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42호
동덕여대 교육투쟁에 대한 몇가지 짧은 생각들
‘개나리투쟁’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대학에서 해마다 비슷한 시기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등록금 투쟁을 지칭하는 말로, 투쟁이 근본적인 문제까지 상승하지 못한 채, 한시적이고 관성적으로 진행되고 마무리되는 것을 반성하는 표현이다. 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학생운동단체들의 OO캠프, OO학교들에서 이러한 관성적 교육투쟁을 극복하기 위한 평가와 대안이 제시되곤 있지만, 아직은 미흡한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작년 한해 진행된 동덕여대의 투쟁은 확실히 여러 생각할 꺼리를 제공해 준다. 요즘처럼 학생대중운동이 매우 어려운 시기에 7000명 학생 중 4000명이 모여 학생총회를 성사시켜 수업거부를 한 것도 그렇고, 그동안 쉽지 않았던 대학구성원의 연대투쟁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단식과 삭발 그리고 무기한 수업거부에도 끝내 학내구성원이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던 점도 그렇다.
필자가 동덕여대 구성원이 아니고 아직 투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2003년 동덕여대 교육투쟁의 성과나 한계 그리고 앞으로 방향에 대해서는 언급할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투쟁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왔기에, 이번 투쟁을 소개하고 고민들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면서 해결해 보고자 이 글을 쓴다.
동덕여대 투쟁은 필연적(?)이었다. - 동덕여대 투쟁의 배경
그들만의 왕국
사립대학 사유화의 전형적인 방법이 족벌체제 구축이다. 동덕여대의 경우에도 총장 조원형을 중심으로 그 어머니 이은주가 이사장으로 있고, 이사회는 동덕여중고 전직교장들과 조원형의 고교 동문과 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립대학 이사회가 대학의 거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대학의 운영, 인사 그리고 재정에 관한 모든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를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대로 좌지우지 해왔던 것이다.
이사회와 대학의 주요 보직을 차지한 그들이 대학을 통해 돈벌이를 하기로 맘먹었다면 비리와 부정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작년 7월 학내구성원의 투쟁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시한 교육부 종합감사 결과 교비수입으로 처리해야할 국고보조금을 법인수입으로 처리하고, 이사장 인건비를 교비에서 지급하는 등 33억 원의 회계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사회는 교원확보율을 높이기 위한 허위보고, 실험실습비 목적 외 집행, 다른 목적 사용의 미사용 건물을 교사기준으로 허위로 보고하는 등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다. 교육부의 감사가 비리재단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솜방망이 감사에 머물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부정과 비리가 있었겠는가.
열악한 교육환경과 자치활동 탄압
이러한 부정과 비리는 당연히 학내구성원들이 고스란히 부담하게 됐다. 동덕여대는 2001년 기준으로 학생 1인당 납부 등록금이 인문사회 480여 만원, 예체능계 670여 만원이었는데, 대학졸업장을 얻기 위한 등록금 부담은 학생과 학부모의 등골을 휘게 했다.
교육서비스의 척도인 교육비 환원율은 98년 이후 연속 전국 최하위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대부분 학생등록금으로 만들어지는 재단의 적립금은 1200억 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학생들이 받는 장학금 수혜율은 법정기준에도 못 미치는 6%대에 머물렀다.
여기에 학생자치활동을 탄압하고 교수와 직원을 봉건적으로 통제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일례가 한 학생이 학교에 바닥그림을 그리자 이사회는 그 학생을 제적 처리하고 총장이 지도교수를 불러 호통을 칠 정도이다. 웃기지도 않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동덕여대의 상황은 비리백서를 발간할 것이 아니라 사학비리콩트집을 발간해야 할 정도이다.
결국 동덕여대 재단은 족벌, 비리, 독선과 전횡, 무능이라는 한국의 사학재단이 가질 수 있는 꼬리표를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이었고, 하기에 동덕여대 구성원들의 투쟁은 필연적이었다.
동덕여대 교육투쟁의 전개과정
당연히 이번 동덕여대의 교육투쟁은 처음이 아니다. 학생들은 오랫동안 재단비리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해왔다. 물론 다른 사립대학에서도 매년 이러한 투쟁은 있었고 올해도 있을 것이다. 동덕여대의 투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정리하는 것은 앞으로 대학에서 교육투쟁의 방향성에 시사점을 줄 것이다.
