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롭던 시간을 기억합니다
어머니들이 쓰는 민가협 역사
1990년 아들 이창규(동국대 89학번)의 구속으로 민가협 활동을 시작한 서경순 회원은 민가협을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 인권운동의 현장에서 세상을 바꾸는 어머니 인권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데모는 않겠다던 막내아들
1980년 광주 오월 항쟁에서 군사정권은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언론을 장악하였습니다. 서울의 봄, 전국학원 가에서 수많은 학생들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군사정권 물러나라”며 거리로 나왔고 서울역, 종로, 명동, 을지로 등 온 서울에도 최루탄이 난무하고 수많은 아들딸들이 백골단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곤봉에 맞고 군홧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눈에서 열이나 차마 눈뜨고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데모에 가담하는가 싶더니 그 때부터 집에 자주 들어오지도 않더군요. 어느 날이었지요. 집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당시 고등학생이던 막내 창규가 내 곁에 다가오더니 “엄마 나는 대학가면 언니들처럼 데모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할께요” 했더랍니다. 그러던 막내 창규가 끌려간 그날은 제가 교회에 가서 밤새 기도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집안이 이상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엄마 놀라지 마세요” 하는 딸에게 빨리 말해보라고 했더니 창규가 어제 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하더군요. 그때가 바로 1990년 1월이었지요. 대학 2학년생이었던 창규는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에서 선봉대로 나섰다가 경찰의 사진에 찍히는 바람에 집시법 위반으로 연행되었다는 겁니다. 허겁지겁, 창규가 끌려갔다는 중부경찰서로 가서 면회를 했지요.
엄마! 면회오지 말고 민가협으로 가세요
창규는 엄마를 보더니 “엄마, 이제 아들 면회는 오지 말고 민가협에 가서 거기서 어머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시면 잘 될 겁니다” 라고 하더군요. 그래 집으로 돌아와서 딸들하고 함께 찾아간 곳이 민가협이었습니다. 그때는 민가협하고 유가협이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가서 보니 이소선 어머님께서 절 보시고는 오히려 위로를 하더군요. 민가협의 선배 어머니들은 저를 보더니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전 그때부터 열심히 민가협으로 출퇴근하듯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얻고 그랬지요. 자식을 감옥에 둔 부모들은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떨리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런데 선배 어머니들은 정의를 위해서는 당신들 몸도 아끼지 않으시고 열심히 투쟁하는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들이었습니다. 투쟁 장소에서 열심히 싸우시는 어머니들 속에서도 아주 투쟁을 열심히 잘하시는 어머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임기란 어머니입니다. 선배로서 후배를 사랑하고 후배를 아낄 줄 아시는 훌륭하신 어머님이시죠. 그런 선배 어머니들이 그 때부터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힘인지도 모르겠어요.
부러진 갈빗대 치료비 50만원
1990년은 4당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의 삼당 야합으로 전국은 어수선해지고 양심수는 15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있을 때 여의도 평민당 당사에서 농성장을 차리고는 20일 동안 국회 앞에서 양심수를 다 내놓으라고 싸웠습니다. 지금은 전경이 있지만 그때는 백골단더러 우리를 가로막게 했습니다. 지금이나 예나 어김없이 막습니다. 거기를 뚫어 들어가다 백골단 군홧발에 옆구리가 걷어차였습니다. 숨이 꽉 막히는데도 놈들은 인정이 없었습니다. 마구 끌어다가 닭장차에 태우면서도 인정도 사정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들은 하루도 거른 적 없이 다시 또 농성장으로 모이곤 했지요. 4일째 되던 날인가 농성장에 가려고 나서는데 너무 아파서 바로 병원에 갔습니다. 엑스레이 촬영을 했더니 갈빗대가 2대나 나갔다더군요. 그래도 그날도 파스 붙이고 농성장에 갔습니다. 그리고 민가협 어머니들과 영등포 경찰서로 쳐들어갔습니다. 들어가려고 한다 하니 경찰이 어디 우리를 들어오라고 합니까? 하지만 싸워서 결국은 들어갔습니다. 몇 번이고 싸워서 결국은 치료비 50만원을 받아 냈습니다. 그래서 민가협에 30만원을 내놓고 나머지는 이리저리 하다 보니 10만원이 남더군요. 그래 어머니들이 치료비 받겠다고 그랬겠습니까? 그저 그 놈들 혼내주려고 했던 거죠. 지금은 나이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몸으로 부대끼며 싸웠던 탓인지 다시 온몸이 너무 아파서 견디기 어려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람을 갖고 살려합니다.
