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의 대중음악(1)
Intro
오랜만에 [CMJ]를 다시 구입하게 된 것은 페미 쿠티(Femi Kuti)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weiv]의 'US 통신원' 한 명 덕분에 알게된 그의 이름에는 '나이지리아'라는 기호가 따라다닌다. 나이지리아? '축구 잘하는 아프리카의 나라'라는 정도 외에는 별로 아는 바 없다. 관련된 이름이 몇 개 더 있다. "Smooth Operator"를 부른 '해프 나이지리언(half nigerian)' 샤데이(Sade), 그리고 한때 NBA를 주름잡은 '흑표범' 하킴 올라주원(Hakeem Olajuwon)이 나이지리아와 아주 조금 관련있는 대중스타다. 하지만 이 글의 이야기와는 큰 상관 없다. 박찬호와 박수영만 알고 한국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으니 말이다.
아프로비트의 제왕, 펠라 쿠티
페미 쿠티는 누구인가? 'US 통신원'에게 내가 먼저 이름을 알려준 펠라 쿠티(Fela Kuti)의 아들이다. 길게 부르면 펠라 안티쿨라포 쿠티(Fela Antikulapo Kuti)고, 짧게 부르면 그냥 펠라(Fela)다. 그를 부르는 별명은 무수히 많다. '아프로비트의 제왕(The King of Afrobeat)' '나이지리아의 밥 말리' '가난한 노동자의 목소리' '흑인의 대통령(black president)'… 1997년 펠라가 AIDS로 사망했을 때 나이지리아의 옛수도 라고스(Lagos)의 거리는 수백만명의 인파로 가득찼다. 반정부 재야정치단체인 나이지리아 통일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 of Nigeria)의 공식발언도 있었다. "당신을 잘 알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당신은 결코 평생을 바쳐 싸워왔던 악과 타협하지 않았다고. 시간과 운명 때문에 가끔 약해지기도 했지만 당신의 의지는 언제나 강했으며,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 아프리카라는 당신의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최상의 찬사다.
펠라는 자신의 죽음을 '조상들에 가담했다'고 표현했다. 그가 조상에 가담하면서 비로소 그의 이름도 내 귀에 들어왔다. 아직 영미권의 '얼터너티브' 음악에 중독되었던 무렵에 구입한 [Alternative Album Guide]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얼터너티브 음악'의 명반을 소개한 책에 웬 나이지리아의 '베테랑'뮤지션이 들어있는가? 하지만 여기 소개된 그의 삶은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하지만 펠라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패밀리 비즈니스'를 계승한 페미 쿠티의 음악을 먼저 들어보자.
Femi Kuti,
페미의 [Shoki Shoki]는 미국시장에서 정식발매되는 첫 앨범이다. 1999년 12월 펠라의 수많은 편집앨범 중 최신판인 [The Black President: The Best of Best of Fela]를 배급한 유니버설이 페미의 음반도 배급을 맡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끼워팔기'인가. 아무튼 음반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아마존'이나 'CD 나우'에 가면 리얼오디오로 사운드샘플을 들어볼 수 있다. 리얼오디오의 음질이 도저히 성에 안 차는 사람이라면 [CMJ] 2000년 2월호의 샘플 CD에서 'Beng, Beng, Beng'이라는 제목을 찾아봐라.
퍼커션의 리듬이 면전을 강타하고 에너지는 넘친다. 이런 스타일의 음악에 귀가 솔깃하다면 한때 슬라이 스톤(Sly Stone),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조지 클린튼(George Cliton)의 이름에 매혹되었던 사람이리라. 레코딩된 트랙이라고 하더라도 '라이블리'하다. 무겁고 강력한 베이스라인이 넘실대는 사운드 위에서 페미는 웃옷을 벗은 채 마이크와 색소폰을 번갈아 잡고 노래부른다. 라이브공연에서는 16명으로 이루어진 페미의 밴드, 포지티브 포시스(Positive Force)가 곡예같은 쇼를 보여준다.
왁자한 파티의 분위기다. 아무래도 직접 본 사람의 문장을 인용하는 편이 낫겠다. 아래 문장을 읽으면 공연 장면이 대략 떠오를 것이다.
"각각의 곡들은 다양한 섹션을 통해 이동해 간다. 페미 쿠티의 보컬에 대해 여자가 응수하고 드럼이 강조점을 찍어준다. 불규칙하게 변동하는 비트 위에서 색소폰 라인은 마치 주문을 외는 듯하면서 소용돌이친다"(Jon Pareles, "Femi Kuti and Positive Force: Putting Smile on Father's Music", [New York Times], September 20, 1999).
