하고 시행을 연기하며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모든 교역국에 대해 3월 12일부터 철강과 알루미늄에 25% 관세를, 4월 2일부터 비관세 장벽까지 고려한 상호관세와 25% 정도의 자동차 관세를 시행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3월 초 현재까지도 반도체, 의약품, 목재, 구리, 농산물 등 관세 부과 품목을 연일 새로 늘리고 있다.
1) 일본, 호주, 인도: 사전적 양보, 유화 전략
트럼프 행정부가 개시한 관세 압박에 대한 각국의 대응은 갈린다. 먼저, 사전에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미국 경제에 자국이 기여하는 바를 강조하면서 트럼프의 관세와 부정적 조치를 최대한 피하려는 국가들이 있다. 일본이 대표적이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2월 7일 미일정상회담에서 트럼프를 “신에게 선택받은 인물”이라고 부르면서 적극적으로 ‘아부’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방위비를 증액하고,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늘려 대미 무역흑자를 줄이는 한편, 대미투자를 1조 달러까지 확대하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그 결과 일본은 미국의 7대 무역적자국(2024년 기준)임에도, 트럼프는 정상회담에서 대일관세 부과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미일정상회담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인식은 이시바 총리의 지지율이 소폭 상승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자국이 미국의 몇 안 되는 무역수지 흑자국이고 자국 철강기업 블루스코프가 미국 내에서 일자리를 대규모로 창출한다는 점을 강조한 호주나, 미국과의 무역협상에 대비하여 70여 개 수입 품목의 기본관세를 선제적으로 인하한 인도도 비슷한 기조로 대응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국가들도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을 정조준한 관세·비관세 조치를 피해갔을 뿐이다. 미국이 모든 교역국에 부과하기로 한 자동차, 철강, 알루미늄 제품 관세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또 다른 쟁점을 들고 나와 압박할 가능성 역시 상존한다. 대표적으로 방위비 문제가 있다. 일본의 경우, 미일정상회담 당시 공동성명에 ‘일본의 방위비 인상’ 관련 내용을 넣자는 미국 측 요청을 철회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3월 6일 트럼프는 “우리는 일본을 보호해야 하지만 일본은 우리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며 다시 불만을 표했다.
2) 캐나다, 멕시코: 불확실성과 반발
캐나다와 멕시코는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제품에 25% 관세 부과를 명령하자 즉각 보복 관세를 천명하는 동시에 미국과 물밑 협상에 나섰다. 그럼에도 3월 초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대캐나다·멕시코 정책은 “자고 일어나면 바뀌어 있는” 대혼란이다. 여러 발표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이뤄지고, 트럼프 대통령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의 말이 엇갈리기도 하면서, 트럼프 자신을 제외하고는 정책의 향방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말도 나온다.
트럼프는 3월 3일, 한 달간 유예했던 캐나다·멕시코산 상품에 대한 25% 관세를 다음날부터 시행하기로 발표했으나, 5일에는 캐나다·멕시코산 자동차에 한해 관세를 1개월 면제한다고 알렸다. 6일에는 미국·캐나다·멕시코 무역협정(USMCA)이 적용되는 대부분의 캐나다·멕시코산 수입품에 대해 25% 관세를 4월 2일까지 유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7일, 캐나다산 목재 및 유제품에 최대 250% 관세를 매기겠다고 발언했다.

올해 2월, 트럼프의 관세 압박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캐나다 곳곳의 카페들에서 ‘아메리카노’를 ‘캐나디아노’로 바꾼 메뉴판이 등장했다. (사진출처: 《뉴시스》)
트럼프가 이렇게 갈팡질팡 행보를 보이는 미국 기업과 소비자가 캐나다·멕시코산 상품에 광범위하게 의존하는 상황에서, 실제로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미국 경제에도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한 추가 관세 발표는 미국 내에서 물가 상승과 주가 하락이라는 파장을 낳았다. 이에 따라 캐나다와 멕시코에 여러 공장과 부품업체를 둔 미국 자동차업체(제너럴모터스, 포드, 스텔란티스)는 관세 부과 유예를 호소했다. 이러한 조건을 단기간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트럼프 행정부가 캐나다와 멕시코를 압박하는 근거도 “국경지대에서 불법 이민과 마약(펜타닐) 유입을 단속하는 데 협력하라”는 데에 방점이 찍혀있다.
따라서 현재의 실랑이가 실제로 북미 국가 간 관세를 대폭 올리는 사태로 귀결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의 파급력은 크다. 이미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지대를 대표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하여 미국·캐나다·멕시코 무역협정(USMCA)로 바꾸었다. 그런데 현재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엄포 놓는 관세들은 만약 실현된다면 그야말로 USMCA를 파탄 내는 것이다. 캐나다, 멕시코에서는 거센 반발과 함께 미국산 상품 대신 자국 생산품을 쓰자는 민족주의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 모순적이게도, 무역장벽을 철폐한 북미 3국 자유무역지대를 만드는 구상은 트럼프와 트럼프주의자가 “위대한 보수 대통령”으로 찬미하는 로널드 레이건이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3월 6일, 국제통화기금(IMF)은 최초로 트럼프 2기 경제정책에 관해 언급했다. 캐나다, 멕시코, 중국에 대한 관세가 이들 나라 경제에 상당한 부정적 타격을 줄 뿐만 아니라,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워 가계와 기업의 소비와 투자 보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트럼프 관세정책 자체에 대한 평가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나스닥 지수가 트럼프 취임 이후 4%가량 하락했으며, 올해 2월 미국 소비자심리지수는 15개월 만에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또한, 미국 개인 투자자협회(AAII)의 설문조사에서 개인 투자자의 과반이 향후 6개월 동안 주가가 하락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처럼, 부정적 경제 신호의 배경에는 오락가락하는 트럼프 관세정책이 낳은 불확실성이 있다.