교수협의회의 총장퇴진 투쟁
2002년 10월 교수들은 교수협의회(이후 교협)를 만든다. 교협 설립은 그 해 여름에 동덕여대의 교육환경을 다룬 MBC뉴스의 보도가 시발점이었다. 조원형 독재체제에서 억눌려왔던 교수들은 교협을 설립함으로써 투쟁의 조직적 기반-설립당시에는 이런 수위의 투쟁을 예상하지 못했었겠지만 - 을 마련했고 2003년 초부터 총장퇴진 투쟁에 돌입한다. 투쟁의 경험과 상이 없었던 교수들은 교수들만의 투쟁으로도 당연히 총장이 퇴진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으나, 재단이 자손만대 부와 명예의 원천인 대학을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결국 교수들은 타협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교내 천막농성에 돌입한다.
학생들의 교육투쟁 비상대책위 구성
학생들은 교수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투쟁초기부터 총장퇴진 뿐만 아니라 학교 운영의 민주화와 학생교육권 확보를 요구하였다. 학생들은 2003년 5월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총장퇴진!교육권쟁취!민주동덕건설!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한다. 투쟁의 경험이 많은 학생들은 대규모 대중집회를 조직하고, 총학생회장이 천막단식농성을 진행함으로써 학내 구성원들의 연대투쟁의 틀을 만들어낸다.
학내구성원의 연대투쟁과 동덕공투위 출범
사립학교에서 투쟁이 일어났을 때, 학원 내부 주체들의 연대투쟁은 쉽지가 않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고민거리이다. 동덕여대 또한 교수, 학생, 직원들이 산발적으로 투쟁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투쟁방향을 맞추어나가거나 공동행동을 만드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내 6단체(교수협의회, 강의전임교수협의회, 직원노조, 잔다르크동덕, 대학원원우회, 총학생회)와 교수노조를 포함한 외부 22개 단체는 ‘족벌비리사학척결과 동덕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이하 동덕공투위)’를 발족한다. 동덕공투위는 학내구성원의 연대틀로 제한하지 않고 사안자체를 학외로 넓혀냈다. 이를 계기로 사학민주화투쟁의 경험자들이 동덕여대 투쟁에 함께 할 수 있었고, 필자 또한 투쟁을 오랫동안 지도, 지원해 왔다.
학생들의 총장실 점거와 수업거부, 직원노조의 총파업
교육부 앞에서 일인시위, 개별적인 이사방문을 통한 자진사퇴투쟁, 신문광고투쟁, 학내 서명운동들이 진행되던 10월 7일, 학생들은 총장실을 기습적으로 점거한다. 또한, 4000여명이 모인 학생총회에서는 관선이사 파견을 요구하며 수업거부를 결의한다. 동시에 직원노조는 총파업에 돌입한다. 조원형은 학내구성원의 강력한 투쟁과 교육부 감사결과에 밀려 총장직을 사퇴했지만, 일방적으로 동국대 전 총장인 송석구를 신임총장으로 임명하면서 오히려 학내구성원들의 반발은 더욱 커졌다.
대규모 도심집회와 삭발식
동덕공투위는 수업거부시점부터 매주 대규모 도심집회를 개최한다. 그럼에도 관선이사파견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교육부는 법적인 문제가 있다며 관선이사를 파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반복하였다. 학생대중은 수업거부가 장기화되고 교육부의 유급을 무기로 한 협박이 이어지면서 급격하게 흔들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수, 학생, 직원노조 30여명은 도심삭발투쟁을 단행하고, 학생들은 교육부 앞에서 연행을 불사한 투쟁을 전개한다. 이때서야 침묵하던 언론은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수업거부 연장과 교육부 중재안 타결
교육부는 12월 29일까지 수업에 복귀하지 않으면 수업불참자를 전원 유급시키겠다고 협박했으나, 학생들은 학생총회에서 수업거부 지속을 결정한다. 이는 많은 사람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였다. 6000명 학생의 대량유급이 부담스러웠던 교육부는 이사 9명을 학내구성원 3명, 교육부 파견 3명, 재단 3명으로 구성하고, 송석구 총장이 자진사퇴하기로 하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학내구성원들은 많은 논란 끝에 타협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투쟁을 진행하면서 느낀 몇가지 생각들
관선이사 파견투쟁은 사학민주화 투쟁의 모범답안인가?
동덕여대 투쟁에서 주요한 투쟁 슬로건은 ‘관선이사파견하라’였다. 실제로 현재 재단이 학교운영에서 손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교육부가 임시이사를 파견하는 것이다. 사립학교법에는 이사회가 여러 이유 등으로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어려울 때 교육부가 임시이사를 파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교육부가 임시이사 임명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부 퇴직관료의 전관예우가 되거나 구재단 관련인사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미 대학이 자본에 종속되어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장치를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없는 관선이사 파견투쟁은 사학민주화 운동의 관성과 질곡이 될 수도 있다.