이 곡은 "She says, Love Me now / She says, squeeze me now"라는 가사나 "It's all about sex"라는 페미 본인의 말처럼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곡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곡은 그의 고국인 나이지리아에서는 금지곡이 되었다. 그러면 아프로비트가 아무 생각없이 놀고 즐기는 음악이냐고? 맞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빌보드]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 엉덩이를 움직이게 하는 음악(hip-shaking music with a message)"라는 기지어린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문장에서 보듯 아프로비트는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자각을 담고 있다. 1999년 페미는 MASS(Movement Against Second Slavery)라고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하여 나이지리아의 청년들에게 '아프리카적 상황(African Condition)'을 자각시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페미 쿠티의 앨범
[CMJ]는 페미 쿠티를 굵은 글씨로 "아프로비트의 새로운 제왕(The New King of Afrobeat)"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옛 제왕은 펠라 쿠티다. 이때 아프로비트를 '리듬의 비트가 강한 아프리카산(産) 음악'이라는 보통명사라고 말하면 '월드뮤직 매니아'들에게 망신당하니 조심해야 한다. 또 나이지리아를 대표하는 대중음악의 장르가 아프로비트라고 말해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페미(그리고 펠라)의 음악은 스타일면에서는 '아프로 아메리칸'의 대중음악인 재즈, 소울, 훵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프로비트는 나이지리아에서 탄생한 음악스타일들 중에서 '미국 흑인음악으로부터 강하게 영향받은 스타일'로 평가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위 인용문이 실린 신문기사의 타이틀을 보자. '아버지의 음악에 미소를 입히기'? 아버지의 음악에는 왜 미소가 없었는가. 페미의 앨범의 나머지트랙들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우선 그의 고국 나이지리아의 문화적 상황부터 검토해 보자. 미소없던 나라, 미소없던 시대로.
Unwelcome To Nigeria
나이지리아는 1억이 넘는 인구와 924,000㎢에 달하는 국토를 가진 대국이다. 고등학교 지리 수업시간같은 분위기를 조장함을 용서하라. 어쨌거나 인구가 1억이 넘으니 통계적으로는 이른바 '블랙 아프리카(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의 주민들 중 네 명 중 한 명 꼴로 나이지리아 국적을 보유한 셈이다. 국토의 면적은 미국의 1/10 정도로 더 큰 나라도 많지만 서아프리카 해안과 평야를 차지하고 있어서, 사막과 정글이 대부분인 나라와는 '질'이 다르다. 게다가 노른자위 땅에 석유도 매장되어 있는 이 나라는 현재 세계 10위의 산유국이다.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니 좋은 조건 때문에 이 나라의 운명은 험난하기만 하다. 한마디로 나이지리아는 유혈쿠데타의 천국, 아니 지옥이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약 40년의 기간 중에서 30년을 군부 독재정권 치하에서 보내야 했고 작년 말 가까스로 자유선거에 의해 민정으로 이양된 상태다. 신임 대통령 올루세군 오바산조(Olusegun Obasanjo)도 1976년부터 1979년까지 군부의 임시정부 수반으로 재직했던 경력이 있다. 한때 중진 개발도상국에 속했지만(독립했을 무렵 나이지리아의 1인당 GNP는 남한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금은 세계최빈국 20국에 속하는 신세가 되어 있다.
정치적 소요가 심각했던 것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잡한 세력관계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민족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나이지리아 연방은 현재 21개의 주(state)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족은 자그만치 252개에 이른다. 3대 민족은 하우사-풀라니(Hausa-Fulani), 이보(Ibo), 요루바(Yoruba)이다. 참고로 하우사와 풀라니는 다른 민족이지만 같은 언어권이므로 하나의 민족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런 민족의 분할은 지역, 종교, 계층의 구분과 대략 일치한다. 북부에는 하우사-풀라니가 거주하고 있고, 남부는 동부에 거주하는 이보와 서부에 거주하는 요루바로 구분된다. 하우스-풀라니는 이슬람교도이며, 이보는 로마카톨릭교도이고 요루바는 기독교도이다. 하우스-풀라니는 군인과 정치인을 많이 배출하고, 이보와 요루바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또 16세기 이후 노예사냥의 주 대상은 이보족과 요루바족이었다.