3) 유럽연합과 대만: 위기감의 증폭
트럼프는 2월 26일 첫 내각회의에서 “유럽연합(EU)은 미국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유럽산 자동차와 기타 상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할 계획을 밝혔다. EU는 즉각 “이 관세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공급망, 투자 흐름, 경제 안정에 심각한 위협”이라고 반발했다. 즉, 유럽이 느끼는 타격은 직접적인 관세 위협을 넘어선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서유럽 동맹국의 경제를 재건하여 소련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한 마셜 플랜 이래로 경제적, 정치적 이해를 같이해 온 미국-유럽 대서양 동맹이 흔들린다는 위기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협상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트럼프 행정부의 ‘유럽 패싱’과 2월 28일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 결렬은 이러한 위기감을 증폭했다. 그 결과 EU가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뿐만 아니라 안보 의존에서 벗어나 ‘자강’을 꾀해야 한다는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서는 뒤에 상술한다.)
경제적 측면보다도 국가의 안보와 존립 자체라는 측면에서 위기감을 더 크게 느끼는 상황은 대만도 비슷하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는 3월 3일 미국에 1000억 달러(약 146조 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트럼프는 이에 TSMC에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TSMC의 미국 투자 결정을 여러 자리에서 강조했다.
그럼에도 대만 내에서는 트럼프의 무역 압박에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인식보다는, 2월 28일 트럼프와 밴스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박대하는 광경에서 받은 충격이 커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가 노골적으로 우선시 하는 ‘강대국’의 ‘핵심 이익’에 따라 운명이 좌우될 약소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우크라이나의 처지에 대만을 이입하며 분개하는 목소리가 (심각한 여야 간 정치대립에도 불구하고) 대만 정계 전반에서 쏟아졌다.
트럼프와 밴스는 희토류 공급을 카드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보려 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그것은 미국이 이미 지원한 금액에 대한 당연한 보상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당신은 카드가 없다”고 몰아붙이고, 안보 보장은 약속하지 않으면서 침략국 러시아와의 ‘외교’를 강제했다. 이러한 모습에 대만 여론은 세계 최고 수준의 대만 반도체 산업도 강대국이 서로의 세력권을 묵인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추구하는 트럼프 행정부에게 충분한 ‘카드’가 되지 못할 수 있으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더라도 보호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 TSMC의 미국 투자 결정 이후에도, 트럼프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만을 보호할 것이라고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대만 내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TSMC에 분할을 압박하여 미국 내 TSMC 사업을 독립 회사로 만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나온다.
4) 중국: 2차 미중무역전쟁의 궁극적 승자가 될 것인가?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낳은 여러 혼란 속에서 중국이 어떻게 행동할지도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의 관세 위협에 중국은 즉각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로 대응했는데, WTO가 이 사안에 착수하면 트럼프 행정부는 WTO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는 지난 임기 때에도 WTO 탈퇴를 언급한 바 있다. WTO의 최혜국대우 조치로 인해 미국이 수입품에 낮은 세율을 부과한 탓에 대규모로 무역수지 적자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 트럼프가 반복하는 주장이다. 미국이 만들어낸 국제무역 틀인 WTO에서 미국의 탈퇴 혹은 탈퇴 위협은 세계에 심대한 충격을 안길 것이다.
2월 초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부과한 10% 관세에 대해, 중국의 첫 맞불 대응은 미국산 석탄과 액화천연가스(LNG)에 대한 추가 관세 부과였다. 이는 대중국 수출 비중이 높은 품목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즉 수위 높은 대응이 아니므로 대화의 문은 열려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국’을 표방하는 중국은 자국을 동등한 대국으로 대접하는 대신 먼저 충격을 던진 뒤 양보, 타협을 압박하는 트럼프의 전술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이에 굴복하면 중국의 위신이 훼손된다고 생각하므로, 미국이 전술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지적들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도 ‘강대강’으로 맞설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럼에도 3월 3일 트럼프가 중국산 제품에 대해 10%의 관세를 더 부과하기로 결정하자, 중국 외교부는 “협박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 “미국이 원하는 것이 관세 전쟁이든, 무역 전쟁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전쟁이든 끝까지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맞섰다. 중국의 두 번째 대응은 3월 10일 시작된 미국산 농축산물 10~15% 보복관세다. 중국이 전 세계에서 미국산 농축산물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첫 대응과 달리 미국에 실제 타격을 주려는 조치로 읽힌다. 트럼프의 2차 미중무역전쟁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미국이 어떻게 나오든 중국은 이와 같이 쉽게 양보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중국은 다른 국가들과 달리 미국의 압박에 다급하게 나서기보다는, 트럼프의 정책이 불러올 역효과를 기다리며 신중히 움직일 것으로 예측된다. 한 예로, 트럼프 행정부는 800달러 미만 중국산 소포장 상품에 대한 면세 혜택 폐지 사흘 만인 2월 7일, 미국 소비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못 이겨 이 방침을 철회했다. 