학내 주체간의 연대투쟁 - 고등교육 운동주체의 연대필요성
앞서 말한 것처럼 학원주체간의 연대투쟁은 쉽지가 않다. 이는 대학이 자치와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발전한 것이 아니라, 양적인 팽창과 도제시스템, 업적주의와 대학서열화의 굴곡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학생과 교수간, 교수와 직원간 등의 갈등과 불신은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학원주체들간의 긴밀한 연대가 있지 않으면 개별대학에서의 투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특정 주체의 운동이 급격하게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대학을 구성하는 교육운동 주체들은 적극적이고 긴밀하게 운동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이는 사학민주화 운동을 넘어 불평등과 종속으로 심화된 대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내는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대학건설=일류대학건설
이번 투쟁에서 교수와 학생대중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민주대학건설을 통한 일류대학건설이었다. 이는 여러 증거와 정황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대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부정과 비상식의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서열화와 서열화된 대학의 졸업장이 자격증이 되는 현실에서 민주대학건설이 일류대학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매우 위험하다. 현재의 교육과 대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효과적인 폭로와 선전이 대중투쟁과정에서 진행되지 않는 한, ‘죽 쒀서 개주는 꼴’이 될 수 있다. 이는 교육개방이후 등록금인상에 대한 대학본부와 학생들의 이전과 다른 분위기, 작년 성신여대 이상주 투쟁에서도 드러났다.
약 20년 동안 우리는 대학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학원민주화 또는 학원자주화 투쟁이라고 불러왔다. 그것을 교육투쟁 또는 사학비리 척결투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입생을 3월에 조직화하는 투쟁이기도 했고, 학생운동이 사회뿐만 아니라 학원에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하는 투쟁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엉켜있다. 게다가 교수와 학생 그리고 직원 사이의 입장과 운동의 조건이 다르고, 국립대와 사립대, 2년제와 4년제, 지방대와 수도권대학의 상황이 다름은 고등교육부분의 활동가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이번 동덕여대 투쟁에 결합하면서 투쟁의 성과와 한계와는 별도로 수많은 판단과 고민이 요구되었다. 신자유주의 경쟁과 시장의 원리는 저항 없이 대학에 침투하고 있고, 이는 민중에게 교육비를 전가하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재생산하는 것으로 결과할 뿐만 아니라, 특정계급에게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탈과 계급사회 고착화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대학을 보고만 있어야 하겠는가. PSSP
그런 점에서 작년 한해 진행된 동덕여대의 투쟁은 확실히 여러 생각할 꺼리를 제공해 준다. 요즘처럼 학생대중운동이 매우 어려운 시기에 7000명 학생 중 4000명이 모여 학생총회를 성사시켜 수업거부를 한 것도 그렇고, 그동안 쉽지 않았던 대학구성원의 연대투쟁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단식과 삭발 그리고 무기한 수업거부에도 끝내 학내구성원이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던 점도 그렇다.
필자가 동덕여대 구성원이 아니고 아직 투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2003년 동덕여대 교육투쟁의 성과나 한계 그리고 앞으로 방향에 대해서는 언급할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투쟁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왔기에, 이번 투쟁을 소개하고 고민들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면서 해결해 보고자 이 글을 쓴다.
동덕여대 투쟁은 필연적(?)이었다. - 동덕여대 투쟁의 배경
그들만의 왕국
사립대학 사유화의 전형적인 방법이 족벌체제 구축이다. 동덕여대의 경우에도 총장 조원형을 중심으로 그 어머니 이은주가 이사장으로 있고, 이사회는 동덕여중고 전직교장들과 조원형의 고교 동문과 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립대학 이사회가 대학의 거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대학의 운영, 인사 그리고 재정에 관한 모든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를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대로 좌지우지 해왔던 것이다.
이사회와 대학의 주요 보직을 차지한 그들이 대학을 통해 돈벌이를 하기로 맘먹었다면 비리와 부정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작년 7월 학내구성원의 투쟁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시한 교육부 종합감사 결과 교비수입으로 처리해야할 국고보조금을 법인수입으로 처리하고, 이사장 인건비를 교비에서 지급하는 등 33억 원의 회계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사회는 교원확보율을 높이기 위한 허위보고, 실험실습비 목적 외 집행, 다른 목적 사용의 미사용 건물을 교사기준으로 허위로 보고하는 등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다. 교육부의 감사가 비리재단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솜방망이 감사에 머물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부정과 비리가 있었겠는가.
