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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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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알 카포네

고지훈 |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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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람을 제목에 나란히 배치한 것만 보고도 벌써 글쓴이의 의도나 성향에 대해 "알쪼다"라고 흘겨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약간의 시차를 가지지만 한국과 미국을 한동안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두 인물들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공산주의 혹은 진보사상에 극단적인 혐오를 가진 사람은 이들을 모두 역사상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필요악'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폭력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어야 한다는 희박한 전제를 필요로 하지만. 어쨌건 닮은꼴이라고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은 이 두 인물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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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이야기보다 영화로 우리들에게 더 잘 알려진 알 카포네는 1899년 1월 17일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이 '알폰서스 카포네'였던 그가 일찍부터 '꼬마 갱'(kid gang)이라 불리운 걸 보면, 미래를 위한 확실한 포부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의 전직 대통령이 연상된다.
아무튼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의 신봉자답게 학교를 일찍 그만둔 그는 가게점원, 볼링장 핀보이, 제본소 직원 등을 전전하다 우연한 기회에 정식으로 구성(규율과 상하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조직'을 갖추었다는 의미에서!)된 갱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갱스터 무비의 전형을 보이기 위해서(?) 그는 탁월한 조직력과 두뇌로 시카고의 암흑가를 통일하고 그 유명한 '금주법 시대'(Prohibition Era : 1920-1933)에 미대통령보다 힘센 유일한 사나이로 군림하게 된다. 이 당시 그의 '악명'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쳐블'이란 영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카포네로 분한 영화배우의 외모 때문에 그가 미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심술궂은 백인의 전형적인 마스크를 하고 있다. 게다가 얼굴엔 '스카페이스'라는 별칭으로 불리웠던 인물답게 커다란 상처까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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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남조선 노동당(南朝鮮勞動黨)의 괴수 혹은 토종 공산주의자로 잘 알려진 박헌영은 1900년경(1899년생이란 이설도 있음)에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는데, 카포네에 비한다면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고등교육까지 받았다.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막 사회주의와 조우하던 시기에 그는 열혈 청년이 되어있었고, 1925년 김재봉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건에 참여하다 처음으로 체포된다. 이때부터 공식적인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던 그는, 이후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유학을 마친 뒤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는 탁월한 조직가로 몇차례에 걸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주도했으며, 해방 직후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창당하였다. 한마디로 해방된 조선 좌파운동의 영수로서 수백만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빈민층을 주력으로 하는 해방군의 총사령관이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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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포네는 위기를 기회로 삼은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20세기가 낳은 대표적인 실패 혹은 '빈대잡으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는 속담의 미국적 발현으로 평가되는 금주령(禁酒令)은 1919년 美연방헌법 수정 제18조항(이 수정18조항은 1933년 수정21조에 의해 폐지되었다)에 의거해서 1920년 1월 16일부터 미국 내의 모든 주에서 실시되었다. 오늘날의 깍두기 머리 아저씨들처럼 유흥가는 당시 갱조직들의 가장 유력한 수입원의 하나였기 때문에 금주령은 심각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조직의 자금은 오히려 더 풍부해졌다. 합법적인 주조가 금지됨으로써 오히려 술값이 금값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알카포네의 전기작가 한 명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20년대에 카포네 조직의 매출액은 연간 1억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카포네가 이런 대규모의 공식-비공식적 경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와 시장의 상징인 '경쟁의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그가 제품의 질이나 가격으로 경쟁한 것은 아니다. 돈이 가는 곳에 피냄새가 나는 것은 살벌한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보다 손쉬운 '기관총 불뿜기 경쟁'에 의지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찰로 위장한 그의 부하들이 라이벌 조직의 밀조공장을 급습하여 저질렀던 '성발렌타인데이의 학살'(St. Valentine's Day Massacre. 1929.2.14)이었다. 그는 언론에 의해 공공연하게 살인의 배후라고 지목되었지만(물론 뇌물의 효과로 이런 기사를 실은 신문은 일부였다) 결코 기소되거나 조사받지 않았다.