미국은 2년 뒤 중간선거가 예정되어 있으므로, 중국은 트럼프가 중간선거에서 패배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며 ‘버티기’를 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때까지 중국은 트럼프가 벌려놓은 온갖 정책들이 부작용을 불러오고 미국과 유럽의 갈등이 고조되기를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다. 중국 외교 전문가들은 트럼프 취임 뒤 한 달 간의 대중국 압박이 예상보다 약했고 상대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2020년 10월 23일, 《홍콩경제일보》는 트럼프 대통령, 즉 ‘촨젠궈 동지’의 ‘미국 우선’ 정책이 오히려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주었다고 비웃는 중국 내 여론을 다뤘다. 이 그림은 중국 네티즌이 만든 관련 이미지 중 하나다. 중국 오성홍기를 배경으로 엄지를 치켜든 트럼프의 모습과 함께 “전부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한 거야”라는 문구가 있다.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중국과의 경쟁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들이 역설적으로 중국에 도움이 된다는 분석이 많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조슈아 멜처 선임 연구원은 미국, 캐나다, 멕시코 간 무역전쟁의 승자는 중국이라고 주장했다. 캐나다·멕시코에 대한 25% 관세는 미국의 경제성장, 물가, 일자리, 임금에 악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공급망을 중국에서 북미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약화시킬 것이고, 동맹국들에 미국과의 교역을 줄여야 한다는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들 동맹국들이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 무역과 투자 관계를 확대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에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중국은 트럼프 1기 때와 마찬가지로 트럼프가 세계에 낳은 혼란을 틈타, 자국의 영향력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할 것이란 분석도 많다. 미국이 앞장서서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시행하고, 침략국인 러시아의 편을 들고, 여러 인권 문제를 야기하는 상황은 국제사회가 중국에 자유무역의 규칙을 준수하고, 주변국들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신장 위구르 강제노동수용소의 인권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기 어렵게 만든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드러나는 트럼프의 ‘대국 중심’ 사고가 중국이 미국에 요구해온 ‘신형대국관계’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수립을 실현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2013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신형대국관계’를 제안하며 “태평양은 무척 넓어서 중국, 미국 양국을 충분히 포용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태평양 서쪽(동아시아)은 중국의 세력권으로, 태평양 동쪽(남북아메리카)은 미국의 세력권으로 두고, 각자의 세력권과 핵심 이익을 존중하며 간섭하지 말자는 의미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압박’을 강조하지만, 러시아와 같은 지역 강대국들의 핵심 이익을 고려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미국의 개입을 축소하겠다는 그의 구상은 사실 이러한 중국의 제안에 부합하는 셈이다.
중국 SNS 사용자들도 트럼프에게 중국의 제2의 건국을 돕는다는 뜻의 ‘촨젠궈(川建國) 동지’라는 별명을 붙였다. (트럼프의 중국어 표기 ‘촨푸’(川普)와 ‘건국’을 합친 말이다.) 트럼프의 무역전쟁이 오히려 중국 경제의 자립과 무역 확대를 돕고, 트럼프의 국제질서 교란이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높여주어 고맙다는 것이다.
5) 한국: 외교정책에 관한 합의가 과연 존재하는가
마지막으로, 한국은 2024년 8위 대미 무역흑자국이며 미국으로 자동차, 철강, 알루미늄 제품을 다량 수출하고 있어 트럼프의 관세정책에 직격타를 맞는 나라다. 이 때문에 트럼프 당선 이전부터 일본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로 국가 차원의 컨트롤 타워가 부재한 상태라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해 경제단체와 기업들이 방미사절단을 꾸리고 있다.
트럼프는 3월 4일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한국을 콕 집어 “미국이 부과하는 관세보다 훨씬 많은 관세를 미국에 부과하는 나라”로 규정하며, 이와 연결지어 미국이 한국에 주는 군사적 도움을 언급했고, 수익성이 낮다고 여겨지는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산업에 한국의 투자를 요구했다. “세계 1위 반도체 기업[TSMC]은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지원법’에 따른] 보조금 없이도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는 언급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압박하는 발언이다.
이와 같이 트럼프 행정부가 전방위적으로 한국을 압박할 것이 예고되는 상황이지만, 한국은 트럼프 정책에 대응하는 태세를 조속히 갖추기 어려울 수 있다. 내전에 가까운 정치 양극화와 헌정위기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설령 조기대선이 치러진 이후라 할지라도 초당적 합의에 기초하여 일관성 있게 유지해야 할 대외정책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야 간 대외정책 노선 차이가 무척 큰 것과 관련있다. 윤석열 대통령 1차 탄핵소추안에 담긴 “가치 외교라는 미명 하에 북한과 중국·러시아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정책을 고집한다”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이 문구는 국내에서 많은 논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급된 국가들과 미국 정가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6) 소결: 트럼프의 관세, 제2의 1930년대를 열 것인가?
급격한 관세 인상은 결국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소할 수 없으며 미국에 경제적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물가 인상은 저소득층에게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므로 트럼프 지지층의 민심 이반을 불러올 수 있다.
