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진, [쿨 핫]
유시진 만화는 어렵다. 도대체 추리물도 아닌 만화를 읽으면서 왜 이렇게 머리를 써야 하는지 알 수 없기도 하지만, 한 페이지 넘기기 만만치 않을 때가 많다. 그나마 [쿨핫]은 배경이 내가 뭔가를 상상해야 하는 공간이 아니라, 한국에 흔하고 흔한 고등학교라는 점이 위안이랄까. 아직 완간도 안 되었고 매체가 하도 바뀌어서 과연 완결될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우면서도 사서 보는 건, 그만큼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얘기는 이렇다.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집의 딸로 태어난 이루다. 그의 오빠 이루리. 같은 반의 김동경, 독서토론반 가디록의 선후배들. 김동경 주변의 남자애들. 이들이 돌아가면서 1~2년간 공유했던, 그리고 각자 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각 트랙을 이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신체조건이나 능력 등에서 우성인자들인 점은 초반에 약간 아쉬웠다. 뭐, 주된 공간 자체가 성적 상위 20% 이내만 받는다는 독서클럽이니까. 그런데 이런 사회적 주류들을 모아놓고 벌이는 얘기는 생소하게도 개체성에 대한 인정, 사회적 통념 혹은 다수의 폭력에 대한 분노, 그리고 상처 같은 것들이다.
이루다는 여고마다 한두 명씩 꼭 있게 마련인, 키 크고 남성적인 인물이다. 이런 아이들은 다른 여자아이들의 극단적인 사랑이나 질시를 받는다. 어떤 쪽이든 항상 관심의 대상이게 마련인데, 불행하게도 편한 우정을 누리기는 어려운 처지다. 아이의 외양이 너무 강조되어 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아이의 내면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아이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남자보다도 (더 남자 같아서) 멋있어, 혹은 무슨 여자애가 저래… 이루다는 이런 잣대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무심하게 흘리는 쪽으로 마음을 잡는다. 그러다 정말 사귀고 싶은 친구가 생기자 어쩔 줄 몰라 한다. 한 번도 타인에게 먼저 관심을 둔 적이 없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런 면은 학교 용모 수려하고 인간성 좋은 선우람과도 비슷하다. 항상 남을 배려하는 이 아이는, 아예 언제나 웃는 표정을 데드마스크처럼 얼굴에 담고 다닌다. 잘생긴 람이, 착한 람이… 루다가 무심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편이라면, 람이는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모든 이를 기쁘게 하려고 한다. 그러다 선배 이루리를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정신없었겠나? 게다가 사회적으로 순진하고 착한 이 아이에게는 불행(!)하게도, 짝사랑에 동성애였으니…
다수의 폭력에 대해 가장 민감한 사람은 아마 김동경일 것이다. 유명감독을 아버지로 두었지만 그로 인해 파멸한 엄마를 기억하는 이 아이는, 남성적인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남성적인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매우 다양해진다. 무조건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권위, 자기와 다르면 짓뭉개야 하는 독선… 심지어 별 생각 없이 단순하게 살면서 떠받들어지는 데 '익숙'한 것으로 보이는 이루다 같은 인물도 그 영역에 들어간다. 이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무시하고 남과의 관계를 스스로 닫아버리는, 같은 반에 있었다면 매우 재수 없어 했을 인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존중할 줄 안다는 점에서는 용기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음…. 인물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이 정도로 대충.)
내가 이 만화의 미덕으로 삼는 것은 대충 나열해보면 이렇다. 첫째, 사회적 통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 사회적 통념이란 앞서 말했듯이 거의 전적으로 남성 중심적 잣대이다. 주요인물의 주변 사람들은 여자는 다소곳하고 애교가 있어야 하고, 남자는 박력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주요 인물들의 '반사회적'인 면이 집중 부각된다. 이루다는 여성적이지 않고, 김동경은 절대 애교가 없으며, 선우람은 남자선배를 좋아하고, 권재련은 가치관이 분명하고 매우 똑똑한, 그래서 (특히 남자들이) 어려워하는 유형이다. 금진성은 여자애보다 더 예쁜 외모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반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다. 이들이 아무리 잘났어도 이런 '결격사유'들이 있기에 이들의 사회적 관계는 행복하기 어렵다. 다수의 폭력을 각오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지키든가, 내면을 철저히 숨기면서 관계를 유지하든가 해야 한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사회적 통념이란 게 40~50대 중산층 남성 '가장'의 입장일 터이니, 말이 좋아 '통념'이지 사회의 절대다수가 이 통념의 주인이 아닌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한줌의 주류에 줄이라도 대기 위해서 자기 몸에 억지로 남의 기준을 구겨넣은 것일 뿐. 매일매일 스스로를 검열하여 사회적으로 용인될 행동을 골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만화는 누구나 (따라서 자신도) 통념에 상처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도 대체로 평균 이상으로 보이는 인물들을 통해.
