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백홈(Come Back Home)
1.
의식, 그리고 거기에 지배되는 기억은 사람을 속인다. 그것들은 내가 항상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느낌을 준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특성으로 제시한 ‘주체’와 ‘자명성’과 ‘항상-이미’(라는 고유한 시간성) 같은 다소 추상적인 범주는, 아마 이런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연관될 것이다. 즉 자신이 ‘항상-이미’ 이런 식의 ‘주체’였다는 ‘자명성’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데올로기와 영영 거리를 두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운동권’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이 때때로 어디론가 떠나려는 충동을 느끼는 건 아마 이 때문일 것 같다. 낯설음은 진리가 끊임없이 도착하는 (비)장소다. 동시에 거기에는 공포와 불안이라는 위험이 어른거린다. 사람들이 떠나려는 충동을 끝내 발휘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한 후에 슬프게도 전보다 더 완고해져 돌아오는 것, 떠나서 도착한 어떤 장소에서 최초의 낯설음을 쫓아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즉 ‘항상-이미’ 그랬다는 듯) 적응해 사는 것. 이 모두가 사람들이 불안을 회피하는,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는 각각의 방식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항상-다시 떠나려 하며,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2.
곰곰이 돌아보면, 나처럼 불안에 취약하고 모험심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런 내가 운동을 하는 건 참 신기한 일이면서, 걱정되는 일이면서, 절실한 일이다.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에게 ‘마수’를 뻗쳤다가 결국 실패한 한 선배는, 군대에 다녀와서 내가 단대집행부를 하는 걸 보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었다. 운동을 하면서 나는 많이 변했다. 그렇지만 기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았다. 이 때문에 나는 모든 부패의 근원에 있는 보수주의/관료주의 경향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있다. 그러니 운동 편에서 보면 나란 존재가 참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정을 다 알면서도 내가 운동을 계속하는 까닭은? 사실 이기적 동기가 크다. 그나마 운동을 하니까 이 정도지, 다른 곳에 가면 얼마나 굳어질지 모를 일이다. 가끔 대학원 친구들에게 듣는 얘기는 이같은 믿음을 확인해 준다. 운동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진 못할지라도, ‘덜 나쁜’ 상태로 유지해 주는 건 분명하다. 운동은 나에게 욕망과 친구를 선물했고, 이제는 피 흘리지 않고 베어낼 수 없는 1파운드의 살이 되었다. 운동은 내가 필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운동이 절실하다.
3.
지난 9월 10일 나는 ‘소집해제’되었다. 사실 처음에 의식과 기억에 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겨우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당시의 삶이 전혀 실감나지 않고 마치 ‘항상-이미’ 내가 운동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출퇴근하는 공익이었고 아무런 강렬한 경험도 없었던 탓이 크다. 그렇더라도 너무 쉽게 ‘적응’하는 내 모습이 문득 섬뜩하다. 도망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아니, 정말 그럴까?), 혹 내가 ‘운동관료’가 되어 가는 건 아닐까? 전체운동에서 우리 조직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상근비 20만원 따위의 취약한 물적 토대를 고려하면(월급 20만원 받는 관료?), ‘매니아’가 되어 가는 게 아닐까 라고 묻는 편이 더 정확할 테지만 말이다. 심지어 ‘소수파’로서 겪는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나, 항상 비현실적이고 과도한 요구를 제시한 후 상대방이 그것을 거부하는 데서 쾌락을 찾는 ‘히스테리’ 환자...?
정확히 위와 같은 표현은 아니었겠지만 그동안 다른 이들과 나 자신으로부터 제기되었던 의혹들을 돌파하는 것이 당분간 나의 윤리적?정치적 과제다. 이는 그동안 나 자신이 별다른 고민 없이 사용했던 ‘대중운동’이라는 말을 엄격한 의미에서 ‘문제’로 대접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이는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리라. 내가 그런 ‘변덕’(變德)을 발휘할 수 있을까?
