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미국에 던져진 질문
2004년 미국에 던져진 질문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과 '제국' 기획의 불가능성
최예륜(정책부장)
부시의 재선으로 마무리된 2004년 미 대선 직후, 미군은 이라크 저항세력 소탕을 목적으로 한다는 대대적인 팔루자 공습을 자행했다. 부시는 11월 10일 연설을 통해 "일부 소수 그룹이 이라크의 민주화를 좌절시켜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다"며 "이같은 민주주의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 미군은 향후 수주간에 걸쳐 공세를 계속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9.11테러 이후 감행된 이라크 전쟁과 공세적 세계군사재편 전략이라는 미국의 일방적 대외정책이 대선을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 심지어는 전세계 인민들에게 승인되었다는 식의 태도다. 그러나 무차별폭격 수준의 팔루자 학살 이후, 이라크 내 반미여론은 더욱 고조되고 미군이 창설한 이라크군 4개 대대 중 일부가 미군의 공격지원명령을 거부하는 등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대한 저항이 쏟아지는 가운데, 부시는 동맹국의 협박을 호소하는 등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2004년 미 대선은 베트남전쟁 중이던 1968년 닉슨의 재선 이래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점, 그리고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나 총득표수 논란과 같은 사태가 불거지지 않은 깔끔한 승리와 승복의 과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부시의 완벽한 승리로 평가된다. 나아가 미국사회의 보수화의 지표, 부시체제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도가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미국 정치체제가 갖는 근원적 한계가 극대화되는 가운데 민주주의 상징으로서의 미국의 헤게모니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징후가 드러난다.
한계에 봉착한 미국 정치 체제의 '민주성'
미국 대선의 선거인단 제도는 미국이 연방국가이며 각 주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연방헌법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 선거인단 제도로 인해 전체 득표율이 선거결과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선거인단 독식제로 민주당, 공화당 이외의 제3세력의 등장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보수성이 유지가능해진다. 이러한 선거제도는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제어하는 가운데 강력한 양당체제를 뒷받침해왔다. 미국적 정치원리의 내부 긴장은 자유주의와 그것을 방어하는 외피로서의 보수주의적 성향{{) 미국의 정치적 변화란 공화주의적 덕성관념과 지유주의적 사익관념의 대립을 현상으로 하면서 주기적으로 개혁의 이념을 형성하였다. 이는 자유주의자, 흑인, 북부 노동자, 소수 인종집단 등의 민주당의 지지연합이 형성되었던 과정, 기본적 자유주의적 전망 하에서 복음주의적 종교집단 등이 주도적으로 도덕적 이슈를 대중화하여 1980년 레이건의 집권으로 결실을 맺은 보수주의 혁명의 과정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정치체제는 미국 건국의 정신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아가서는 구래의 정신으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한계 내에서 지속되어왔다.
}} 간의 대립으로 유지되어왔다. 1933년-1945년 민주당 루즈벨트의 4선 기간동안 확립되고 미국 사회의 '새로운 다수'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뉴딜연합은 8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경제불황이라는 조건 속에서 지속불가능해였다. 이는 이후의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과 네오콘의 등장을 뒷받침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내부의 보수화와 급진화 사이의 경합을 1992년 중도보수를 표방한 클린턴의 등장으로 일단락된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클린턴의 등장은 여성, 소수 인종집단, 북부 노동자 등 이질적인 집단들의 연합이라는 위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선봉장으로서의 미국의 지위가 더 이상 불가능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냉전의 해소는 평화,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미국 대외정책의 외피를 벗겨내고 다자주의적 개입의 틀(UN과 국제법)을 초과하는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을 초래하였다.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는 분명한 선거조작과 플로리다의 수백 표가 미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결정했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자가 패배를 승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플로리다의 상당수의 흑인남성을 범죄자로 낙인찍어 공민권의 박탈을 초래한 '범죄와의 전쟁'은 분명 레이건-부시/클린턴-고어의 합작품이었다. 투표자의 다수가 모든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선거제도는 미국 자유주의의 몰락을 '도덕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결집으로 은폐하는 미국식 정치체제의 '민주성'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공민의 지위로부터 추방되거나 이탈하는 다양한 세력에 대해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복지의 종식을 뜻하는 '일하는 복지'와 보편성을 상실한 자유주의의 앙상함은 이러한 미국정치의 '민주성'에 대한 환멸을 안고 이탈하는 세력들을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조직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9.11 이후 군사개입의 확대로 재정적자가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인 2억 9천만명 중 4천 5백만이 의료보험으로부터 소외되고 8백만 이상이 실업상태라는 조건이 대선에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당이 내건 의료보호확대와 재정적자 해소 등이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미국사회의 