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비 경감방안의 본질과 고교 평준화 해체 논의 비판
천박한 방안, 천박한 논란
사교육비 문제와 고교 평준화를 둘러싸고 연초부터 공방이 뜨겁다. 물론 둘 다 그다지 신선한 주제는 못된다. 지겹고도 지겨운 그런 메뉴. (평준화도 도입 초반부터 논란이 있었다.) 치고 받고 하다가 결국은 ‘우리 교육은 어떻게 해도 안 돼. 학벌주의와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이렇게 다소 비관적인 그러나 ‘정확한’ 결론에 이르고야 마는.
사교육비와 평준화를 두고 공방이 벌어지는 지금의 맥락은 8년 간 전개된 시장주의 지배연합 마이클 애플은 ‘신 헤게모니 블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80년대 이후부터 나타난 미국의 보수적근대화 경향을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보수적 근대화를 주도하는 ‘신 헤게모니 블록’이라는 정치적 제휴가 있으며 이를 이데올로기 우산에 비유했다. 이 정치적 제휴는 몇몇 거대 집단들로 구성되는데 신자유주의가 그 첫 번째 집단이며 이들은 이데올로기 우산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즉 주도 세력이다. 두 번째는 신보수주의자들이며, 세 번째는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집단들인데, 이들은 공립학교 내에 세속적 인본주의가 만연하게 되면 자신들의 특권을 박탈당하리라고 여기는 까닭에 신자유주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보태준다. 이들은 경제구조조정으로 겪는 생존의 위험을 겪고 있는 집단이기도 한데, 그 불만의 표출이 급진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우경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상황은 미국과 물론 다르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이들을 중심으로 지배 블럭이 재편되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주의 지배연합이라고 칭했다.
시장주의 지배연합 : 독점자본의 이해를 중심으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으며 권력의 중심에는 재계인사와 정부관료(경제부처 관료가 중심), 정치인, 보수적인 학자 등이 포진. 보수언론은 신자유주의 담론 유포 및 진보진영을 겨냥한 이데올로기 공세 및 대중의식의 우경화를 이끌고 기획하고 주도하고 있음. 적극적인 역할 수행. 사회계층 가운데 이 권력집단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지지 기반은 사회경제적 기득권을 가진 정치적,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부유층이며 고학력, 고소득의 전문, 관리직 종사자들. 권력, 지위, 부의 안정적인 세습을 도모하려는 욕구가 강한 이들은 엘리트주의를 선호하며 따라서 계급 분리적 교육체제를 지향. 따라서 공적 자금에 의해서 운영되는 공교육을 강화시키는 방향보다는 시장원리에 따른 ‘교육 상품 소비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함. 따라서 시장주의적 질서로 교육을 재편하는 것을 지지. 파시즘적 질서 하에서 억제된 이들의 욕망은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표출의 계기를 맞음. 정치,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이들은 진보적인 교육운동 진영에 대해 우익적 대중동원 방식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면서 시장주의 정책 도입을 지원하고 있음. 우익적 학부모 단체를 시장주의자들은 적절히 활용하고 있음.
진보교육연구소, 2004 겨울 워크샵 자료집 중 “현 단계,, 교육운동의 패러다임 모색을 위하여.”
의 막바지 교육재편 공세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가 지닌 근본모순에 더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이 폭넓게 시도되면서 노동의 현실, 생존권 문제는 대단히 심각해졌기에 이를 건너뛰고는 사교육비 문제든, 평준화 문제든 제대로 된 논의는 전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장주의 지배연합은 나름대로 일관된 기조 하에 두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들의 속셈은 교육을 사적논리의 지배에 맡기고 경쟁구조를 더욱 견고화하여 교육의 사회통제 기능을 강화하고 더불어 이를 안정적인 대물림 구조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에 담기조차 짜증나는 뜨거운 감자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격론의 귀결점은 결과적으로 공교육, 민중교육권의 향방과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사교육비를 잡아보겠다고 정부가 나섰지만 그 꼴이 소 잃고(팔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데다 의지도 대단히 의심스럽다. 극단 수준까지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고 그 규모가 엄청나게 “팽창”하게 된 가장 큰 책임은 ‘국민의 의식’이 아니라 지난 몇 년 간의 정부 정책에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 부분을 생략한 채 사교육비 문제를 그간의 정부 정책기조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공교육 부실’ 운운하며 실효성마저 의심스런 방안을 내놓고 일방통행식으로 진행하면서, 여론조작을 포함 보수언론과 합작하여 대대적인 언론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그 덕택인지 무엇인지, 현재의 논란은 대단히 ‘천박하고 비생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교육적, 사회적 파장을 판단하기에 앞서 교육부 방안을 놓고 “전교조는 왜 맨날 딴지만 거냐, 교육부가 내놓은 방안이 문제도 많고 마음에도 안 들지만 일단 그거라도 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라는 반응조차 만들어지고 있다.