부하들의 충성심과 충분한 자금력에 의존한 탓이었다. FBI, 시카고 경찰, 법무부 등 사법기관의 울트라캡숑슈퍼초강력찐드기形 전담조사팀들도 어쩌지 못하던 이 파워풀한 사나이의 덜미를 잡은 것은 재무성 산하 미연방국세청(IRS) 소속의 특수정보팀(Special Intelligent Unit)직원들이었다. '언터쳐블'로 불리웠던 이들이 살인교사와 마약밀매, 밀주제조 등 온갖 연방법 혹은 주법 위반사범을 다루는 사법당국이 아니라, 국세청 소속(지금도 미 연방국세청의 현관에는 '결국 알카포네를 잡아넣은 것은 국세청이다'라는 액자가 걸려있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의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므로 믿을 것은 못되겠다)이었다는 점은 영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간과된다. 간단하다. "살인은 용서해도 탈세는 용서받지 못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실로 용감한 '본질드러내기'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반성할 지어다, 남한의 세무당국자들이여! 탈세범들로 구성된 남한의 국회여!
어쨌건 이 잘 나가던 사나이는 고작 21만 5천달러를 탈세했단 이유로 1931년 기소되고, 9년 간 감금되었다. 禁酒法(이후 금주령 위반혐의가 추가되었고 위폐액수도 삼백만원에서 천이백만원으로 늘어났다)과 카포네 시대가 동시에 막을 내리게 된 셈이다. 그로부터 꼭 10년 후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반파시즘을 위한 위대한 전쟁'을 개시하였고, 어쩌면 전혀 인연이 없을 수도 있었던 '남한의 알카포네' 박헌영과 조우하게 된다. 1945년 9월 8일, 점령군 美 제24군이 서울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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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 15일 오후. 제1관구 경찰청장 장택상의 발표는 남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이 말은 약간의 어폐가 있는데, 라디오를 보유하였던 극소수의 사람들은 15일 저녁 늦게나 16일 오전쯤에 놀랐고, 부지런한 신문배달소년이 배달하던 지역에선 16일 오후경,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에서 보름쯤 후에 이 사실을 알았을테니. 어쨌건 이처럼 호수의 파문처럼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을 놀래킨 것은 바로 근택빌딩의 지하에서 대규모의 위폐조직이 적발되었다는 발표였다.
소위 '정판사위조사건(精版社僞幣事件)'이었다. 그러나 이는 페인트 모션이었을 뿐, 정작 남한의 정부당국 즉, 주한미군정(駐韓美軍政) 당국이 타깃으로 삼았던 게 조선공산당이었음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정판사는 당시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였던 '해방일보'를 찍어내던 인쇄소였다. 그리고 수사발표는 사건의 용의자 14명이 모두 조선공산당 당원임을 명기하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위폐는 조선공산당의 활동비 명목으로 사용되었고, 위폐단의 핵심은 이관술(조선공산당 재정부장)과 권오직(해방일보 사장)이라는 점이었다. 조공(朝共)의 중앙간부들이 위폐사건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좌익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사건이었다. 5월 15일의 수사발표가 제법 고위급의 조공 간부까지 포함하는 것이긴 했지만, 미군정당국의 의도는 애초부터 박헌영을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박헌영과 미군정당국의 사이가 벌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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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 초기 남한의 좌익은 '역사적 한계'(남한에서 좌익운동은 30년대말부터 거의 가사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점은 해방직후 조직된 좌익정당 및 좌파운동이 우경과 좌경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구성하고 있던 역사적 조건이었다)로 인해 경직되기도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좌파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유연한 전술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에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그 후신인 인민위원회는 사실상 행정기관과 통제력을 수중에 쥐고 있던 '준정부'(quasi-government)였다.
하지만 '미·소협조노선'을 표방한 조공의 방침에 따라 공식적으로 남한의 좌익은, 수중에 쥐고있던 권력을 넘겨주었다. 미군정의 점령행정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미소를 띤 채로 말이다. 미군정 당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공식적인 정책은 '언론·집회·표현·결사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때문에, 하지는 수시로 조공 간부들을 접견했고 좌파의 행사에도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참가하여 축사를 해주었다. 역시 미소를 띤 채로.
