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계엄·탄핵 정세 평가
계엄·탄핵을 거치며 어째서 정치양극화는 더욱 격화되었는가
필자는 《계간 사회진보연대》 지난 겨울호에 실린 「사법의 시간, 그렇다면 정치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17~18년 왜 개헌에 실패했는가 되돌아보아야 한다」에서 어떻게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같은 극단적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나, 이런 사태가 재연되는 일을 막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를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는 차분히 기록을 남긴다는 의도로 2024년의 정치정세 전반을 되돌아보는 글을 쓰고자 한다. 2024년 한국정치의 흐름을 △ 4·10 총선까지 △ 총선 이후 비상계엄 이전까지 △ 비상계엄 이후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 번째, 4·10 총선까지 시기에서는 윤 대통령의 불통과 독선, 즉 소통과 협치의 결여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하고, 그 결과 여당의 총선참패로 이어졌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두 번째, 총선 이후 비상계엄 이전까지는 ‘정치내전’이라는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여야대결이 극단화되고, 대통령과 의회의 충돌, 즉 헌법기관 간 충돌이란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저강도이지만 만성적인 헌정위기라 칭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비상계엄을 수습하는 과정이 곧 이러한 만성적 헌정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 되어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비상계엄 이후 상황에서는 어떻게 이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나를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그와 동시에, 비상계엄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여야 정치세력이 보인 과오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어째서 윤 대통령 탄핵소추와 형사기소 이후에도 ‘정치내전’ 상황이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더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밝히고,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한다. 12월 14일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상황은 간단히만 다뤘는데, 다음 기관지 글에서 자세한 분석과 평가를 제시하겠다고 약속한다.
1. 2024년 4·10 총선까지
2024년 정국은 1월 2일 이재명 대표 피습사건, 1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의 ‘김건희 특검’과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에 대한 거부권 행사로 시작되었다. 전자는 정치양극화가 언제라도 ‘정치폭력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후자는 2025년에도 국회 다수당과 대통령 사이에 악무한적 대립이 이어질 것임을 예고했다.
한편, 2023년 12월 27일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가 탈당한 데 이어, 2024년 1월 11일 이낙연 민주당 전 대표가 탈당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당에서 당 대표를 하던 인사가 거의 동시에 탈당하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는 정치양극화를 이끄는 양쪽의 축 내에서 ‘단극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각 당 내부에서 소수파가 도무지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냐는 우려를 낳았다. 이때부터 4·10 총선까지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1) 여권: 대통령과 당의 갈등 (이른바 윤한 갈등)
2023년 12월 21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사임하고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한 위원장을 두고, 한편에서는 대통령의 최측근 출신이기 때문에 대통령과 당의 수직적 관계가 강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히려 대통령과 당 사이의 대화와 소통이 원활해질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1월 21일 이관섭 비서실장이 한 위원장을 직접 만나 사퇴하라는 윤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한 위원장은 이에 대해 “국민 보고 나선 길, 할 일을 하겠다”라고 응답하는 일이 발생했다. 윤 대통령이 취임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이준석·김기현 대표에 이어 세 번째로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물러나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으나, 갈등의 매개가 되었던 김경률 씨가 출마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 ‘윤한 갈등’은 어쨌든 봉합되는 듯 보였다.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의 공천 과정은 ‘비명횡사’로 논란이 컸던 민주당의 공천 과정에 비해 조용했다. 현역 의원 대부분이 단수공천을 받거나 경선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40대 이하의 비율은 13%, 여성의 비율은 10% 미만으로 나타나 구태의연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여권의 논란은 공천보다는 대통령과 당 사이의 갈등으로 드러났다. 윤 대통령은 해병대원 사망 사건에 대한 수사에 외압을 가했다는 혐의로 공수처의 수사를 받던 이종섭 전 국방장관을 호주대사로 임명해 출국시켰다. 여당은 출국은 안 된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대통령은 이를 무시했다. 또한, 여당은 ‘회칼테러’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황상무 수석을 물러나게 하라고 요구했지만, 대통령은 이 역시도 거부했다. 이에 대통령실 내부에서조차, 대통령이 여론이 가리키는 방향과 반대로 가려고 고집을 부리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한편, 총선을 불과 열흘 앞둔 4월 1일, 윤 대통령은 ‘의대 정원 2천 명 증원’ 문제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의료계가 통일된 안을 제안하면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 4월 4일 대한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과 면담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2) 민주당: ‘비명횡사’ 파장
2024년 2월 3일, 민주당은 다가올 4월 총선에 적용될 선거제도, 즉 ‘비례대표 선출방식’ 결정권을 이재명 대표에게 일임했다. 즉 이 대표가 결정하면 의원총회나 당원투표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를 두고 현대적인 정당이 대표에게 결정권을 일임한다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이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 준연동형 유지, 즉 비례위성정당 유지와 △ 권역별 병립형을 두고 입장이 엇갈렸다. 전자는 준연동형을 유지하되 비례위성정당을 방지하겠다는 이재명 대표의 대선 공약과 충돌한다는 문제가 있었고, 후자는 권역별로 적어도 7% 이상은 얻어야 당선자 배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소수정당의 진입이 더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2월 5일, 이 대표는 “준연동제의 취지를 살리는 통합형 비례정당을 준비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대표의 발표 후, 비례위성정당 창당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진보당, 새진보연합, 연합정치시민회의가 참여한 가운데, 2월 16일에는 민주개혁진보연합 창당발기인대회가 열렸고, 3월 3일에는 ‘더불어민주연합’ 창당대회가 열렸다.
한편 2월 20일, 민주당은 의원평가에서 하위 20%에 속해 공천심사 때 감점을 받을 의원들에게 통보를 시작했는데, 전체 31명 중 28명이 비명계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로써 ‘친명횡재, 비명횡사’라는 표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윤영찬·박용진 의원은 자신이 하위 10%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고, 김영주 국회부의장은 하위 20% 통보를 받고 탈당했다. 임종석 전 의원과 홍영표 의원은 경선 기회도 얻지 못했다.
3) 조국혁신당의 급부상: 정의당을 대체하는 비례정당 선언
2024년 2월 13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창당을 선언했다. 그는 하루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났는데, 문 전 대통령은 “신당을 창당하는 불가피성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조국 전 장관은 2월 19일에는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해, 민주당이 직접 말하기 쉽지 않은 윤 정권 조기종식, 곧 탄핵을 주도하겠다고 선언했다. 김어준 씨도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국혁신당의 지지율 급상승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어준 씨의 직간접적인 지지 표명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조국 전 장관은 ‘의석수로든 정치적 지향성으로든 녹색정의당을 대체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민주당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하는 세력으로서) 새진보연합에 합류한 열린민주당의 김상균 씨도 “비호감도 1위의 ‘교조주의 정당’ 정의당을 이제는 ‘상식적인 시민정당’ 열린민주당이 대체하겠다고 감히 말씀드린다”고 말한 바 있다. 조국혁신당이나 열린민주당이나 2010년대 한때 통용되던 ‘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정의당’이라는 공식을 이제는 확실히 깨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정의당 역시 ‘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정의당’이라는 공식에 안주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이제는 더이상 내주지 않겠다는 더 확실한 친민주당 세력이 나타나자, 정의당은 어디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냐는 문제에 직면했다.