나이지리아의 독재자들
이런 민족 갈등 = 지역 갈등 = 종교 갈등 = 계급 갈등 = 직업 갈등은 독립 후 채 6년이 지나지 않아 표면화되어, 급기야 30개월간의 비극적 내전을 낳았다. 발단은 1966년 1월 동부 출신 군인에 의한 쿠데타였고 이는 각지에서의 정치적 테러를 거쳐, 같은 해 5월 북부 출신 군인의 쿠데타를 거쳐 낳았다. 그 직후 동부의 군부가 비아프라(Biafra)라는 이름의 독립국가를 선포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비아프라 내전(공식명칭은 '국민통일전쟁(National Unity War)')'이다. 내전은 1970년에 이르러야 가까스로 정상화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200만명의 사망자를 남겼다(공식통계로는 10만 명이지만).
계속된 '민정 이양'이라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의 예외적 기간을 제외하곤 최근까지 군부 지배 하에 신음했다.
이런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의 맹주일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세계적 강국이다. 나이지리아 뿐만 아니라 기니만(灣)을 따라 도열한 서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좀 경직되긴 했지만 넬슨 조지(Nelson George) 같은 미국의 흑인음악연구자들은 블루스, 재즈, 고스펠, 소울 등의 먼 기원을 서아프리카에서 찾고 있으며, 딕 헤브디지(Dick Hebdige)같은 레게연구자들도 카리브해 지역의 흑인음악의 기원을 이 지역에서 찾고 있다.
또한 현대의 음악 중에도 세네갈의 마코사(makossa), 코트디브와르의 즈글리비티(zglibithy), 가나의 하이라이프(highlife), 나이지리아의 주주(juju) 등은 '월드 뮤직'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이름들이리라. 이제까지의 설명이 너무 장황하고 번잡스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일단 시기와 지역을 좁혀서 가나의 하이라이프부터 시작하자.
※이 글은 웹진[weiv](vol.2/no.6, 2000. 3. 20)에 연재되는 시리즈 "Afro-beat Never Stands Still"라는 제하의 글을 게재한 것입니다. 시리즈는 다음과 같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1) 아프리카의 대중음악 -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2) 펠라 쿠티 & 아프로비트
(3)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시 아프리카로 - (deafricanization and reafricanization)
이번 달에는 위 글 (1)중 일부만을 발췌했으며 이후 계속해서 나머지 글도 연재될 예정입니다.(홈페이지: http://www.weiv.co.kr)
오랜만에 [CMJ]를 다시 구입하게 된 것은 페미 쿠티(Femi Kuti)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weiv]의 'US 통신원' 한 명 덕분에 알게된 그의 이름에는 '나이지리아'라는 기호가 따라다닌다. 나이지리아? '축구 잘하는 아프리카의 나라'라는 정도 외에는 별로 아는 바 없다. 관련된 이름이 몇 개 더 있다. "Smooth Operator"를 부른 '해프 나이지리언(half nigerian)' 샤데이(Sade), 그리고 한때 NBA를 주름잡은 '흑표범' 하킴 올라주원(Hakeem Olajuwon)이 나이지리아와 아주 조금 관련있는 대중스타다. 하지만 이 글의 이야기와는 큰 상관 없다. 박찬호와 박수영만 알고 한국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으니 말이다.
아프로비트의 제왕, 펠라 쿠티
페미 쿠티는 누구인가? 'US 통신원'에게 내가 먼저 이름을 알려준 펠라 쿠티(Fela Kuti)의 아들이다. 길게 부르면 펠라 안티쿨라포 쿠티(Fela Antikulapo Kuti)고, 짧게 부르면 그냥 펠라(Fela)다. 그를 부르는 별명은 무수히 많다. '아프로비트의 제왕(The King of Afrobeat)' '나이지리아의 밥 말리' '가난한 노동자의 목소리' '흑인의 대통령(black president)'… 1997년 펠라가 AIDS로 사망했을 때 나이지리아의 옛수도 라고스(Lagos)의 거리는 수백만명의 인파로 가득찼다. 반정부 재야정치단체인 나이지리아 통일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 of Nigeria)의 공식발언도 있었다. "당신을 잘 알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당신은 결코 평생을 바쳐 싸워왔던 악과 타협하지 않았다고. 시간과 운명 때문에 가끔 약해지기도 했지만 당신의 의지는 언제나 강했으며,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 아프리카라는 당신의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최상의 찬사다.