보수화의 지표라거나 전시에는 대통령이 바뀌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는 정치적, 법적 평등을 자유의 동반자로 인식하면서도 경제적, 결과적 평등은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모순된 미국 자유주의에 대한 인민들의 회의와 환멸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비교적) 높은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국 시민의 상당수는 이러한 미국 정치체제로부터 등돌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업에 대한 감세정책, 동성애자 결혼반대, 사형제도 찬성, 낙태 불법화 등이 '도덕적 가치'로 인식되는 여론조사기관들의 분류법은 더 이상 미국 정치에 민중적 의제와 쟁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주의의 몰락이 보수주의자의 결집으로 은폐되는 상황이란 다시 말해 미국 지배계급의 대중의 정치의식에 대한 통제력 상실의 상황이다. 체제의 위기상황은 전쟁과 종교의 상호방어라는 방식을 통해서만 관리될 수 있을 따름이다. 대중의 정치적 참여와 직접적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했던 연방헌법의 이념이 자유주의의 위기 상황과 맞물려 대중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초래하는 상황을 자초하였다. 이는 '도덕적 가치'로 표상되는 쟁점들을 동원하는 것 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며, 케리의 깨끗한 승복이란 이러한 미국 지배계급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다.
9.11 -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의 전파에서 요새 아메리카 수호로
9.11은 미국적 자유민주주의를 보편으로 인식하는 특수한 소명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냉전시대에도 관리 가능했던 전세계 도처에서의 미 패권에 대한 비판과 반전, 반미의 기운은 이제 예측불허의 테러가능성으로 가시화되었다. 부시와 신보주주의자들에 의해 천명된 팍스 아메리카나는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는 행복한 제국의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따라서 항존하는 '테러'위협으로부터 강력한 보호망을 형성하는 요새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부시는 미국은 냉전 시대의 '억지와 봉쇄' 정책은 21세기의 새로운 위헙을 대처하는 데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억지'는 방어할 국가나 국민이 없는 그림자 같은 테러리스트 조직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봉쇄'는 대량살상무기를 미사일에 탑재해 공격하거나 테러리스트들에게 비밀리에 제공하는 독재자들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일방주의를 전제로 예방전쟁 차원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잠재적 적국을 선제공격한다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 기관지2002년6월호)
2002.9.17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선제공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국경에 닿기 전에 위협을 식별하고 파괴함으로써 미국과 미국 국민, 국내외에서 이익을 지킬 것이며, 이를 위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지만 필요한 경우 선제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의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해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공격은 최선의 방어이다.
}} 자본과 국방의 심장부에 가해진 예측불허의 테러는 '우월성과 모범성'을 가진 구원자로서의 나라, 타락한 구대륙과도 전혀 다르고 미개한 나라에 대해서는 인도자가 되어야 할 대단히 '예외적'인 나라라는 미국적 경험과 체제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대한 도전이었다.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의 특수성과 도덕적 우월성 뿐 아니라, 선을 보존 혹은 확장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이는 마치 오컴의 면도날{{)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Entia non sunt multiplicanda sine necessitate"(존재자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된다.)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불필요하게 다수가 설정되어서는 안된다)
"Frustra fit per plura quod potest fieri per pauciora"(소수를 가정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다수로 가정하여 설명하는 것은 헛되다.)
이상의 세가지 명제로 요약되는 오컴의 이론은 합리적 이성을 표방하는 서구적 세계관의 근저를 이루며, 적과 나를 이분화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처럼 전세계를 정확히 이분화하거나 지구상에서 미합중국만을 오려낸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이분법적 개념을 포함한다.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골자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 혹은 개발하고 있는 잠재적 적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통해 적국의 전체주의적 정권을 붕괴시키고 미국적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정권을 수립해, 주변국가 혹은 잠재적 적국을 민주화한다는 것이다. 신보주주의자의 관념(idea)의 힘이자 이미 공화/민주당 내 흡수된 이러한 입장은 강력한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룬다. 부시의 재선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수행한 이라크 전을 비롯, 결정된 대외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그 목적을 철저히 추구하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도덕적 절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미국인이 선택한 '도덕적 가치'란 이러한 소명의식과 미국적 특수성에 도전하는 세력들에 대한 화답이며, 4130억 달러라는 엄청난 재정적자와 취약한 경제구조를 안고 있는 미국의 채권의 7000억 달러 이상을 사들이는 각국 중앙은행에 대한 미국적 보답인 셈이다.
