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아도르 원주민들의 분노
소외받는 민중들의 저항과 분노
에쿠아도르원주민연맹(CONAIE)과 사회운동연합(CMS)은 민중의회를 건설하고 1월 15일부터 무기한 전국봉기를 선언했다. 수천 명의 원주민, 농민들이 전국각지에서 키토로 몰려왔고 1월 21일에는 수만 명의 원주민, 농민, 노동자, 학생들이 모여 국회의사당, 대법원, 대통령궁을 하나씩 점거했다. 2000년 세계민중투쟁사의 첫 장을 장식하게 된 에쿠아도르 원주민들의 봉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은 평소 지위와 처우에 관해 불만을 품고있던 영관급 군인들이 동참했고 민·군 혁명평의회가 형성되어 금방이라도 권력장악으로 나아갈 듯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라틴아메리카 내에서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미국의 개입으로 혁명평의회는 해체되었고, 권력은 구스타보 노보아 부통령에게 이양되었다.
구스타보는 첫 성명서에서 "물러난 마와드 전임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대부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으며 "마와드에 의해 시작된 달러화와 금융기관구제 및 현대화가 계속될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는 경제상황의 악화와 달러화 추진으로 촉발된 원주민들의 봉기가 있은지 불과 50여일 만에“인플레이션 억제와, 기반마저 무너져버린 경제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며 달러화(dollarization)를 시작했다.
에쿠아도르가 브라질이나 멕시코처럼 라틴아메리카의 신자유주의적 재앙을 분석하는 주요 대상국이거나 혹은 베네수엘라, 칠레처럼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으로 주목을 끌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 원주민들의 봉기는 국가단위를 넘어서 소외받고 배제당하고 있는 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의 움직임이 어떻게 조직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경제정책 자체를 거부한다!
원주민들의 봉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들어선 정부마다 IMF의 구조조정을 성실히 이행한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모두 알다시피, 전체 국민의 ⅔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노동력의 70%가 실업 혹은 불완전고용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7.2%의 경제성장과 7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처참한 생활이었다.
1995년 오랜 영토분쟁을 벌여온 페루와의 전쟁도, 극도의 빈곤상태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의 시선을 돌릴 수는 없었고 결국 1996년 대선에서 불만이 표출되었다. 압달라 부카람의 대중선동적인 공약에 몰표가 던져진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부카람은 모든 공약을 저버렸고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모든 생필품에 대한 물가인상을 비롯하여 IMF에 의해 강요된 구조조정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전기세가 500%, 가스가 340%, 전화세가 700%가 인상되었다. 이것이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을 터뜨린 한 발단이 되었다. 1997년 노동조합들은 2월 5~6일 전국 총파업을 선언했으며 이는 무기한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부카람은 긴급사태를 선포하고 진압군을 동원하는 등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탄압을 했지만 국민들의 항의시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제서야 전반적인 경제정책들을 폐기하는 데 급급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결국 '미치광이' 부카람은 해외로 추방당했다. 대중적인 분노에 당황하며 물리적 탄압으로 이를 멈출 수 없었던 에쿠아도르 지배세력은, 즉시 타협안을 제시해 파비아 알라르카를 임시대통령으로 임명했다.
그 당시 노조는 이미 파업의 목적이 대통령의 사임이 아니라, 경제정책에 대한 거부라는 것을 분명히 경고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을 조직화하다
신임 알라르카 정부는 부카람이나 1998년에 당선된 마와드가 했던, 똑같은 정책을 폈다. 1998년과 1999년 초에 들이닥친 국제원유가체제의 붕괴로, 석유수출을 주요 외화수입원으로 삼고있는 에쿠아도르는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결국 지난해, 전체외채 136억달러의 44%를 차지하는 60억달러 규모의 브래디채권 중 만기상환을 앞둔 9천800만달러 등 일부 외채에 대해, 에쿠아도르 정부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에쿠아도르와 같이 엄청난 외채를 가진 가난한 국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입각해 위기를 탈출하려는 한 궤도수정의 여지는 전혀 없다.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는 탈출의 방법은,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책임을 지워 생존권을 더욱 압박해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민중진영은 생존권에 대한 정부의 공격에 하나씩 저항했고 지난 해 3월, 48시간 총파업을 통해 정부의 구조조정계획 중 일부를 철회시켰다.