하지만 서로의 속마음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군바리와 빨갱이라. 삼대를 섞여살아도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기 힘든 부류들이다. 그들이 꼭 그랬다. 미군정과 조공이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계기는 1946년 초, 남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제1차 미소공위의 결렬 때문이었다. '다 먹기는 힘들지만 어느정도는 확보해야만 할 파이'.
당시 한반도는 미국에게 후식거리에 다름아니었다. 물론 메인디쉬였던 일본과 유럽에 비해서 영양가는 좀 떨어졌지만. 어쨌건 '초원의 포식자'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이 잠시 결렬된 틈을 타서 남한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삼켜봐야 소화불량을 일으킬 좌파를 도려내야 했다. "박헌영을 체포하라!" 하지만 문제는 "so what?", 아니 "so how?"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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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사건의 취조과정에서 박헌영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완벽한 알리바이는 보스의 필수덕목이다. 이 점에 있어서만은 카포네와 박헌영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럼 해결책은? 5월 15일 사건발표가 있기 전에 작성된 군정의 한 비밀문서를 훔쳐보자.

"문제는 박헌영이 이번 위조사건(정판사사건)으로 기소될 수 있는지 여부이지만...증거가 없다...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다. 미국에서 갱조직을 처벌하는 방식과 유사한 것이다. 즉, 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의 범죄를 추궁하지 말고, 수입에 대한 탈세를 추궁하는 것이다."

미군정 소속의 한 법률가가 작성한 이 문서는 '정당활동의 자유'를 표방하는 미국이 어떻게 좌파정당의 당수를 제거할 수 있는가란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묘책이었다. 효과는 알 카포네의 체포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었다. 물론 박헌영이 탈세 혐의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1946년 9월경 실제로 박헌영에게 체포령이 내렸지만, 혐의내용은 탈세가 아닌 연합군사령관 포고 위반이었다. 조공의 2중장부가 알 카포네의 그것보다 더 완벽했기 때문일까?
알 수 없다. 당시 미군당국은 조공의 회계장부와 내부문건들을 압수했지만, 박헌영에게 수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 치명적인 오점이 찍힐 뻔한 것이다. 좌파운동의 1세대 우두머리가 고작 탈세범이라니!
법률가들의 잔머리를 생각해 본다. 법을 그물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른 비유로 비약해야 한다. 법이 그물이라면 사법당국은 어부일뿐이며, 입법행위는 그물을 좀더 촘촘히 만드는 織網工(?)이라고나 할까? 이 그물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작자들에게 행위의 준칙이란 더 이상 正言命令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물고기를 더욱 간편하게 잡아올리면 된다는 간편한 실용주의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야기가 역사를 떠나 법학으로 가기 전에 되돌아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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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령으로 인해 지하로 숨어든 박헌영은 한동안 남한의 좌익 운동을 지도하다가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월북하게 된다.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외무상과 부수상을 역임하였지만 그의 말년은 알 카포네보다 더 비참하였다.(알카포네는 8년간의 복역을 마친 후 더이상 조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매독성치매와 발작으로 우울하게 죽어갔다)
1955년 12월 열린 공판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전복음모 및 미제의 간첩으로 활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게 된다. 그 진위여부를 떠나 해방 직후 남한의 좌파세력을 이끌던 영수가, 한갖 미제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사형당했다는 점이나 카포네가 탈세범으로 처벌받았던 사실은 차라리 '해프닝'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로 본다면 박헌영과 알카포네는 그들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죄목으로 유죄가 인정되었다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경찰국가의 공권력을 상대로 '맞짱'을 뜬 몇 안되는 인물들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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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둘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음을 또한 이야기해야겠다. 잡범 축에 속하는 탈세범을 미국인들은 묘한 향수를 떠올리면서 '은근히' 추모하는 반면, 간첩죄란 뉘앙스 때문인지 박헌영에 관한 후일담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수많은 전기작가들이 남긴 카포네의 전기류가 수십종임은 물론, 그와 관련된 인터넷사이트와 그를 다루는 영화관은 수많은 관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박헌영의 경우는 어떨까?
평전은 고사하고 아직 그에 관한 자료집조차 변변한게 없는 실정이다. 알 카포네와 박헌영의 차이만큼이나 우리와 미국의 차이는 멀고도 깊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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