4.
근무 중에 짬을 내 책도 읽고, 퇴근 후엔 사적 자유를 누린다는 점에서 공익을 현역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적 자유를 박탈당한 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의 상태에서, 쉴 새 없이 닥쳐오는 사건들을 만나야 하는 것. 그 나름으로 괴로웠다.
김주익 열사가 자결하고 이용석 열사가 분신한 후(그날 열사는 내 동료들의 눈앞에서 분신했다고 한다) 2003년 노동자대회에서 노동자들이 불같은 분노를 토해냈을 때, ‘와이키키 브라더스’ 박일수 열사의 사연을 어느 신문에서 읽었을 때, 노무현이 파병방침을 재확인한 후 김선일씨가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들은 그 비참한 날 베트남전을 다룬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 ‘위도 17도’를 차마 보지 못한 채 흥국빌딩 아트큐브에서 광화문으로 걸어가면서 영화건 현실이건 전쟁으로 가득 차 있다는 현기증을 느꼈을 때, 탄핵폭풍에 휩쓸려 민중운동의 반신자유주의 전선이 유실되는 바로 그 거리에 선배들과 동기들과 후배들이 아마 졸업 후 거의 처음으로 나서는 걸 볼 때, 58일간 단식한 김재복 수사의 퀭한 눈빛을 마주해야 할 때, 그리고 내가 갈 수 없고 가지 못한 모든 곳에서, 나는 무력한 구경꾼일 뿐이었다. 내 짧은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절 중 하나였다. 비극이 펼쳐지는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극장을 떠나지도 못하는 관객이, 비극의 인물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는 고통. 그러나 그것이 어찌 나만의 얘기겠는가. 혹시 그 경계선의 고통 때문에 사람들은 운동을 하거나, 아예 정리하는 것 아닐까. 그때, 그리고 아마 지금 나의 선배들과 동기들과 후배들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녀들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까.
5.
지난 2년 동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정치 활동은 독서뿐이었다. 직원들이 딱히 나를 감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귀찮은 간섭을 피하기 위해 영어책과 순정철학, 문학작품을 주로 읽었다. 학교 다닐 땐 선전전할 때 빼고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도서관에서 후배 학생증으로 책을 대출하고, 고시생들 틈에 끼어 늦게까지 읽기도 했다. 퇴근 후에는 잠깐이긴 하지만 좋은 영화도 찾아 다녔고 정신분석과 윤리학을 다루는 세미나에도 참가했으며 거의 10년 만에 드라마에 탐닉하기도 했다. 항상 일에 치여서 사는 활동가들이 좀처럼 누리지 못하는 안식년이라는 호사를 누린 셈이다.
그동안 겪지 못한 낯선 체험은 10년 가까이 내가 속했던 운동을 거리를 두고 살펴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휴식은 새로운 욕망이 자라나게 했는데, 그건 내가 아마 대학교 2학년 때쯤 그 단어를 처음 듣고 난 후 항상 두려워하며 대면을 회피해 왔던 ‘평생운동’이라는 말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저 사람의 운동이 젊은 날의 치기인지, 긴 호흡을 갖는 진정성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또는 나 자신이 그렇게 믿어 온) 서른. 이제 나도 낼 모레면 그 나이에 진입한다. 다른 모든 가능성을 뒤로하고 운동을 선택했으니, 나의 ‘직업’으로 운동에 전념하고 싶다.
