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결과에 나타난 낙천낙선운동의 성적표
총선시민연대활동이 낳은 필연적 효과를 직시해야
총선 전에도 그러했지만 총선이 끝난 지금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을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운동에는 과학적인 논쟁보다는 제도언론에서의 과장과 왜곡, 진보진영의 무비판과 타협, 개혁과 진보에 대한 혼란 그리고 감정과 흥분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사회의 개혁과 변혁에서 시민운동의 위상을 올바로 위치지우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뚫고, 본질과 진실에 이르는 진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특히 이번 총선결과를 보면 총선 전인『사회진보연대』지난 호(2000년 4월호)에 썼던 필자의 비판적인 평가가 올바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기에 총선시민연대의 자화자찬과 총선시민연대에 대한 여론의 대대적인 의미부여에도 불구하고, 선거결과를 놓고 그 쟁점을 재론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민중운동의 관점에서 이번 총선을 평가해보자.
우선 현 정부와 집권당의 신자유주의정책과 '20 대 80 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초국적 자본으로의 해외매각정책에 대한 대중적 심판이, 이번 총선의 주요쟁점으로 제기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야겠다. 여기에는 민중운동진영 내에서 특히 진보정치의 실험과 관련하여, 이번 총선의 의의 또는 개입전술에 대한 상이한 견해와 그로부터 기인하는 정세대응력의 부족 그리고 조직력 또는 투쟁력의 한계 등 여러 요인이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가져온 돌풍효과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권자혁명'이니 '시민혁명'이니 하면서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제도언론의 집중적인 보도로 인해, 선거지형은 정책논쟁이 아니라 인물논쟁으로 급전되었고 총선 후반기에는 그 위에 지역주의논쟁이 가세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쟁점은 묻혀버리고 말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총선시민연대의 운동이 가져온 효과를 비판함으로써, 이번 선거에서 진보진영의 여러 문제들을 총선시민연대의 운동 때문으로 전가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운동을 비판하면 종종 '그러면 진보운동은 무엇을 했느냐'는 반론이 제기되곤 하는데, 진보진영의 문제는 그 문제대로 별도의 평가가 필요한 것이고 여기서는 총선시민연대의 운동에 대한 평가가 주제인 것이다.
낙천낙선운동에 의해 민중운동적 선거쟁점이 억압된 효과는, 지난 호에서도 밝힌 바처럼 총선시민연대가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한 효과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총선시민연대의 신자유주의적 지향성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효과였고 나아가 집권당과 친정부 제도언론 그리고 총선시민연대 간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 연대의 소산이었다. 한나라당의 분열과 그로 인해 조성된 집권당에 유리한 선거지형도 이 운동의 또 다른 부수적인 효과였던 것이다.
낙천낙선운동, 은밀한 목표의 좌절
이러한 선거지형에서 현 정부와 집권당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한 심판 문제는, 어이없게도 신자유주의의 뿌리를 같이 하면서도 보수적인 한나라당이 주요한 선거구호로 내걸었고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국부유출논쟁이나 국가채무논쟁을 유발시켰다. 그에 반해 집권 민주당과 정부는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지속을 위해 안정적인 다수의석을 호소하였다. 알다시피, 선거결과는 한나라당이 과반의석에 육박하는 제1당이 되면서 보수적인 한나라당에 의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심판이라는 기이한 결과를 가져왔다.
의석수만이 아니라 득표율도 그러하였다. 한나라당 또한 김영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승한 당이라는 점에서 이 심판은 말할 것도 없이 반신자유주의적 심판이라기보다는, 보수주의와 선거막판에 기승을 부린 지역주의의 심판, 즉 호남지역주의에 대한 영남지역주의의 심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통한 심판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투표를 통한 심판 못지 않게 투표를 거부한 심판 또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여론몰이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의 투표율은 57%라는 역대 최저투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권자의 43%는 제도정치권을 불신하고 부정하였다. 그 근저에 신자유주의정책의 파괴적 효과와 그에 대비되는 기성정치인의 부패와 무능 등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과 분노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낙천낙선운동으로 민중운동에 불리하게 조성된 선거지형과 총선을 위해 급조된 민주노동당과 청년진보당의 조직, 재정상의 현격한 열세 및 그에 따른 제한된 지역구에서의 후보출마.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들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여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중적 대안을 요구하는 대중들의 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원내진출은 좌절되었어도 민주노동당은 후보를 낸 21개 지역구에서 평균 13%의 지지를, 청년진보당은 46개 지역구에서 평균 3%를 얻어 진보정당은 후보출마지역에서 대체로 평균 16%를 득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총선은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신자유주의쟁점이 억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 진보정당에 표를 찍은 적지 않은 대중의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반대, 유권자의 43%나 투표를 거부하기에 이른 소극적인 반대, 다른 한편에서 지역주의와 결합한 한나라당의 보수주의적 반대로 인해 정부와 집권 민주당의 신자유주의정책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총선시민연대와 집권당 그리고 친정부적 제도언론간의 신자유주의 연대의 선거목표, 즉 이번 총선을 통해 정부와 집권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재신임한다는 은밀한 목표가 좌절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낙천낙선운동, 공식적 목표의 달성?