손댈 수 없어 보일 지경으로 심각해져버린(일단은 이걸로 먹고사는 집단이 너무 많다. 실업대책이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사교육 증가 문제나 평준화가 봉착한 어려움은 한국의 독특한 교육기회 확대 면모와도 관련이 있다. 한국은 무상이 아닌 유상(사립, 사부담에 과잉 의존)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기반하여 교육기회가 확대되었으며 강력한 국가주의적 통제 모델 속에서 정통성 확보라는 정치적 이해마저 중첩되었다. 국가 교육정책은 특정 집단에게 독점되어 경제논리나 정치논리에 휘둘렸으며 여기에서 노동자, 민중은 교육권의 주체로서 전면에 나서기 어려웠다. 그보다는 늘 정책의 대상, 약간의 시혜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탓인지 교육에 대한 대중의 관념도 왜곡된 방향으로 형성된 것이 사실이다. 봉건적 신분질서가 급격히 와해되고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공공성에 입각한 근대적 교육질서를 세우기도 전에 교육은 지배자들에게는 통치의 수단, 대중들에게는 계층상승을 위한 유력한 도구로 비춰질 수밖에. 진보적 교육운동의 흐름은 번번이 막혀버렸고 일방통행식 국가교육정책 시행이 남발했다. 사실, 중등교육 단계에서 공교육은 계층분해의 장치로 기능했으며 이에 따라 교육을 계층 상승의 사다리로, 일종의 ‘투자처’로 인식하는 것이 만연했다. 좁디좁은 ‘성공’의 가능성 속에서, 엄청난 사회불평등, 이를 직접 대면하고 해체하기보다는 ‘우회적으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개개인의 죽기살기식의 경쟁에의 몰입. 이는 우리 노동자, 민중의 계급성에 입각한 교육문제 인식의 기회를 봉쇄하는 장치였다. 이처럼 교육권은 ‘기본권’의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마땅한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개인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획득’해야 하는 재화처럼 각인되었다. 이런 속에서 지배계급은 치열한 경쟁 메커니즘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제도교육을 사회통제기구의 일환으로 활용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교육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드높았으나 비본질적인 차원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런 한국적 지형을 너그럽게 헤아려 백보 양보한다 치더라도, 그래서 이런 공모 아닌 공모 속에서 그 누구도 마땅한 대안을 선뜻 내놓지 못할 정도로 교육문제가 심각할 대로 심각해져버렸음을 인정한다 해도, 대중의 교육에 대한 인식이 기득권층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천박하고 비본질적인‘ 차원에 묶여 있음을 수긍한다 해도, 정부 정책의 과오와 그 노선의 반민중성, 반교육성을 비판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다. 교육문제를 더 얽히게 만들고 교육권과 공공성의 토대를 훼손한 최대 주범은 바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노선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따져보자. 90년대 사교육비 폭등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94년의 수능 도입, 99년의 ‘과외금지 위헌판결’로 인한 과외 규제정책의 무력화, 02년 입시전형의 다양화로 인한 입시부담 가중 등이다. 여기에 덧붙여 7차 교육과정 도입에 따른 교과의 난이도 상승, 우열반 편성, 입시중심 과목 선택 등의 부작용과 함께, 무분별한 특목고 확대에 따른 초?중학교의 입시경쟁 격화 등이 사교육 폭발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학교교육만으로 대비할 수 없는 수능의 도입, 운영 및 선택권 확대를 빙자하며 도입된 7차 교육과정은 의도적으로 학교교육을 무능하게 만들고 있으며 불안심리에 휩싸인 학생, 학부모를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아 온 것이다. 이렇게 현재의 논란을 천박한 수준으로 격하시킨 일차적/직접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흔히 거론되는 “한국교육의 위기”와 그 원인에 대해 정확히 짚고 다시 공교육의 역할과 기능을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이야기가 모아져야 할 시점에 불필요한 쪽으로 논란이 번지게 만들고 총선용으로 활용하려 들고 있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마녀사냥 하듯 평준화를 두들겨 패 만신창이를 만들고, 사교육 의존 구조의 문제를 비용의 문제로 환원하여 대중의 의식을 현혹하기에 바쁘다. 근본적인 원인을 깊게 따지고 들면 교육부의 방안이 그야말로 “유효시한이 지난 해열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눈치채기 어렵지 않다. 지금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괴로운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 만은 전 계층들은 교육에만큼은 마치 ‘로또’ 당첨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출혈적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교육 수요발생 원인을 근본적으로 짚지 않은 채 처방되는 근시안적 대증요법은 이미 폭넓게 번져버린 사교육 의존 행태는 전혀 바꾸지 못한 채 80년대 식의 엄혹한 학교입시체제까지 얹어버릴 게 뻔하디 뻔하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10년, 20년이 지나 지금 학교교육을 경험한 세대가 ‘학교에 대한 안 좋은 추억’ 아니 끔찍한 추억만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 뻔하지 않은가.
정부의 사교육비 경감방안의 본질은 학교 시장화 견인책
정부가 발표한 방안을 한 번 살펴본다. 전교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바가 정확하다. 단기대책은 학교 학원화 방안, 중기대책은 학교 시장화 방안, 장기 대책은 구색 맞추기 용에 불과한 그 추진 의지가 심히 의심되는 방안 말이다.
정부가 2월 17일 발표한 “사교육비 경감 종합대책”은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교육부로부터 1억 5천만 원을 지원 받아 수행한 연구 프로젝트를 기초로 한 것으로, 작년 말 한국교육개발원이 처음 발표한 뒤 이미 여러 차례의 공청회와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교원단체와 교육시민운동단체의 문제제기가 반영되지 않은 채 애초의 안에 몇 가지만 추가된 꼴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 같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안을 ‘종합대책’이라고 서둘러 확정 발표한 것은 결국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하여 여론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총선용 공약’이 아닌지 라는 의혹마저 인다. 방안 자체도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재탕 삼탕’인데다 그 실효성마저 대단히 의심스럽고 결국은 학교교육마저 파행으로 이끌 위험스런 요소가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종합대책’에 포함된 내용의 상당 부분은 종전에 이미 시행되었다가 실효성이 의심스러워 중단되거나, 지금 현재도 이미 편법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정부는 현재의 교육부총리인 안병영 장관이 교육부장관으로 재직할 때인 지난 1995년, 교육방송(EBS) 위성과외를 학교 안으로 흡수하기 위해 많은 학교에 위성수신기와 위성방송 수신용 안테나, 교실에는 소형 텔레비전을 대대적으로 설치한 바 있다. 그러나 그토록 법석을 떨었던 위성과외는 결국 과외열풍 해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채, 위성수신 안테나와 텔레비전은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녹슬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지금 와서 정부가 다시 ‘e-러닝’을 시도하겠다는 것은 방식만 약간 바꿔 같은 내용을 다시 재탕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수험생들에게 “대비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을 추가하여 부담을 키워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보충수업의 부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현재도 대부분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당국의 눈을 피해가며 방과 후 특기적성교육을 입시준비를 위한 문제풀이위주의 교과수업으로 편법 운영해 온지 오래인데, 만약 정부가 학교 내 보충수업을 허가할 경우, 학교 간 입시경쟁에 불을 붙여 ‘강제 보충수업’, ‘심야 보충수업’, 지도수당 조성을 위한 ‘불법 잡부금 징수’ 등의 편법으로 나아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과거 이 같은 불법 편법을 근절하기 위해 학교 내 보충수업을 금지했던 전례에 비춰볼 때, 이는 곧 ‘공교육 정상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교육을 잡기 위해 학교 교육을 파행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종합 대책 안에는 수준별 반 편성을 확대하겠다는 의지 또한 빼놓치 않고 있다. 현장교사들은 금방 안다. 수준별 수업의 그 ‘유혹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이는 현실에서는 수준차를 오히려 확대, 고착화시킬 뿐이며 학생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는 방안임을. 공교육은 계급을 가로질러 공통의 언어가 통용되는 ‘혁명적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상의 우열반 편성으로 귀결될 수준별 학습 집단 구분은 “나는 실업계 출신”이라는 자괴감말고도 “나는 10년 내내 하반”이라는 안 좋은 추억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만약 네이스가 정부 의도대로 추진되었다면 학생부에는 평생 ‘하반’ 꼬리표가 따라다녔을 거다. 교사 입장에서도 수업 준비 부담이 가중되어 결국 수업의 질은 저하되고 만다.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교육철학이다. 이러한 하향 평준화 논의는 사실 상위 5%내지 상위 10% 이내에 맞추어져 이들의 ‘피해’만을 중점 부각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의 교육철학이다. 수준별 반 편성은 상위에 초점을 맞춘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며 수준차를 좁히려는 목적과 전혀 상관이 없다. 트랙킹이 학교 안에 제도화될 때 교육자원이 상위 그룹에 집중되고 나머지는 ‘버린 자식’ 취급하는 것은 이미 외국의 사례, 우리의 실험에서 증명되었다. 7,80%의 학습자를 소외시키는 못돼먹은 교육과정, 2001년 7차 교육과정 투쟁에서 쟁점이 되어 현장에서 무력화된 수준별 반 편성이 은근슬쩍 사교육비 경감방안에 끼어 들어 현장에 잠입하려 하고 있다.
