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시간, 그 변증볍적 관계에 대하여
질문 하나. ‘빠름’이라는 단어는 당신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가? 스포츠카? 이동시간을 급격히 단축해준 고속철도? 인터넷으로 다운을 받거나 업로드 하는데 드는 시간? 은행 창구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느낌? 다시 질문. ‘빠름’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일상 속에서 은행 창구에서 기다리지 않고 빠른 전송속도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처리하고 무슨 일이 있어 이동할 경우에라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가장 빠른 수단을 찾아보는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빠름이 좋은 것이라 의식하면서 살아간다기보다는 이미 몸으로 그것을 재현해내고 있다. 즉, 어릴 적 가족이 외출하고자 하더라도 화장을 하느라 늑장을 부리시던 어머니를 채근하는 아버지의 모습- 사실은 가사일을 정리해야만 했기에 화장하는 시간이 긴 것처럼 생각될 뿐이다. 그전에 가사일 정리하시는 아버지는 기억나는가?- 명절 기간에 교통체증에 따른 귀향(및 귀경)길의 고통스러움, 정해진 시간에 얼마나 많은 정답들을 채워낼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각종 시험들 등에서 우리는 빠름 내지는 신속함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빠름’은 이처럼 긍정적인 의미로만 채워졌으며 우리는 그에 맞춰 살아가는 것일까?
사실, 빠름은 항상 긍정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들은 특히 도로에서 잘 드러나는데 《Resurgence Magazine》이라는 잡지의 부편집장인 제이 그리피스(Jay Griffiths)는 최근에 자신의 책 『시계 밖의 시간』에서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흔히 생각하는 교통사고와 관련된 위험 및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갈수록 확대되는 환경오염 외에도 그녀는 도로의 건설과 빠름에 대한 강조를 통해 사람들이 이동에서 이동시간의 단축만을 고려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우선, 도로의 건설은 당연하게도 인간과 그 곳에서 살고 있던 각종 동식물들을 위한 여지들을 없애버리고 오직 자동차만을 위한 공간으로 장소를 변형시켰는데 이에 따라, 점차 ‘느림’은 부정적인 의미로 채워지게 되었다. 즉, “영어에서 ‘느림’(slowness)은 일반적으로 동정적이거나(a slower learner 학습지진아), 조롱(예를 들어 sluggish 게으른/나태한/굼뜬)과 의심 어린(loitering 빈둥거리다/늑장부리다) 눈길이 투영되고 있다. 소처럼 느린 사람을 bovine(소 같은/둔감한)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경멸을 의미한다.”(『시계 밖의 시간』, p. 79)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동에 걸리는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는가[“더욱 더 빨리!!”]만이 강조되게 되었고 따라서, 예전에 알고 있던 풍경이 지닌 시간과 느린 이동 속에서 표출되는 자발성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진행방향도 이미 결정된 도로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이동시간의 단축에 주안점을 둔 수동성으로 인해 ‘왜 빨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고 오직 ‘어떻게 빠르게 할 것인가’라는 기계적인 효율성에 대한 강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직관적이면서도 암시적인 뉘앙스를 사람들은 잃어가고 있으며, 내면의 반성적 사유에서 우러나온 개성 있는 사고보다는 효율적이고 간단명료하게 전달하는 것, 자동적인 사고 그리고 의례적인 대응이 널리 확산되었다.(위의 책, pp. 70~83)
물론, 그리피스가 도로의 건설이 이 모든 것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도로의 건설은 도로에 대한 관심과 투자 등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 없이는 나타날 수 없으며 따라서, 우선은 이러한 배경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한다. 이에 대해 캐나다의 정치경제사가이자 미디어학자인 해롤드 이니스(Harold Innis)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이러한 흐름은 공간에 대한 강조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주장하였다. 봉화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아주 먼 옛날에도 사람들은 정해진 지역 내에서의 소통만이 아닌 거리가 어느 정도 있는 곳에서의 소식들을 필요로 하였다. 왕의 명령이나 적의 침략 혹은 조운선[세금으로 받은 쌀을 나르는 선박]의 출발 등을 알리는데 사용되던 봉화는 시간보다는 공간에 걸쳐 소통할 필요가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인데 당연히, 좁은 영역에서만 한정되어 사람들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적 소통 수단은 인간의 역사에서 필수적이었다. 서구에서도 이러한 필요성이 나타나는데 가령, 종교개혁 시기에 도입된 인쇄기는 보다 많은 사람들 즉, 공간을 가로질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내기 위해 필요하였던 것이며 거기에 사용되는 문자들 또한, 난해한 라틴어보다는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문자로 기입되기 시작하였다. 