4) 총선 결과, 분석과 평가: 대의제의 작동원리와 충돌하는 윤 대통령의 불통과 독선
총선 결과는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민주연합이 175석(지역구 161석, 비례 14석), 국민의힘과 국민의미래가 108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으로 나타났다. 이는 여권 참패, 야권 대승, 이른바 ‘제3지대’의 초라한 성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총선 몇 개월 전부터 윤석열 대통령의 집무 수행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보다 20%p가량 높게 나타났고, 부정평가가 긍정평가의 두 배가 넘는 때도 있었다. 응답자가 꼽은 첫 번째 이유는 “경제·민생·물가”였고, 두 번째 이유는 “독단적·일방적” “소통 미흡”이었다. 달리 말하면, 우선 코로나19 위기 이후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경기 부진이라는 배경이 강하게 깔린 상황이라 여권이 불리했다. (사실 최근 중심부 국가에서 집권 정당이 인플레이션과 경기 부진이라는 벽을 넘어 재집권에 안착한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거기에다가, 김건희 여사 관련 각종 의혹이나 해병대원 사망 사건 수사에 대한 외압 의혹을 둘러싸고 대통령이 보이는 태도, 이준석-김기현-한동훈으로 이어지는 당 지도부와의 반복된 갈등이 결국 정부에 대한 ‘응징투표’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불통과 독선, 즉 소통과 협치의 결여는 단지 정치인 개인의 ‘정치스타일’ 문제를 넘어 대의제의 작동원리와 충돌하는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불통이란 공직자가 여론과의 상호작용을 회피하고 설명책임(accountability)을 성실히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었다. 독선이란 정당정치와 의회정치가 성립하기 위한 사활적 조건으로서 중용과 타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여당 내부에 대해서조차 여러 세력 간 중용과 타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총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총선 이후 윤 대통령이 보이는 행보가 여전히 우려스럽고 위태로워 보인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총선 참패 직후 윤 대통령이나 여당, 검찰이 어쨌든 간에 얼마간 변화를 보인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국민의 의혹과 불신을 해소하기 어려운 행동을 이어가거나(채 상병 특검 거부와 무대책, 총선백서특위의 내부 갈등), 변화를 스스로 뒤집는 듯 보이는 조치를 취하거나(민정수석실 복원, 검찰총장을 ‘패싱’한 검찰인사), 의도나 메시지를 알 수 없는 결정을 내리는 일(박근혜 대통령 당시 ‘문고리’로 언급되던 정호성 씨 발탁, 연금개혁 불발)이 연거푸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이미 총선 시기에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던 채 상병 사망 사건이나 김건희 여사 사건, 아니면 제3의 어떤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서 정국을 폭발시키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민주당은 ‘공천을 두고 파열음이 컸던 정당은 결코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는 경험칙을 깨고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이재명 대표가 주도하는 포퓰리즘의 위험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 민주당의 ‘민생회복지원금’ 제안, △ 이재명 대표의 ‘쎄세’ 발언(“중국에도 쎄쎄, 대만에도 쎄쎄 하면 되지”) △ 이화영 씨 사건 관련 검사 고발은 반(反)경제학, 외교사안의 정치화, 법치주의 파괴(사법방해)라는 포퓰리즘의 특징적 위험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2. 4·10 총선 이후, 12·3 계엄 전까지
총선 직후인 4월 29일,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간에 처음으로 ‘영수회담’이 열렸다. 5월 2일에는 여야합의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이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는 영수회담에서 다뤘던 사안이었는데, 김수경 대통령실 대변인은 “협치와 정치의 복원이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22대 국회 개원을 전후해 여야 간 대결이 재개되었다.
예컨대, 6월 5일 22대 국회 첫 본회의에 국민의힘이 불참했다. 국회 사상 최초의 야당 단독개원이었다. 핵심 쟁점은 법사위 위원장을 누가 맡느냐였다. 6월 10일, 민주당은 본회의를 열어 정청래 의원을 법사위원장으로, 박찬대 원내대표를 운영위원장으로 선출하면서 단독으로 11개 상임위원장을 뽑았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이 협상을 계속 거부하면 나머지 7개 위원장도 단독으로 선출하겠다고 압박했다.
총선 이후 정치 이슈는 김건희 여사로 시작해서 김건희 여사로 끝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선 전부터 이어진 도이치모터스 건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2024년의 이슈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명품 가방 수수 (2023년 11월 영상공개~2014년 6월 10일 국민권익위 사건종결~2024년 8월 8일 권익위 부패방지국장 자결~2024년 10월 검찰의 불기소 결정) △ 국민의힘 전당대회, 김건희-한동훈 문자 논란 (2024년 7월 언론보도) △ 명태균 씨 관련 의혹 (2024년 9월 언론보도) △ 김대남 씨 녹취록 (2024년 9월 언론보도)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모든 국민이 김건희 여사 관련 뉴스를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들어야 했다. 이러한 김건희 여사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비대위원장·당대표 간에 벌어진 갈등(이른바 윤한갈등)의 핵심소재가 되었다. 김건희 여사 문제는 가히 총선 이후 정국의 블랙홀이었다.
1) 국민의힘: 김건희 여사 이슈와 윤한갈등
(1) 전당대회와 ‘김건희-한동훈 문자 논란’
국민의힘은 총선 이후 6월 24일 후보등록에서 시작해 7월 23일 전당대회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당대표·최고의원·청년최고의원을 선출했다. 당대표 후보로는 나경원 의원, 원희룡 전 의원, 윤상현 의원,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출마했다.
그런데 본격적인 합동연설회가 시작되기 전인 7월 4일, 이른바 ‘김건희-한동훈 문자 논란’이 터져 나왔다. 총선 전인 2024년 1월 당시, 명품 가방 수수 문제를 두고 김건희 여사가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대국민사과를 할 의사가 있으니 검토해달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으나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는 게 요지였다. 문자를 주고받은 시점은 1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오기 전이었는데, 전당대회 과정에서 마치 1월의 윤한 갈등이 재연되는 듯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보면, 한동훈 62.%, 원희룡 18.%, 나경원 14.%, 윤상현 3.%로 한동훈 후보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는 총선 패배의 책임이 한동훈 비대위원장보다는 윤 대통령과 김 여사에게 있다는 인식이 국민의힘 당원 내에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림] 국민의힘 합동연설회 폭력사태
2024년 7월 15일 국민의힘 대전·세종·충북·충남 합동연설회에서 한동훈 후보와 원희룡 후보 지지자 간 몸싸움이 벌어졌다. 한 후보가 연설을 할 때 원 후보 측 지지자들이 ‘배신자’를 반복해 외쳤고, 이에 한 후보 지지자들이 항의하며 충돌했다. 한 당 내에서 상대방 후보에 ‘배신자’ 프레임을 씌우고, 연설을 방해하고, 폭력을 촉발하는 행위는 어쩌면 우리가 앞으로 자주 볼 풍경이 될 수도 있다. (사진출처: 《경향신문》)
(2) 전당대회 이후 윤한 갈등
윤 대통령과 한 대표를 비롯한 국힘 지도부의 만찬이 8월 30일로 잡혀 있었으나, 직전에 이를 추석 이후로 연기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한 대표 측은 의정갈등 해소를 위해 이듬해 증원을 유예하자는 안을 제시했으나, 대통령실이 이를 거부한 게 기화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0월 21일에야 한동훈 대표는 (정진석 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과 면담했다. 한 대표는 “개혁 추진 동력을 위해서라도 부담되는 이슈들을 선제적으로 해소할 필요가 있다”며, 김건희 여사의 활동 중단, 대통령실 인적 쇄신, 각종 의혹 설명과 해소를 요구하고 특별감찰관 임명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이미 자제하고 있다”거나 “확인된 잘못이 없지 않느냐”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졌다.