한편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북한, 이란, 시리아 등 불량국가에 대한 개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케리의 패배는 자유주의의 몰락을 저지하고 미국 헤게모니를 유지, 강화하는 데 다양한 이익집단(과거의 '새로운 다수'로 표현된 소수인종, 환경, 여성, 동성애 등등의 이슈)의 이해는 포괄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선거 이래 공화당과 보수주의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신보수주의자들의 '제국'적 기획의 판정승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세계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제국의 신민들에 의한 보편성의 승인은 이제 미국의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자국적 이해를 보호하는 것, 미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요새를 수호해내는 것이 미국 그리고 동맹국의 목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수호하기 위한 전 세계 국가들의 과제는 FTA 등의 도입을 통한 관세철폐로 미국 대외무역적자를 감축하고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데 동참하는 것, 미국을 핵심 타겟으로 하는 테러 위협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을 지지엄호하고 미국의 이분법에 따라 '우리편'의 수를 늘려 단결하는 것 등이 된다. 한편 이 보호해야 할 요새에는 미국 부의 40%를 소유한 상위 1% 그룹이 존재하며 더불어 전세계 지배엘리트들이 결집하고 있다.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이 요새에 대한 저항과 공격은 물론 모두 테러로 간주된다. 이 요새 수호전략은 테러가능성을 지닌 불량국가들이라는 위협요인을 제거하고 예방전쟁을 항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전파하는 합의적 미국정치체제가 복원되는 길은 요원하며 세계는 동맹국의 암묵적 합의(다자간 틀로 협의한 바 없다 하여도)를 기반으로 한 더욱 야만적인 미국의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미국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다. 전면적인 반전반세계화 투쟁을 조직하자.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금융적 팽창이 새로운 헤게모니 출현의 전조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국의 헤게모니가 쉽게 지속된다거나 미국의 '제국'으로의 전환이 무난히 이루어질 전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은 절대적 군사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인 개입을 펼치기에는 군사력과 재정적 여력이 충분치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주의적 틀을 강조하는 케리의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전혀 없다. 미국은 이라크라는 미궁에서 저항군에게 깨져나가며 친미정부 수립과정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미국에 대한 이라크와 전세계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으며 요새 아메리카를 수호하는 전쟁에 대한 부담으로 동맹국들의 불만과 이탈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라크 전을 수행하기 위한 연합군 운영의 과정에서 미국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각 국의 군대를 말그대로 갖다 쓰고 있다.
}} 이러한 상황은 다자주의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일방적으로 군사개입을 상시화 해왔던 이전의 미국의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임의적 자위권 발동이라는 선제공격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 15억 달러씩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로 표현되는 미국 경제의 취약성은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서 지게 되는 정치적, 사회적 비용부담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는 유동성과 규제철폐 경향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미국으로 집중되는 금융분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난점이다. 국방비는 점점 늘어날 것이며 반대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보장비용의 지속적 삭감이 요구될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기업 감세정책과 의료보호 축소가 '도덕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대외정책과 맞바뀌어진 점은 그러한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초국적 기업을 통한 세계시장의 장악과 이를 통한 세계적 부의 집중으로 문제를 헤게모니를 유지해왔던 미국이 이와 관련해 내놓을 수 있는 계획은 많지 않다. 더욱 더 파괴적이고 반민중적인 시장개방 압력과 각종 FTA체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각종 사회보장기금의 민영화와 사회보장비용의 감소정책을 지속할 것이다. 이는 물론 미국 내에서의 노동자, 빈민들의 저항과 전 세계 개도국 정부 혹은 민중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에게는 한층 가열차고 더욱 폭넓은 연대를 구축하는 반전반세계화 투쟁이 요구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왜 부시의 재선을 막지 못했을까라는 평가보다는 2004 미 대선을 통해 드러나는 미국의 몰락과 야만의 징후를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미국 내에서 공민의 지위(선거권을 비롯하여 제반 사회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미국 시민들의 불만과 미국 내 사회운동의 반전을 비롯한 투쟁의 과제는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의 반미란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보다 냉철한 비판과 폭넓은 저항의 조직화라는 과제를 일컫는다. 오늘날의 미 대선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지금, 반전반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모든 사회운동의 쟁점들의 연대를 통해 저항의 세계화를 이루어야 할 의무가 요구되고 있다. PSSP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과 '제국' 기획의 불가능성