총선시민연대는 이러한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면 총선시민연대는 자신들이 선정한 낙선대상 후보 86명 중 70%에 이르는 59명을 낙선시켜, 이 운동이 커다란 성과를 이룩했고 유권자혁명을 성취했다고 자축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목표일뿐이다. 민중운동진영은 총선시민연대에 대해 낙천낙선운동의 신자유주의적 성격 또는 그 위험을 수차 지적하였고, 이 운동의 지평을 더욱 넓혀서 단순히 몇몇 정치인의 물갈이가 아니라 제도정치권의 청산과 진보정치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총선시민연대는 이를 거부하였는데, 이는 총선시민연대가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총선의 결과는 외관과는 달리, 총선시민연대로서는 내심 쓰라린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낙천낙선운동의 공식적인 성과도 그 내용을 보면 전혀 자축할 만한 것이 아니다.
우선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3개의 방송국과 10개 신문사이 집중적으로 보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오히려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하여 유권자혁명이란 찬사는 무색하게 되어버렸다. 그것도 낙천낙선운동의 선도자라는 20대, 30대의 투표율이 가장 낮았던 것이다. 낙천낙선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던 언론을 따라간 독자라면, 그래서 낙천낙선운동으로 정치를 새롭게 자각하는 많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언론에서 들어오던 독자라면, 이런 결과는 아마도 충격처럼 느껴질 것이다.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여 썩은 정치를 바꾸자는 총선시민연대의 구호는, 실은 자신들이 선정한 86명만 찍지말고 그 대신 어떤 다른 후보라도 찍으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제도정당들을 대중들로 하여금 다시 승인하도록 유도하는 것인데 대중들은 역대 최대의 기권율로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찍을 정당이 없다, 찍을 정치가가 없다, 그래서 선거에 관심없다는 대중들에 대해 총선시민연대는 이들을 위해 대안의 정치, 대안의 정당을 만들어가려는 대신 신자유주의든 보수주의든 어느 하나를 찍으라고 강요한 셈이다.
또 낙천낙선운동은 더욱 심화된 지역주의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고 그로써 유권자혁명이란 더더욱 걸맞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총선시민연대는 선거막판에 지역주의와 집중적으로 대결하였지만 지역주의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총선시민연대가 내세운 낙선대상후보의 낙선율이 영남에서 45%로 가장 낮았던만큼, 이들의 지역주의 비판은 영·호남 지역주의를 거론하더라도 주로 영남지역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언론에서 65개 지역구 중 64개를 한나라당에 몰아주어 영남지역주의가 싹쓸이한 모습을 보고 개탄한다. 말하자면 영남지역주의 때문에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선택은 당선의석수가 아니라 득표율에 더 정확하게 나타나 있는데, 정당별 득표율을 보면 지역주의의 아성은 영남보다는 오히려 호남이다. 영남에서 한나라당은 41%(울산)-63%(대구)를, 민주당은 10%(울산)-15%(부산, 경북)를 득표한 반면, 호남에서는 한나라당이 겨우 3-4%를, 민주당은 66-70%를 득표했다. 그런데 호남의 친여 무소속과 영남의 민주국민당을 이에 각각 포함시키면 호남지역주의는 더욱 빛나게 된다. 이처럼 여전히 완고한 호남지역주의, 그리고 조금은 약화된 영남지역주의를 영남지역주의의 싹쓸이로 보이게 한 것은 다름아니라 최대득표자 당선을 제도화한, 부당한 현행 선거제도에서 기인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전체 투표수 중 39%, 36%정도를 득표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전체의석수의 49%, 42%를 쓸어간 결과는 분명 대의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영남지역주의의 폐해를 운운한다면 먼저 46석의 비례대표의석만이 아니라, 지역구를 포함한 전체의석에 대해 전면적인 정당명부제와 득표율에 따른 의석배분을 보장하는 방향의 선거제도 개혁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호남지역주의는 그래도 군사정권의 지배하에서는 파시즘의 지배에 대항하는 호남 소외계층을 결집시키는 긍정적인 의미도 없지 않았지만, 신자유주의 민간정권 하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볼모가 되어버렸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점에서도 지역주의의 더 큰 문제는 언론에서 말하듯이 영남지역주의가 아니라 호남지역주의이다. 호남대통령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소외된 국민과 계층인 호남 대중이, 대중소외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현실은 지역주의의 타파와 계급주의적 투표행태를 모색하는 데에 보다 큰 걸림돌이 아닐까?