트럼프도 이러한 우려를 어느 정도 인지하는 것으로 보이나, “감수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3월 9일 인터뷰에서 “경기 침체를 예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미국 경제에] 과도기가 있을 것”이라며 “우리가 하는 것은 부를 미국으로 다시 가져오는 큰일이며 시간이 걸린다”고 답했다. 최근 뉴욕증시의 하락세에 관해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은 강력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며 “주식시장을 너무 신경 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경기 침체와 주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관세정책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다음날인 10일 뉴욕증시 3대 지수(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 S&P500 지수, 나스닥 지수)가 급락했다. 당초 트럼프의 관세 압박은 국경 통제 강화, 미국 내 투자 등을 얻어내기 위한 블러핑일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최근 악화된 경제지표는 이것이 1기 때와 달리 블러핑이 아니라 진짜 정책이 아니냐는 위기감을 반영한다. 트럼프의 관세전쟁이 설령 진심이 아닌 블러핑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블러핑의 남발은 그 자체로 규칙 기반의 국제무역질서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국의 관세전쟁에 대한 현재까지 각국의 대응은 기존 국제질서를 보호하는 공동대응보다는, 각자도생을 꾀하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미국의 스무트-홀리 법이 촉발한 1930년대 각국의 연쇄적인 보호주의 조치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진 선례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세계가 그때와 다른 대응을 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2. 국제정치: 가자지구·우크라이나 휴전협상에서 드러난 국제규범의 파괴
트럼프는 취임 첫날 ‘멕시코만’의 이름을 ‘미국만’으로 바꾸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데 이어,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매입해 미국 영토로 삼겠다거나,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회수하겠다거나, 캐나다에 “미국의 51번째 주(州)가 되라”고 발언했다. 아직 실질적으로 추진된 바는 없지만, 미국의 영토나 준영토를 직접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전후 최초로 밝힌 것이어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팽창주의’, ‘제국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이러한 돌출행동의 배경에, UN(국제연합)헌장 아래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 전후 국제질서에서 이탈하여 중국, 러시아가 주장하는 세력권 분할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대신, 미국의 세력권이라 할 수 있는 남북아메리카 등지에서는 미국의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구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국제질서관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처리에서도 두드러진다.
1)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위태로운 휴전과 제2의 ‘나크바’?
자신이 취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라는 트럼프의 압박은 1월 15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2단계 휴전 논의가 진전되지 못해, 6주간의 1단계 휴전(휴전과 이스라엘인 인질과 팔레스타인인 수감자 교환)이 3월 1일부로 끝났음에도 일주일 넘는 기간 동안 휴전도, 본격적인 전쟁 재개도 아닌 상태에서 이스라엘군의 산발적인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협상은 하마스가 당초 합의대로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을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2단계 휴전을 요구하는 반면, 이스라엘은 병력 철수를 원치 않아 1단계 휴전 연장을 주장하고 있어 교착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전력과 물 공급, 구호물자 반입을 끊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는 고강도 봉쇄로 하마스를 압박하여 철군 없이 추가 인질 석방을 끌어내려는 이스라엘의 ‘지옥 계획’ 작전의 일환이다. 이스라엘 내에서는 전쟁 재개 준비도 진행 중이다. 이스라엘 카츠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군에 전투 복귀 준비를 지시했고, 강경파로 분류되는 에얄 자미르 신임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은 3월 5일 취임식에서 “인질을 귀환시키고 결정적 승리를 거두기 위한 군사작전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1단계 휴전 연장 제안에 찬동하고 가자지구 봉쇄를 묵인하는 한편, 비밀리에 하마스에 특사를 보내 직접 인질 문제 등을 논의한 것이 드러나 이스라엘 측의 반발도 샀다.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에 사활을 건 반면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하마스를 제거한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양측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으므로 트럼프의 호언장담처럼 해결이 쉽지 않을 것임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2월 4일 트럼프가 느닷없이 가자지구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내놨다. 미국이 직접 가자지구를 장악·소유하고 2백만 명이 넘는 주민을 주변국으로 영구 이주시킨 뒤 휴양지로 개발하겠다는 안이었다. 이 안은 반인도적 범죄인 ‘인종 청소’를 연상시켜 세계를 경악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미국과 국제사회가 힘겹게 마련했던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법에 역행한다.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75만 명이 삶의 터전에서 폭력적으로 쫓겨난 ‘나크바’(아랍어로 재앙이라는 뜻이다)는 오늘날까지 기나긴 비극의 시작이다.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두 국가 해법’을 골자로 한 오슬로 협정을 체결한 이래로 국제사회는 이러한 해법을 지지해왔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탄압과 폭격을 견디며 버텨온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제2의 나크바일 수밖에 없는 구상을 선언했다.

2월 25일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린 영상의 한 장면
이 영상은 트럼프의 구상대로 휴양지로 개발된 가자지구라는 주제로 AI로 만든 것이다. 지중해와 맞닿은 가자지구 해안이 해수욕장으로 변하고, ‘트럼프 가자’라는 이름의 리조트가 들어선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구상이 중동에서 미국의 개입을 축소하겠다는 트럼프의 기존 기조와 다르고 강제 이주 계획을 실현하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실제 구상이라기보다는 주변국들의 더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는 ‘충격과 공포’ 전술일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서구 열강들이 지역민들의 자결권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중동 지도를 그리고 주민들을 이주시킨 [세계대전 종전 이전의 제국주의] 시대를 연상”(《뉴욕타임스》)시키는 제안 자체만으로도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 내 반미 여론이 요동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종전뿐만 아니라 트럼프 정부가 추진해온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관계 정상화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간의 중동 역사를 보았을 때, 팔레스타인 인민의 해방이라는 ‘팔레스타인 대의’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방식의 ‘해결’은 결코 진정한 중동의 평화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2) 우크라이나 전쟁: UN헌장과 대서양 동맹의 위기
강자와의 협상을 선호할 뿐 피해자의 정당한 권리나 UN헌장과 국제법에 따른 국제사회의 합의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트럼프 행정부는 2월 18일 러시아와 직접 대면하여 휴전을 논의했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패싱’당했다. 미국 측 협상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를 인정하고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유보하는 등 러시아 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에서는 대러 제재를 해제하고 미러관계를 회복하는 방향까지 논의했다.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를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복권시켜준 셈이라는 비판이 빗발쳤다.
