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구적 운동의 국제적 노조주의에 대한 도전에 따른 해방적 노동전략 탐색(2)
4. 다른 유토피아를 향한 다른 경로들
밥 호프, 빙 크로스비, 도로시 라무어[40-50년대를 주름잡던 미국 연예인들 이름]가 시대를 풍미하던 때,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는 때마침 1946년에 개봉된 영화제목이기도 하였다)은 오직 하나만 존재했다. 스탈린, 애틀리[전후 총선에서 처칠 보수당에 압승하여 노동당 단독내각 총리에 임명된 노동당수], 페론[민중주의로 알려진 1940-50년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만델[트로츠키주의자로서 제4인터내셔널의 주요 지도자이자 맑스주의 경제학자], 마오쩌뚱, 은크루마[反영국 투쟁에 앞장선 1950년대 아프리카 가나의 총리], 티토[자주관리 사회주의를 추진한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이 모두는 [유토피아를 향한] 상세한 경로나 목적지점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한 노동 혹은 대중 유토피아는 실패했고 그 결과, 많은 좌파 사상가들은 유토피아가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고 간주하면서 이를 포기했다. 현대의 사상가들은 과거의 실패를 돌이켜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사회적 해방과 유토피아적 사고를 재발명하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 재발명은 긴급하며 이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패니치&레이스 2000). 구래의 노동 유토피아의 실패로 인하여 우리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어떠한 좌파도 우리를 일방통행의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 또는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와 같은 단일한 모델이나 전략은 노동운동 내외부에 있는 해방운동과 사상가들 사이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요소들 중 단지 하나일 뿐이라고 확신한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이론적 시도를 검토할 텐데, 최근에 제기된 두세 가지 것들만 살펴볼 것이다. “최근”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이론적 시도들이 헤게모니적 세계화와 대항 헤게모니적 세계화라는 두 가지 현상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세계 속에서 출현했다는 것이다.1)
맑스/주의로 돌아가다(혹은 무언가 나쁜 것을 찾게 될까 두려워 마르크스를 벗어나지 못함.)
그레고어 골(2002)와 마이클 니어리(2002)는 분명 [서로를] 같은 입장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골은 특수한 트로츠키주의자-전위주의자 쪽이고, 니어리는 급진민주주의적인 노동자 자율주의 쪽이다). 실제로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다음의 두 가지 밖에 없을 것이다. (1) 두 사람 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나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2) 그들의 이의제기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호소한다. 그러나 이 비판은 (1)에 있어서는 엉뚱하고(gross) (2)에 있어서는 난해하다(subtle). 나는 그들의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개념화에 대해 그들이 얘기하는 많은 부분, 특히 깊이가 부족하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발생한 자본주의의 중대한 변모에 따른 (마르크스주의적?) [자기]비판을 동반하지 않는 (2세기 전의)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에 호소하는 것은 종교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들이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해 제시하는 대안, 혹은 이들 스스로가 이 대안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골(2002)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노동자운동은 생산과 분배, 교환에 있어 힘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계급 및 세력과는 구분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특별한 사회세력[노동자계급]의 대중적 표상이다.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잠재력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가혹한 어려움 때문에 집단적 표상으로서 이러한 노동자 조직들이 취할 수 있는 역사적 프로젝트를 무효로 할 필요가 없고 무효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운동과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을 그렇게 열심히 받아들이려고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일반적으로 인정된 고유한 약점이 있지만, 노동조합주의의 본래의 형식에는 많은 유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조직된 노동자의 변혁적 잠재력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시에 우리는 노조주의 내에서의 보수주의의 지배와 사회주의적 의식과 지도력의 결핍이라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그 잠재력은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2)
낙관적이기도 하고 비관적이기도 한 어떤 글에서 골은 노동계급, 노조, 노동계급의 지도력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이론의 미심쩍은 가정 혹은 해석을 옹호하는 19세기/20세기 마르크스주의적 합리화를 재생산한다(하이만 1971 참조). 종교적 신앙이라는 행위와 유비시켜 보자면, 변함없는 근원적 진리 또는 예언에 대한 호소를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물론 경험적 증거 또는 합리적 논쟁에 둔감하다.(국제적 노동운동에 대한 대화에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끌어들이려는 나의 시도가 실패한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니어리의 저작(2002)은 노동에 대한 최근의 좌파 저작 가운데 더욱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비판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는 좀더 신중하게 쓰여진 것이다. 그는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킴 무디)와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나 자신)를 구별한다. 그러나 그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노동’이라는 범주/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가지는 함축적 의미를 회복하고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다(‘계급투쟁’, ‘노동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와는 구별되는?). 그리고 그는 남한 사례에서 드러나는 부침을 통해 이러한 견해를 예증하려 한다.
그러나 현재 남한(또한 멕시코, 아르헨티나, 유럽)의 운동에 빛을 비추기 위해 마르크스의 노동에 대한 견해를 취해야 할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노동운동과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무시하면서 말이다. (마르크스가 스스로 선언했듯이,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지 않았나?) 게다가 멕시코 사파티스타 또는 아르헨티나의 도로봉쇄 시위대를 노동-자본간 모순의 현재적 표현으로 보는 니어리의 견해는 과도한 단순화(reductionist)이거나, 적어도 편파적인 이해라고 생각된다. 그는 이러한 민족적/지역적 사례들은 "지구적 수준에서 세계화된 자본과 대항하는 그들의 결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례적으로 국제주의라는 항목으로 검토해온 그러한 저항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개념화하거나 묘사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니어리는 그런 사례들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변혁 패러다임"을 발전시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임감을 강조하며 결론을 맺는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그는 "그러한 패러다임을 위한 이론은 발명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작업 속에 이미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 속에는 공백과 비약이 있다. 결국 니어리의 주장에 있어 현재의 노동대중의 사회적 저항의 역할은 노동에 대한 150년된 이론적 입장을 예증하기 위한 것임이 드러난다. 이는 새로운 변혁 패러다임의 본질이 왜 보이지 않고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는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교파에는 어떠한 구원도 없다. 현재의 국제적 노동자 투쟁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입장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는 나에게 종파적(partisan)이고 현학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당 또는 경향성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종파적이다 - 또한 그들의 당/경향성에 대한 견해(그리고 세계화 이전에 존재하는 이러한 당/경향성에 대한 견해)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제한한다는 점에서도 종파적이다.
또한 그들의 설명은 노동운동 자체보다 동료 학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들은 현학적이다. 그들이 전통적인 국제적 노조기구 또는 이러한 세계를 넘어 출현하는 무수히 새로운 노동운동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킴 무디를 예로 들기는 좀 어렵다. 그들은 현재의 국제적 노동운동과 관계 맺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생동하는 마르크스주의는 반드시 새로운 운동(구래의 노조 내에 있더라도)과 새로운 해방이론(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는) - 이는 아래 필자들이 시도하는 것이다 - 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전진 (혹은 민족-산업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기)
일련의 논문에서 리차드 하이만은 오늘날의 노조주의(1999a), 노동자 연대(1999b), 노동자 국제주의의 미래(2003)에 관해 가능한 모델이나 시나리오를 검토해왔다. 이 모든 작업은 세계화의 견지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인식과 함께 탈민족주의의 기본틀 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노조 정체성에 관한 다섯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는데, 이는 (세계화된) 서구 유럽의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다른 지역에도 적용할 수 있다. (표 1을 보라).
마지막 모델은 “파퓰리즘적 캠페인” 형태(1999a:130)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하이만은 이 모델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조합이 지지기반이나 조합원이 감소하고 권력기반이 취약해짐에 따라 어려움을 겪게 되어 “강제적으로 사회운동 모델의 적어도 일부 요소를 받아들였다고 본다(앞의 글).” 그는 세계화에 직면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연대라는 개념(1999b)을 분명 국제적 수준으로 제기했다. 하지만 이는 민족적, 산업적, 기업적 또는 지방적 수준에서도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연대를 노동자들을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는 어떤 것, 혹은 성취 불가능한 영웅적 신화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상상력을 요구하는(94)” 새로운 종류의 집단주의로 이해한다. 하이만은 후자를 “새로운 헤게모니 프로젝트”(앞의 글)라는 맥락에서 사고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권리를 거듭 주장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노조형태를 급진적으로 변형하는 것은 힘들지만, 조직적 역량과 내부 민주주의, 노동자 행동주의의 부활은 가능하며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더욱 강력한 중앙 집중 구조(그 수준과 지지기반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와 풀뿌리 참여 양자를 함축하며, 또한 (1)노조 수준(union level), (2)표상과 행동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접합이다. 두 가지 논점이 이어지는데, 첫 번째는 다음과 같다.
상호작용하는 내적 관계를 촉진하는 체계이자 위계구조가 아닌 네트워크로 작동하는 광범위한 조직체로서 노조를 복원하는 것이다(112).
다음은 정보통신 기술의 잠재력에 관한 인식이다.
새 천년에는 노조가 상상력을 통해 스스로를 변형시킬 수 있고 노동자를 위한 해방적 잠재력을 확립할 수 있다. 바로 ‘미래에 걸맞는 사이버공간의 노동조합’을 향해 가는 것이다.(앞의 글)
하이만의 세 번째 저작(2003)은 미래의 국제주의에 관한 것이다. 그는 국제 노조조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노조가 자신의 배타적인 관할 구역이라고 주장했던 영역에 대한 대안적 개입방식을 사고하는 데 있어서, 그 방식의 유연성과 자발성으로 인해 국제 노동조직은 배제되기도 하고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한때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알려졌던 것들-지금은 많은 부분 퇴색되고 제도화되었지만-은 ‘논쟁적인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형태로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최근까지도 이러한 정치를 미성숙의 표시로 여겼다.