‘그들’도 인정하다시피 한국의 교육 불평등은 점점 심해지는 형국이다. 해마다 발표되는 “뉘 집 아그들이 서울대에 많이 들어가나” 발표만 보아도 불평등 현실은 금방 피부에 와 닿는다. 어느 자본주의 국가든 계급불평등과 교육불평등은 어떻게 해서든 매개되고 또 교육을 통해 불평등이 재생산되고 있지만 한국에서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작동하는 방식은 다소 천박하고 극단적이다. 문화자본이니 아비투스니 하는 복잡한 얘기를 건너뛰면 90년대 들어 누구나 알 수 있는 불평등을 매개하는 직접적인 고리는 바로 ‘사교육’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이 천박한 연결고리만 박살내면 교육불평등이 완화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사교육이지만 사교육의 수요를 생산하는 교육시스템을 혁파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결실도 거두기 어렵다는 게 현재의 한국교육이 처한 난마처럼 얽힌 사태다. 초반에서 언급한 대로 ‘학벌주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서열화된 대학체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로또 심리를 부추겨 학력, 학벌경쟁을 만드는 진원지인 ’노동의 문제, 계급의 문제’는 그래서 우리가 언제든 회귀해야 하는 출발지인 것이다.
시장주의자들은 평준화를 왜 그토록 미워하는가?
한편, 2001년부터 시장주의자들은 고교평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문제삼기 시작한다. KDI를 필두로 평준화를 문제삼는 논문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고, 2003년에는 보수언론을 필두로 평준화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도지사, 정운찬 서울대 총장 등 재계, 정치계, 교육계 인사들도 폭탄성 발언을 쏟아내며 자신의 ‘교육적 소신’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오히려 교육부가 ‘평준화 유지, 보완’ 입장을 밝히며 진화에 나서는 이상스런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시장주의 지배연합이 평준화를 문제삼는 지점은 다채롭지만 논란이 거듭될수록 비약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꾸준한 공세 끝에 급기야 2003년에는 교육 바깥의 문제(이를테면, 집 값 상승) 원인도 평준화라는 기괴한 주장을 내놓았다. 평준화시기에 일어난 모든 문제는 평준화 탓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비약을 일삼으며 평준화를 흔들어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교육을 상품, 시장으로 만들고 그 상품화, 시장화된 교육을 해외자본에게 폭넓게 개방하는 정책 추진에서 평준화는 엄청난 걸림돌이나 마찬가지이다. 공급자간의 경쟁과 수요자의 선택이라는 메커니즘과 평준화는 전혀 상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준화의 틀을 깨지 않는 이상 교육을 시장화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서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보다 안정적인 대물림 교육구조를 갈구하는 상층계급은 평준화 해체를 통해 자신들의 비뚤어진 계급분리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한다. 평준화 해체 공세는 이들의 어긋난 분리 욕망을 최대한 자극하며 진행되고 있다. 이는 ‘수월성 추구’, ‘선택권 확대’, ‘엘리트 양성’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곤 하지만 제 자식이 ‘천한 것’과 한 학교, 한 교실에서 어울리는 게 싫다는 게 본심이며 될 수 있는 한 빨리 안정된 트랙에 자기 자식을 진입시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기실, 고도성장이 벽에 부딪치고 계급구조가 굳어지면서 서민들의 똥통학교(?)와 귀족학교를 갈라치는 '불평등 교육체제'의 도입 압력은 이미 전방위로 몰려들고 있다. 한국에서 출구 찾기에 짜증이 난 부유층은 아예 '조기 유학' '미국시민권 획득'을 통하여 별개의 트랙을 개설해 나가거나 거주 공간의 분리가 반영된 강남 8학군, 정부의 ‘평준화 보완’ 명목으로 도입된 특목고, 자립형 사립고 등을 통해 대물림 구조는 그간 고착화되어 왔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평준화 해체를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최대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는 평준화 해체 주장의 논거를 살필 차례다. 평준화가 다양한 교육적 욕구를 가로막고 선택권을 봉쇄하여 결국은 국가경쟁력에도 해악을 끼친다는 “하향” 평준화 시비는 그래도 ‘그들이니까’하고 넘어가 줄 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실증적 근거가 없는 ‘주장’에 불과했기 때문에 하향화를 근거로 정부가 평준화 해체 입장을 노골적으로 천명하기는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정말 가관인 것은 ‘평준화가 교육형평성을 훼손했다’는 주장을 열심히 펼친다는 것인데, 하향평준화 시비보다 ‘정서적으로’ 평준화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평등’의 문제이기 때문에 ‘평등’ 문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그들이 평준화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쉽지 않다.
