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경제에 관한 몇가지 오해들
들어가며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디지털과 벤처이다. 얼마 전까진 벤처대박이 화제였고, 이제는 벤처괴담이 역시 화제이다. 인터넷 경제라고도 하고 'e-conomy'(Delong 1999)라고도 한다. 레스터 서로같은 사람은 지식기반 경제의 등장을 말하기도 한다. 아예 미국의 신경제(New Economy)는 경기순환의 종말을 선포하여 전세계 자본주의의 이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과연 디지털 경제란 무엇일까. 디지털 경제란 용어는 1998년, 미 경제의 장기호황을 설명하기 위한 미 상무부 작성의 "The Emerging Digital Economy"(디지털 경제의 등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보고서를 통해 미 상무부는 미국 산업경쟁력의 회복이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에 기인한다고 결론내렸다. 즉 디지털 경제란 정보의 처리와 유통과정이 디지털화되고 네트워크화되면서, 이에 의존한 재화·서비스의 생산, 분배, 소비활동이 이루어지는 경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터넷 경제는 디지털 경제의 한 부분이며, 지식기반 경제는 디지털 경제의 등장으로 인한 사회변동의 전망을 극단적으로 낙관한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다름아니다. 또한 e-conomy란 용어는 정보화 혁명을 전자정보화 기술의 발전·보급과 경영조직·관행 개혁의 결합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세계적 규모의 경제구조적 파괴와 변동을 가져온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e-conomy의 등장이 경제적 안정과 무리없는 성장, 지속적 주가상승, 정부재정 흑자, 혹은 낮은 실업률, 이자율, 인플레이션율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정부정책과제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다. 보다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구경제학의 종식을 선언하는 '신경제(New Economy)'론이 동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부루조아 경제학자들내에서조차 신경제론의 실체를 인정하는 입장은 극소수이다. 주로 언론과 정부, 정보통신주 투자자들로부터 만들어진 말이다.
결국 들뜬 언론과 부르조아지들의 섣부른 기술결정론적 축포를 뒤로 한 채, 우리는 디지털 경제에 대한 질문의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디지털 경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9년과 2000년 초반의 정세를 살펴, 금융세계화와 연관되어 디지털 경제가 출현한 배경을 짚어보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디지털 경제의 특징과 관련된 몇가지 쟁점들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IMF 구조조정과 벤처·디지털 경제의 출현
현재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한 축이 노동의 신축화와 노동자 계급(운동)의 파괴를 동반하는 '노동의 궁핍화 또는 불안정화'라면, 다른 한축은 '금융화와 IT(Information Technology 정보기술) 혁명'에 의한 과잉생산의 파괴와 자본축적 구조의 혁신, 새로운 동원전략의 수립이다. 자본축적 이윤율 곡선상의 변곡점, 즉 자본축적의 이윤율이 하강하게 되는 구조적 위기에 자본은 필연적으로 이윤율 보전을 위한 금융적 이탈(금융화)을 선택한다. 실물적 생산·축적으로부터의 급속한 이탈과 금융적 축적으로의 이전은, 이윤율 저하의 원인이 되었던 과잉생산과 투자를 파괴하며 각 주체간의 투기적인 자본 재분배를 강제한다.
다시말해 금융화의 진전은 한편으로는 실물적 축적의 토대를 파괴함으로써 자본축적의 붕괴를 재촉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IT(정보기술)혁명과 결합하여 새로운 자본축적 사이클의 구축을 위한 제반 정치·경제·사회적 개혁과 새로운 주체형성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지난 1단계 IMF 구조조정의 핵심은 한마디로 과잉자본과 노동에 대한 강제적인 파괴와 퇴출이었다. 고금리·긴축재정의 기조아래 인위적인 공황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구조조정의 전부는 아니었다.
1996년경 개장된 이후 버려져있던 코스닥 시장과 벤처창업에 대한 정부의 갖가지 지원·육성책들이 1998년 이후 본격화된 것이다. 이것이 단지 의례적인 불황기의 중소기업 육성대책들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조치였음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20-30대의 신흥벤처갑부들이 탄생했고, 인터넷·주식투기열풍은 공황의 빈 자리를 채워갔다.
인터넷 기술의 경이로운 발전과 젊고 깨끗한 이미지가 어우러진 벤처의 성공은 곧 경제위기 극복의 신화가 되었고, 구조조정의 성공을 상징했다. 구조조정의 개혁가들은 디지털 경제의 도래를, 구재벌을 위시한 경제전반에 걸친 낡은 경영조직·관행의 혁신으로서 자본-금융시장의 시스템 개혁은 물론이고, 교육·문화·정치·사회전반에 이르는 거대한 진보(!)를 서둘러야 할 절대절명의 역사적 계시로서 받아들였다. 벤처·디지털경제의 출현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일부이자 그 결과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새로운 구조조정의 역사적 과제였던 것이다. '산업화에서는 뒤졌지만, 정보화에서는 앞서자!'는 식의 새로운 발전동원전략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금융화와 결합되어 급속하게 출현하게 된 디지털경제의 토대는 극히 불안정했고, 1단계 구조조정의 파괴적 결과들이(빈부격차와 노동의 불안정화 등) 통계수치로 잡힐 때 즈음, 다가온 총선은 구조조정의 정치적 지도력을 재구성해낼 시간을 요했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디지털 경제의 출현으로 촉발된 자본축적구조 혁신과 새로운 동원전략의 실행을 위한 2단계 구조조정의 계획들이 마련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2단계 구조조정의 모태가 될 디지털 경제의 재편을 위한 거품빼기와 M&A(인수합병)이 병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벤처·디지털 경제는 '의도된' 공황(정책)의 빈 자리를 채워주면서 붕괴직전의 자본주의 재생산시스템을 재가동시키는 새로운 원동력으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디지털 경제는 새로운 착취시스템의 전형이자 새로운 구조조정의 첨병이었다.
디지털 경제의 주요쟁점과 오해들
인터넷의 확산과 산업의 정보화는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오는가?