열악한 교육환경과 자치활동 탄압
이러한 부정과 비리는 당연히 학내구성원들이 고스란히 부담하게 됐다. 동덕여대는 2001년 기준으로 학생 1인당 납부 등록금이 인문사회 480여 만원, 예체능계 670여 만원이었는데, 대학졸업장을 얻기 위한 등록금 부담은 학생과 학부모의 등골을 휘게 했다.
교육서비스의 척도인 교육비 환원율은 98년 이후 연속 전국 최하위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대부분 학생등록금으로 만들어지는 재단의 적립금은 1200억 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학생들이 받는 장학금 수혜율은 법정기준에도 못 미치는 6%대에 머물렀다.
여기에 학생자치활동을 탄압하고 교수와 직원을 봉건적으로 통제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일례가 한 학생이 학교에 바닥그림을 그리자 이사회는 그 학생을 제적 처리하고 총장이 지도교수를 불러 호통을 칠 정도이다. 웃기지도 않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동덕여대의 상황은 비리백서를 발간할 것이 아니라 사학비리콩트집을 발간해야 할 정도이다.
결국 동덕여대 재단은 족벌, 비리, 독선과 전횡, 무능이라는 한국의 사학재단이 가질 수 있는 꼬리표를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이었고, 하기에 동덕여대 구성원들의 투쟁은 필연적이었다.
동덕여대 교육투쟁의 전개과정
당연히 이번 동덕여대의 교육투쟁은 처음이 아니다. 학생들은 오랫동안 재단비리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해왔다. 물론 다른 사립대학에서도 매년 이러한 투쟁은 있었고 올해도 있을 것이다. 동덕여대의 투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정리하는 것은 앞으로 대학에서 교육투쟁의 방향성에 시사점을 줄 것이다.
교수협의회의 총장퇴진 투쟁
2002년 10월 교수들은 교수협의회(이후 교협)를 만든다. 교협 설립은 그 해 여름에 동덕여대의 교육환경을 다룬 MBC뉴스의 보도가 시발점이었다. 조원형 독재체제에서 억눌려왔던 교수들은 교협을 설립함으로써 투쟁의 조직적 기반-설립당시에는 이런 수위의 투쟁을 예상하지 못했었겠지만 - 을 마련했고 2003년 초부터 총장퇴진 투쟁에 돌입한다. 투쟁의 경험과 상이 없었던 교수들은 교수들만의 투쟁으로도 당연히 총장이 퇴진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으나, 재단이 자손만대 부와 명예의 원천인 대학을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결국 교수들은 타협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교내 천막농성에 돌입한다.
학생들의 교육투쟁 비상대책위 구성
학생들은 교수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투쟁초기부터 총장퇴진 뿐만 아니라 학교 운영의 민주화와 학생교육권 확보를 요구하였다. 학생들은 2003년 5월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총장퇴진!교육권쟁취!민주동덕건설!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한다. 투쟁의 경험이 많은 학생들은 대규모 대중집회를 조직하고, 총학생회장이 천막단식농성을 진행함으로써 학내 구성원들의 연대투쟁의 틀을 만들어낸다.
학내구성원의 연대투쟁과 동덕공투위 출범
사립학교에서 투쟁이 일어났을 때, 학원 내부 주체들의 연대투쟁은 쉽지가 않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고민거리이다. 동덕여대 또한 교수, 학생, 직원들이 산발적으로 투쟁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투쟁방향을 맞추어나가거나 공동행동을 만드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내 6단체(교수협의회, 강의전임교수협의회, 직원노조, 잔다르크동덕, 대학원원우회, 총학생회)와 교수노조를 포함한 외부 22개 단체는 ‘족벌비리사학척결과 동덕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이하 동덕공투위)’를 발족한다. 동덕공투위는 학내구성원의 연대틀로 제한하지 않고 사안자체를 학외로 넓혀냈다. 이를 계기로 사학민주화투쟁의 경험자들이 동덕여대 투쟁에 함께 할 수 있었고, 필자 또한 투쟁을 오랫동안 지도, 지원해 왔다.
학생들의 총장실 점거와 수업거부, 직원노조의 총파업
교육부 앞에서 일인시위, 개별적인 이사방문을 통한 자진사퇴투쟁, 신문광고투쟁, 학내 서명운동들이 진행되던 10월 7일, 학생들은 총장실을 기습적으로 점거한다. 또한, 4000여명이 모인 학생총회에서는 관선이사 파견을 요구하며 수업거부를 결의한다. 동시에 직원노조는 총파업에 돌입한다. 조원형은 학내구성원의 강력한 투쟁과 교육부 감사결과에 밀려 총장직을 사퇴했지만, 일방적으로 동국대 전 총장인 송석구를 신임총장으로 임명하면서 오히려 학내구성원들의 반발은 더욱 커졌다.