최예륜(정책부장)
부시의 재선으로 마무리된 2004년 미 대선 직후, 미군은 이라크 저항세력 소탕을 목적으로 한다는 대대적인 팔루자 공습을 자행했다. 부시는 11월 10일 연설을 통해 "일부 소수 그룹이 이라크의 민주화를 좌절시켜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다"며 "이같은 민주주의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 미군은 향후 수주간에 걸쳐 공세를 계속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9.11테러 이후 감행된 이라크 전쟁과 공세적 세계군사재편 전략이라는 미국의 일방적 대외정책이 대선을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 심지어는 전세계 인민들에게 승인되었다는 식의 태도다. 그러나 무차별폭격 수준의 팔루자 학살 이후, 이라크 내 반미여론은 더욱 고조되고 미군이 창설한 이라크군 4개 대대 중 일부가 미군의 공격지원명령을 거부하는 등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대한 저항이 쏟아지는 가운데, 부시는 동맹국의 협박을 호소하는 등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2004년 미 대선은 베트남전쟁 중이던 1968년 닉슨의 재선 이래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점, 그리고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나 총득표수 논란과 같은 사태가 불거지지 않은 깔끔한 승리와 승복의 과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부시의 완벽한 승리로 평가된다. 나아가 미국사회의 보수화의 지표, 부시체제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도가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미국 정치체제가 갖는 근원적 한계가 극대화되는 가운데 민주주의 상징으로서의 미국의 헤게모니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징후가 드러난다.
한계에 봉착한 미국 정치 체제의 '민주성'
미국 대선의 선거인단 제도는 미국이 연방국가이며 각 주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연방헌법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 선거인단 제도로 인해 전체 득표율이 선거결과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선거인단 독식제로 민주당, 공화당 이외의 제3세력의 등장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보수성이 유지가능해진다. 이러한 선거제도는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제어하는 가운데 강력한 양당체제를 뒷받침해왔다. 미국적 정치원리의 내부 긴장은 자유주의와 그것을 방어하는 외피로서의 보수주의적 성향{{) 미국의 정치적 변화란 공화주의적 덕성관념과 지유주의적 사익관념의 대립을 현상으로 하면서 주기적으로 개혁의 이념을 형성하였다. 이는 자유주의자, 흑인, 북부 노동자, 소수 인종집단 등의 민주당의 지지연합이 형성되었던 과정, 기본적 자유주의적 전망 하에서 복음주의적 종교집단 등이 주도적으로 도덕적 이슈를 대중화하여 1980년 레이건의 집권으로 결실을 맺은 보수주의 혁명의 과정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정치체제는 미국 건국의 정신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아가서는 구래의 정신으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한계 내에서 지속되어왔다.
}} 간의 대립으로 유지되어왔다. 1933년-1945년 민주당 루즈벨트의 4선 기간동안 확립되고 미국 사회의 '새로운 다수'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뉴딜연합은 8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경제불황이라는 조건 속에서 지속불가능해였다. 이는 이후의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과 네오콘의 등장을 뒷받침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내부의 보수화와 급진화 사이의 경합을 1992년 중도보수를 표방한 클린턴의 등장으로 일단락된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클린턴의 등장은 여성, 소수 인종집단, 북부 노동자 등 이질적인 집단들의 연합이라는 위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선봉장으로서의 미국의 지위가 더 이상 불가능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냉전의 해소는 평화,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미국 대외정책의 외피를 벗겨내고 다자주의적 개입의 틀(UN과 국제법)을 초과하는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을 초래하였다.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는 분명한 선거조작과 플로리다의 수백 표가 미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결정했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자가 패배를 승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플로리다의 상당수의 흑인남성을 범죄자로 낙인찍어 공민권의 박탈을 초래한 '범죄와의 전쟁'은 분명 레이건-부시/클린턴-고어의 합작품이었다. 투표자의 다수가 모든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선거제도는 미국 자유주의의 몰락을 '도덕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결집으로 은폐하는 미국식 정치체제의 '민주성'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공민의 지위로부터 추방되거나 이탈하는 다양한 세력에 대해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복지의 종식을 뜻하는 '일하는 복지'와 보편성을 상실한 자유주의의 앙상함은 이러한 미국정치의 '민주성'에 대한 환멸을 안고 이탈하는 세력들을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조직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9.11 이후 군사개입의 확대로 재정적자가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인 2억 9천만명 중 4천 5백만이 의료보험으로부터 소외되고 8백만 이상이 실업상태라는 조건이 대선에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당이 내건 의료보호확대와 재정적자 해소 등이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미국사회의 보수화의 지표라거나 전시에는 대통령이 바뀌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는 정치적, 법적 평등을 자유의 동반자로 인식하면서도 경제적, 결과적 평등은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모순된 미국 자유주의에 대한 인민들의 회의와 환멸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비교적) 높은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국 시민의 상당수는 이러한 미국 정치체제로부터 등돌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업에 대한 감세정책, 동성애자 결혼반대, 사형제도 찬성, 낙태 불법화 등이 '도덕적 가치'로 인식되는 여론조사기관들의 분류법은 더 이상 미국 정치에 민중적 의제와 쟁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주의의 몰락이 보수주의자의 결집으로 은폐되는 상황이란 다시 말해 미국 지배계급의 대중의 정치의식에 대한 통제력 상실의 상황이다. 