한편으로 이 만화는 같은 시기와 공간을 다루다 보니 같은 상황이 인물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그게 사실은 어떤 의도였는지를 다시 보여주는 장면이 많다. 그때마다 '입장'이라는 것이, 통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느끼게 된다. 혹은 생각 없이 통념대로 하는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를. 주류도 아니면서 주류인 줄 아는 이들의 위선이 왜 나쁜지를.
둘째, '착하다' '원만하다'는 것이 사실은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조차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개인적으로 언젠가부터 착한 사람들을 불편해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착한'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하는 경우 먼저 자책하고 피해도 기꺼이 감당해버려서, 내가 분노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내 기분이 안 좋은 게 '착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의 옹졸함 때문이 아닐까 의심까지 하게 된다. 결과도 안 좋은데 화도 못 내게 되었으니 불편할 밖에.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착하고 원만해서 누구에게나 친절한 유형이다. 선우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좋아서, 여자애들의 선물공세를 받고, 남자애들의 첫 키스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당한' 후에 불쾌해하면서도 장난이려니, 한다. 남들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단련시킨 이 아이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며 수동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다.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 없어도 자신의 애정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일까? 선우람 주변의 몇몇 아이는 누군가가 애정도 없이 자신에게 그저 맞춰주는 것을 '배려'나 '친절'이 아니라 '모욕'이라고 인식한다. 선우람이 인기 좋은 게 뭐가 문제냐는 질문에 권재련은 "본인이 감당 못하고 책임도 안 지니 문제지. 사람들한테 상처만 주게 된다구."라며 '무한무차별주의'에 직격탄을 날린다. 착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서도 내가 피해자였던 것을 깨닫지 못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아,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나만 그런가?) 착한 사람은 무조건 봐주고 들어가는 많고 많은 착한 이야기들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용감한 주제다.
셋째, 이 만화는 다양한 사람을 존중하는 구성을 취한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개인적으로 나는 자신이 80~90% 이상 공감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 관용을 터득하고 싶다. 그게 내가 이 만화를 시작하기 전에 잡아놓은 포인트고, 그에 따른 전개방식과 연출방식을 택했다"고 했다. 매 트랙마다 중심인물이 다른 이 만화는, 형식에서부터 오직 한 명만을 위한 이야기를 거부한다. 그뿐 아니라 트랙별 중심인물은 흔한 만화주인공처럼 착하고 약하고 상처받은 인물이어서 감정이입이 막 되는 유형들로만 구성되지도 않았다. 각기 다양한 인물을 다루다 보니 평생 조연만 할 팔자들이 주연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봐도 현실에서는 왕따일 수밖에 없어 보이는 김동경이 그렇고, 완벽하고 무뚝뚝한데다 가정사의 아픔조차 없는 김준휘가 그렇다. 이런 인물들은 쉽게 동화되기 어렵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꽤 고생스러울 텐데, 유시진은 이들의 내면도 들여다보려 애쓴다. 개인적으로는 잘난 마초의 대표격인 정지환의 트랙은 어떻게 끌어갈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뭐 가벼운 작가는 아니니 알아서 잘 하겠지.
뭔가 체계적으로 느낀 것처럼 적으려 했지만,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결국 관용을 주창하는 웬만한 인문서보다 절절했다는 것이고, 고등학교 때 보았으면 정말 획기적이었겠다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하고도 한참 후에 보게 된 나로서는 좀 늦게 읽은 감도 있지만, 여전히 통념에 절어 사는 걸 보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느끼고 다양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제목이 쿨 핫인데, 아무리 봐도 등장인물 중 가장 쿨한 사람은 이루리 이루다의 어머니이지 않을까 싶다. 애 둘을(게다가 그 중 하나는 아들인데) 저렇게 자유롭고 넓은 인간으로 키우고 본인 또한 그렇게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터인데, 아무리 만화 속 설정이지만 본받을 인물이지 싶다.