현재의 영남지역주의는 군사정권의 지역주의가 지속된다는 측면도 있지만, 지역등권과 지역연대론에 입각해서 정권을 잡은 지역주의 정권은 지역주의를 청산할 수 없다는 점, 그것이 오히려 영남지역주의를 더욱 결집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점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왕에 지역주의를 논하는 마당에 충청지역주의도 간단히 언급하자. 자민련의 충청지역주의가 와해되면서, 언론들은 충청도가 품위있는 투표를 통해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있다고 추켜세우는 데 여기에도 왜곡은 있다. 왜냐하면 JP의 충청지역주의는 몰락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하는 것은 정책론에 입각한 계급주의가 아니라, 이 지역의 연고를 주장하는 민주당 이인제의 새로운 충청지역주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극우적인 자민련이 몰락의 기로에 서게된 것은 일정한 의의가 있겠지만, 그 성과를 신자유주의 지역주의가 가져가는 것을 지역주의 해체라고는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언론들은 JP의 충청지역주의는 망국병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뒤에서는 이인제의 신충청지역주의를 은밀하게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절반이라도 성공한 것인가?
이처럼 최악의 투표율과 대중들의 투표 거부, 그리고 지역주의의 기승 속에서 이루어진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혁명과 낙천낙선운동을 자랑하기는 아무래도 면목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총선시민연대는 이제, 보다 현실적인 자세로 돌아와서 겸허하게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하고 총선 전에 진보진영에서 그렇게도 제기했던 문제들, 즉 대안의 정치를 위해 진보진영과 시민운동진영이 같이 나갈 방안을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 총선시민연대의 운동을 위해, 그리고 아마도 집권당의 재신임을 위해 총선기간 중 민중운동의 목소리를 억눌러왔던 한겨레(심지어 지난 4월 1일 전국 12곳에서 2만여 명의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이 참가한 민중대회위원회의 민중대회조차 한 자도 보도하지 않았던)도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안을 논의하기에는 총선기간 동안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은 너무 다른 방향으로 나가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차이가 놓여있다.
'절반의 성공'을 운운하는 근거는 무엇보다도 낙선대상자의 70%가 낙선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데 자화자찬의 근거이자 그래도 절반은 성공했다고 자위할 수 있는 59명의 이들 낙선자는, 과연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때문에 낙선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이를 논증할 수 있는 투표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 운동의 효과가 일정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해당 낙선자의 당락을 결정짓는 데 어느만큼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좋게 말해도 어느 지역구에서는 그러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지역구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70% 낙선 운운은 잘못된 평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처럼 계급과 계층간, 연령간 투표행태와 그 지지정당 변화, 그리고 지지정당 또는 후보를 바꾼 이유 등에 대해 납득할만한 지역구별 투표분석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효과를 말하기 어렵다.
가장 권위있는 여론조사기관들에서 예측한 출구조사조차, 한나라당과 민주당간 실제의 선거결과를 정반대로 추정한 현실 수준을 보면 더욱 그렇지 않은가? 결국 총선시민연대와 제도언론들은 납득할만한 논거도 없이 낙천낙선운동을 부풀려 보도했고 그 결과를 서로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여 '절반의 승리'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을 조롱하는 세계의 시민운동
총선 후의 문제는 총선 전에도 그러했지만, 한국의 시민운동과 진보적인 민중운동이 갖고있는 한국사회의 개혁 청사진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있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개혁을 위해 같이 나가는 데 심각한 갈등과 간격을 보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때문이다. 총선 후에 시민운동은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언론의 지지와 그 성과에 대한 자화자찬적 평가에 입각하여 진보진영과의 차별성을 강화하고 더욱 자립적인 운동으로 나가려 할 것이다.