(3) 명태균 사건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대한 기소 여부를 검토할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9월 5일, 《뉴스토마토》는 김건희 여사가 2024년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 공천 과정에 관여했다는 보도를 냈다. 5선 중진이었던 김영선 의원에게 지역구를 옮겨서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9월 19일에는 2022년 6월 재보궐선거 때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경남 창원시 의창구에서 김영선 전 의원이 공천을 받도록 개입했다는 추가 보도를 냈다. 이를 계기로 명태균 사태, 이른바 ‘명태균 게이트’가 터져 나왔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은 이제 윤석열 대통령 본인에게까지 옮겨갔다.
10월 31일, 민주당은 2022년 5월 9일 윤석열 대통령과 명태균 씨 사이의 통화녹취를 공개했다. 이 당시 윤 당선자는 명태균 씨에게 “공관위에서 (공천 명단을) 나한테 들고 왔길래 내가 ‘김영선(전 국민의힘 의원)이 경선 때부터 열심히 뛰었으니까 그거(공천)는 김영선이를 좀 해줘라’ 그랬는데 말이 많네 당에서”라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비상계엄 선포라는 엄청난 사건에 밀려 오히려 명태균 씨 관련 사건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 듯 보이지만, 어쨌든 당시 제기된 의혹은 다음과 같다. (윤 대통령과 김 여사 외에도 여러 여권 인사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가히 폭발적 이슈로 등장한 ‘명태균 녹취록’은 대통령 부부에 대한 누적된 불신에 불을 붙였다. 11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19%로 나와, 취임 30개월 만에 10%대로 추락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특히나 대구경북 지역의 지지율도 서울보다 낮은 18%로 나와 충격을 주었다. 1987년 직선제 도입 후, 대통령 취임 3년차에 10%대 지지율이 나온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34년 만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덧붙여, 대통령 지지율은 추락했지만 국민의힘 지지율은 30%대로 2주 연속 상승하여,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따로 움직이는 디커플링 현상도 나타났다.
2)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사당화
(1) 우원식 의원의 국회의장 당선 파장
5월 16일 국회 회의장에서는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 선출을 위한 민주당 내부 경선이 진행됐다. 우원식 후보는 추미애 후보를 89표 대 80표로 이겼다. 사실 ‘명심’은 추미애 후보 쪽이라는 게 다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는 예상을 깨는 결과였다.
그러자 정청래 최고위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상처받은 당원과 지지자들께 미안하며 당원과 지지자 분들을 위로한다”라고 썼다. 강성 당원들도 격렬한 의사표시에 나섰는데, 당원 게시판에는 “민주당 안에 잔존 수박(비이재명계)이 많다는 증거”라거나, “탈당하고 조국혁신당에 입당하겠다”며 탈당 신청서를 인증하는 게시글도 올라왔다. ‘재명이네 마을’에 올라온 글도 “민평련과 친문, 586 등 계파 문제가 많다. 이들을 색출해야 한다”고 했다.

[그림] 우원식 의원 국회의장 후보 당선 후 정청래 의원이 SNS에 올린 글(왼쪽)과
이재명 대표 지지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재명이네 마을’에 올라온 글(오른쪽)
5월 22~23일 민주당 당선자 워크숍에서는 김민석 의원이 지금까지 의원들이 뽑아온 원내대표나 국회의장 후보 선거에 당원 표심을 10% 반영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장경태 의원과 양문석 당선자는 각각 20%, 50%까지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민주당이 “팬덤 당원” 내지는 “지배하려는 당원”에게 점점 더 휘둘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5월 26일 《매일경제》에 따르면, “학계에서는 2022~2023년 사이 급증한 당원들을 ‘지배하려는 당원’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지도부 선거 전반은 물론 의원들의 일상 활동까지 직접 관여하고 통제하려는 팬덤 당원들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국회미래연구원은 「만들어진 당원:우리는 어떻게 1천만 당원을 가진 나라가 되었나」라는 보고서에서, 이들에 대해 ‘당원 중심주의를 내세우며 당의 대의체계를 없애고 당 대표와 당원의 직접 소통을 원한다’며 ‘경쟁하는 정당은 물론, 의견이 다른 당직자, 의원, 동료 당원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며 정치 양극화를 빠르게 심화시킨다’고 평가했다. 이런 연장선에서 민주당 당원들이 당내 의사결정 전반을 주도하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한 문제가 꾸준히 제기된다.” (국회미래연구원 보고서는 『청와대 정부』, 『혐오하는 민주주의』를 쓴 박상훈 씨가 주도해서 작성되었다.)
(2) 민주당 당헌, 당규 개정
5월 30일, 22대 국회임기가 시작된 날에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당헌 당규를 개정하기로 했다. △ 당 대표와 최고의원이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선 1년 전에 당직에서 사퇴해야 하는데, 당무위원회 의결로 그 시기를 늦출 수 있게 하고 △ 부정부패 연루자에 대한 직무정지 규정을 없앤다는 게 요지였다. 이는 이재명 대표의 연임을 위한 포석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또한, △ 당론 위반자에 대한 공천 부적격 기준을 강화하고, △ 국회의장단과 원대대표 선출 때 권리당원의 의사를 유효투표의 20%만큼 반영하는 방안도 담겼다. 이는 이재명 대표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의원이 공천에서 불이익을 받도록 하며, 이 대표 강성 지지층이 원내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보장한다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안은 6월 12일 당무위원회를 거쳐, 6월 17일 중앙위원회 의결을 통해 확정되었다. 중앙위원 559명 중 501명이 참여했고(89.%), 찬성이 422명으로 84.%의 찬성률로 가결되었다.