1998년에 들어선 마와드 정부는 아르헨티나에도 이미 적용된 바 있는 경제의 달러화로 이를 돌파하고자 했다. 달러화가 외국인투자자들의 '신뢰'를 높일 것이라는 게 정책을 추진하게된 근거였다. 그러나 달러화는 이 나라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깊은 침체에 빠져있는 경제를 미국과 연계시킴으로써, 긴축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통화정책의 자율성을 상실한 상황에서, 정부가 위기탈출의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단 한가지의 대안은 공공 서비스 지출을 줄이고 민영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임금과 그 밖의 보조금을 삭감하는 길 뿐이다.
국민 중 절반을 차지하며 대부분 극빈생활을 하고 있는 원주민들은 경제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계층이자 구조조정의 일차적 대상이었다. 결국 이들은 과거 대중투쟁의 경험을 통해 독자적인 조직을 건설해 나갔다.
우리는 새로운 민중의회를 필요로 한다
이번 봉기는 대중적인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면서 진행되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정부 건물을 접수하고 지역 및 지방의 민중의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가령 쿠엔카에서는 5만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군대에 맞서싸우면서 정부건물을 점거했다. 또한 에쿠아도르의 경제적 수도인 과야킬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봉기를 지지하며 1월 16일부터 연일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중소기업경영자들이 주를 이룬 중산층으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이들도 전국 각지에서 이 운동에 참여했다. 남쪽 로하에서도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고 군대는 대학캠퍼스로 난입해 150명의 학생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원주민들의 키토 입성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가 배치되었지만 1월 19일이 되자 거리는 2만 명의 원주민들로 채워졌다. CONAIE 지도자 안토니오 바르가스는 "원주민과 도시의 지지자들은 경제, 정치적 권력을 쥐고 흔들면서 노략질을 일삼은 부패한 자들 앞에 결코 무릎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중 스스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도록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경찰과 군인들에게, 그들이 저격해야 할 대상은 이 나라 전체를 약탈한 자들이지 자신들의 형제인 원주민이나 민중이 아니라고 호소했다.(「풀사르」1월 19일자)
침보라소 지방에서는 "약 5만 명의 원주민과 농민들이 지역의 모든 도로를 봉쇄했으며, 지방원주민들의 전통의상인 폰초의 색깔 때문에 군인들은 이들을 붉은 물결이라 지칭했다. 동시에, 아마존지역의 민중의회는 노동자와 원주민들이 유전을 접수했다고 발표했다. 봉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대중적인 성격을 취했고 정부는 심지어 원주민 이외의 모든 이들을 죽이겠다는 위협이 담긴 CONAIE 명의의 거짓성명서를 뿌려댔지만 이미 시작된 대중적 시위의 물결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CONAIE가 밝힌 이번 봉기의 공개적인 목표는 독자적인 권력기구인 민중의회를, 전국과 각 지방에서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국가의 3권(행정, 사법, 입법)을 폐절하는 것이었다.