결의가 굳어지는 이 때가, 그러나 타락이 시작되는 가장 위험한 때이기도 할 것이다. 직업이란 말에는 ‘이립’(而立)의 미더움이 있지만, 동시에 보수주의와 관료주의의 악취가 도사리기 때문이다. 다른 일 하기엔 이미 늦었으니 이거나 하자, 할 줄 아는 게 이것 밖에 없으니 여기나 있자, 다른 데서 출세하긴 글렀으니 여기서 ‘닭의 대가리’라도 되자 등등. 그 훌륭했던 활동가들이 비리사건 등 불명예스런 부패에 휩싸이는 것은, ‘평생운동’이라는 쉽지 않은 결의에 필연적으로 들러붙는 저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문제에 (적어도 개인적으로)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하다가, 지금까지 한번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자유주의 공/사 구별 기획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공적 활동과 양립할 수 있는, 또는 공적 활동 주위를 항상-아직 배회하는 타락과 권력욕(‘지배하려는 욕망’)을 상쇄해 줄 수 있는 그런 사생활. 물론 이걸 여전히 ‘사생활’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공적 활동과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워커홀릭’이 모든 타락의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와 구별되는 욕망과 품성을 활동가 스스로 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요지다. 지난 2년이 나에게 갖는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는, 내가 평생동안 계발해야 할 완전히 공적이지도 완전히 사적이지도 않은 욕망의 맹아가 조그맣게 싹텄다는 점이다.
6.
97년 한총련 사태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운동을 정리하던 선배들에 대한 미움과 오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그/녀들과 좀더 여유 있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나와는 다른 시간성을 체험하는 그/녀들 의식 어디에는, 그때 나와 그/녀들을 하나로 묶었던 기억이 흩어져 있을 것이고, 현재의 삶을 넘어 새로운 공간에서 우리를 다시 묶어 줄 낯설음의 욕망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녀들과 다시 만나, 당신들이 호명한 그 주체가 이렇게 컸고 이렇게 산다는 것, 어쩌면 당신들이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나에게 건넨 그 목소리에 이런 진실이 담겨 있었다는 것, 내가 당신들에게 되돌려주는 이 목소리를 받아들여 다른 세계를 함께 열어가자는 것. 이와 같은 일종의 ‘고아 환상’이 내 운동의 가장 내밀한 욕망이자 환상이다. 하지만 이 욕망을 실현하려면 나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진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나에게 이런 욕망을, 따라서 이런 삶을 선물해 준 그/녀들이 오늘 무척 보고 싶다.
의식, 그리고 거기에 지배되는 기억은 사람을 속인다. 그것들은 내가 항상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느낌을 준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특성으로 제시한 ‘주체’와 ‘자명성’과 ‘항상-이미’(라는 고유한 시간성) 같은 다소 추상적인 범주는, 아마 이런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연관될 것이다. 즉 자신이 ‘항상-이미’ 이런 식의 ‘주체’였다는 ‘자명성’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데올로기와 영영 거리를 두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운동권’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이 때때로 어디론가 떠나려는 충동을 느끼는 건 아마 이 때문일 것 같다. 낯설음은 진리가 끊임없이 도착하는 (비)장소다. 동시에 거기에는 공포와 불안이라는 위험이 어른거린다. 사람들이 떠나려는 충동을 끝내 발휘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한 후에 슬프게도 전보다 더 완고해져 돌아오는 것, 떠나서 도착한 어떤 장소에서 최초의 낯설음을 쫓아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즉 ‘항상-이미’ 그랬다는 듯) 적응해 사는 것. 이 모두가 사람들이 불안을 회피하는,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는 각각의 방식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항상-다시 떠나려 하며,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2.
곰곰이 돌아보면, 나처럼 불안에 취약하고 모험심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런 내가 운동을 하는 건 참 신기한 일이면서, 걱정되는 일이면서, 절실한 일이다.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에게 ‘마수’를 뻗쳤다가 결국 실패한 한 선배는, 군대에 다녀와서 내가 단대집행부를 하는 걸 보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었다. 운동을 하면서 나는 많이 변했다. 그렇지만 기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았다. 이 때문에 나는 모든 부패의 근원에 있는 보수주의/관료주의 경향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있다. 그러니 운동 편에서 보면 나란 존재가 참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정을 다 알면서도 내가 운동을 계속하는 까닭은? 사실 이기적 동기가 크다. 그나마 운동을 하니까 이 정도지, 다른 곳에 가면 얼마나 굳어질지 모를 일이다. 가끔 대학원 친구들에게 듣는 얘기는 이같은 믿음을 확인해 준다. 운동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진 못할지라도, ‘덜 나쁜’ 상태로 유지해 주는 건 분명하다. 운동은 나에게 욕망과 친구를 선물했고, 이제는 피 흘리지 않고 베어낼 수 없는 1파운드의 살이 되었다. 운동은 내가 필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운동이 절실하다.