한국에서 이러한 발전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과 낙천낙선운동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일본으로 수출될 것이라는 일부 언론보도까지 접하며,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세계의 시민운동이 한국의 시민운동을 따라간다는 보도는 세계의 시민운동을 모독하는 보도이다. 우리는 세계의 전투적인 NGO들이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미국의 시애틀에서 그리고 워싱턴에서 초국적 금융과두들과 그 정치대표자들에 대항해서,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WTO의 신자유주의 개방화정책과 자유화정책에 대항하여, 그리고 세계의 빈민과 노동자를 위해, 지구적 환경을 위해 국가를 초월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해왔음을 보아오지 않았는가?
그것도 한국의 시민운동을 그렇게 추켜세우는 그 동일한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보아오지 않았는가? 세계의 NGO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자유화 정책에 온몸을 던져 저항하고 있을 때, 한국의 대표적인 NGO들은 국내외의 신자유주의 지배계급에 영합하여 한국사회를 초국적 자본에게 내어주고 자본과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몰아가는, 이데올로기적 첨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제도언론들 또한 반신자유주의, 반세계화를 내세운 세계의 NGO 운동은 주목할만한 운동으로 보도하면서도, 동일한 요구사항을 내건 한국의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묵살하기 일쑤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추종하고 세계화를 수용하는 한국의 NGO들이 개혁의 새로운 기수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겨레의 큰 지면에는 프랑스의 '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연합'(ATTAC)이 소개된 바 있다.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이 단체의장과의 인터뷰에서는 세계 NGO의 비판적 과학인식의 높은 수준을 엿볼 수 있는데, 한국의 천박한 시민운동가들의 인식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이 세계의 NGO를 쫓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반신자유주의와 반세계화로 입장을 전환할 수 있다면, 그때야 비로소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같이 갈 수 있는 공동의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현재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간의 간극과 갈등은 불가피하며 봉합이 아니라 폭발과 파열을 필요로 한다.
총선 전에도 그러했지만 총선이 끝난 지금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을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운동에는 과학적인 논쟁보다는 제도언론에서의 과장과 왜곡, 진보진영의 무비판과 타협, 개혁과 진보에 대한 혼란 그리고 감정과 흥분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사회의 개혁과 변혁에서 시민운동의 위상을 올바로 위치지우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뚫고, 본질과 진실에 이르는 진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특히 이번 총선결과를 보면 총선 전인『사회진보연대』지난 호(2000년 4월호)에 썼던 필자의 비판적인 평가가 올바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기에 총선시민연대의 자화자찬과 총선시민연대에 대한 여론의 대대적인 의미부여에도 불구하고, 선거결과를 놓고 그 쟁점을 재론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민중운동의 관점에서 이번 총선을 평가해보자.
우선 현 정부와 집권당의 신자유주의정책과 '20 대 80 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초국적 자본으로의 해외매각정책에 대한 대중적 심판이, 이번 총선의 주요쟁점으로 제기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야겠다. 여기에는 민중운동진영 내에서 특히 진보정치의 실험과 관련하여, 이번 총선의 의의 또는 개입전술에 대한 상이한 견해와 그로부터 기인하는 정세대응력의 부족 그리고 조직력 또는 투쟁력의 한계 등 여러 요인이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가져온 돌풍효과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권자혁명'이니 '시민혁명'이니 하면서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제도언론의 집중적인 보도로 인해, 선거지형은 정책논쟁이 아니라 인물논쟁으로 급전되었고 총선 후반기에는 그 위에 지역주의논쟁이 가세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쟁점은 묻혀버리고 말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총선시민연대의 운동이 가져온 효과를 비판함으로써, 이번 선거에서 진보진영의 여러 문제들을 총선시민연대의 운동 때문으로 전가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운동을 비판하면 종종 '그러면 진보운동은 무엇을 했느냐'는 반론이 제기되곤 하는데, 진보진영의 문제는 그 문제대로 별도의 평가가 필요한 것이고 여기서는 총선시민연대의 운동에 대한 평가가 주제인 것이다.