최근에 나온 서울대와 KDI의 보고서는 각각 형평성 문제와 하향평준화 문제를 공략하는 용도로 제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근거하여 보다 대대적인 평준화 해체 공세를 펼칠 기세다. 형평성 문제와 평준화를 최근에 과감히 연결시킨 것은 바로 학벌주의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이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은 지난 1월25일 "입시제도의 변화: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무리하게 평준화 정책의 실패를 지적했는데, 이는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마저 의심케 할 정도의 주관적인 해석으로 여론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보고서는 1970학년도부터 2003학년도까지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의 입학생의 인적사항을 바탕으로 출신지역, 부모의 직업과 학력이 입학 가능성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보고서는 교육제도가 부익부빈익빈의 악순환을 재생산한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을 내놓은 바, 대도시, 특히 서울 강남지역에 살수록, 부모의 학력이 높을수록, 부모가 고소득 전문직종에 종사할수록 입학률은 뚜렷하게 증가했다. 이는 현재 교육체제가 부와 학벌의 세습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교육기회의 평등조차 실현하고 있지 못함을 말해준다. 사실 이 보고서 덕에 우리 사회에서 부와 학력의 세습이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며 여론의 추이는 결코 해체론자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해체론자들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던 분위기는 교육부총리의 ‘교사평가’ 발언과 이에 대한 언론의 집중 조명으로 쟁점은 급속히 ‘교사평가’ 문제로 이동해버렸다.
신자유주의 교육담론의 진원지 격인 KDI 역시 최소한의 형식논리조차 무시한 채 견강부회 식으로 평준화제도를 공격해온 집단으로 유명하다. 올해도 이 기조는 어김없이 확인되었다. KDI는 지난 2월 23일, 보고서 전문도 공개하지 않은 채, "고교평준화정책이 학업성취도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실증분석"이란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비평준화정책이 평준화 정책에 비해 성적 상승효과가 있음을 밝혔고 경제일간지들을 중심으로 선정적인 표제 아래 KDI의 발표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연구방법에 있어서는 고1 학생이 2학년으로 진학한 이후 어떻게 성적이 변화했는가를 살펴본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고1 학생과 고2 학생을 비교하여 성취도 향상결과를 측정한 것으로 드러나 억지논리로 평준화를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문제는 사실 확인도 전에 언론은 사실인양 서둘러 보도함으로써 평준화의이미지를 깎아 내리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교육은 ‘천부인권’이다. 다시 말해, 교육은 인간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초로서, 교육의 권리는 생존권적 기본권인 셈이다. 따라서 이 권리 앞에서 누구나 평등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는 어떠한 이유로든 차별이 행해져서는 안 되며 나아가 질 높은 교육을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허나, 생존을 위한 기본적 권리인 교육에 대한 책임을 개개인에 떠밀어서는 ‘평등한 권리 보장’은 실현되지 않을뿐더러 교육이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나아가 사회적 생산성도 높아지지 않는다. 사회가 나서서 교육권 보장 장치를 마련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현실이 교육에도 고스란히 반영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공적 장치’가 바로 공교육인 것이다. 즉, 공교육은 만인의 평등한 기본권인 민중교육권 실현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장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교육을 통해 천부인권이자 생존권적 기본권이기도 한 교육권을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수 있게끔 그 틀을 엮어내고 내용 채우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현재는 이런 공교육의 역할에 비추어 평준화 정책 시행과정을 평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급하게는 ‘보완’인양 거론되고 있는 자립형 사립고, 특목고 확대 흐름부터 끊어내야 한다. 그리고 비평준화 지역에서 평준화 도입운동을 활발히 벌여야 한다. 이미 몇 개 지역에서는 고된 여정 끝에 결실을 거둬나가고 있다. 평준화 확대 흐름에서 복병처럼 존재하는 것은 ‘외국교육기관특별법’(6월 국회에서 입법 시도될 예정), ‘교육특구지정’(지역특화발전특구법은 3월2일 국회통화) 따위의 ‘자발적 자유화 조치’를 틈탄 평준화 해체 시도다. 이런 따위의 ‘평준화 보완의 유혹’에 맞서지 않는 한 평준화의 틀은 금새 허물어질 것이다.
교육 시장화, 안정적 대물림 구조 만들기 책동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의 철의 규범
현 정부는 아니나 다를까 겉으로는 ‘공교육정상화’, ‘교육의 공공성강화’를 입에 올리지만 그 내용은 이러한 기조와는 전혀 딴판이다. ‘공교육정상화’를 입에 올리지만, 포함된 내용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학교를 학원처럼 만들어 입시경쟁체제를 강화시키고 특목고, 자사고, 외국교육기관 따위를 대거 도입해 평준화의 틀을 점진적으로 해체하는 한편 학교 내에서는 ‘갈라치기 반 편성’을 확대하여 교육에서의 ‘분리주의’를 실현하는 방책들이n 그것이다. 사교육비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경감’ 운운하고는 있지만, 이를 비용의 문제로 단순화시키는 오류와 ‘학력지상주의’적 교육관을 드러내고 있다. 사교육 문제는 경쟁의 방식을 바꾸거나 학교가 학원이 하는 기능을 일부 가져온다고 해서 결코 해결될 리가 없다. 어떤 기준에의 도달이 이미 목적이 아니고, 지금의 서열화된 대학체제, 고용불안 임금 차별 등 불평등한 노동시장 구조 하에서는 ‘남보다 더’ 식으로 경쟁은 끝도 없이 격화될 소지를 안고 있다. 정부는 다양한 교육개방, 시장화 메뉴를 준비하고 있다. 개방을 위한 자발적 자유화 조치 및 교원 유연화, 평준화 정책 폐기의 움직임이 올해 본격적으로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연초부터 교육정세는 복잡하고 다종다기하게 전개되고 있다. 자본은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시도를 진행 중이다. 전경련은 대학을 기업처럼 만들어야 된다 떠들고 자립형 사립고를 더 많이 만들어야 된다고 ‘교육개혁안’을 거침없이 내놓고 있다. KDI는 천박한 관념을 ‘숫자놀음’으로 숨기려들며 대중을 현혹한다.
교육운동은 ‘견고한 상식의 벽을 두드리는 비애 가득 찬 작업’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식’처럼 굳어진 ‘자본의 기준’을 노동자, 민중의 기준으로 대치하고 연대의 자리를 만드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학벌주의를 넘어서도 능력주의가 우리를 기다린다. 계급성에 근거하지 못한 채 개인의 차원에 매몰되어 부르주아의 교육관념을 자기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온 노동자, 민중이 교육권의 주체로 거듭나기는 정말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육에서의 계급투쟁은 그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었음을 인식하자. 올해는 교육이 시장화 될 것이냐 공공성이 강화될 것이냐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노동자, 민중이 우리의 교육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느냐의 기점이 바로 올해이다. PSSP
사교육비 문제와 고교 평준화를 둘러싸고 연초부터 공방이 뜨겁다. 물론 둘 다 그다지 신선한 주제는 못된다. 지겹고도 지겨운 그런 메뉴. (평준화도 도입 초반부터 논란이 있었다.) 치고 받고 하다가 결국은 ‘우리 교육은 어떻게 해도 안 돼. 학벌주의와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이렇게 다소 비관적인 그러나 ‘정확한’ 결론에 이르고야 마는.