나아가, 트럼프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시작했다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해서는 “독재자”라거나 “지지율 4%”라고 깎아내리면서 모욕에 가까운 푸대접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2월 초 키이우국제사회학연구소(KII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민의 57%가 젤렌스키 대통령을 신뢰한다고 답했으며, 이는 2024년 12월의 52%보다 늘어난 것이다. 2월 28일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 결렬 뒤에는 65%로 상승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친러 행보는 2월 24일에 열린 UN 안보리와 UN 총회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은 러시아의 이해를 고려하여 이날 UN 안보리에서 발의한 결의안에 전쟁의 본질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명시하지 않고 대신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의 신속한 종결”을 강조했다. 이 안은 찬성 10표, 반대 0표, 기권 5표로 채택되었다. 미국 주도 결의안에 기권한 영국과 프랑스 등은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독립, 영토 보전을 지지한다”는 수정안을 제출했지만,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여 부결됐다.
1945년 UN헌장은 전 세계에서 침략전쟁을 불법화하고, 자기방어를 제외한 무력행사는 오직 안보리의 집단적 의사결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했다. 특히 크건 작건 상관없이 모든 국가가 동등한 주권과 ‘무력 위협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고 명시하면서 약소국의 권리를 공동으로 보호하는 것이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의 재발을 막는 방법임을 드러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러한 UN헌장을 명백하게 위반하므로, 세계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UN총회는 여러 차례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는 UN총회 결의와 달리 UN 회원국이 이행해야 할 구속력을 부여할 수 있는 UN 안보리에서는,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 러시아가 당사국인 탓에 러시아를 비판하고 제재하는 어떤 결의도 채택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계속해서 기권을 택했다.) 그 결과, 안보리 결의 중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련되어 채택된 것은 올해 2월 24일 미국이 주도한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의 신속한 종결” 결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하며 같은 날 UN총회에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50국이 공동발의로 제출한 결의안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전면 침공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의 주권, 독립, 통합 및 영토 보전을 명시했다. 이 안은 찬성 93표, 반대 18표, 기권 65표로 채택되었다. 이를 통해 여전히 러시아의 침략전쟁을 비판하는 여론이 다수임은 확인했지만,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준 것은 미국이 벨라루스, 북한 등 친러국가들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시한 광물협정에는 광물을 비롯한 우크라이나의 천연자원과 항만 및 기반시설에서 발생한 수익의 50%를 미국이 통제하는 기금에 해당 기금이 5000억 달러(약 719조 원)가 될 때까지 편입하는 내용이 담겼다. 반면 미국의 안보 보장이나 구체적인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3년간 미국이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쓴 돈을 돌려받는다는 명목으로 이러한 광물협정을 요구했다. 따라서 약탈적 협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이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열린 2월 28일 트럼프-젤렌스키 정상회담은 외교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파행을 빚었고, 이 모습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는 2019년 휴전을 포함하여 과거의 약속들을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하자,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이 불법침공을 당한 피해국인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을 “무례하다”, “미국에 감사한 줄 알라”, “당신에게는 카드가 없다”고 몰아세웠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 직후 군사물자 이송을 멈추고, 정보공유를 포함한 우크라이나와의 모든 협력을 중단했다.
이 사태를 보며, 유럽 지도자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의 문제를 넘어 유럽을 방어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다시 유럽이 스스로 유럽의 안보를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다. 올해 2월 뮌헨안보회의에서 밴스 부통령이 유럽의 민주주의와 이민 정책을 공격하며 “유럽에 대한 러시아와 중국보다 더 큰 위협은 유럽 내부로부터 온다. 현재 유럽의 가치가 미국이 방어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발언했듯,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적 가치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인식도 있다.
이에 유럽연합은 2월 28일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 결렬 직후 ‘유럽 차원의 재무장’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3월 7일, 우크라이나 지원과 유럽 방위력 강화를 위한 EU 특별 정상 회의에서 27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유럽 재무장 계획’을 확정했다. 이 계획은 8000억 유로(약 1258조 원) 규모로, 유럽 방위를 위한 지출을 대폭 늘릴 뿐만 아니라 미국 무기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유럽 방위 산업의 부활에 투자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주요 유럽 국가들도 ‘유럽에 의한 유럽 방어’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3월 5일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대국민 연설에서 “핵 억지력을 통해 유럽의 동맹국 보호를 위한 전략적 대화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미국 동맹 속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던 국제 질서를 뒤집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유럽에 위협이 될 것이기에 구경꾼으로 남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마크롱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30년이 이제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전부터 마크롱 대통령이 주장했던 유럽 자체 핵우산 논의가 탄력을 받은 것은, 본래 유럽의 독자성보다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했던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기독민주당 대표가 트럼프 행정부의 우크라이나 휴전협상 과정을 보며 정책 전환을 결단한 덕분이다. 메르츠 대표는 2월 25일 총선에서 승리하여 사실상 차기 독일 총리로 확정되었는데, 총선 직후 “핵 보유국인 영국, 프랑스와 함께 핵 공유 내지 핵 방위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한 “독일이 안보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해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미국에 대한 의존을 종식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프랑스와 독일 정치권은 징병제 부활까지 논의하고 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3월 2일 영국과 프랑스 주도로 우크라이나 협력과 방어를 모색할 4대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유럽 국가들의 ‘의지의 연합’이라고 명명했다. 핵심은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유럽의 평화를 지킬 평화유지군 창설로, 관련 논의는 3월 11일 유럽 30개 국 이상의 군 고위급 회담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노선은 영국 노동당, 보수당 양당의 초당적 합의다. 이로써 전후의 기나긴 대서양 동맹은 큰 변화를 마주했다. 더는 대서양 동맹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는 유럽으로 하여금 ‘자강’으로 노선을 선회하게 했다. 가치를 함께하는 동맹국들과의 협력 관계는 전후 미국의 세계 전략이었는데, 이 부분에 결정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다.