낙천낙선운동에 의해 민중운동적 선거쟁점이 억압된 효과는, 지난 호에서도 밝힌 바처럼 총선시민연대가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한 효과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총선시민연대의 신자유주의적 지향성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효과였고 나아가 집권당과 친정부 제도언론 그리고 총선시민연대 간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 연대의 소산이었다. 한나라당의 분열과 그로 인해 조성된 집권당에 유리한 선거지형도 이 운동의 또 다른 부수적인 효과였던 것이다.
낙천낙선운동, 은밀한 목표의 좌절
이러한 선거지형에서 현 정부와 집권당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한 심판 문제는, 어이없게도 신자유주의의 뿌리를 같이 하면서도 보수적인 한나라당이 주요한 선거구호로 내걸었고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국부유출논쟁이나 국가채무논쟁을 유발시켰다. 그에 반해 집권 민주당과 정부는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지속을 위해 안정적인 다수의석을 호소하였다. 알다시피, 선거결과는 한나라당이 과반의석에 육박하는 제1당이 되면서 보수적인 한나라당에 의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심판이라는 기이한 결과를 가져왔다.
의석수만이 아니라 득표율도 그러하였다. 한나라당 또한 김영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승한 당이라는 점에서 이 심판은 말할 것도 없이 반신자유주의적 심판이라기보다는, 보수주의와 선거막판에 기승을 부린 지역주의의 심판, 즉 호남지역주의에 대한 영남지역주의의 심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통한 심판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투표를 통한 심판 못지 않게 투표를 거부한 심판 또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여론몰이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의 투표율은 57%라는 역대 최저투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권자의 43%는 제도정치권을 불신하고 부정하였다. 그 근저에 신자유주의정책의 파괴적 효과와 그에 대비되는 기성정치인의 부패와 무능 등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과 분노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낙천낙선운동으로 민중운동에 불리하게 조성된 선거지형과 총선을 위해 급조된 민주노동당과 청년진보당의 조직, 재정상의 현격한 열세 및 그에 따른 제한된 지역구에서의 후보출마.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들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여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중적 대안을 요구하는 대중들의 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원내진출은 좌절되었어도 민주노동당은 후보를 낸 21개 지역구에서 평균 13%의 지지를, 청년진보당은 46개 지역구에서 평균 3%를 얻어 진보정당은 후보출마지역에서 대체로 평균 16%를 득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총선은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신자유주의쟁점이 억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 진보정당에 표를 찍은 적지 않은 대중의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반대, 유권자의 43%나 투표를 거부하기에 이른 소극적인 반대, 다른 한편에서 지역주의와 결합한 한나라당의 보수주의적 반대로 인해 정부와 집권 민주당의 신자유주의정책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총선시민연대와 집권당 그리고 친정부적 제도언론간의 신자유주의 연대의 선거목표, 즉 이번 총선을 통해 정부와 집권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재신임한다는 은밀한 목표가 좌절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낙천낙선운동, 공식적 목표의 달성?
총선시민연대는 이러한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면 총선시민연대는 자신들이 선정한 낙선대상 후보 86명 중 70%에 이르는 59명을 낙선시켜, 이 운동이 커다란 성과를 이룩했고 유권자혁명을 성취했다고 자축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목표일뿐이다. 민중운동진영은 총선시민연대에 대해 낙천낙선운동의 신자유주의적 성격 또는 그 위험을 수차 지적하였고, 이 운동의 지평을 더욱 넓혀서 단순히 몇몇 정치인의 물갈이가 아니라 제도정치권의 청산과 진보정치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총선시민연대는 이를 거부하였는데, 이는 총선시민연대가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총선의 결과는 외관과는 달리, 총선시민연대로서는 내심 쓰라린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낙천낙선운동의 공식적인 성과도 그 내용을 보면 전혀 자축할 만한 것이 아니다.