이 외에도 대제국을 건설한 대부분의 황제들은 이러한 공간적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어 이미 로마 시대에도 광활한 제국에 도로를 건설하고자 했던 노력들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강조와 대조적으로 시간에 대한 강조는 공간에 걸친 소통보다는 시간에 걸친 소통<<각주1 실은 이니스는 이를 시간적 편향(bias), 앞서의 공간적 소통은 공간적 편향이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편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 단어 자체가 지닌 다소 부정적인 느낌 때문이다. 즉, 이니스는 편향을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데 이에 대해 설명하려면 너무나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밝힌다. 다만, 이니스가 표현한 내용은 정확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이 각주를 추가하였다.>> 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어떤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인 지혜들 <<각주2[다소 극단적이기는 하나] 가령, 북극에서 사는 사람들과 사막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는 같을 수 없다. 이들에게 공간적인 소통보다는 그 지역 사람들 세대간의 소통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다.>>
을 세대에 걸쳐 계승하기 위한 수단들이 고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밝혀낸 것처럼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수많은 ‘옛날 이야기들’은 그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혜들을 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마도 가장 큰 형태의 소통도구일 피라미드 또한, 이러한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는 북쪽으로 향하는 긴 나일강의 흐름과 델타지역[이집트 북부의 삼각주]의 수많은 하류들에서 발생한 정기적인 범람으로 인해 계곡이 확장되었고 관개를 위해 범람에도 유지될 수 있는 인공 운하와 제방의 발전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널리 적용되는 규율과 거주민들의 협동을 필요로 하였으며 따라서, 이집트는 질서와 중앙화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건설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강력한 왕권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적 사회가 출현하였고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피라미드는 다시금 널리 적용되는 규율과 거주민들의 협동을 강조하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간/시간에 대한 강조가 역설적이게도 서로에 대한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사를 살펴보면 잘 드러나는 것인데 특히, 영토를 확장하여 경제적 필요를 해소하던 시대에 각각의 지역에서의 지혜들은 존중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이 지닌 시간들은 무시되기 쉬웠다. 가령, 시베리아 북부지방의 우고르 오스탸크 족은 어떤 시기에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여행하지 못하고 얼음 위를 조심조심 걸어 다녀야만 하기 때문에 그때를 ‘도보여행’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지역마다 그 곳의 특징에 따른 서로 다른 달력들이 넓은 영토에서 사용될 경우에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공간의 확장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는 경우에는 개별 공간의 시간에 대한 관심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각주3-오늘날의 시간 체계를 한 번 생각해보면, 이는 자명하다. 서울이든, 영국이든, 이집트이든 모두 “몇 년, 몇월, 몇일, 오후/전, 몇시, 몇분, 몇초”. 이들은 편리하지만, 지역적 특징은 전혀 담지 못한다.>> 따라서, 공간(의 이동)에 대한 강조가 강화되는 시기에 시간 체계는 계량화되어 획일성과 행정화된 단일성에 가치를 부여되며 이 외의 시간들은 특수한(혹은 보편적이지 않은) 것일 뿐이라 인식되어 결국, 배제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무차별적으로 획일화되면서 각각의 지역들이 지닌 특징들[혹은 그러한 특징들이 나타나게 된 이전의 시간들]에 대한 고려는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영토의 확장과 문화적 획일성의 부과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결과를 낳곤 한다. <<각주4-특히, 즉각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쟁을 한번 떠올려 보라. 어떤 지역에서의 삶을 시간을 두어 생각하기보다 각종 전쟁무기들에 힘입은 앞선 무력으로 공간(내지는 영토)을 점령하는 편이 훨씬 수월한 것이라 종종 생각된다. 이러한 특징은 과학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이는 어떤 지역의 토착 기술이나 전통적 지식 등과 같은 국지적 지식(local knowledge)에 대한 폄하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이러한 지식들은 ‘후천적이고 보수적이며 비효율적이고 열등하며 무지 혹은 신화에 의존한 것’일 뿐이라 매도되어 과학적 합리성에 따라 개선되고 교정되어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이 지역적 특징을 간과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와 이에 따른 국지적 지식의 유용성은 주로 PUS(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에서 제기되어 왔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종종 일본드라마를 보는데(그래봤자 두 편밖에 안 된다) 엄청난 과장과 유치함에 