(3) 민주당 전국당원대회와 이재명 대표 연임
민주당은 당 대표와 다섯 명의 최고의원을 뽑는 8월 18일 전국당원대회를 앞두고, 7월부터 합동연설회와 시도당원대회를 시작했다. 당 대표 선거에는 이재명, 김두관, 김지수 세 후보가 출마했다. 김두관 후보는 선거운동 중 더민주전국혁신회의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8월 4일 서한에서는 “현재 우리 당의 운명은 ‘더민주전국혁신회의’가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강성 원외 인사들의 조직이었던 혁신회의가 당내 최대 계파가 된 계기는 공천”이고 “친명횡재 비명횡사가 나온 이유”라고 말했다. 8월 12일 기자회견에서는 ‘개혁의 딸’과 결별하고 ‘더민주전국혁신회의’를 해산할 것을 촉구했고, △ 권리당원 당 교육·연수 필수 이수 △ 중앙당 권한 대폭 축소, 시·도당 중심의 당으로 전환 △ 대의원제도 강화를 민주당 혁신과제로 제안했다.
하지만 당대표 선거결과는 김두관 후보가 스스로 예상했듯이, 이재명 후보의 압승이었다. 이재명 후보는 종합득표율 85.4%로, 12.1%를 얻은 2위 김두관 후보를 압도적 차이로 눌렀다. 최고의원으로는 김민석, 전현희, 한준호, 김병주, 이언주 등 다섯 명이 당선되었는데, 모두 강성 친명 일색이었다.
(4) 22대 국회에서 민주당의 행보: 이재명 대표 방탄, 연이은 탄핵 시도, 김건희 특검법
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 22대 국회에서 가장 주력한 일은 무엇이었나. 첫째는 이재명 대표 ‘방탄’이었다. 6월 3일에는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을 맡은 검사를 수사하겠다며 특검법을 발의했다. 6월 12일에는 수사기관의 위증 강요를 처벌하는 ‘수사기관 무고죄’를 신설하겠다고도 했다. 7월 2일에는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과 대장동·백현동 사건을 수사한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안도 당론으로 발의했다. 이재명 대표를 수사한 검찰을 압박하기 위한 전방위적 공세의 일환이었다.
둘째, 민주당은 탄핵소추를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했다. 6월 27일 민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당론으로 채택하였고, 7월 4일 임시국회 종료 전에 탄핵안을 통과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김홍일 방통위원장은 7월 2일 자진 사퇴했다. 7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이 신임 방통위원장으로 이진숙 씨를 지명하자, 민주당은 곧바로 탄핵 의사를 밝혔다.
셋째, 김건희 특검법이었다. 이미 2023~4년 21대 국회에서도 본회의 가결 → 대통령 거부권 행사 → 국회재의결 부결이라는 사이클이 있었다. 22대 국회에서는 9월부터 10월까지 두 번째 사이클이 있었고, 또다시 11월부터 세 번째로 본회의 가결과 대통령 거부권 행사가 이어졌다. 이는 비상계엄 사태 이후로도 계속 반복되었는데, 12월 7일 국회 재의결 부결이 이어졌다. 이후 12월 14일 네 번째 본회의 가결, 12월 31일 최상목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 1월 8일 국회 재의결 부결이 있었다.
(5) 이재명 대표의 허위사실 유포, 위증교사 1심 판결과 장외집회
민주당은 10월 31일, 윤석열 대통령과 명태균 씨의 통화녹취를 공개한 데 이어, 11월 2일에 첫 번째 장외집회로 ‘김건희 윤석열 국정농단 규탄·특검 촉구 국민행동의 날’을 열었다. 지도부는 원내 의원들과 원외지역위원장을 대상으로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날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30만 명, 경찰 추산 1만 7천 명이 참가했다.
이 와중에 11월 15일, 법원은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에서 금고 이상의 형이나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이 나오면 의원직을 상실하고 대선 출마도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대선 때 보전받은 선거비용 434억 원을 반납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된 순간이었다.
선고 다음 날인 11월 16일(토), 민주당은 ‘국민행동의 날’ 3차 집회를 열고, ‘거부권을 거부하는 전국비상행동’이 주최하는 집회, ‘윤석열을 거부한다 시민행진’에 합류했다. 이날 집회에서 이재명 대표는 “이재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외쳤고, 최민희 의원은 집회 후 언론 인터뷰에서 당내 비명계에 대해 “움직이면 제가 당원과 함께 죽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민주당과 전국비상행동이 합류한 집회의 참석인원은 주최 측 추산 10만 명, 경찰 측 추산 2만 5천 명이었다.
한편, 11월 25일 법원은 위증교사 1심에서 이재명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위증 혐의로 함께 기소된 김진성 씨는 일부 유죄가 인정돼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재명 대표의 위증교사 1심 무죄를 두고, 한국갤럽이 11월 26∼28일에 실시해 29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무죄가 ‘잘된 판결’이라는 응답은 41%, ‘잘못된 판결’이라는 반응은 39%로 나타났다. 나머지 20%는 의견을 유보했다. 지난 11월 15일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 1심 선고 유죄 판결에 대한 갤럽 여론조사 결과도 ‘정당한 판결’ 43%, ‘부당한 정치 탄압’ 42%로 팽팽하게 갈린 바 있다. 이는 이재명 대표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긍정적 여론이 대략 40 대 40으로 팽팽하게 맞서고, 나머지 20이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과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집회는 시간이 지나도 힘이 실리지 않았다. 11월 30일(토) 민주당 주최 5차 국민행동의 날과 전국비상행동 주최 3차 시민행진에는 주최 측 추산 10만 명, 경찰 추산 1만 명이 참석했다. 민주당은 장외집회를 정리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선거법 위반과 위증교사 혐의에 관한 재판에서 이 대표 측을 지지하는 여론이 대략 40%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집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위력이 감소하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 이 대표를 지지하는 수준의 ‘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거나 옅어진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3) ‘비상계엄 전야’, 11월 국면
명태균 씨 관련 사건으로 윤 대통령 지지율이 끝없이 추락하자 여권의 위기의식도 매우 커졌다. 국민의힘 시·도지사 협의회는 11월 3일 입장문을 내고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적극적인 국민과 소통 및 국정쇄신”을, 한동훈 대표에게는 “당정일체와 당의 단합”을 요구했다.