[국제 노동조직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노동조합이 변화하는 노동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혀가고 있고, 그 결과로 노동조합이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들과 동맹을 형성하고 이들과 관계 맺기 위한 새로운 형태를 찾아낼 필요성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적/일국적 계급타협이 붕괴됨으로써 주요 노조들은 “국제적 시민사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 역시 그 이유가 된다.
국경을 초월하여 직접 상호 소통하는 노조활동가들의 능력(언어가 문제지만 자동 통역시스템의 질이 급속히 개선되고 있다)은 공식적인 의견교환을 위한 전통적인 위계적 통로의 많은 부분이 소용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제적 노동기구들이 투명성과 내부 민주주의 증대를 위한 기회를 활용하여 관료주의적 성격에서 벗어나 네트워크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욱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될 것이다. 이러한 교훈이 타당함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들이 있다.
하이만은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나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에 대해 공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논쟁에(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사실 그의 주장 중 많은 부분은 전통적인 사회학적 현대 노동관계론 혹은 사회주의적 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견해가 내가 이해하고 있는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 쪽에 더 가깝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섣불리 그의 견해와 동일시하기는 망설여진다. (특히 먼저 그에게 물어보지 않고 말이다) 하이만의 논의에서 나는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냈다. (1)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서는 해방을 지향하는 입장과 국제적/일국적 노조주의를 접합시킬 수 없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론과 개념화를 통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사회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적 이론과 새로운 분석적 개념이 요구된다. 학문들이 고정된 상태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이론과 새로운 분석적 개념이 형성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이 제대로 이론화되지 않거나 평가 절하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소우사 산토스 2003).
맑스주의, 여성주의 그리고 생태주의(또는: 꼴찌가 첫째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3) 그러나 해방적 이론과 실천은 여기에서도 성장하고 있다)
디트리히와 나이약(2001) 논문에 대해서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그 논문이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의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 변종의 관심사항들을 그 개념에 대한 언급이나 토론 없이도 표현하고 있는 방식이다.4)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논문이 세계화 시기에 남부 인도의 장인적 어업노동자들과 그들의 지역공동체의 조직과 투쟁에 대해 반추하면서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디트리히와 나이약은 그것에 역사적 형태를 부여해 온 계급적인 것, 민족적인 것, 노조형태를 벗어난 해방적 노동운동 및 국제주의의 문제를 공개한다. 이 해방적 노동운동 및 국제주의는 맑스주의, 여성주의, 환경주의 그리고 여타 현대적 요소에서 합성된 것인데, 이는 그것의 초점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접근법에서도 그러하다.
인도 어업노동자들의 사례는 근대 민족적 산업적 노조주의의 자기한계를 하나하나 드러내는 것 같다. 저자들의 접근법은 민족적-산업적 노동계급 및 노조가 매개변수를 제공하는 그들의 한계를 유사하게 드러낸다. “전통적 부문”, “비공식 부문”이라는 개념과 “비전형적 고용”의 개념은 여기서 매우 이데올로기적이고 아주 보수적인 것으로 드러난다.5)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는 점증하는 수의 여성노동자 또는 간접 임노동자들을 단순히 더해서 섞을 수 없다. 그것은 전통적 노동자와 노조를 더 이상 규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시 사고되어야 한다.
어업노동자 사례는 역시 다음과 같은, 근대적 노동 운동에 의해 무시되고 은폐되고 주변화된 대부분의 문제들을 공개적이고 극적인 형태로 드러낸다. 즉 노동자의 복수의 동일성, 여성 노동자/일하는 여성, 공동체의 복합적이고 갈등적인 개념, 자연친화적인 노동과 생산의 추구, 세계적인 [차원의] 것이 점차 중심적으로 되어 가는 경향, 노동자+공동체의 국제적인 공동체를 동시적으로 건설할 필요성, 그리고 이런 기초에서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강화하는 한에서 국가 간 기구들과 협상하는 것 등이 그것들이다. 나에겐 특별히 그들의 국제주의가 형성되는 방식과 형태가 흥미롭다. 전통적 노조주의에 의해 제도화된 국제노조들에 그리고 앞에서 언급된 SIGTUR에 가입이 배제되면서 어업노동자들은 그들의 국제주의를 국제적/국제주의적 비정부기구들의 지원을 통해, 그리고 네트워크 형태로 형성하였다. 이것들은 물론 새로운 비노조 노동자 국제주의(비판적인 평가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에 흔한 사회적 매개 및 관계 양식이다.
접근법과 관련해서도 역시 그 연구는 전통적 맑스주의(민족적, 세계적 자본주의 분석, 계급적 동일성 및 투쟁의 개념), 여성주의(젠더를 사회적 구조로 인정, 그래서 젠더에 민감한 분석 및 전략의 필요성, 자율적인 여성 조직 및 투쟁에 대한 가치 제고), 그리고 생태주의(산업 자본주의의 파괴적 동학에 대한 분석, 그리고 환경친화적 제품, 생산방법 및 노사관계를 위한 투쟁)를 묶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두 가지 가능한 오해를 피하도록 하자. 하나는 우리가 민족적 국제적 해방에 대한 유일한 길을 발견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것의 전위를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오류는, 보통 함께 묶여서, 역사적으로 좌파에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고대의 인간해방 이데올로기(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라는, 즉 선택받은 사람들이 있다)6)와 근대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국제적 해방의 담지자로서 가장 억압받는 근대 계급, 그것의 향도와 스승으로서 사회주의적 인텔리겐치아)의 지속되는 유산을 드러내 준다.
그 어업노동자들이 노동해방과 국제주의의 미래를 시사하는 것은 그들이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혹은 가장 주변화한 사람들)이라거나, 혹은 그들이 대다수를 대표한다거나 혹은 그들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가장 주요한 형태의 소외를 그들의 공동체 내부에 축적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판적이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지식인들과 협력하여 가능하게 된, 이런 문제들에 대한 체계적인 사고로 인하여, 이전에 은폐된 진실이 드러나게 되거나 깊이 새겨진 오해를 벗어날 수 있게 되어서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해방적 비전, 욕망 혹은 역량은 다음과 같은 공격을 견뎌내서 생존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즉 (1) 국가적, 간국가적 정책 및 실천이 증가시키는 억압과 국제적 민족적 자본의 상업적 공격, (2) 앞의 동일한 권력기구들에 의한 복잡하고도 심도 깊은 개혁정책, (3) 다른 반해방적인 민족적 혹은 국제적 노조운동(즉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주장하는 노조운동)이 할, 유사한 정도의 복잡한 결합제안 (4) 지역 수준이든 혹은 민족적 국제적 수준이든, 운동을 지원하는(혹은 지도하는) 지식인/전문가들의 대리주의적인(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닌) 역할.
다시 정리해 보자.
난 위에서 언급된 몇 가지 문헌에 대해 짧은 논평을 하였지만, 나는 노동의 세계적인 해방- 혹은 세계적인 해방에 대한 노동의 기여에 대한 토론에서 이런 모든 다른 이들의 참여를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반복하는 바, 나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에 대한 내 자신의 이해에 대해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을 약도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그것은 노조 및 일반적인 사회이론과의 명확한 관계가 결여되어 있고, 그리고 그것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노동운동 활동가들 사이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 나는 광야의 예언자의 역할도 소망하지 않고, 그렇다고 작고 고요한 진리의 목소리를 소망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낙원으로 가는 다른 경로가 나타나면 다른 가능한 노동의 유토피아로 향하는 다른 길을 다시 보장할 것이다.