신경제론의 지지자들과 지식기반경제의 이데올로그들에게 이는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터넷과 정보화는 산업전반의 물류비용과 생산비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생산성 향상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무한한 기술의 발전이 경제적 발전과 아무런 매개없이 결합되어 자본주의의 최대약점인 '경기순환'과 '인플레이션'을 죽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능케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신경제의 본산인 미국에서조차 인터넷-정보화가 정보통신산업 자체의 생산성향상이외에 다른 산업분야에 미친 파급효과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신경제 논쟁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던) 지난해 10월 발표된 미 상무부의 '40년간의 미 경제지표 수정치'에 따르면 1990년대 미 경제의 연평균 생산성 증가율은 2.1%에 이른다. 이는 분명 지난 생산성 향상수준에 비해 높은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이는 1990년대 들어 급부상한 지식·정보산업이 이같은 생산성 향상을 가져온 것처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이같은 전반적인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상무부가 경제지표 수정시 다음 세가지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 생산성 향상에 영향을 주는 자료를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했고 둘째, 과거에는 `비용'으로 간주했던 컴퓨터소프트웨어 구입을 이번 수정치에서는 `투자'로 분류했으며 셋째, 기술적 사항인 생산성 측정의 테크닉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성 분야의 전문가인 로버트 고든 교수의 최근 연구는 컴퓨터 분야를 중심으로 한 `신경제'가 고도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고든은 1990년대의 생산성 향상분 중 3분의 1은 측정오차이고, 다른 3분의 1은 경기순환에 따른 향상분이며, 나머지 3분의 1만이 컴퓨터 분야에 의한 기여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수정 경제지표를 근거로 한다해도, 컴퓨터 분야에 의한 생산성 향상은 신경제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다. 미 경제호황은 신경제의 등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벤처와 재벌의 관계는?
사실 벤처(venture)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모험, 투기'이다. 그러니까 벤처기업이란 본래 투기기업을 뜻한다. 또 벤처기업이 꼭 인터넷 기업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벤처란, 일반적으로 인터넷 기술과 사업아이템을 가진 신생 중소기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있다. 더구나 일부 재벌개혁론자들과 언론은 마치 벤처가 재벌개혁의 대안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재벌의 현 구조조정본부를 벤처캐피탈로 재편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경련 유한수전무의 말대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일이다.
드롱(전 미재무부 경제정책국 부국장)의 설명에 따르면, 정보화 혁명의 역사는 곧 기술발전의 역사이고 경영조직 및 경영관행 혁신의 역사이다. 이 둘은 서로의 진전을 추동한다. 경영조직 및 관행상의 변화는 디지털화를 이끄는 제2의 원동력이다. E-conomy란 신기술 발전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경영조직, 시장구조, 정부규제의 변화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 드롱의 말을 종합하자면, 경영(조직)혁신이란 경영생태학을 뜻하는데 여기엔 벤처자본의 두드러진 역할, start-up fund(벤처창업기금)와 spin-off(기업의 자회사 또는 사업부를 독립기업화하는 방법), 그리고 숙련 노동자와 경영자에 대한 성과배분 및 보상방법, 그리고 신경영과 신기술의 새로운 결합이 포함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벤처기업은 약 6000여개에 이르지만 이들중 상당수는 최근 재벌 구조조정과정에서 spin-off되거나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제휴된 기업들이다. 물론 벤처와 재벌은 별개의 존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벤처가 재벌을 대체하거나 재벌과 대립되는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벤처는 재벌이 가려는 미래의 위험을 실험하고 조절하며, 그 성공을 전수시켜주는 구조조정의 첨병이다.
벤처거품은 얼마나 더 빠질 것인가?
블랙먼데이로 기록된 지난 4월 17일, 한국증시는 10여분간 거래가 중지되는 사상초유의 서킷 브레이크 사태를 맞았다. 이날의 주가폭락으로 하루만에 40조원이 날아갔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태의 원인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전 주에 있었던 미국 나스닥(NASDAQ, 전국증권업협회 (컴퓨터)자동매매시스템)의 폭락 때문이었다. 이 주간에 나스닥이 기록한 폭락세는 전설적인 1929년의 '검은 금요일' 주간보다 컸고 '피의 금요일'로 기록된 4월 14일에는 무려 1조 달러가 주식시장에서 증발했다. 이는 화폐가 등장한 이후 하루 최대의 손실액이었다고 한다(뉴스위크). 이같은 사태 앞에서 더 이상 벤처거품론에 관한 논란의 여지는 없다.
아직도 나스닥이나 코스닥의 주가가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시스코·MS·마이크론테코놀로지 등 미 증시를 이끌었던 주식들의 PER(주당 수익률)이 아직도 40∼1백60에 달할 정도로 주가는 높게 형성되어 있다. 사정은 코스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벤처기업들은 높은 주가만을 믿고, 이제까지 신경쓰지 않았던 수익모델 확보에 저마다 나서기 시작했다. 장부상의 매출액을 높이기위해 때아닌 용산 전자상가들과의 제휴에 나서는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일련의 사태들이 지금 당장의 증시붕괴나 디지털 경제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벤처거품론은 벤처기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이다. 벤처의 속성 자체가 「고수익을 기대하는 대신 사업이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는 데 있는만큼, 벤처와 거품은 동전의 양면이다. 또 이번 폭락의 직접적 계기였던 그리스펀의 금리인상 조치는 작년에만 5차례나 있어왔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예상해왔던 일이 왜 하필 지금 터졌으며, 코스닥이 나스닥의 등락에 이토록 종속되어있는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나스닥 폭락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사상 최대로 누적되고 있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와 9년간의 호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압력 때문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미 행정부는 한편으로는 신경제를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스닥 거품빼기를 통한 미 경제의 연착륙시도에 나선 것이다. 당연히 투자자들은 정부의 시장개입을 비난하기 시작했지만 이들 시장과 미 정부와의 다툼은, 곧 새로운 미래수익을 생성하기 위한 벤처기업간 M&A의 활성화와 새로운 수익모델 찾기로 마무리될 것이다.
요는 이 과정을 통해 신경제의 금융적 불안정성은 더욱 확대될 것이고 연착륙 이후에 찾아올 다음번 위기의 규모는, 1929년의 기록을 갱신한 이번 붕괴보다 클 것이라는 점이다. 과연 그 때에도 시장과 미 정부가 자신들의 대안을 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편 어쩌면 9년간의 호황의 즐거운(?) 뒷정리를 하고있는 미국과는 달리, 아무런 대책없이 뉴욕에서 날아온 폭탄을 맞은 한국의 입장은 좀 다르다. 당장 벤처거품 본질론과 미 증시 동조화론을 빼고나면, 마땅히 주가가 이처럼 하루아침에 폭락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막 IMF공황으로부터 살아나기 시작한 시장 상황이 미국의 경우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사태를 지켜볼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정부와 시장의 대책이라는 것 역시 속수무책일뿐이다.