11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연이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저와 아내의 처신이 올바르지 못해”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여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윤 대통령 국정지지율에 관한 한국갤럽 11월 15일자 조사결과는 20%로 나와 아주 조금 반등했는데, 여기에는 특히 18%까지 떨어졌던 대구경북이 37%로 오른 게 영향을 미쳤다. 이를 해석하면, 기자회견은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더 떨어지는 상황을 막은 정도였다. 즉 윤 대통령에 대한 여론의 신뢰도가 어떤 임계점을 통과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전에는 쉽게 되돌리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은 11월 1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임기 후반기에는 양극화를 타개하기 위한 전향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밝히고, 22일 조찬기도회에서도 ‘신 중산층 시대의 개막’을 내세웠다. 이를 두고 윤 대통령이 추구하는 국면 전환 방식이 이명박 전 대통령 때와 판박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기 2년차 중반에 ‘서민층을 따듯하게, 중산층을 두텁게’, ‘친서민·중도실용’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총리 교체도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이명박 대통령이 정운찬 교수를 총리로 임명했던 것을 연상케 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을 겪은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2년차 말에 40% 중반대로 회복했다. 물론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153석, 통합민주당 81석으로, 집권 초에 여소야대 국면이 조기에 끝나, 국회가 대통령의 국정 전환을 지원할 수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11월 14일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는 당론으로 특별감찰관 후보 추천을 진행하기로 했다. 특히 기존과 달라진 부분은 북한인권재단 이사 추천과 연계한다는 입장을 철회한 것이었다. 이로써 2년 반을 끌던 특별감찰관 임명도 실현될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동시에 11월 25일 김민전 최고의원을 비롯해 국힘 내 친윤계는 ‘당원게시판 가족 게시글 의혹’을 제기하며 한동훈 대표를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런 점에서 11월 국면은 1월 초의 반복으로 보이기도 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민생토론회를 연쇄적으로 개최하며 한 대표가 아니라 본인이 총선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김 여사 문제로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종합해보면, 대국민 기자회견과 정책 전환 시도가 진정한 반성에 기초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지난해 초에 시도했던 일을 그저 반복하는 것인지 불확실했다. 어쨌든 이 시점까지도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예를 들어, 비상계엄 직전, 즉 12월 3일 저녁에 올라온 《한겨레》 칼럼 「양극화 해소, ‘쇼’라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을 보면, 진정으로 국정기조 전환을 추진하고자 한다면 야당과의 협치, 상징적 인사의 중용을 검토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한겨레》도 ‘양극화 해소’로의 국정기조 전환을 중심으로 향후 정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민주당은 11월 여러 차례 추진한 장외집회가 기대만큼 성과를 얻지 못한 가운데, 국회에서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11월 29일 민주당은 국회 예결위에서 4.1조 원을 감액한 예산안을 단독 처리했는데, 예결위에서 예산안이 야당 단독으로 통과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르면, 11월 30일까지 예결특위에서 심사를 마치지 못하면 12월 2일 정부원안이 본회의에 자동으로 부의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예산안을 단독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12월 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야당이 단독으로 통과시킨 감액예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정기국회가 끝나는 10일까지 여야가 예산안을 합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사실 야당이 예결위에서 단독 처리를 강행하기는 했으나, 국회의장이 그대로 안건을 상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부분 예상했다. 게다가 야당 의원들도 각자 자기 지역구 예산을 반영하는 게 필요하기도 했다. 즉 예산안에 관한 야당의 태도가 강경하기는 했으나, 협상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또한, 민주당은 감사원장, 서울중앙지검장 등 검사 3인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본회의 보고 절차를 마쳤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민주당은 윤 대통령 탄핵에 집중하겠다면서 감사원장과 검사 탄핵소추안은 보류했으나, 국힘이 윤 대통령 탄핵 반대로 당론을 정하자, 12월 5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3월 13일, 헌법재판소는 만장일치로 이들에 대한 탄핵을 기각했다.)
4) 비상계엄 이전까지 상황에 대한 총괄평가: 민주화 이행의 역풍, 정치양극화와 헌정위기의 만성화
홍콩의 헌법학자 앨버트 첸이 편집한 『21세기 초, 아시아의 헌정주의』(2014)는 아시아 각국의 민주화 사례를 살펴보면서, 얼마나 헌정주의의 발전이 있었는가를 평가한다. 그런데 저자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만큼이나 각 정치세력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게 헌정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에 따르면, 각국에서 민주화가 진전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지배적 정치세력과 이에 도전하는 신흥 정치세력이 격렬한 갈등을 벌이면서, 상대방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강력한 심리가 작동한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가 발생할 수는 있지만, 선거 불복의 정치적 심리가 강하게 움직인다. 패자는 부정선거 문제를 제기하고, 승자는 패자의 정치활동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제약을 가하는 식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야의 교체는 공수의 교체일 뿐이다.
게다가 아시아는 일본을 제외하곤 대통령제를 택하는 국가가 많다. 대통령제 하에서 여소야대 국면이 도래하면,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문화 속에서 적대적인 정치 갈등이 폭발한다. ‘상대방의 실패가 곧 나의 성공’이라는 판단기준에 따라, 야당은 정부를 마비시키기 위해 온갖 시도를 반복하고, 대통령은 이에 비상권한으로 대항하곤 한다. (비상계엄을 전후로 한 한국 사례는 아시아의 여러 사례 중 대표적이고도 극단적인 사례의 하나로 틀림없이 기록될 것이다.)
이는 분명히 저강도이지만 만성적인 헌정위기라 칭할 만하다. 즉 여야 모두 헌법과 법이 허용하는 권한을 행사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정치과정은 사실상 마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헌정의 원리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정치적 결정이 독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방지하여 최선의 답을 찾는 정치적 과정을 보장하는 것이지, 정치세력이나 권력기관이 권한을 남용하여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민주화 이행의 초기라고 할 수 있는 ‘3김 시대 정치’가 막을 내린 이후, 선거불복의 정치문화가 본격적으로 싹을 띄우기 시작했다. 1992~2002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에는 오히려 정치권의 분위기가 이 정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애초 김영삼 씨는 노태우, 김종필 씨와 손을 잡았고, 김대중 씨도 김종필 씨와 손을 잡아 집권에 성공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대통령 당선자인 김대중 씨가 건의하고 현직 대통령인 김영삼 씨가 수용하는 식으로 전두환, 노태우 씨를 사면했고, 김대중 씨는 대통령이 된 후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전두환, 노태우 씨를 여러 차례 청와대에 초청하기도 했다.
또한,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야당 대표 이기택, 김대중 씨와 여러 차례 영수회담이 있었고, 특히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이회창 대표와 일곱 차례 영수회담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대중 씨는 ‘정치보복은 본인 때 끝내겠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즉, 민주화 이후 민간민선정부로 이행하는 초기에, 오히려 정치적 경쟁자를 ‘용납할 수 없는 악’으로 규정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이른바 ‘3김정치’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부터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정당양극화’를 측정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자당이 발의한 안에 대한 찬성률과 타당이 발의한 안에 대한 반대율을 비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당이 발의한 안에 대해서는 100% 찬성하고 타당이 발의한 안에 대해서는 100% 반대할 경우 정당양극화가 극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덧붙여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을 기점으로 한국에서 정당양극화가 뚜렷하게 진척됐다는 분석이 있다. 열린우리당 창당을 기점으로 정치적 세대교체와 함께 △ 386식의 낡고 진부한 역사관 △ 국가의 강제력(초헌법적 수단을 포함하여)에 기초한 개혁이라는 이상, △ 협상을 거부하는 비타협적 정치적 태도를 숭배하는 정치관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완화되기보다는, 오히려 한층 더 강화되었다. 우리는 이를 ‘정치양극화’라 칭했고, 최근에는 가히 ‘정치내전’이라고 부를 지경에 이르러 만성적 헌정위기로 드러나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1987년 이후 8번 중 5번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새 행정부가 출범했다. 그중에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의 경우 정부 발의 법안이 통과된 비율이 각각 18.%, 14.%, 7.%인 반면, 이명박, 윤석열 정부는 각각 2.%, 0%였다.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시점인) 2000년대 후반 이후 보수정당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당 계열이 국회 다수당이었던 경우, 그 비율이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발의 법안 중 통과된 법안 수 |
비율 | 여소야대 여부 | |
---|---|---|---|
노태우 | 2/4 | 50% | |
김영삼 | 18/21 | 85.7% | |
김대중 | 8/43 | 18.6% | 여소야대 |
노무현 | 5/35 | 14.3% | 여소야대 |
이명박 | 1/47 | 2.1% | 여소야대 |
박근혜 | 9/70 | 12.9% | |
문재인 | 12/160 | 7.5% | 여소야대 |
윤석열 | 0/77 | 0% | 여소야대 |
[표] 새 정부 출범 후 6개월간 정부 발의 법안 통과 상황
여기에는 대선과 지방선거, 보궐선거, 총선이 끊이지 않고 열리는 선거제도의 문제도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22년 3월 대선에 이어 곧바로 6월에 지방선거과 보궐선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야 정당 모두 상대방에게 선거 ‘호재’가 될 수 있는 일은 무조건 막고 본다거나 상대방의 행동에 무조건 흠집을 내고 본다는 심리가 작동한다.