결론: 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적절한 광장
나는 이 논문이 자기정당화를 하는 것으로 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거니와(비록 내가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에 대한 내 자신의 해석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변명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혀지지 않길 바란다(내가 그것의 결점을 반복하고 있지만). 내가 오히려 원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다른 해방적 담론들을 포함하여 이런 류의 토론이 세계적 정의 연대 운동 안에서 혹은 그 운동 주변에서 계속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진정으로, 나는 내가 “사회운동의 장”이라는 개념을 일찍이 기각한 것에 대해 최소한 정당화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 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세계화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정보화한 자본주의 안에서 운동의 장의 이동 혹은 새로운 운동 축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새로운 공간/장소와 관련하여 선호했던 개념은 “아고라[광장]”라는 그리스 단어인데, 만남의 장소(확실히)와 시장(돈과 권력이 여기에서도 작동한다) 모두를 의미한다. 그리고 내가 전에는 이것을 사회적 공간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장소인 세계사회포럼에만 적용하였는데, 그 개념은 지구적 정의 연대 운동 전체로 연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광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의 장(場)과 축(軸), 즉 끌어당김(그리고 반발 또는 배제(초급진파들의 스스로의 배제를 포함하여))의 장과 축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유일 사회운동” - 사회의 또는 사회 안에서의 변혁 운동 - 은 관례적으로 노동운동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용법을 상기하는 프랑스 잡지 <유일 사회운동>이 있다. 이렇게 간주된 중심성으로 인해 이 유일 사회운동은 다른 사회운동들이 그 주변에 혹은 그 밑에 혹은 그 뒤에 위치지어 지는 축, 장, 광장으로 이해되었다(옛 제국들에서 그리고 새로운 식민주의 세계에서 민족운동이 관련된 역할을 맡았다). 이런 가정은 또한 맑스의 계급에 바탕하고 있는 이론과 같은 노동에 대한 이론들이 다른 이론들을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그런 이론들을 능가하거나, 혹은 궁극적으로 민족주의 운동, 반식민주의 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민주주의 운동, 그리고 다른 “비계급적”운동들을 책임질 정도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자본주의적 관계의 모든 사회영역으로의 침투, 그리고 네팔의 히말라야와 페루의 아마존까지로 확산이 실제로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해체시켰다는 것은 또 다른 역설 - 앞의 것보다 훨씬 더 교묘한 역설 - 이다. 물론 그것[노동운동]은 일찍이, 그리고 당시의 그 중심성 때문에, 대대적인 탄압과 회유를 당하게 되었고, 그것의 의미 있는 실존은 사회전체에서 자본 그리고/혹은 국가로 축소되게 되었고, 다면적인 계급운동과 민중운동에서 제도적(제도화한) 노조로 축소되게 되었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관계 및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침투, 지리적 확산과 함께, “유일 사회운동”은 사회전체로 확산되었고 그래서 여성운동, 민주주의 운동, 정보통신 운동, 원주민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 - 수많은 자율적인 운동과 특수한 주체를 가진 운동 - 을 반자본주의 운동의 일부로 만들었다. 반자본주의 - 그리고 확실히는 탈자본주의 - 가 전통적인 국제 노조기구 안에서 인기가 없는 시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운동들(이들 중 몇몇은 실제로는 노동운동만큼 오래되었거나 그 보다 더 오래되었다)이 이제 반자본주의 운동이 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그것은 중심성의 순위 혹은 위계서열에서의 위치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운동을 집행위원회, 전위운동 혹은 지도자(역시 젠더맹목의 의미에서도 “지도자”) 담론으로 종속시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확실하다. 그것은 밀접한 관계 또는 대화를 통해서이다. 내가 위에서 지나가면서 언급한, 급진 민주주의 운동의 “정치적 등가성”이라는 개념은 여성운동=노동운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정(認定)의 표현이고 연대의 행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우리는 당신도 우리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이라고 알고(혹은 기대하고 혹은 바라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동등하게 대우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우리는 당신의 관심사항을 우리 운동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관심사항의 일부로 취급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도 똑같이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혹은 기대하고 혹은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우리가 그리고 우리 안에서 당신들의 이슈를 인정하는 것 혹은 편입시키는 것은 우리의 운동을 강화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점차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어떻든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과 세계사회포럼이 이제 사회적 저항의 가치를 모으고 더하는 장, 장소, 싸이트, 광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래된 사회운동의 서구중심주의를 잠재적으로 능가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추가되어야 한다. 노동[운동]과 그 국제주의에게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조가 여기 새로운 운동(의 일부와 단순히 선별적으로 그리고 당분간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에 존재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그들이 리차드 하이만의 완벽하게 가능하고 끔찍한 다른 네 가지 선택지의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나는 앞에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중 국제적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변종과 관련한 문제는 정확히 그 노조주의가 민족적 산업적 (반(反)-)식민주의적 자본주의의 덫에 걸려 있는 것과, 그것의 주창자들의 제도화된 국제적 민족적 노조주의 일반 혹은 구체적인 특수한 국제적 민족적 조직과의 동일시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내가 주장한 변종인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는 노동운동에 한 발을 담고, 다른 한 발은 1980년대의 새로운 사회운동에 담고 있다. 1980년대의 새로운 사회운동이 이제 2000년대에 중년에 접어든 지금, 이러한 운동들[노동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과 세계사회포럼 및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 그 자신들에게 도전과제가 동시에 제출되어 있다. 두 전통[노동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 모두가 새로운 축에 이끌리고 있는 한 - 혹은 노조가 새로운 운동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한 - 그러면 우리는 노동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 사이, 조직과 네트워크 사이, 북반구와 남반구(그리고 북반구 안에 있는 남반구와 남반구 안에 있는 북반구) 사이, 자본 및 국가와의 교전과 이들로부터 벗어난 자치 사이, 해방운동의 실질적 측면 혹은 표현과 가상의 측면 혹은 표현 사이의 변증법 및 대화가 풀릴 수 있는 광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혹은 어쩌면 안 풀릴 수도 있고, 이번에는 안 풀릴 수도 있다. 한편, 그러나 나로서는 이곳이 이 특별한 대화가 가장 풍성하게 지속될 수 있는 적절한 장소, 공간 그리고 담론적 지대인 것 같다.
이제, 가상공간 어딘가에 사이버부뤀(Cyberbrook)(http://www.brook.com/cyberbrook)이라 불리는 발산물이 있다. 그것은 여성인가 남성인가? 그것은 새인가? 그것은 지구인가? 그것은 - 가장 적절할 것처럼 보이듯이 - 사이보그인가? 유태계 사이보그? 어떻든 그/그녀/그것의 서명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계를 완성하는 일을 끝마치는 것이 우리의 임무는 아닌데, 그렇다고 그것을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Rabbi Tarfon, Pirkei Avot[조상의 윤리]
이것은 인간 역사의 보다 선량한 시대 - 윤리적인 것이 오늘날(유엔 대변인이 전체 민족국가들과, 특별히 “대통령” 부시에 대해 표명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희망이라는 게, 그들이 “실용주의적”이었으면 하는 정도인)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시대 - 에 나타난 훌륭한 사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의무와 즐거움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킬 필요가 없는 오늘날, 내가 노동운동 내부의 또는 그 주변의 노동운동가들과 전문가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세계를 완성하는 것]을 시작하는 것을 특권이자 즐거움으로 생각하지 않을 이유 역시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노조,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전문가에서 약간 벗어나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폴 존슨(2001:2)이 그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함께 다시 끄집어내는데, 이번에는 기회에 대한 약속보다는 위험에 대한 경고와 함께 그렇게 한다.
사회운동 연구자들은 전형적으로 사회운동 [설명]틀을 [사회운동] 참가자들의 단순한 자기이해[에 기반하고 있는 내용]로 여기거나 또는 아마도 그들이 연구하는 활동가들에게 전략적 자원으로 기능하는(혹은 기능할 수 없는) 해석[내용]으로 여길 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 자신들의 학자적 분석은 객관적인 외부자의 설명으로서 틀지어져 있다. 그러나 사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단순한 자기이해에도 불구하고, 학자들 스스로가 오랫동안 노사관계라는 세계 안에서 훌륭하던 그렇지 않던 적극적으로 [설명]틀 생산자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틀은 그들 자신의 이해, 동일성 그리고 가정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자신의 일인 사람들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운동 [설명]틀뿐만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노동운동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래서 여기에서, 학자도 활동가도 그것이 통찰력이든 단순성이든 어느 하나를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가정 하에서 우리는 함께 이 문제점들을 해결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사회연구에 의해 알려진 사회운동 [설명]틀이 필요하기도 하고 우리는 실천가의 경험에 의해 알려진 노동운동 이론도 필요로 한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 우리의 집단적인 학습과정을 개시하기 위해서 -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론의 부적실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가의 단순성과 관련하여, 이론과 실천 사이 분할의 어느 한편에서 광범하게 지탱되고 있는 가정들에 대해 도전하고 거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는 한, 학자와 활동가 모두가 서로에 대한 비관적인 기대치를 계속해서 충족해 갈 것이다.
세계사회포럼 및 더 광범한 세계적 정의 연대 운동은 내가 암시했던 대로 이미 활동가와 학자(그리고 학자적 활동가 또는 활동가적 학자) 모두가 그런 상호의존의 전제 아래 서로 만나는 장소임이 증명되고 있다. 나는 그 세계사회포럼 및 세계적 정의 연대 운동이 이전에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는 개념 안에 포괄되었던 해방적 담론이 그 안에서 크게 발전할 유일한 광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부록 1 -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 국제주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문화7)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
나로서는 이것을 스스로 모든 형태의 일에 착수함으로써, 그리고 사회문화적 형태를 띰으로써, 그리고 스스로 시민사회에 다가감으로써 기존의 “경제적”, “정치적” 혹은 “정치경제적” 노조주의 모델을 뛰어넘는 노조주의로 이해한다. 그런 노조 모델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 노조주의다.
·임금노동 안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단순히 보다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위해서만 아니라 노동과정, 투자, 새로운 기술, 재배치, 외주, 교육 및 훈련 정책에 대한 노동자 및 노동조합의 통제의 증대를 위해서도 투쟁한다. 그런 전략과 투쟁은 갈등(예를 들면, 환경주의자들이나 여성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요구의 호소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그로 인해 영향을 받는 공동체와 이해관계자들과 대화와 공동행동을 통해 실행에 옮겨진다.
·위계적, 권위주의적, 기술관료적 작업 방법 및 관계에 반대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환경친화적인 제품, 노동시간 단축, 이용가능하고 필요한 것의 분배, 가사의 공유, 그리고 문화적인 자기발전 및 자기실현을 위한 자유시간 증대를 위하여 투쟁한다.
·노조로 조직되지 않거나 노조로 조직될 수 없는 노동계급 및 계층(소상품생산 영역, 가내노동자, 소농, 가정주부, 기술자 및 전문가)의 운동과 밀접하게 관계한다.
