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정치위기에 대한 개관
이 글은 현재 브라질 정치위기를 개관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이 위기가 단지 최근 사건들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1989년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진 과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룰라 정부의 ‘연정기반(ally base)’과 노동자당(PT)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로 인하여 최근 브라질은 가장 심각한 정치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 위기는 우익의 비참한 배제 정책, 잘 알려진 우익의 고질적인 부패, 혹은 민주적 권리를 박탈하는 군부독재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좌파 스스로 위기를 낳았다.
그러나 부패 폭로의 이면에는 노동자당이 정권을 잡지 않았던 때부터 시작된 더욱 뿌리가 깊은 과정이 놓여 있다. 그것은 바로 지역 방송, 특히 헤지글로부TV(the Rede Globo TV)가 대부분 조작한 것으로 오늘날 널리 알려진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룰라가 페르난두 콜로르(PRN, 민족재건당)에게 패배한 1989년 이후, 노동자당이 천천히 중도파로 이동해온 과정이다. 2년 반 후에 콜로르 대통령은 부패 스캔들 때문에 (이전에 그에게 권력을 안겼던 바로 그 헤지글로부TV가 지지한) 대중시위에 의해 탄핵을 받고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잡탕의 이타마르 프랑코(PMDB, 브라질민주운동당) 정부가 콜로르를 대신한 후, 룰라는 1994년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하였다. 이번에 그는 헤알계획으로 인플레이션율에 강력 대처했던 프랑코 정부의 전 재무장관인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수(PSDB, 브라질사회민주당)에게 패배하였다. 그 때까지 헤알계획은 엉터리 선거용 계획이라고 불렸지만, 주로 19931996년의 초기에 역사적인 초-인플레이션율을 연 10% 이하로 낮추면서 평균임금가치를 향상시키는데 실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헤알계획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1994년 이후 심화된 사유화 과정이 결합되면서 경제는 해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높은 이자율을 고수해야만 했고, 이는 매우 낮은 인플레이션율 따라서 높은 실업율을 낳았다.
국영기업과 공공서비스 사유화를 수단으로 하고, 상품수출과 경제로부터 국가의 퇴각에 기초한 브라질의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은 1992년, 주되게는 1994년 이후에 이미 위기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지만, 1998년 룰라는 또 다시 카르도수에게 패배했다.
노동자당이 그 때까지 정권을 잡지는 못했지만, 1990년대 지방선거에서는 빠르게 성장하여, 몇몇 지방자치시와 중요한 주에서 승리하였다. 2004년 선거 결과, 노동자당은 3개의 주와 184개의 시에서 집권하고 있으며, 14명의 상원의원과 91명의 하원의원, 151명의 주의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당은 여전히 수적인 크기에 있어서 8번째 당이고, 지방자치시의 34%만을 지배하고 있다. 2004년에 노동자당은 두 개의 가장 중요한 지방정부, 가장 부유하고 커다란 상파울루시와 20년 동안 성공적인 통치를 해 왔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패배했다.
브라질의 지방 정부의 대다수는 브라질민주운동당(PMDB)-22.6%, 자유전선당(PFL)-18.5%, 브라질사회민주당(PSDB)-17.8%, 진보당(PP)-11.1%, 브라질노동당(PTB)-7.2%이 장악하고 있다. 이 상황은 주 수준이나 연방의회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되며, 이러한 다원적 정치체계 속에서 당선 이후 개혁을 실행하려면 좁거나 넓은 연정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연정이 룰라와 노동자당이 역사적으로 좇아온 경로였다.
대연정 정책을 통해서 노동자당은 사회의 온건한 계층의 지지를 얻어 당의 가장 강력한 간판스타인 룰라의 마지막 기회로 이해된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전략을 강화했다.
노동자당은 민주주의(사회정의와 정치윤리)를 위한 역사적 운동과 참여예산제와 같이 구체적이고 민주적인 경험이자 흥미로운 사회 프로그램을 결합했고, 덧붙여 룰라의 이미지에 대한 정치적 선전을 강화하는데 투자를 집중했고, 결국 선거에서 성공했다. 그러나 선거에서의 성공은 (사회주의자의 붉은색에 대비하여) 분홍색 노동자당(Pink PT), 가벼운 룰라(Lula Light)와 같은 표현에서 증명되는 것처럼 급진주의의 상실과 전투성을 더욱 해체하는 미디어 정치에 대한 굴복을 대가로 한 것이었다.
