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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3.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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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들, 또는 이데올로기의 파편들

장귀연 | 회원
2월 4일. 스포츠신문 보도, "탤런트 이승연, 누드 사진집 촬영차 괌으로 극비출국"
2월 12일. 이승연, 누드 사진집 촬영 기자회견, 종군위안부 테마 밝혀 / 서비스 제공사 로토토 주가 급등 / 여성단체 및 종군위안부 관련 단체, 일제히 비난 성명 / 안티 이승연 카페 개설 하루만에 가입자 1만명을 넘는 등 네티즌 비난 빗발
2월 13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이승연 사진집 제공금지 가처분 신청 / 관련업체 주식 큰 폭 하락 / 이동통신 3사, 컨텐츠 제공 거부 / 협찬사 홈페이지 서버 다운
2월 14일. KBS, 다음날 방영 예정 프로그램의 이승연 출연분 삭제 결정 / 이승연과 제작기획사 네띠앙엔터테인먼트, 종군위안부의 아픔을 위로하려는 기획 의도가 왜곡 보도되었다고 주장 / 포털사이트 네띠앙 회원 1000여명 탈퇴
2월 16일. 제작사, 누드 사진집 기획 중단 발표, 기획대표 삭발
2월 17일. 이승연, 나눔의 집 정대협 등 방문 사죄
2월 18일. 제작사, 1차 촬영분에 대한 공개시사회 제안 "직접 보시면 우리의 참뜻을 이해해 줄 것" / 이승연, 수요집회 불참 / 비난 다시 확산
2월 19일. 제작사, 촬영자료 소각

정확히 일주일의 해프닝이었다. 내용으로만 보면, 별스러울 것도 없다. 어떻게든 '튀어' 보려다가, 대중의 '코드'를 잘못 읽어, '대박' 아닌 '쪽박' 찬, '머리나쁜' 연예기획사와 연예인 얘기다.
쯧쯧, 그 한심함에 혀를 찰지언정, 이제 한바탕 해프닝도 일단락되고, 언제나 그렇듯이 슬슬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가는 모양이다. 뭐 물론,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사건도 아니다.
그러나 또한 이 사건은, 한국 사회라는 태피스트리의 일부분 또는 직소퍼즐의 한 그림조각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야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해프닝에 불과하지만, 이외에도 무수한 그림조각들이 널려 있고, 그 조각들을 맞추어 보았을 때, 한국 사회 풍경의 윤곽이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난다. 솔직히 내게 있어서, 그 완성된 풍경의 모습은, 실소라기보다는, 섬. 뜩. 하다.
이른바 '이승연 누드집 사건'에는, 대중들(그리고 우리들?)을 관통하며 마치 성감대를 애무하듯 강렬하게 자극하는 욕망들, 또는 더 정확히 이데올로기의 파편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다른 역시 사소한 조각들 옆에 놓아보면, 그 윤곽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승연 누드집 사건을 씨실로, 다른 풍경들을 날실로 하여, 하나의 태피스트리를 짤 수도 있다. 그 낱실들의 이름은 세 가지, 자본주의, 남근주의, 민족주의다.