펠라는 자신의 죽음을 '조상들에 가담했다'고 표현했다. 그가 조상에 가담하면서 비로소 그의 이름도 내 귀에 들어왔다. 아직 영미권의 '얼터너티브' 음악에 중독되었던 무렵에 구입한 [Alternative Album Guide]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얼터너티브 음악'의 명반을 소개한 책에 웬 나이지리아의 '베테랑'뮤지션이 들어있는가? 하지만 여기 소개된 그의 삶은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하지만 펠라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패밀리 비즈니스'를 계승한 페미 쿠티의 음악을 먼저 들어보자.
Femi Kuti,
페미의 [Shoki Shoki]는 미국시장에서 정식발매되는 첫 앨범이다. 1999년 12월 펠라의 수많은 편집앨범 중 최신판인 [The Black President: The Best of Best of Fela]를 배급한 유니버설이 페미의 음반도 배급을 맡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끼워팔기'인가. 아무튼 음반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아마존'이나 'CD 나우'에 가면 리얼오디오로 사운드샘플을 들어볼 수 있다. 리얼오디오의 음질이 도저히 성에 안 차는 사람이라면 [CMJ] 2000년 2월호의 샘플 CD에서 'Beng, Beng, Beng'이라는 제목을 찾아봐라.
퍼커션의 리듬이 면전을 강타하고 에너지는 넘친다. 이런 스타일의 음악에 귀가 솔깃하다면 한때 슬라이 스톤(Sly Stone),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조지 클린튼(George Cliton)의 이름에 매혹되었던 사람이리라. 레코딩된 트랙이라고 하더라도 '라이블리'하다. 무겁고 강력한 베이스라인이 넘실대는 사운드 위에서 페미는 웃옷을 벗은 채 마이크와 색소폰을 번갈아 잡고 노래부른다. 라이브공연에서는 16명으로 이루어진 페미의 밴드, 포지티브 포시스(Positive Force)가 곡예같은 쇼를 보여준다.
왁자한 파티의 분위기다. 아무래도 직접 본 사람의 문장을 인용하는 편이 낫겠다. 아래 문장을 읽으면 공연 장면이 대략 떠오를 것이다.
"각각의 곡들은 다양한 섹션을 통해 이동해 간다. 페미 쿠티의 보컬에 대해 여자가 응수하고 드럼이 강조점을 찍어준다. 불규칙하게 변동하는 비트 위에서 색소폰 라인은 마치 주문을 외는 듯하면서 소용돌이친다"(Jon Pareles, "Femi Kuti and Positive Force: Putting Smile on Father's Music", [New York Times], September 20, 1999).
이 곡은 "She says, Love Me now / She says, squeeze me now"라는 가사나 "It's all about sex"라는 페미 본인의 말처럼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곡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곡은 그의 고국인 나이지리아에서는 금지곡이 되었다. 그러면 아프로비트가 아무 생각없이 놀고 즐기는 음악이냐고? 맞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빌보드]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 엉덩이를 움직이게 하는 음악(hip-shaking music with a message)"라는 기지어린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문장에서 보듯 아프로비트는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자각을 담고 있다. 1999년 페미는 MASS(Movement Against Second Slavery)라고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하여 나이지리아의 청년들에게 '아프리카적 상황(African Condition)'을 자각시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페미 쿠티의 앨범
[CMJ]는 페미 쿠티를 굵은 글씨로 "아프로비트의 새로운 제왕(The New King of Afrobeat)"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옛 제왕은 펠라 쿠티다. 이때 아프로비트를 '리듬의 비트가 강한 아프리카산(産) 음악'이라는 보통명사라고 말하면 '월드뮤직 매니아'들에게 망신당하니 조심해야 한다. 또 나이지리아를 대표하는 대중음악의 장르가 아프로비트라고 말해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페미(그리고 펠라)의 음악은 스타일면에서는 '아프로 아메리칸'의 대중음악인 재즈, 소울, 훵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프로비트는 나이지리아에서 탄생한 음악스타일들 중에서 '미국 흑인음악으로부터 강하게 영향받은 스타일'로 평가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위 인용문이 실린 신문기사의 타이틀을 보자. '아버지의 음악에 미소를 입히기'? 아버지의 음악에는 왜 미소가 없었는가. 페미의 앨범의 나머지트랙들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우선 그의 고국 나이지리아의 문화적 상황부터 검토해 보자. 미소없던 나라, 미소없던 시대로.