결국 이들의 선택은 하나, 1단계 구조조정에 이은 강력한 2단계 구조조정이다. 첫번째는 투신사정리를 필두로 한 금융구조조정이다. 벤처기업간의 인수합병도 이전에 시도되었던 행복한 마음의 행사가 아니라, 죽음을 모면키 위한 사활전으로 치러질 것이다. 물론 이 예상은 생존권 사수와 금융세계화 저지를 위한 민중들의 투쟁이 이들을 굴복시키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산업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에는 앞서자? 한국 경제의 신경제화는 가능한가?
1980년대 우리나라 경제전문가들의 주문은 '일본경제 추월, 앞으로 몇 년!, 수출을 통한 선진경제창조!' 등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가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던 예는 역대로 1987년 3저호황기와 1993년, 그리고 원화가치 폭락으로인한 IMF위기 직후 정도였고 돌이켜보아, 선진국들이 막 탈산업화 정책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취해진 공업화정책이란 결국 종속과 위기의 심화에 다름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산업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에서 앞서자'는 주문으로 뒤바뀌었다. 가뜩이나 한국민족두뇌의 우수성을, 값싼 노동력 동원의 이데올로기로 즐겨썼던 이들에게 지식기반 정보화사회의 도래라는 언명은 참으로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그래서 정부의 각 부처와 재벌 경제연구소에서 올해들어 발간한 '한국식 신경제' 보고서는 하나 둘이 아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과제는 1> 정보통신 인프라 구축과 전문인력 육성, 2> 효과적인 금융통화정책, 3> 물가안정과 지나친 원화절상 억제, 4> 노동시장의 유연화, 5> 효율적인 자본시장 활성화 등이다. 1>의 과제는 딱히 한국식 신경제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산업경쟁력확보 차원에서 취해질 수 있는 조치이다.
문제는 2>, 3>과 관련한 한국은행의 독립성확보, 저금리-저물가-긴축재정의 패키지로 이루어진 제반의 금융자유화 조치들과 5> 벤처캐피탈 활성화와 주주 수익경영 강화와 같은 자본시장육성, 기업지배구조 개혁과제, 그리고 너무나도 낯익은 4> 정리해고 규제완화, 스톡옵션 등 다양한 보상체제 도입의 과제들이다.
비단 디지털 경제나 신경제를 말하지 않아도 이것들은 이미 올초에 발표된 정부의 2차 구조조정 계획의 핵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식 신경제 도입' 정책의 부실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디지털경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표현인 '신경제 정책'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이들의 '한국식 신경제 도입' 자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을 가진다.
현재 미국의 신경제는 그리스펀의 비유대로 '오아시스'와 같이 온주변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미국만의 호황이다. 그리스펀의 비유에 빠진 부분이 있다면, 그건 이 사막들이 오아시스의 주인들에 의해 조성된 인위적인 사막이란 점이다. 유럽과 일본 역시 '신경제'의 도입을 위해 뛰고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또다른 사막화를 위한 노력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굳이 여기에서 미국이 보유한 인터넷 산업에서의 선점이익과 바이오 벤처산업에 있어서의 압도적 우위의 수치를 들어서 '한국식 신경제'논자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킬 필요는 없다. 종속의 사슬을 끊는 유일한 열쇠는 불가능한 신경제 도입을 내걸어 또다시 민중을 기만하는 이들이 아니라 디지털화와 신경제의 과제들이 가지는 반민중성을 폭로하고 파괴할 우리들에게 쥐어져있기 때문에.
나가며
이케다 노부오는 '인터넷 자본주의 혁명'이라는 에세이(?)의 서두를 다음의 글로 대신했다. 필자는 이상의 길고 정신없었던 글을 이 재인용으로 마치려 한다.
"부르조아지는 세계시장을 개척하여 생산과 소비가 국가를 초월하여 이루어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반대파의 탄식을 무시하며 산업의 민족적인 토대를 무너뜨렸다. 모든 국내산업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지금도 파괴되고 있다. 이 파괴를 계속 밀어붙이는 것은 새로운 산업이며, 그 도입여부가 모든 문명국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된다.
… 부르조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부르조아 생산양식을 채택할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자기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할 것, 곧 부르조아지가 될 것을 강요한다. 한 마디로 부르조아지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규정된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
- 1848년 맑스 '선언' 중
※보론
디지털 경제의 특징과 영향
디지털 경제는 디지털 경제를 구성하는 세가지 특징, 즉 기술적·경영조직적·금융적 특징에 의해 규정된다. 기술결정론에 경도된 대다수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의 관심은 주로 물리적 기술적 특징에 쏠려있다.