또 하나의 단적인 사례는, 지난해 12월 초 야당이 강행처리한 예산안에서 대통령실(비서실, 국가안보실) 특수활동비 82억 원, 검찰의 특정업무경비 506억 원과 특활비 80억 원을 전액 삭감한 일이었다. 민주당은 “예산사용 내역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시민단체의 청와대 예산 공개 요구를 거부했으며, 이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에도 항소하여 시간을 끌면서 결국 관련 자료를 15년간 공개가 불가능한 대통령기록물로 이관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김정숙 여사의 의상비 논란이었다.) 문 정부 시절 2022년 3월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문재인 정부 청와대는 연평균 96억원의 특활비를 편성했는데 이는 역대 정부 최저 수준”이라고 자랑했는데, 민주당은 현 정부의 82억 원 예산을 한 푼도 쓰지 못하게 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셈이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었다. (검찰 예산 삭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만약 앞으로 여야 공수가 바뀌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대방도 똑같은 방법을 활용하고자 하는 강렬한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양극화와 정치내전의 악순환은 한 번 시작하면 끊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요약하면, 비상계엄 이전 정치상황을 (‘3김시대’의 끝과 함께 2000년대에 들어 도리어 점차 강화된) ‘정치양극화와 만성적 헌정위기’라는 틀로 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선거불복의 정치문화와 헌정위기의 만성화가 비상계엄 사태의 배경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비상계엄의 전야 ‘11월 국면’을 회고할 때, 윤 대통령이 멀고 힘들지만 다른 길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여론과 당에서 수다하게 제기된 국정쇄신 요구를 수용하고 새롭게 개혁의제를 설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신을 단숨에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했겠지만, 남은 임기 2년 반이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비상계엄 선포와 같은 극단적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은, 윤 대통령의 정치관이나 기질에 결함이 있었고, 이를 교정해 나가는 정치적 경륜이 없었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이처럼 문제가 있는 정치지도자를 견제할 제도적 방벽이 취약했다는 사실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종합하는 설명 틀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3. 비상계엄 선포 이후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까지
1)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에서 12월 4일 비상계엄 해제까지
12월 3일, 화요일 밤 10시 27분,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는 “지금까지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다고 선언했다. (국회의원이 즉각 모이기 어려운 주말이 아니라 화요일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헌법에 따르면, “계엄을 선포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하며,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즉 국회가 계엄을 해제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동시에 국회의 움직임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10시 46분경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발표한 메시지,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입니다. 국민과 함께 막겠습니다”가 언론에 보도되었고, 우원식 국회의장은 “곧바로 본회의를 소집하겠다”고 밝혔다.
그 후 계엄사령부 포고령 1호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 명의의 포고령은 “2024년 12월 3일 23시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한다며 6개 항을 포고했다. 그중 1항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계엄해제의 권한을 지닌 국회의 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이 계엄에 관한 헌법 규정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5항에서 48시간 내 전공의 본업 복귀를 명한 내용도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11시 4분 서울경찰청 소속 국회경비대는 국회 입구를 봉쇄했고, 11시 50분 헬기가 국회 경내에 접근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12월 4일 0시 7분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을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언론의 모든 관심이 국회에 있었으나, 12월 3일 10시 30분,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방첩사령부 요원들이 특수전사령부와 경찰의 지원을 받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침입했다.

[그림] 방첩사 출동조 단체대화방
김대우 방첩사 수사단장은 12월 4일 0시 38분께 국회로 출동하고 있는 7개의 방첩사 출동조에게 “기존 부여된 구금 인원 전면 취소한다. 모든 팀은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을 체포해 구금시설(수방사)로 이동한다”고 명령했다. 그 무렵 방첩사 수사단 최모 소령은 출동조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을 통해 이런 명령을 전달하며 “포승줄과 수갑을 이용하라”고 지시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국회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 0시 49분 본회의가 열렸고 1시 3분 본회의장에 있던 의원 190명 전원 찬성으로 계엄 해제 요구안이 통과되었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즉각 공고하지 않으면서 불안감이 이어졌다. 계엄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하려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국무회의 개최를 미루는 식으로 계엄상태를 유지하려 할 수도 있고 심지어 2차 계엄을 선포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국회 의결 후 3시간 반이 지난 새벽 4시 27분에야 대통령이 계엄을 해제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고, 곧 국무회의에서 계엄해제안이 의결되었다.
2) 12월 14일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까지
12월 4일(수) 오전 7시에 열린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에서 한동훈 대표는 △ 국무위원 총사퇴 △ 국방장관 즉각 해임 △ 대통령 탈당을 요구했다. 또 “비상계엄 책임자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여기서 책임자는 윤 대통령을 뜻했다. 그렇지만 ‘엄중한 책임’이 무엇인지 정확히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계엄 해제 후 첫 번째 최고위원회에서는 윤 대통령의 거취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은 셈이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 6당은 오후 2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탄핵소추안은 헌법 또는 법률위배의 행위로 △ 위헌·무효인 비상계엄 발령 △ 위헌적 비상계엄령 발령으로 인한 국민주권주의와 헌법수호 책무 위반 등 △ 형법상 내란을 포함했다.
12월 4일 한동훈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과의 면담에서, 윤 대통령은 “정치인을 체포하려 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12월 6일(금) 오전에 열린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에서 한동훈 대표는 “계엄령 선포 당일에 윤석열 대통령이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도록 한 지시한 사실, 정보기관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신뢰할 만한 근거를 통해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덧붙여 “이번 사태에 관여한 군 인사에 대한 인사조치조차 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번 비상계엄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이 재연될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윤 대통령의 조속한 직무집행 정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 대표가 말한 조속한 직무집행 정지가 실행되는 방식은 자진하야이거나 탄핵일 것이므로, 계엄해제 후 여당 대표가 윤 대통령의 거취 문제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이는 한 대표가 상황에 따라 탄핵에 찬성할 수도 있음을 비친 셈이었으므로, 윤 대통령 측에서도 반응이 왔다. 탄핵안 국회 표결을 앞둔 12월 7일(토) 오전, 윤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해서 “계엄선포와 관련하여 법적,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제2의 계엄과 같은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임기를 포함하여 정국 안정 방안은 우리 당에 일임하겠습니다”, “향후 국정운영은 우리 당과 정부가 함께 책임지고 해나가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에 조응하여 국민의힘은 탄핵 표결에 집단적으로 불참했고, 탄핵안은 투표 불성립으로 폐기되었다.