결국 2002년 룰라는 5,200만 표라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주세 세하(카르도수측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선거운동 기간 룰라는 IMF 및 다른 금융기관과 맺은 모든 협정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지켰다. 또한 룰라는 매우 중도적인 강령으로 당선이 되었는데, 이는 룰라가 세부 내용은 제시하지 않은 채 규정하려고 하였던 ‘변화', '새로운 사회협약'에 대한 요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가 부통령으로 섬유산업의 민족주의적 기업인을 결정한 것은 전통적인 중도좌파 그룹인 자유당(PL)과의 깊숙하고 실용적인 동맹을 상징한다. 정부 내에서 [동맹세력에게 배분한] 권력은 룰라가 계획했던 개혁에 대한 의회의 지지로 나타났다. 이것은 거래였다. 한편으로 소위 ‘연정기반’에는 항상 [룰라]정부에 충실한 브라질공산당(PCdoB)과 같은 오랜 동지들도 포함되어 있다.
룰라가 브라질 대통령으로 공표되던 때의 기쁨도 잠시, 사회운동과 시민사회조직을 포함하여 노동자당과 좌파에 속해있는 분파들은 룰라정부 하에서 가능한 사회적 변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노동자당 지도부의 대연정 정책의 결과로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게 된 보수주의자와 좌파 사이의 ‘논쟁에 휘말린 정부’가 될 것이라는 점을 즉시 깨달았다.
그러나 룰라 정부를 압박하도록 민중을 조직하는 일은 대부분 정부 바깥에 있는 비판적인 좌파 분파들에게 쉽지 않은 일임이 드러났다. 룰라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강력한 대중시위가 없을 뿐 아니라 요즘 설문조사에서조차 정부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보다도 더 높은 지지를 받을 정도로 지난 25년의 정치 무대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룰라가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을 받아들였고 어떤 점에서는 인플레이션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이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수행하고 있는 사회 프로그램들이 완벽하지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에서 지난 15년과 비교했을 때 구체적인 진전을 의미하는 것은 확실하다. 대외정책 또한 국제문제에서 자주성의 증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정부의 성과로 인정된다.
룰라가 5,200만 표에서 얻은 지지를 정부정책을 좌익화하는 데 동원하지 않았으며, 보수적인 경제모델을 유지하고 매우 온건한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금융시장을 만족시키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브라질 엘리트들에게 대항하지 않은 포상으로 2006년 재선에서 더 쉽게 승리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개혁을 심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2005년 5월 부패스캔들이 폭로되기까지의 배경이다. 그 후 브라질의 정치적 맥락은 완전히 변했다. 노동자당의 대‘연정기반’의 구성원인 호베르투 제페르손(PTB 브라질노동당)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우편공사 내부의 부패스캔들에 걸려들었고 정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자, 정부 ‘연정기반’과 노동자당이 연루된 전반적인 부패 구조를 대중적으로 폭로하기로 결정했다.
제페르손은 자신의 폭로에 대한 증거를 대지 못했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되면서, 정부가 공사들로부터 돈을 받아 노동자당의 재정위원장에게 주었고 연방의회의 하원의원들이 정부의 개혁에 찬성하도록 문자 그대로 표를 매수하였다는 연쇄적 과정에 대한 제페르손의 폭로가 대부분 [사실로] 확인되기 시작했다. 정부법안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돈을 받은 의원들은 주로 자유당(PL), 진보당(PP), 브라질노동당(PTB) 출신으로, 이 정당들은 모두 2002년 룰라의 대선운동에 참여한 보수정당이다. 대연정의 취약성이 증명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주제 디르세우 정무장관과 주제 제노이누 노동자당 총재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의 사퇴는 아직 그들에 대한 심판이 진행 중이라 해도 유죄임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 활동가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은, 모든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번 스캔들이 1992년 콜로르를 탄핵시켰던 건보다 훨씬 큰 규모이며, 노동자당이 출범한 이래 25년간 지속해온 정치윤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있다. 당이 성장하면서, 지방정부에도 역시 부패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커졌지만, [부패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부패와의 전쟁은 항상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부패 스캔들을 비롯하여 연정정책과 같은 룰라정부가 취했던 정치적 행보가 룰라, 디르세우, 제노이우 및 다른 대표 지도자들이 속해 있고 지난 10년간 노동자당을 지배해 온 당내 세력인 다수파(MF, Campo Majoritario)가 주도한 과정의 결과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경제정책 및 연정정책에 관한 노동자당 내부의 갈등이 더욱 빈번해졌고, 결국 전 총재인 제노이우는 엘로이사 엘리나(PSOL 사회주의자유당) 상원의원과 다른 세 명의 하원의원들을 권위주의적으로 축출하기도 했다. 따라서 현재 위기의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잘못된 다수파의 지도, 결과적으로 노동자당 전체와 관련이 있다.