우선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3개의 방송국과 10개 신문사이 집중적으로 보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오히려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하여 유권자혁명이란 찬사는 무색하게 되어버렸다. 그것도 낙천낙선운동의 선도자라는 20대, 30대의 투표율이 가장 낮았던 것이다. 낙천낙선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던 언론을 따라간 독자라면, 그래서 낙천낙선운동으로 정치를 새롭게 자각하는 많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언론에서 들어오던 독자라면, 이런 결과는 아마도 충격처럼 느껴질 것이다.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여 썩은 정치를 바꾸자는 총선시민연대의 구호는, 실은 자신들이 선정한 86명만 찍지말고 그 대신 어떤 다른 후보라도 찍으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제도정당들을 대중들로 하여금 다시 승인하도록 유도하는 것인데 대중들은 역대 최대의 기권율로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찍을 정당이 없다, 찍을 정치가가 없다, 그래서 선거에 관심없다는 대중들에 대해 총선시민연대는 이들을 위해 대안의 정치, 대안의 정당을 만들어가려는 대신 신자유주의든 보수주의든 어느 하나를 찍으라고 강요한 셈이다.
또 낙천낙선운동은 더욱 심화된 지역주의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고 그로써 유권자혁명이란 더더욱 걸맞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총선시민연대는 선거막판에 지역주의와 집중적으로 대결하였지만 지역주의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총선시민연대가 내세운 낙선대상후보의 낙선율이 영남에서 45%로 가장 낮았던만큼, 이들의 지역주의 비판은 영·호남 지역주의를 거론하더라도 주로 영남지역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언론에서 65개 지역구 중 64개를 한나라당에 몰아주어 영남지역주의가 싹쓸이한 모습을 보고 개탄한다. 말하자면 영남지역주의 때문에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선택은 당선의석수가 아니라 득표율에 더 정확하게 나타나 있는데, 정당별 득표율을 보면 지역주의의 아성은 영남보다는 오히려 호남이다. 영남에서 한나라당은 41%(울산)-63%(대구)를, 민주당은 10%(울산)-15%(부산, 경북)를 득표한 반면, 호남에서는 한나라당이 겨우 3-4%를, 민주당은 66-70%를 득표했다. 그런데 호남의 친여 무소속과 영남의 민주국민당을 이에 각각 포함시키면 호남지역주의는 더욱 빛나게 된다. 이처럼 여전히 완고한 호남지역주의, 그리고 조금은 약화된 영남지역주의를 영남지역주의의 싹쓸이로 보이게 한 것은 다름아니라 최대득표자 당선을 제도화한, 부당한 현행 선거제도에서 기인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전체 투표수 중 39%, 36%정도를 득표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전체의석수의 49%, 42%를 쓸어간 결과는 분명 대의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영남지역주의의 폐해를 운운한다면 먼저 46석의 비례대표의석만이 아니라, 지역구를 포함한 전체의석에 대해 전면적인 정당명부제와 득표율에 따른 의석배분을 보장하는 방향의 선거제도 개혁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호남지역주의는 그래도 군사정권의 지배하에서는 파시즘의 지배에 대항하는 호남 소외계층을 결집시키는 긍정적인 의미도 없지 않았지만, 신자유주의 민간정권 하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볼모가 되어버렸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점에서도 지역주의의 더 큰 문제는 언론에서 말하듯이 영남지역주의가 아니라 호남지역주의이다. 호남대통령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소외된 국민과 계층인 호남 대중이, 대중소외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현실은 지역주의의 타파와 계급주의적 투표행태를 모색하는 데에 보다 큰 걸림돌이 아닐까?
현재의 영남지역주의는 군사정권의 지역주의가 지속된다는 측면도 있지만, 지역등권과 지역연대론에 입각해서 정권을 잡은 지역주의 정권은 지역주의를 청산할 수 없다는 점, 그것이 오히려 영남지역주의를 더욱 결집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점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왕에 지역주의를 논하는 마당에 충청지역주의도 간단히 언급하자. 자민련의 충청지역주의가 와해되면서, 언론들은 충청도가 품위있는 투표를 통해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있다고 추켜세우는 데 여기에도 왜곡은 있다. 왜냐하면 JP의 충청지역주의는 몰락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하는 것은 정책론에 입각한 계급주의가 아니라, 이 지역의 연고를 주장하는 민주당 이인제의 새로운 충청지역주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극우적인 자민련이 몰락의 기로에 서게된 것은 일정한 의의가 있겠지만, 그 성과를 신자유주의 지역주의가 가져가는 것을 지역주의 해체라고는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언론들은 JP의 충청지역주의는 망국병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뒤에서는 이인제의 신충청지역주의를 은밀하게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절반이라도 성공한 것인가?