그러나 디지털 경제가 출현한, 더 중요한 의미는 경영조직적·금융적 특징에 있다. 그림1)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디지털 혁명의 여파는 1> 인터넷 산업의 출현과 발전으로부터, 2> 非인터넷산업의 e-business화에 의한 경영·조직구조상의 변화, 3> 경제사회구조 전반의 변화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디지털경제의 기술적 특징에 대한 검토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선전되는 디지털경제의 특징은 흔히 1> 정보의 균등분배(비대칭성의 소멸), 2> 수확체증의 효과(무한 복사, 재생산비용의 제로화), 3> 비약적인 기술혁신에 의한 지속적인 성장가능성, 4> 글로벌화의 진전(거리의 소멸) 등으로 정리된다. 그리하여 빌 게이츠와 같은 이들은 이른바 '마찰없는 경제(friction-free economy)'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찰없는 경제'란 인터넷 기술의 특성상 디지털 경제하에서는 공급자와 소비자간, 독점체와 신규시장 진입자간의 대칭적인 정보공유와 자유로운 시장참여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은 마침내 (거의) 이상적으로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는 민주적이고 완전한 균형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커다란 착각이거나 현실을 호도하는 주장이다. 디지털 경제가 초기 시장진입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정보접근 가능성을 확대한다는 점은 옳다. 이는 기존 독점자본의 횡포에 시달린 기억을 가진 누구라도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Winner take all) '2등 없는' 디지털경제의 새로운 게임법칙을 고려해야만 한다. 초기진입은 자유롭고 값싸지만 시장에 진입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디지털 경제는 적은 차이의 우열(優劣)을 돌이킬 수 없는 승패(勝敗)의 갈라짐으로 확정짓는 비정함을 특징으로 한다. 시장진입의 자유는 이전의 '독점에 의한 배제적 착취'로부터 '선점에 의한 참여적 착취'로 시장의 질서가 바뀌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수십, 수백만의 실패 위에서 유일승자들의 이익만이 극대화되는 야만의 질서를 진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인터넷을 통한 소비자의 탐색비용이 제로화되었기 때문에, Friction-Free 경제하에서 기업들은 가격을 급격하게 낮추게 되고 독점적인 이윤을 모두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확대일로의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와 추가적인 신뢰비용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인터넷이 소비자의 정보력을 상승시켜주는만큼, 공급자의 정보력은 곱으로 상승하며 아무리 인터넷을 통한 정보탐색 비용이 저렴하다 해도 완전한 공짜란 없다. 더구나 알아서 원하는 정보를 갖다바치는 인터넷은 아직 없으며, 직접대면 없이 거래하는 인터넷 거래의 특성상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신뢰비용은 소비자의 새로운 부담이다.
지속적인 기술혁신에 의한 지속적인 성장가능성의 확보라는 기대 역시 허구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지식기반 경제의 도래를 굳게 믿는 자들의 바램대로라면, 디지털 경제하에서의 기술혁신은 최소한의 비용과 시간만으로도 즉각적인 생산성의 향상과 경제성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시장의 영리만을 쫓아 사회적으로 '통제되지 않는'(속도제한이 아니다) 급격한 기술혁신의 결과는, 오히려 예측불가능한 경쟁의 격화와 기술혁신과정 및 성과의 왜곡을 초래하는 것으로 결론맺기 쉽다.
또한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초민족적 자본과 제국주도의 글로벌화가 국민국가의 경제와 주변부 민중의 삶을 얼마나 참혹하게 파괴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에서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디지털 경제의 경영조직적 금융적 특징에 대한 검토
디지털 경제의 등장으로 인한 경영환경의 변화는 흔히 Alliance(기업간 제휴), Blur(모호함), Discontinuity(불연속성), Flexibility(신축성), Enterainment(재미), Creativeness(창의성), Globalization(세계화), Humanity, Internet 등의 키워드로 설명되곤 한다(윤종언 2000). 그리고 그 선도적 전형은 그림 2)와 같은 이른바 '벤처생태계'에 의해 주어진다.
'기업간 제휴'와 '모호함', '불연속성'이라는 키워드들은 디지털 경제의 등장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 현대 자본주의의 금융지배적 자본축적구조가 드러내는 극단적인 불안정성의 다른 이름들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9년 이후 도약기에 다다른 국내 벤처생태계는 1> 벤처가 배태되고 창업되는 축(Incubation & Creation), 2> 벤처가 성장하도록 자문하고 육성하는 축(Consulting & Nurturing), 3> 벤처의 자금이 지원되고 또 그것들이 회수되는 축(Funding & Liquidation)의 세가지 축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벤처생태계의 initiator(기폭자)였던 정부의 역할이, 지원자 또는 촉진자(facilitator)의 수준으로 축소되어왔다는 점과 초기에 개인 엔젤투자자와 정부지원을 중심으로 했던 VC의(벤처캐피탈, 이들도 일종의 벤처기업이다) 역할이 VB(벤처창업)과 경영·경제의 보조자 수준에서 독립적인 주체이자 금융적 지배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기업간 인수합병(M&A)은 디지털화된 경제환경에서는 더 이상 몇몇 도산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M&A는 지주회사들과 M&A만을 전문적인 업으로하는 M&A전문기업들의 주요업무이고, 빼놓을 수 없는 경제환경이 된 것이다.
'신축성'과 '창의성'은 경영·조직의 디지털화와 네트워크화로 인한 변화를 대변한다. 좋은 말로 하면 조직구성원의 창의력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이는 노동과 고용의 극단적인 불안정화로 나타난다. 정부의 2차 구조조정안에서 말하는 '평생직장'의 소멸과 '평생고용'의 창출이라는 빛좋은 개살구의 전형적인 모습인 셈이다. 뜬금없는 Humanity(인간성의 추구)라는 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밖에 없다.
이제 노동자들은 사주나 직장의 상사들에게는 물론이고, 헤드헌터라는 인간사냥꾼들을 상대로 평생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혹자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기업을 갈음하게 될 디지털 네트워크 기업의 경영·조직형태를, 헐리우드 스튜디오의 영화산업에 비유하기도 한다.
영화를 만들 때 자본과 아이템을 가진 제작기획자가 대본작가와 감독, 배우, 기술자들을 모아 일종의 임시기업을 조직하듯이, 디지털화된 미래의 기업들은 노동자를 굳이 직원으로 고용하지 않는다. 이를 대신해서 가상적 사업단이나 네트워크 기업을 통해 일시적으로 모았다 풀었다하는 식으로 경영조직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현재 대기업들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책임사업부제의 바람은 이같은 변화의 단면이다. 이는 성과급제를 중심으로한 임금체계의 개편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디지털화된 기업과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자와 임금은 자본재이자 투자인 셈이다.