9월 19일, 노동자당은 지도부와 총재를 선출하는 자유-직접선거를 실시했다. 7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이후 어려운 시기 정당을 이끌어 갈 권력을 두고 경합했다. 그들 중 2명은 룰라, 디르세우, 제노이우가 속해 있는 다수파를 대표하며, 그 중 전직 노동부장관 리카르도 베르조니가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다른 다섯 명은 다양한 좌파적 조류를 대표하며 베르조니(1차투표에서 42%의 득표를 했다)와의 결선투표에 나가는 것을 노리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선거 실용주의가 채택되면서 상실된 사회주의적 급진주의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당과 브라질 좌파가 경험한 가장 심각한 정치위기에서도 다수파의 총재 재집권이 여전히 유력한 이런 상황은 다수파의 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좌파내부에서는 속았다거나 난처하다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무토지농민운동(MST)과 같은 사회운동들이 새로운 흐름을 모아내기 시작했지만, 상황은 불리하다. 위기가 노동자당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다음에 어떤 형태의 혁신이 있을지 혹은 없을지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전히 룰라가 승리할 지도 모르지만(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는 있다), 그것은 노동자당과 브라질의 좌파의 역사에서 심각한 반동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며 그 결과는 예측 할 수 없다.
룰라 정부의 ‘연정기반(ally base)’과 노동자당(PT)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로 인하여 최근 브라질은 가장 심각한 정치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 위기는 우익의 비참한 배제 정책, 잘 알려진 우익의 고질적인 부패, 혹은 민주적 권리를 박탈하는 군부독재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좌파 스스로 위기를 낳았다.
그러나 부패 폭로의 이면에는 노동자당이 정권을 잡지 않았던 때부터 시작된 더욱 뿌리가 깊은 과정이 놓여 있다. 그것은 바로 지역 방송, 특히 헤지글로부TV(the Rede Globo TV)가 대부분 조작한 것으로 오늘날 널리 알려진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룰라가 페르난두 콜로르(PRN, 민족재건당)에게 패배한 1989년 이후, 노동자당이 천천히 중도파로 이동해온 과정이다. 2년 반 후에 콜로르 대통령은 부패 스캔들 때문에 (이전에 그에게 권력을 안겼던 바로 그 헤지글로부TV가 지지한) 대중시위에 의해 탄핵을 받고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잡탕의 이타마르 프랑코(PMDB, 브라질민주운동당) 정부가 콜로르를 대신한 후, 룰라는 1994년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하였다. 이번에 그는 헤알계획으로 인플레이션율에 강력 대처했던 프랑코 정부의 전 재무장관인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수(PSDB, 브라질사회민주당)에게 패배하였다. 그 때까지 헤알계획은 엉터리 선거용 계획이라고 불렸지만, 주로 19931996년의 초기에 역사적인 초-인플레이션율을 연 10% 이하로 낮추면서 평균임금가치를 향상시키는데 실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헤알계획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1994년 이후 심화된 사유화 과정이 결합되면서 경제는 해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높은 이자율을 고수해야만 했고, 이는 매우 낮은 인플레이션율 따라서 높은 실업율을 낳았다.