체제의 위기상황은 전쟁과 종교의 상호방어라는 방식을 통해서만 관리될 수 있을 따름이다. 대중의 정치적 참여와 직접적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했던 연방헌법의 이념이 자유주의의 위기 상황과 맞물려 대중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초래하는 상황을 자초하였다. 이는 '도덕적 가치'로 표상되는 쟁점들을 동원하는 것 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며, 케리의 깨끗한 승복이란 이러한 미국 지배계급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다.
9.11 -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의 전파에서 요새 아메리카 수호로
9.11은 미국적 자유민주주의를 보편으로 인식하는 특수한 소명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냉전시대에도 관리 가능했던 전세계 도처에서의 미 패권에 대한 비판과 반전, 반미의 기운은 이제 예측불허의 테러가능성으로 가시화되었다. 부시와 신보주주의자들에 의해 천명된 팍스 아메리카나는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는 행복한 제국의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따라서 항존하는 '테러'위협으로부터 강력한 보호망을 형성하는 요새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부시는 미국은 냉전 시대의 '억지와 봉쇄' 정책은 21세기의 새로운 위헙을 대처하는 데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억지'는 방어할 국가나 국민이 없는 그림자 같은 테러리스트 조직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봉쇄'는 대량살상무기를 미사일에 탑재해 공격하거나 테러리스트들에게 비밀리에 제공하는 독재자들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일방주의를 전제로 예방전쟁 차원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잠재적 적국을 선제공격한다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 기관지2002년6월호)
2002.9.17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선제공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국경에 닿기 전에 위협을 식별하고 파괴함으로써 미국과 미국 국민, 국내외에서 이익을 지킬 것이며, 이를 위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지만 필요한 경우 선제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의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해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공격은 최선의 방어이다.
}} 자본과 국방의 심장부에 가해진 예측불허의 테러는 '우월성과 모범성'을 가진 구원자로서의 나라, 타락한 구대륙과도 전혀 다르고 미개한 나라에 대해서는 인도자가 되어야 할 대단히 '예외적'인 나라라는 미국적 경험과 체제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대한 도전이었다.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의 특수성과 도덕적 우월성 뿐 아니라, 선을 보존 혹은 확장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이는 마치 오컴의 면도날{{)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Entia non sunt multiplicanda sine necessitate"(존재자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된다.)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불필요하게 다수가 설정되어서는 안된다)
"Frustra fit per plura quod potest fieri per pauciora"(소수를 가정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다수로 가정하여 설명하는 것은 헛되다.)
이상의 세가지 명제로 요약되는 오컴의 이론은 합리적 이성을 표방하는 서구적 세계관의 근저를 이루며, 적과 나를 이분화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처럼 전세계를 정확히 이분화하거나 지구상에서 미합중국만을 오려낸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이분법적 개념을 포함한다.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골자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 혹은 개발하고 있는 잠재적 적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통해 적국의 전체주의적 정권을 붕괴시키고 미국적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정권을 수립해, 주변국가 혹은 잠재적 적국을 민주화한다는 것이다. 신보주주의자의 관념(idea)의 힘이자 이미 공화/민주당 내 흡수된 이러한 입장은 강력한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룬다. 부시의 재선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수행한 이라크 전을 비롯, 결정된 대외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그 목적을 철저히 추구하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도덕적 절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미국인이 선택한 '도덕적 가치'란 이러한 소명의식과 미국적 특수성에 도전하는 세력들에 대한 화답이며, 4130억 달러라는 엄청난 재정적자와 취약한 경제구조를 안고 있는 미국의 채권의 7000억 달러 이상을 사들이는 각국 중앙은행에 대한 미국적 보답인 셈이다.
