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0세기 중국은 세계사의 일부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세계사 자체이기도 했다. 중국은 19세기 말 이후 열강들 사이의 제국주의 경합과 식민지 침탈의 시대의 한 복판에 놓여있었고, 제3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이 핵심적으로 분출한 장소였으며,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모순적 결합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장소였다. 그 이후에 소련과 대립하면서도 유사한 사회주의 국가를 설립한 역사를 경험하였고, 거대한 대중운동의 폭발과 소멸을 겪었으며, 20세기말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새로운 동력을 더해주는 새로운 제조업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처럼 중국은 한번도 빠지지 않고 20세기 세계사의 핵심적 무대가 되었고, 핵심적 쟁점들을 제기한 장소였다. 문제로서의 중국은 여전히 우리시대에도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그 질문의 한 복판에는 사회주의의 거대한 실험이 놓여있다. 개혁개방이라고 이르는 1976/78년 이후의 중국은 마치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단절한 하나의 새로운 시기에 들어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마오 시기를 땅에 묻고 시작한 1980년대 이후의 중국에 ‘마오의 유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흐름들이 관찰되는 것 자체가 현 시기 중국을 1970년대 이전과 완전히 떼어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으며, 잊혀진 듯 보이는 쟁점들은 극복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끝없이 새롭게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짐으로 되살아 올 수밖에 없다.1)더 거슬러 가서, 또 하나의 단절이었던 것 같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1949년이라는 경계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 시기를 나누더라도 그 사이에서 쟁점들은 계속 이어져서 분출되어 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현재의 중국이 사회주의의 과거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 과거의 경험들을 돌이켜보지 않고서 현재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음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나간 역사가 결코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며, 그 과거는 모순과 문제제기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주며, 그 과거는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지만, 그 문제는 여전히 지금 이 자리에도 살아있는 목소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코 ‘잃어버린 시절'과 '찬란한 현재'로 나뉠 수 없는 문제들을 되찾아 끄집어내고, 상처를 상처로서 드러내려는 시도는 모든 이를 불편하게 하지만, 결코 우회할 수 없는 길임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마이스너의 이 책 자체는 변화해 온 중국의 현대사만큼이나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마오가 사망한 1976년 첫판이 나온 이 책은, 그 후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86년 개정한 2판을 발간했고, 중국의 자본주의화의 길이 본격화한 1999년에 그 3판이 발간되었다. 번역의 판본인 제3판은 20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의 등장시기부터 새로운 모순을 낳고 있는 1990년대까지 한 세기 전체를 조명해 주고 있으며, 그것을 사회주의 경험의 모순들 속에서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는 중국 자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소련을 포함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전체의 역사에 대한 조명으로 읽혀야 한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정립으로서의 중국의 역사적 시도가 결국 유사한 한계 속에서 좌절하게 되는 이야기로서 중국 현대사는 중국을 벗어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전체에 제기되는 모든 쟁점을 건드리고 있다.
우선 문화혁명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쇠잔해간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의 모순적 측면에 대한 마이스너의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자.
『이 운동[문화대혁명]은 관료적 특권과 억압에 반대하는 전쟁으로 (대중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곧바로 국가 관료기구 가운데 가장 억압적이고 가장 위계적인 중국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마오주의 지도자들은 초기에 중국공산당을 공격하도록 대중을 자극하면서 한층 민주적인 정치구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원래부터 당을 ‘공고히 하는' 목적을 가졌다고 선포한 사람들도 바로 이 지도자들이었다. 이후 운동은 곧바로 당 기구를 장악하기 위한 공산당 지도자들 사이의 잔인한 투쟁으로 전락해버렸다....... 또한 문화혁명은 1927년 장제스의 군대가 그토록 잔인하게 프롤레타리아트를 붕괴시킨 이래 처음으로 중국의 도시 노동계급을 정치무대에 등장시켰다. 그러나 초기의 운동과정에서 형성되었던 진정한 노동자조직은 운동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기 훨씬 전에 이미 해체되고 탄압받았다. 이후 중국의 노동계급은 또다시 정치적 수동상태에 빠져들었다.......중국에서 사회주의 정신을 부활시킨다는, 그래서 '부르주아 복귀'의 위험을 막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한다는 목표 아래 일어났던 이 동란은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앙의 위기'를 낳았고 인민공화국에 남아있던 그토록 빈약한 사회주의 기반마저 붕괴시키면서 결국에는 많은 중국인의 마음에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불신만 심어주었다. (430-31쪽)』
이는 그저 무력감의 표현인가? 그보다 오히려 마이스너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리고 정확하게 이론화하지 못하고 해결점을 찾지 못한 내장된 모순들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결국 사회주의가 국가주의와 발전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굴복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밝혀내려는 것, 그것이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여러 가지 쟁점들 중 몇 가지만 추려보자.