거리에서 경대가 죽었단 소식을 들었는데…
1991년 4월 26일. 그날도 민가협 어머니들은 매캐한 최루탄이 하늘 창공을 뒤 덮던 길거리를 헤매다가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전경들의 곤봉에 맞아 죽었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바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보니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경대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을 그렇게 보낸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우리는 그 날들을 함께 보냈지요. 민가협 엄마로서 우린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열사들의 부모님을 볼 때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경대를 비롯하여 그 후로도 16명 꽃다운 젊은 아들딸들을 열사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경대가 맞아죽고 그 다음 서강대 3층에서 김기설 열사가 죽었습니다. 민가협 어머니들을 젊은 자식들이 죽는 것을 보고 펄펄 뛰었습니다. 그래도 수구 세력은 기설이 뒤에 ‘검은 그림자’가 있다고 떠들어댔지요.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고 하면서 강기훈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래서 강기훈이는 억울하디 억울한 옥살이를 3년간 하였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그럴 땐 나 하나 죽어 좋은 세상이 온다면 그때 심정은 죽고도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나무랐던 우리도 그런 마음이 드는데 피가 끓은 우리 자식들은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욱 더 민주적으로 변화되어서 이런 일로 더 이상 마음 아픈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가협 선배를 비롯하여 많은 후배가 자주민주통일과 인권 신장을 위해 열심히 싸우고 투쟁해야 할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민애전 사건
1992년 8월 13일. 8월 추석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집으로 오는 도중 ‘남한조선노동당간첩단’ 사건이 어마어마하게 터졌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모두 68명이 연행되어 그 가족들은 대명절도 없이 한 사람 두 사람 안기부 앞 주자파출소로 모여들었습니다. 민가협 어머니들과 저도 그 중 한 사람으로 보름날부터 주자파출소 앞에서 39일 동안 싸웠습니다. 대선을 앞둔 간첩단 사건이라니, 뭔가 의심스럽다, 간첩사건 조작 중단하라, 그리고 그 당시에는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으니까, 면회 시켜 달라. 그렇게 외치고 또 외치다가 닭장차에 실려가 난지도에 쓰레기처럼 한 두 사람씩 버려지고, 때로는 차도 얻어 탈 수 없는 고속도로에 두 세 명 씩 차에서 끌어다 내려놓을 때 몸부림치다 온몸이 피멍들고 안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또다시 모였고, 다시 남산 안기부 앞으로 또다시 모이고 그런 반복을 수없이 했습니다. 그때 우리 민가협 어머니들은 아픈 줄도 모르고 싸웠지요. 22일씩 가둬다 놓고 가족들 면회 한 번 시키지 않은 행위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악명 높은 안기부도 때로는 우리 앞에는 쩔쩔 맬 때가 있지요. 그럴 만도 합니다. 왜냐면 안기부 요원이 그 앞을 지나기라도 하면 우리가 달려들어 허리춤을 거머쥐고, 바짓가랑이며 와이셔츠며, 넥타이를 당기는 통에 자기는 안기부원 아니라고 바지춤을 움켜쥐고 달아나 버립디다. 그 모습을 보면 어찌 그리 통쾌하던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안기부 직원임을 감추어야 할 만큼 정의롭지 못한 그네들의 태도에 측은함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남한조선노동당과 민애전 사건은 연루된 사람도 많았던 만큼 사연도 많았습니다. 이철우의 집에 가서 헛간에 못자리판을 들추고는 인공기가 거기가 있다고 찾아내고는 간첩이라고 몰아붙여 그 아버지께서 기절초풍을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길로 병이 나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최호경씨는 재판에서 무기형이 나왔습니다. 최호경씨 부인은 어린 아들 데리고 생활하느라 면회도 제대로 갈 수 없는 딱한 사정이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젊은 자식을 둔 부모로서 최호경씨 부인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게다가 여성으로서 이 땅에 자주민주통일 운동을 하다 민애전 사건으로 구속된 변의숙이는 재판에서 8년형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그 어머니는 딸아이에게 ‘통일은 무슨 여자가 통일이냐’고 꾸중도 많이 했죠. 그러나 투쟁현장을 다니면서 그 어머니께서도 많이 깨달아 지금은 투사가 되었답니다. 심상득 어머니도 매일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투쟁을 하시면서 얼마나 분하고 또 분하겠습니다. 민애전 사건과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은 구속자만 68명으로 어마어마하였습니다.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농성하면서 매일같이 전철 안에서 전단지를 국민에게 나눠주면서 저는 많은 것을 느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주적 평화적 통일만이 되어야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자파출소, 남산 안기부 터 앞에서
