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의 구조조정정책과 4.13 총선
정부의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간의 입장 차이는 구조조정을 실행해 왔던 지난 2년 동안에도 주요한 쟁점들(무엇보다도 정리해고와 파업, 민영화 문제 등)에서 긴장과 충돌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그 입장 차이는 민중운동 일각에서 시민운동에 대해 약간 논쟁적으로 비판한 것을 제외한다면(김성구, 채만수 등) 공개적으로 토론되기보다는 자제해서 은폐되었고 많은 논자들은 양자의 봉합에 연연하였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더라도 같이 활동할 수 있는 부분이 많고, 파시즘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는 당면과제를 위해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는 논거,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은 시민사회와 계급사회라는 상이한 영역을 대상으로 하기에 상호적대적이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이어서 시민운동의 확산이 민중운동의 지형을 개선시킨다는 주장, 심지어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차이는 목표와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그 실현을 위한 전술·전략의 차이, 절차와 경로의 차이라는 논거도 있었다.
그러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당면한 정세, 당면한 과제에서 어떤 요구를 어느 만큼 같이 제기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양자간의 지향하는 이념과 목표, 전략적 과제에 대한 차이들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 그와 관련하여 두 운동이 각기 제기하는 당면 요구들을 평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논쟁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시민운동과 함께 나가는 민중운동'이라는 타협으로 인해 구조조정의 쟁점들이 시민운동적 관점으로 축약되어왔다. 그로써 시민운동 속에 민중운동이 억압되고 민중운동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정세가 형성되고 있지 않은가 한다.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과 함께 조성된 총선국면의 이데올로기 지형은, 이런 우려가 위험수준을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총선 시기 이데올로기 지형
총선연대가 발족하기 전 주요한 쟁점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가져온 파괴적인 효과와 그와 대비되는 재벌과 자산계층의 부와 소득의 독점적 증대, 이른바 '20대 80사회'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과 불신이 증대되면서 형성되었다. 이를 배경으로하여 폭로된 실세 고관집의 도둑사건, 옷로비사건과 파업유도 공작사건 등은 현 정부를 도덕적, 정치적 위기로 몰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집권당은 이른바 생산적 복지정책 운운하며 대중들에 일정하게 양보하는 정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민중운동은 국회의원 선거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심판의 자리로 가져가야 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부패한 제도정치권을 청산하고 진보정치의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는 막중한 과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반면 정부와 집권당으로서는 이런 지형을 돌파하는 특단의 조처들이 강구되어야 했다.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과 함께, 무엇보다도 이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제도언론의 여론조성으로 민중운동의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정부와 집권당에는 유리한 지형이 조성되었다.
즉 '20대 80사회'의 논쟁지형은 급속하게 해체되어갔고 선거국면에서 쟁점은, 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의 심판인가 아닌가 라는 것에서 60여명의 부패, 무능, 반인권 정치가의 물갈이인가 아닌가로 바뀌어 버렸다.
문제는 60여명의 정치가들의 재공천, 재선 여부일 뿐이고 나머지 제도권 정치와 정치가는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민주당을 찍어도 되고 한나라당을 찍어도 되고 심지어 자민련도 괜찮다, 다만 이 60여명만 찍지 말라! 낙천낙선운동은 집권당과 한나라당에서, 낙천낙선대상자들보다 조금도 더 나을게 없는 낡은 정치가들이 자신의 경쟁자를 정리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바꾸는가 라는 문제는 한번도 제기되지 못한 채 정체불명의 "바꿔!"가 맹위를 떨치게 된 것이다.
반면 위기로까지 몰렸던 정부와 집권당은 낙천낙선운동에서 탈출구를 발견하였고 발빠르게 이 운동을 지지함으로써(그것도 말로만 지지하고 나섰을 뿐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는데도) 반민중적인 정권으로부터 민주적 개혁정당으로 탈바꿈했다. 구조조정정책은 이제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총선 후에 계속 강화해야 할 개혁정책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조건이 형성되었다.(『사회진보연대』, 2000년 3월호; 손호철, 「종속적 신자유주의와 '초국적 자본의 정부'를 넘어서」, 4.13 총선과 김대중 정부 중간평가 토론회 발제문, 2000. 3. 15)
급속한 정세변화에 당혹스러운 것은 민중운동진영이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함께 나간다는 비판부재의 운동관은, 낙천낙선운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뒤늦게 낙천낙선운동이,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민중운동진영의 저항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효과를 낳고있다고 깨닫기는 했다.
함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진영은 그래도 낙천낙선운동이 나름대로 의미있다는 식으로 이 운동을 승인하고 이 운동의 효과가 조성하는 정세를 무기력하게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설령 민중운동을 강화시켜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복원시키겠다고 하더라도, 이를 위해 낙천낙선운동을 타격할 생각으로 좀처럼 발전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정세변화가 우연인가? 시민운동이 진행하는 선의의 선거운동이, 민중운동에 대해 예상치 못한 억압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해 시민운동은 민중대회위원회가 제시한 6대 민중요구들을 지금이라도 수용하고, 낙천낙선운동을 넘어선 반신자유주의 논쟁으로 선거지형을 바꿔갈 수 있는가?
필자는 이 모든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냐 반신자유주의냐 하는 쟁점을 억압하고 이 선거를 신자유주의냐 보수주의냐 하는 쟁점으로 제기함으로써, 이번 선거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재승인한다는 효과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이는 시민단체들의 신자유주의적 지향성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의도야 어찌되었든 시민운동은 낙천낙선운동으로 한나라당의 분열을 가져왔고 위기에 빠진 집권당을 구원하였다. 낙천낙선운동을 통한 현 정부와 시민단체간 이해관계의 조응은, 보수적인 정치가들이 제기하는 사전적인 음모론은 아닐지라도 결국 동일한 이데올로기지반과 신자유주의 연대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지난 2년여의 구조조정시기에 우리가 그렇게도 시민운동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민중운동내의 주요한 문제로서, 구조조정의 쟁점들에 대해 민중운동의 관점에서 시민운동을 비판하는 문제를 강조했던 것은 다름아니라 이런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정부와 시민운동의 구조조정정책: 동일한 뿌리, 상이한 색채
이러한 비판에 대해 아마도 시민단체들(여기서는 경실련과 참여연대를 문제삼는다)은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경실련과 참여연대는 경제정책과 개혁방안에 있어, 현 정부와 자신들간의 격렬한 논쟁과 입장차이를 들이대면서 정부의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적 태도를 증거로 들이댈지 모른다.