치를 떨면서도 가끔 그들이 던져주는 날카로움에 감탄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는 시기의 문제점이 일본드라마 《고쿠센》 제10화에서 날카롭게 묘사되고 있으니 한번 보시라~>> 한편 시간에 대한 강조 또한, 공간에 대한 관심의 약화라는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이는 앞서 시간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던 시대의 이집트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적으로 시간에 대한 강조라는 관심사를 처리해야 했던 이집트로는 돌을 운반하거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데 사용되는 비숙련 혹은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들은 자신의 지혜를 피라미드에 글을 새겨 기록하여 남기는 -따라서, 배우는 것과 새기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숙련된 혹은 정신노동에 비해 부차적인 지위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즉, 이집트는 대중들과 정치적 엘리트라는 이원론이 강력한 위치를 점하는 사회였다는 것이며 이러한 시간에 대한 강조를 통해 이집트에서는 지식의 독점이 출현하게 된다. 결국, 시간에 대한 강조가 공간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면서 그 사회에서 규정된 시간에 대한 강조만이 사회 성원들에게 요구되었으며 이러한 독점에서 벗어나는 지식이나 지혜들이 무시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각주5-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다름 아닌 종교재판이 행해지던 중세시대이다. 기독교적 교리관에서 벗어나는 모든 지혜나 지식들(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전쟁』을 보면 심지어 웃는 것까지도!!)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자들은 모두 처형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니스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심 어느 하나만을 옹호하지도 않았으며 대신, 이들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문제는 어떤 하나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는 시기에 그것에 익숙해지며 그것을 몸으로 체화함으로써 그러한 흐름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나타나지 않고 계속 강화된다는 것이며 이는 앞서 설명하였던 도로의 건설-이제서야 다시 되돌아와서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에서 너무나도 잘 드러난다. 애초에 도로의 건설은 공간적 소통을 좀 더 원활하게 풀어보고자 나타난 것인데도 불구하고 도로가 (개별 공간의) 시간에 대한 관심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점차 공간의 이동에 대한 관심만이 강조되게 된 것이다. 각각의 지역이 지닌 다양한 특징들에 대한 고려가 사라지고 점차 기계적 효율성만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도로의 건설이라는 단일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수단(인공물? 물리적 실재? 뭐라고 불리든 일상 속에서 매일 매일 접하는 것)들이 이러한 경향을 강화하고 있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또, 이를 통해 어떠한 지식들만이 유용한 지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권력을 획득하여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빠름은 항상 긍정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들은 특히 도로에서 잘 드러나는데 《Resurgence Magazine》이라는 잡지의 부편집장인 제이 그리피스(Jay Griffiths)는 최근에 자신의 책 『시계 밖의 시간』에서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흔히 생각하는 교통사고와 관련된 위험 및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갈수록 확대되는 환경오염 외에도 그녀는 도로의 건설과 빠름에 대한 강조를 통해 사람들이 이동에서 이동시간의 단축만을 고려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우선, 도로의 건설은 당연하게도 인간과 그 곳에서 살고 있던 각종 동식물들을 위한 여지들을 없애버리고 오직 자동차만을 위한 공간으로 장소를 변형시켰는데 이에 따라, 점차 ‘느림’은 부정적인 의미로 채워지게 되었다. 즉, “영어에서 ‘느림’(slowness)은 일반적으로 동정적이거나(a slower learner 학습지진아), 조롱(예를 들어 sluggish 게으른/나태한/굼뜬)과 의심 어린(loitering 빈둥거리다/늑장부리다) 눈길이 투영되고 있다. 소처럼 느린 사람을 bovine(소 같은/둔감한)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경멸을 의미한다.”(『시계 밖의 시간』, p. 79)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동에 걸리는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는가[“더욱 더 빨리!!”]만이 강조되게 되었고 따라서, 예전에 알고 있던 풍경이 지닌 시간과 느린 이동 속에서 표출되는 자발성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진행방향도 이미 결정된 도로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이동시간의 단축에 주안점을 둔 수동성으로 인해 ‘왜 빨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고 오직 ‘어떻게 빠르게 할 것인가’라는 기계적인 효율성에 대한 강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직관적이면서도 암시적인 뉘앙스를 사람들은 잃어가고 있으며, 내면의 반성적 사유에서 우러나온 개성 있는 사고보다는 효율적이고 간단명료하게 전달하는 것, 자동적인 사고 그리고 의례적인 대응이 널리 확산되었다.(위의 책, pp. 70~83)