국영기업과 공공서비스 사유화를 수단으로 하고, 상품수출과 경제로부터 국가의 퇴각에 기초한 브라질의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은 1992년, 주되게는 1994년 이후에 이미 위기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지만, 1998년 룰라는 또 다시 카르도수에게 패배했다.
노동자당이 그 때까지 정권을 잡지는 못했지만, 1990년대 지방선거에서는 빠르게 성장하여, 몇몇 지방자치시와 중요한 주에서 승리하였다. 2004년 선거 결과, 노동자당은 3개의 주와 184개의 시에서 집권하고 있으며, 14명의 상원의원과 91명의 하원의원, 151명의 주의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당은 여전히 수적인 크기에 있어서 8번째 당이고, 지방자치시의 34%만을 지배하고 있다. 2004년에 노동자당은 두 개의 가장 중요한 지방정부, 가장 부유하고 커다란 상파울루시와 20년 동안 성공적인 통치를 해 왔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패배했다.
브라질의 지방 정부의 대다수는 브라질민주운동당(PMDB)-22.6%, 자유전선당(PFL)-18.5%, 브라질사회민주당(PSDB)-17.8%, 진보당(PP)-11.1%, 브라질노동당(PTB)-7.2%이 장악하고 있다. 이 상황은 주 수준이나 연방의회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되며, 이러한 다원적 정치체계 속에서 당선 이후 개혁을 실행하려면 좁거나 넓은 연정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연정이 룰라와 노동자당이 역사적으로 좇아온 경로였다.
대연정 정책을 통해서 노동자당은 사회의 온건한 계층의 지지를 얻어 당의 가장 강력한 간판스타인 룰라의 마지막 기회로 이해된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전략을 강화했다.
노동자당은 민주주의(사회정의와 정치윤리)를 위한 역사적 운동과 참여예산제와 같이 구체적이고 민주적인 경험이자 흥미로운 사회 프로그램을 결합했고, 덧붙여 룰라의 이미지에 대한 정치적 선전을 강화하는데 투자를 집중했고, 결국 선거에서 성공했다. 그러나 선거에서의 성공은 (사회주의자의 붉은색에 대비하여) 분홍색 노동자당(Pink PT), 가벼운 룰라(Lula Light)와 같은 표현에서 증명되는 것처럼 급진주의의 상실과 전투성을 더욱 해체하는 미디어 정치에 대한 굴복을 대가로 한 것이었다.
결국 2002년 룰라는 5,200만 표라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주세 세하(카르도수측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선거운동 기간 룰라는 IMF 및 다른 금융기관과 맺은 모든 협정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지켰다. 또한 룰라는 매우 중도적인 강령으로 당선이 되었는데, 이는 룰라가 세부 내용은 제시하지 않은 채 규정하려고 하였던 ‘변화', '새로운 사회협약'에 대한 요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가 부통령으로 섬유산업의 민족주의적 기업인을 결정한 것은 전통적인 중도좌파 그룹인 자유당(PL)과의 깊숙하고 실용적인 동맹을 상징한다. 정부 내에서 [동맹세력에게 배분한] 권력은 룰라가 계획했던 개혁에 대한 의회의 지지로 나타났다. 이것은 거래였다. 한편으로 소위 ‘연정기반’에는 항상 [룰라]정부에 충실한 브라질공산당(PCdoB)과 같은 오랜 동지들도 포함되어 있다.
룰라가 브라질 대통령으로 공표되던 때의 기쁨도 잠시, 사회운동과 시민사회조직을 포함하여 노동자당과 좌파에 속해있는 분파들은 룰라정부 하에서 가능한 사회적 변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노동자당 지도부의 대연정 정책의 결과로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게 된 보수주의자와 좌파 사이의 ‘논쟁에 휘말린 정부’가 될 것이라는 점을 즉시 깨달았다.
그러나 룰라 정부를 압박하도록 민중을 조직하는 일은 대부분 정부 바깥에 있는 비판적인 좌파 분파들에게 쉽지 않은 일임이 드러났다. 룰라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강력한 대중시위가 없을 뿐 아니라 요즘 설문조사에서조차 정부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보다도 더 높은 지지를 받을 정도로 지난 25년의 정치 무대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룰라가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을 받아들였고 어떤 점에서는 인플레이션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이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수행하고 있는 사회 프로그램들이 완벽하지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에서 지난 15년과 비교했을 때 구체적인 진전을 의미하는 것은 확실하다. 대외정책 또한 국제문제에서 자주성의 증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정부의 성과로 인정된다.