3월 11일, 우크라이나가 미국이 제안한 30일간의 휴전에 동의하고, 광물협정도 다시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또 다시 트럼프의 압박 전술이 통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살얼음판에 놓인 이스라엘-하마스 휴전이 보여주듯, 양측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상황에서 강자의 입장에만 힘을 실으며 갈등을 봉합하려 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전술은 장기적인 평화를 담보하지 못한다. 정상회담 파국이 보여주듯,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충돌할 가능성은 산적해있다.
3) 소결: 트럼프의 휴전협상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
상기했듯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하는 휴전협상들은 UN헌장이 규정한 공동안보와 약소국 민중의 자결권을 무시한다. 이는 트럼프의 세계보건기구(WHO)와 파리기후협약 탈퇴, 국제무역기구(WTO) 탈퇴 위협처럼, 국제기구와 국제조약을 무력화하는 흐름을 강화한다.
이는 전쟁의 완전한 종결이나 지역 내 평화 정착과도 거리가 멀다. 현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의 휴전은 푸틴 정권의 유라시아주의와 네타냐후 정권의 극우 민족주의가 현실에서 ‘승리’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를 통해 권위주의 정권들이 정치 생명 연장에 성공한다면 각각 구 러시아 제국 및 구소련의 영토를 포함한 주변국에 대한 야욕, 서안지구 및 골란고원 내 유대인 정착촌 확대와 이란 견제 강화로 새로운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행정부의 휴전협상들을 외교적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자는 논의도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함의를 읽어내는 논자들이 있다. 그러한 논자들은 트럼프가 푸틴, 오르반, 네타냐후 등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과시하는 지도자들에게 호감을 표함으로써 결국 국제질서를 무너뜨리는 연대에 동조한다고 우려한다. 예컨대 레바논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저명한 중동 연구가 질베르 아슈카르는 미러협상을 비판하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대량학살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짓밟고 시리아에서 수십만 명의 학살에 관여한 푸틴이 국제법과 UN의 틀 밖에서 우크라이나 민중을 희생하는 합의를 맺으려 하는 것은, 과거의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자결권을 대놓고 부정하는 신파시즘적 공모라고 썼다.
미국의 이러한 선회는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에도 도움이 될 리 만무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한반도 정책을 소상히 밝힌 적 없지만, 트럼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핵 위협을 서슴지 않는 푸틴을 배려하며 북한의 우크라이나전 참전 책임을 간접적으로 지워주었고, 김정은과의 개인적 친분을 줄기차게 언급해왔다. 1기 때와 달리 북한과 ‘스몰딜’을 맺는 것에 반대할 세력도 여당인 공화당과 행정부 관료 내에서 크게 줄었다.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 북미 스몰딜이 타결될 가능성이나, 혹은 가자지구 개발 계획과 같이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안이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3. 이념과 대중운동: 반자유주의를 선도하는 미국?
마지막으로, 트럼프주의 이념과 대중운동을 살펴보자. 이는 미국이 표방하거나 미국인들이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진 가치들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이러한 변화가 향후 세계 전반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1) 트럼프주의의 대중화
2024년 가을호에 실린 「미국 공화당의 변화와 트럼프의 귀환이 열 ‘미국 없는 세계’」는 트럼프의 대외정책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초당적으로 추구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서 이탈하여 ‘잭슨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비자유주의적 인민주의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트럼프 1기 출범 당시와 달리 현재에는 이러한 전환이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대표적인 미국 보수 싱크탱크에서도 관찰되고,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레이건과 부시가 상징했던 강력한 개입주의 대신 트럼프와 같은 태도가 크게 늘어났다는 데 주목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티파티 운동과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상징되는 트럼프주의 운동 등 대중운동의 부상이 있다고 짚었다.
같은 호의 「트럼프 인민주의 정권은 미국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또한, 트럼프의 등장 뒤로 공화당 지지층에 청년과 러스트벨트 출신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공화당의 전통적인 대외정책과 경제정책을 지지하고 비교적 온건한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당원의 비중이 감소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청년층에서 공화당 지지가 확산한 배경으로, ‘정치적 올바름’(PC) 운동 반대 기류에 힘입은 트럼프주의 청년단체의 성장을 소개했다.