벌거벗은 자본주의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경악스러운 책 광고에 눈이 머물렀으니, 책 제목은 <힘, 빼앗는 사람 뺏기는 사람>이었다. 광고 카피는 다음과 같았다. "회사에서 어려울 때 퇴출당하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이 책의 핵심은 힘을 빼앗는 데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대가 힘을 빼앗기고도 억울하거나 손해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미 수년 전 일이다. 공전의 히트를 쳤던 광고 카피, 심지어 알만한 친구들조차 내게 메일을 보내며 "부~자 되세요"를 외치는 사태에 직면하여, 생경스럽다 못해 경악했었던 것. 그러니 이제 면역이 될 만한데도, 나는 촌스럽게 또 놀라고 만다. "힘을 빼앗는" 법을 가르친다는 이 책이 히트를 칠까. 어쨌든 최근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예담이는 열두살에 천만원을 벌었어요>와 <아침형 인간>이다.
<힘, 빼앗는 사람 뺏기는 사람>, <예담이는 열두살에 천만원을 벌었어요> 옆에, 성현아, 고소영, 이혜영, 권민중, 함소원, 이지현 (그리고 이승연?) 등등의 누드집이 놓인다. 작년에만 해도 10여 명의 연예인들이 누드 사진집을 냈다. 이승연 이전에도 연예인 누드에 대한 비판은 많았다. 몸을 상업화한다, 라거나, 벗어서 쉽게 돈 벌려고 한다, 거나...
그러나 분명히, 몸이든 머리든 성기든 발가락에 낀 때든, 상업적으로 팔아치울 수 있다면 모조리 팔아치울 것이며, 벗든 일하든 얻어맞든 허리를 구십도로 꺾으며 굽실거리든 물구나무서서 곤두박질을 치든, 돈을 벌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것일지니!…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정언명령 아니던가.
천박한 자본주의와 고상한 자본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인간과 인간의 활동이었던 모든 영역들을 교환가치의 속국으로 만드는 것, 조그마한 틈새라도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 상업화하는 것, 자본주의 그 자체의 속성이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것들, 머리속에 잠깐 스치고 지나간 생각, 아름다운 미소, 벌거벗은 알몸… 이 모든 것들이 돈이 되고 대박의 꿈이 되고, 자본의 노예시장에서 팔리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열두살에 돈 벌기 위해서 뛰고 남의 힘을 빼앗고 빼앗기는 아귀다툼을 벌이는 바, 이 풍경은 지옥도가 아니라, 벌거벗은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벗는 것으로 돈이 된다면, 그 어찌 아름답지 아니할손. 이승연은 참으로 즐거운 꿈을 꾸었을 따름이다. 결국 누드라면 자본주의의 누드. 탐욕으로 벌겋게 충혈된 연예기획사의 카메라는, 화사한 자본주의의 누드를 찍어낸다. 누가 이 여자의 욕망에 돌을 던지겠는가. 돈과 돈과 돈과 돈…의 누드집은 연예인의 알몸보다 훨씬 적나라하고 음란하니.
- 그대, 대박을 꿈꾸며 수음해 본 적은 없는가?

남근의 환타지

그러나 열몇 번째의 연예인 누드집으로는 대박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여 테마 기획 아이디어를 냈으니, 솔직히 그 자체로는 굿 아이디어였다. '종군위안부', '성노예'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그 야릇한 자극의 감각. 무릇 건강한 보통 사람이라면 성적 환타지를 몽상하기 마련이요, 그 은밀한 성적 환타지에서 빠지지 않는 일부분이 성노예 테마이니 말이다.
넓게 보면 강간의 환타지이지만, 강간을 좀더 극적이고 자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디테일한 시나리오들이 몇 개 있는데, 이른바 '돌림빵'이라고 불리는 윤간이나 눈물 흘리며 다양한 성행위를 강제당하는 성노예에 대한 환상은 그중 중요한 모티브들이다. 강간과 윤간과 성노예 테마를 끊임없이 변주하는 수많은 야동과 야설들. 군복의 남자들 옆에서 처참한 표정으로 드러난 가슴을 가린 이승연의 사진은, 정확히 이 환상의 모티브를 재현한다. 은밀한 골방의 야동과 야설을 끌어내기, 연예기획사의 테마 기획은 핵심을 잘 잡았다.
물론 현실과 환상은 구별해야 한다. 상상은 자유지만, 그게 현실로 옮겨오면 범죄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얼마전 여중생을 납치해다 쇠사슬에 묶어놓고 노예 삼으려 한 엽기적 범죄가 있었고, 그 기사 밑에는 "현실과 환상을 구별합시다" "야겜을 너무 많이 했군요, 쩝"이라는 리플들이 달렸었다. 성적 환타지를 몽상하는 건강한 보통 사람은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말로 '상상은 자유'인가?
욕망과 상상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환상이다. 그러한 환타지를 보는 것은 페니스에 달린 눈. 펼쳐진 세계는 나의 자유로운 상상이 아니라, 남근주의의 환타지 월드다. 페니스에 달린 눈답게, 여성이라는 대상은 성기로 환원되어 보일 뿐이다. 윤간은 남근들의 연대이고, 성노예는 남근의 권력을 지칭한다. 빳빳이 발기해 치켜세워진 권력의 눈 아래로 보이는 세계. 어쩌면 자본주의보다 더 역사가 깊을 이데올로기의 파편들이다.
"어찌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독하는 저런 일을!"이라는 분개 뒤에서 기억을 더듬어보자. 일본군 성노예의 참상을 폭로하는 진지한(?) 기사 속에서, 하루에 몇 명 받았다는 숫자와 다양한 성적 학대의 사례에 눈이 가지 않았는지. 분개하면서 동시에 야릇한 성적 자극에 몸을 떨진 않았는지. 그리하여, 폭력의 희생자일 뿐 절대로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경험이 아닌데도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긴 삶 동안 수치스러워하도록 만든, 남근의 권력자가 아닌지.
그러니,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려고 했다"는 이승연과 제작기획사 측의 강변도 전혀 뻘소리는 아닌 셈이다. 지금까지의 폭로 기사들을 보며 은밀한 상상을 즐겼던 사람들이 왜 이번에는 이렇게 난리냐, 는 억울함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비난의 목소리 속에 남근주의에 대한 의식과 성찰을 찾아보기 힘드니, 더욱 착잡할 뿐. "보지를 찢어죽일 년" "너나 일본 가서 가랑이를 벌려라"… 이승연이라는 또다른 여성에게 전이된 무지막지한 남근의 폭력성.
- 그대, 윤간을 꿈꾸며 수음해 본 적은 없는가?