사실 언론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의 구도를 보면 시민단체와 정부간의 공방, 시민단체와 재벌간의 공방 그리고 정부와 재벌간의 공방이 주를 이룬다. 그들간의 공방과 논쟁이 실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서로 신자유주의라는 공동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시장과 경쟁, (독점)자본과 이윤의 지배, 자유화와 개방을 기본적으로 승인하는 신자유주의 사상의 토대 위에서 그들간의 차이란 정도와 색채, 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즉 그들간의 차이란 시장에서 (독점)자본의 지배를 국가가 어느 정도 규제하는가, 국가가 사회보장정책을 위해 어느 정도 개입하는가, 이해관계자의 경영참가를 어느 정도로 허용하는가 그리고 자유화와 개방의 속도를 어느 정도로 조절하는가의 차이이다. 재벌들을 대변하는 입장을 차치하면, 이 차이는 흔히 신자유주의의 두개의 변종, 즉 영미형 신자유주의와 독일형 신자유주의간의 차이로 이해되곤 한다.
영미형 신자유주의가 시장 지배를 절대적으로 승인하고, 국가의 개입을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자유주의 사상의 현대판이라고 한다면, 독일 신자유주의는 반독점경쟁정책과 사회보장정책을 위해 국가개입을 이론화하며 이해관계자의 시장통제와 경영참가를 수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여러 흐름들은 이 두 개의 변종 중 어느 하나로 순수하게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두 변종의 혼합물이며, 어느 변종의 색채가 더 강하느냐에 따라 경향이 구분될 뿐이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도 IMF의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규정되면서, 그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개입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또 경실련의 경제정책도 영미형 신자유주의를 토대로 하면서 독일형 지배구조를 가미시키고 있다.(강철규, 「재벌개혁의 향후 방향」, 경실련 재벌개혁 대토론회, 1999. 5. 27)
반면 참여연대는 독일형 신자유주의에 더 경사되고 있지만 영미형 지배구조도 수용하고 있다.(그것은 참여연대내 경제학자들간의 의견차이로도 존재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장하성 교수는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가깝고 김기원, 김상조 교수는 독일적 신자유주의의 경향을 띤다.)
따라서 이들간의 차이는 그들간의 외관상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부차적이다. 말하자면 자칭 '시민단체의 좌파'라는 참여연대는 신자유주의정책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김대중정부의 IMF/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보다 진보적인 독일적 신자유주의(보수적 개혁주의)에 경사되어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를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경실련과 달리, 김대중 정부는 자신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로 명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반독점 개입과 사회보장정책적 개입 등을 들면서 무언가 온건한 경제정책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이를 근거로 일부 논자들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로 분류하는데 이의를 제기한다.(김기원, 김연명 교수 등)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지평은 독일 신자유주의에서 보는 바처럼 (시장적합적) 정부개입을 포함하며,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두 가지 신자유주 변종의 혼합물이라는 점에서 이는 별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들간의 차이가 실로 부차적임을 보다 명백히 이해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파업과 정리해고, 재벌개혁과 지배구조개혁, 민영화와 국민기업, 우리사주와 소액주주, 대외개방 등의 개별쟁점에서 정부와 시민단체의 입장 차이가 과연 어떠한지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정리해고 문제에 있어서는 정부나 시민단체 모두, 경제위기와 중복과잉투자라는 현실 앞에서 노동시장 유연화의 필요성을 수용한다. 그것은 진보적 시민운동을 표방하는 참여연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예컨대 김석연 변호사, 김상조 교수 등)
그러면 정리해고라는 '병'을 주는데는 정부와 시민단체가 같이 하지만 그 처방약에서는 시민단체가 정부보다 진보적인가?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 김대중 정부라고 무자비한 정리해고를 강요한 다음에,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라 사후적인 실업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1998년 10조원, 1999년 9조원 규모의 실업대책예산을 집행하였는데(대략 전체예산의 10% 수준) 이같은 사후 실업대책은 신자유주의정책의 필수적인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도 차이가 있다면, 단지 실업예산의 퍼센티지 논쟁이나 실업예산의 효율적인 집행여하 정도일텐데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한, 정부의 실업예산비중은 작다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실업예산의 효율적인 집행을 강조한다면, 실업노동력의 효율적인 사후관리라는 점에서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신자유주의에 보다 충실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시민단체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동조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파업기간 중에 보여준 우파 시민단체들의 단호한 입장, "파업은 안된다"는 주장이나 좌파 시민단체가 취한 파업에 대한 양비론적 비판 모두 그 색채만 다를 뿐, 동일한 인식 위에 서있는 것이다. 강력한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는 정부의 파업불허정책과 비교하면 시민단체의 입장은 그래도 온건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파업비판 여론이 다름아니라, 정부가 폭력적으로 파업을 진압하는데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조성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까? 역으로, 시민단체들이 조금이라도 노동자파업을 이해하고 동조했다면 구조조정정세는 지금보다는 대중들에게 훨씬 유리하게 조성되었을 것이다.
한편 재벌개혁과 관련해서 정부는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 3대원칙)에 입각해서 재벌지배구조를 선진화, 합리화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재벌총수의 소유지배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소유지배로 발생하는 기업지배·시장지배를 제한하고 민주화하여 경쟁적인 대기업체제로 전환한다는 실현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이에 대해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재벌총수의 소유지배 자체를 해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이른바 소유의 분산) 그리고 여기에 기업지배와 시장지배를 보다 강력하게 단속할 수 있는 경쟁강화정책(예컨대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부활, 부당내부거래 단속 등)이나 민주적인 기업통제정책(사외이사, 사외감사의 강화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어찌 보면 소유분산에 대한 요구는 정부와 시민단체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경쟁강화나 민주적인 기업통제의 요구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경제에서 소유를 어떻게 분산시킨다 하더라도 소유분산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는 소유집중은 막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요구차이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질적으로 상이한 차이가 아니며, 이는 공기업 민영화와 관련하여 이미 정부가 소유분산 방식의 민영화도 고려할 수 있다는 데에서도 읽을 수 있다. 경쟁강화나 사외이사, 사외감사 등을 통한 기업통제와 관련해서는 현 정부에 의해 상당한 제도장치가 마련된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정부와 시민단체의 차이는 어느 정도 좁혀졌다.