하얀 광목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국가보안법 철폐하자고, 우리 아들 딸 다 내놓으라고, 민주정부 세우자고 경찰서며 교도소며 국회며 청와대 앞이며 안 다닌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은 안기부에 우리 아들딸이 끌려갈 때면 어김없이 우리는 주자파출소 앞에 모였지요. 그때는 남산 안기부 근처에는 절대 갈 수가 없었고, 주자파출소가 그 마지막 경계라고 할까요. 그 이상은 절대로 접근금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서울 남산이 우리 기억 속에는 ‘싸움했던 곳’이라는 인상만이 남아 있지요. 얼마 전, 고향을 방문한 해외민주인사들과 함께 그곳 남산 안기부터 답사를 갔습니다.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뀌고, 내곡동으로 이사를 간 다음 자연스레 그 앞을 지키던 주자파출소도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그 터만 우리를 맞이하더군요. 파출소 터를 지나서 안기부 입구에 들어서는데, 그때 그 생각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많은 생각이 나더군요. 소리치고 싸우고 울고 끌려가고…. 그 세월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도대체 그 높은 담장 안 어디쯤에서 우리자식들이 협박받고 고문당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른 게 한 두 번이 아닌데. 영원히 그 권력이 계속되고 우리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인데…. 아무도 우리를 막지 않았습니다. 그곳엔 경찰도, 전경도, 안기부 직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엔 조사실도, 휴전선만큼이나 넘을 수 없었던 주자파출소도, 우리의 피눈물이 맺힌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그 많은 일들을 누가 기억하고 후세에게 전해줄까? 생각하니 불안해졌습니다. 한사람이라도 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루빨리 서둘러서 기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모는 않겠다던 막내아들
1980년 광주 오월 항쟁에서 군사정권은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언론을 장악하였습니다. 서울의 봄, 전국학원 가에서 수많은 학생들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군사정권 물러나라”며 거리로 나왔고 서울역, 종로, 명동, 을지로 등 온 서울에도 최루탄이 난무하고 수많은 아들딸들이 백골단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곤봉에 맞고 군홧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눈에서 열이나 차마 눈뜨고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데모에 가담하는가 싶더니 그 때부터 집에 자주 들어오지도 않더군요. 어느 날이었지요. 집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당시 고등학생이던 막내 창규가 내 곁에 다가오더니 “엄마 나는 대학가면 언니들처럼 데모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할께요” 했더랍니다. 그러던 막내 창규가 끌려간 그날은 제가 교회에 가서 밤새 기도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집안이 이상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엄마 놀라지 마세요” 하는 딸에게 빨리 말해보라고 했더니 창규가 어제 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하더군요. 그때가 바로 1990년 1월이었지요. 대학 2학년생이었던 창규는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에서 선봉대로 나섰다가 경찰의 사진에 찍히는 바람에 집시법 위반으로 연행되었다는 겁니다. 허겁지겁, 창규가 끌려갔다는 중부경찰서로 가서 면회를 했지요.
엄마! 면회오지 말고 민가협으로 가세요
창규는 엄마를 보더니 “엄마, 이제 아들 면회는 오지 말고 민가협에 가서 거기서 어머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시면 잘 될 겁니다” 라고 하더군요. 그래 집으로 돌아와서 딸들하고 함께 찾아간 곳이 민가협이었습니다. 그때는 민가협하고 유가협이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가서 보니 이소선 어머님께서 절 보시고는 오히려 위로를 하더군요. 민가협의 선배 어머니들은 저를 보더니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전 그때부터 열심히 민가협으로 출퇴근하듯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얻고 그랬지요. 자식을 감옥에 둔 부모들은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떨리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런데 선배 어머니들은 정의를 위해서는 당신들 몸도 아끼지 않으시고 열심히 투쟁하는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들이었습니다. 투쟁 장소에서 열심히 싸우시는 어머니들 속에서도 아주 투쟁을 열심히 잘하시는 어머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임기란 어머니입니다. 선배로서 후배를 사랑하고 후배를 아낄 줄 아시는 훌륭하신 어머님이시죠. 그런 선배 어머니들이 그 때부터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힘인지도 모르겠어요.