·강력하고 다양한 시민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타 비계급적 혹은 다계급적 민주주의 운동(교회 기초공동체 운동, 여성, 주신, 생태, 인원, 평화 운동 등)에 밀접하게 관계한다.
·자신을 “전위” 혹은 “최고의” 조직 혹은 권력이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이런 조직 혹은 권력에 자신을 종속시키지도 않는, 자율적이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파트너로서의 다른 (잠재적) 동맹세력과 밀접하게 관계한다.
·광범한 사회 안에 새로운 사회적 이슈를 떠맡는다, 특히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발생하거나 노조 자체 안에서 드러날 때(권위주의, 다수결주의, 관료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등에 대한 투쟁).
·작업장 민주주의에 손을 들어주고 노동자들 사이에, 그리고 노동자와 다른 민중적/민주적 사회세력 사이에 직접적 수평적 관계를 장려한다.
·교육, 문화, 정보통신 영역에서 적극적이고 노동자 문화와 민중문화를 자극하고 지역적, 민족적, 세계적 차원에서 지배적인 제도 혹은 미디어의 내외부에서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향한 이니셔티브를 지지한다.
·조직 민주주의, 다원주의, 창조성을 자극하기 위하여 조직 내부와 조직 간의 네트워킹에 열려져 있고, 비공식적인, 수평적인, 유연한 연합, 동맹, 이익집단의 가치를 이해한다.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
이 국제주의가 세계화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정보화된(GNI) 자본주의(국가간 관계는 이것의 오직 일부일 뿐이다)에 스스로 대응한다면, 이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는 스스로를 여기에서 배우고 여기에 기여를 해야 할 일반적인 세계적 연대 운동의 일부로 보아야할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노동자 국제주의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노조간부 혹은 여타 간부의 국제적 관계에서 작업장, 공동체 혹은 기초조직 수준에서 관련되어 노동하는 민중들의 대면관계로 이동한다.
·스스로의 힘을 강화하고, 분권화되어 있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이고, 유연한 국제적 정보 네트워크 모델을 고무함으로써 중앙집권화하고, 관료적이고, 경직적인 피라미드같이 거대한 국제 조직 모델에의 의존성을 벗어난다.
·“원조 모델”(“부유하고, 힘 있고, 자유로운” 노조, 노동자 등으로부터 자금 및 물자의 한 방향으로의 흐름)에서 “연대 모델”(정치적 지원, 정보 및 생각의 쌍방향의 혹은 여러 방향으로의 흐름)로 이동한다.
·말로 하는 선언, 호소 및 회의에서 관련 있는 노동하는 민중들에 의한 정치적 행동, 창조적인 일, 혹은 직접적인 재정적 기여(계속해서 필요로 할 것이다)로 이동한다.
·국제 연대를 단순히 대표자들의 요구, 가치, 역량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일하는 민중들이 표현하는 매일의 요구, 가치, 역량에 기초한다.
·임금노동자들의 투쟁을 강화하고 노동자주의적 국제주의를 지양하기 위해, 노동자가 국제주의의 특권화한 담당자가 아니지만, 그것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여타 민주주의적 국제주의들을 연결한다.
·노동자 기금 혹은 공개적으로 모금한 기금으로 국제주의적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연대 사업에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금융적 의존성을 극복하고 독자적인 연구 활동과 정책을 형성한다.
·전통적 국제주의의 정치적/금융적 강요, 사적 담함과 공적 침묵을, 관심 있는 노동자들에게 열려있는, 평등한 당사자들의 솔직하고, 우호적이고, 건설적이고, 공적인 담론으로 대체한다.
·국제적 투쟁의 유일한 장소 혹은 수준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작업장, 풀뿌리조직, 지역공동체가 토대일 수 있지만 전통적 형식적 영역도 이용될 수 있고 영향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새로운 국제주의의 발전이 서양, 동양, 남반구 노동운동으로부터의 기여나 이들과의 토론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다른 사회지리적 지역 내부에서의 기여나 토론 그리고 이들 지역 사이에서의 기여나 토론도 새로운 국제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요구된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된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의] 요소들을 국제적 노조의 발언이나 실천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 생각으로는 비록 몇몇은 아직도 노동자(혹은 심지어 노조) 국제주의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한 새로운 투쟁의 흐름을 선도하고 선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런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는 좌파 노동자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전형적인 유형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대한 세계적 차원의 노동자/민중적 그리고 민주주의적 대안을 프로그램적 조건과 관계적 조건 양 측면에서 상세히 작성하고 있다(Brecher, Costello and Smith 2000).
국제주의,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조합 국제주의
우리는 “국제주의”,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조합 국제주의” 개념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회운동 담론 안에서 국제주의는 관습적으로 19세기 노동과 연관되어 있고,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거슬러 올라가 투사하여 고대의 종교적 보편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기의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를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19, 20 양 세기에도 여성/페미니즘적 형태, 평화주의적 형태, 반식민주의적 형태 그리고 인권 형태를 포함하도록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두 세기와 “민족 국가의 세계”에 한정되는 한, 우리는 세계화 시기에 상응하는 새로운 용어를 필요로 한다. 어떤 이는 초민족주의를 거론한다. 나는 세계적 연대가 세계화, 그에 대한 불만 그리고 대안을 다루는 한에서, 이 용어를 더 선호한다. 노동자 국제주의는 광범위한 과거 및 현재의 노동관련 사상, 전략 그리고 실천을 가리키는데, 협동조합, 노동자 및 사회주의 당, 사회주의 지식인, 문화, 미디어, 그리고 심지어는 스포츠의 그것들[노동관련 사상, 전략, 실천]을 포함한다. 노조국제주의는 민족적 산업적 자본주의(NIC) 시기 동안 노동자 스스로의 접합[두 뼈가 따로 움직일 수 있으면서 이어진 관절을 지칭함, ‘차이를 인정한 가운데서의 연대’를 의미 - 역자]의 초보적인 형태에 국한된다. 노조 국제주의는 20세기 후반 보통은 노동자 국제주의와 합성될 정도로 노동자 국제주의를 대체하고 지배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화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정보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가장 심각하게 위기에 처해 있고 의문시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노조 국제주의이다.
네트워킹, 커뮤니케이션, 문화
우리는 진실로 우리의 시대에 적합한 추가적인, 심지어는 대안적인 노동자 접합(함께하기와 의견표명 모두)원칙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급진적인” 그리고 “혁명적인” 노조들 안에서도 발생하는 관료주의, 위계, 도그마의 재생산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침식시킬 노동자 접합 원칙이 필요하다.
이 원칙은 네트워크이고 그 실천은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크를 물신화하고 조직을 악마시할 필요는 없다. “네트워킹”은 인간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우리는 그래서 네트워크 측면에서 조직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네크워크를 조직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산업적 자본주의(NIC)에서 세계화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정보화한 자본주의(GNI)로의 이행이 또한 조직 자본주의에서 네트워크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것은 사실로 남아있다. 새로운 이니셔티브, 속도, 창조성, 유연성이 나오는 듯한 곳은 국제 노동 네트워크와 네트워킹으로부터이다. 급진적-민주주의적이고 국제주적인 것에 관심 있는 국제 노조주의는 이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체될 것이니까. 국제 노조주의가 자신 스스로를 노조를 훨씬 뛰어넘고, 노동문제를 훨씬 뛰어넘는 급진적-민주주의적 국제주의적 프로젝트의 일부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국제 노조 네트워킹 자체가 정체할 것이다.
“네트워킹”은 제도보다는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다. 국제 노동 네트워킹은 급진적-민주주의적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문화 감각, 즉 “세계적 연대 문화”를 배워야 하고 생산해야 한다.
노동은 오래고도 풍부한 문화적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과거에는 민중적, 민주주의적, 심지어는 아방가르드 문화 운동을 창조하고 심지어는 선도하였다. 다시 한 번 국제 노조운동은 축소지향의 자기제한을 벗어나거나 국제적 미디어 영역에서 보이지 않은 채로 존재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국제 미디어 영역은 민주주의적 논쟁과 숙고에서 중심적 공간으로서 점차로 제도적 영역에 도전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을 대체해가고 있다.
1) 이 부분에서 폴 존스턴의 작업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거북하다. 특히 그가 시민성 이론과 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논의했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을 해방과 접합시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이러한 독창성에 더해 존스턴이 노동 조직가이자 이론가, 분석가라는 것이 덧붙여져야만 한다. 더욱이 그는 그러한 노동 국제주의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초민족적’ 노조주의 (예컨대 미국-멕시코 국경을 가로지르는)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2) 이는 그의 글 초안에 의한 것인데 저자는 친절하게도 본인에게 활용하도록 했다.
3) [역주] 뒤에도 나오는 내용에서 추론하자면 이 말은 해방운동의 주체가 선험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4) 이 부분은 Waterman 2001b에서 개작되었다.
5) [역주] Waterman 2001b에서 생략된 내용을 복원요약하면 ‘[예상과는 혹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비공식부문의 경제활동인구 비율이 매우 높고, 높아지고 있고, 이 제 3 지역의 세계 인구와 노동인구의 규모를 고려할 때 “비전형적 고용”이 [보다 일반적이라는 의미에서] 전형적 고용이다’라는 등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6) [역주] 이 내용은 성서에(도)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20장 16절; 공동번역본)
7) 이 부분은 Waterman 2001의 13-16, 22-24쪽에서 발췌한 것이다. 참고문헌은 전체 목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목들이 추가되었다.