그리고 문제는 그 실제적인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운영할 수 있는가가 더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재벌개혁과 구조조정에 대한 이상의 입장을 보면 시민단체가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정책을 용인하고 수용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공기업의 폐해가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관료주의적 통제와 간섭, 그로부터 비롯하는 부패와 무능, 태만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폐해를 청산하기보다 이를 근거로 재벌과 초국적 자본의 손에 공기업을 넘겨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시도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민영화는 불가피하다며, 다만 민영화되는 기업을 그들의 재벌개혁론 관점에서 민주화시키는 문제(소주주, 국민주, 우리사주 등을 통한 소유분산과 소주주에 의한 민주적 기업통제)로 한정시키고 있다.(김대환 교수 등) 참여연대 일각에서는 공기업 구조조정의 핵심이 공기업 경영혁신에 있다고도 하지만, 그에 근거해서 공기업 민영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민영화를 하면 이미 공기업은 없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민영화를 공기업 경영혁신 방안의 하나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 말이 안되는 논리를 들이대면서 다양한 주주층(기관투자가, 국민주, 우리사주, 소주주 등)에 의해 지배되는 소유구조 위에서 전문경영인이 지배하는 기업구조를 제시하는 것이다.(참여연대, 『재벌개혁 감시보고서』, 1999. 5) 작년 12월 전력산업의 민영화와 분할매각에 반대하는 전력노동자와 전력범대위의 저항으로 한국전력의 민영화가 일단 무산되자, 개혁의 이름으로 민영화를 강력하게 촉구한 경실련에 비한다면 참여연대의 입장은 훨씬 온건하긴 하다.
그렇지만 역시 초록은 동색이고 두 단체 모두 동일한 재벌개혁론 위에 서있다.
대외개방과 외국자본이 경쟁의 강화와 선진제도 및 기술의 도입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가속시킬 것이라는 인식 또한, 어떤 쟁점 못지 않게 정부와 시민단체들이 공유하는 사항이다. 이들에게 국민자본의 문제, 자본의 국적성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정부와 시민단체간의 차이는, 자유화와 개방화의 속도 그리고 개방화를 위한 준비와 안전장치에 대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시민단체 주변에서 활동하는 일부 논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오는 투기자본 운동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본금융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정책이, 국민경제의 불안정성과 대외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이병천 교수 등) 이른바 '종속적 신자유주의'라는 문제제기는 시민운동의 진영에서는 아무래도 낯설은 것일 수밖에 없고 오히려 이런 문제제기는 민중운동의 진영에서 제출된 것이었다.
종속적 신자유주의는 제국주의론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일관되게 제출될 수 있는 것이다. 독일형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선진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꿈꾸는 이병천 교수의 이론 틀(이른바 한국판 제3의 길)에서는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 때문에 이교수는 종속적 신자유주의의 위험을 지적하지만, 한국자본주의의 개혁문제에서 제국주의 지배/종속이 부과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이론화하고 반제국주의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개방과 세계화를 기본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적절한 통제장치(예컨대 투기자본의 운동을 제한하는 조처들)를 모색하거나 또는 선별적인 개방과 중도의 길을 탐색하는데 머무르고 만다. 이로써 그는 제국주의 이론가가 아니라 시민운동의 이론가로서 남게 되었으며 종속적 신자유주의라는 문제제기는 그 결과 초라한 내용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시민운동의 최대강령과 민중운동의 최소강령: 공동투쟁의 조건?
이렇게 보면 시민운동의 정치경제학은 다음을 목표로 하고 있다. 파시즘적, 관료적 조절에 의해 형성·발전되어 온 한국자본주의에서 신유주의적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시장경쟁이 지배하는 이른바 개방적인 민주적 시장경제, 다시 말해 선진국형의 근대적인 독점적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는 것.
이런 길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가라는 생각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선진국형의 근대적인 시장경제는 시민운동의 최대강령이라 할 수 있다. 재벌개혁과 민영화 그리고 대외개방에 대한 시민운동의 요구들은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최소강령적 성격을 갖는 것인데, 여기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은 특별한 긴장관계나 모순관계도 읽을 수 없을만큼 동일한 성격의 내용을 갖는다.
따라서 시민운동에 있어서는 최소강령이 곧 최대강령이며 그 때문에 시민운동에서는 전술과 전략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도 않는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그들이 말하고 실천하는 운동에서 맥시멈을 보여주며, 그것을 뛰어넘는 사회변화나 변혁을 전망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의 운동은 이론과 실천에서 별다른 모순을 느낄 것이 없고, 아는만큼, 할 수 있는만큼 전진하면 된다.
물론 시민단체들 내에서는 이러한 평가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논자가 있을 수도 있다. 참여연대의 한 실무자에 의하면 당차게도 독일 신자유주의적 정책지향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한국자본주의의 개혁과 변혁에서 단지 한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하여 시장주의적 재벌개혁 또는 해체(즉 독립적인 전문 대기업체제+책임전문경영체제)를 넘어 대안체제를 모색한다고 말한다.(이승희, 「재벌개혁과 시민운동」, 김대환·김균 편, 『한국재벌개혁론』, 나남, 1999.)
이처럼 시민운동에서 대안과 이행문제를 명시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이 쟁점을 둘러싼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된다. 이승희씨에 의하면 재벌문제는 자본일반의 차원, 독점자본의 차원 그리고 한국형 독점자본(재벌)의 차원 등 상이한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정치지형과 힘의 관계를 고려하면, 재벌문제는 현실적으로 세번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그 해결을 통해 두 번째 독점자본의 지배문제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차원의 독점자본 청산의 상이 어떤 것인지는 이 간사를 포함하여 참여연대 내에서 제시되고 있지 않다.(첫번째 차원의 대안 상도 명확하지 않다. '사회적 불평등이 사라지고 분배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그런 사회의 조건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재벌해체와 변혁운동이, 이처럼 세번째 차원에서 두번째 차원으로 계기적으로 발전해가는 것도 아니고 현실 개량으로부터 변혁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세번째 차원의 재벌개혁/해체로부터 두번째 차원의 독점해체로 나아간다는 발상은, 한국자본주의가 선진국형 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해갈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발상이며(제국주의 세계경제에서 종속적인 지위문제, 따라서 한국에서는 독점자본의 청산이란 곧 한국형 독점자본 즉 재벌의 청산과정과 동일한 과정일 뿐이다) 개량과 변혁은 연속적이고 계기적인 과정이 아니라 변증법적이고 단절적인 과정이다.