부러진 갈빗대 치료비 50만원
1990년은 4당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의 삼당 야합으로 전국은 어수선해지고 양심수는 15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있을 때 여의도 평민당 당사에서 농성장을 차리고는 20일 동안 국회 앞에서 양심수를 다 내놓으라고 싸웠습니다. 지금은 전경이 있지만 그때는 백골단더러 우리를 가로막게 했습니다. 지금이나 예나 어김없이 막습니다. 거기를 뚫어 들어가다 백골단 군홧발에 옆구리가 걷어차였습니다. 숨이 꽉 막히는데도 놈들은 인정이 없었습니다. 마구 끌어다가 닭장차에 태우면서도 인정도 사정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들은 하루도 거른 적 없이 다시 또 농성장으로 모이곤 했지요. 4일째 되던 날인가 농성장에 가려고 나서는데 너무 아파서 바로 병원에 갔습니다. 엑스레이 촬영을 했더니 갈빗대가 2대나 나갔다더군요. 그래도 그날도 파스 붙이고 농성장에 갔습니다. 그리고 민가협 어머니들과 영등포 경찰서로 쳐들어갔습니다. 들어가려고 한다 하니 경찰이 어디 우리를 들어오라고 합니까? 하지만 싸워서 결국은 들어갔습니다. 몇 번이고 싸워서 결국은 치료비 50만원을 받아 냈습니다. 그래서 민가협에 30만원을 내놓고 나머지는 이리저리 하다 보니 10만원이 남더군요. 그래 어머니들이 치료비 받겠다고 그랬겠습니까? 그저 그 놈들 혼내주려고 했던 거죠. 지금은 나이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몸으로 부대끼며 싸웠던 탓인지 다시 온몸이 너무 아파서 견디기 어려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람을 갖고 살려합니다.
거리에서 경대가 죽었단 소식을 들었는데…
1991년 4월 26일. 그날도 민가협 어머니들은 매캐한 최루탄이 하늘 창공을 뒤 덮던 길거리를 헤매다가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전경들의 곤봉에 맞아 죽었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바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보니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경대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을 그렇게 보낸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우리는 그 날들을 함께 보냈지요. 민가협 엄마로서 우린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열사들의 부모님을 볼 때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경대를 비롯하여 그 후로도 16명 꽃다운 젊은 아들딸들을 열사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경대가 맞아죽고 그 다음 서강대 3층에서 김기설 열사가 죽었습니다. 민가협 어머니들을 젊은 자식들이 죽는 것을 보고 펄펄 뛰었습니다. 그래도 수구 세력은 기설이 뒤에 ‘검은 그림자’가 있다고 떠들어댔지요.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고 하면서 강기훈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래서 강기훈이는 억울하디 억울한 옥살이를 3년간 하였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그럴 땐 나 하나 죽어 좋은 세상이 온다면 그때 심정은 죽고도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나무랐던 우리도 그런 마음이 드는데 피가 끓은 우리 자식들은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욱 더 민주적으로 변화되어서 이런 일로 더 이상 마음 아픈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가협 선배를 비롯하여 많은 후배가 자주민주통일과 인권 신장을 위해 열심히 싸우고 투쟁해야 할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민애전 사건
1992년 8월 13일. 8월 추석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집으로 오는 도중 ‘남한조선노동당간첩단’ 사건이 어마어마하게 터졌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모두 68명이 연행되어 그 가족들은 대명절도 없이 한 사람 두 사람 안기부 앞 주자파출소로 모여들었습니다. 민가협 어머니들과 저도 그 중 한 사람으로 보름날부터 주자파출소 앞에서 39일 동안 싸웠습니다. 대선을 앞둔 간첩단 사건이라니, 뭔가 의심스럽다, 간첩사건 조작 중단하라, 그리고 그 당시에는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으니까, 면회 시켜 달라. 그렇게 외치고 또 외치다가 닭장차에 실려가 난지도에 쓰레기처럼 한 두 사람씩 버려지고, 때로는 차도 얻어 탈 수 없는 고속도로에 두 세 명 씩 차에서 끌어다 내려놓을 때 몸부림치다 온몸이 피멍들고 안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또다시 모였고, 다시 남산 안기부 앞으로 또다시 모이고 그런 반복을 수없이 했습니다. 