Unwelcome To Nigeria
나이지리아는 1억이 넘는 인구와 924,000㎢에 달하는 국토를 가진 대국이다. 고등학교 지리 수업시간같은 분위기를 조장함을 용서하라. 어쨌거나 인구가 1억이 넘으니 통계적으로는 이른바 '블랙 아프리카(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의 주민들 중 네 명 중 한 명 꼴로 나이지리아 국적을 보유한 셈이다. 국토의 면적은 미국의 1/10 정도로 더 큰 나라도 많지만 서아프리카 해안과 평야를 차지하고 있어서, 사막과 정글이 대부분인 나라와는 '질'이 다르다. 게다가 노른자위 땅에 석유도 매장되어 있는 이 나라는 현재 세계 10위의 산유국이다.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니 좋은 조건 때문에 이 나라의 운명은 험난하기만 하다. 한마디로 나이지리아는 유혈쿠데타의 천국, 아니 지옥이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약 40년의 기간 중에서 30년을 군부 독재정권 치하에서 보내야 했고 작년 말 가까스로 자유선거에 의해 민정으로 이양된 상태다. 신임 대통령 올루세군 오바산조(Olusegun Obasanjo)도 1976년부터 1979년까지 군부의 임시정부 수반으로 재직했던 경력이 있다. 한때 중진 개발도상국에 속했지만(독립했을 무렵 나이지리아의 1인당 GNP는 남한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금은 세계최빈국 20국에 속하는 신세가 되어 있다.
정치적 소요가 심각했던 것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잡한 세력관계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민족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나이지리아 연방은 현재 21개의 주(state)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족은 자그만치 252개에 이른다. 3대 민족은 하우사-풀라니(Hausa-Fulani), 이보(Ibo), 요루바(Yoruba)이다. 참고로 하우사와 풀라니는 다른 민족이지만 같은 언어권이므로 하나의 민족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런 민족의 분할은 지역, 종교, 계층의 구분과 대략 일치한다. 북부에는 하우사-풀라니가 거주하고 있고, 남부는 동부에 거주하는 이보와 서부에 거주하는 요루바로 구분된다. 하우스-풀라니는 이슬람교도이며, 이보는 로마카톨릭교도이고 요루바는 기독교도이다. 하우스-풀라니는 군인과 정치인을 많이 배출하고, 이보와 요루바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또 16세기 이후 노예사냥의 주 대상은 이보족과 요루바족이었다.
나이지리아의 독재자들
이런 민족 갈등 = 지역 갈등 = 종교 갈등 = 계급 갈등 = 직업 갈등은 독립 후 채 6년이 지나지 않아 표면화되어, 급기야 30개월간의 비극적 내전을 낳았다. 발단은 1966년 1월 동부 출신 군인에 의한 쿠데타였고 이는 각지에서의 정치적 테러를 거쳐, 같은 해 5월 북부 출신 군인의 쿠데타를 거쳐 낳았다. 그 직후 동부의 군부가 비아프라(Biafra)라는 이름의 독립국가를 선포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비아프라 내전(공식명칭은 '국민통일전쟁(National Unity War)')'이다. 내전은 1970년에 이르러야 가까스로 정상화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200만명의 사망자를 남겼다(공식통계로는 10만 명이지만).
계속된 '민정 이양'이라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의 예외적 기간을 제외하곤 최근까지 군부 지배 하에 신음했다.
이런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의 맹주일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세계적 강국이다. 나이지리아 뿐만 아니라 기니만(灣)을 따라 도열한 서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좀 경직되긴 했지만 넬슨 조지(Nelson George) 같은 미국의 흑인음악연구자들은 블루스, 재즈, 고스펠, 소울 등의 먼 기원을 서아프리카에서 찾고 있으며, 딕 헤브디지(Dick Hebdige)같은 레게연구자들도 카리브해 지역의 흑인음악의 기원을 이 지역에서 찾고 있다.
또한 현대의 음악 중에도 세네갈의 마코사(makossa), 코트디브와르의 즈글리비티(zglibithy), 가나의 하이라이프(highlife), 나이지리아의 주주(juju) 등은 '월드 뮤직'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이름들이리라. 이제까지의 설명이 너무 장황하고 번잡스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일단 시기와 지역을 좁혀서 가나의 하이라이프부터 시작하자.
※이 글은 웹진[weiv](vol.2/no.6, 2000. 3. 20)에 연재되는 시리즈 "Afro-beat Never Stands Still"라는 제하의 글을 게재한 것입니다. 시리즈는 다음과 같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1) 아프리카의 대중음악 -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2) 펠라 쿠티 & 아프로비트
(3)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시 아프리카로 - (deafricanization and reafricanization)
이번 달에는 위 글 (1)중 일부만을 발췌했으며 이후 계속해서 나머지 글도 연재될 예정입니다.(홈페이지: http://www.wei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