에쿠아도르 신문「엘 코메르시오」는 이번 원주민 봉기세력의 높은 의식수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원주민운동과 사회운동은 1990년대 초 저항세력으로 처음 등장한 이래 국가의 지도계층과 정치적 강령을 변화시켜왔다. 이 변화는 현재 봉기의 형태에서 기존권력의 모든 형식들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룰과 대표를 가진 수평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와드 대통령을 하야시키거나 기존의회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그렇게 했지만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형태의 조직건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소위 지방과 전국의회의 존속이 아니라, 국가적 수준에서 새로운 의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화는 누구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않고, 중개자에게 의지하지도 않는 것이다."(「엘 코메르시오」, 1월 16일자)
봉기의 실패, 그리고 투쟁은 계속된다
이번 원주민들의 봉기에 동참한 군인세력들은 젊은 영관급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쿠테타가 실패로 끝나자마자 대거 구속되었다. 군인들 대부분은 혼혈인종으로 대부분 중산층 이하의 출신들이다. 1998년 에쿠아도르와 페루 사이의 평화협정체결 이후, 마와드 대통령이 군예산감축을 선언하면서 이로 인한 사회적 위상의 하락과 처우에 대한 불만이 높았던 군인들은 기회 때마다 쿠테타를 시도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봉기 참여자들의 높은 의식수준과 군쿠테타 세력의 결합 그리고 대중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번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원인에 대해「Socialis Appeal」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원주민 운동의 지도부는 권력의 출현 앞에서 갈피를 못 잡았고 혁명평의회의 당사자인 멘도사가 이 평의회의 사멸을 선언하고 노보아를 대통령으로 지명했을 때, 그들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군부세력이 혁명세력 편에 서게 되면서 멘도사에게 돌아갈 권력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조직된 대중들에게 대통령궁을 다시 차지하자고 호소하고, 군인과 군장성들에게 총을 겨누어 이 운동에 참여하라고 설득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Socialis Appeal」1월 23일자)
그러나 역시 봉기의 실패와 부통령으로의 발빠른 권력이양은 아직도 이 나라의 주요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의 힘을 보여준다. 미국자본은 에쿠아도르의 주요수출품인 바나나, 석유를 구매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봉기와 반란, 그리고 저항들은 불안한 걸림돌이었다. 그리하여 에쿠아도르라는 이 작은 국가에서부터 그 불씨를 제거해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국경과 체제의 장벽으로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쿠아도르의 봉기가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마야족의 투쟁,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들의 투쟁에서 직간접적으로 영감받은 것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자신들의 생존기반을 그 먼 옛날 유럽과 서구열강에게 빼앗긴 이후,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고 소외당하며 빈곤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잠재의식을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또다시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에쿠아도르원주민연맹(CONAIE)과 사회운동연합(CMS)은 민중의회를 건설하고 1월 15일부터 무기한 전국봉기를 선언했다. 수천 명의 원주민, 농민들이 전국각지에서 키토로 몰려왔고 1월 21일에는 수만 명의 원주민, 농민, 노동자, 학생들이 모여 국회의사당, 대법원, 대통령궁을 하나씩 점거했다. 2000년 세계민중투쟁사의 첫 장을 장식하게 된 에쿠아도르 원주민들의 봉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은 평소 지위와 처우에 관해 불만을 품고있던 영관급 군인들이 동참했고 민·군 혁명평의회가 형성되어 금방이라도 권력장악으로 나아갈 듯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라틴아메리카 내에서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미국의 개입으로 혁명평의회는 해체되었고, 권력은 구스타보 노보아 부통령에게 이양되었다.
구스타보는 첫 성명서에서 "물러난 마와드 전임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대부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으며 "마와드에 의해 시작된 달러화와 금융기관구제 및 현대화가 계속될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는 경제상황의 악화와 달러화 추진으로 촉발된 원주민들의 봉기가 있은지 불과 50여일 만에“인플레이션 억제와, 기반마저 무너져버린 경제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며 달러화(dollarization)를 시작했다.
에쿠아도르가 브라질이나 멕시코처럼 라틴아메리카의 신자유주의적 재앙을 분석하는 주요 대상국이거나 혹은 베네수엘라, 칠레처럼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으로 주목을 끌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 원주민들의 봉기는 국가단위를 넘어서 소외받고 배제당하고 있는 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의 움직임이 어떻게 조직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경제정책 자체를 거부한다!
원주민들의 봉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들어선 정부마다 IMF의 구조조정을 성실히 이행한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모두 알다시피, 전체 국민의 ⅔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노동력의 70%가 실업 혹은 불완전고용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7.2%의 경제성장과 7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처참한 생활이었다.