독일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해체운동은 반독점변혁투쟁으로의 전화를 사고하지 못하고, 오히려 독일형 독점자본지배를 고착시키는 보수적 개량주의로 귀착될 우려가 높다.
이에 반해 민중운동진영은 1997년 경제위기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더욱 완성시킴으로써 극복한다거나 또는 그에 더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민주화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제국주의 지배체제하에서 이 길은 가능한 길도 아니다)
오히려 자본과 시장의 지배를 제한하고 금융기관과 재벌 대기업들을 사회화함으로써, 공공적인 영역을 확대하고 이에 대한 대중적 통제를 강화하고 민주화하는 데에서 위기극복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변혁정세에서나 가능한 높은 수준의 추상적 요구라고 할 지 모르지만, 사회화가 진전되는 현대 자본주의하에서는 점차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요구이며(이행요구강령) 특히 구조적인 경제위기가 표출함에 따라 객관적으로 요구된 정책이었다.
예를 들면 제일은행, 서울은행 등의 국유화 조처들이나 워크아웃에 따른 재벌기업들의 사회화 그리고 기아 처리과정이라든가 일정에 올라온 민영화 문제 등에서, 사회화정책은 당면한 과제로 전화되었고 민중운동은 이 문제를 미래의 문제로서 회피해서는 안되었다. 물론 이 정책은 노동자 대중들 속에서 투쟁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정리해고 반대와 고용안정이라는 노동자들의 일차적인 요구는, 민영화 저지 및 사회화 그리고 경영통제 문제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는 위기정세 때문에 사회화 요구투쟁으로 전화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민중운동의 변혁투쟁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개혁투쟁을 개량주의라고 폄하하여 높은 수준의 요구와 추상적인 구호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변혁투쟁은 현실의 개혁투쟁 속에서만 전화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
문제는 개혁투쟁이 개량주의로 퇴색하지 않고 변혁투쟁으로의 전화할 수 있도록 어떻게 고리를 장악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이 동일시되는 시민운동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지점이다. 이 때문에 민중운동의 일상적인 개혁요구(최소강령적 요구)와 시민운동의 최대강령적 요구가 현실에서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두 가지 운동이 함께 나아가는 공동투쟁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행으로의 전화고리를 장악하는가 아니면 현 질서가 고착되는가를 둘러싼 투쟁의 지점인 것이다.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시민운동을 타격해야 한다
이처럼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이 총선국면에서 신자유주의 경향을 강화하고 정부와 집권여당에 유리한 지형을 형성하게 된 것은, 구조조정에 대한 시민운동의 정치경제학과 정치학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효과에 대해 민중운동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그동안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시민운동이 민중운동을 억압하는 효과는 총선이 끝난 이후의 정세에서, 보다 거대해진 시민운동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현 정세에서 문제는 집권당과의 신자유주의 연대를 통해, 보수주의의 잔당을 공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와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강화,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집권당과 제도권의 신자유주의를 주요한 공격전선으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부차적으로 보수주의 잔당을 밀어내는 일이다. 총선시기에 시민운동이 전자의 전선과 신자유주의 연대를 만들어가고 있다면, 민중운동은 후자의 전선과 민중연대를 만들어 가면서 정부와 집권당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을 주요하게 공격해야 한다.
총선국면에서 일어난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그 공격을 어렵게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면, 시민운동과 낙천낙선운동을 집중적으로 타격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반민중적인 본질을 다시 환기시키고 민중운동을 동원할 수 있는 지형이 형성될 수 있다. 60여명의 낙천낙선대상자들에 대해, 밀실공천과 반민주적인 공천을 이유로 공천무효소송을 제기하는데 이르면 시민운동은 이제 최소한의 도덕적인, 법률적인 일관성도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밀실공천과 반민주적인 공천이 제도권 4개 당의 모든 후보자에 해당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선정한 낙천낙선대상자 이외의 후보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가? 시민운동이 현실의 개혁요구에 충실하려고만 해도, 이 운동은 신자유주의의 틀을 벗어나 집권당을 포함한 제도정치권 전체와 신자유주의의 지배에 대해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만 시민운동은 민중운동과 함께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이 대중들을 기만하면서 낙천낙선운동에 머무르고 있는 것, 무엇보다도 이 사정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자칭 민주언론,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가 이 운동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여론을 왜곡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이처럼 커다란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제도언론과의 이데올로기적 신자유주의 연대에 있었던 때문이고 제도언론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요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즉 제도언론이 여론공간을 집중적으로 할애했기 때문이지, 대중들의 요구를 선점해서 발빠른 선거전술을 구사했던 덕택도 아니며 대중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해서 '시민들의 운동'으로 성장했기 때문도 아니다. 여론에서 이 운동에 대해 시민들이 지지하는 것은 오히려 집중적인 언론보도의 결과라고 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시민운동은 조직된 시민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없는 시민운동'일 뿐이며, 몇십명의 시민운동가들은 결코 시민들을 대표하지도 못한다.
이 운동의 주요활동공간은 제도권의 언론일 뿐이며, 제도언론은 이들을 이용해 시민여론을 왜곡하는 것이다. 반면 민중운동은 기층으로부터 상층에 이르끼까지 조직된 대중을 토대로 하며 대중들을 대표함에도 불구하고, 제도언론은 이들의 요구를 대중들의 요구로서 수용하기를 거부한다.