얘기는 이렇다.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집의 딸로 태어난 이루다. 그의 오빠 이루리. 같은 반의 김동경, 독서토론반 가디록의 선후배들. 김동경 주변의 남자애들. 이들이 돌아가면서 1~2년간 공유했던, 그리고 각자 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각 트랙을 이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신체조건이나 능력 등에서 우성인자들인 점은 초반에 약간 아쉬웠다. 뭐, 주된 공간 자체가 성적 상위 20% 이내만 받는다는 독서클럽이니까. 그런데 이런 사회적 주류들을 모아놓고 벌이는 얘기는 생소하게도 개체성에 대한 인정, 사회적 통념 혹은 다수의 폭력에 대한 분노, 그리고 상처 같은 것들이다.
이루다는 여고마다 한두 명씩 꼭 있게 마련인, 키 크고 남성적인 인물이다. 이런 아이들은 다른 여자아이들의 극단적인 사랑이나 질시를 받는다. 어떤 쪽이든 항상 관심의 대상이게 마련인데, 불행하게도 편한 우정을 누리기는 어려운 처지다. 아이의 외양이 너무 강조되어 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아이의 내면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아이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남자보다도 (더 남자 같아서) 멋있어, 혹은 무슨 여자애가 저래… 이루다는 이런 잣대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무심하게 흘리는 쪽으로 마음을 잡는다. 그러다 정말 사귀고 싶은 친구가 생기자 어쩔 줄 몰라 한다. 한 번도 타인에게 먼저 관심을 둔 적이 없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런 면은 학교 용모 수려하고 인간성 좋은 선우람과도 비슷하다. 항상 남을 배려하는 이 아이는, 아예 언제나 웃는 표정을 데드마스크처럼 얼굴에 담고 다닌다. 잘생긴 람이, 착한 람이… 루다가 무심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편이라면, 람이는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모든 이를 기쁘게 하려고 한다. 그러다 선배 이루리를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정신없었겠나? 게다가 사회적으로 순진하고 착한 이 아이에게는 불행(!)하게도, 짝사랑에 동성애였으니…
다수의 폭력에 대해 가장 민감한 사람은 아마 김동경일 것이다. 유명감독을 아버지로 두었지만 그로 인해 파멸한 엄마를 기억하는 이 아이는, 남성적인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남성적인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매우 다양해진다. 무조건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권위, 자기와 다르면 짓뭉개야 하는 독선… 심지어 별 생각 없이 단순하게 살면서 떠받들어지는 데 '익숙'한 것으로 보이는 이루다 같은 인물도 그 영역에 들어간다. 이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무시하고 남과의 관계를 스스로 닫아버리는, 같은 반에 있었다면 매우 재수 없어 했을 인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존중할 줄 안다는 점에서는 용기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음…. 인물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이 정도로 대충.)
내가 이 만화의 미덕으로 삼는 것은 대충 나열해보면 이렇다. 첫째, 사회적 통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 사회적 통념이란 앞서 말했듯이 거의 전적으로 남성 중심적 잣대이다. 주요인물의 주변 사람들은 여자는 다소곳하고 애교가 있어야 하고, 남자는 박력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주요 인물들의 '반사회적'인 면이 집중 부각된다. 이루다는 여성적이지 않고, 김동경은 절대 애교가 없으며, 선우람은 남자선배를 좋아하고, 권재련은 가치관이 분명하고 매우 똑똑한, 그래서 (특히 남자들이) 어려워하는 유형이다. 금진성은 여자애보다 더 예쁜 외모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반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다. 이들이 아무리 잘났어도 이런 '결격사유'들이 있기에 이들의 사회적 관계는 행복하기 어렵다. 다수의 폭력을 각오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지키든가, 내면을 철저히 숨기면서 관계를 유지하든가 해야 한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사회적 통념이란 게 40~50대 중산층 남성 '가장'의 입장일 터이니, 말이 좋아 '통념'이지 사회의 절대다수가 이 통념의 주인이 아닌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한줌의 주류에 줄이라도 대기 위해서 자기 몸에 억지로 남의 기준을 구겨넣은 것일 뿐. 매일매일 스스로를 검열하여 사회적으로 용인될 행동을 골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만화는 누구나 (따라서 자신도) 통념에 상처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도 대체로 평균 이상으로 보이는 인물들을 통해.