밥 호프, 빙 크로스비, 도로시 라무어[40-50년대를 주름잡던 미국 연예인들 이름]가 시대를 풍미하던 때,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는 때마침 1946년에 개봉된 영화제목이기도 하였다)은 오직 하나만 존재했다. 스탈린, 애틀리[전후 총선에서 처칠 보수당에 압승하여 노동당 단독내각 총리에 임명된 노동당수], 페론[민중주의로 알려진 1940-50년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만델[트로츠키주의자로서 제4인터내셔널의 주요 지도자이자 맑스주의 경제학자], 마오쩌뚱, 은크루마[反영국 투쟁에 앞장선 1950년대 아프리카 가나의 총리], 티토[자주관리 사회주의를 추진한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이 모두는 [유토피아를 향한] 상세한 경로나 목적지점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한 노동 혹은 대중 유토피아는 실패했고 그 결과, 많은 좌파 사상가들은 유토피아가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고 간주하면서 이를 포기했다. 현대의 사상가들은 과거의 실패를 돌이켜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사회적 해방과 유토피아적 사고를 재발명하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 재발명은 긴급하며 이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패니치&레이스 2000). 구래의 노동 유토피아의 실패로 인하여 우리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어떠한 좌파도 우리를 일방통행의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 또는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와 같은 단일한 모델이나 전략은 노동운동 내외부에 있는 해방운동과 사상가들 사이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요소들 중 단지 하나일 뿐이라고 확신한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이론적 시도를 검토할 텐데, 최근에 제기된 두세 가지 것들만 살펴볼 것이다. “최근”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이론적 시도들이 헤게모니적 세계화와 대항 헤게모니적 세계화라는 두 가지 현상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세계 속에서 출현했다는 것이다.1)
맑스/주의로 돌아가다(혹은 무언가 나쁜 것을 찾게 될까 두려워 마르크스를 벗어나지 못함.)
그레고어 골(2002)와 마이클 니어리(2002)는 분명 [서로를] 같은 입장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골은 특수한 트로츠키주의자-전위주의자 쪽이고, 니어리는 급진민주주의적인 노동자 자율주의 쪽이다). 실제로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다음의 두 가지 밖에 없을 것이다. (1) 두 사람 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나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2) 그들의 이의제기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호소한다. 그러나 이 비판은 (1)에 있어서는 엉뚱하고(gross) (2)에 있어서는 난해하다(subtle). 나는 그들의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개념화에 대해 그들이 얘기하는 많은 부분, 특히 깊이가 부족하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발생한 자본주의의 중대한 변모에 따른 (마르크스주의적?) [자기]비판을 동반하지 않는 (2세기 전의)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에 호소하는 것은 종교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들이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해 제시하는 대안, 혹은 이들 스스로가 이 대안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골(2002)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노동자운동은 생산과 분배, 교환에 있어 힘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계급 및 세력과는 구분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특별한 사회세력[노동자계급]의 대중적 표상이다.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잠재력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가혹한 어려움 때문에 집단적 표상으로서 이러한 노동자 조직들이 취할 수 있는 역사적 프로젝트를 무효로 할 필요가 없고 무효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운동과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을 그렇게 열심히 받아들이려고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일반적으로 인정된 고유한 약점이 있지만, 노동조합주의의 본래의 형식에는 많은 유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조직된 노동자의 변혁적 잠재력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시에 우리는 노조주의 내에서의 보수주의의 지배와 사회주의적 의식과 지도력의 결핍이라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그 잠재력은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2)
낙관적이기도 하고 비관적이기도 한 어떤 글에서 골은 노동계급, 노조, 노동계급의 지도력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이론의 미심쩍은 가정 혹은 해석을 옹호하는 19세기/20세기 마르크스주의적 합리화를 재생산한다(하이만 1971 참조). 종교적 신앙이라는 행위와 유비시켜 보자면, 변함없는 근원적 진리 또는 예언에 대한 호소를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물론 경험적 증거 또는 합리적 논쟁에 둔감하다.(국제적 노동운동에 대한 대화에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끌어들이려는 나의 시도가 실패한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니어리의 저작(2002)은 노동에 대한 최근의 좌파 저작 가운데 더욱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비판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는 좀더 신중하게 쓰여진 것이다. 그는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킴 무디)와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나 자신)를 구별한다. 그러나 그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노동’이라는 범주/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가지는 함축적 의미를 회복하고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다(‘계급투쟁’, ‘노동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와는 구별되는?). 그리고 그는 남한 사례에서 드러나는 부침을 통해 이러한 견해를 예증하려 한다.
그러나 현재 남한(또한 멕시코, 아르헨티나, 유럽)의 운동에 빛을 비추기 위해 마르크스의 노동에 대한 견해를 취해야 할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노동운동과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무시하면서 말이다. (마르크스가 스스로 선언했듯이,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지 않았나?) 게다가 멕시코 사파티스타 또는 아르헨티나의 도로봉쇄 시위대를 노동-자본간 모순의 현재적 표현으로 보는 니어리의 견해는 과도한 단순화(reductionist)이거나, 적어도 편파적인 이해라고 생각된다. 그는 이러한 민족적/지역적 사례들은 "지구적 수준에서 세계화된 자본과 대항하는 그들의 결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례적으로 국제주의라는 항목으로 검토해온 그러한 저항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개념화하거나 묘사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니어리는 그런 사례들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변혁 패러다임"을 발전시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임감을 강조하며 결론을 맺는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그는 "그러한 패러다임을 위한 이론은 발명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작업 속에 이미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 속에는 공백과 비약이 있다. 결국 니어리의 주장에 있어 현재의 노동대중의 사회적 저항의 역할은 노동에 대한 150년된 이론적 입장을 예증하기 위한 것임이 드러난다. 이는 새로운 변혁 패러다임의 본질이 왜 보이지 않고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는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교파에는 어떠한 구원도 없다. 현재의 국제적 노동자 투쟁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입장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는 나에게 종파적(partisan)이고 현학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당 또는 경향성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종파적이다 - 또한 그들의 당/경향성에 대한 견해(그리고 세계화 이전에 존재하는 이러한 당/경향성에 대한 견해)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제한한다는 점에서도 종파적이다.
또한 그들의 설명은 노동운동 자체보다 동료 학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들은 현학적이다. 그들이 전통적인 국제적 노조기구 또는 이러한 세계를 넘어 출현하는 무수히 새로운 노동운동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킴 무디를 예로 들기는 좀 어렵다. 그들은 현재의 국제적 노동운동과 관계 맺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생동하는 마르크스주의는 반드시 새로운 운동(구래의 노조 내에 있더라도)과 새로운 해방이론(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는) - 이는 아래 필자들이 시도하는 것이다 - 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전진 (혹은 민족-산업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기)
일련의 논문에서 리차드 하이만은 오늘날의 노조주의(1999a), 노동자 연대(1999b), 노동자 국제주의의 미래(2003)에 관해 가능한 모델이나 시나리오를 검토해왔다. 이 모든 작업은 세계화의 견지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인식과 함께 탈민족주의의 기본틀 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노조 정체성에 관한 다섯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는데, 이는 (세계화된) 서구 유럽의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다른 지역에도 적용할 수 있다. (표 1을 보라).
마지막 모델은 “파퓰리즘적 캠페인” 형태(1999a:130)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하이만은 이 모델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조합이 지지기반이나 조합원이 감소하고 권력기반이 취약해짐에 따라 어려움을 겪게 되어 “강제적으로 사회운동 모델의 적어도 일부 요소를 받아들였다고 본다(앞의 글).” 그는 세계화에 직면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연대라는 개념(1999b)을 분명 국제적 수준으로 제기했다. 하지만 이는 민족적, 산업적, 기업적 또는 지방적 수준에서도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연대를 노동자들을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는 어떤 것, 혹은 성취 불가능한 영웅적 신화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상상력을 요구하는(94)” 새로운 종류의 집단주의로 이해한다. 하이만은 후자를 “새로운 헤게모니 프로젝트”(앞의 글)라는 맥락에서 사고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권리를 거듭 주장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노조형태를 급진적으로 변형하는 것은 힘들지만, 조직적 역량과 내부 민주주의, 노동자 행동주의의 부활은 가능하며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더욱 강력한 중앙 집중 구조(그 수준과 지지기반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와 풀뿌리 참여 양자를 함축하며, 또한 (1)노조 수준(union level), (2)표상과 행동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접합이다. 두 가지 논점이 이어지는데, 첫 번째는 다음과 같다.
상호작용하는 내적 관계를 촉진하는 체계이자 위계구조가 아닌 네트워크로 작동하는 광범위한 조직체로서 노조를 복원하는 것이다(112).
다음은 정보통신 기술의 잠재력에 관한 인식이다.
새 천년에는 노조가 상상력을 통해 스스로를 변형시킬 수 있고 노동자를 위한 해방적 잠재력을 확립할 수 있다. 바로 ‘미래에 걸맞는 사이버공간의 노동조합’을 향해 가는 것이다.(앞의 글)
하이만의 세 번째 저작(2003)은 미래의 국제주의에 관한 것이다. 그는 국제 노조조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노조가 자신의 배타적인 관할 구역이라고 주장했던 영역에 대한 대안적 개입방식을 사고하는 데 있어서, 그 방식의 유연성과 자발성으로 인해 국제 노동조직은 배제되기도 하고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한때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알려졌던 것들-지금은 많은 부분 퇴색되고 제도화되었지만-은 ‘논쟁적인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형태로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최근까지도 이러한 정치를 미성숙의 표시로 여겼다.