언론이 이들의 목소리를 여론으로 주목할 때는 아마도 제도권을 위협할 정도의 강력한 투쟁이 동반될 때일 것이다. 구조조정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수만명의 노동자, 농가부채탕감과 농업개방에 반대하는 수만명의 농민이 집회, 시위를 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제출해도 묵살해 버리는 언론, 그러나 어딘지 모르는 대학의 조그만 교실에서 몇십명이 모여 토론하는 낙천낙선운동은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는 언론, 이것이야말로 한겨레가 여론을 왜곡하고 있다는 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교양있는 한겨레가 왜 그럴까? 집권당과의 신자유주의 연대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더라도 같이 활동할 수 있는 부분이 많고, 파시즘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는 당면과제를 위해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는 논거,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은 시민사회와 계급사회라는 상이한 영역을 대상으로 하기에 상호적대적이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이어서 시민운동의 확산이 민중운동의 지형을 개선시킨다는 주장, 심지어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차이는 목표와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그 실현을 위한 전술·전략의 차이, 절차와 경로의 차이라는 논거도 있었다.
그러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당면한 정세, 당면한 과제에서 어떤 요구를 어느 만큼 같이 제기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양자간의 지향하는 이념과 목표, 전략적 과제에 대한 차이들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 그와 관련하여 두 운동이 각기 제기하는 당면 요구들을 평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논쟁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시민운동과 함께 나가는 민중운동'이라는 타협으로 인해 구조조정의 쟁점들이 시민운동적 관점으로 축약되어왔다. 그로써 시민운동 속에 민중운동이 억압되고 민중운동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정세가 형성되고 있지 않은가 한다.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과 함께 조성된 총선국면의 이데올로기 지형은, 이런 우려가 위험수준을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총선 시기 이데올로기 지형
총선연대가 발족하기 전 주요한 쟁점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가져온 파괴적인 효과와 그와 대비되는 재벌과 자산계층의 부와 소득의 독점적 증대, 이른바 '20대 80사회'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과 불신이 증대되면서 형성되었다. 이를 배경으로하여 폭로된 실세 고관집의 도둑사건, 옷로비사건과 파업유도 공작사건 등은 현 정부를 도덕적, 정치적 위기로 몰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집권당은 이른바 생산적 복지정책 운운하며 대중들에 일정하게 양보하는 정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민중운동은 국회의원 선거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심판의 자리로 가져가야 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부패한 제도정치권을 청산하고 진보정치의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는 막중한 과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반면 정부와 집권당으로서는 이런 지형을 돌파하는 특단의 조처들이 강구되어야 했다.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과 함께, 무엇보다도 이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제도언론의 여론조성으로 민중운동의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정부와 집권당에는 유리한 지형이 조성되었다.
즉 '20대 80사회'의 논쟁지형은 급속하게 해체되어갔고 선거국면에서 쟁점은, 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의 심판인가 아닌가 라는 것에서 60여명의 부패, 무능, 반인권 정치가의 물갈이인가 아닌가로 바뀌어 버렸다.
문제는 60여명의 정치가들의 재공천, 재선 여부일 뿐이고 나머지 제도권 정치와 정치가는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민주당을 찍어도 되고 한나라당을 찍어도 되고 심지어 자민련도 괜찮다, 다만 이 60여명만 찍지 말라! 낙천낙선운동은 집권당과 한나라당에서, 낙천낙선대상자들보다 조금도 더 나을게 없는 낡은 정치가들이 자신의 경쟁자를 정리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바꾸는가 라는 문제는 한번도 제기되지 못한 채 정체불명의 "바꿔!"가 맹위를 떨치게 된 것이다.
반면 위기로까지 몰렸던 정부와 집권당은 낙천낙선운동에서 탈출구를 발견하였고 발빠르게 이 운동을 지지함으로써(그것도 말로만 지지하고 나섰을 뿐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는데도) 반민중적인 정권으로부터 민주적 개혁정당으로 탈바꿈했다. 구조조정정책은 이제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총선 후에 계속 강화해야 할 개혁정책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조건이 형성되었다.(『사회진보연대』, 2000년 3월호; 손호철, 「종속적 신자유주의와 '초국적 자본의 정부'를 넘어서」, 4.13 총선과 김대중 정부 중간평가 토론회 발제문, 2000. 3. 15)
급속한 정세변화에 당혹스러운 것은 민중운동진영이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함께 나간다는 비판부재의 운동관은, 낙천낙선운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뒤늦게 낙천낙선운동이,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민중운동진영의 저항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효과를 낳고있다고 깨닫기는 했다.
함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진영은 그래도 낙천낙선운동이 나름대로 의미있다는 식으로 이 운동을 승인하고 이 운동의 효과가 조성하는 정세를 무기력하게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설령 민중운동을 강화시켜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복원시키겠다고 하더라도, 이를 위해 낙천낙선운동을 타격할 생각으로 좀처럼 발전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정세변화가 우연인가? 시민운동이 진행하는 선의의 선거운동이, 민중운동에 대해 예상치 못한 억압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해 시민운동은 민중대회위원회가 제시한 6대 민중요구들을 지금이라도 수용하고, 낙천낙선운동을 넘어선 반신자유주의 논쟁으로 선거지형을 바꿔갈 수 있는가?
필자는 이 모든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냐 반신자유주의냐 하는 쟁점을 억압하고 이 선거를 신자유주의냐 보수주의냐 하는 쟁점으로 제기함으로써, 이번 선거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재승인한다는 효과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이는 시민단체들의 신자유주의적 지향성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의도야 어찌되었든 시민운동은 낙천낙선운동으로 한나라당의 분열을 가져왔고 위기에 빠진 집권당을 구원하였다. 낙천낙선운동을 통한 현 정부와 시민단체간 이해관계의 조응은, 보수적인 정치가들이 제기하는 사전적인 음모론은 아닐지라도 결국 동일한 이데올로기지반과 신자유주의 연대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지난 2년여의 구조조정시기에 우리가 그렇게도 시민운동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민중운동내의 주요한 문제로서, 구조조정의 쟁점들에 대해 민중운동의 관점에서 시민운동을 비판하는 문제를 강조했던 것은 다름아니라 이런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정부와 시민운동의 구조조정정책: 동일한 뿌리, 상이한 색채
이러한 비판에 대해 아마도 시민단체들(여기서는 경실련과 참여연대를 문제삼는다)은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경실련과 참여연대는 경제정책과 개혁방안에 있어, 현 정부와 자신들간의 격렬한 논쟁과 입장차이를 들이대면서 정부의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적 태도를 증거로 들이댈지 모른다.