물론, 그리피스가 도로의 건설이 이 모든 것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도로의 건설은 도로에 대한 관심과 투자 등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 없이는 나타날 수 없으며 따라서, 우선은 이러한 배경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한다. 이에 대해 캐나다의 정치경제사가이자 미디어학자인 해롤드 이니스(Harold Innis)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이러한 흐름은 공간에 대한 강조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주장하였다. 봉화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아주 먼 옛날에도 사람들은 정해진 지역 내에서의 소통만이 아닌 거리가 어느 정도 있는 곳에서의 소식들을 필요로 하였다. 왕의 명령이나 적의 침략 혹은 조운선[세금으로 받은 쌀을 나르는 선박]의 출발 등을 알리는데 사용되던 봉화는 시간보다는 공간에 걸쳐 소통할 필요가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인데 당연히, 좁은 영역에서만 한정되어 사람들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적 소통 수단은 인간의 역사에서 필수적이었다. 서구에서도 이러한 필요성이 나타나는데 가령, 종교개혁 시기에 도입된 인쇄기는 보다 많은 사람들 즉, 공간을 가로질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내기 위해 필요하였던 것이며 거기에 사용되는 문자들 또한, 난해한 라틴어보다는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문자로 기입되기 시작하였다. 이 외에도 대제국을 건설한 대부분의 황제들은 이러한 공간적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어 이미 로마 시대에도 광활한 제국에 도로를 건설하고자 했던 노력들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강조와 대조적으로 시간에 대한 강조는 공간에 걸친 소통보다는 시간에 걸친 소통<<각주1 실은 이니스는 이를 시간적 편향(bias), 앞서의 공간적 소통은 공간적 편향이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편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 단어 자체가 지닌 다소 부정적인 느낌 때문이다. 즉, 이니스는 편향을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데 이에 대해 설명하려면 너무나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밝힌다. 다만, 이니스가 표현한 내용은 정확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이 각주를 추가하였다.>> 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어떤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인 지혜들 <<각주2[다소 극단적이기는 하나] 가령, 북극에서 사는 사람들과 사막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는 같을 수 없다. 이들에게 공간적인 소통보다는 그 지역 사람들 세대간의 소통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다.>>
을 세대에 걸쳐 계승하기 위한 수단들이 고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밝혀낸 것처럼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수많은 ‘옛날 이야기들’은 그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혜들을 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마도 가장 큰 형태의 소통도구일 피라미드 또한, 이러한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는 북쪽으로 향하는 긴 나일강의 흐름과 델타지역[이집트 북부의 삼각주]의 수많은 하류들에서 발생한 정기적인 범람으로 인해 계곡이 확장되었고 관개를 위해 범람에도 유지될 수 있는 인공 운하와 제방의 발전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널리 적용되는 규율과 거주민들의 협동을 필요로 하였으며 따라서, 이집트는 질서와 중앙화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건설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강력한 왕권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적 사회가 출현하였고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피라미드는 다시금 널리 적용되는 규율과 거주민들의 협동을 강조하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간/시간에 대한 강조가 역설적이게도 서로에 대한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사를 살펴보면 잘 드러나는 것인데 특히, 영토를 확장하여 경제적 필요를 해소하던 시대에 각각의 지역에서의 지혜들은 존중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이 지닌 시간들은 무시되기 쉬웠다. 가령, 시베리아 북부지방의 우고르 오스탸크 족은 어떤 시기에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여행하지 못하고 얼음 위를 조심조심 걸어 다녀야만 하기 때문에 그때를 ‘도보여행’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지역마다 그 곳의 특징에 따른 서로 다른 달력들이 넓은 영토에서 사용될 경우에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공간의 확장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는 경우에는 개별 공간의 시간에 대한 관심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각주3-오늘날의 시간 체계를 한 번 생각해보면, 이는 자명하다. 