한편으로 이 만화는 같은 시기와 공간을 다루다 보니 같은 상황이 인물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그게 사실은 어떤 의도였는지를 다시 보여주는 장면이 많다. 그때마다 '입장'이라는 것이, 통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느끼게 된다. 혹은 생각 없이 통념대로 하는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를. 주류도 아니면서 주류인 줄 아는 이들의 위선이 왜 나쁜지를.
둘째, '착하다' '원만하다'는 것이 사실은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조차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개인적으로 언젠가부터 착한 사람들을 불편해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착한'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하는 경우 먼저 자책하고 피해도 기꺼이 감당해버려서, 내가 분노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내 기분이 안 좋은 게 '착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의 옹졸함 때문이 아닐까 의심까지 하게 된다. 결과도 안 좋은데 화도 못 내게 되었으니 불편할 밖에.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착하고 원만해서 누구에게나 친절한 유형이다. 선우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좋아서, 여자애들의 선물공세를 받고, 남자애들의 첫 키스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당한' 후에 불쾌해하면서도 장난이려니, 한다. 남들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단련시킨 이 아이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며 수동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다.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 없어도 자신의 애정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일까? 선우람 주변의 몇몇 아이는 누군가가 애정도 없이 자신에게 그저 맞춰주는 것을 '배려'나 '친절'이 아니라 '모욕'이라고 인식한다. 선우람이 인기 좋은 게 뭐가 문제냐는 질문에 권재련은 "본인이 감당 못하고 책임도 안 지니 문제지. 사람들한테 상처만 주게 된다구."라며 '무한무차별주의'에 직격탄을 날린다. 착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서도 내가 피해자였던 것을 깨닫지 못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아,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나만 그런가?) 착한 사람은 무조건 봐주고 들어가는 많고 많은 착한 이야기들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용감한 주제다.
셋째, 이 만화는 다양한 사람을 존중하는 구성을 취한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개인적으로 나는 자신이 80~90% 이상 공감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 관용을 터득하고 싶다. 그게 내가 이 만화를 시작하기 전에 잡아놓은 포인트고, 그에 따른 전개방식과 연출방식을 택했다"고 했다. 매 트랙마다 중심인물이 다른 이 만화는, 형식에서부터 오직 한 명만을 위한 이야기를 거부한다. 그뿐 아니라 트랙별 중심인물은 흔한 만화주인공처럼 착하고 약하고 상처받은 인물이어서 감정이입이 막 되는 유형들로만 구성되지도 않았다. 각기 다양한 인물을 다루다 보니 평생 조연만 할 팔자들이 주연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봐도 현실에서는 왕따일 수밖에 없어 보이는 김동경이 그렇고, 완벽하고 무뚝뚝한데다 가정사의 아픔조차 없는 김준휘가 그렇다. 이런 인물들은 쉽게 동화되기 어렵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꽤 고생스러울 텐데, 유시진은 이들의 내면도 들여다보려 애쓴다. 개인적으로는 잘난 마초의 대표격인 정지환의 트랙은 어떻게 끌어갈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뭐 가벼운 작가는 아니니 알아서 잘 하겠지.
뭔가 체계적으로 느낀 것처럼 적으려 했지만,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결국 관용을 주창하는 웬만한 인문서보다 절절했다는 것이고, 고등학교 때 보았으면 정말 획기적이었겠다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하고도 한참 후에 보게 된 나로서는 좀 늦게 읽은 감도 있지만, 여전히 통념에 절어 사는 걸 보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느끼고 다양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제목이 쿨 핫인데, 아무리 봐도 등장인물 중 가장 쿨한 사람은 이루리 이루다의 어머니이지 않을까 싶다. 애 둘을(게다가 그 중 하나는 아들인데) 저렇게 자유롭고 넓은 인간으로 키우고 본인 또한 그렇게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터인데, 아무리 만화 속 설정이지만 본받을 인물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