2024년 10월 21일, 미국 조지아 주립대 캠퍼스에서 열린 행사에서 트럼프주의 청년단체 ‘터닝포인트 USA’의 설립자인 찰리 커크가 연단에 올랐다. 사진은 관계자들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구호가 쓰인 모자를 참가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출처: AFP)
트럼프 2기에 들어,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공고해졌다. 1월 《월스트리트 저널》은 트럼프주의가 ‘정치적 올바름’과의 ‘문화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평가했다. 트럼프의 재선이 확정된 뒤로 메타, 픽사, 코카콜라 등 주요 기관과 기업이 PC 정책을 철회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교육, 직장 등 사회 전반에서 PC에 대한 거부와 트럼프주의 표현이 확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전에는 내셔널 풋볼 리그(NFL) 선수들이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에 연대를 표했다면, 지금은 트럼프의 춤을 따라하며 세리머니를 하고, 8년 전 트럼프의 첫 취임 때와 달리 주류 연예인들이 거리낌 없이 트럼프 취임을 축하하는 행사에 출연하며, 유튜브, 틱톡 등 SNS에서 기업들과 인플루언서들이 트럼프주의 내용을 담은 컨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PC를 주도했던 대학 캠퍼스들에서도 변화가 관찰된다. 한 애리조나주립대 학생의 인터뷰에 따르면 “캠퍼스를 걸을 때마다 MAGA 모자를 쓴 학생들을 본다, 예전에는 없던 현상”이며, “보수주의가 대중문화와 깊이 결합하면서 이제는 보수적 성향이 ‘멋지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2) 반자유주의 이념의 대두
트럼프의 첫 등장 당시 화두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였다면, 트럼프 2기를 맞이한 최근에는 전후 미국 정치의 초당적 주류였던 ‘자유주의’라는 합의까지 공격하는 반자유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상징하는 인물이 ‘탈자유주의’(post-liberal) 우파를 자칭하는 J. D. 밴스 부통령이다. 밴스는 부통령 후보로 지명받기 전부터 트럼프주의를 더욱 급진화하여 미국 전체를 재편해야 한다는 ‘신우파’ 운동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트럼프주의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친 극우 인터넷 언론 《브라이트바트 뉴스》의 전 회장이자 트럼프의 첫 대선 캠페인을 이끌었던 스티브 배넌은 밴스를 MAGA 운동의 ‘사도 바울’이라 부르며, 젊고 급진적인 밴스가 트럼프주의를 트럼프 자신(예수)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확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밴스는 ‘신우파’ 경향을 공화당 내에서 확대하려 노력했다. 그는 트럼프주의의 민족주의, 인민주의적 의제에 동조하는 기부자들의 연합인 ‘락브리지 네트워크’를 설립하는 데 참여했고, 우파 인민주의 경향의 청년들이 미 의회와 행정부에서 일할 수 있게 지원하는 ‘아메리칸 모먼트’를 창립했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이 레이건주의에서 트럼프주의로 전환하는 것을 지지했고, PC와의 문화전쟁에 앞장서는 클레어몬트 연구소 행사나 신우파 공화당원, 학자들의 모임인 ‘전국 보수주의 회의’에 자주 참여했다. 미국 학계에서 반자유주의 세력의 대표적인 논자인 노터데임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패트릭 드닌의 2023년 저서 『체제 전환: 탈자유주의적 미래를 향하여』 출판 기념회에 참가한 밴스는 의회에서 자신의 역할도 체제를 바꾸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책은 민주당과 공화당 기성세력의 자유주의적 컨센서스를 깨고 미국의 ‘탈자유주의적 체제 전환’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밴스, 드닌과 같은 이들은 경제적 탈자유화와 전통적 가족의 가치 강화, 반이민 정책을 통해 미국을 가부장적인 백인 기독교 국가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현대 자유주의가 개인주의라는 미명 하에 전통적인 규범을 무너뜨리고 무절제한 방종과 사적 이익의 추구를 허용한 탓에, 사회가 파편화되고 불평등이 급증하여 미국인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본다. 또한 현대 자유주의는 미국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중국의 WTO 가입 지원, 이라크 전쟁과 같이 지배계급만 배불리고 평범한 미국인에게는 부담만 안기는 대외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요컨대, 그들은 오늘날 미국의 문제는 자유주의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이고, 따라서 좌우를 막론하여 자유주의 지배계급을 축출하고 자유주의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이들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능력주의로 인해 소외되어 온 백인 노동자, 청년층의 정신적 지주를 복원하여 미국 사회의 혼란을 해결해야 하며, 그 길은 종교, 가족, 전통적 성역할에 기초한 공동체 복원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밴스는 무과실 이혼 금지, 자녀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중과세, 아이를 낳은 가정에 투표권 가중 부여와 같은 정책을 주장해왔다. 이들이 보기에, 자녀수에 따라 보조금을 지급하고 동성 결혼은 헌법으로 금지하면서 사회 전반의 자유주의 제도를 파괴한 것으로 악명 높은 헝가리의 오르반 정부는 “현대 자유주의에 맞서는 저항의 롤 모델”이다.
미국 반자유주의 세력은 구체 정책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반자유주의’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중국과 러시아의 권위주의, 유럽 내 극우와 이념적 친화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듯 밴스 부통령은 러시아나 유럽 내 극우와 비슷한 논지로 ‘유럽의 가치’를 공개 비난했는데, 이러한 류의 발언도 그러한 친화성을 드러내는 계기였다. 슬로베니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현재의 상황을 두고, 트럼프와 푸틴, 브렉시트를 강하게 주장했던 영국의 나이젤 패라지, 독일의 극우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당(AfD), 헝가리의 오르반, 서안지구 시오니스트와 중국의 “애국적” 공산주의자들이 ‘유럽’이 상징하는 가치, 바로 국경을 넘나드는 통합과 피해자와의 연대라는 계몽주의 신조에 반대하는 동맹을 맺은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민족, 종교, 국가로 상징되는 공동체의 복원을 강조하며 시민 개인의 자유를 여기에 복속시키고, 기존 엘리트를 공격하는 대신 노동자층에게 직접 호소하며 이들을 민족 공동체에 충성하는 일원으로 호명한 것은 바로 20세기 파시즘의 특징이었다. 이는 미국 ‘신우파’ 운동이 지금보다 더욱 위험한 형태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움직임이 다름 아닌 미국 정치의 핵심부에서 일어나는 중이다.