서울이든, 영국이든, 이집트이든 모두 “몇 년, 몇월, 몇일, 오후/전, 몇시, 몇분, 몇초”. 이들은 편리하지만, 지역적 특징은 전혀 담지 못한다.>> 따라서, 공간(의 이동)에 대한 강조가 강화되는 시기에 시간 체계는 계량화되어 획일성과 행정화된 단일성에 가치를 부여되며 이 외의 시간들은 특수한(혹은 보편적이지 않은) 것일 뿐이라 인식되어 결국, 배제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무차별적으로 획일화되면서 각각의 지역들이 지닌 특징들[혹은 그러한 특징들이 나타나게 된 이전의 시간들]에 대한 고려는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영토의 확장과 문화적 획일성의 부과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결과를 낳곤 한다. <<각주4-특히, 즉각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쟁을 한번 떠올려 보라. 어떤 지역에서의 삶을 시간을 두어 생각하기보다 각종 전쟁무기들에 힘입은 앞선 무력으로 공간(내지는 영토)을 점령하는 편이 훨씬 수월한 것이라 종종 생각된다. 이러한 특징은 과학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이는 어떤 지역의 토착 기술이나 전통적 지식 등과 같은 국지적 지식(local knowledge)에 대한 폄하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이러한 지식들은 ‘후천적이고 보수적이며 비효율적이고 열등하며 무지 혹은 신화에 의존한 것’일 뿐이라 매도되어 과학적 합리성에 따라 개선되고 교정되어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이 지역적 특징을 간과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와 이에 따른 국지적 지식의 유용성은 주로 PUS(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에서 제기되어 왔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종종 일본드라마를 보는데(그래봤자 두 편밖에 안 된다) 엄청난 과장과 유치함에 치를 떨면서도 가끔 그들이 던져주는 날카로움에 감탄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는 시기의 문제점이 일본드라마 《고쿠센》 제10화에서 날카롭게 묘사되고 있으니 한번 보시라~>> 한편 시간에 대한 강조 또한, 공간에 대한 관심의 약화라는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이는 앞서 시간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던 시대의 이집트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적으로 시간에 대한 강조라는 관심사를 처리해야 했던 이집트로는 돌을 운반하거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데 사용되는 비숙련 혹은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들은 자신의 지혜를 피라미드에 글을 새겨 기록하여 남기는 -따라서, 배우는 것과 새기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숙련된 혹은 정신노동에 비해 부차적인 지위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즉, 이집트는 대중들과 정치적 엘리트라는 이원론이 강력한 위치를 점하는 사회였다는 것이며 이러한 시간에 대한 강조를 통해 이집트에서는 지식의 독점이 출현하게 된다. 결국, 시간에 대한 강조가 공간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면서 그 사회에서 규정된 시간에 대한 강조만이 사회 성원들에게 요구되었으며 이러한 독점에서 벗어나는 지식이나 지혜들이 무시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각주5-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다름 아닌 종교재판이 행해지던 중세시대이다. 기독교적 교리관에서 벗어나는 모든 지혜나 지식들(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전쟁』을 보면 심지어 웃는 것까지도!!)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자들은 모두 처형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니스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심 어느 하나만을 옹호하지도 않았으며 대신, 이들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문제는 어떤 하나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는 시기에 그것에 익숙해지며 그것을 몸으로 체화함으로써 그러한 흐름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나타나지 않고 계속 강화된다는 것이며 이는 앞서 설명하였던 도로의 건설-이제서야 다시 되돌아와서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에서 너무나도 잘 드러난다. 애초에 도로의 건설은 공간적 소통을 좀 더 원활하게 풀어보고자 나타난 것인데도 불구하고 도로가 (개별 공간의) 시간에 대한 관심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점차 공간의 이동에 대한 관심만이 강조되게 된 것이다. 각각의 지역이 지닌 다양한 특징들에 대한 고려가 사라지고 점차 기계적 효율성만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도로의 건설이라는 단일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수단(인공물? 물리적 실재? 뭐라고 불리든 일상 속에서 매일 매일 접하는 것)들이 이러한 경향을 강화하고 있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또, 이를 통해 어떠한 지식들만이 유용한 지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권력을 획득하여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