사족일지 모르지만 Enterainment(재미)라는 키워드는 말그대로 재미있는 논쟁거리를 제공해준다. 과연 정보화는 민중의 지적 능력향상과 정치경제적 권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냐는 점이다. 디지털 경제하에서 사회적 주도층으로 부상한 N세대는 재미있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종종 이들의 취미는 매니아나 오따꾸로 발전되어 취미가 직업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글로벌화에 따른 민족국가와 정치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전화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다. 사고의 깊이와 진지한 토론문화가 사라졌다는, 고지식한 훈계조의 평가만이 아니다. 탈정치화와 정치의 이미지화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정보적, 경찰적(물리적 폭력) 통제의 강화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이 자연적으로 E-Politic을 실현하여 직접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은 지나친 낙관이다.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디지털과 벤처이다. 얼마 전까진 벤처대박이 화제였고, 이제는 벤처괴담이 역시 화제이다. 인터넷 경제라고도 하고 'e-conomy'(Delong 1999)라고도 한다. 레스터 서로같은 사람은 지식기반 경제의 등장을 말하기도 한다. 아예 미국의 신경제(New Economy)는 경기순환의 종말을 선포하여 전세계 자본주의의 이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과연 디지털 경제란 무엇일까. 디지털 경제란 용어는 1998년, 미 경제의 장기호황을 설명하기 위한 미 상무부 작성의 "The Emerging Digital Economy"(디지털 경제의 등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보고서를 통해 미 상무부는 미국 산업경쟁력의 회복이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에 기인한다고 결론내렸다. 즉 디지털 경제란 정보의 처리와 유통과정이 디지털화되고 네트워크화되면서, 이에 의존한 재화·서비스의 생산, 분배, 소비활동이 이루어지는 경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터넷 경제는 디지털 경제의 한 부분이며, 지식기반 경제는 디지털 경제의 등장으로 인한 사회변동의 전망을 극단적으로 낙관한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다름아니다. 또한 e-conomy란 용어는 정보화 혁명을 전자정보화 기술의 발전·보급과 경영조직·관행 개혁의 결합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세계적 규모의 경제구조적 파괴와 변동을 가져온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e-conomy의 등장이 경제적 안정과 무리없는 성장, 지속적 주가상승, 정부재정 흑자, 혹은 낮은 실업률, 이자율, 인플레이션율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정부정책과제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다. 보다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구경제학의 종식을 선언하는 '신경제(New Economy)'론이 동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부루조아 경제학자들내에서조차 신경제론의 실체를 인정하는 입장은 극소수이다. 주로 언론과 정부, 정보통신주 투자자들로부터 만들어진 말이다.
결국 들뜬 언론과 부르조아지들의 섣부른 기술결정론적 축포를 뒤로 한 채, 우리는 디지털 경제에 대한 질문의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디지털 경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9년과 2000년 초반의 정세를 살펴, 금융세계화와 연관되어 디지털 경제가 출현한 배경을 짚어보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디지털 경제의 특징과 관련된 몇가지 쟁점들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IMF 구조조정과 벤처·디지털 경제의 출현
현재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한 축이 노동의 신축화와 노동자 계급(운동)의 파괴를 동반하는 '노동의 궁핍화 또는 불안정화'라면, 다른 한축은 '금융화와 IT(Information Technology 정보기술) 혁명'에 의한 과잉생산의 파괴와 자본축적 구조의 혁신, 새로운 동원전략의 수립이다. 자본축적 이윤율 곡선상의 변곡점, 즉 자본축적의 이윤율이 하강하게 되는 구조적 위기에 자본은 필연적으로 이윤율 보전을 위한 금융적 이탈(금융화)을 선택한다. 실물적 생산·축적으로부터의 급속한 이탈과 금융적 축적으로의 이전은, 이윤율 저하의 원인이 되었던 과잉생산과 투자를 파괴하며 각 주체간의 투기적인 자본 재분배를 강제한다.
다시말해 금융화의 진전은 한편으로는 실물적 축적의 토대를 파괴함으로써 자본축적의 붕괴를 재촉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IT(정보기술)혁명과 결합하여 새로운 자본축적 사이클의 구축을 위한 제반 정치·경제·사회적 개혁과 새로운 주체형성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지난 1단계 IMF 구조조정의 핵심은 한마디로 과잉자본과 노동에 대한 강제적인 파괴와 퇴출이었다. 고금리·긴축재정의 기조아래 인위적인 공황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구조조정의 전부는 아니었다.
1996년경 개장된 이후 버려져있던 코스닥 시장과 벤처창업에 대한 정부의 갖가지 지원·육성책들이 1998년 이후 본격화된 것이다. 이것이 단지 의례적인 불황기의 중소기업 육성대책들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조치였음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20-30대의 신흥벤처갑부들이 탄생했고, 인터넷·주식투기열풍은 공황의 빈 자리를 채워갔다.
인터넷 기술의 경이로운 발전과 젊고 깨끗한 이미지가 어우러진 벤처의 성공은 곧 경제위기 극복의 신화가 되었고, 구조조정의 성공을 상징했다. 구조조정의 개혁가들은 디지털 경제의 도래를, 구재벌을 위시한 경제전반에 걸친 낡은 경영조직·관행의 혁신으로서 자본-금융시장의 시스템 개혁은 물론이고, 교육·문화·정치·사회전반에 이르는 거대한 진보(!)를 서둘러야 할 절대절명의 역사적 계시로서 받아들였다. 벤처·디지털경제의 출현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일부이자 그 결과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새로운 구조조정의 역사적 과제였던 것이다. '산업화에서는 뒤졌지만, 정보화에서는 앞서자!'는 식의 새로운 발전동원전략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금융화와 결합되어 급속하게 출현하게 된 디지털경제의 토대는 극히 불안정했고, 1단계 구조조정의 파괴적 결과들이(빈부격차와 노동의 불안정화 등) 통계수치로 잡힐 때 즈음, 다가온 총선은 구조조정의 정치적 지도력을 재구성해낼 시간을 요했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디지털 경제의 출현으로 촉발된 자본축적구조 혁신과 새로운 동원전략의 실행을 위한 2단계 구조조정의 계획들이 마련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2단계 구조조정의 모태가 될 디지털 경제의 재편을 위한 거품빼기와 M&A(인수합병)이 병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벤처·디지털 경제는 '의도된' 공황(정책)의 빈 자리를 채워주면서 붕괴직전의 자본주의 재생산시스템을 재가동시키는 새로운 원동력으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디지털 경제는 새로운 착취시스템의 전형이자 새로운 구조조정의 첨병이었다.
디지털 경제의 주요쟁점과 오해들
인터넷의 확산과 산업의 정보화는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오는가?