사실 언론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의 구도를 보면 시민단체와 정부간의 공방, 시민단체와 재벌간의 공방 그리고 정부와 재벌간의 공방이 주를 이룬다. 그들간의 공방과 논쟁이 실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서로 신자유주의라는 공동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시장과 경쟁, (독점)자본과 이윤의 지배, 자유화와 개방을 기본적으로 승인하는 신자유주의 사상의 토대 위에서 그들간의 차이란 정도와 색채, 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즉 그들간의 차이란 시장에서 (독점)자본의 지배를 국가가 어느 정도 규제하는가, 국가가 사회보장정책을 위해 어느 정도 개입하는가, 이해관계자의 경영참가를 어느 정도로 허용하는가 그리고 자유화와 개방의 속도를 어느 정도로 조절하는가의 차이이다. 재벌들을 대변하는 입장을 차치하면, 이 차이는 흔히 신자유주의의 두개의 변종, 즉 영미형 신자유주의와 독일형 신자유주의간의 차이로 이해되곤 한다.
영미형 신자유주의가 시장 지배를 절대적으로 승인하고, 국가의 개입을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자유주의 사상의 현대판이라고 한다면, 독일 신자유주의는 반독점경쟁정책과 사회보장정책을 위해 국가개입을 이론화하며 이해관계자의 시장통제와 경영참가를 수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여러 흐름들은 이 두 개의 변종 중 어느 하나로 순수하게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두 변종의 혼합물이며, 어느 변종의 색채가 더 강하느냐에 따라 경향이 구분될 뿐이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도 IMF의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규정되면서, 그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개입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또 경실련의 경제정책도 영미형 신자유주의를 토대로 하면서 독일형 지배구조를 가미시키고 있다.(강철규, 「재벌개혁의 향후 방향」, 경실련 재벌개혁 대토론회, 1999. 5. 27)
반면 참여연대는 독일형 신자유주의에 더 경사되고 있지만 영미형 지배구조도 수용하고 있다.(그것은 참여연대내 경제학자들간의 의견차이로도 존재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장하성 교수는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가깝고 김기원, 김상조 교수는 독일적 신자유주의의 경향을 띤다.)
따라서 이들간의 차이는 그들간의 외관상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부차적이다. 말하자면 자칭 '시민단체의 좌파'라는 참여연대는 신자유주의정책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김대중정부의 IMF/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보다 진보적인 독일적 신자유주의(보수적 개혁주의)에 경사되어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를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경실련과 달리, 김대중 정부는 자신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로 명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반독점 개입과 사회보장정책적 개입 등을 들면서 무언가 온건한 경제정책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이를 근거로 일부 논자들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로 분류하는데 이의를 제기한다.(김기원, 김연명 교수 등)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지평은 독일 신자유주의에서 보는 바처럼 (시장적합적) 정부개입을 포함하며,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두 가지 신자유주 변종의 혼합물이라는 점에서 이는 별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들간의 차이가 실로 부차적임을 보다 명백히 이해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파업과 정리해고, 재벌개혁과 지배구조개혁, 민영화와 국민기업, 우리사주와 소액주주, 대외개방 등의 개별쟁점에서 정부와 시민단체의 입장 차이가 과연 어떠한지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정리해고 문제에 있어서는 정부나 시민단체 모두, 경제위기와 중복과잉투자라는 현실 앞에서 노동시장 유연화의 필요성을 수용한다. 그것은 진보적 시민운동을 표방하는 참여연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예컨대 김석연 변호사, 김상조 교수 등)
그러면 정리해고라는 '병'을 주는데는 정부와 시민단체가 같이 하지만 그 처방약에서는 시민단체가 정부보다 진보적인가?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 김대중 정부라고 무자비한 정리해고를 강요한 다음에,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라 사후적인 실업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1998년 10조원, 1999년 9조원 규모의 실업대책예산을 집행하였는데(대략 전체예산의 10% 수준) 이같은 사후 실업대책은 신자유주의정책의 필수적인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도 차이가 있다면, 단지 실업예산의 퍼센티지 논쟁이나 실업예산의 효율적인 집행여하 정도일텐데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한, 정부의 실업예산비중은 작다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실업예산의 효율적인 집행을 강조한다면, 실업노동력의 효율적인 사후관리라는 점에서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신자유주의에 보다 충실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시민단체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동조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파업기간 중에 보여준 우파 시민단체들의 단호한 입장, "파업은 안된다"는 주장이나 좌파 시민단체가 취한 파업에 대한 양비론적 비판 모두 그 색채만 다를 뿐, 동일한 인식 위에 서있는 것이다. 강력한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는 정부의 파업불허정책과 비교하면 시민단체의 입장은 그래도 온건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파업비판 여론이 다름아니라, 정부가 폭력적으로 파업을 진압하는데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조성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까? 역으로, 시민단체들이 조금이라도 노동자파업을 이해하고 동조했다면 구조조정정세는 지금보다는 대중들에게 훨씬 유리하게 조성되었을 것이다.
한편 재벌개혁과 관련해서 정부는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 3대원칙)에 입각해서 재벌지배구조를 선진화, 합리화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재벌총수의 소유지배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소유지배로 발생하는 기업지배·시장지배를 제한하고 민주화하여 경쟁적인 대기업체제로 전환한다는 실현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이에 대해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재벌총수의 소유지배 자체를 해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이른바 소유의 분산) 그리고 여기에 기업지배와 시장지배를 보다 강력하게 단속할 수 있는 경쟁강화정책(예컨대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부활, 부당내부거래 단속 등)이나 민주적인 기업통제정책(사외이사, 사외감사의 강화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어찌 보면 소유분산에 대한 요구는 정부와 시민단체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경쟁강화나 민주적인 기업통제의 요구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경제에서 소유를 어떻게 분산시킨다 하더라도 소유분산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는 소유집중은 막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요구차이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질적으로 상이한 차이가 아니며, 이는 공기업 민영화와 관련하여 이미 정부가 소유분산 방식의 민영화도 고려할 수 있다는 데에서도 읽을 수 있다. 경쟁강화나 사외이사, 사외감사 등을 통한 기업통제와 관련해서는 현 정부에 의해 상당한 제도장치가 마련된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정부와 시민단체의 차이는 어느 정도 좁혀졌다.