첫 번째 문제는 중국의 사회주의 역사적 경험 속에 강하게 깔려있던 민족주의라는 쟁점이다. 이는 1919년 5.4운동 이래 외세로부터 독립하고 분열을 극복한 통일된 그리고 부강한 중국의 건설이라는 열망으로 나타나, 사회주의적 경향과 병행하면서도 그것을 왜곡시켜 왔다. 그것은 농촌중심의 혁명전략이 결국은 도시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농촌에 대한 착취를 가속화하는 모델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질서'의 이름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고, 문화혁명 종료 후 일종의 '조국방어'라는 명목 하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나아가 개혁개방의 새로운 산업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든 요인이었다. 그 판본이 소련을 더욱 모방한 중앙집중적 형태이든, 아니며 마오식으로 다소 탈집중적인 형태이든 간에 은폐된 민족주의는 넘어서지 못했던 한계점으로 작동해 왔다.
둘째로 중국의 사회주의 경험과 노동계급 사이의 모호한 관계라는 쟁점이 등장한다. 1930년대 중국사회 성격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은 1930년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노동계급을 형성하였다. 그 상대적 규모가 아니라 절대적 수만 놓고 보면 1940년대 말 중국 노동계급의 규모는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 노동계급에 비해 뒤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여러 차례의 도시혁명의 패배이후 중국혁명은 농촌으로 철수했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근거지와 홍군을 통해 ‘농촌이 도시를 포위'함으로써 중국혁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기에도 마오의 초점은 도시는 아니었다. 인민공사로 대표되는 대약진기의 새로운 모델의 출발점도 농촌이었고, 농촌이 도시를 포위해가는 전략이 중요했다. 이는 양면적인 함의를 지닌다. 한편에서, 대중운동으로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도시노동자들만의 운동은 아니며, 그 '대중'형성적 측면을 포괄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그런 점에서 '사회혁명'임을 강조해 보여준다. 다른 한편 중국사회주의에서 노동계급이 운동의 주체로서 등장한 것은 상당히 뒤늦은 일이었고, 그것은 문화대혁명시기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려 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시기 도시노동자의 대중적 열기는 달아오르는 동시에 억제되었고, 안정된 생산의 지속을 위해 다시 봉쇄되었다. 더더구나, 농촌과 도시의 높은 장벽을 통해 상대적으로 보호된 도시의 안정적 노동자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특권세력화하였고,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기 노동자 '조반' 세력은 농촌과 도시의 경계에 서있던 '임시노동자'들이었다. 사회주의 하에서 중국노동자들은 '코포라티즘'적으로 통제되고 보호받던 세력이었으며, 이들이 오히려 사회적 동요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게 되는 가운데에서였다. 중국혁명은 노동계급의 자기전화 없이 사회주의적 전화의 길을 겪었다는 역설로 드러난다.
셋째, 문화대혁명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것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계급의 존재였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주자파)으로 지칭된 세력을 색출하는 작업으로 나타난 이 쟁점은,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완료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난제를 제기하였다. 그에 대한 대답은 때로는 주의주의적인 사상문제로 나타나거나, 때로는 과거의 계급성분의 유제로 나타나면서 편향을 극단화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그와 연관하여, 이런 경향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라는 쟁점을 제기하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주자파를 정치적으로 색출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답이 아닌 답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마오는 분명 '이데올로기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그것은 때로 사상개조로, 때로 정치적 억압으로, 때로는 대중의 주도성으로 일관되지 않은 시도들로서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이다.