[국제 노동조직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노동조합이 변화하는 노동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혀가고 있고, 그 결과로 노동조합이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들과 동맹을 형성하고 이들과 관계 맺기 위한 새로운 형태를 찾아낼 필요성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적/일국적 계급타협이 붕괴됨으로써 주요 노조들은 “국제적 시민사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 역시 그 이유가 된다.
국경을 초월하여 직접 상호 소통하는 노조활동가들의 능력(언어가 문제지만 자동 통역시스템의 질이 급속히 개선되고 있다)은 공식적인 의견교환을 위한 전통적인 위계적 통로의 많은 부분이 소용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제적 노동기구들이 투명성과 내부 민주주의 증대를 위한 기회를 활용하여 관료주의적 성격에서 벗어나 네트워크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욱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될 것이다. 이러한 교훈이 타당함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들이 있다.
하이만은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나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에 대해 공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논쟁에(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사실 그의 주장 중 많은 부분은 전통적인 사회학적 현대 노동관계론 혹은 사회주의적 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견해가 내가 이해하고 있는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 쪽에 더 가깝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섣불리 그의 견해와 동일시하기는 망설여진다. (특히 먼저 그에게 물어보지 않고 말이다) 하이만의 논의에서 나는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냈다. (1)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서는 해방을 지향하는 입장과 국제적/일국적 노조주의를 접합시킬 수 없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론과 개념화를 통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사회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적 이론과 새로운 분석적 개념이 요구된다. 학문들이 고정된 상태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이론과 새로운 분석적 개념이 형성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이 제대로 이론화되지 않거나 평가 절하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소우사 산토스 2003).
맑스주의, 여성주의 그리고 생태주의(또는: 꼴찌가 첫째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3) 그러나 해방적 이론과 실천은 여기에서도 성장하고 있다)
디트리히와 나이약(2001) 논문에 대해서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그 논문이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의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 변종의 관심사항들을 그 개념에 대한 언급이나 토론 없이도 표현하고 있는 방식이다.4)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논문이 세계화 시기에 남부 인도의 장인적 어업노동자들과 그들의 지역공동체의 조직과 투쟁에 대해 반추하면서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디트리히와 나이약은 그것에 역사적 형태를 부여해 온 계급적인 것, 민족적인 것, 노조형태를 벗어난 해방적 노동운동 및 국제주의의 문제를 공개한다. 이 해방적 노동운동 및 국제주의는 맑스주의, 여성주의, 환경주의 그리고 여타 현대적 요소에서 합성된 것인데, 이는 그것의 초점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접근법에서도 그러하다.
인도 어업노동자들의 사례는 근대 민족적 산업적 노조주의의 자기한계를 하나하나 드러내는 것 같다. 저자들의 접근법은 민족적-산업적 노동계급 및 노조가 매개변수를 제공하는 그들의 한계를 유사하게 드러낸다. “전통적 부문”, “비공식 부문”이라는 개념과 “비전형적 고용”의 개념은 여기서 매우 이데올로기적이고 아주 보수적인 것으로 드러난다.5)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는 점증하는 수의 여성노동자 또는 간접 임노동자들을 단순히 더해서 섞을 수 없다. 그것은 전통적 노동자와 노조를 더 이상 규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시 사고되어야 한다.
어업노동자 사례는 역시 다음과 같은, 근대적 노동 운동에 의해 무시되고 은폐되고 주변화된 대부분의 문제들을 공개적이고 극적인 형태로 드러낸다. 즉 노동자의 복수의 동일성, 여성 노동자/일하는 여성, 공동체의 복합적이고 갈등적인 개념, 자연친화적인 노동과 생산의 추구, 세계적인 [차원의] 것이 점차 중심적으로 되어 가는 경향, 노동자+공동체의 국제적인 공동체를 동시적으로 건설할 필요성, 그리고 이런 기초에서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강화하는 한에서 국가 간 기구들과 협상하는 것 등이 그것들이다. 나에겐 특별히 그들의 국제주의가 형성되는 방식과 형태가 흥미롭다. 전통적 노조주의에 의해 제도화된 국제노조들에 그리고 앞에서 언급된 SIGTUR에 가입이 배제되면서 어업노동자들은 그들의 국제주의를 국제적/국제주의적 비정부기구들의 지원을 통해, 그리고 네트워크 형태로 형성하였다. 이것들은 물론 새로운 비노조 노동자 국제주의(비판적인 평가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에 흔한 사회적 매개 및 관계 양식이다.
접근법과 관련해서도 역시 그 연구는 전통적 맑스주의(민족적, 세계적 자본주의 분석, 계급적 동일성 및 투쟁의 개념), 여성주의(젠더를 사회적 구조로 인정, 그래서 젠더에 민감한 분석 및 전략의 필요성, 자율적인 여성 조직 및 투쟁에 대한 가치 제고), 그리고 생태주의(산업 자본주의의 파괴적 동학에 대한 분석, 그리고 환경친화적 제품, 생산방법 및 노사관계를 위한 투쟁)를 묶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두 가지 가능한 오해를 피하도록 하자. 하나는 우리가 민족적 국제적 해방에 대한 유일한 길을 발견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것의 전위를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오류는, 보통 함께 묶여서, 역사적으로 좌파에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고대의 인간해방 이데올로기(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라는, 즉 선택받은 사람들이 있다)6)와 근대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국제적 해방의 담지자로서 가장 억압받는 근대 계급, 그것의 향도와 스승으로서 사회주의적 인텔리겐치아)의 지속되는 유산을 드러내 준다.
그 어업노동자들이 노동해방과 국제주의의 미래를 시사하는 것은 그들이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혹은 가장 주변화한 사람들)이라거나, 혹은 그들이 대다수를 대표한다거나 혹은 그들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가장 주요한 형태의 소외를 그들의 공동체 내부에 축적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판적이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지식인들과 협력하여 가능하게 된, 이런 문제들에 대한 체계적인 사고로 인하여, 이전에 은폐된 진실이 드러나게 되거나 깊이 새겨진 오해를 벗어날 수 있게 되어서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해방적 비전, 욕망 혹은 역량은 다음과 같은 공격을 견뎌내서 생존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즉 (1) 국가적, 간국가적 정책 및 실천이 증가시키는 억압과 국제적 민족적 자본의 상업적 공격, (2) 앞의 동일한 권력기구들에 의한 복잡하고도 심도 깊은 개혁정책, (3) 다른 반해방적인 민족적 혹은 국제적 노조운동(즉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주장하는 노조운동)이 할, 유사한 정도의 복잡한 결합제안 (4) 지역 수준이든 혹은 민족적 국제적 수준이든, 운동을 지원하는(혹은 지도하는) 지식인/전문가들의 대리주의적인(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닌) 역할.
다시 정리해 보자.
난 위에서 언급된 몇 가지 문헌에 대해 짧은 논평을 하였지만, 나는 노동의 세계적인 해방- 혹은 세계적인 해방에 대한 노동의 기여에 대한 토론에서 이런 모든 다른 이들의 참여를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반복하는 바, 나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에 대한 내 자신의 이해에 대해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을 약도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그것은 노조 및 일반적인 사회이론과의 명확한 관계가 결여되어 있고, 그리고 그것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노동운동 활동가들 사이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 나는 광야의 예언자의 역할도 소망하지 않고, 그렇다고 작고 고요한 진리의 목소리를 소망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낙원으로 가는 다른 경로가 나타나면 다른 가능한 노동의 유토피아로 향하는 다른 길을 다시 보장할 것이다.