사교육비와 평준화를 두고 공방이 벌어지는 지금의 맥락은 8년 간 전개된 시장주의 지배연합 마이클 애플은 ‘신 헤게모니 블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80년대 이후부터 나타난 미국의 보수적근대화 경향을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보수적 근대화를 주도하는 ‘신 헤게모니 블록’이라는 정치적 제휴가 있으며 이를 이데올로기 우산에 비유했다. 이 정치적 제휴는 몇몇 거대 집단들로 구성되는데 신자유주의가 그 첫 번째 집단이며 이들은 이데올로기 우산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즉 주도 세력이다. 두 번째는 신보수주의자들이며, 세 번째는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집단들인데, 이들은 공립학교 내에 세속적 인본주의가 만연하게 되면 자신들의 특권을 박탈당하리라고 여기는 까닭에 신자유주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보태준다. 이들은 경제구조조정으로 겪는 생존의 위험을 겪고 있는 집단이기도 한데, 그 불만의 표출이 급진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우경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상황은 미국과 물론 다르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이들을 중심으로 지배 블럭이 재편되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주의 지배연합이라고 칭했다.
시장주의 지배연합 : 독점자본의 이해를 중심으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으며 권력의 중심에는 재계인사와 정부관료(경제부처 관료가 중심), 정치인, 보수적인 학자 등이 포진. 보수언론은 신자유주의 담론 유포 및 진보진영을 겨냥한 이데올로기 공세 및 대중의식의 우경화를 이끌고 기획하고 주도하고 있음. 적극적인 역할 수행. 사회계층 가운데 이 권력집단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지지 기반은 사회경제적 기득권을 가진 정치적,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부유층이며 고학력, 고소득의 전문, 관리직 종사자들. 권력, 지위, 부의 안정적인 세습을 도모하려는 욕구가 강한 이들은 엘리트주의를 선호하며 따라서 계급 분리적 교육체제를 지향. 따라서 공적 자금에 의해서 운영되는 공교육을 강화시키는 방향보다는 시장원리에 따른 ‘교육 상품 소비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함. 따라서 시장주의적 질서로 교육을 재편하는 것을 지지. 파시즘적 질서 하에서 억제된 이들의 욕망은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표출의 계기를 맞음. 정치,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이들은 진보적인 교육운동 진영에 대해 우익적 대중동원 방식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면서 시장주의 정책 도입을 지원하고 있음. 우익적 학부모 단체를 시장주의자들은 적절히 활용하고 있음.
진보교육연구소, 2004 겨울 워크샵 자료집 중 “현 단계,, 교육운동의 패러다임 모색을 위하여.”
의 막바지 교육재편 공세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가 지닌 근본모순에 더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이 폭넓게 시도되면서 노동의 현실, 생존권 문제는 대단히 심각해졌기에 이를 건너뛰고는 사교육비 문제든, 평준화 문제든 제대로 된 논의는 전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장주의 지배연합은 나름대로 일관된 기조 하에 두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들의 속셈은 교육을 사적논리의 지배에 맡기고 경쟁구조를 더욱 견고화하여 교육의 사회통제 기능을 강화하고 더불어 이를 안정적인 대물림 구조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에 담기조차 짜증나는 뜨거운 감자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격론의 귀결점은 결과적으로 공교육, 민중교육권의 향방과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사교육비를 잡아보겠다고 정부가 나섰지만 그 꼴이 소 잃고(팔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데다 의지도 대단히 의심스럽다. 극단 수준까지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고 그 규모가 엄청나게 “팽창”하게 된 가장 큰 책임은 ‘국민의 의식’이 아니라 지난 몇 년 간의 정부 정책에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 부분을 생략한 채 사교육비 문제를 그간의 정부 정책기조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공교육 부실’ 운운하며 실효성마저 의심스런 방안을 내놓고 일방통행식으로 진행하면서, 여론조작을 포함 보수언론과 합작하여 대대적인 언론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그 덕택인지 무엇인지, 현재의 논란은 대단히 ‘천박하고 비생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교육적, 사회적 파장을 판단하기에 앞서 교육부 방안을 놓고 “전교조는 왜 맨날 딴지만 거냐, 교육부가 내놓은 방안이 문제도 많고 마음에도 안 들지만 일단 그거라도 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라는 반응조차 만들어지고 있다.