3.
지난 9월 10일 나는 ‘소집해제’되었다. 사실 처음에 의식과 기억에 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겨우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당시의 삶이 전혀 실감나지 않고 마치 ‘항상-이미’ 내가 운동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출퇴근하는 공익이었고 아무런 강렬한 경험도 없었던 탓이 크다. 그렇더라도 너무 쉽게 ‘적응’하는 내 모습이 문득 섬뜩하다. 도망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아니, 정말 그럴까?), 혹 내가 ‘운동관료’가 되어 가는 건 아닐까? 전체운동에서 우리 조직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상근비 20만원 따위의 취약한 물적 토대를 고려하면(월급 20만원 받는 관료?), ‘매니아’가 되어 가는 게 아닐까 라고 묻는 편이 더 정확할 테지만 말이다. 심지어 ‘소수파’로서 겪는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나, 항상 비현실적이고 과도한 요구를 제시한 후 상대방이 그것을 거부하는 데서 쾌락을 찾는 ‘히스테리’ 환자...?
정확히 위와 같은 표현은 아니었겠지만 그동안 다른 이들과 나 자신으로부터 제기되었던 의혹들을 돌파하는 것이 당분간 나의 윤리적?정치적 과제다. 이는 그동안 나 자신이 별다른 고민 없이 사용했던 ‘대중운동’이라는 말을 엄격한 의미에서 ‘문제’로 대접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이는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리라. 내가 그런 ‘변덕’(變德)을 발휘할 수 있을까?
4.
근무 중에 짬을 내 책도 읽고, 퇴근 후엔 사적 자유를 누린다는 점에서 공익을 현역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적 자유를 박탈당한 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의 상태에서, 쉴 새 없이 닥쳐오는 사건들을 만나야 하는 것. 그 나름으로 괴로웠다.
김주익 열사가 자결하고 이용석 열사가 분신한 후(그날 열사는 내 동료들의 눈앞에서 분신했다고 한다) 2003년 노동자대회에서 노동자들이 불같은 분노를 토해냈을 때, ‘와이키키 브라더스’ 박일수 열사의 사연을 어느 신문에서 읽었을 때, 노무현이 파병방침을 재확인한 후 김선일씨가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들은 그 비참한 날 베트남전을 다룬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 ‘위도 17도’를 차마 보지 못한 채 흥국빌딩 아트큐브에서 광화문으로 걸어가면서 영화건 현실이건 전쟁으로 가득 차 있다는 현기증을 느꼈을 때, 탄핵폭풍에 휩쓸려 민중운동의 반신자유주의 전선이 유실되는 바로 그 거리에 선배들과 동기들과 후배들이 아마 졸업 후 거의 처음으로 나서는 걸 볼 때, 58일간 단식한 김재복 수사의 퀭한 눈빛을 마주해야 할 때, 그리고 내가 갈 수 없고 가지 못한 모든 곳에서, 나는 무력한 구경꾼일 뿐이었다. 내 짧은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절 중 하나였다. 비극이 펼쳐지는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극장을 떠나지도 못하는 관객이, 비극의 인물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는 고통. 그러나 그것이 어찌 나만의 얘기겠는가. 혹시 그 경계선의 고통 때문에 사람들은 운동을 하거나, 아예 정리하는 것 아닐까. 그때, 그리고 아마 지금 나의 선배들과 동기들과 후배들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녀들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까.
5.