신경제론의 지지자들과 지식기반경제의 이데올로그들에게 이는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터넷과 정보화는 산업전반의 물류비용과 생산비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생산성 향상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무한한 기술의 발전이 경제적 발전과 아무런 매개없이 결합되어 자본주의의 최대약점인 '경기순환'과 '인플레이션'을 죽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능케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신경제의 본산인 미국에서조차 인터넷-정보화가 정보통신산업 자체의 생산성향상이외에 다른 산업분야에 미친 파급효과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신경제 논쟁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던) 지난해 10월 발표된 미 상무부의 '40년간의 미 경제지표 수정치'에 따르면 1990년대 미 경제의 연평균 생산성 증가율은 2.1%에 이른다. 이는 분명 지난 생산성 향상수준에 비해 높은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이는 1990년대 들어 급부상한 지식·정보산업이 이같은 생산성 향상을 가져온 것처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이같은 전반적인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상무부가 경제지표 수정시 다음 세가지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 생산성 향상에 영향을 주는 자료를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했고 둘째, 과거에는 `비용'으로 간주했던 컴퓨터소프트웨어 구입을 이번 수정치에서는 `투자'로 분류했으며 셋째, 기술적 사항인 생산성 측정의 테크닉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성 분야의 전문가인 로버트 고든 교수의 최근 연구는 컴퓨터 분야를 중심으로 한 `신경제'가 고도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고든은 1990년대의 생산성 향상분 중 3분의 1은 측정오차이고, 다른 3분의 1은 경기순환에 따른 향상분이며, 나머지 3분의 1만이 컴퓨터 분야에 의한 기여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수정 경제지표를 근거로 한다해도, 컴퓨터 분야에 의한 생산성 향상은 신경제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다. 미 경제호황은 신경제의 등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벤처와 재벌의 관계는?
사실 벤처(venture)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모험, 투기'이다. 그러니까 벤처기업이란 본래 투기기업을 뜻한다. 또 벤처기업이 꼭 인터넷 기업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벤처란, 일반적으로 인터넷 기술과 사업아이템을 가진 신생 중소기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있다. 더구나 일부 재벌개혁론자들과 언론은 마치 벤처가 재벌개혁의 대안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재벌의 현 구조조정본부를 벤처캐피탈로 재편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경련 유한수전무의 말대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일이다.
드롱(전 미재무부 경제정책국 부국장)의 설명에 따르면, 정보화 혁명의 역사는 곧 기술발전의 역사이고 경영조직 및 경영관행 혁신의 역사이다. 이 둘은 서로의 진전을 추동한다. 경영조직 및 관행상의 변화는 디지털화를 이끄는 제2의 원동력이다. E-conomy란 신기술 발전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경영조직, 시장구조, 정부규제의 변화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 드롱의 말을 종합하자면, 경영(조직)혁신이란 경영생태학을 뜻하는데 여기엔 벤처자본의 두드러진 역할, start-up fund(벤처창업기금)와 spin-off(기업의 자회사 또는 사업부를 독립기업화하는 방법), 그리고 숙련 노동자와 경영자에 대한 성과배분 및 보상방법, 그리고 신경영과 신기술의 새로운 결합이 포함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벤처기업은 약 6000여개에 이르지만 이들중 상당수는 최근 재벌 구조조정과정에서 spin-off되거나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제휴된 기업들이다. 물론 벤처와 재벌은 별개의 존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벤처가 재벌을 대체하거나 재벌과 대립되는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벤처는 재벌이 가려는 미래의 위험을 실험하고 조절하며, 그 성공을 전수시켜주는 구조조정의 첨병이다.
벤처거품은 얼마나 더 빠질 것인가?
블랙먼데이로 기록된 지난 4월 17일, 한국증시는 10여분간 거래가 중지되는 사상초유의 서킷 브레이크 사태를 맞았다. 이날의 주가폭락으로 하루만에 40조원이 날아갔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태의 원인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전 주에 있었던 미국 나스닥(NASDAQ, 전국증권업협회 (컴퓨터)자동매매시스템)의 폭락 때문이었다. 이 주간에 나스닥이 기록한 폭락세는 전설적인 1929년의 '검은 금요일' 주간보다 컸고 '피의 금요일'로 기록된 4월 14일에는 무려 1조 달러가 주식시장에서 증발했다. 이는 화폐가 등장한 이후 하루 최대의 손실액이었다고 한다(뉴스위크). 이같은 사태 앞에서 더 이상 벤처거품론에 관한 논란의 여지는 없다.
아직도 나스닥이나 코스닥의 주가가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시스코·MS·마이크론테코놀로지 등 미 증시를 이끌었던 주식들의 PER(주당 수익률)이 아직도 40∼1백60에 달할 정도로 주가는 높게 형성되어 있다. 사정은 코스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벤처기업들은 높은 주가만을 믿고, 이제까지 신경쓰지 않았던 수익모델 확보에 저마다 나서기 시작했다. 장부상의 매출액을 높이기위해 때아닌 용산 전자상가들과의 제휴에 나서는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일련의 사태들이 지금 당장의 증시붕괴나 디지털 경제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벤처거품론은 벤처기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이다. 벤처의 속성 자체가 「고수익을 기대하는 대신 사업이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는 데 있는만큼, 벤처와 거품은 동전의 양면이다. 또 이번 폭락의 직접적 계기였던 그리스펀의 금리인상 조치는 작년에만 5차례나 있어왔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예상해왔던 일이 왜 하필 지금 터졌으며, 코스닥이 나스닥의 등락에 이토록 종속되어있는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나스닥 폭락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사상 최대로 누적되고 있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와 9년간의 호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압력 때문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미 행정부는 한편으로는 신경제를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스닥 거품빼기를 통한 미 경제의 연착륙시도에 나선 것이다. 당연히 투자자들은 정부의 시장개입을 비난하기 시작했지만 이들 시장과 미 정부와의 다툼은, 곧 새로운 미래수익을 생성하기 위한 벤처기업간 M&A의 활성화와 새로운 수익모델 찾기로 마무리될 것이다.
요는 이 과정을 통해 신경제의 금융적 불안정성은 더욱 확대될 것이고 연착륙 이후에 찾아올 다음번 위기의 규모는, 1929년의 기록을 갱신한 이번 붕괴보다 클 것이라는 점이다. 과연 그 때에도 시장과 미 정부가 자신들의 대안을 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편 어쩌면 9년간의 호황의 즐거운(?) 뒷정리를 하고있는 미국과는 달리, 아무런 대책없이 뉴욕에서 날아온 폭탄을 맞은 한국의 입장은 좀 다르다. 당장 벤처거품 본질론과 미 증시 동조화론을 빼고나면, 마땅히 주가가 이처럼 하루아침에 폭락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막 IMF공황으로부터 살아나기 시작한 시장 상황이 미국의 경우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사태를 지켜볼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정부와 시장의 대책이라는 것 역시 속수무책일뿐이다.