손댈 수 없어 보일 지경으로 심각해져버린(일단은 이걸로 먹고사는 집단이 너무 많다. 실업대책이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사교육 증가 문제나 평준화가 봉착한 어려움은 한국의 독특한 교육기회 확대 면모와도 관련이 있다. 한국은 무상이 아닌 유상(사립, 사부담에 과잉 의존)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기반하여 교육기회가 확대되었으며 강력한 국가주의적 통제 모델 속에서 정통성 확보라는 정치적 이해마저 중첩되었다. 국가 교육정책은 특정 집단에게 독점되어 경제논리나 정치논리에 휘둘렸으며 여기에서 노동자, 민중은 교육권의 주체로서 전면에 나서기 어려웠다. 그보다는 늘 정책의 대상, 약간의 시혜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탓인지 교육에 대한 대중의 관념도 왜곡된 방향으로 형성된 것이 사실이다. 봉건적 신분질서가 급격히 와해되고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공공성에 입각한 근대적 교육질서를 세우기도 전에 교육은 지배자들에게는 통치의 수단, 대중들에게는 계층상승을 위한 유력한 도구로 비춰질 수밖에. 진보적 교육운동의 흐름은 번번이 막혀버렸고 일방통행식 국가교육정책 시행이 남발했다. 사실, 중등교육 단계에서 공교육은 계층분해의 장치로 기능했으며 이에 따라 교육을 계층 상승의 사다리로, 일종의 ‘투자처’로 인식하는 것이 만연했다. 좁디좁은 ‘성공’의 가능성 속에서, 엄청난 사회불평등, 이를 직접 대면하고 해체하기보다는 ‘우회적으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개개인의 죽기살기식의 경쟁에의 몰입. 이는 우리 노동자, 민중의 계급성에 입각한 교육문제 인식의 기회를 봉쇄하는 장치였다. 이처럼 교육권은 ‘기본권’의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마땅한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개인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획득’해야 하는 재화처럼 각인되었다. 이런 속에서 지배계급은 치열한 경쟁 메커니즘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제도교육을 사회통제기구의 일환으로 활용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교육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드높았으나 비본질적인 차원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런 한국적 지형을 너그럽게 헤아려 백보 양보한다 치더라도, 그래서 이런 공모 아닌 공모 속에서 그 누구도 마땅한 대안을 선뜻 내놓지 못할 정도로 교육문제가 심각할 대로 심각해져버렸음을 인정한다 해도, 대중의 교육에 대한 인식이 기득권층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천박하고 비본질적인‘ 차원에 묶여 있음을 수긍한다 해도, 정부 정책의 과오와 그 노선의 반민중성, 반교육성을 비판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다. 교육문제를 더 얽히게 만들고 교육권과 공공성의 토대를 훼손한 최대 주범은 바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노선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따져보자. 90년대 사교육비 폭등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94년의 수능 도입, 99년의 ‘과외금지 위헌판결’로 인한 과외 규제정책의 무력화, 02년 입시전형의 다양화로 인한 입시부담 가중 등이다. 여기에 덧붙여 7차 교육과정 도입에 따른 교과의 난이도 상승, 우열반 편성, 입시중심 과목 선택 등의 부작용과 함께, 무분별한 특목고 확대에 따른 초?중학교의 입시경쟁 격화 등이 사교육 폭발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학교교육만으로 대비할 수 없는 수능의 도입, 운영 및 선택권 확대를 빙자하며 도입된 7차 교육과정은 의도적으로 학교교육을 무능하게 만들고 있으며 불안심리에 휩싸인 학생, 학부모를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아 온 것이다. 이렇게 현재의 논란을 천박한 수준으로 격하시킨 일차적/직접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흔히 거론되는 “한국교육의 위기”와 그 원인에 대해 정확히 짚고 다시 공교육의 역할과 기능을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이야기가 모아져야 할 시점에 불필요한 쪽으로 논란이 번지게 만들고 총선용으로 활용하려 들고 있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마녀사냥 하듯 평준화를 두들겨 패 만신창이를 만들고, 사교육 의존 구조의 문제를 비용의 문제로 환원하여 대중의 의식을 현혹하기에 바쁘다. 근본적인 원인을 깊게 따지고 들면 교육부의 방안이 그야말로 “유효시한이 지난 해열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눈치채기 어렵지 않다. 지금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괴로운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 만은 전 계층들은 교육에만큼은 마치 ‘로또’ 당첨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출혈적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교육 수요발생 원인을 근본적으로 짚지 않은 채 처방되는 근시안적 대증요법은 이미 폭넓게 번져버린 사교육 의존 행태는 전혀 바꾸지 못한 채 80년대 식의 엄혹한 학교입시체제까지 얹어버릴 게 뻔하디 뻔하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10년, 20년이 지나 지금 학교교육을 경험한 세대가 ‘학교에 대한 안 좋은 추억’ 아니 끔찍한 추억만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 뻔하지 않은가.
정부의 사교육비 경감방안의 본질은 학교 시장화 견인책
정부가 발표한 방안을 한 번 살펴본다. 전교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바가 정확하다. 단기대책은 학교 학원화 방안, 중기대책은 학교 시장화 방안, 장기 대책은 구색 맞추기 용에 불과한 그 추진 의지가 심히 의심되는 방안 말이다.
정부가 2월 17일 발표한 “사교육비 경감 종합대책”은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교육부로부터 1억 5천만 원을 지원 받아 수행한 연구 프로젝트를 기초로 한 것으로, 작년 말 한국교육개발원이 처음 발표한 뒤 이미 여러 차례의 공청회와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교원단체와 교육시민운동단체의 문제제기가 반영되지 않은 채 애초의 안에 몇 가지만 추가된 꼴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 같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안을 ‘종합대책’이라고 서둘러 확정 발표한 것은 결국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하여 여론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총선용 공약’이 아닌지 라는 의혹마저 인다. 방안 자체도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재탕 삼탕’인데다 그 실효성마저 대단히 의심스럽고 결국은 학교교육마저 파행으로 이끌 위험스런 요소가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종합대책’에 포함된 내용의 상당 부분은 종전에 이미 시행되었다가 실효성이 의심스러워 중단되거나, 지금 현재도 이미 편법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정부는 현재의 교육부총리인 안병영 장관이 교육부장관으로 재직할 때인 지난 1995년, 교육방송(EBS) 위성과외를 학교 안으로 흡수하기 위해 많은 학교에 위성수신기와 위성방송 수신용 안테나, 교실에는 소형 텔레비전을 대대적으로 설치한 바 있다. 그러나 그토록 법석을 떨었던 위성과외는 결국 과외열풍 해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채, 위성수신 안테나와 텔레비전은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녹슬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지금 와서 정부가 다시 ‘e-러닝’을 시도하겠다는 것은 방식만 약간 바꿔 같은 내용을 다시 재탕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수험생들에게 “대비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을 추가하여 부담을 키워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보충수업의 부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현재도 대부분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당국의 눈을 피해가며 방과 후 특기적성교육을 입시준비를 위한 문제풀이위주의 교과수업으로 편법 운영해 온지 오래인데, 만약 정부가 학교 내 보충수업을 허가할 경우, 학교 간 입시경쟁에 불을 붙여 ‘강제 보충수업’, ‘심야 보충수업’, 지도수당 조성을 위한 ‘불법 잡부금 징수’ 등의 편법으로 나아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과거 이 같은 불법 편법을 근절하기 위해 학교 내 보충수업을 금지했던 전례에 비춰볼 때, 이는 곧 ‘공교육 정상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교육을 잡기 위해 학교 교육을 파행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종합 대책 안에는 수준별 반 편성을 확대하겠다는 의지 또한 빼놓치 않고 있다. 현장교사들은 금방 안다. 수준별 수업의 그 ‘유혹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이는 현실에서는 수준차를 오히려 확대, 고착화시킬 뿐이며 학생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는 방안임을. 공교육은 계급을 가로질러 공통의 언어가 통용되는 ‘혁명적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상의 우열반 편성으로 귀결될 수준별 학습 집단 구분은 “나는 실업계 출신”이라는 자괴감말고도 “나는 10년 내내 하반”이라는 안 좋은 추억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만약 네이스가 정부 의도대로 추진되었다면 학생부에는 평생 ‘하반’ 꼬리표가 따라다녔을 거다. 교사 입장에서도 수업 준비 부담이 가중되어 결국 수업의 질은 저하되고 만다.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교육철학이다. 이러한 하향 평준화 논의는 사실 상위 5%내지 상위 10% 이내에 맞추어져 이들의 ‘피해’만을 중점 부각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의 교육철학이다. 수준별 반 편성은 상위에 초점을 맞춘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며 수준차를 좁히려는 목적과 전혀 상관이 없다. 트랙킹이 학교 안에 제도화될 때 교육자원이 상위 그룹에 집중되고 나머지는 ‘버린 자식’ 취급하는 것은 이미 외국의 사례, 우리의 실험에서 증명되었다. 7,80%의 학습자를 소외시키는 못돼먹은 교육과정, 2001년 7차 교육과정 투쟁에서 쟁점이 되어 현장에서 무력화된 수준별 반 편성이 은근슬쩍 사교육비 경감방안에 끼어 들어 현장에 잠입하려 하고 있다.