1995년 오랜 영토분쟁을 벌여온 페루와의 전쟁도, 극도의 빈곤상태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의 시선을 돌릴 수는 없었고 결국 1996년 대선에서 불만이 표출되었다. 압달라 부카람의 대중선동적인 공약에 몰표가 던져진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부카람은 모든 공약을 저버렸고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모든 생필품에 대한 물가인상을 비롯하여 IMF에 의해 강요된 구조조정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전기세가 500%, 가스가 340%, 전화세가 700%가 인상되었다. 이것이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을 터뜨린 한 발단이 되었다. 1997년 노동조합들은 2월 5~6일 전국 총파업을 선언했으며 이는 무기한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부카람은 긴급사태를 선포하고 진압군을 동원하는 등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탄압을 했지만 국민들의 항의시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제서야 전반적인 경제정책들을 폐기하는 데 급급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결국 '미치광이' 부카람은 해외로 추방당했다. 대중적인 분노에 당황하며 물리적 탄압으로 이를 멈출 수 없었던 에쿠아도르 지배세력은, 즉시 타협안을 제시해 파비아 알라르카를 임시대통령으로 임명했다.
그 당시 노조는 이미 파업의 목적이 대통령의 사임이 아니라, 경제정책에 대한 거부라는 것을 분명히 경고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을 조직화하다
신임 알라르카 정부는 부카람이나 1998년에 당선된 마와드가 했던, 똑같은 정책을 폈다. 1998년과 1999년 초에 들이닥친 국제원유가체제의 붕괴로, 석유수출을 주요 외화수입원으로 삼고있는 에쿠아도르는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결국 지난해, 전체외채 136억달러의 44%를 차지하는 60억달러 규모의 브래디채권 중 만기상환을 앞둔 9천800만달러 등 일부 외채에 대해, 에쿠아도르 정부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에쿠아도르와 같이 엄청난 외채를 가진 가난한 국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입각해 위기를 탈출하려는 한 궤도수정의 여지는 전혀 없다.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는 탈출의 방법은,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책임을 지워 생존권을 더욱 압박해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민중진영은 생존권에 대한 정부의 공격에 하나씩 저항했고 지난 해 3월, 48시간 총파업을 통해 정부의 구조조정계획 중 일부를 철회시켰다.
1998년에 들어선 마와드 정부는 아르헨티나에도 이미 적용된 바 있는 경제의 달러화로 이를 돌파하고자 했다. 달러화가 외국인투자자들의 '신뢰'를 높일 것이라는 게 정책을 추진하게된 근거였다. 그러나 달러화는 이 나라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깊은 침체에 빠져있는 경제를 미국과 연계시킴으로써, 긴축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통화정책의 자율성을 상실한 상황에서, 정부가 위기탈출의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단 한가지의 대안은 공공 서비스 지출을 줄이고 민영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임금과 그 밖의 보조금을 삭감하는 길 뿐이다.
국민 중 절반을 차지하며 대부분 극빈생활을 하고 있는 원주민들은 경제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계층이자 구조조정의 일차적 대상이었다. 결국 이들은 과거 대중투쟁의 경험을 통해 독자적인 조직을 건설해 나갔다.