12월 8일(일),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 한덕수 국무총리는 대국민 공동 담화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을 추진하고, ‘여당과 협력해 국가 기능의 안정적 운영’을 도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렇지만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어떻게 대통령 권한을 2선 후퇴시키고 국무총리와 여당 대표가 이를 나눠서 같이 행사하겠단 해괴망측한 공식 발표를 할 수가 있냐. 이것이야말로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또 다른 쿠데타 아니냐”고 강력히 반발했고, 12월 14일 탄핵 표결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2월 9일(월) 국민의힘은 ‘정국안정화 TF’를 구성했고, 12월 10일(화) TF 위원장을 맡은 이양수 의원은 ‘질서 있는 조기퇴진’으로 1안 ‘2월 퇴진, 4월 대선’, 2안 ‘3월 퇴진, 5월 대선’을 제시했다. (임기 단축 개헌을 통한 조기퇴진은 현실적으로 실행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는 퇴진을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재판이 확정된 후 시점으로 미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 내 일각에서는 탄핵의 불확실성(언제 결론이 나올지, 어떤 결론이 나올지)을 고려할 때 2월 퇴진이나 3월 퇴진이면 받을만하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편 12월 10일 이후 윤석열 대통령도 7일 담화에서 밝혔던 약속을 뒤집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자진사퇴하지 않고 탄핵 절차를 통해 끝까지 다퉈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뜻을 여당에 전달했다. 대통령실은 그러면서도 여당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때까지 탄핵안을 계속 부결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상황이 또다시 반전되기 시작했다.
12월 12일(목),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출근했고, 조간신문은 윤 대통령이 조기퇴진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자 한동훈 대표는 “대통령이 조기퇴진 의사가 없음이 확인된 이상 즉각적인 직무정지가 필요합니다. 이제 그 유효한 방식은 하나, 탄핵 절차뿐입니다”고 밝혔다. 반면 윤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권 행사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통치행위입니다”,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습니다”고 선언했다. 또 이날 담화에서 윤 대통령은 “제가 비상계엄이라는 엄중한 결단을 내리기까지 그동안 직접 차마 밝히지 못했던 더 심각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라며 부정선거론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선관위는 헌법기관이고, 사법부 관계자들이 위원으로 있어 영장에 의한 압수수색이나 강제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국방장관에게 선관위 전산시스템을 점검하도록 지시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12월 14일(토)에 진행된 탄핵소추안 표결 결과는 찬성 204명, 반대 85명, 기권 3명, 무효 8명으로 나왔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 후 11일 만에 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되는 결과를 받았다. 여당 국민의힘 의원 중 12명이 찬성했고, 여기에 무효와 기권을 포함해 반대하지 않은 의원은 23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탄핵 표결 직후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친한계’로 불리던 장동혁, 진종오 최고의원이 사퇴한 데 이어, 김재원, 김민전, 인요한 최고위원도 사퇴했다. 국민의힘은 당헌과 당규에 따라 선출직 최고위원 5명 가운데 4명이 사퇴할 경우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되므로, 한동훈 대표 체제가 무너진 것이었다.
3) 어떻게 비상계엄과 같은 극단적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나
필자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같은 극단적 상황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었냐는 문제에 대해, 12월 19일 《사회운동포커스》, 「사법의 시간, 그럼 정치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17~18년 왜 개헌에 실패했는가 되돌아 보아야」에서 다뤘다. (이 글은 지난 겨울호에도 실렸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 본인의 개인적 결함에서 비상계엄 사태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성과 자질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하지만, 이는 왜 우리 사회는 정치인 개개인을 검증하거나, 또는 바람직한 덕성과 자질을 갖추도록 키워내는 정치시스템을 발전시키지 못했느냐는 문제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정당정치, 의회정치의 성숙도가 작용을 한다. 정당정치, 의회정치가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곳일수록 정치의 중심이 정당보다 선거전문가 조직으로 이동하고, 정당은 안전판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최고권력자의 사당(私黨)으로 변질된다.
또한 우리의 정치시스템은 특정 개인이 정치권력의 최정상에 진입한 후 이를 견제할 만한 수단이 부족하다. 1987년 헌법에 내장된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은 1963년에 시행된 박정희 시대의 3공화국 헌법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그 자신의 권력을 견제하게 할 수단을 배제한 제왕적 대통령은 오히려 실패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하고 정당정치, 의회정치를 뿌리내리게 할 제도적 변화, 즉 개헌이라는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덧붙여 제도적 변화에 못지않게 정치문화가 성숙될 필요가 있다. 1980~90년대 민주화로 점진적으로 이행한 곳들의 사례를 보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만큼이나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정치양극화라는 조건에서 선거불복의 정치문화는 만성적인 헌정위기를 낳을 수 있다. 특히나 여소야대라는 조건에서 선거불복의 정치적 심리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리를 훨씬 뛰어넘어 행정부와 의회 각각의 권한 남용이라는 형태로, 저강도의 헌정마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4) 정당, 의회가 비상계엄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 대한 평가
여야 정당과 의회가 비상계엄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 중에서 짚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첫째,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국회에서 신속히 계엄 해제 요구를 결의해야 하고 여당 소속 의원들이 국회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추경호 원내대표는 당사에 모여 중진의원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국민의힘 내에서 어떤 잠재적 균열선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12월 6~7일 윤 대통령이 조기퇴진 의사를 밝히고 구체적인 방안을 당에 일임한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이러한 균열선이 봉합되는가 했지만, 이내 윤 대통령이 입장을 뒤집으며 갈등이 폭발했다.
특히 윤 대통령 본인이 조기퇴진 대신 탄핵을 거쳐 헌법재판소에서 법적 다툼을 해보겠다는 뜻을 비치면서도, 당에 탄핵안을 통과시켜달라고 말하는 대신, 가능할 때까지 최대한 탄핵안 통과를 막아달라고 요구한 것이 당의 갈등을 폭발시킨 핵심 원인이었다. 윤 대통령은 여당의 운명을 자신의 정치적 생사에 걸도록 요구했고, 이를 받아들인 여당 주류는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든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달리,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소추 이후에도 당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과 함께 침몰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둘째, 계엄 해제 이후 국면에서 현재와 같은 상황으로 이어지기까지 단 한 번의 변곡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12월 6~7일, 윤 대통령이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조기퇴진을 수용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동훈-한덕수 공동담화는 오히려 강한 역풍을 맞았다. 이와 같은 구상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 탄핵심판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면서도 탄핵심판보다 빠르게 퇴진이 달성될 수 있다는 로드맵이 먼저 제시되어야 했고, △ 조기퇴진 전까지 국정운영에서 야당이 배제되지 않도록 하는 구체적인 안(예를 들어 거국내각 구성방안)을 갖고 야당과 사전에 협의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 없이 돌발적으로 제시된 한동훈-한덕수 담화는 계엄해제 이후 국면에서 여당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야당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도권 싸움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이때 여야 간의 빠른 논의와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면, 윤 대통령이 그렇게 손쉽게 조기퇴진 약속을 저버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상황이 어그러진 데에는 우원식 의장이 제안한 ‘대통령의 직무를 즉각 중단시키기 위한 여야 회담’이 성사되기도 전에 약속을 저버린 윤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말이다.