결론: 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적절한 광장
나는 이 논문이 자기정당화를 하는 것으로 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거니와(비록 내가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에 대한 내 자신의 해석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변명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혀지지 않길 바란다(내가 그것의 결점을 반복하고 있지만). 내가 오히려 원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다른 해방적 담론들을 포함하여 이런 류의 토론이 세계적 정의 연대 운동 안에서 혹은 그 운동 주변에서 계속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진정으로, 나는 내가 “사회운동의 장”이라는 개념을 일찍이 기각한 것에 대해 최소한 정당화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 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세계화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정보화한 자본주의 안에서 운동의 장의 이동 혹은 새로운 운동 축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새로운 공간/장소와 관련하여 선호했던 개념은 “아고라[광장]”라는 그리스 단어인데, 만남의 장소(확실히)와 시장(돈과 권력이 여기에서도 작동한다) 모두를 의미한다. 그리고 내가 전에는 이것을 사회적 공간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장소인 세계사회포럼에만 적용하였는데, 그 개념은 지구적 정의 연대 운동 전체로 연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광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의 장(場)과 축(軸), 즉 끌어당김(그리고 반발 또는 배제(초급진파들의 스스로의 배제를 포함하여))의 장과 축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유일 사회운동” - 사회의 또는 사회 안에서의 변혁 운동 - 은 관례적으로 노동운동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용법을 상기하는 프랑스 잡지 <유일 사회운동>이 있다. 이렇게 간주된 중심성으로 인해 이 유일 사회운동은 다른 사회운동들이 그 주변에 혹은 그 밑에 혹은 그 뒤에 위치지어 지는 축, 장, 광장으로 이해되었다(옛 제국들에서 그리고 새로운 식민주의 세계에서 민족운동이 관련된 역할을 맡았다). 이런 가정은 또한 맑스의 계급에 바탕하고 있는 이론과 같은 노동에 대한 이론들이 다른 이론들을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그런 이론들을 능가하거나, 혹은 궁극적으로 민족주의 운동, 반식민주의 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민주주의 운동, 그리고 다른 “비계급적”운동들을 책임질 정도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자본주의적 관계의 모든 사회영역으로의 침투, 그리고 네팔의 히말라야와 페루의 아마존까지로 확산이 실제로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해체시켰다는 것은 또 다른 역설 - 앞의 것보다 훨씬 더 교묘한 역설 - 이다. 물론 그것[노동운동]은 일찍이, 그리고 당시의 그 중심성 때문에, 대대적인 탄압과 회유를 당하게 되었고, 그것의 의미 있는 실존은 사회전체에서 자본 그리고/혹은 국가로 축소되게 되었고, 다면적인 계급운동과 민중운동에서 제도적(제도화한) 노조로 축소되게 되었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관계 및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침투, 지리적 확산과 함께, “유일 사회운동”은 사회전체로 확산되었고 그래서 여성운동, 민주주의 운동, 정보통신 운동, 원주민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 - 수많은 자율적인 운동과 특수한 주체를 가진 운동 - 을 반자본주의 운동의 일부로 만들었다. 반자본주의 - 그리고 확실히는 탈자본주의 - 가 전통적인 국제 노조기구 안에서 인기가 없는 시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운동들(이들 중 몇몇은 실제로는 노동운동만큼 오래되었거나 그 보다 더 오래되었다)이 이제 반자본주의 운동이 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그것은 중심성의 순위 혹은 위계서열에서의 위치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운동을 집행위원회, 전위운동 혹은 지도자(역시 젠더맹목의 의미에서도 “지도자”) 담론으로 종속시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확실하다. 그것은 밀접한 관계 또는 대화를 통해서이다. 내가 위에서 지나가면서 언급한, 급진 민주주의 운동의 “정치적 등가성”이라는 개념은 여성운동=노동운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정(認定)의 표현이고 연대의 행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우리는 당신도 우리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이라고 알고(혹은 기대하고 혹은 바라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동등하게 대우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우리는 당신의 관심사항을 우리 운동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관심사항의 일부로 취급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도 똑같이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혹은 기대하고 혹은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우리가 그리고 우리 안에서 당신들의 이슈를 인정하는 것 혹은 편입시키는 것은 우리의 운동을 강화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점차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어떻든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과 세계사회포럼이 이제 사회적 저항의 가치를 모으고 더하는 장, 장소, 싸이트, 광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래된 사회운동의 서구중심주의를 잠재적으로 능가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추가되어야 한다. 노동[운동]과 그 국제주의에게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조가 여기 새로운 운동(의 일부와 단순히 선별적으로 그리고 당분간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에 존재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그들이 리차드 하이만의 완벽하게 가능하고 끔찍한 다른 네 가지 선택지의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나는 앞에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중 국제적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변종과 관련한 문제는 정확히 그 노조주의가 민족적 산업적 (반(反)-)식민주의적 자본주의의 덫에 걸려 있는 것과, 그것의 주창자들의 제도화된 국제적 민족적 노조주의 일반 혹은 구체적인 특수한 국제적 민족적 조직과의 동일시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내가 주장한 변종인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는 노동운동에 한 발을 담고, 다른 한 발은 1980년대의 새로운 사회운동에 담고 있다. 1980년대의 새로운 사회운동이 이제 2000년대에 중년에 접어든 지금, 이러한 운동들[노동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과 세계사회포럼 및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 그 자신들에게 도전과제가 동시에 제출되어 있다. 두 전통[노동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 모두가 새로운 축에 이끌리고 있는 한 - 혹은 노조가 새로운 운동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한 - 그러면 우리는 노동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 사이, 조직과 네트워크 사이, 북반구와 남반구(그리고 북반구 안에 있는 남반구와 남반구 안에 있는 북반구) 사이, 자본 및 국가와의 교전과 이들로부터 벗어난 자치 사이, 해방운동의 실질적 측면 혹은 표현과 가상의 측면 혹은 표현 사이의 변증법 및 대화가 풀릴 수 있는 광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혹은 어쩌면 안 풀릴 수도 있고, 이번에는 안 풀릴 수도 있다. 한편, 그러나 나로서는 이곳이 이 특별한 대화가 가장 풍성하게 지속될 수 있는 적절한 장소, 공간 그리고 담론적 지대인 것 같다.
이제, 가상공간 어딘가에 사이버부뤀(Cyberbrook)(http://www.brook.com/cyberbrook)이라 불리는 발산물이 있다. 그것은 여성인가 남성인가? 그것은 새인가? 그것은 지구인가? 그것은 - 가장 적절할 것처럼 보이듯이 - 사이보그인가? 유태계 사이보그? 어떻든 그/그녀/그것의 서명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계를 완성하는 일을 끝마치는 것이 우리의 임무는 아닌데, 그렇다고 그것을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Rabbi Tarfon, Pirkei Avot[조상의 윤리]
이것은 인간 역사의 보다 선량한 시대 - 윤리적인 것이 오늘날(유엔 대변인이 전체 민족국가들과, 특별히 “대통령” 부시에 대해 표명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희망이라는 게, 그들이 “실용주의적”이었으면 하는 정도인)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시대 - 에 나타난 훌륭한 사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의무와 즐거움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킬 필요가 없는 오늘날, 내가 노동운동 내부의 또는 그 주변의 노동운동가들과 전문가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세계를 완성하는 것]을 시작하는 것을 특권이자 즐거움으로 생각하지 않을 이유 역시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노조,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전문가에서 약간 벗어나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폴 존슨(2001:2)이 그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함께 다시 끄집어내는데, 이번에는 기회에 대한 약속보다는 위험에 대한 경고와 함께 그렇게 한다.
사회운동 연구자들은 전형적으로 사회운동 [설명]틀을 [사회운동] 참가자들의 단순한 자기이해[에 기반하고 있는 내용]로 여기거나 또는 아마도 그들이 연구하는 활동가들에게 전략적 자원으로 기능하는(혹은 기능할 수 없는) 해석[내용]으로 여길 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 자신들의 학자적 분석은 객관적인 외부자의 설명으로서 틀지어져 있다. 그러나 사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단순한 자기이해에도 불구하고, 학자들 스스로가 오랫동안 노사관계라는 세계 안에서 훌륭하던 그렇지 않던 적극적으로 [설명]틀 생산자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틀은 그들 자신의 이해, 동일성 그리고 가정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자신의 일인 사람들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운동 [설명]틀뿐만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노동운동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래서 여기에서, 학자도 활동가도 그것이 통찰력이든 단순성이든 어느 하나를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가정 하에서 우리는 함께 이 문제점들을 해결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사회연구에 의해 알려진 사회운동 [설명]틀이 필요하기도 하고 우리는 실천가의 경험에 의해 알려진 노동운동 이론도 필요로 한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 우리의 집단적인 학습과정을 개시하기 위해서 -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론의 부적실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가의 단순성과 관련하여, 이론과 실천 사이 분할의 어느 한편에서 광범하게 지탱되고 있는 가정들에 대해 도전하고 거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는 한, 학자와 활동가 모두가 서로에 대한 비관적인 기대치를 계속해서 충족해 갈 것이다.
세계사회포럼 및 더 광범한 세계적 정의 연대 운동은 내가 암시했던 대로 이미 활동가와 학자(그리고 학자적 활동가 또는 활동가적 학자) 모두가 그런 상호의존의 전제 아래 서로 만나는 장소임이 증명되고 있다. 나는 그 세계사회포럼 및 세계적 정의 연대 운동이 이전에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는 개념 안에 포괄되었던 해방적 담론이 그 안에서 크게 발전할 유일한 광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부록 1 -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 국제주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문화7)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
나로서는 이것을 스스로 모든 형태의 일에 착수함으로써, 그리고 사회문화적 형태를 띰으로써, 그리고 스스로 시민사회에 다가감으로써 기존의 “경제적”, “정치적” 혹은 “정치경제적” 노조주의 모델을 뛰어넘는 노조주의로 이해한다. 그런 노조 모델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 노조주의다.
·임금노동 안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단순히 보다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위해서만 아니라 노동과정, 투자, 새로운 기술, 재배치, 외주, 교육 및 훈련 정책에 대한 노동자 및 노동조합의 통제의 증대를 위해서도 투쟁한다. 그런 전략과 투쟁은 갈등(예를 들면, 환경주의자들이나 여성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요구의 호소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그로 인해 영향을 받는 공동체와 이해관계자들과 대화와 공동행동을 통해 실행에 옮겨진다.
·위계적, 권위주의적, 기술관료적 작업 방법 및 관계에 반대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환경친화적인 제품, 노동시간 단축, 이용가능하고 필요한 것의 분배, 가사의 공유, 그리고 문화적인 자기발전 및 자기실현을 위한 자유시간 증대를 위하여 투쟁한다.
·노조로 조직되지 않거나 노조로 조직될 수 없는 노동계급 및 계층(소상품생산 영역, 가내노동자, 소농, 가정주부, 기술자 및 전문가)의 운동과 밀접하게 관계한다.