배타적 공동체

누드는 검증된 대박의 꿈이요, 골방의 은밀한 성적 환타지를 적극적으로 끌어내려던 전략 역시 시류에 비추어 성공 가능성이 다분했었다. 제작기획사와 이승연이 미처 생각을 못한 바람에 걸려 넘어진 것은, 이른바 '민족감정'. "고구려사 문제와 독도 문제로 격앙되어 있던 민족감정에 불을 질러"라는 기사가 전혀 얼토당토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 고구려사 문제와 독도 문제. 수많은 게시판이 "뙤놈들, 짱깨놈들" "쪽바리놈들"이라는 욕설로 도배되게 만들었던 그 문제. 그러나,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천수백여년전 고구려가 반드시 한국(과 북한)의 역사에 속해야 할 근거는 거의 없다.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역사적 자료만큼 일본 역시 비슷한 자료를 내세울 수 있다. 문제는 정치적인 것, 역사란 항상 현재의 정치성에 따라 전유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은 '상상적 공동체'라는 말은 정확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재의 상황들을 가로지르는 정치적 상징의 구획을 따라 형성된다. 따라서 '민족'의 의미는,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상징적 공동체이다.
이승연이 좌초한 정치성은 어떤 것인가. 나는 의심한다. 이승연의 테마가, '우리가 당한' '수치스러운' 역사였기 때문에, 그토록 대중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것이 아닌가 하고. 우리의 '자랑찬(?) 역사'를 테마로 했다면, 과연 그렇게 큰 반대가 있었을까 하고.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비해,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행했던 학살과 강간에 대해서 알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너무나 극소수이기 때문에, 그런 회의는 짙어진다. 미군에 의한 여중생 죽음 사건은 엄청난 촛불의 물결을 일으켰지만, 지금도 다른 나라에 진출(!)한 한국 공장에서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 노동자 학대 사건은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어차피 당한 자가 떠들어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편히 잘 수 없다'는 우리 속담도 있거늘.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짱깨놈들, 쪽바리놈들, 양키놈들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일견 올바르고 아름다워 보이는 대중적 민족주의,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제국주의의 거꾸로 비친 거울상, 즉 제국에 대한 은밀한 욕망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지만, 진출하는 것은 아름다운.
'독도는 우리땅' 노래의 마지막 후렴,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일본땅, 독도는 우리땅"을 이렇게 바꿔 부르곤 했다. "하와이는 미국땅, 미국은 일본땅, 일본은 우리땅", 즉 하와이도 미국도 일본도, 다 우리땅이기를 기원한다. 작은 장난인가, 은밀한 욕망인가? PSSP
- 그대, 제국을 꿈꾸며 수음해 본 적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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