이처럼 최악의 투표율과 대중들의 투표 거부, 그리고 지역주의의 기승 속에서 이루어진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혁명과 낙천낙선운동을 자랑하기는 아무래도 면목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총선시민연대는 이제, 보다 현실적인 자세로 돌아와서 겸허하게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하고 총선 전에 진보진영에서 그렇게도 제기했던 문제들, 즉 대안의 정치를 위해 진보진영과 시민운동진영이 같이 나갈 방안을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 총선시민연대의 운동을 위해, 그리고 아마도 집권당의 재신임을 위해 총선기간 중 민중운동의 목소리를 억눌러왔던 한겨레(심지어 지난 4월 1일 전국 12곳에서 2만여 명의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이 참가한 민중대회위원회의 민중대회조차 한 자도 보도하지 않았던)도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안을 논의하기에는 총선기간 동안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은 너무 다른 방향으로 나가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차이가 놓여있다.
'절반의 성공'을 운운하는 근거는 무엇보다도 낙선대상자의 70%가 낙선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데 자화자찬의 근거이자 그래도 절반은 성공했다고 자위할 수 있는 59명의 이들 낙선자는, 과연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때문에 낙선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이를 논증할 수 있는 투표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 운동의 효과가 일정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해당 낙선자의 당락을 결정짓는 데 어느만큼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좋게 말해도 어느 지역구에서는 그러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지역구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70% 낙선 운운은 잘못된 평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처럼 계급과 계층간, 연령간 투표행태와 그 지지정당 변화, 그리고 지지정당 또는 후보를 바꾼 이유 등에 대해 납득할만한 지역구별 투표분석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효과를 말하기 어렵다.
가장 권위있는 여론조사기관들에서 예측한 출구조사조차, 한나라당과 민주당간 실제의 선거결과를 정반대로 추정한 현실 수준을 보면 더욱 그렇지 않은가? 결국 총선시민연대와 제도언론들은 납득할만한 논거도 없이 낙천낙선운동을 부풀려 보도했고 그 결과를 서로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여 '절반의 승리'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을 조롱하는 세계의 시민운동
총선 후의 문제는 총선 전에도 그러했지만, 한국의 시민운동과 진보적인 민중운동이 갖고있는 한국사회의 개혁 청사진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있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개혁을 위해 같이 나가는 데 심각한 갈등과 간격을 보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때문이다. 총선 후에 시민운동은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언론의 지지와 그 성과에 대한 자화자찬적 평가에 입각하여 진보진영과의 차별성을 강화하고 더욱 자립적인 운동으로 나가려 할 것이다.
한국에서 이러한 발전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과 낙천낙선운동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일본으로 수출될 것이라는 일부 언론보도까지 접하며,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세계의 시민운동이 한국의 시민운동을 따라간다는 보도는 세계의 시민운동을 모독하는 보도이다. 우리는 세계의 전투적인 NGO들이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미국의 시애틀에서 그리고 워싱턴에서 초국적 금융과두들과 그 정치대표자들에 대항해서,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WTO의 신자유주의 개방화정책과 자유화정책에 대항하여, 그리고 세계의 빈민과 노동자를 위해, 지구적 환경을 위해 국가를 초월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해왔음을 보아오지 않았는가?
그것도 한국의 시민운동을 그렇게 추켜세우는 그 동일한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보아오지 않았는가? 세계의 NGO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자유화 정책에 온몸을 던져 저항하고 있을 때, 한국의 대표적인 NGO들은 국내외의 신자유주의 지배계급에 영합하여 한국사회를 초국적 자본에게 내어주고 자본과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몰아가는, 이데올로기적 첨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제도언론들 또한 반신자유주의, 반세계화를 내세운 세계의 NGO 운동은 주목할만한 운동으로 보도하면서도, 동일한 요구사항을 내건 한국의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묵살하기 일쑤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추종하고 세계화를 수용하는 한국의 NGO들이 개혁의 새로운 기수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겨레의 큰 지면에는 프랑스의 '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연합'(ATTAC)이 소개된 바 있다.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이 단체의장과의 인터뷰에서는 세계 NGO의 비판적 과학인식의 높은 수준을 엿볼 수 있는데, 한국의 천박한 시민운동가들의 인식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이 세계의 NGO를 쫓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반신자유주의와 반세계화로 입장을 전환할 수 있다면, 그때야 비로소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같이 갈 수 있는 공동의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현재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간의 간극과 갈등은 불가피하며 봉합이 아니라 폭발과 파열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