결국 이들의 선택은 하나, 1단계 구조조정에 이은 강력한 2단계 구조조정이다. 첫번째는 투신사정리를 필두로 한 금융구조조정이다. 벤처기업간의 인수합병도 이전에 시도되었던 행복한 마음의 행사가 아니라, 죽음을 모면키 위한 사활전으로 치러질 것이다. 물론 이 예상은 생존권 사수와 금융세계화 저지를 위한 민중들의 투쟁이 이들을 굴복시키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산업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에는 앞서자? 한국 경제의 신경제화는 가능한가?
1980년대 우리나라 경제전문가들의 주문은 '일본경제 추월, 앞으로 몇 년!, 수출을 통한 선진경제창조!' 등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가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던 예는 역대로 1987년 3저호황기와 1993년, 그리고 원화가치 폭락으로인한 IMF위기 직후 정도였고 돌이켜보아, 선진국들이 막 탈산업화 정책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취해진 공업화정책이란 결국 종속과 위기의 심화에 다름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산업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에서 앞서자'는 주문으로 뒤바뀌었다. 가뜩이나 한국민족두뇌의 우수성을, 값싼 노동력 동원의 이데올로기로 즐겨썼던 이들에게 지식기반 정보화사회의 도래라는 언명은 참으로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그래서 정부의 각 부처와 재벌 경제연구소에서 올해들어 발간한 '한국식 신경제' 보고서는 하나 둘이 아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과제는 1> 정보통신 인프라 구축과 전문인력 육성, 2> 효과적인 금융통화정책, 3> 물가안정과 지나친 원화절상 억제, 4> 노동시장의 유연화, 5> 효율적인 자본시장 활성화 등이다. 1>의 과제는 딱히 한국식 신경제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산업경쟁력확보 차원에서 취해질 수 있는 조치이다.
문제는 2>, 3>과 관련한 한국은행의 독립성확보, 저금리-저물가-긴축재정의 패키지로 이루어진 제반의 금융자유화 조치들과 5> 벤처캐피탈 활성화와 주주 수익경영 강화와 같은 자본시장육성, 기업지배구조 개혁과제, 그리고 너무나도 낯익은 4> 정리해고 규제완화, 스톡옵션 등 다양한 보상체제 도입의 과제들이다.
비단 디지털 경제나 신경제를 말하지 않아도 이것들은 이미 올초에 발표된 정부의 2차 구조조정 계획의 핵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식 신경제 도입' 정책의 부실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디지털경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표현인 '신경제 정책'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이들의 '한국식 신경제 도입' 자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을 가진다.
현재 미국의 신경제는 그리스펀의 비유대로 '오아시스'와 같이 온주변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미국만의 호황이다. 그리스펀의 비유에 빠진 부분이 있다면, 그건 이 사막들이 오아시스의 주인들에 의해 조성된 인위적인 사막이란 점이다. 유럽과 일본 역시 '신경제'의 도입을 위해 뛰고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또다른 사막화를 위한 노력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굳이 여기에서 미국이 보유한 인터넷 산업에서의 선점이익과 바이오 벤처산업에 있어서의 압도적 우위의 수치를 들어서 '한국식 신경제'논자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킬 필요는 없다. 종속의 사슬을 끊는 유일한 열쇠는 불가능한 신경제 도입을 내걸어 또다시 민중을 기만하는 이들이 아니라 디지털화와 신경제의 과제들이 가지는 반민중성을 폭로하고 파괴할 우리들에게 쥐어져있기 때문에.
나가며
이케다 노부오는 '인터넷 자본주의 혁명'이라는 에세이(?)의 서두를 다음의 글로 대신했다. 필자는 이상의 길고 정신없었던 글을 이 재인용으로 마치려 한다.
"부르조아지는 세계시장을 개척하여 생산과 소비가 국가를 초월하여 이루어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반대파의 탄식을 무시하며 산업의 민족적인 토대를 무너뜨렸다. 모든 국내산업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지금도 파괴되고 있다. 이 파괴를 계속 밀어붙이는 것은 새로운 산업이며, 그 도입여부가 모든 문명국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된다.
… 부르조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부르조아 생산양식을 채택할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자기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할 것, 곧 부르조아지가 될 것을 강요한다. 한 마디로 부르조아지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규정된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
- 1848년 맑스 '선언' 중
※보론
디지털 경제의 특징과 영향
디지털 경제는 디지털 경제를 구성하는 세가지 특징, 즉 기술적·경영조직적·금융적 특징에 의해 규정된다. 기술결정론에 경도된 대다수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의 관심은 주로 물리적 기술적 특징에 쏠려있다.