대규모 도심집회와 삭발식
동덕공투위는 수업거부시점부터 매주 대규모 도심집회를 개최한다. 그럼에도 관선이사파견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교육부는 법적인 문제가 있다며 관선이사를 파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반복하였다. 학생대중은 수업거부가 장기화되고 교육부의 유급을 무기로 한 협박이 이어지면서 급격하게 흔들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수, 학생, 직원노조 30여명은 도심삭발투쟁을 단행하고, 학생들은 교육부 앞에서 연행을 불사한 투쟁을 전개한다. 이때서야 침묵하던 언론은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수업거부 연장과 교육부 중재안 타결
교육부는 12월 29일까지 수업에 복귀하지 않으면 수업불참자를 전원 유급시키겠다고 협박했으나, 학생들은 학생총회에서 수업거부 지속을 결정한다. 이는 많은 사람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였다. 6000명 학생의 대량유급이 부담스러웠던 교육부는 이사 9명을 학내구성원 3명, 교육부 파견 3명, 재단 3명으로 구성하고, 송석구 총장이 자진사퇴하기로 하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학내구성원들은 많은 논란 끝에 타협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투쟁을 진행하면서 느낀 몇가지 생각들
관선이사 파견투쟁은 사학민주화 투쟁의 모범답안인가?
동덕여대 투쟁에서 주요한 투쟁 슬로건은 ‘관선이사파견하라’였다. 실제로 현재 재단이 학교운영에서 손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교육부가 임시이사를 파견하는 것이다. 사립학교법에는 이사회가 여러 이유 등으로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어려울 때 교육부가 임시이사를 파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교육부가 임시이사 임명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부 퇴직관료의 전관예우가 되거나 구재단 관련인사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미 대학이 자본에 종속되어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장치를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없는 관선이사 파견투쟁은 사학민주화 운동의 관성과 질곡이 될 수도 있다.
학내 주체간의 연대투쟁 - 고등교육 운동주체의 연대필요성
앞서 말한 것처럼 학원주체간의 연대투쟁은 쉽지가 않다. 이는 대학이 자치와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발전한 것이 아니라, 양적인 팽창과 도제시스템, 업적주의와 대학서열화의 굴곡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학생과 교수간, 교수와 직원간 등의 갈등과 불신은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학원주체들간의 긴밀한 연대가 있지 않으면 개별대학에서의 투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특정 주체의 운동이 급격하게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대학을 구성하는 교육운동 주체들은 적극적이고 긴밀하게 운동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이는 사학민주화 운동을 넘어 불평등과 종속으로 심화된 대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내는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대학건설=일류대학건설
이번 투쟁에서 교수와 학생대중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민주대학건설을 통한 일류대학건설이었다. 이는 여러 증거와 정황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대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부정과 비상식의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서열화와 서열화된 대학의 졸업장이 자격증이 되는 현실에서 민주대학건설이 일류대학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매우 위험하다. 현재의 교육과 대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효과적인 폭로와 선전이 대중투쟁과정에서 진행되지 않는 한, ‘죽 쒀서 개주는 꼴’이 될 수 있다. 이는 교육개방이후 등록금인상에 대한 대학본부와 학생들의 이전과 다른 분위기, 작년 성신여대 이상주 투쟁에서도 드러났다.
약 20년 동안 우리는 대학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학원민주화 또는 학원자주화 투쟁이라고 불러왔다. 그것을 교육투쟁 또는 사학비리 척결투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입생을 3월에 조직화하는 투쟁이기도 했고, 학생운동이 사회뿐만 아니라 학원에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하는 투쟁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엉켜있다. 게다가 교수와 학생 그리고 직원 사이의 입장과 운동의 조건이 다르고, 국립대와 사립대, 2년제와 4년제, 지방대와 수도권대학의 상황이 다름은 고등교육부분의 활동가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이번 동덕여대 투쟁에 결합하면서 투쟁의 성과와 한계와는 별도로 수많은 판단과 고민이 요구되었다. 신자유주의 경쟁과 시장의 원리는 저항 없이 대학에 침투하고 있고, 이는 민중에게 교육비를 전가하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재생산하는 것으로 결과할 뿐만 아니라, 특정계급에게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탈과 계급사회 고착화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대학을 보고만 있어야 하겠는가.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