룰라가 5,200만 표에서 얻은 지지를 정부정책을 좌익화하는 데 동원하지 않았으며, 보수적인 경제모델을 유지하고 매우 온건한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금융시장을 만족시키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브라질 엘리트들에게 대항하지 않은 포상으로 2006년 재선에서 더 쉽게 승리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개혁을 심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2005년 5월 부패스캔들이 폭로되기까지의 배경이다. 그 후 브라질의 정치적 맥락은 완전히 변했다. 노동자당의 대‘연정기반’의 구성원인 호베르투 제페르손(PTB 브라질노동당)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우편공사 내부의 부패스캔들에 걸려들었고 정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자, 정부 ‘연정기반’과 노동자당이 연루된 전반적인 부패 구조를 대중적으로 폭로하기로 결정했다.
제페르손은 자신의 폭로에 대한 증거를 대지 못했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되면서, 정부가 공사들로부터 돈을 받아 노동자당의 재정위원장에게 주었고 연방의회의 하원의원들이 정부의 개혁에 찬성하도록 문자 그대로 표를 매수하였다는 연쇄적 과정에 대한 제페르손의 폭로가 대부분 [사실로] 확인되기 시작했다. 정부법안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돈을 받은 의원들은 주로 자유당(PL), 진보당(PP), 브라질노동당(PTB) 출신으로, 이 정당들은 모두 2002년 룰라의 대선운동에 참여한 보수정당이다. 대연정의 취약성이 증명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주제 디르세우 정무장관과 주제 제노이누 노동자당 총재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의 사퇴는 아직 그들에 대한 심판이 진행 중이라 해도 유죄임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 활동가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은, 모든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번 스캔들이 1992년 콜로르를 탄핵시켰던 건보다 훨씬 큰 규모이며, 노동자당이 출범한 이래 25년간 지속해온 정치윤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있다. 당이 성장하면서, 지방정부에도 역시 부패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커졌지만, [부패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부패와의 전쟁은 항상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부패 스캔들을 비롯하여 연정정책과 같은 룰라정부가 취했던 정치적 행보가 룰라, 디르세우, 제노이우 및 다른 대표 지도자들이 속해 있고 지난 10년간 노동자당을 지배해 온 당내 세력인 다수파(MF, Campo Majoritario)가 주도한 과정의 결과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경제정책 및 연정정책에 관한 노동자당 내부의 갈등이 더욱 빈번해졌고, 결국 전 총재인 제노이우는 엘로이사 엘리나(PSOL 사회주의자유당) 상원의원과 다른 세 명의 하원의원들을 권위주의적으로 축출하기도 했다. 따라서 현재 위기의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잘못된 다수파의 지도, 결과적으로 노동자당 전체와 관련이 있다.
9월 19일, 노동자당은 지도부와 총재를 선출하는 자유-직접선거를 실시했다. 7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이후 어려운 시기 정당을 이끌어 갈 권력을 두고 경합했다. 그들 중 2명은 룰라, 디르세우, 제노이우가 속해 있는 다수파를 대표하며, 그 중 전직 노동부장관 리카르도 베르조니가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다른 다섯 명은 다양한 좌파적 조류를 대표하며 베르조니(1차투표에서 42%의 득표를 했다)와의 결선투표에 나가는 것을 노리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선거 실용주의가 채택되면서 상실된 사회주의적 급진주의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당과 브라질 좌파가 경험한 가장 심각한 정치위기에서도 다수파의 총재 재집권이 여전히 유력한 이런 상황은 다수파의 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좌파내부에서는 속았다거나 난처하다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무토지농민운동(MST)과 같은 사회운동들이 새로운 흐름을 모아내기 시작했지만, 상황은 불리하다. 위기가 노동자당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다음에 어떤 형태의 혁신이 있을지 혹은 없을지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전히 룰라가 승리할 지도 모르지만(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는 있다), 그것은 노동자당과 브라질의 좌파의 역사에서 심각한 반동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며 그 결과는 예측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