그리고 문제는 그 실제적인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운영할 수 있는가가 더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재벌개혁과 구조조정에 대한 이상의 입장을 보면 시민단체가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정책을 용인하고 수용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공기업의 폐해가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관료주의적 통제와 간섭, 그로부터 비롯하는 부패와 무능, 태만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폐해를 청산하기보다 이를 근거로 재벌과 초국적 자본의 손에 공기업을 넘겨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시도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민영화는 불가피하다며, 다만 민영화되는 기업을 그들의 재벌개혁론 관점에서 민주화시키는 문제(소주주, 국민주, 우리사주 등을 통한 소유분산과 소주주에 의한 민주적 기업통제)로 한정시키고 있다.(김대환 교수 등) 참여연대 일각에서는 공기업 구조조정의 핵심이 공기업 경영혁신에 있다고도 하지만, 그에 근거해서 공기업 민영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민영화를 하면 이미 공기업은 없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민영화를 공기업 경영혁신 방안의 하나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 말이 안되는 논리를 들이대면서 다양한 주주층(기관투자가, 국민주, 우리사주, 소주주 등)에 의해 지배되는 소유구조 위에서 전문경영인이 지배하는 기업구조를 제시하는 것이다.(참여연대, 『재벌개혁 감시보고서』, 1999. 5) 작년 12월 전력산업의 민영화와 분할매각에 반대하는 전력노동자와 전력범대위의 저항으로 한국전력의 민영화가 일단 무산되자, 개혁의 이름으로 민영화를 강력하게 촉구한 경실련에 비한다면 참여연대의 입장은 훨씬 온건하긴 하다.
그렇지만 역시 초록은 동색이고 두 단체 모두 동일한 재벌개혁론 위에 서있다.
대외개방과 외국자본이 경쟁의 강화와 선진제도 및 기술의 도입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가속시킬 것이라는 인식 또한, 어떤 쟁점 못지 않게 정부와 시민단체들이 공유하는 사항이다. 이들에게 국민자본의 문제, 자본의 국적성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정부와 시민단체간의 차이는, 자유화와 개방화의 속도 그리고 개방화를 위한 준비와 안전장치에 대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시민단체 주변에서 활동하는 일부 논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오는 투기자본 운동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본금융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정책이, 국민경제의 불안정성과 대외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이병천 교수 등) 이른바 '종속적 신자유주의'라는 문제제기는 시민운동의 진영에서는 아무래도 낯설은 것일 수밖에 없고 오히려 이런 문제제기는 민중운동의 진영에서 제출된 것이었다.
종속적 신자유주의는 제국주의론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일관되게 제출될 수 있는 것이다. 독일형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선진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꿈꾸는 이병천 교수의 이론 틀(이른바 한국판 제3의 길)에서는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 때문에 이교수는 종속적 신자유주의의 위험을 지적하지만, 한국자본주의의 개혁문제에서 제국주의 지배/종속이 부과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이론화하고 반제국주의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개방과 세계화를 기본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적절한 통제장치(예컨대 투기자본의 운동을 제한하는 조처들)를 모색하거나 또는 선별적인 개방과 중도의 길을 탐색하는데 머무르고 만다. 이로써 그는 제국주의 이론가가 아니라 시민운동의 이론가로서 남게 되었으며 종속적 신자유주의라는 문제제기는 그 결과 초라한 내용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시민운동의 최대강령과 민중운동의 최소강령: 공동투쟁의 조건?
이렇게 보면 시민운동의 정치경제학은 다음을 목표로 하고 있다. 파시즘적, 관료적 조절에 의해 형성·발전되어 온 한국자본주의에서 신유주의적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시장경쟁이 지배하는 이른바 개방적인 민주적 시장경제, 다시 말해 선진국형의 근대적인 독점적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는 것.
이런 길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가라는 생각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선진국형의 근대적인 시장경제는 시민운동의 최대강령이라 할 수 있다. 재벌개혁과 민영화 그리고 대외개방에 대한 시민운동의 요구들은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최소강령적 성격을 갖는 것인데, 여기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은 특별한 긴장관계나 모순관계도 읽을 수 없을만큼 동일한 성격의 내용을 갖는다.
따라서 시민운동에 있어서는 최소강령이 곧 최대강령이며 그 때문에 시민운동에서는 전술과 전략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도 않는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그들이 말하고 실천하는 운동에서 맥시멈을 보여주며, 그것을 뛰어넘는 사회변화나 변혁을 전망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의 운동은 이론과 실천에서 별다른 모순을 느낄 것이 없고, 아는만큼, 할 수 있는만큼 전진하면 된다.
물론 시민단체들 내에서는 이러한 평가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논자가 있을 수도 있다. 참여연대의 한 실무자에 의하면 당차게도 독일 신자유주의적 정책지향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한국자본주의의 개혁과 변혁에서 단지 한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하여 시장주의적 재벌개혁 또는 해체(즉 독립적인 전문 대기업체제+책임전문경영체제)를 넘어 대안체제를 모색한다고 말한다.(이승희, 「재벌개혁과 시민운동」, 김대환·김균 편, 『한국재벌개혁론』, 나남, 1999.)
이처럼 시민운동에서 대안과 이행문제를 명시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이 쟁점을 둘러싼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된다. 이승희씨에 의하면 재벌문제는 자본일반의 차원, 독점자본의 차원 그리고 한국형 독점자본(재벌)의 차원 등 상이한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정치지형과 힘의 관계를 고려하면, 재벌문제는 현실적으로 세번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그 해결을 통해 두 번째 독점자본의 지배문제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차원의 독점자본 청산의 상이 어떤 것인지는 이 간사를 포함하여 참여연대 내에서 제시되고 있지 않다.(첫번째 차원의 대안 상도 명확하지 않다. '사회적 불평등이 사라지고 분배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그런 사회의 조건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재벌해체와 변혁운동이, 이처럼 세번째 차원에서 두번째 차원으로 계기적으로 발전해가는 것도 아니고 현실 개량으로부터 변혁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세번째 차원의 재벌개혁/해체로부터 두번째 차원의 독점해체로 나아간다는 발상은, 한국자본주의가 선진국형 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해갈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발상이며(제국주의 세계경제에서 종속적인 지위문제, 따라서 한국에서는 독점자본의 청산이란 곧 한국형 독점자본 즉 재벌의 청산과정과 동일한 과정일 뿐이다) 개량과 변혁은 연속적이고 계기적인 과정이 아니라 변증법적이고 단절적인 과정이다.