지난 2년 동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정치 활동은 독서뿐이었다. 직원들이 딱히 나를 감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귀찮은 간섭을 피하기 위해 영어책과 순정철학, 문학작품을 주로 읽었다. 학교 다닐 땐 선전전할 때 빼고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도서관에서 후배 학생증으로 책을 대출하고, 고시생들 틈에 끼어 늦게까지 읽기도 했다. 퇴근 후에는 잠깐이긴 하지만 좋은 영화도 찾아 다녔고 정신분석과 윤리학을 다루는 세미나에도 참가했으며 거의 10년 만에 드라마에 탐닉하기도 했다. 항상 일에 치여서 사는 활동가들이 좀처럼 누리지 못하는 안식년이라는 호사를 누린 셈이다.
그동안 겪지 못한 낯선 체험은 10년 가까이 내가 속했던 운동을 거리를 두고 살펴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휴식은 새로운 욕망이 자라나게 했는데, 그건 내가 아마 대학교 2학년 때쯤 그 단어를 처음 듣고 난 후 항상 두려워하며 대면을 회피해 왔던 ‘평생운동’이라는 말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저 사람의 운동이 젊은 날의 치기인지, 긴 호흡을 갖는 진정성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또는 나 자신이 그렇게 믿어 온) 서른. 이제 나도 낼 모레면 그 나이에 진입한다. 다른 모든 가능성을 뒤로하고 운동을 선택했으니, 나의 ‘직업’으로 운동에 전념하고 싶다.
결의가 굳어지는 이 때가, 그러나 타락이 시작되는 가장 위험한 때이기도 할 것이다. 직업이란 말에는 ‘이립’(而立)의 미더움이 있지만, 동시에 보수주의와 관료주의의 악취가 도사리기 때문이다. 다른 일 하기엔 이미 늦었으니 이거나 하자, 할 줄 아는 게 이것 밖에 없으니 여기나 있자, 다른 데서 출세하긴 글렀으니 여기서 ‘닭의 대가리’라도 되자 등등. 그 훌륭했던 활동가들이 비리사건 등 불명예스런 부패에 휩싸이는 것은, ‘평생운동’이라는 쉽지 않은 결의에 필연적으로 들러붙는 저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문제에 (적어도 개인적으로)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하다가, 지금까지 한번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자유주의 공/사 구별 기획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공적 활동과 양립할 수 있는, 또는 공적 활동 주위를 항상-아직 배회하는 타락과 권력욕(‘지배하려는 욕망’)을 상쇄해 줄 수 있는 그런 사생활. 물론 이걸 여전히 ‘사생활’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공적 활동과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워커홀릭’이 모든 타락의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와 구별되는 욕망과 품성을 활동가 스스로 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요지다. 지난 2년이 나에게 갖는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는, 내가 평생동안 계발해야 할 완전히 공적이지도 완전히 사적이지도 않은 욕망의 맹아가 조그맣게 싹텄다는 점이다.
6.
97년 한총련 사태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운동을 정리하던 선배들에 대한 미움과 오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그/녀들과 좀더 여유 있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나와는 다른 시간성을 체험하는 그/녀들 의식 어디에는, 그때 나와 그/녀들을 하나로 묶었던 기억이 흩어져 있을 것이고, 현재의 삶을 넘어 새로운 공간에서 우리를 다시 묶어 줄 낯설음의 욕망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녀들과 다시 만나, 당신들이 호명한 그 주체가 이렇게 컸고 이렇게 산다는 것, 어쩌면 당신들이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나에게 건넨 그 목소리에 이런 진실이 담겨 있었다는 것, 내가 당신들에게 되돌려주는 이 목소리를 받아들여 다른 세계를 함께 열어가자는 것. 이와 같은 일종의 ‘고아 환상’이 내 운동의 가장 내밀한 욕망이자 환상이다. 하지만 이 욕망을 실현하려면 나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진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나에게 이런 욕망을, 따라서 이런 삶을 선물해 준 그/녀들이 오늘 무척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