‘그들’도 인정하다시피 한국의 교육 불평등은 점점 심해지는 형국이다. 해마다 발표되는 “뉘 집 아그들이 서울대에 많이 들어가나” 발표만 보아도 불평등 현실은 금방 피부에 와 닿는다. 어느 자본주의 국가든 계급불평등과 교육불평등은 어떻게 해서든 매개되고 또 교육을 통해 불평등이 재생산되고 있지만 한국에서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작동하는 방식은 다소 천박하고 극단적이다. 문화자본이니 아비투스니 하는 복잡한 얘기를 건너뛰면 90년대 들어 누구나 알 수 있는 불평등을 매개하는 직접적인 고리는 바로 ‘사교육’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이 천박한 연결고리만 박살내면 교육불평등이 완화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사교육이지만 사교육의 수요를 생산하는 교육시스템을 혁파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결실도 거두기 어렵다는 게 현재의 한국교육이 처한 난마처럼 얽힌 사태다. 초반에서 언급한 대로 ‘학벌주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서열화된 대학체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로또 심리를 부추겨 학력, 학벌경쟁을 만드는 진원지인 ’노동의 문제, 계급의 문제’는 그래서 우리가 언제든 회귀해야 하는 출발지인 것이다.
시장주의자들은 평준화를 왜 그토록 미워하는가?
한편, 2001년부터 시장주의자들은 고교평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문제삼기 시작한다. KDI를 필두로 평준화를 문제삼는 논문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고, 2003년에는 보수언론을 필두로 평준화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도지사, 정운찬 서울대 총장 등 재계, 정치계, 교육계 인사들도 폭탄성 발언을 쏟아내며 자신의 ‘교육적 소신’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오히려 교육부가 ‘평준화 유지, 보완’ 입장을 밝히며 진화에 나서는 이상스런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시장주의 지배연합이 평준화를 문제삼는 지점은 다채롭지만 논란이 거듭될수록 비약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꾸준한 공세 끝에 급기야 2003년에는 교육 바깥의 문제(이를테면, 집 값 상승) 원인도 평준화라는 기괴한 주장을 내놓았다. 평준화시기에 일어난 모든 문제는 평준화 탓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비약을 일삼으며 평준화를 흔들어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교육을 상품, 시장으로 만들고 그 상품화, 시장화된 교육을 해외자본에게 폭넓게 개방하는 정책 추진에서 평준화는 엄청난 걸림돌이나 마찬가지이다. 공급자간의 경쟁과 수요자의 선택이라는 메커니즘과 평준화는 전혀 상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준화의 틀을 깨지 않는 이상 교육을 시장화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서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보다 안정적인 대물림 교육구조를 갈구하는 상층계급은 평준화 해체를 통해 자신들의 비뚤어진 계급분리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한다. 평준화 해체 공세는 이들의 어긋난 분리 욕망을 최대한 자극하며 진행되고 있다. 이는 ‘수월성 추구’, ‘선택권 확대’, ‘엘리트 양성’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곤 하지만 제 자식이 ‘천한 것’과 한 학교, 한 교실에서 어울리는 게 싫다는 게 본심이며 될 수 있는 한 빨리 안정된 트랙에 자기 자식을 진입시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기실, 고도성장이 벽에 부딪치고 계급구조가 굳어지면서 서민들의 똥통학교(?)와 귀족학교를 갈라치는 '불평등 교육체제'의 도입 압력은 이미 전방위로 몰려들고 있다. 한국에서 출구 찾기에 짜증이 난 부유층은 아예 '조기 유학' '미국시민권 획득'을 통하여 별개의 트랙을 개설해 나가거나 거주 공간의 분리가 반영된 강남 8학군, 정부의 ‘평준화 보완’ 명목으로 도입된 특목고, 자립형 사립고 등을 통해 대물림 구조는 그간 고착화되어 왔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평준화 해체를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최대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는 평준화 해체 주장의 논거를 살필 차례다. 평준화가 다양한 교육적 욕구를 가로막고 선택권을 봉쇄하여 결국은 국가경쟁력에도 해악을 끼친다는 “하향” 평준화 시비는 그래도 ‘그들이니까’하고 넘어가 줄 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실증적 근거가 없는 ‘주장’에 불과했기 때문에 하향화를 근거로 정부가 평준화 해체 입장을 노골적으로 천명하기는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정말 가관인 것은 ‘평준화가 교육형평성을 훼손했다’는 주장을 열심히 펼친다는 것인데, 하향평준화 시비보다 ‘정서적으로’ 평준화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평등’의 문제이기 때문에 ‘평등’ 문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그들이 평준화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쉽지 않다.