그러나 디지털 경제가 출현한, 더 중요한 의미는 경영조직적·금융적 특징에 있다. 그림1)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디지털 혁명의 여파는 1> 인터넷 산업의 출현과 발전으로부터, 2> 非인터넷산업의 e-business화에 의한 경영·조직구조상의 변화, 3> 경제사회구조 전반의 변화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디지털경제의 기술적 특징에 대한 검토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선전되는 디지털경제의 특징은 흔히 1> 정보의 균등분배(비대칭성의 소멸), 2> 수확체증의 효과(무한 복사, 재생산비용의 제로화), 3> 비약적인 기술혁신에 의한 지속적인 성장가능성, 4> 글로벌화의 진전(거리의 소멸) 등으로 정리된다. 그리하여 빌 게이츠와 같은 이들은 이른바 '마찰없는 경제(friction-free economy)'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찰없는 경제'란 인터넷 기술의 특성상 디지털 경제하에서는 공급자와 소비자간, 독점체와 신규시장 진입자간의 대칭적인 정보공유와 자유로운 시장참여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은 마침내 (거의) 이상적으로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는 민주적이고 완전한 균형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커다란 착각이거나 현실을 호도하는 주장이다. 디지털 경제가 초기 시장진입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정보접근 가능성을 확대한다는 점은 옳다. 이는 기존 독점자본의 횡포에 시달린 기억을 가진 누구라도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Winner take all) '2등 없는' 디지털경제의 새로운 게임법칙을 고려해야만 한다. 초기진입은 자유롭고 값싸지만 시장에 진입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디지털 경제는 적은 차이의 우열(優劣)을 돌이킬 수 없는 승패(勝敗)의 갈라짐으로 확정짓는 비정함을 특징으로 한다. 시장진입의 자유는 이전의 '독점에 의한 배제적 착취'로부터 '선점에 의한 참여적 착취'로 시장의 질서가 바뀌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수십, 수백만의 실패 위에서 유일승자들의 이익만이 극대화되는 야만의 질서를 진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인터넷을 통한 소비자의 탐색비용이 제로화되었기 때문에, Friction-Free 경제하에서 기업들은 가격을 급격하게 낮추게 되고 독점적인 이윤을 모두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확대일로의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와 추가적인 신뢰비용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인터넷이 소비자의 정보력을 상승시켜주는만큼, 공급자의 정보력은 곱으로 상승하며 아무리 인터넷을 통한 정보탐색 비용이 저렴하다 해도 완전한 공짜란 없다. 더구나 알아서 원하는 정보를 갖다바치는 인터넷은 아직 없으며, 직접대면 없이 거래하는 인터넷 거래의 특성상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신뢰비용은 소비자의 새로운 부담이다.
지속적인 기술혁신에 의한 지속적인 성장가능성의 확보라는 기대 역시 허구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지식기반 경제의 도래를 굳게 믿는 자들의 바램대로라면, 디지털 경제하에서의 기술혁신은 최소한의 비용과 시간만으로도 즉각적인 생산성의 향상과 경제성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시장의 영리만을 쫓아 사회적으로 '통제되지 않는'(속도제한이 아니다) 급격한 기술혁신의 결과는, 오히려 예측불가능한 경쟁의 격화와 기술혁신과정 및 성과의 왜곡을 초래하는 것으로 결론맺기 쉽다.
또한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초민족적 자본과 제국주도의 글로벌화가 국민국가의 경제와 주변부 민중의 삶을 얼마나 참혹하게 파괴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에서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디지털 경제의 경영조직적 금융적 특징에 대한 검토
디지털 경제의 등장으로 인한 경영환경의 변화는 흔히 Alliance(기업간 제휴), Blur(모호함), Discontinuity(불연속성), Flexibility(신축성), Enterainment(재미), Creativeness(창의성), Globalization(세계화), Humanity, Internet 등의 키워드로 설명되곤 한다(윤종언 2000). 그리고 그 선도적 전형은 그림 2)와 같은 이른바 '벤처생태계'에 의해 주어진다.
'기업간 제휴'와 '모호함', '불연속성'이라는 키워드들은 디지털 경제의 등장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 현대 자본주의의 금융지배적 자본축적구조가 드러내는 극단적인 불안정성의 다른 이름들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9년 이후 도약기에 다다른 국내 벤처생태계는 1> 벤처가 배태되고 창업되는 축(Incubation & Creation), 2> 벤처가 성장하도록 자문하고 육성하는 축(Consulting & Nurturing), 3> 벤처의 자금이 지원되고 또 그것들이 회수되는 축(Funding & Liquidation)의 세가지 축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벤처생태계의 initiator(기폭자)였던 정부의 역할이, 지원자 또는 촉진자(facilitator)의 수준으로 축소되어왔다는 점과 초기에 개인 엔젤투자자와 정부지원을 중심으로 했던 VC의(벤처캐피탈, 이들도 일종의 벤처기업이다) 역할이 VB(벤처창업)과 경영·경제의 보조자 수준에서 독립적인 주체이자 금융적 지배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기업간 인수합병(M&A)은 디지털화된 경제환경에서는 더 이상 몇몇 도산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M&A는 지주회사들과 M&A만을 전문적인 업으로하는 M&A전문기업들의 주요업무이고, 빼놓을 수 없는 경제환경이 된 것이다.
'신축성'과 '창의성'은 경영·조직의 디지털화와 네트워크화로 인한 변화를 대변한다. 좋은 말로 하면 조직구성원의 창의력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이는 노동과 고용의 극단적인 불안정화로 나타난다. 정부의 2차 구조조정안에서 말하는 '평생직장'의 소멸과 '평생고용'의 창출이라는 빛좋은 개살구의 전형적인 모습인 셈이다. 뜬금없는 Humanity(인간성의 추구)라는 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밖에 없다.
이제 노동자들은 사주나 직장의 상사들에게는 물론이고, 헤드헌터라는 인간사냥꾼들을 상대로 평생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혹자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기업을 갈음하게 될 디지털 네트워크 기업의 경영·조직형태를, 헐리우드 스튜디오의 영화산업에 비유하기도 한다.
영화를 만들 때 자본과 아이템을 가진 제작기획자가 대본작가와 감독, 배우, 기술자들을 모아 일종의 임시기업을 조직하듯이, 디지털화된 미래의 기업들은 노동자를 굳이 직원으로 고용하지 않는다. 이를 대신해서 가상적 사업단이나 네트워크 기업을 통해 일시적으로 모았다 풀었다하는 식으로 경영조직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현재 대기업들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책임사업부제의 바람은 이같은 변화의 단면이다. 이는 성과급제를 중심으로한 임금체계의 개편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디지털화된 기업과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자와 임금은 자본재이자 투자인 셈이다.
사족일지 모르지만 Enterainment(재미)라는 키워드는 말그대로 재미있는 논쟁거리를 제공해준다. 과연 정보화는 민중의 지적 능력향상과 정치경제적 권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냐는 점이다. 디지털 경제하에서 사회적 주도층으로 부상한 N세대는 재미있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종종 이들의 취미는 매니아나 오따꾸로 발전되어 취미가 직업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글로벌화에 따른 민족국가와 정치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전화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다. 사고의 깊이와 진지한 토론문화가 사라졌다는, 고지식한 훈계조의 평가만이 아니다. 탈정치화와 정치의 이미지화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정보적, 경찰적(물리적 폭력) 통제의 강화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이 자연적으로 E-Politic을 실현하여 직접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은 지나친 낙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