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렵다. 일상 곳곳에서 부지불식간에 복병처럼 튀어 나오는 여성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려면 과감한 저항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닳고 단 듯 회자된 ‘사적인 것이 정치적’이란 명제가 얼마나 끈질기게 유효한가를 새록새록 체득하고 있는 이에게, 치열하고 현학적인 논쟁의 테이블에서 해답을 얻는 것보다 대낮의 지하철에서 버젓이 횡행하는 성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다른 듯 닮았을 기억의 끝자락을 당겨본다.
# 1 처음 여성주의를 만나다
다각도에서 엄청나게 떠들어대는 주입식 사고마비 과정에도 불구하고 시니컬한 삐딱함의 겉멋에 들었던 것일까. 괜시리 운동권에 대한 막연한 호감을 품고 대학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이 쇠락기였던 당시에도 유난히 운동권을 배척하던 단과대 분위기에서 난 학생회실을 들락거리는 소수의 신입생 중 하나였다. 친밀한 듯 하면서 왠지 모를 어색함이 배어있는 끈적끈적한 분위기에 섞여 놀다가도 한순간 꺼림칙해지는 순간들이 찾아들곤 했다.“선배가 말씀하시는데 어디 딴 데 보고 있냐”, 학내 여성운동 주체들을 두고서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애들”이라며 소리 높여 흥분했던 그 떨림을 아직 기억한다. 방학 중 학내 여학생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떤 또렷한 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나의 불편함은 정당한 것이었다. 칼부림을 마다치 않는 가정폭력이 고이 간직해야 할 부끄러운 풍경이 아님을 확인했다. 수감 중이던 학생회장의 성폭력 전력을 공개 발표한 여학생위원회의 행동이 지나치지 않았냐고 반문했던 나의 사고가 가부장제의 자장에 꽤나 흠뻑 젖어든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일상과 활동의 경계를 넘나드는 숱한 사례들을 도마 위에서 올려놓으면서 수다를 계속했다. 애정과 연대보다 분노와 저항감을 한껏 들이쉰 때였다. 나의 부당함에 이름을 부여해준 여성주의가 든든했지만, 정작 중요한 무언가는 빠져있었다.
# 2 언니들을 만나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그 작은 여성 노조를 접하게 되었다. 학내에서 운동의 희노애락을 나눌 둥지를 찾지 못해 외롭던 차, 밖에서 무언가를 구하고 싶었다. 사이트에 올려진 성명서의 기조가 꽤 셌다. 당시 그것이 중요했다. 여타 큰 노조들의 타협적인 언행의 틈을 비집고 굽히지 않는 목소리를 올곧게 표현한 듯 한 그곳이 그 어디보다도 정당해보였다. 참‘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자그마한 테이블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곤 했다. 주로 소규모 사업장에서 근무하거나 실업상태에 내몰려 있는 조합원 언니들의 경험이 어울려진 편안한 자리였다.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찻잔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을 새삼 깨달으면서 배워갔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다고 머리만 굴렸던 이전과 비교해, 여성노동 현장의 우울한 색채를 간접적으로나마 덧입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참 소중했다. 불안정한 여성 노동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들으며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분노스럽고 어지러운 경험들을 같이 공감해주는 그곳이 좋았다. 언젠가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꽤나 놀랍고 안타까운 사건을 접하면서 그곳과의 인연은 끝이 났고 동시에 ‘여성’을 힘주어 강조하던 시절도 일단락되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조금씩 쌓여가는 혹은 내려놓을 짐들의 무게가 버거워지면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일이 너무 고단하고 피곤한 일임을 깨쳤다. 그리고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었다.
# 3 인권운동을 만나다
영화를 좋아한다. 운동과 영화에 관심 있던 대학 시절, 덥석 인권영화제 자원활동을 시작했고 인연이 닿아 졸업 후 인권단체에서 상근을 하게 되었다. 별로 예견치 못한 진로였다. 여성인권을 표방하거나 이를 의식적으로 흡수하지 않았지만, 웃음이 많고 서열이 없는 그곳의 조직문화가 매력적이었다. 언니들이 많고 일상의 언행에 민감했던 그곳에서 비폭력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하여 힘들게 배워갔다. 그렇지만 숨어있을 때가 많았다. 빡빡하고 체계적인 완벽함이 선으로 받아들여지는 때에 운동을 제대로 해보지 않아서 그러겠거니 느슨한 나를 질책했지만 그 순간 여성주의와 만난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기도 했다. 난 여전히 여성인권을 앞에 두고 맞짱 뜨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봉합을 목격했고 고심의 흔적 없이 여성주의를 한두 마디로 재단하는 시간들을 관찰했지만, 여성이 흡수된 인권의 방향 찾기가 뿌옇게 불투명했지만,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펼치기란 참말로 어려웠다. 헉헉거리며 맡은 일을 제대로 마치기도 숨이 차오르던 때에, 문제제기에서부터 골머리 썩이며 진통을 거듭할 것이 뻔한 여성인권을 의제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그다지 기울이지 못했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있었지만 여기서도 이는 미지의 개척지였다. 적잖은 그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아쉽지만 기회는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수평적이고 식물적인 정체성을 띤 것이라 믿고 있는 여성인권을 ‘실천’하기 위한 머나먼 여정에서 여전히 서성이며 좌충우돌 하는 델마를 위하여.