한편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북한, 이란, 시리아 등 불량국가에 대한 개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케리의 패배는 자유주의의 몰락을 저지하고 미국 헤게모니를 유지, 강화하는 데 다양한 이익집단(과거의 '새로운 다수'로 표현된 소수인종, 환경, 여성, 동성애 등등의 이슈)의 이해는 포괄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선거 이래 공화당과 보수주의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신보수주의자들의 '제국'적 기획의 판정승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세계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제국의 신민들에 의한 보편성의 승인은 이제 미국의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자국적 이해를 보호하는 것, 미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요새를 수호해내는 것이 미국 그리고 동맹국의 목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수호하기 위한 전 세계 국가들의 과제는 FTA 등의 도입을 통한 관세철폐로 미국 대외무역적자를 감축하고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데 동참하는 것, 미국을 핵심 타겟으로 하는 테러 위협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을 지지엄호하고 미국의 이분법에 따라 '우리편'의 수를 늘려 단결하는 것 등이 된다. 한편 이 보호해야 할 요새에는 미국 부의 40%를 소유한 상위 1% 그룹이 존재하며 더불어 전세계 지배엘리트들이 결집하고 있다.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이 요새에 대한 저항과 공격은 물론 모두 테러로 간주된다. 이 요새 수호전략은 테러가능성을 지닌 불량국가들이라는 위협요인을 제거하고 예방전쟁을 항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전파하는 합의적 미국정치체제가 복원되는 길은 요원하며 세계는 동맹국의 암묵적 합의(다자간 틀로 협의한 바 없다 하여도)를 기반으로 한 더욱 야만적인 미국의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미국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다. 전면적인 반전반세계화 투쟁을 조직하자.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금융적 팽창이 새로운 헤게모니 출현의 전조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국의 헤게모니가 쉽게 지속된다거나 미국의 '제국'으로의 전환이 무난히 이루어질 전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은 절대적 군사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인 개입을 펼치기에는 군사력과 재정적 여력이 충분치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주의적 틀을 강조하는 케리의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전혀 없다. 미국은 이라크라는 미궁에서 저항군에게 깨져나가며 친미정부 수립과정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미국에 대한 이라크와 전세계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으며 요새 아메리카를 수호하는 전쟁에 대한 부담으로 동맹국들의 불만과 이탈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라크 전을 수행하기 위한 연합군 운영의 과정에서 미국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각 국의 군대를 말그대로 갖다 쓰고 있다.
}} 이러한 상황은 다자주의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일방적으로 군사개입을 상시화 해왔던 이전의 미국의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임의적 자위권 발동이라는 선제공격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 15억 달러씩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로 표현되는 미국 경제의 취약성은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서 지게 되는 정치적, 사회적 비용부담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는 유동성과 규제철폐 경향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미국으로 집중되는 금융분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난점이다. 국방비는 점점 늘어날 것이며 반대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보장비용의 지속적 삭감이 요구될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기업 감세정책과 의료보호 축소가 '도덕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대외정책과 맞바뀌어진 점은 그러한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초국적 기업을 통한 세계시장의 장악과 이를 통한 세계적 부의 집중으로 문제를 헤게모니를 유지해왔던 미국이 이와 관련해 내놓을 수 있는 계획은 많지 않다. 더욱 더 파괴적이고 반민중적인 시장개방 압력과 각종 FTA체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각종 사회보장기금의 민영화와 사회보장비용의 감소정책을 지속할 것이다. 이는 물론 미국 내에서의 노동자, 빈민들의 저항과 전 세계 개도국 정부 혹은 민중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에게는 한층 가열차고 더욱 폭넓은 연대를 구축하는 반전반세계화 투쟁이 요구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왜 부시의 재선을 막지 못했을까라는 평가보다는 2004 미 대선을 통해 드러나는 미국의 몰락과 야만의 징후를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미국 내에서 공민의 지위(선거권을 비롯하여 제반 사회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미국 시민들의 불만과 미국 내 사회운동의 반전을 비롯한 투쟁의 과제는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의 반미란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보다 냉철한 비판과 폭넓은 저항의 조직화라는 과제를 일컫는다. 오늘날의 미 대선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지금, 반전반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모든 사회운동의 쟁점들의 연대를 통해 저항의 세계화를 이루어야 할 의무가 요구되고 있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