우리는 새로운 민중의회를 필요로 한다
이번 봉기는 대중적인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면서 진행되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정부 건물을 접수하고 지역 및 지방의 민중의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가령 쿠엔카에서는 5만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군대에 맞서싸우면서 정부건물을 점거했다. 또한 에쿠아도르의 경제적 수도인 과야킬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봉기를 지지하며 1월 16일부터 연일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중소기업경영자들이 주를 이룬 중산층으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이들도 전국 각지에서 이 운동에 참여했다. 남쪽 로하에서도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고 군대는 대학캠퍼스로 난입해 150명의 학생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원주민들의 키토 입성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가 배치되었지만 1월 19일이 되자 거리는 2만 명의 원주민들로 채워졌다. CONAIE 지도자 안토니오 바르가스는 "원주민과 도시의 지지자들은 경제, 정치적 권력을 쥐고 흔들면서 노략질을 일삼은 부패한 자들 앞에 결코 무릎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중 스스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도록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경찰과 군인들에게, 그들이 저격해야 할 대상은 이 나라 전체를 약탈한 자들이지 자신들의 형제인 원주민이나 민중이 아니라고 호소했다.(「풀사르」1월 19일자)
침보라소 지방에서는 "약 5만 명의 원주민과 농민들이 지역의 모든 도로를 봉쇄했으며, 지방원주민들의 전통의상인 폰초의 색깔 때문에 군인들은 이들을 붉은 물결이라 지칭했다. 동시에, 아마존지역의 민중의회는 노동자와 원주민들이 유전을 접수했다고 발표했다. 봉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대중적인 성격을 취했고 정부는 심지어 원주민 이외의 모든 이들을 죽이겠다는 위협이 담긴 CONAIE 명의의 거짓성명서를 뿌려댔지만 이미 시작된 대중적 시위의 물결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CONAIE가 밝힌 이번 봉기의 공개적인 목표는 독자적인 권력기구인 민중의회를, 전국과 각 지방에서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국가의 3권(행정, 사법, 입법)을 폐절하는 것이었다.
에쿠아도르 신문「엘 코메르시오」는 이번 원주민 봉기세력의 높은 의식수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원주민운동과 사회운동은 1990년대 초 저항세력으로 처음 등장한 이래 국가의 지도계층과 정치적 강령을 변화시켜왔다. 이 변화는 현재 봉기의 형태에서 기존권력의 모든 형식들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룰과 대표를 가진 수평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와드 대통령을 하야시키거나 기존의회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그렇게 했지만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형태의 조직건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소위 지방과 전국의회의 존속이 아니라, 국가적 수준에서 새로운 의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화는 누구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않고, 중개자에게 의지하지도 않는 것이다."(「엘 코메르시오」, 1월 16일자)
봉기의 실패, 그리고 투쟁은 계속된다
이번 원주민들의 봉기에 동참한 군인세력들은 젊은 영관급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쿠테타가 실패로 끝나자마자 대거 구속되었다. 군인들 대부분은 혼혈인종으로 대부분 중산층 이하의 출신들이다. 1998년 에쿠아도르와 페루 사이의 평화협정체결 이후, 마와드 대통령이 군예산감축을 선언하면서 이로 인한 사회적 위상의 하락과 처우에 대한 불만이 높았던 군인들은 기회 때마다 쿠테타를 시도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봉기 참여자들의 높은 의식수준과 군쿠테타 세력의 결합 그리고 대중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번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원인에 대해「Socialis Appeal」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원주민 운동의 지도부는 권력의 출현 앞에서 갈피를 못 잡았고 혁명평의회의 당사자인 멘도사가 이 평의회의 사멸을 선언하고 노보아를 대통령으로 지명했을 때, 그들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군부세력이 혁명세력 편에 서게 되면서 멘도사에게 돌아갈 권력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조직된 대중들에게 대통령궁을 다시 차지하자고 호소하고, 군인과 군장성들에게 총을 겨누어 이 운동에 참여하라고 설득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Socialis Appeal」1월 23일자)
그러나 역시 봉기의 실패와 부통령으로의 발빠른 권력이양은 아직도 이 나라의 주요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의 힘을 보여준다. 미국자본은 에쿠아도르의 주요수출품인 바나나, 석유를 구매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봉기와 반란, 그리고 저항들은 불안한 걸림돌이었다. 그리하여 에쿠아도르라는 이 작은 국가에서부터 그 불씨를 제거해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국경과 체제의 장벽으로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쿠아도르의 봉기가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마야족의 투쟁,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들의 투쟁에서 직간접적으로 영감받은 것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자신들의 생존기반을 그 먼 옛날 유럽과 서구열강에게 빼앗긴 이후,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고 소외당하며 빈곤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잠재의식을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또다시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