# 1 처음 여성주의를 만나다
다각도에서 엄청나게 떠들어대는 주입식 사고마비 과정에도 불구하고 시니컬한 삐딱함의 겉멋에 들었던 것일까. 괜시리 운동권에 대한 막연한 호감을 품고 대학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이 쇠락기였던 당시에도 유난히 운동권을 배척하던 단과대 분위기에서 난 학생회실을 들락거리는 소수의 신입생 중 하나였다. 친밀한 듯 하면서 왠지 모를 어색함이 배어있는 끈적끈적한 분위기에 섞여 놀다가도 한순간 꺼림칙해지는 순간들이 찾아들곤 했다.“선배가 말씀하시는데 어디 딴 데 보고 있냐”, 학내 여성운동 주체들을 두고서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애들”이라며 소리 높여 흥분했던 그 떨림을 아직 기억한다. 방학 중 학내 여학생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떤 또렷한 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나의 불편함은 정당한 것이었다. 칼부림을 마다치 않는 가정폭력이 고이 간직해야 할 부끄러운 풍경이 아님을 확인했다. 수감 중이던 학생회장의 성폭력 전력을 공개 발표한 여학생위원회의 행동이 지나치지 않았냐고 반문했던 나의 사고가 가부장제의 자장에 꽤나 흠뻑 젖어든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일상과 활동의 경계를 넘나드는 숱한 사례들을 도마 위에서 올려놓으면서 수다를 계속했다. 애정과 연대보다 분노와 저항감을 한껏 들이쉰 때였다. 나의 부당함에 이름을 부여해준 여성주의가 든든했지만, 정작 중요한 무언가는 빠져있었다.
# 2 언니들을 만나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그 작은 여성 노조를 접하게 되었다. 학내에서 운동의 희노애락을 나눌 둥지를 찾지 못해 외롭던 차, 밖에서 무언가를 구하고 싶었다. 사이트에 올려진 성명서의 기조가 꽤 셌다. 당시 그것이 중요했다. 여타 큰 노조들의 타협적인 언행의 틈을 비집고 굽히지 않는 목소리를 올곧게 표현한 듯 한 그곳이 그 어디보다도 정당해보였다. 참‘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자그마한 테이블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곤 했다. 주로 소규모 사업장에서 근무하거나 실업상태에 내몰려 있는 조합원 언니들의 경험이 어울려진 편안한 자리였다.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찻잔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을 새삼 깨달으면서 배워갔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다고 머리만 굴렸던 이전과 비교해, 여성노동 현장의 우울한 색채를 간접적으로나마 덧입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참 소중했다. 불안정한 여성 노동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들으며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분노스럽고 어지러운 경험들을 같이 공감해주는 그곳이 좋았다. 언젠가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꽤나 놀랍고 안타까운 사건을 접하면서 그곳과의 인연은 끝이 났고 동시에 ‘여성’을 힘주어 강조하던 시절도 일단락되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조금씩 쌓여가는 혹은 내려놓을 짐들의 무게가 버거워지면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일이 너무 고단하고 피곤한 일임을 깨쳤다. 그리고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었다.
# 3 인권운동을 만나다
영화를 좋아한다. 운동과 영화에 관심 있던 대학 시절, 덥석 인권영화제 자원활동을 시작했고 인연이 닿아 졸업 후 인권단체에서 상근을 하게 되었다. 별로 예견치 못한 진로였다. 여성인권을 표방하거나 이를 의식적으로 흡수하지 않았지만, 웃음이 많고 서열이 없는 그곳의 조직문화가 매력적이었다. 언니들이 많고 일상의 언행에 민감했던 그곳에서 비폭력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하여 힘들게 배워갔다. 그렇지만 숨어있을 때가 많았다. 빡빡하고 체계적인 완벽함이 선으로 받아들여지는 때에 운동을 제대로 해보지 않아서 그러겠거니 느슨한 나를 질책했지만 그 순간 여성주의와 만난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기도 했다. 난 여전히 여성인권을 앞에 두고 맞짱 뜨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봉합을 목격했고 고심의 흔적 없이 여성주의를 한두 마디로 재단하는 시간들을 관찰했지만, 여성이 흡수된 인권의 방향 찾기가 뿌옇게 불투명했지만,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펼치기란 참말로 어려웠다. 헉헉거리며 맡은 일을 제대로 마치기도 숨이 차오르던 때에, 문제제기에서부터 골머리 썩이며 진통을 거듭할 것이 뻔한 여성인권을 의제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그다지 기울이지 못했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있었지만 여기서도 이는 미지의 개척지였다. 적잖은 그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아쉽지만 기회는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수평적이고 식물적인 정체성을 띤 것이라 믿고 있는 여성인권을 ‘실천’하기 위한 머나먼 여정에서 여전히 서성이며 좌충우돌 하는 델마를 위하여.