셋째, 야당이 제출한 탄핵소추안은 논란과 문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들도 담고 있어서 탄핵의 정당성을 잠식하는 효과를 낳았다. 대표적으로 1차 탄핵안 ‘결론’ 중에 “소위 가치외교라는 미명 하에 지정학적 균형을 도외시한 채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정책을 고집하며 일본에 경도된 인사를 정부 주요 직위에 임명하는 등의 정책을 펼침으로써 동북아에서 고립을 자초하고 전쟁의 위기를 촉발시켜 국가 안보와 국민 보호 의무를 내팽개쳐 왔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2차 탄핵안에는 윤 정부의 외교정책에 관한 언급은 빠졌으나, “원내대표 추경호 의원은 (…)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 결의안 의결을 방해하였다”, “피소추자는 (…) 내란의 우두머리(수괴)로서, 국방부장관 김용현, (…) 국민의힘 원내대표 추경호 등과 공모하여”라고 하여, 국민의힘 원내지도부를 ‘내란 공모세력’으로 규정했다. 이는 국민의힘 주류가 2차 탄핵안을 거부하는 명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야당이 이참에 국민의힘을 ‘내란 공모세력’으로 규정하여 붕괴시키려 한다는 우려를 낳았다.
여당 주류가 비상계엄 사태에서 보인 태도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여당을 ‘내란 공모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는 여당 의원이 탄핵을 찬성하면 ‘내란 공모세력’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양이 되고, 반대하면 ‘내란 공모세력’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일종의 정치전략이었다. 야당 역시 국회의 틀 내에서 여야 간 합의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배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종합해보면, 비록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으나, 여야 간의 극한적 정치대결, 즉 ‘정치 내전’의 불씨는 오히려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여당은 자신의 사활에 당의 명운을 던지라는 윤 대통령의 요구에 빨려 들어갔고, 이 고리를 끊으려는 비주류를 지도부에서 몰아냈다. 야당은 상대방을 ‘내란 공모세력’으로 규정하며 제거하고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결국 계엄사태 이전부터 지속된 극한의 정치적 대결이 비상계엄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해소되지 못했고, 오히려 더욱 악화하는 길로 나아간 셈이었다.
4.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이후부터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판이 결정될 때까지의 상황은 기관지 다음호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본격화된 강경 우파의 대중집회를 비롯한 탄핵 찬반 집회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이번호 특집 중 다른 글이 집중적으로 다룰 주제이기도 하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절차는 1월 14일 1차 변론기일을 시작으로 1월 10일 10차 변론기일까지 진행되었고, 헌법재판소는 2월 25일 변론 종결을 고지했다. (최종 선고일은 이 글을 쓰는 3월 13일 현재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한편, 탄핵소추안 통과 후 윤 대통령에 대한 수사도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2월 16일 검찰이 공수처로 수사를 이첩하고, 12월 30일 공수처는 서울서부지법에 대통령 체포영장을 청구하여 다음 날 31일 서부지법이 헌정사 최초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공수처는 1월 3일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했으나 5시간 30분만에 철수했다. 1월 7일 서부지법은 체포영장을 재발부했고, 1월 15일 공수처는 다시 체포영장을 집행하여 윤 대통령이 체포되었다.
1월 17일 공수처는 윤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19일 서부지법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1월 23일 검찰은 법원에 구속기간을 2월 6일까지 연장해달라고 신청했으나 서울중앙지법은 연장을 불허했다. 검찰은 25일 구속기간 연장을 재신청했으나,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자, 26일 검찰은 윤 대통령을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그렇지만 2월 4일 윤 대통령은 구속상태가 부당하다며 구속 취소를 청구했다. 2월 20일 서울중앙지법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 공판준비기일과 함께 구속취소 심문을 열었고, 3월 7일 구속취소를 인용했다. 검찰은 즉시항고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3월 8일 윤 대통령이 석방되었다.
또 한편 12월 25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이어받았다. 야당의 한 권한대행 탄핵은 한 권한대행이 “여야 간의 합의를 거치지 않고 선출한 헌법재판관의 선례는 없다”며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은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한 권한대행 탄핵소추안 통과를 국회 과반수 의결로 선포했는데, 이 역시 탄핵심판에서 다뤄야 할 쟁점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한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심판 최종선고 날짜 역시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윤 대통령은 1월 1일 관저 앞 지지자에 직접 서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실시간 생중계 유튜브를 통해 여러분께서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더 힘을 냅시다”라고 했다. 이는 지지자의 집회와 유튜버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독려한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이는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 당시 지지자들의 집단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1월 18~19일 윤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서부지법으로 지지자들이 난입하는 사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흐름이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이나 내란죄 재판에서 재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무척 심각한 문제다.

[그림] 2025년 1월 1일 윤 대통령이 한남동 관저 앞에 모인 지지자에게 보낸 메시지
체포영장 집행 기한이 1월 6일까지고, 1월 2일부터 정상업무가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메시지는 지지자들이 체포영장 집행을 적극적으로 막아달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되었다. (사진출처: 《파이낸셜뉴스》)
종합하면, 이번 계엄사태의 배경인 정치양극화 또는 ‘정치내전’ 상태가 계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한층 더 악화됐다. 이렇게 내전을 방불케 하는 극단적 정치양극화는 탄핵심판과 내란죄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게 분명하다. 혹자는 이런 극단적 대결을 완화하고 해소하기 위해서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동시에 정치무대에서 퇴장하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승자독식, 즉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정치문화를 해소하고 협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회진보연대 역시 개헌이라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현 국면에서 정치양극화의 양극을 이끄는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동시 퇴진하는 그림은 상상에서나 가능할 듯하며, 현재처럼 양극이 공존하는 한 개헌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듯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현 상황이 지극히 위험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정치양극화, 정치내전이라는 상황은, ‘진보정치’든, ‘중도결집’이든 간에, 어떤 제3의 정치세력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달리 말하면 사실 ‘단극’을 지향하는 정치라는 점에서, 어떤 탈출구가 나타날 가능성을 마치 ‘자동 메커니즘’인 듯이 봉쇄한다. 정치양극화, 정치내전은 끊임없는 자기파괴의 과정인 셈이다. 한국사회와 사회운동은 대통령 탄핵소추, 내란죄 기소 이후 여전히, 도리어 거대한 위험에 놓여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