최근에 나온 서울대와 KDI의 보고서는 각각 형평성 문제와 하향평준화 문제를 공략하는 용도로 제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근거하여 보다 대대적인 평준화 해체 공세를 펼칠 기세다. 형평성 문제와 평준화를 최근에 과감히 연결시킨 것은 바로 학벌주의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이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은 지난 1월25일 "입시제도의 변화: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무리하게 평준화 정책의 실패를 지적했는데, 이는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마저 의심케 할 정도의 주관적인 해석으로 여론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보고서는 1970학년도부터 2003학년도까지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의 입학생의 인적사항을 바탕으로 출신지역, 부모의 직업과 학력이 입학 가능성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보고서는 교육제도가 부익부빈익빈의 악순환을 재생산한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을 내놓은 바, 대도시, 특히 서울 강남지역에 살수록, 부모의 학력이 높을수록, 부모가 고소득 전문직종에 종사할수록 입학률은 뚜렷하게 증가했다. 이는 현재 교육체제가 부와 학벌의 세습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교육기회의 평등조차 실현하고 있지 못함을 말해준다. 사실 이 보고서 덕에 우리 사회에서 부와 학력의 세습이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며 여론의 추이는 결코 해체론자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해체론자들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던 분위기는 교육부총리의 ‘교사평가’ 발언과 이에 대한 언론의 집중 조명으로 쟁점은 급속히 ‘교사평가’ 문제로 이동해버렸다.
신자유주의 교육담론의 진원지 격인 KDI 역시 최소한의 형식논리조차 무시한 채 견강부회 식으로 평준화제도를 공격해온 집단으로 유명하다. 올해도 이 기조는 어김없이 확인되었다. KDI는 지난 2월 23일, 보고서 전문도 공개하지 않은 채, "고교평준화정책이 학업성취도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실증분석"이란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비평준화정책이 평준화 정책에 비해 성적 상승효과가 있음을 밝혔고 경제일간지들을 중심으로 선정적인 표제 아래 KDI의 발표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연구방법에 있어서는 고1 학생이 2학년으로 진학한 이후 어떻게 성적이 변화했는가를 살펴본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고1 학생과 고2 학생을 비교하여 성취도 향상결과를 측정한 것으로 드러나 억지논리로 평준화를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문제는 사실 확인도 전에 언론은 사실인양 서둘러 보도함으로써 평준화의이미지를 깎아 내리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교육은 ‘천부인권’이다. 다시 말해, 교육은 인간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초로서, 교육의 권리는 생존권적 기본권인 셈이다. 따라서 이 권리 앞에서 누구나 평등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는 어떠한 이유로든 차별이 행해져서는 안 되며 나아가 질 높은 교육을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허나, 생존을 위한 기본적 권리인 교육에 대한 책임을 개개인에 떠밀어서는 ‘평등한 권리 보장’은 실현되지 않을뿐더러 교육이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나아가 사회적 생산성도 높아지지 않는다. 사회가 나서서 교육권 보장 장치를 마련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현실이 교육에도 고스란히 반영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공적 장치’가 바로 공교육인 것이다. 즉, 공교육은 만인의 평등한 기본권인 민중교육권 실현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장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교육을 통해 천부인권이자 생존권적 기본권이기도 한 교육권을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수 있게끔 그 틀을 엮어내고 내용 채우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현재는 이런 공교육의 역할에 비추어 평준화 정책 시행과정을 평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급하게는 ‘보완’인양 거론되고 있는 자립형 사립고, 특목고 확대 흐름부터 끊어내야 한다. 그리고 비평준화 지역에서 평준화 도입운동을 활발히 벌여야 한다. 이미 몇 개 지역에서는 고된 여정 끝에 결실을 거둬나가고 있다. 평준화 확대 흐름에서 복병처럼 존재하는 것은 ‘외국교육기관특별법’(6월 국회에서 입법 시도될 예정), ‘교육특구지정’(지역특화발전특구법은 3월2일 국회통화) 따위의 ‘자발적 자유화 조치’를 틈탄 평준화 해체 시도다. 이런 따위의 ‘평준화 보완의 유혹’에 맞서지 않는 한 평준화의 틀은 금새 허물어질 것이다.
교육 시장화, 안정적 대물림 구조 만들기 책동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의 철의 규범
현 정부는 아니나 다를까 겉으로는 ‘공교육정상화’, ‘교육의 공공성강화’를 입에 올리지만 그 내용은 이러한 기조와는 전혀 딴판이다. ‘공교육정상화’를 입에 올리지만, 포함된 내용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학교를 학원처럼 만들어 입시경쟁체제를 강화시키고 특목고, 자사고, 외국교육기관 따위를 대거 도입해 평준화의 틀을 점진적으로 해체하는 한편 학교 내에서는 ‘갈라치기 반 편성’을 확대하여 교육에서의 ‘분리주의’를 실현하는 방책들이n 그것이다. 사교육비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경감’ 운운하고는 있지만, 이를 비용의 문제로 단순화시키는 오류와 ‘학력지상주의’적 교육관을 드러내고 있다. 사교육 문제는 경쟁의 방식을 바꾸거나 학교가 학원이 하는 기능을 일부 가져온다고 해서 결코 해결될 리가 없다. 어떤 기준에의 도달이 이미 목적이 아니고, 지금의 서열화된 대학체제, 고용불안 임금 차별 등 불평등한 노동시장 구조 하에서는 ‘남보다 더’ 식으로 경쟁은 끝도 없이 격화될 소지를 안고 있다. 정부는 다양한 교육개방, 시장화 메뉴를 준비하고 있다. 개방을 위한 자발적 자유화 조치 및 교원 유연화, 평준화 정책 폐기의 움직임이 올해 본격적으로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연초부터 교육정세는 복잡하고 다종다기하게 전개되고 있다. 자본은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시도를 진행 중이다. 전경련은 대학을 기업처럼 만들어야 된다 떠들고 자립형 사립고를 더 많이 만들어야 된다고 ‘교육개혁안’을 거침없이 내놓고 있다. KDI는 천박한 관념을 ‘숫자놀음’으로 숨기려들며 대중을 현혹한다.
교육운동은 ‘견고한 상식의 벽을 두드리는 비애 가득 찬 작업’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식’처럼 굳어진 ‘자본의 기준’을 노동자, 민중의 기준으로 대치하고 연대의 자리를 만드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학벌주의를 넘어서도 능력주의가 우리를 기다린다. 계급성에 근거하지 못한 채 개인의 차원에 매몰되어 부르주아의 교육관념을 자기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온 노동자, 민중이 교육권의 주체로 거듭나기는 정말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육에서의 계급투쟁은 그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었음을 인식하자. 올해는 교육이 시장화 될 것이냐 공공성이 강화될 것이냐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노동자, 민중이 우리의 교육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느냐의 기점이 바로 올해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