독일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해체운동은 반독점변혁투쟁으로의 전화를 사고하지 못하고, 오히려 독일형 독점자본지배를 고착시키는 보수적 개량주의로 귀착될 우려가 높다.
이에 반해 민중운동진영은 1997년 경제위기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더욱 완성시킴으로써 극복한다거나 또는 그에 더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민주화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제국주의 지배체제하에서 이 길은 가능한 길도 아니다)
오히려 자본과 시장의 지배를 제한하고 금융기관과 재벌 대기업들을 사회화함으로써, 공공적인 영역을 확대하고 이에 대한 대중적 통제를 강화하고 민주화하는 데에서 위기극복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변혁정세에서나 가능한 높은 수준의 추상적 요구라고 할 지 모르지만, 사회화가 진전되는 현대 자본주의하에서는 점차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요구이며(이행요구강령) 특히 구조적인 경제위기가 표출함에 따라 객관적으로 요구된 정책이었다.
예를 들면 제일은행, 서울은행 등의 국유화 조처들이나 워크아웃에 따른 재벌기업들의 사회화 그리고 기아 처리과정이라든가 일정에 올라온 민영화 문제 등에서, 사회화정책은 당면한 과제로 전화되었고 민중운동은 이 문제를 미래의 문제로서 회피해서는 안되었다. 물론 이 정책은 노동자 대중들 속에서 투쟁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정리해고 반대와 고용안정이라는 노동자들의 일차적인 요구는, 민영화 저지 및 사회화 그리고 경영통제 문제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는 위기정세 때문에 사회화 요구투쟁으로 전화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민중운동의 변혁투쟁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개혁투쟁을 개량주의라고 폄하하여 높은 수준의 요구와 추상적인 구호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변혁투쟁은 현실의 개혁투쟁 속에서만 전화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
문제는 개혁투쟁이 개량주의로 퇴색하지 않고 변혁투쟁으로의 전화할 수 있도록 어떻게 고리를 장악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이 동일시되는 시민운동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지점이다. 이 때문에 민중운동의 일상적인 개혁요구(최소강령적 요구)와 시민운동의 최대강령적 요구가 현실에서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두 가지 운동이 함께 나아가는 공동투쟁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행으로의 전화고리를 장악하는가 아니면 현 질서가 고착되는가를 둘러싼 투쟁의 지점인 것이다.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시민운동을 타격해야 한다
이처럼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이 총선국면에서 신자유주의 경향을 강화하고 정부와 집권여당에 유리한 지형을 형성하게 된 것은, 구조조정에 대한 시민운동의 정치경제학과 정치학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효과에 대해 민중운동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그동안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시민운동이 민중운동을 억압하는 효과는 총선이 끝난 이후의 정세에서, 보다 거대해진 시민운동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현 정세에서 문제는 집권당과의 신자유주의 연대를 통해, 보수주의의 잔당을 공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와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강화,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집권당과 제도권의 신자유주의를 주요한 공격전선으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부차적으로 보수주의 잔당을 밀어내는 일이다. 총선시기에 시민운동이 전자의 전선과 신자유주의 연대를 만들어가고 있다면, 민중운동은 후자의 전선과 민중연대를 만들어 가면서 정부와 집권당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을 주요하게 공격해야 한다.
총선국면에서 일어난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그 공격을 어렵게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면, 시민운동과 낙천낙선운동을 집중적으로 타격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반민중적인 본질을 다시 환기시키고 민중운동을 동원할 수 있는 지형이 형성될 수 있다. 60여명의 낙천낙선대상자들에 대해, 밀실공천과 반민주적인 공천을 이유로 공천무효소송을 제기하는데 이르면 시민운동은 이제 최소한의 도덕적인, 법률적인 일관성도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밀실공천과 반민주적인 공천이 제도권 4개 당의 모든 후보자에 해당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선정한 낙천낙선대상자 이외의 후보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가? 시민운동이 현실의 개혁요구에 충실하려고만 해도, 이 운동은 신자유주의의 틀을 벗어나 집권당을 포함한 제도정치권 전체와 신자유주의의 지배에 대해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만 시민운동은 민중운동과 함께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이 대중들을 기만하면서 낙천낙선운동에 머무르고 있는 것, 무엇보다도 이 사정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자칭 민주언론,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가 이 운동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여론을 왜곡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이처럼 커다란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제도언론과의 이데올로기적 신자유주의 연대에 있었던 때문이고 제도언론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요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즉 제도언론이 여론공간을 집중적으로 할애했기 때문이지, 대중들의 요구를 선점해서 발빠른 선거전술을 구사했던 덕택도 아니며 대중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해서 '시민들의 운동'으로 성장했기 때문도 아니다. 여론에서 이 운동에 대해 시민들이 지지하는 것은 오히려 집중적인 언론보도의 결과라고 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시민운동은 조직된 시민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없는 시민운동'일 뿐이며, 몇십명의 시민운동가들은 결코 시민들을 대표하지도 못한다.
이 운동의 주요활동공간은 제도권의 언론일 뿐이며, 제도언론은 이들을 이용해 시민여론을 왜곡하는 것이다. 반면 민중운동은 기층으로부터 상층에 이르끼까지 조직된 대중을 토대로 하며 대중들을 대표함에도 불구하고, 제도언론은 이들의 요구를 대중들의 요구로서 수용하기를 거부한다.
언론이 이들의 목소리를 여론으로 주목할 때는 아마도 제도권을 위협할 정도의 강력한 투쟁이 동반될 때일 것이다. 구조조정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수만명의 노동자, 농가부채탕감과 농업개방에 반대하는 수만명의 농민이 집회, 시위를 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제출해도 묵살해 버리는 언론, 그러나 어딘지 모르는 대학의 조그만 교실에서 몇십명이 모여 토론하는 낙천낙선운동은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는 언론, 이것이야말로 한겨레가 여론을 왜곡하고 있다는 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교양있는 한겨레가 왜 그럴까? 집권당과의 신자유주의 연대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