그때 우리 민가협 어머니들은 아픈 줄도 모르고 싸웠지요. 22일씩 가둬다 놓고 가족들 면회 한 번 시키지 않은 행위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악명 높은 안기부도 때로는 우리 앞에는 쩔쩔 맬 때가 있지요. 그럴 만도 합니다. 왜냐면 안기부 요원이 그 앞을 지나기라도 하면 우리가 달려들어 허리춤을 거머쥐고, 바짓가랑이며 와이셔츠며, 넥타이를 당기는 통에 자기는 안기부원 아니라고 바지춤을 움켜쥐고 달아나 버립디다. 그 모습을 보면 어찌 그리 통쾌하던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안기부 직원임을 감추어야 할 만큼 정의롭지 못한 그네들의 태도에 측은함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남한조선노동당과 민애전 사건은 연루된 사람도 많았던 만큼 사연도 많았습니다. 이철우의 집에 가서 헛간에 못자리판을 들추고는 인공기가 거기가 있다고 찾아내고는 간첩이라고 몰아붙여 그 아버지께서 기절초풍을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길로 병이 나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최호경씨는 재판에서 무기형이 나왔습니다. 최호경씨 부인은 어린 아들 데리고 생활하느라 면회도 제대로 갈 수 없는 딱한 사정이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젊은 자식을 둔 부모로서 최호경씨 부인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게다가 여성으로서 이 땅에 자주민주통일 운동을 하다 민애전 사건으로 구속된 변의숙이는 재판에서 8년형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그 어머니는 딸아이에게 ‘통일은 무슨 여자가 통일이냐’고 꾸중도 많이 했죠. 그러나 투쟁현장을 다니면서 그 어머니께서도 많이 깨달아 지금은 투사가 되었답니다. 심상득 어머니도 매일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투쟁을 하시면서 얼마나 분하고 또 분하겠습니다. 민애전 사건과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은 구속자만 68명으로 어마어마하였습니다.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농성하면서 매일같이 전철 안에서 전단지를 국민에게 나눠주면서 저는 많은 것을 느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주적 평화적 통일만이 되어야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자파출소, 남산 안기부 터 앞에서
하얀 광목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국가보안법 철폐하자고, 우리 아들 딸 다 내놓으라고, 민주정부 세우자고 경찰서며 교도소며 국회며 청와대 앞이며 안 다닌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은 안기부에 우리 아들딸이 끌려갈 때면 어김없이 우리는 주자파출소 앞에 모였지요. 그때는 남산 안기부 근처에는 절대 갈 수가 없었고, 주자파출소가 그 마지막 경계라고 할까요. 그 이상은 절대로 접근금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서울 남산이 우리 기억 속에는 ‘싸움했던 곳’이라는 인상만이 남아 있지요. 얼마 전, 고향을 방문한 해외민주인사들과 함께 그곳 남산 안기부터 답사를 갔습니다.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뀌고, 내곡동으로 이사를 간 다음 자연스레 그 앞을 지키던 주자파출소도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그 터만 우리를 맞이하더군요. 파출소 터를 지나서 안기부 입구에 들어서는데, 그때 그 생각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많은 생각이 나더군요. 소리치고 싸우고 울고 끌려가고…. 그 세월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도대체 그 높은 담장 안 어디쯤에서 우리자식들이 협박받고 고문당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른 게 한 두 번이 아닌데. 영원히 그 권력이 계속되고 우리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인데…. 아무도 우리를 막지 않았습니다. 그곳엔 경찰도, 전경도, 안기부 직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엔 조사실도, 휴전선만큼이나 넘을 수 없었던 주자파출소도, 우리의 피눈물이 맺힌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그 많은 일들을 누가 기억하고 후세에게 전해줄까? 생각하니 불안해졌습니다. 한사람이라도 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루빨리 서둘러서 기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