·강력하고 다양한 시민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타 비계급적 혹은 다계급적 민주주의 운동(교회 기초공동체 운동, 여성, 주신, 생태, 인원, 평화 운동 등)에 밀접하게 관계한다.
·자신을 “전위” 혹은 “최고의” 조직 혹은 권력이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이런 조직 혹은 권력에 자신을 종속시키지도 않는, 자율적이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파트너로서의 다른 (잠재적) 동맹세력과 밀접하게 관계한다.
·광범한 사회 안에 새로운 사회적 이슈를 떠맡는다, 특히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발생하거나 노조 자체 안에서 드러날 때(권위주의, 다수결주의, 관료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등에 대한 투쟁).
·작업장 민주주의에 손을 들어주고 노동자들 사이에, 그리고 노동자와 다른 민중적/민주적 사회세력 사이에 직접적 수평적 관계를 장려한다.
·교육, 문화, 정보통신 영역에서 적극적이고 노동자 문화와 민중문화를 자극하고 지역적, 민족적, 세계적 차원에서 지배적인 제도 혹은 미디어의 내외부에서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향한 이니셔티브를 지지한다.
·조직 민주주의, 다원주의, 창조성을 자극하기 위하여 조직 내부와 조직 간의 네트워킹에 열려져 있고, 비공식적인, 수평적인, 유연한 연합, 동맹, 이익집단의 가치를 이해한다.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
이 국제주의가 세계화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정보화된(GNI) 자본주의(국가간 관계는 이것의 오직 일부일 뿐이다)에 스스로 대응한다면, 이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는 스스로를 여기에서 배우고 여기에 기여를 해야 할 일반적인 세계적 연대 운동의 일부로 보아야할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노동자 국제주의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노조간부 혹은 여타 간부의 국제적 관계에서 작업장, 공동체 혹은 기초조직 수준에서 관련되어 노동하는 민중들의 대면관계로 이동한다.
·스스로의 힘을 강화하고, 분권화되어 있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이고, 유연한 국제적 정보 네트워크 모델을 고무함으로써 중앙집권화하고, 관료적이고, 경직적인 피라미드같이 거대한 국제 조직 모델에의 의존성을 벗어난다.
·“원조 모델”(“부유하고, 힘 있고, 자유로운” 노조, 노동자 등으로부터 자금 및 물자의 한 방향으로의 흐름)에서 “연대 모델”(정치적 지원, 정보 및 생각의 쌍방향의 혹은 여러 방향으로의 흐름)로 이동한다.
·말로 하는 선언, 호소 및 회의에서 관련 있는 노동하는 민중들에 의한 정치적 행동, 창조적인 일, 혹은 직접적인 재정적 기여(계속해서 필요로 할 것이다)로 이동한다.
·국제 연대를 단순히 대표자들의 요구, 가치, 역량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일하는 민중들이 표현하는 매일의 요구, 가치, 역량에 기초한다.
·임금노동자들의 투쟁을 강화하고 노동자주의적 국제주의를 지양하기 위해, 노동자가 국제주의의 특권화한 담당자가 아니지만, 그것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여타 민주주의적 국제주의들을 연결한다.
·노동자 기금 혹은 공개적으로 모금한 기금으로 국제주의적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연대 사업에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금융적 의존성을 극복하고 독자적인 연구 활동과 정책을 형성한다.
·전통적 국제주의의 정치적/금융적 강요, 사적 담함과 공적 침묵을, 관심 있는 노동자들에게 열려있는, 평등한 당사자들의 솔직하고, 우호적이고, 건설적이고, 공적인 담론으로 대체한다.
·국제적 투쟁의 유일한 장소 혹은 수준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작업장, 풀뿌리조직, 지역공동체가 토대일 수 있지만 전통적 형식적 영역도 이용될 수 있고 영향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새로운 국제주의의 발전이 서양, 동양, 남반구 노동운동으로부터의 기여나 이들과의 토론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다른 사회지리적 지역 내부에서의 기여나 토론 그리고 이들 지역 사이에서의 기여나 토론도 새로운 국제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요구된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된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의] 요소들을 국제적 노조의 발언이나 실천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 생각으로는 비록 몇몇은 아직도 노동자(혹은 심지어 노조) 국제주의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한 새로운 투쟁의 흐름을 선도하고 선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런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는 좌파 노동자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전형적인 유형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대한 세계적 차원의 노동자/민중적 그리고 민주주의적 대안을 프로그램적 조건과 관계적 조건 양 측면에서 상세히 작성하고 있다(Brecher, Costello and Smith 2000).
국제주의,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조합 국제주의
우리는 “국제주의”,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조합 국제주의” 개념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회운동 담론 안에서 국제주의는 관습적으로 19세기 노동과 연관되어 있고,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거슬러 올라가 투사하여 고대의 종교적 보편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기의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를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19, 20 양 세기에도 여성/페미니즘적 형태, 평화주의적 형태, 반식민주의적 형태 그리고 인권 형태를 포함하도록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두 세기와 “민족 국가의 세계”에 한정되는 한, 우리는 세계화 시기에 상응하는 새로운 용어를 필요로 한다. 어떤 이는 초민족주의를 거론한다. 나는 세계적 연대가 세계화, 그에 대한 불만 그리고 대안을 다루는 한에서, 이 용어를 더 선호한다. 노동자 국제주의는 광범위한 과거 및 현재의 노동관련 사상, 전략 그리고 실천을 가리키는데, 협동조합, 노동자 및 사회주의 당, 사회주의 지식인, 문화, 미디어, 그리고 심지어는 스포츠의 그것들[노동관련 사상, 전략, 실천]을 포함한다. 노조국제주의는 민족적 산업적 자본주의(NIC) 시기 동안 노동자 스스로의 접합[두 뼈가 따로 움직일 수 있으면서 이어진 관절을 지칭함, ‘차이를 인정한 가운데서의 연대’를 의미 - 역자]의 초보적인 형태에 국한된다. 노조 국제주의는 20세기 후반 보통은 노동자 국제주의와 합성될 정도로 노동자 국제주의를 대체하고 지배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화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정보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가장 심각하게 위기에 처해 있고 의문시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노조 국제주의이다.
네트워킹, 커뮤니케이션, 문화
우리는 진실로 우리의 시대에 적합한 추가적인, 심지어는 대안적인 노동자 접합(함께하기와 의견표명 모두)원칙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급진적인” 그리고 “혁명적인” 노조들 안에서도 발생하는 관료주의, 위계, 도그마의 재생산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침식시킬 노동자 접합 원칙이 필요하다.
이 원칙은 네트워크이고 그 실천은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크를 물신화하고 조직을 악마시할 필요는 없다. “네트워킹”은 인간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우리는 그래서 네트워크 측면에서 조직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네크워크를 조직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산업적 자본주의(NIC)에서 세계화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정보화한 자본주의(GNI)로의 이행이 또한 조직 자본주의에서 네트워크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것은 사실로 남아있다. 새로운 이니셔티브, 속도, 창조성, 유연성이 나오는 듯한 곳은 국제 노동 네트워크와 네트워킹으로부터이다. 급진적-민주주의적이고 국제주적인 것에 관심 있는 국제 노조주의는 이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체될 것이니까. 국제 노조주의가 자신 스스로를 노조를 훨씬 뛰어넘고, 노동문제를 훨씬 뛰어넘는 급진적-민주주의적 국제주의적 프로젝트의 일부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국제 노조 네트워킹 자체가 정체할 것이다.
“네트워킹”은 제도보다는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다. 국제 노동 네트워킹은 급진적-민주주의적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문화 감각, 즉 “세계적 연대 문화”를 배워야 하고 생산해야 한다.
노동은 오래고도 풍부한 문화적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과거에는 민중적, 민주주의적, 심지어는 아방가르드 문화 운동을 창조하고 심지어는 선도하였다. 다시 한 번 국제 노조운동은 축소지향의 자기제한을 벗어나거나 국제적 미디어 영역에서 보이지 않은 채로 존재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국제 미디어 영역은 민주주의적 논쟁과 숙고에서 중심적 공간으로서 점차로 제도적 영역에 도전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을 대체해가고 있다.
1) 이 부분에서 폴 존스턴의 작업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거북하다. 특히 그가 시민성 이론과 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논의했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을 해방과 접합시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이러한 독창성에 더해 존스턴이 노동 조직가이자 이론가, 분석가라는 것이 덧붙여져야만 한다. 더욱이 그는 그러한 노동 국제주의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초민족적’ 노조주의 (예컨대 미국-멕시코 국경을 가로지르는)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2) 이는 그의 글 초안에 의한 것인데 저자는 친절하게도 본인에게 활용하도록 했다.
3) [역주] 뒤에도 나오는 내용에서 추론하자면 이 말은 해방운동의 주체가 선험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4) 이 부분은 Waterman 2001b에서 개작되었다.
5) [역주] Waterman 2001b에서 생략된 내용을 복원요약하면 ‘[예상과는 혹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비공식부문의 경제활동인구 비율이 매우 높고, 높아지고 있고, 이 제 3 지역의 세계 인구와 노동인구의 규모를 고려할 때 “비전형적 고용”이 [보다 일반적이라는 의미에서] 전형적 고용이다’라는 등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6) [역주] 이 내용은 성서에(도)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20장 16절; 공동번역본)
7) 이 부분은 Waterman 2001의 13-16, 22-24쪽에서 발췌한 것이다. 참고문헌은 전체 목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목들이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