넷째, 그러나 가장 큰 문제의 핵심은 대중운동과 당 사이의 관계였다. 마오의 가장 큰 이율배반을 보여준 사례는 마오가 문화혁명의 마오주의적 좌파들을 제거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을 종결시켰다는 점이었다. 그 좌파들은 처음에는 ‘극좌'에서 다시 '극우'로, '트로츠키주의자'로, 제국주의의 '첩자'로 다양한 죄명을 받고 사라져갔다.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시기에 이미 등장한 이런 이율배반은 문화혁명기에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억제를 벗어나 폭발한 대중운동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억압의 핵심적 적대세력으로 당관료를 지목하였고, 올바른 당과 잘못된 당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화한 당기구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갔다.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당이 아니라 당을 전복하는 대중운동이라는 역설에 직면한 마오는 결국 당의 편에 섰고, 인민해방군이라는 억압장치가 대중운동을 억누르게 되었으며, 당이 두 가지 노선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는 입장을 버리고 당을 숙정함으로써 당의 무오류성을 회복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마이스너가 문화대혁명을 1966년-69년의 짧은 3년으로 보는 것도 이처럼 대중운동의 주도성이 사라지면서 무오류성의 신화를 자기강화하는 당이 복원된 시점을 중국사회주의의 실험의 종료점이라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그저 '이후'였을 뿐이다.
그 이후 1970년대에 도시노동자에 대한 소비주의적 포섭의 단초가 열리고, 대미선망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이 개시된 것을 고려하면 1980년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이미 문화혁명의 종료로부터 열려있던 것이기도 했다.
마이스너는 마오주의의 신화를 글자그대로 믿는 마오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오시기의 시도들을 ‘봉건적 잔재'나 '낙후된 농촌주의'의 잔재로 평가하는 근대화론자도 아니다. 마이스너가 강조하는 것은 마오와 마오시기가 직면한 역설들이다. 사회주의를 지향한 중국이 왜 사회주의가 될 수 없었는가를 되짚어보려는 시도로서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제기로 남을 것이다. PSSP
1)백승욱, 〈마오쩌뚱의 유령: 신자유주의시대 중국(5)〉, 《월간 사회진보연대》2002년 9월호. 본문으로
물론 그 질문의 한 복판에는 사회주의의 거대한 실험이 놓여있다. 개혁개방이라고 이르는 1976/78년 이후의 중국은 마치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단절한 하나의 새로운 시기에 들어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마오 시기를 땅에 묻고 시작한 1980년대 이후의 중국에 ‘마오의 유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흐름들이 관찰되는 것 자체가 현 시기 중국을 1970년대 이전과 완전히 떼어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으며, 잊혀진 듯 보이는 쟁점들은 극복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끝없이 새롭게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짐으로 되살아 올 수밖에 없다.1)더 거슬러 가서, 또 하나의 단절이었던 것 같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1949년이라는 경계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 시기를 나누더라도 그 사이에서 쟁점들은 계속 이어져서 분출되어 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현재의 중국이 사회주의의 과거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 과거의 경험들을 돌이켜보지 않고서 현재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음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나간 역사가 결코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며, 그 과거는 모순과 문제제기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주며, 그 과거는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지만, 그 문제는 여전히 지금 이 자리에도 살아있는 목소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코 ‘잃어버린 시절'과 '찬란한 현재'로 나뉠 수 없는 문제들을 되찾아 끄집어내고, 상처를 상처로서 드러내려는 시도는 모든 이를 불편하게 하지만, 결코 우회할 수 없는 길임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마이스너의 이 책 자체는 변화해 온 중국의 현대사만큼이나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마오가 사망한 1976년 첫판이 나온 이 책은, 그 후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86년 개정한 2판을 발간했고, 중국의 자본주의화의 길이 본격화한 1999년에 그 3판이 발간되었다. 번역의 판본인 제3판은 20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의 등장시기부터 새로운 모순을 낳고 있는 1990년대까지 한 세기 전체를 조명해 주고 있으며, 그것을 사회주의 경험의 모순들 속에서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는 중국 자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소련을 포함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전체의 역사에 대한 조명으로 읽혀야 한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정립으로서의 중국의 역사적 시도가 결국 유사한 한계 속에서 좌절하게 되는 이야기로서 중국 현대사는 중국을 벗어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전체에 제기되는 모든 쟁점을 건드리고 있다.