3) 조직노동자의 동요
반자유주의 ‘신우파’ 운동의 위험성이 과연 폭발할 것이냐 여부는, 이들의 호소에 미국 노동자가 응답할 것이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트럼프 지지층을 포함하더라도, 아직 이들의 급진적인 주장을 미국 노동자들이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2024년 대선 전후로 미국의 몇몇 대표적인 노동조합의 행보를 보면, 이미 2016년 대선부터 트럼프에게로 돌아선 기층 노동자들만 아니라, 조직된 노동운동도 점차 민주당과의 오랜 연대를 벗어나 (밴스 식의 급진화된 트럼프주의는 아니더라도) 트럼프주의와 가까워지고 있다.
2024년 대선 당시, 조합원 130만 명의 미국 최대 운수노조 ‘팀스터스’는 1996년 이래 최초로 민주당 대선 후보를 공식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팀스터스가 조합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60%, 해리스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34%로 나왔다. 또한, 같은 해 7월 션 오브라이언 팀스터스 위원장이 주요 노동운동 인사로서 사상 처음으로 공화당 전당대회 무대에 발언자로 오르기도 했다. 팀스터스를 제외한 주요 노조들이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음에도, 팀스터스의 변화는 세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번 3월 4일, 미국 최대의 자동차 산업 노조인 전미자동차노조(UAW)가 트럼프의 관세정책을 환영하며 낸 성명도 많은 논란을 낳았다. 성명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40년 동안 소위 ‘자유무역’이 노동자계급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을 보았다. 관세는 반(反)노동자적 무역협정의 불의를 해소하는 강력한 도구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에 폭탄처럼 떨어진 자유무역이란 재앙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 공격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기쁘다.” 트럼프주의의 논리와 표현을 정확히 반영한 문장들이다. 성명은 새 관세정책의 부작용에 관한 우려에 대해서도 “관세가 경제를 ‘교란’한다는 말이 많다. 그러나 기업이 가격을 부당하게 인상하여 미국 소비자에게 부담을 떠넘기거나 미국 노동자를 공격하기를 택한다면, 비난받아야 할 것은 기업이다”라며 관세정책을 옹호했다.
미국 노동조합의 이러한 변화에는, 밴스와 같은 반자유주의자들이 기여한 측면도 있다. 트럼프는 저소득 노동자층에게 지지를 호소하면서도, 선명하게 친노조, 반기업 성향을 표방하지 않았다. 그는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을 해고한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를 옹호하고, 1기 첫해인 2017년에만 대기업·부자를 대상으로 2조 달러나 세금을 중려주는 정책을 택했다. 반면, 밴스와 같은 젊은 트럼프주의 정치인들은 훨씬 적극적으로 기업을 공격하고 노조를 옹호하는 행보를 취하며 노조에 접근해왔다. 이들은 2023년 전미자동차노조(UAW)의 파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2024년 팀스터스 위원장의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을 성사시켰다.
밴스는 철도산업의 안전 기준을 높이는 법, 대형 파산 은행의 임원들이 받은 보상을 회수하는 법 등 진보적 사회운동의 요구와 가까운 법들을 발의하기도 했다. 트럼프의 2017년 감세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러한 정책들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공화당 내 친기업 기조와 싸우는 것이 먼저임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내 장기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10년 뒤에는 미국 제조업을 지지하지 않는 공화당원을 찾아보기 매우 힘들어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4. 무너지는 세계 속, 사회운동의 역할은 무엇인가?
미국마저 수정주의 세력이 되었다는 평가는, 민주주의와 규칙에 기반을 둔 전후 국제질서를 유실하지 않으면서 대안을 찾기 위한 노력이 더욱 긴요해졌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러나 2월 24일 UN 안보리 표결에서 상임이사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반대를 던져 미국이 발의한 결의안 채택을 무산시킬 수도 있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완전히 잃지 않도록 회유하기 위해 기권을 선택했고, 한국은 “북한 문제에 관련해서 한미 간 긴밀한 공조의 중요성도 고려하여” 찬성했다고 밝혔듯이, 각국이 여전히 초강대국으로서 세계에 큰 영향력을 가진 ‘수정주의’ 미국의 뜻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트럼프의 미국이 내놓는 제안을 무조건 수용하고 따라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를 배제한 새로운 틀을 만들기도 어려운 딜레마가 오래도록 계속될 것이다.
나아가, 지난해와 올해 세계 각국의 선거 결과와 정치 상황이 보여주듯, 장기 저성장과 정치 대립 속에서 각국 시민의 불만과 분노가 인민주의 세력의 약진이나 심각한 정치 불안정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각국이 협력을 통해 국제질서의 복원을 시도하는 대신 각자도생의 굴레에 빠지게 하거나, 한국의 상황이 그러하듯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하는 정치적 합의 자체를 봉쇄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개시되고 국제질서의 격변이 예고된 2022년 당시, 우리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몰락하는 반면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도, 러시아 혁명과 같은 대안도 나타나지 않은 현 상황은 사회운동이 대안적 이념과 운동을 건설하지 못하면 ‘투쟁하는 두 계급의 공멸’로 향할 수 있는 정세라고 진단했다. 진정한 대안은 현존 국제질서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그러한 대안의 모색은 민주주의와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를 완전히 유실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트럼프의 미국이 전후 국제질서를 다방면으로 공격하는 지금, 이러한 과제는 더욱 긴급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