우선 문화혁명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쇠잔해간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의 모순적 측면에 대한 마이스너의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자.
『이 운동[문화대혁명]은 관료적 특권과 억압에 반대하는 전쟁으로 (대중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곧바로 국가 관료기구 가운데 가장 억압적이고 가장 위계적인 중국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마오주의 지도자들은 초기에 중국공산당을 공격하도록 대중을 자극하면서 한층 민주적인 정치구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원래부터 당을 ‘공고히 하는' 목적을 가졌다고 선포한 사람들도 바로 이 지도자들이었다. 이후 운동은 곧바로 당 기구를 장악하기 위한 공산당 지도자들 사이의 잔인한 투쟁으로 전락해버렸다....... 또한 문화혁명은 1927년 장제스의 군대가 그토록 잔인하게 프롤레타리아트를 붕괴시킨 이래 처음으로 중국의 도시 노동계급을 정치무대에 등장시켰다. 그러나 초기의 운동과정에서 형성되었던 진정한 노동자조직은 운동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기 훨씬 전에 이미 해체되고 탄압받았다. 이후 중국의 노동계급은 또다시 정치적 수동상태에 빠져들었다.......중국에서 사회주의 정신을 부활시킨다는, 그래서 '부르주아 복귀'의 위험을 막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한다는 목표 아래 일어났던 이 동란은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앙의 위기'를 낳았고 인민공화국에 남아있던 그토록 빈약한 사회주의 기반마저 붕괴시키면서 결국에는 많은 중국인의 마음에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불신만 심어주었다. (430-31쪽)』
이는 그저 무력감의 표현인가? 그보다 오히려 마이스너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리고 정확하게 이론화하지 못하고 해결점을 찾지 못한 내장된 모순들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결국 사회주의가 국가주의와 발전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굴복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밝혀내려는 것, 그것이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여러 가지 쟁점들 중 몇 가지만 추려보자.
첫 번째 문제는 중국의 사회주의 역사적 경험 속에 강하게 깔려있던 민족주의라는 쟁점이다. 이는 1919년 5.4운동 이래 외세로부터 독립하고 분열을 극복한 통일된 그리고 부강한 중국의 건설이라는 열망으로 나타나, 사회주의적 경향과 병행하면서도 그것을 왜곡시켜 왔다. 그것은 농촌중심의 혁명전략이 결국은 도시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농촌에 대한 착취를 가속화하는 모델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질서'의 이름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고, 문화혁명 종료 후 일종의 '조국방어'라는 명목 하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나아가 개혁개방의 새로운 산업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든 요인이었다. 그 판본이 소련을 더욱 모방한 중앙집중적 형태이든, 아니며 마오식으로 다소 탈집중적인 형태이든 간에 은폐된 민족주의는 넘어서지 못했던 한계점으로 작동해 왔다.
둘째로 중국의 사회주의 경험과 노동계급 사이의 모호한 관계라는 쟁점이 등장한다. 1930년대 중국사회 성격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은 1930년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노동계급을 형성하였다. 그 상대적 규모가 아니라 절대적 수만 놓고 보면 1940년대 말 중국 노동계급의 규모는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 노동계급에 비해 뒤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여러 차례의 도시혁명의 패배이후 중국혁명은 농촌으로 철수했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근거지와 홍군을 통해 ‘농촌이 도시를 포위'함으로써 중국혁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기에도 마오의 초점은 도시는 아니었다. 인민공사로 대표되는 대약진기의 새로운 모델의 출발점도 농촌이었고, 농촌이 도시를 포위해가는 전략이 중요했다. 이는 양면적인 함의를 지닌다. 한편에서, 대중운동으로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도시노동자들만의 운동은 아니며, 그 '대중'형성적 측면을 포괄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그런 점에서 '사회혁명'임을 강조해 보여준다. 다른 한편 중국사회주의에서 노동계급이 운동의 주체로서 등장한 것은 상당히 뒤늦은 일이었고, 그것은 문화대혁명시기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려 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시기 도시노동자의 대중적 열기는 달아오르는 동시에 억제되었고, 안정된 생산의 지속을 위해 다시 봉쇄되었다. 더더구나, 농촌과 도시의 높은 장벽을 통해 상대적으로 보호된 도시의 안정적 노동자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특권세력화하였고,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기 노동자 '조반' 세력은 농촌과 도시의 경계에 서있던 '임시노동자'들이었다. 사회주의 하에서 중국노동자들은 '코포라티즘'적으로 통제되고 보호받던 세력이었으며, 이들이 오히려 사회적 동요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게 되는 가운데에서였다. 중국혁명은 노동계급의 자기전화 없이 사회주의적 전화의 길을 겪었다는 역설로 드러난다.
셋째, 문화대혁명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것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계급의 존재였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주자파)으로 지칭된 세력을 색출하는 작업으로 나타난 이 쟁점은,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완료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난제를 제기하였다. 그에 대한 대답은 때로는 주의주의적인 사상문제로 나타나거나, 때로는 과거의 계급성분의 유제로 나타나면서 편향을 극단화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그와 연관하여, 이런 경향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라는 쟁점을 제기하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주자파를 정치적으로 색출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답이 아닌 답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마오는 분명 '이데올로기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그것은 때로 사상개조로, 때로 정치적 억압으로, 때로는 대중의 주도성으로 일관되지 않은 시도들로서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이다.
넷째, 그러나 가장 큰 문제의 핵심은 대중운동과 당 사이의 관계였다. 마오의 가장 큰 이율배반을 보여준 사례는 마오가 문화혁명의 마오주의적 좌파들을 제거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을 종결시켰다는 점이었다. 그 좌파들은 처음에는 ‘극좌'에서 다시 '극우'로, '트로츠키주의자'로, 제국주의의 '첩자'로 다양한 죄명을 받고 사라져갔다.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시기에 이미 등장한 이런 이율배반은 문화혁명기에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억제를 벗어나 폭발한 대중운동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억압의 핵심적 적대세력으로 당관료를 지목하였고, 올바른 당과 잘못된 당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화한 당기구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갔다.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당이 아니라 당을 전복하는 대중운동이라는 역설에 직면한 마오는 결국 당의 편에 섰고, 인민해방군이라는 억압장치가 대중운동을 억누르게 되었으며, 당이 두 가지 노선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는 입장을 버리고 당을 숙정함으로써 당의 무오류성을 회복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마이스너가 문화대혁명을 1966년-69년의 짧은 3년으로 보는 것도 이처럼 대중운동의 주도성이 사라지면서 무오류성의 신화를 자기강화하는 당이 복원된 시점을 중국사회주의의 실험의 종료점이라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그저 '이후'였을 뿐이다.
그 이후 1970년대에 도시노동자에 대한 소비주의적 포섭의 단초가 열리고, 대미선망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이 개시된 것을 고려하면 1980년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이미 문화혁명의 종료로부터 열려있던 것이기도 했다.
마이스너는 마오주의의 신화를 글자그대로 믿는 마오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오시기의 시도들을 ‘봉건적 잔재'나 '낙후된 농촌주의'의 잔재로 평가하는 근대화론자도 아니다. 마이스너가 강조하는 것은 마오와 마오시기가 직면한 역설들이다. 사회주의를 지향한 중국이 왜 사회주의가 될 수 없었는가를 되짚어보려는 시도로서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제기로 남을 것이다. PSSP
1)백승욱, 〈마오쩌뚱의 유령: 신자유주의시대 중국(5)〉, 《월간 사회진보연대》2002년 9월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